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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5 (17:5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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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글씨 귀향전을 보고


1.
어제 10월 1일, 과천 시민회관에서 ‘추사 글씨 귀향전’을 보았다.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글씨 및 자료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 1879~1948)가 모은 것으로 그의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藤塚明直 1912~2006)가 2006년 초에 추사가 마지막 생애를 보낸 곳인 과천시에 기증한 것이다.
후지츠카 아키나오는 이 유물을 기증하면서 “그동안 자료를 처리하지 못하여 죽지 못했으며, 추사 관련 자료가 지금까지 나를 살게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유물을 기증한 몇 개월 후 유명을 달리했다.

후지츠카 치카시(이하 후지츠카)는 일제강점기 때 중국 유학 후 경성제국대학에서 청조학을 강의하면서 18-19세기 한 ․ 중 지식인들의 학술 교류를 중점적으로 연구한 학자다. 그래서 그는 북경의 고미술품 거리 유리창과 서울의 인사동을 중심으로 한 고서점가 및 골동가게에서 중국학자와 조선학자간에 주고받은 많은 서간문, 탁본 책 등을 발굴하고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추사가 당시 국제적인 인물이었음을 알게 되었으며, 그가 쓴 박사 학위 논문도 「이조에 있어서의 청조문화의 이입과 김완당」이다. 그는 또한 우리나라 문인화를 대표하는 『세한도』를 소장했다가 서예가 손재형의 간곡한 요청에 광복 직전 우리에게 돌려준 사실로도 유명한 사람이다.  

기증된 자료는 추사의 친필 26점을 비롯하여, 추사와 청대 학자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 이상적, 추사의 아우로서 청대 학계와 교류가 깊었던 김명희, 그리고 추사의 스승인 박제가와  유득공 등에게 보낸 청대 학자들의 많은 글과 그림 등 서화류가 70여점에 이르며, 이외에도 관련 자료를 포함하면 모두 1만 여점에 이르는 방대한 것으로, 이번 전시회에서 주요 자료들이 공개되었다.
그러나 이번 기증 유물 중에 추사의 친필은 많지 않았고 추사체의 진수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현판 글씨 같은 대작도 없었다. 물론 이는 광복 직후 미군 폭격에 의해 후지츠카의 연구소가 불타면서 대부분의 추사 관련 자료가 불타 없어진 것도 그 원인이지만 후지츠카 집안이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 않아 학술적 1차 자료를 주로 수집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조선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를 두어 역사를 왜곡한 식민사관을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는 아직도 이러한 식민사관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우리는 이번 전시를 통해 일본인 중에는 후치츠카 같은 사람도 있었음을 알게 된다.
사실 후지츠카도 처음엔 조선을 명(明)이나 청(淸)의 속국쯤으로 생각하고 조선이 중국의 문화를 어떻게 수용했는가에 관심을 갖다가 북학파와 추사를 알고 나서 조선 문명의 독자성에 충격을 받은 후 본격적으로 추사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도 기증 자료를 주는 과정에서 생전에 추사를 19세기 말에 중국에서 일어났던 최초의 한류 열풍에 비유했다고 한다)

2.
이번 전람회의 출품된 자료 들 중 특히 추사의 중국인 스승인 옹방강(당시 청나라 최고의 학자이자 서예가였음)이 직접 쓴 유일본 책은 앞으로 연구 결과에 따라 조선 후기 북학파나 추사의 활동을 알 수 있는 귀한 자료들이다.
그럼에도 나의 주된 관심은 역시 추사의 글씨들이었다. 이번에 전시된 추사의 글씨는 거대한 현판 글씨도 대련 글씨도 아닌 서간(편지글)들이었다.(그래서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대작은 전시장에서 볼 수 없다)
이 중 이상적에게 보낸 편지인 <중추부사 우선에게, 과천에서>에 가장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우선은 이상적의 호임) 이상적은 바로 추사의 <세한도>와 관계있는 인물로서 <세한도>에 그려진 곧게 자란 짙푸른 소나무와 잣나무는 바로 이상적의 변치 않은 마음을 상징한다.
<중추부사 우선에게, 과천에서>란 서간은 추사가 북청 유배에서 돌아와 생애 마지막에 쓴  추사체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글이어서 한동안 발길을 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록에 번역된 내용과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눈으로 뒤덮인 산에 소리쳐 원안(袁安, 『후한서』「원안전」의 주인공)을 물으러 오는 일도 없는데 대안도(戴安道, 진나라 때 왕휘지의 친구)를 찾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뜻밖에 편지를 받으니 옛날 배공(裴公:미상)이 섣달에 받은 그 편지입니다. 초췌하고 적막한 이곳(과천)에서 어찌 놀랄 만큼 기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품격 높은 문장은 대단히 곱씹을 만할뿐더러 차가운 부엌에 온기가 돌게 합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지내며 애써 몹쓸 글 짓느라 골몰하지 않으신다니 얼마나 반가운 일입니까?
저는 추위에 대한 고통이 북청(제주 10년 유배가 끝난 얼마 후 가게 된 추사의 마지막 유배지로서 함경도에 위치함)에 있을 때보다도 더합니다. 밤이면 한호충(寒號蟲: 산박쥐)이 밤새 울어대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날아갑니다. 저무는 해에 온갖 감회가 오장을 휘감고 돌아 지낼 수가 없습니다.
보내주신 물품은 모두 잘 받았습니다. 석노시(石砮詩, 이상적이 지은 철언 장편시)는 조화로운 화음이 봄빛처럼 고울 뿐만이 아닙니다. 영재(泠齋, 유득공의 호) 노인도 다시 돌아보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쾌한 기분으로 서너 번을 되읽으며 남은 해를 그냥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새해를 맞아 만복을 빕니다.
積雪山嘷 旣無問袁 誰爲訪戴 忽枉尺緘 宛是與裵臘下書風味 蕉萃(췌)寂寞之濱
安得不欣然敍暢也 况高詠佳篇 大嚼煖肉 又覺冷廚(주)回暖 藉(자)想動靖隨喜隨安 不作氷柱雪車之惡札也 何等耿誦 賤狀 苦不勝寒 甚於北時 夜則一寒號蟲 朝起始爲得過鳥 逼歲百感
回膓轉輪無以銷受耳 來惠諸品 一以收到 砮詩極好 非徒鯨鏗春麗 泠齋老人 恐復瞠乎後耳
快讀三四 不虛抛此歲殘光矣 餘冀迓禧 不宣 臘 卄七 老阮

