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전원길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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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no image 창작천연염색의 발전적 비젼을 위하여
소나무
3836 2007-06-05
창작천연염색의 발전적 비젼을 위하여 전원길 2005/1/21 (18:53) 천연 염색프로그램 및 전시회를 마치고 -창작천연염색의 발전적 비젼을 위하여- 전원길 소나무 스튜디오 갤러리의 교육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천연 염색 강습이 지난 9월부터 시작하여 11주간 이어졌다. 또한 강습의 결과물을 이용한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도 가졌다. 이번 프로그램은 경기문화재단 기전문화대학이 주관하여 기획하고 소나무스튜디오 갤러리가 진행하였다. 이번 프로그램은 전통적인 미의식이 어떻게 이시대의 정신과 조형의식을 반영하면서 발전되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해주었다. 천연 염색의 과정을 직접 경험한 바는 없었으나 잡지를 통해 소개되는 사진을 통해서도 그 윤기 나는 색조에 넋을 놓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기대감을 가지고 시작하였다. 비록 프로그램의 뒷바라지를 자청한 처지여서 염료에 손을 담가 보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수강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인하여 충분한 대리만족을 갖게 해준 시간이었다. 특히 이번 강습을 맡아주신 조미숙 선생님의 남다른 열정, 그리고 일찍이 없었을 창의적 수업 방식은 수강생 모두에게 기능 전수 이상의 소중한 시간을 맛보게 하였다. 이번 프로그램에는 도자기, 일러스트, 퀼트, 편집디자인, 회화,등의 분야에서 작업하는 예술가들이 참여하였고 천연염색의 시대적 사회적 의미 등에 관하여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향후 본 갤러리가 천연염색과 관련하여 관심을 가지고 나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하였다. 나는 이글을 통하여 천연염색 작업과정과 그 결과물을 이용한 창작표현물들 그리고 색을 주제로 한 말하기와 글쓰기등를 통해 삶에 대한 새로운 가치 회복과 격조있는 순수미감의 체득, 이 시대의 최대 화두인 파괴된 자연생태에 대한 관심, 기능 전수와 실용적 적용에 머물러있는 천연염색의 붐을 보다 적극적인 창의적 표현을 위한 통로로의 접근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많음을 알고 그에 관하여 생각하려고 한다. 1. 삶에 대한 새로운 가치 회복 본 프로그램을 마치고 한 수강생은 일종의 심리치료적 효험을 간증하였다. 본 프로그램이 단지 염색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염색의 축을 이루는 색에 관하여 새로운 접근을 함으로서 평상시에 가질 수 없었던 시간을 통해서 얻은 경험이다. 실습수업 전 혹은 후에는 색과 관련된 개인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수강생들은 기억저편에 숨겨져 있는 색과 관련된 행복했던 경험이나 불행했던 기억들, 남들에게 이야기 할 수 없었던 어릴적 비밀 들을 끄집어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수강생들은 일종의 자기정화의 시간을 가졌다. 마음속의 이야기들은 특정한 색을 앞세워 술술 풀어냄으로서 닫혔던 마음속에 일종의 한으로 남아있던 응어리를 풀어내기도 하고 자기 확인의 기회로 삼는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자기 정화와 자기 발견의 순간을 경험하게 되고 과거의 이야기로부터 현재의 우울함을 떨쳐버리고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는 자기치유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황폐화된 인간성의 회복; 잃어버린 몸 감각의 회복을 위한 천연염색 천연염색은 그 염료를 자연물로부터 얻는다. 물론 물을 들이는 천 역시 자연으로부터 온다. 산업화 이전에 우리는 대부분의 필요한 것들을 자연으로부터 직접 구했으며 직접 가공하여 사용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러한 물건들은 손때를 묻혀가며 자자손손 대물려 사용하였고 조상의 삶을 손으로 마음으로 이어갔다. 그러나 현대인은 완전 자동화 시스템에 의하여 대량생산된 물건들을 손쉽게 사서 쓴다. 그 물건들은 이 집에도 있고 저 집에도 있는 기성품들인 것이다. 이런 산업사회의 혜택을 통하여 사람들은 편리를 추구하고 우리의 변덕스런 감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디자인을 끊임없이 쫓는다. 감각적 쾌락을 제공하는 현대사회의 생산물들로 인하여 우리는 물건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을 길들여 사용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소중한 정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손실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가치측정 방법으로는 계산되지 않는 손실이기도하다. 천염염색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색을 구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쫓아 이루어진다. 자연으로부터 색을 채취하고 천에 물 들여 실용적인 물건을 만들거나 집안을 장식 할 아름다운 장식품을 제작하는 동안에 우리는 천연염색프로그램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놓치고 살아온 즉 자신의 노동의 흔적으로 자신의 역사를 엮어가는 소중한 가치들을 다시 경험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손 감각을 비롯한 다양한 감각이 작용하는 천연염색은 굳어져있던 우리의 몸 감각을 풀어주고 정서를 유연하게 순화시켜주는 것이다. 2. 격조있는 순수 미감의 체득 ;색을 즐기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현실물을 닮은 이미지를 발견하면 즉시 반응을 일으킨다. 이미지는 사람들의 시지각에 즉시 작용하면서 쉽게 정서적 반응까지도 끌어낸다. 하지만 색채는 이미지의 사실성을 보조할 때는 의미를 갖지만 독립적으로는 쉽게 사람들과 교감하지 않는다. 서양미술에서 색채가 의미있는 가치물로서 위치를 획득하기 까지는 치열한 자기비판의 과정을 거쳤음을 모더니즘 회화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색채는 일체의 외부세계와 관계하지 않고 미술 그 자체의 조형적 개념적 논리에 의해서 미술을 형성시키는 독립세계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형상의 마력에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색채의 자율적 세계를 즐기기는 쉽지 않다. 걸러지고 다듬어진 지성과 감성이 아니면 이 고상한 세계를 만날 수 없다. 하지만 천연염색의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은 색 그 자체의 빛나는 실체를 단번에 만나고 충분히 즐겨낸다. 천연염색의 작업과정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일체의 심미적 선입견을 버리고 재료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간단치 않은 작업을 육체적 노동으로 참여하면서 본성적 감성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천연염색을 통해 발현되는 자연색의 격조와 그 색을 받아내는 천의 질감 그리고 그 천 조각을 이용한 조각보의 현대적 조형성을 즐겨내는 평범한 주부들의 고상한 미감에 주목한다. 또한 단순한 조형적 표현을 넘어 작업의 순간순간에 염원을 담아내는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우리 속에 이미 내재된 정서와 미적 감수성을 일련의 형식적 발전을 통해 도달한 서구 추상미술의 순수조형의 세계의 방법론이 갖고 있는 특질들과 연결한다면 기능의 숙달과 양식적 모방에 만족하는 소극적 취미생활을 넘어 실질적인 창작의 만족감을 누리는 수준으로 발전하리라 생각한다 보다 확장된 창작예술의 견지에서 자신의 감성을 확장시켜 각자의 내재된 창의적 에너지가 훨씬 생동감 있게 발휘되게 함으로서 실존하는 자아를 풍부하게 실현하는 삶으로 연결할 수 있을것이다 라는 생각을 한다. 3. 자연생태에 대한 관심; 자연으로부터의 색 화학염색으로 편리를 추구해온 현대 산업사회에서 다시 천연염색의 의미를 찾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단지 부드럽고 편안하며 자연친화적인 색깔을 얻는다는 의미이상의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천연염색에 필요한 염료는 모두 자연으로부터 얻는다. 사계절을 통해서 각기 다른 염료를 자연물로부터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서 적절한 염료를 자연으로부터 채취하여 사용했다. 따라서 그네들은 자연을 바라 볼 때 그리고 자연의 각기 다른 색을 느끼는데 있어서 우리와는 다른 관심을 가졌을 터이고 자연과의 심리적 육체적 접촉에 있어서 보다 생생하고 구체적이었을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연을 느끼는데 있어서 단지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쾌적함만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보다 직접적이며 깊이 있는 이해를 가지고 자연을 대하고자 할 때 천연염색은 더없이 값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즉 자연 만물이 살아서 그 몫을 함에 있어서 단지 인간에게 먹거리를 제공하여 주고 때로 상처를 치유하는 약초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색을 소유하게 함으로서 우리의 미감을 자극하고 살아나게 한다는 사실을 생각 할 수 있다면 그 모든 자연의 색깔들이 생생하게 느껴지리라. 