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전원길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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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no image Where is your mind? 3
소나무
5005 2011-02-12
4. 2010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야투 워크숍 작품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이틀간 원골 자연미술의 집에서 작업한 워크숍 자료들을 가지고 슬라이드 쇼를 진행하였다. 다른 프레젠테이션 때보다도 흥미진진한 분위기이다. 프로젝터가 설치되고 원골에서의 워크숍 작품들이 비추어진다. 처음부터 주저함 없이 자신의 생각을 몸으로 표현해내기 시작한 가나에서 온 패트릭 타고 턱슨의 작품이다. 처음 몇 작품은 내가 촬영해서 아는 내용들이지만 그 외에도 풀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호박을 잘라 모자를 만들어 쓴 작품들은 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즐겁고 기분 좋은 작품이다. 자연미술 워크숍에 참여하는 일은 자연과 함께 즐겁게 노는 일의 일환이었다. 원골의 주변 환경 자체가 창조적이고 흥미로우며 자극적이기 때문에 쉽게 창작에 몰입 할 수 있었다. 신선한 아이디어가 큰 수고 없이 쉽게 떠올랐다. 마치 자연이 내 사고 과정을 장악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연이 주는 메시지는 단순하였지만 나에게 부과하는 질문은 매우 많았다. 따라서 대체로 매우 깊은 영감을 주고 사고를 자극하는 작품들을 창작할 수 있었다. ‘덧없는 존재인 우리들의 모순’ 가면의 배후에 진짜 얼굴이 있듯이 고강도의 힘은 취약한 조직으로부터 나온다. ‘오남 두아 소 나 아호마 훈 노 소르’ (아칸 금언, 가나)는 이렇게 번역될 수 있다. ‘덩굴식물이 기어 올라가는 통로를 보여주는 것은 나무이다.’ ‘죽기 전에 가치 있는 일을 하라’ 나뭇가지는 인류에게 끊임없이 도움을 제공하는데 심지어 잘린 뒤에도 그리한다. 이 사람을 이해하고 선잠에서 깨어나라. 죽고 나서야 자연에 기여하려는가? 우리의 시간은 애초에 남아 있던 것보다 훨씬 가까이 왔다. ‘자연군(自然軍) 사령관’ 끊임없이 자연 세계와 모든 천체(天體)를 격노케 한 여러분의 오만함이 이제 자연이 베푸는 아량 앞에서 극에 달하였다. 나는 여러분과 그 자손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모든 무기를 전진 배치시켰다. 나는 여러분의 경작지를 물어뜯을 것이고 동식물도 삼켜 버릴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나의 마지막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수년에 걸쳐 수고로이 이룬 모든 것들 위에 나의 머리칼을 풀어 헤칠 것이며, 여러분이 애초에 나온 바로 그 길로 돌아가게 만들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의 경계선들’ 여러분의 손에 힘이 남아 있는가? 여러분이 제작하고 또 해체했던 것들을 잡고, 만지고, 느껴보라. 여러분의 생애가 이만한 수준에 도달한다면 산이나 바다의 가장자리 쪽에 정착하겠노라 결심하라. 그리고 거기에서 여러분의 손이 여러분의 안내자가 되게 하라. 여러분은 자신들이 자연에 가하는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다음은 고승현 회원의 작품이다. 2008년에는 나무에서 길게 늘어진 나뭇잎을 입으로 물고 있는 작업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강아지풀을 한 움큼 잘라 입에 물고 하늘을 향해 누었다. 태양 빛이 풀과 얼굴을 비추며 떨어진다. 마치 입속에서 자라 오른 풀들을 더욱 잘 자라게 하려는 듯하다. 고 승 현 “풀밭위에 누워서....” 자연 속에서의 나의 작업은 더 이상의 아름다움이나 어떤 가치를 구현하지는 않는다. 나는 자연 속에서 안식을 얻기를 원한다. 강아지 풀을 잎에 가득 물고 풀밭위에 편안히 누었다. 태양에 눈부신 하늘을 바라보고, 땅의 기운을 느끼는 동안에 나의 몸과 마음은 신선한 에너지로 충전될 것을 기대하면서... 고승현 회원의 작품사진을 멋지게 찍었던 비엔날레 스텝 김선희씨의 작품이다. 가위로 어린 호박을 자르고 호박 줄기에 맺혀있는 수액을 붉은 전정가위 손잡이와 함께 찍었다. 적색과 녹색의 대비가 가위와 잘려진 호박 줄기가 간결하고 대범하게 연출되었다. 김선희 “기억과의 연결” 호박덩굴을 보며 주방에서 요리 할 때 호박이 생각났다. 칼이 지나간 자리에 동글동글 맺혀있는 끈끈한 아기자기한 물방울 다시 보고 싶었다. 싱싱한 재료임을 증명하는... 호박의 단면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주위에 칼은 없었고 가위만 있었다...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표현되었다. 