위 글 중 특히 실감나고 가슴에 와 닿은 구절은 추위와 밤새우는 산박쥐의 울음소리로 잠 못 이루는 밤을 묘사한 구절과 “저무는 해에 온갖 감회가 오장을 휘감고 돌아 지낼 수가 없습니다.”란 구절이다. 나는 이러한 구절을 통해 평생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던 추사의 실제 삶을 엿보게 되며, 나아가 예인(藝人)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감동은 추사의 운필과 용묵법을 통해서 더욱 실감할 수 있다. 편지지에다 쓴 작은 글씨임에도 칼끝으로 목판을 예리하게 도려낸 듯 모가 나는 방필(方筆)에다 뼈가 드러나는 골필(骨筆)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묵(먹을 사용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바짝 마른 갈필을 많이 구사하고, 또한 태세(太細)나 장단(長短) 기울기 등에서 변화가 무쌍하여 극심한 동세와 대비를 보여주며, 이를 통해 당시 추사의 심정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글 중간 중간 추사 특유의 수직으로 길게 내리 그은 선들에서 추사의 고고하고도 단호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한 인간으로서의 숨결과 심정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러한 운필과 용묵은 추사의 3, 40대 글씨에서는 볼 수 없으며, 그만큼 추사 말년 글씨의 특징들은 추사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함축한다.    

3.
나에게 있어 추사의 예술세계는 겸재의 산수화와 더불어 지난 수십 년간 늘 화두였다. 너무도 개성이 다른, 그러나 근본은 결코 다르지 않은 이 두 사람을 통해 나는 조선의 예술과 숨결을 생생하게 느껴왔으며, 그때마다 자랑스러운 조상을 가진 후예로서 자긍심을 느꼈다. 그들의 예술적 성취는 너무도 크고 우뚝하여 당대 동 아시아 어느 누구도 필적할 이가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이들의 예술적 성취가 무색할 정도로 급격한 쇠망의 길을 걸었고, 20세기 들어 결국 국권마저 상실해버린다. 이 격변과 혼돈의 와중에 우리의 전통적 정신문화는 실질적으로 단절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해방이후 새로이 나라의 기틀을 세우면서 지난 수십 년간 경제일변도의 근대화에 성공하였고, 이를 토대로 지난 1990년대 초반부터 우리는 각 분야에서 우리 조상들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자와 단절된 젊은 세대들에게 특히 전통정신이 담겨 있는 고전은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전통예술은 다르다. 추사예술, 특히 거대한 현판 글씨의 경우 글씨의 뜻을 몰라도 얼마든지 예술적 흥취와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서양의 일부 미술가들이 원시미술에의 동경을 통해 새로운 예술을 개척하듯이 추사는 동양 서예의 기틀을 마련한 왕희지 이전의 서예인‘고비(古碑)’, 즉 원초적인 글씨로 돌아가서 자신의 서체를 만들어내었기 때문이다.  
비록 지난 90년대 이후 세계화(미국화) 바람이 거세지만 이러한 획일화의 바람에 맞설 수 있는 기틀은 역시 ‘고유성’이다. 물론 이는 배타적 민족주의자나 국수주의자가 되자는 것이 아니다. 겸재나 추사는 조선의 선비로서 고유성에 뿌리를 두면서도 당대로서는 국제적인 보편성을 지닌 예술을 성취했으며, 오늘의 젊은 세대들이 겸재나 추사로부터 배울 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 이후 왜곡된 역사인식을 갖게 되었으며,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을 통해서도 그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듯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입증하는 전략이 요구되는 시점에 살고 있다. 어느 사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동북공정뿐만 아니라 아직도 살아 있는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와도 싸워야 하는 이중의 전선에 서 있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추사의 학문과 예술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2006년 10월  2일
                                                      도 병 훈(작가)

*올 가을 추사 서거 150주기를 맞아 국립 중앙박물관, 간송미술관, 예술의 전당 등에서 전시회가 있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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