우리나라와 같이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나라에서는 자연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잘 관찰할 수 있고 철마다 다른 식물을 만날 수 있다. 천연 염료를 채취하는 과정에서 그 식물의 이름과 모양새는 물론이고 그 쓰임새와 종의 특성도 살피게 됨으로서 살아있는 자연을 보다 가까이서 친근하게 느끼고 사랑하게 된다. 자연과 더불어 살며 그곳에서 지혜를 얻고 우리의 몸과 마음의 자연성을 유지해온 우리민족의 깊은 정서를 회복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또한 천연염색이라고 생각한다. 4.창의적 표현을 위하여 우리가 철들면서부터 보편적인 삶의 목표로서 가장 많이 들어왔던 것 중의 하나가 창의적인 사람이 되자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창의적인 삶에 관해서 그리고 창의성이란 무엇인지에 관해서 구체적인 이야기하고 실천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우리가 개인의 독특한 성격이나 재능을 인정하기 보다는 획일화된 사고와 집단의식을 강조해온 불운한 역사를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에 관해 좀 더 구체적이고 분석적으로 접근하여 그 속성을 찾아내는데 소홀한 감성적 기질을 가진 민족이어서 일 수 도 있다. 천연염색이라는 전통적 염색 방법을 다시 살려내고 응용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전통의 회복과 발전이라는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고 특히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망막함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망막함은 실제로 이러한 작업을 평생 해야 하는 장인들에게나 전수자들에게 언제나 해결해야할 문제로 남게 되는 것이다. 나는 천연염색의 과정을 보다 넓은 의미의 창작과정의 문제로 놓고 생각한다면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발전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으로부터 색 염료를 얻고 천에 물을 들이는 전통적인 방법을 연구하고 실습하는 과정과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다양한 미술현상들 그리고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어떻게 만날 때 창의적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모음으로서 생생한 예술 활동에 참여하는 길을 찾게 되리라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천연염색을 하는 동안에 경험하게 되는 현상들에 주목하면서 그 과정에서 발휘된 본래 감성이 용기있게 자유롭게 발휘 되도록 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여가선용을 위해 제공되는 취미활동 수준에서 벗어나 창의적 자아실현이라는 인간 본연의 바램을 실현하기위해서는 탁월한 예술가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생활경험이나 미적인 발견 혹은 사상적 경험을 의미 있게 살려내기 위해서는 그러한 것을 격려함으로서 일상적 사고에서 벗어나 보다 고양된 예술적 경험이 충일한 상태로 진입하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염색을 통해 다루는 재료 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물체와 재료에 관심을 가지고 언제나 그것들을 자신의 표현영역으로 연결시켜내는 항상 살아있는 창작마인드를 가지고 살아가야한다. 전통적인 문화든 당대의 새로운 사상이든지간에 그것을 완성형의 사실로 인식하고 그것에 빠져들기보다는 모든 예술적 방법과 사상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며 또한 새롭게 형성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살아있는 의식의 소유자로서 그것을 대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온 역사와 이루어온 전통문화의 소중함은 언제나 다른 문화권에서 일구어온 것들과 대비됨으로서 더욱 실질적으로 느끼게 되는 만큼 보다 확장된 미의식을 갖기위한 경험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번 전통천연염프로그램을 통해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삶과 그 경험이 창의적인 표현 활동을 통해 어떻게 드러나며 적당히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자신들의 삶을 건져내어 어떻게 풍부하고 생동감 있게 만들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바라기는 이번 소중한 경험이 단발로 끝나지 않고 보다 넓고 깊게 확장되어, 유지해야 할것보다는 새로이 세워나가야 할 부분이 많은 우리사회에 의미있는 창작활동의 모델로서 기여하게 되기를 바란다.
36 no image 자연의 내재적 질서 드러내기
소나무
2950 2007-06-05
자연의 내재적 질서 드러내기 김성호 2004/12/8 (0:47) 전원길, 자연처럼 그림 그리고 살기를 원하는 작가 - 자연의 내재적 질서 드러내기 김성호(미술평론가, 수원미술전시관 큐레이터) 이번 호 뉴스레터 작업실 탐방 코너는 작가 전원길이다. 햇살이 따스한 가을 끝, 지난한 여정을 감당하느라 허리를 앓아대는 차를 채찍질하며 오르막 외길을 올라 가까스로 전원길의 작업실에 도달한다. 휴우! 경기도 안성 인근의 한적한 시골길, 그 한 끝자락에 그의 소나무 스튜디오 갤러리가 시야를 탁 틔운다. 이 전원의 아틀리에는, 90년 서울 동숭동에 개관해서 젊은 작가들의 실험적인 현대미술의 발표의 장으로 기능했던 소나무갤러리의 취지를 계승하고자 당시 창립멤버와 큐레이터로 근무했던 그가 영국 유학이후 2002년 4월 안성에 터를 잡고 소나무S갤러리로 재개관한 것이다. 이 곳은 아틀리에와 갤러리의 특성을 아울러 표방하는 대안공간인 셈인데, 일반인들과의 만남과 그들의 문화체험 교육을 시도하는 ‘소나무 미술학교’ 운영이나 미술인들로 구성된 회원 간 커뮤니티와 비평문화의 활성화를 선도하려는 ‘독립작가 연구회’ 운영 등을 함께 하고 있다. 갤러리와 아틀리에를 겸하고 있는 특성상 소나무S 갤러리는 일반인들에게는 토요일에 정기 개방하고 평일에는 예약을 하고 관람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있는데, 전원길에게 있어서는 나 또한 평일에 찾아든 ‘벼락치기 예약손님’이 된 셈이다. 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나의 그림은 싹을 틔어서 자라게 하고 다시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지를 닮고자 한다. 자란다는 것이 사라지는 과정이듯이 표면 속으로 돌아간다. 나는 마음 없이 움직이는 자연처럼 일하고 싶다.' 전원길이 그의 작가노트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의 최근 작업은 호박을 키우고 포도 넝쿨을 올릴 수 있는 자연 환경과 늘 호흡하면서 지내는 연유로 인해 자연의 이미지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 개나리, 진달래, 참외, 오이, 토마토, 솔방울, 포도넝쿨과 포도, 호박잎과 호박 등등... 그러나 전원길의 작업이 자연물의 소재주의에 탐닉하고 있지 않고 자연의 원형적 혹은 내재적 질서 드러내기에 정성을 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그림들이 지향하는 태도는 일찌감치 자연주의, 전원주의를 벗어나 있다. 유학 이전의 작업 역시 자연에 내재된 근원의 질서, 그 안에 거하는 인간의 존재론을 그 화두로 삼고 작업해 왔던 만큼 컨텍스트(자연)와 텍스트(인간)의 문제는 여전히 최근 작업에서도 일관되게 지속되어 오고 있다. 단지 이전 작업에서 표면 위로 떠올라 있던 창작 주체인 화가의 존재의식이 최근 작업에 이르러 자연이미지 나아가 그 이미지의 내재율 속으로 침투해 들어와 존재론의 심각한 고민이 무화된 듯이 보일 뿐이다. 그의 석사 논문 ‘현대회화의 기하학적 형태와 표현성에 관한 연구’에서 우리가 살펴볼 수 있듯이, 전원길은 이전 작업에서 지적 측면과 감성적 측면이 병존하는 화면 경영을 시도해서 육체와 영혼을 함께 소유하고 있는 인간 존재 표현에 대해 골몰하고 있었다. 기하학적 형태와 표현적인 제스처, 이 두 대립항이 충돌하는 화면은 흡사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이것이 최근에는 작가의 독자적인 창작 논리에 의해서 매우 이지적인 면모로 탈바꿈한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자연은 결코 이지적이지 않는 실체임을 확인하는 길이다. 자연을 대상으로 사색하고 그 위에 의미를 덧붙이는 우리들, 인간에 의해서 질서의 체계를 부여받았을 따름이다. 특히 미술의 세계에서는 원근법이나 투시법 등 자연을 끊임없이 가두어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화가들이나 자연을 근원적 질서의 세계로 되돌리려고 분석의 대상으로 끊임없이 설정했던 입체파 같은 이들의 시도에 의해서 질서 짓기의 결박을 당한 셈이다. 전원길 역시 자연을 대상으로 사색한다. 