싱싱한 보다는 잔인함이 느껴진다. 2008년 워크샵 1,2 회 워크숍에 참여하여 사진 촬영을 한 적이 있었다. 접해 보지 않은 워크숍이라 매우 흥미진진했다. 이번에는 스텝으로써 참여 했는데 충분히 즐기지 못해 아쉬웠다. 하지만 자연을 이용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떻게 자연물을 이용하는지 눈으로 확인하며 체험했다. 야투 워크숍에 참여함으로써 머릿속에 존재하는 기억을 끄집어 낼 수도 있고 주어진 제한된 같은 공간 안에서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느끼며 어떻게 표현하는지 알 수 있는 기회여서 좋았다. 종이로 하는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이 아니라 열려진 공간에서 하는 브레인스토밍... 야투워크숍이라는 명칭보다는 자연에 대한 브레인스토밍으로 다가온다. 나는 슬라이드 쇼를 진행하면서 먼저 작가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사진이 넘어 가면서 진짜 궁금할 때만 작가의 이름을 묻도록 하였다. 선입견 없이 작품을 보기를 바라는 마음과 이 모든 것이 자연의 소산으로서 함께 공유하기를 원해서였다. 아울러 이름을 묻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호응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 김용익 선생의 작품은 참가한 모든 작가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전날 프레젠테이션을 통하여 오래된 미래로서의 인도를 소개하고 거기에서 자신이 받은 인상을 바탕으로 작업한 작품 ‘성배’가 함께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작업이 순수 자연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살다간 그 빈 집은 인간사의 생태를 바라보는 선생의 비판적이면서 따듯한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낯선 언어로 밖에는 이야기 할 수 없는 진정한 자연의 회복에 관해서 그는 이야기 하고 있다. 오래된 미래라는 꼬여진 언어는 쾌적한 삶의 절망을 이야기하며 원시적 삶의 고귀함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어쩌랴 현대인은 현대인의 삶에서 한 발자국도 뒤로 후퇴할 수 없지 않은가? 김용익 선생이 이번 워크숍을 통하여 자연과 인간살이를 균형 있게 바라 볼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한다. 김용익 “경배 Worship” 오래전에 주인이 떠나버려 폐허가 된 어느 집을 찾아들어간다. 이름 모를 잡풀이 무성한, 아니, 제각기 이름이 있으되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야생초가 무성한 마당을 헤치며 마루로 다가간다. 지붕은 내려 앉아 방바닥에 빗물이 흥건하고 가재도구들이 심란하게 흩어져있다. 흙과 먼지투성이의 비닐장판이 애처로운 저 마루에 펼쳐져있는 저것은 누구의 졸업 앨범일까? 이곳은 거룩한 곳... 마루의 처마를 받치고 있는 기둥에 금색 칠을 올린다. 이것이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속도에 밀려 스러져가는 것들에 대한 나의 경배다. 산업 자본주의는 공동체를 해체하여 개인을 고립시켜서 자본주의에 매혹과 동시에 공포를 느끼는 피동적 소비자로 만든다. 공동체가 형성되어있던 장소를 일단 부수고 새롭게 배치한다. 너희들이 우애와 환대를 나누며 오순도순 살았던 공동체의 기억은 잊어라!! 그리고 소비를 즐겨라.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의 노동을 헐값에 내 놓아야만 한다. 망각의 정치학은 우리에게 화려하게, 달콤하게 그리고 겁주며 속삭이다. 예술가는 망각의 정치학에 저항하는 자다. 저항 해야만 하는 자다!! 혹자는 말하리라. 너희 예술가 나부랭이가 아무리 그래봐야 소용없어. 세상은 달라지지 않아.. 그러나, 얘야,.. 무한히 헐값으로 자연과 노동을 착취 할 수 있을 것이란 자본의 환상은 곧 깨어지게 되어있단다. 세상은 달라지게 되어있어. 나는, 우리 예술가들은 자기 스스로도 믿지 않는 전혀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허황된 로맨티스트가 아냐 알겠니? 정확히 말하면 현재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 그러나 미래의 에너지가 되는 것을 꿈꾸는 자들이지. 이 낡은 집, 폐허가 된 집을 경배하는 나의 태도는 현실을 일부러 외면하는 로맨틱한 예술가의 제스처 아니야. 그럼 뭐냐구? 감히 말하건대 우리의 “오래된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라구,,, 자본과 속도의 무한 경쟁 앞에 모든 국민이 무방비로 노출되어있는, 압축 성장의 후유증이 터질 듯 팽배해 있는 한국 사회에서 예술가들이 먼저 앞장서서 꿈을 꾸어 줘야해. 이제 이 치킨 게임을 끝내자구.. 속도의 무한경쟁에서 빠져나오자구. 이제 세상은 곧 바뀔 터이니 미리 준비하자구.. 