그가 여전히 이지적인 태도로 자연에의 질서에 집착하면서도 앞서의 우리들 선배들과 차별화되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면 자연의 질서를 분석, 구축해내려고 하기 보다는 자연에 동화되거나 차라리 그 부분집합이 되기를 원하는 태도일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붓을 쥐고 그림을 그리거나 자연을 캔버스 삼아 ‘야투’ 활동을 통한 자연미술을 시도하는 전원길에게 있어서는, 자연의 흔적을 더듬어 그 원형의 질서를 따라가는 행위만이 의미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그는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에 접근할 때, 그 창작에 있어 주인공이 되기를 포기하려는 태도, 단지 그 창작의 결과물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려는 태도를 견지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의 질문은 그의 작업이, 그의 창작 결과물이 자연 앞에서 늘 미끄러지지 않는가? 라고 반문하는데 존재한다. 그의 작업이 결코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고 생생한 시각적 결과물로 작가 곁에 남기 때문이다. 화이트 큐브에서의 전시가 설정되고 있는 회화 작품에 관한 한, 이러한 이미지의 양상은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다. 자연물의 이미지를 관통하는 유사색을 찾아내고 그 유사색에 자연의 이미지를 설정한 작가는 다시 그것에 도달하려고 하는 부단한 색 조율의 과정을 거치는데, 이 행위 자체가 겹겹이 쌓여있는 시각적 결과물의 이미지가 자연의 근원적 질서로 회귀되기에는 너무나 생생해 보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창작 결과물은 자연 앞에서 미끄러지거나 그 앞에서 모양새를 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역설적이지만 필자로서는 이 창작 결과물의 미끄러짐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작업의 본질적 의미가 찾아지지 않나 싶다. 결과물에 대한 관심보다는 과정 자체에 보다 큰 의미를 두는 작가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관건이 되는 것이다. 전원길은 자연의 흔적을 더듬고 그 원형의 질서, 내재적 질서를 따라가는 행위의 과정 자체를 색과 이미지가 침투하는 그의 회화 안에서 전개해 내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레드, 블루, 옐로우, 화이트 4원색만을 가지고 그가 설정하는 자연물의 다양한 색을 혼합, 구축하고 이처럼 설정된 하나의 혼합색에 다시 도달하려고 하는 4원색으로부터 출발하는 형상 만들기라고 하는 매우 독특하고 이지적인 창작 방법론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summer leaves 1’의 작품을 보면 그가 취한 실제의 나뭇잎 색에 근접하기 위해 화면위에 색조율 과정을 통해 계속된 붓질로 균일하게 단일색을 만들어내고 이 색에 다시 근접하기 위해 빨강, 파랑, 노랑색으로부터 출발한 각자의 나뭇잎들이 초록의 나뭇잎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자연의 원형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태도를 회화의 어법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또는 ‘grapes’라는 작업에서 작가는 먼저 분홍빛으로 보이는 포도의 새순에 근접하는 색을 화면위에 균일하게 올린다. 그 다음 실제의 포도잎을 화면위에 부착시켜 그 위에 실제 포도잎에 근접하는 색으로 일일이 붓질을 통해서 코팅시켜내고 다시 포도줄기를 통해서 다른 포도잎의 이미지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배경의 색과 같아지려는 흔적들을 가시화 시켜 보여준다. 이러한 자연물의 색과 같아지려는 화면 만들기가 극대화 되어 있는 ‘컵의 위치’라는 작업은 그것이 컵이라는 사물의 색 만들기로 전치되고 있지만 자연의 원형, 그 흔적을 따라가려는 데 집중되어 있는 작가의 대상에 대한 이해의 태도를 찾아볼 수 있다. 실제의 참외를 화면위에 올려놓고 같은 색의 물감으로 계속 칠하여 캐스팅한 후 참외를 빼어내고 그 참외의 공간을 주저앉혀 보여주는 작업은 그의 표현대로 ‘이미지物로서의 회화’의 자격을 부여받으며 자연이미지의 물성을 강조해 보여주고 있다. 분석 대상의 자연을 끌어안고 차라리 그 자연의 질서를 흉내 내며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생성과 소멸의 내재적 질서를 따라가고자 하는 전원길의 ‘자라나는 그림’은 전통적이면서도 매우 이지적인 회화 어법을 통해 시간의 흐름, 창작자의 노동행위를 기록하면서 오늘도 여전히 ‘마음없이 움직이는 자연처럼 일하고’ 밭 매는 농부의 마음을 담아내고자 한다.(2004. 11.15)
35 no image 2004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마치고
소나무
2908 2007-06-05
2004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마치고 전원길 2004/11/3 (0:19) 2004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마치고 -야투野投의 새로운 발전을 기대하며- 전 원 길 (작가/2004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조직위원) I 자연과의 접촉이 가져다주는 예술적 영감靈感을 진정 사랑했던 공주 금강 백사장의 청년들이 20여년의 작업의 여정 끝에 2004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자체적으로 기획하고 진행하여 그 모든 일정을 마쳤다. 예산의 확보에서 행사 장소의 결정 그리고 모든 작가들의 작품이 완성되는 과정과 마무리까지가 모두 난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겪었던 모든 어려움은 차후 진행될 비엔날레의 발전을 위한 실질적인 경험으로 남게 되었으니 그것이 야투의 크나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번 행사를 마치며 80년대 나의 소중한 작업들의 산실産室이었던 야투의 발전을 기대하는 작가로서 야투에 관한 평소의 나의 바램을 밝히고자한다. 이것은 현재의 야투회원들이 이번 비엔날레를 통해 나에게 보여준 변함없는 우정이 아니었다면 생각지 못할 일이였을 것이다. II 자연에서의 새로운 표현 방법론은 80년대 청년 야투 멤버들의 사계절 연구 활동을 통해서 발전되었으며, 90년대 현 회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진 국제전을 통하여 그 외연적 활동영역을 확대하였고 2000년대 초부터 진행한 야투의 비엔날레 프로젝트를 금년에 실현하였다. 이제 야투의 자연미술국제전은 국고지원사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자그마한 지역에서 출발한 소박한 미술운동이 마침내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이다. 야투그룹의 초기 형성과정은 미술계에서의 가시적 성공을 담보로 하지 않은 순수한 정신적 결합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면서도 당시 야투그룹은 강한 결속을 강요하는 대신 자유롭게 참여하고 연구하는 열린 구조를 취하고 있었다. 아직은 어린 대학생이었던 대다수 회원들은 자연 속에서 발휘되는 인간의 본래적 감흥을 바탕으로 표현했다. 살아있는 자연이 예술작품이 되고 예술작품이 자연 속에 신비롭게 머무는 새로운 방식의 작업에 대하여 스스로 놀라면서도 알 수 없는 통로를 찾아 한 발 한 발을 전진했던 순간들을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사계절연구회에 참가한 회원들은 말없이 행해지는 작업들을 통하여 서로의 마음의 눈을 열어주었으며 평상시에는 그냥 지나치던 자연의 다양한 측면들을 보게 하였다. 또한 이전에는 무심히 행하던 삶의 방식들을 자연 속에서 작업의 중요한 개념이 되도록하는 방식을 서로에게 전수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창립자로서의 역할을 했던 임동식이 독일로 유학을 떠나서도 그를 지도하고 있던 뵈뮬러교수와 학생들의 반응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고국의 후배들을 격려하고는 있었으나 학습된 작가로서 조력을 해줄만한 선배작가들이 현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회원들은 단지 자연과의 맞대결을 통하여 자신들의 작업을 진행했었다. 사계절 연구회는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연구 작품집들을 만들어냈다. 이 모든 열정은 오로지 자연이 가져다주는 영감을 통하여 다시 자연을 드러내는 방식의 상호작용을 경험하는 가운데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회원들은 현대미술의 형식적 변화 과정에서 다루어진 미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작업하기보다는 자연의 인도를 받아 자연이 내보이는 순리적 질서와 자연 그 보이는 대로의 양태를 보고자 하였다. 이것이 야투20여년의 역사를 끌어온 원동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야투가 그 당시 어설픈 사변의 늪에서 공허해지는 뇌腦운동의 산물을 만들기 보다는 자연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하여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인간 본래의 직관적 감흥을 중시하려는 태도를 가졌었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고 이러한 기본정신은 앞으로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III 그러나 이제 야투는 이제 자기 분석에 필요한 미술이론과 이와 관련된 사상적 흐름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풀어낸 작품의 수가 적지 않고 그러한 작업의 주체였던 회원들의 나이 또한 적지 않다. 말하자면 이제까지의 작업을 분류하고 비교하는 작업을 통하여 개별적 특성을 강화해야하는 시기이며 대 사회적인 요구에 부응 할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야투 작업의 대부분이 시각적 완성도를 높여가는 방식보다는 자연과의 대면에 있어서 직관적 아이디어에 무게를 두면서 작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야투의 방법론은 인간 의 정신과 자연의 어떠함이 합일하는 순간에 발휘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고양된 인간정신의 충일함이 없이는 피상적 제스츄어에 그치게 된다. 자연과 문명에 대한 이론과 사상이 다양하게 표출되는 이 시대의 새로운 시대정신과 조응하고 반응함으로서 자신의 정신적 지평을 넓히는 일 또한 작품제작과 더불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생명력 있는 미술운동은 자기 진화를 거듭할 수 있을 때 힘 있게 발전 할 수 있다. 작업을 수행하는 작가들은 언제나 자신을 일신해나가는 가운데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언제나 열려져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상태에서만 작가의 정신세계는 깊어지고 작업으로 드러나는 외적결과와 그것을 뿜어내는 내적요인이 연결되어 삶과 예술이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초창기의 의미 있는 작업태도가 20여년이 넘은 이시기에 까지도 유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야투자체가 쌓아온 작품 활동의 역사, 그리고 사회적 성장을 해온 작가들의 경력과 위치가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자체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내외적 요구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미술 운동으로서의 힘을 상실하고 단지 전시 기획팀으로 그룹의 성격을 한정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제 야투는 국내 자연미술운동을 이끄는 리딩그룹(leading group) 일 뿐 아니라 자연미술계에 있어서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고 그 역할이 기대되는 시점에 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즉 역사 속에서의 일정한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지점에 서있다는 말이다. 자연미술 운동을 23년간 진행해온 주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확인해야 함은 물론이고 이러한 미술운동에 계속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자연과 인간과 예술에 대한 풍부한 사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만일 이러한 공공의 책임을 담당 할 필요가 없다면 야투가 그룹으로서 미술운동을 지속할 이유가 모호해진다. 왜 모여서 활동하는가? 작가로서 개별적인 행보를 한다고 해서 아무도 말릴 사람은 없다. 이제 더 이상 청년이 아닌 미술계의 중진적 역할을 담당해야하는 연배에 회원 모두가 들어섰으므로 더 이상 낭만적 열정이나 의리가 목적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IV 나는 지금이 야투의 자연미술운동을 재점검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간의 그룹과 개인의 성과들을 분석함으로서 그 내용의 폭과 깊이의 정도를 가늠하고 정리함으로서 자신들이 일구어온 일들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준비를 해 나가야한다. 한편으로는 다른 지역,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같은 정신을 가진 작가들이나 그룹과의 연계를 통해 확장된 네트워킹을 만드는 일도 병행해야한다. 아울러 자연미술연구에 연계될 수 있는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과의 만나는 프로그램이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가다듬으면서도 외연의 성과에 부응하는 위치에서 미술계와 이사회에 의미 있는 발언을 해야 하는, 안과 밖을 동시에 챙기며 전진해야 하는 시점이라는 말이다. 나는 이렇듯 야투가 직면한 현재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러한 기회를 발전적으로 살려내기 위한 방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회원들과 관심을 가진 이들이 함께 모여 토론하는 가운데 발전적인 아이디어들을 도출되기를 기대한다. 첫째는 그동안 야투의 중요한 활동 중의 하나였던 사계절 연구회의 현재 분위기를 일신하여 보다 실제적인 연구의 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상시 자신이 일하고 거주하는 장소를 중심으로 개별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연구회 기간에는 자신의 작업을 공개하고 회원 및 초대된 전문가와 더불어 토론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또한 필요한 분야의 강의를 청해듣는 재충전의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자연에 반응하는 우리의 지성과 감성이 더욱 탄력적인 상태를 유지하게 될 것이고 작업의 폭은 확장 될 수 있다. 물론 초대된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프로그램을 통해 공적 사적인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향후 야투가 진행할 다양한 사업의 지원그룹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전략적 효과 또한 중요하다. 둘째는 자연미술관련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이다. 명실공히 자연미술의 본산으로서 학술적 연구가치가 있는 자료를 제공 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미술관련 정보를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세계의 중요한 작가들과 기획자 및 미술이론가들을 불러들이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생각해야한다. 셋째는 그동안 관계를 맺어온 자연미술가 및 단체들과의 국제적인 네트워킹을 활용하면서 자연미술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해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해외의 자연미술운동의 현장을 방문하여 그들의 움직임을 직접 살펴보고 그들의 연구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확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넷째는 지금 야투가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젊은 작가들이 작업하는 살아있는 작업공간과 대안적 미술연구장소로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국제적인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발전된다면 더욱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운영함으로서 자연미술운동에 합류하는 젊은 작가를 맞이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차세대 자연미술 작가 없이 야투는 자동 소멸된다. 마지막으로는 자연미술이 지금의 현대미술(contemporary art)과 불가분의 관계선상에서 이해되는 만큼 다양한 매체와 방법론으로 작업하는 현대미술작가들과 열려진 관계 속에서 교류하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해나가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확장된 태도를 바탕으로 야투만의 자연관과 작업방법론을 강화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시도를 통하여 야투는 창립 당시의 정신을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시대적 임무(?)을 실현 할 수 있으며 제시한 방안들을 추진하는 과정을 통하여 차기 비엔날레는 그 내용의 무게를 더할 것이다. V 이 글을 통하여 비엔날레의 결산적 발언보다는 앞으로 해야 할 미래지향적 방안을 제시하는 것은 비엔날레를 통해 드러난 운영상의 문제점 보다 차후 야투가 나가야할 발전적 모색이 더욱 중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아이디어의 일부는 이응우 회원이 금번 비엔날레 카탈로그에서 “우리는 그간의 과정을 토대로 자연미술의 미학적 연구와 이론적 체계 확립은 물론 자연미술운동의 국제적 네트워크 참여확대와 자연미술의 발전을 위한 항구적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언급한바있다. 또한 다른 사항에 관해서도 이미 회원들간에 논의가 되고 있거나 추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시도들을 통하여 회원들간에 보다 분명한 비전을 재정립 할 수 있다면 차기 비엔날레를 진행하는 방식도 합리적으로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훨씬 많은 대화를 통해 최선의 방안을 도출해내고 함께 보람을 느끼는 방식으로 모든 일들을 진행 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한다. 야투는 한국 미술계의 대안적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공공적 책임을 느껴야 한다. 또한 이제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체계적인 전략을 수립하고 그 실행방안들을 하나씩 검토해 나가는 치밀함이 요구되는 시점에 있다. 이제 모두 숨을 고르면서 지내온 날들을 돌아보고 처음의 그 순수한 열정을 되살려 내야 할 것이며 마침내 도달해야 할 작가로서의 미래의 위치를 넘겨다 볼 때다.
34 no image 10월의 작가와의 만남을 위하여
소나무
2765 2007-06-05
10월의 작가와의 만남을 위하여 전원길 2004/10/19 (11:15) 독립작가 회원님들께 10월에는 김수철, 박용국, 경수미등의 회원들이 작가와의 만남(P&I)을 갖게 됩니다. 김희곤, 전원길, 이윤숙, 우무길에 이어서 갖게되는 만남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지역사회는 물론 우리나라의 전시문화를 새롭게 하려는 일련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습니다. 이것은 승부가 나기도 전에 승부를 정해주는 국내미술계의 부조리한 구조에 순응하기 보다는 우리들 자신을 평생 진행형의 상태로서 쓸데없는 권위와 허세를 벗어버리고 서로 열린 마음으로 만나는 장을 형성하는 데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금과는 다른 대안적 미술문화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으로부터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시회를 연다는 것은 경력 한 줄을 보태기위해서라기 보다는 자기을 미술계에 내보이고 그 반응을 진지하게 경청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전은 작가로서 현재의 자신을 숨길 수 없이 드러내 보이기 때문에 전시를 통하여 우리에게 마땅이 돌아오는 것은 다른 작가나 관객의 반응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반응을 보다 구체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소개하고 그에 대한 질문과 응답의 장을 마련합니다. 이러한 자리는 언제나 불편하고 어려운 자리입니다. 때로 아직 구체적인 컨셉으로 정리되지 않은 것에 대하여서도 대답해야 하고 전혀 예기치 않은 질문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준비된 답변이 신통치 않을 때는 작가로서 자괴감을 느끼게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공식적인 자리에 서게 됨으로서 자신의 현재 위치를 객관화하고 다음에 나가야 할 방향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각자의 개별적인 작업세계를 존중하며 또한 언제나 전진 할 여지가 있는 미완의 프로젝트중간에 있음을 받아드리는 가운데 효과적인 관계를 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만남에 참가하는 동료 작가들은 보다 분명한 자신의 잣대를 가지고 발표자와 만나야 하며,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견해보다는 특별한 관점에서 발표자의 작업에 접근 할 수 있어야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토론의 장을 형성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비춰보면서 피차의 세계를 확장 하게 해줍니다. 가능하다면 우리는 지정 질문자를 초대하여 전문적인 견해와 아울러 맥락을 집는 질문을 접하기를 원합니다. 프로그램을 통한 공적인 관계는 만남의 영역를 확장하여 우리 모두를 소개하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지역과 기존의 인맥관계를 가로질러 새로운 관계를 형성시키면서 진정한 만남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풍토를 이루어내는데 역할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프로그램 진행에 협조해주신 회원님들께 감사드리며 연속해서 열리게 되는 10월의 작가와의 만남에 관심있는 동료 작가들과 더불어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작업에 진전있기를 바랍니다. 전원길 드림
33 no image 우무길의 육면체와 끈 그리고 새로움에 관하여
소나무
3302 2007-06-05
우무길의 육면체와 끈 그리고 새로움에 관하여 전원길 2004/9/23 (1:32) 우무길의 육면체와 끈 그리고 새로움에 관하여 이번 소나무 스튜디오 갤러리에서의 전시회를 통하여 우무길은 그의 오랜 관심의 대상인 육면체의 조형적인 변주와 아울러 자신이 포함된 인간사에 대한 관조와 깨달음의 경험을 육면체에 이입함으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하여 묻고 있다. 외견상 그의 입체물들은 전통적인 모더니즘 추상조각의 문맥 속에서 읽어지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비록 그가 기하세계가 가지고 있는 순수 조형의 가치를 주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구사하고 있는 조형 어법은 조형세계 밖의 인간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다. 반면에 작가 자신의 작업에 대한 증언은 오히려 자신의 어릴적 삶의 특수한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현재 자신이 처해있는 현실에 대한 경험적 인식에 비중을 두고 있는것이다. 어쩌면 우무길은 자신의 작업을 진행하는 중에 그가 증언하고 있는 작업의 의미를 생각 한다기보다는 훨씬 작업 자체의 조형적 문제에 고민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작업이 종료된 후에는 작업의 과정에서 작업의 주된 의미를 찾기 보다는 자신의 둘러싸고 있는 삶에서 작업의 의미를 끌어오는 것이다. 대체로 미술의 주된 맥락의 변화 과정을 통해서 창의성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작가의 사적인 경험이 어떻게 형식화 되었으며 그것이 어떻게 새로운가를 흥미 있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개인의 일상의 경험에 대한 증언이나 재주 있는 표현보다는 그것을 도출해내는 표현 형식의 구조가 색다를 때 강한 감흥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여기서 형식의 구조란 다양한 표현을 만들어 내는 장치와도 같은 것이다. 아무리 새로운 재료를 집어넣더라도 그 생산구조 틀이 변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것이 나올 수가 없다. 우무길이 이야기 하고 있는 끈이라는 화두를 통해 이 문제를 설명하자면, 우리는 가정과 직장 혹은 지역사회 미술계에 이런 저런 인연을 맺고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때로는 행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복잡한 갈등구조를 엮어내는 끈이며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는 끈끈이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미술작가로서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끈에 매달려있다. 그것은 우리가 면면히 흘러내려오는 미술의 전통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그 안에서 우리의 위치와 작업의 가치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선배예술가들이 남겨둔 예술적 소산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생각해야하는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예술계속에서의 연결된 끈의 관계를 인식해야만 작가로서의 자신의 보편적 위치를 확인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선배들이 일구어 정립한 틀을 벗어나면 사회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고 그 틀 안에 머믈러서는 진정한 의미의 새로움의 발견이란 불가능하다. 이런한 상황을 인식하는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틀은 유지하되 자신의 삶의 색다른 경험을 의미화해서 작업에 가미해 나가는 소극적 방식이다. 이때 개별 경험의 충격이 크면 클수록 작업을 형성해 나가는 형식에 지배받지 않고 강력한 아우라를 뿜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류의 작업도 반복되면 양식화되고 피상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과거의 틀을 벋고 새로워 질 수 있는가? 과연 그것은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사람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작품이 바뀌지 않는다. 즉 이 세상을 바라보는 색다른 방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면 과거의 끈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끈을 부여잡고 전진 할 수 있으리라. 인간을 세계를 바라보는 중심에 놓았을 때 가능했던 르네상스의 선 원근법의 발명과 자연의 생생함과 색채와의 관계를 통해 관념적 이미지들의 세계였던 회화를 캔버스 표면의 물질계로 이끌었던 인상주의와 그 후예들, 영상매체를 통해 장소와 시간의 문제에 대한 색다른 제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예술의 형식으로 발전시킨 비디오 아트 그리고 이러한 테크놀러지를 중심으로 확장되고 있는 방법론과 나란하게 발전하고 있는 자연미술의 생태학적 표현 방식등은 인간과 미술 그 자체에 대한 의문과 재발견 그리고 문명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미술적 혁신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그 실마리를 잡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새로운 위치에 선다는 것은 철저하게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립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신 이전부터 있어오던 세계이지만 구석구석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관계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자리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관계 끈을 만들고 그 구조 속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안내하는 자로서 그의 새로운 영토는 확장된다. 예지력이 강한 천재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과거와 현시대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조망하면서 다음 단계를 앞서 전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우무길의 작업의 여정을 통해 그 가능성을 배울 수 있는데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쉬지 않고 일한다는 점이다. 쉬지 않고 작업한다는 것은 작업을 통해 자기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꾸밀 수 없는 진정성이 전제가 되어야 가능하다. 나는 이 두 가지 점을 통하여 새로움에 도달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있다. 그가 비록 전통적인 맥락하에서 자신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작업의 지속적인 진행 과정을 통하여 자신이 매달려 있는 끈의 실마리를 모두 풀어내고 그것으로부터 벗어 나리라 생각한다. 또한 그 진정성을 통하여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아닌 것으로 알고 자꾸 자꾸 걸러가는 동안 이제 까지 쌓아온 자기 탈출을 위한 내공의 공력을 더욱 강화해 나가리라 믿는다. 그의 전시 작품 이외에 제시하고 있는 드로잉들을 통하여 그는 주체 할 수 없는 창의적 아이디어들을 배태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그의 생각들이 작업의 과정을 통해 정립되길 바란다. 잔머리만 굴려서는 진정한 정신을 확립 할 수 없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의 창작의 몸 놀림이야 말로 그가 새로운 세계로 전진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비록 한 동료작가에 대한 나의 접근이 어쩔 수없는 나의 잣대를 통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저 없이 내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것은 최근 소나무스튜디오 갤러리의 작가와의 만남 프로그램을 통하여 작가들이 자신의 위치를 공개하고 그 허약한 곳을 스스로 노출시키는 용기있는 전시문화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것은 전시문화를 보다 실질적인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의미있는 시도이자 성과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자리를 서슴치 않는 작가들에 의해서 조금치라도 자신의 영역을 확보해 나가는 자를 진심으로 격려하는 분위기가 살아나길
32 no image . RE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본 예술작품의 가치
소나무
3062 2007-06-05
. RE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본 예술작품의 가치 황영철 2004/7/17 (11:36) 전문가 앞에서는 침묵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지만, 부싯돌님의 글을 읽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술을 위하여 용맹정진하시는 모습은 언제나 우리를 돌아보게 하며, 그 속에서 생산되는 작품들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줍니다. 또한 신앙인으로서 예술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찾으려는 오랜 노력이 그 글에서 엿보여 더욱 상쾌합니다. 영국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토론했던 많은 내용들이 회상됩니다. 님의 글을 읽다가 한 가지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군요. 허두에 시작하신 말, '작품의 가치는 경험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님의 그 말씀의 의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 발언이 생각나게 하는 문학이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른바 reader response theory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오늘날 문학 비평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이론입니다. 그 이론이 대답하고자 하는 근본 문제는 문장의 의미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문장의 의미는 문장 자체에 내재한다고 믿어졌습니다. 그래서 바른 방식으로 문장을 잘 공부하면 거기에 내재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고, 따라서 독자의 임무는 그 내재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믿어졌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독자가 문장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을 관찰해보면, 그런 전통적인 생각에 의문이 드는 점이 많게 됩니다. 대부분의 문학작품의 경우, 심지어는 객관적으로 기록되었다고 하는 보고서나 신문기사에 대해서도, 모든 사람이 그것을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끔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경험이 되어 더 이상 그것이 이상하지 않게 느껴질 지경입니다. 어떤 문제에 대한 토론 프로 하나만 들어보면, 동일한 사태에 대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상이한 해석을 내리는지가 금방 드러납니다. 이 카페에서 오가는 담론에 대해서도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동일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떠오릅니다. 문장의 의미가 과연 문장 자체에 있는 것인가? 만약 문장 자체에 의미가 있다면 왜 사람들은 문장에서 전부 동일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제가끔 그 문장의 의미를 이해할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연구자들의 관심은, 문장을 그렇게 다르게 이해하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가에 집중되었고, 거기서 발견된 것은 선이해와 경험의 중요성입니다. 즉 독자가 가진 과거의 경험과 지식,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형성된 세계관 혹은 선이해들이 독자로 하여금 동일한 문장을 다르게 이해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프로이드의 인간 이해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이 이론을 성경해석에도 적용하려는 시도가 있어서 이론적인 토론이 진행되고 있기는 합니다. 그래서 이 이론의 주창자들은 문장의 의미는 문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내용을 모르면 말이 안되는 소리 같지만, 내용을 알고 보면 거기에 상당한 일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독자는 수동적으로 앉아서 문장이 던져주는 의미를 받는 입장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미를 생산해내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미의 생산자로서의 독자가 있음으로써 문장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저는 그 이론의 극단적인 형태를 일관되게 비판해 왔고, 특별히 그 이론이 가지고 올 파괴적인 영향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우마님이 염려하신 가치의 상대화가 이런 이론을 통해서 현실화되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은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것이 있습니다. 문장의 참된 의미에 도달하기가 그렇게 용이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장을 해석함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을 이해함에 있어서, 혹은 어떤 현상을 해석하고 파악함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독특한 경험에 의해서, 혹은 우리가 과거에 맺었던 어떤 대인관계에 의해서, 혹은 우리의 기질에 의해서 얼마든지 현실을 오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의 이해를 반성하게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 자신을 좀 더 겸손하게 해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타인에 대해서 관용하기를 더 쉽게 해줄 것입니다. '작품의 가치는 경험하는 자의 것'이라는 님의 언명이 그 이론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31 no image 작업실 20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본 예술작품의 가치
소나무
3089 2007-06-05
작업실 20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본 예술작품의 가치 전원길 2004/7/15 (9:48) Q (길모퉁이); 설치미술은 주변 환경과 독립해서 이해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반적인 미술작품도 전시 환경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일본에 있는 몽유도원도' 의 가치에는 역사적, 사회적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술 작품에는 단 하나의 가치(미)만 있는 것인지 궁금해서 질문을 드립니다. A (전원길); 작품의 가치는 경험하는 자(할 수 있는자)의 것이기 때문에 예술 작품의 가치가 어디까지 이고 또한 그 판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설득 타당한 답을 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설치미술에 관한 풍부한 경험(감상)을 위해서는 설치 미술품이 위치한 외부 환경 뿐아니라 그 속에 깔려 있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 될 때 그 의미가 살아나고, 안견의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는 우리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천리대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아무나 볼 수 도 없게 된 마당에는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부가적으로 취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작품 그 자체의 가치가 다른 영역으로 증폭된 대표적인 예 일 것입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대명제 하에 작품속의 문학성과 환영(illusion)을 지워내려했던 추상미술조차도 그 의도 자체가 외부 사회와 관련을 맺고 어떤 멧시지를 날리고 있기 때문에 사회와의 관련성을 끊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 작품의 멧시지 즉 내용이 갖는 의미가 어떤 잣대 즉 사회윤리 혹은 종교에 의해 판단 받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술 작품에 내재된 순수한 미적 형식은 따로 떼어서 생각 할 수 없고 언제나 내용과 더불어 그 가치판단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라고 생각 될 수도 있구요. 그리고 요즘 우리 까페에서 논의되고 있는 상상력이라든가 창의성의 가치에 대해서도 언제나 표현된 내용에 의해 그 가치가 확인된다고 말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좀더 다른 각도에서 미술의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면서 생각의 폭을 넓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의 가치에 대하여 많은 미학적 개진이 학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기독교 개혁 신앙을 추구하는 자들로서의 예술에 대한 태도일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세련된 미감은 주로 예술지상주의를 추구했던 모던 아트의 고상함과 순수함의 추구의 결과입니다. 특히 아파트의 인테리어라든지 가구등 우리의 미감을 사로잡고 있는 모든 것들은 기독교적 입장에서 단순히 따지고 보면 신을 떠난 인간들의 바벨탑적 불순한 의도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온 것들입니다. 인상주의 풍의 편안한 화풍은 종교적 신념의 판단에 부응하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 할 런지 모르지만, 중립적 순수미술의 세계를 천명한 추상미술의 저 앞자락에는 인상주의가 그 불순한 예술지상주의를 적극적으로 예시를 하고 있다는 것도 생각하여야 합니다. 좀 더 올라가서 사물을 파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는 사실주의 화법을 보더라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평면 속에 3차원 가상 공간을 그리는 방법 즉 선원근법과 명암법을 르네상스 시대에 발명되었는데, 역시 불순하기는 마찬가지로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반영이며 인간 중심적 사상의 정돈된 미술 형식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후 현대미술은 때로 합리주의와 이성에 그 근거를 둔 서양 정신 문명에 대응(다다이즘) 하면서도 방향을 돌려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생각하여야 할 정당한 사고로 전환하지는 않았고 여전히 인간의 가치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사상과 나란하게 그 형식을 유지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따지면 인간의 본성의 타락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현대 예술은 태생적으로 불순합니다. 그 순수한 의도만를 걸러내기가 힘들다는 것이지요. 비록 그 내용이 사회적으로는 의미있으나 기독교적으로는 반 신국적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정신적 신념을 상관치 않고 파고드는 인본주의적 산물인 예술품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즉 극단적으로 말하면 가치 있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가치를 논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술품의 가치를 모두 부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록 신을 떠난 역사적 패러다임의 한복판에 있는 작가들의 예술 세계일지라도 거기서 느끼게 되는 감동과 미적 공감은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은 불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냥 그런 것이 아니고 의미있는 현상이라는 말이지요. 우리 안에 내재된 미감을 흔들면서 다가오는 이것은 때로 작품의 내용이 아닌 보이지 않는 구조와 관련이 있을 때 더욱 강렬하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을 통해 발휘되는 상상력과 창의성이 새로운 형식으로 자리를 잡을 때 보다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작품의 대 사회적 관계의 효용성보다는 그 자체의 미적 형식에서 발생하는 생생한 힘에 주목하는 것은 단지 가치 중립적인 미의 세계에 탐닉한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내신 그 창조성이 살아 움직임을 기꺼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살아있는 나무는 비록 어디에 쓰여지지 않더라도 자연 속에서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닌다"고 말한 로크마커의 표명이 언제나 새롭습니다. 사실, 좋은 것만 의미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무리 없는 의견 통일을 이룰 수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정신을 빈곤하게 할 뿐이고 마땅히 누려야 할 중요한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 될런지도 모릅니다. 구태의연한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치열한 예술가들의 삶 통해 발휘되는 창의성을 가려내어 볼 수 있다면 자연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에 기뻐하듯이 그것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술품의 순수한 미적가치 혹은 상상력과 창의력은 보다 입체적인 사고방식의 틀 안에서 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불순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를 넘나들며 생각이 다른 너와 나의 경계를 가리지 않는 지점에서 상상력은 아름다운 만물과 호흡하며 그 지으신 이를 찬송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련된 감식안을 통해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내보이신 그 아름다움을 보다 깊게 향유하길 원하는 것은 자연스런 욕구 일 것입니다.
30 no image 작업실 19 수원 시립 미술관보다 먼저 꾸는 꿈
소나무
3366 2007-06-05
작업실 19 수원 시립 미술관보다 먼저 꾸는 꿈 전원길 2004/7/5 (20:56) 작업실 19 수원 시립 미술관보다 먼저 꾸는 꿈 오늘 나는 수원 미협이 시립 미술관 건립을 위한 기금 마련 전시회를 한다는 공문을 받았다. 꽤 오래 전에도 이번과 같이 시립미술관 건립을 위한 서명 비슷한 것을 하면서 지역 미술인들의 동참을 촉구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민들이 언제나 찾아와서 질 높은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그들의 삶의 가치를 보다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미술관 건립은 일단 반대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지역 미술계의 전문화와 활성화의 필요성을 강조해 온 나로서는 우선 순위에 있어서 미술관은 좀 더 나중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인구 백만의 도시에 걸 맞는 미술관을 당장 세운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것보다는 장기적으로 보다 특색 있는 진정한 의미의 지역 미술관을 만들어 세계인이 주목하는 미술관을 건립할 꿈을 키워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의 미술계가 살아 움직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 그런 터 위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많이 배출되는 분위기 속에서 지역 미술관을 건립해야 할 것이다. 국내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그냥 그런 미술관이 아닌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미술운동을 기념하는 미술관이라든지 아니면 보다 특성화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한 미술관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혹시 그래도 미술관을 만들고 보아야겠다면 포괄적인 당위성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그 미술관이 어떤 내용으로 채워질 것이고 그 운영을 통해 어떻게 지역 작가들의 활동에 보탬이 될 것인지 설득력 있는 제안을 해야 할 것이다. 단지 기관장의 실적 위주의 행정을 위한 예산 낭비가 되서도 안되고, 미술 관장이라는 자리 하나 마련해 놓고 돌려 가며 폼잡는 우수운 상황을 위해서라면 더 더욱 안될 일이다. 기존의 건물을 개조한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는 미술관 건립보다는 지역의 젊은 작가들이 자생 할 수 있는 기본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우선 지원해야 할 것이다. 사실 다양한 미술가들의 층이 엷고 변화 있는 기획전을 진행 할 만한 인적 자원이 없다면 그 공간은 인근 지역으로부터 공급되는 용병 작가들로만 채워지게 될 것이다. 건물 욕심보다는 사람 욕심을 먼저 가져야 한다. 우리 지역에서 활동하는 살아 있는 작가가 얼마나 되고 그들은 어떻게 작가로서 살아(생존해)가는지 관심을 가지고 키워 내야 한다. 온전히 자신의 삶을 작업에 던지지 않고는 한치의 영역도 확장시킬 수 없는 것이 예술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실에서 작업에 몰두 할 수 있는 환경이 어떻게 조성되야 하는지 생각하는 지역의 문화 행정가는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여론에 의지하여 자신의 업무를 값없는 일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이 아닌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는 의욕적인 공무원을 우리는 만나고 싶다. 또한 이런 저런 일을 병행하면서 어려운 가운데 근근히 작업을 지속해 온 선배 세대들은 다음 세대 작가들에게는 보다 전문적이고 활기 있는 지역 미술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마음을 모을 줄 알았으면 좋겠다. 그냥 '알아서 커라'라고 해서야 역사가 발전하겠는가?. 정으로 연으로 만나 낭만적 열정을 함께 나누는 작가가 수 백명이 된다고 지역의 미술계가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빈 공공건물이 생긴다면 예술적 전진을 심각하게 모색하는 작가들에게 제공하고 그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지원하자. 많은 작가들이 작업실에서 그들의 상상력을 확장해 나간다면 지역의 시민들이 그 신선한 예술적 분위기를 보다 실질적으로 누리게 될 것이다. 실력있는 작가들이 지역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작품들은 바로 이곳에서 발표되고 많은 갤러리스트와 컬렉터들이 각지로부터 모여들 것이 아닌가? 이때 쯤 지역에서 활동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채워진 미술관을 짓는 일은 자동적으로 진행되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 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에 이루어진 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29 no image 작업실18 삶에 대한 단상
소나무
3405 2007-06-05
28 no image '이미지物 로서의 회화'전에 붙이는 작가노트
소나무
3103 2007-06-05
'이미지物 로서의 회화'전에 붙이는 작가노트 이미지物 로서의 회화 Painting as an Image-thing 이번 작품들은 지난해 봄 마른 회색 줄기의 틈을 비집고 핑크빛 움을 트여내던 마당의 포도나무와 초여름 잦은 비로 인해 늙은 호박을 많이 내지 못한 호박밭을 지켜보며 일년 가까이 작업한 것이다. 나는 그동안 사물의 색과 똑같은 단색 화면을 만들고 그 위에 사물을 개념적conceptual, 시각적visual 측면에서 접근하여 대상의 속성과 형상을 색 조절 과정을 통해 표현하는 방법으로 작업을 해왔다. 최근에는 그동안의 방법론을 대상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하면서 나뭇잎과 같은 실제 자연물nature object 혹은 주제와 관련된 사진 이미지를 화면에 붙이고, 그 위에 한 붓, 한 붓 물감으로 올려붙여 색채를 조율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形象-物 image-thing을 화면 속에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물감을 올려 붙여나가는 작업에서는 ‘그린다’ 는 전통적 감성보다는 ‘일한다’ 는 현장감을 더욱 느끼게 되는데 이는 마당에서 삽이나 괭이를 들고 흙과 더불어 일할 때의 기분과 동일하다. 화면 위에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듯 점점이 움직여 나가는 작은 물감 덩어리들은 명백한 이미지를 만들어 냄과 동시에 실물로 남겨지며 빛을 받아들이는 반 입체 공간을 형성한다. 사물의 존재감을 직접적으로 제공하는 이와 같은 작업은 대상 자체가 물감으로 뒤덮여서 결국은 본 실체와 그 위에 만들어진 새로운 작업 결과물이 물리적으로 하나가 되고 원래의 대상 위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색채 탐색 과정은 시각적 자연성을 드러낸다. 긴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물체들의 순환과정을 짧은 시간으로 압축해 볼 수 있다면 모든 것은 드러났다가 사라지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화면 속으로 사라졌다가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나의 이미지들도 이와 같이 순환하는 만물의 존재 양상을 반영한다. 시간을 따라 다층적으로 쌓여지며 각 단계가 서로 관련을 맺게 되는 이러한 작업의 전개 방식은 원인과 결과가 상호 작용하는 자연의 보이지 않는 구조를 반영하며, 어제와 오늘의 시간이 함께 존재하고 내일의 시간이 이미 화면 속에 등장하는 통시적通時的diachronic 회화 공간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 중 함께 보여지는 야외작업Outdoor work 은 주변에서 모은 크고 작은 돌들을 쪽을 맞추어 쌓은 다음 자연광에 의해 생긴 명암의 경계를 따라가며 색채 조율 흔적을 남긴 작업으로, 실내 평면 작업의 야외공간으로의 확장이라 할 수 있다. 작업의 모든 결과물들은 시각적 판단을 반영하면서도 그 시각 경험을 의미 있게 형식화하는 지적인 사유 과정이 현실화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작업의 흐름에 주도적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무심하게 움직이면서도 늘 제대로 일하는 자연을 닮기 원해서이다. 자연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고 풍부하게 보는 이의 눈과 머리 그리고 마음속에 감흥을 주는 그런 작업을 하고 싶다. 2004년 5월 전 원 길 Painting as an Image-thing My new work is done during last one year period of time, looking at the grapes growing out of dry, gray branches last spring, and the pumpkin plant that couldn't grow a lot of full grown pumpkins because of too much rain at summer. I have worked equalizing the color of the object on the canvas and adding in the conceptual and visual perspectives, expressing the quality and the physical shape within the colors. These days I approach to the object in variety of ways, sticking the real object such as leaves, or a photograph on the surface and adding paint touch by touch, controling the colors. During the process, I create a new image on the canvas. While I add in the touches of paint on the canvas, it feels that I'm "working", rather than the traditional concept, "painting". It is the same idea as working on dirt with a spade or an hoe. The paint that has moved as if it was recording the time, forms droplets that accepts light and still makes a clear image. This kind of process expresses the existence directly, showing a natural look as if the object and the paint was forming as one. . It is easy to tell that everything appears and disappears in certain amount of time, just like what I try to show through my images going through the surface. Also, the style of work that makes relationship with the steps of the process with each other shows the natural figure that corresponds to itself. As yesterday and today's time exists together, tommorow's time has come into the image in a diachronic form. The outdoor works can be seen as translations of the flat surface work into 3 dimensional space. I collected stones big and small, matched the sides and formed a tower-like figure,and then I have worked through the colors and left the traces of it, following the difference of shadows and lights formed by natural sunlight. This time All the outcomes of my work has an visual idea that formed in my head while drawing the real object, also as the object is drawn,. However, I always try not to interfre with the flow of my working process, it is because I want to be like nature, which works mindlessly and still so perfect. I want my work to be just like a moment of nature, fresh and unlimited, which inspires a persons eyes, the head and also the mind. 2004.5.Won-Gil Jeon
27 no image ‘이미지로 포장된 사물의 해방’ (2004.4 김희곤 "존재의 시선" 전을 보며)
소나무
3013 2007-06-05
‘이미지로 포장된 사물의 해방’ (2004.4 김희곤 "존재의 시선" 전을 보며) 김희곤은 사물의 시선을 느낀다. 沒人格 사물 속에서 자신을 마주보는 어떤 힘을 느낀다는 이야기다. 김희곤의 작업은 사물과 자신이 처해 있는 한계 상황에 대한 관념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인식은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物我同格의 생생한 경험으로 현실화된다. 서로가 서로를 구속함으로서 본연의 자아를 상실하게 하는 인간관계의 고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그는 사물 속에 자신을 투사하고 있다. 기능적 역할을 통해서만 그 효용성이 인정되는 사물의 가치를 재고하도록 함으로서 그 또한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사물의 고정적 이미지를 유기적 변이가 가능한 상태로 바꾸어 가는 그의 일련의 작업 과정에 동원되는 비닐과 비닐 철끈은 그의 평면작업 속 이미지들의 상징 현실물들이다. 회화의 형식적 측면에서 보자면 공간 속의 사물이 평면 속의 이미지로 전이되는 과정의 역행인 것이다. 조금 전 까지 사용되던 선풍기는 검은 비닐로 감싸지면서 그 胎生的 기능으로부터 벗어나 사물 본래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하며 그것은 다른 것들과 다른 방식으로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물론 본래의 기능성이 해제되자마자 그 물체는 미술품이라는 또 다른 기능이 부여되지만 그는 "實在와 派生實在"와의 불편한 동거관계 사이에서 예술적 감흥이라는 작가의 양식을 얻어낸다. 우리는 흔히 작품에서 생명감을 찾는다. 그러나 김희곤은 작업을 통해서 자신을 자신으로 부터 분리해가는 剝離 작업을 반복함으로서 생생한 자신의 실체에 도달하고자 한다. 이것은 자신과 작업이 일체화된 삶을 향한 求道的 태도이다. 숨죽이고 있던 인간성을 활성화시키는 김희곤의 作業物들은 우리 앞에서 또 다른 해방을 위한 視線을 날리고 있다. 이번 전시회를 통하여 그는 독립 작가연구회 iam에서 기획한 P&I프로그램(Presentation and Interview)에 기꺼이 참가한다. 그는 동료 작가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자신도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찾아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참석한 모든 사람의 창의적 영감을 자극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또한 이 전시회는 경기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진행되는 소나무 미술학교의 "현대미술과 놀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으며 작가와 일반인의 보다 적극적인 만남을 통해 일반인의 구체적인 감상과 반응을 이끌어내는 장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26 no image 독립작가연구회 iam 첫 번째 모임을 위하여
소나무
2979 2007-06-05
독립작가연구회 iam 첫 번째 모임을 위하여 전원길 2004/3/18 (0:40) 김희곤 선생님의 개인전을 통하여 독립작가 연구회 iam 의 첫 번째 P&I(Presentation & Interview) 프로그램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각각의 작품세계를 열어온 작가들이 모여 그간의 고민의 결과를 소개하고 동료들과 그 의미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사실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일은 작업 이상의 어려움이 따르게 됩니다. 자신조차도 작업의 과정에서 있었던 직관적 판단의 근거와 작업 자체의 자율적 전개의 현상의 면면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을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러한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이것이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그동안 정리되지 않았던 생각들이, 자신의 작업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질문에 답하는 과정을 통하여 제자리를 잡게 되고, 더 나아가 지금까지 거닐었던 생각 너머의 세계로 함께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독립 작가 연구회의 멤버들은 적어도 전통적인 작업의 틀 속에 안주하기 보다는 자신의 독립적 세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하는 작가들입니다. 즉 오늘을 사는 작가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열려지지 않은 길을 향한 전진을 자처한 작가들 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미술contemporary art을 지향하는 작가가 자신의 작업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보편적 소통의 새로운 가능성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자기 논리를 세워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작업의 근거를 보다 든든한 토대위에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생생한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가?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형식화 되었는가? 완성된 작업이 그 스스로 새로운 의미를 더해나가는가?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해나가는 생명력을 가졌는가? 를 함께 따져보는 가운데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기위한 극점 가까이로 자신을 이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요구되는 작가 정신은 자신은 새로워지지 않으면서 단지 하나의 스타일을 개발하여 자신의 작업을 브랜드화 하고 그것을 선전하기위한 경력 확보에만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신과 자신의 작업을 새롭게 갱신해나가는 생명력을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작업의 토대를 보다 넓고 깊게 하기위하여 이러한 프로그램을 스스로 마련하였습니다. 지역 사회에서 오랫동안 친분을 나누어 오는 동안 쌓아온 신뢰가 정직하고 의미있는 반응을 이끌어 내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앞에 선 작가가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우리는 훨씬 날카로운 검으로 빈틈을 찾을 것이며 작가는 그 예리한 접근에 의하여 자신의 작업이 움직여 나가야 하는 방향을 본능적으로 찾아낼 것입니다.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이 대화를 통한 고양된 정신 상태를 만들어내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각자의 작업에 필요한 예술적 영감을 얻어낼 수 있도록 서로를 배려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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