자발적 실업자가 되고 사회적 망명자가 되자구,, 이제 곧 이 낡은 집은 폐가요 흉물로 스러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소생할 것임을 믿고 나는 준비하는 것이다. 기둥에 금칠을 올려 경배하며 준비하는 것이다. 2010 9.3 오후 4시 37분 공주 원골에서 김용익 야투 워크숍은 본 전시와 맞먹는 중요성을 가지고 운영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으로도 야투 워크숍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도시에 살면서 신자유주의적 시장주의의 야만성에 저항하여 사회적 망명자로 사는 젊은 예술가들과 워크숍이 공유되기를 바란다. 도날드 버그라스는 비엔날레 작품으로 연미산 입구 무덤 옆에 돔형의 작품을 남겼다. 매일 새벽 엔진 톱소리로 동료작가들을 깨우면서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작업하여 마침내 깔끔하게 떨어지는 돔을 완성했다. 생명의 쉼터로서 연미산을 찾는 사람들을 제일 먼저 맞이한다. 야투 워크숍을 통해서 보여준 그의 작업은 의외로 가볍다. ‘역류’라는 제목을 붙인 매주 병 작업에 대해 그는 애착을 보인다. 자연은 그의 말처럼 한계를 설정 할 수 없는 열려진 세계이다. 자연을 지나치게 신성시하면 정작 자연을 잃어버린다. 도날드 버글라스 ‘숲 속 우매(愚昧)’ 이 작품은 그저 내가 숲 속에서 노는 것과 비대칭에서 대칭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역류’ 이 작품은 내가 가장 좋아하며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이것은 워크숍과 금강에 몸담고 있던 우리와 직접 연계된다. 이것은 설치된 것이 아니고 발견된 모습 그대로이다. 플라스틱 병이 이와 같이 급류 속에서 가만히 있기는 매우 드문 일이다. 마치 플라스틱 병이 자신을 산란을 위해 상류로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라 생각하는 것 같다. 나에게 자연은 나무, 돌 그리고 아름다운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쓰레기까지 포함하는 모든 것이다. 만약 카탈로그에 나의 작품 중 하나만 싣게 된다면, 부디 이것을 실어주길 청한다. 제목은 ‘역류’이다. 공허 공허의 신(god)이 우리를 따라왔다 언덕 위로 올라와 침묵으로 대기를 식혔다 말을 않는 것이 말을 하는 더 나은 방식. 모든 숨을 통해 허공 속으로 빠진다 로저는 워크숍 전날 진행했던 야투 프리젠테이션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야 말로 제도화되고 경직된 교육 체계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의 감성의 원형 같은 것이며, 어린이들이 놀이하듯 하는 작업 속에는 단지 어린이의 순진함과 놀이로서의 단순함 뿐 만아니라, 인간의 소중한 본성의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어린아이의 놀이와 닮은 야투의 유희성을 옹호하였다. 로저 티본 ‘생각의 숨결’ 생각은 바람이 부는 대로 조용히 움직이는 구름과 같은 존재이다. 그것은 지나가는 길에 이것저것을 모으며 장애물을 통과하는 강이다. 하지만 생각은 또한 그가 가는 길에 파괴를 남기는 사나운 바람이다. 그것은 분노로 울부짖는 강이다. 그것은 멈추어지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끌어당기고 이완되어야 하는 숨결이다. 생각은 우리의 행동과 내뱉는 말로서 나타난다. 다른 성격과 여러 감정이 겹친 말. 기도. 주문. 불 같은 욕설. 칭찬. 찬송과 노래들. 화려한 말. 조용한 자장가. 진실한 말. 부정직한 말. 퍼지는 루머. 무미건조한 고찰. 흥분된 담론. 죽은 말. 지혜의 말. 생명을 죽이고 살리는 말. 말. 말은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야투의 개념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야투의 자연미술에 대한 개념(사고)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표현하면 이렇다. 나는 피카소와 쟝 미셸 바스키아의 작품을 예로 들고자 한다. –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 시대, 예술적 표현, 그리고 감각을 가졌지만 같은 사고를 가진 각각의 두 거장 예술가. 그들의 작품은 아이의 작품과 매우 비슷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을 어리거나 아이의 작품을 만든다고 취급했던 적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의 작품과 아이의 작품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실천 방법에 있어 차이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의 작품에서 그들의 작품을 분리하는 것은 그들의 세련되고, 창작적인 생각의 본질이다. 아이의 사고는 선천적으로 호기심이 많고, 탐구적이고, 장난스럽고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개방된 사고를 갖고 있고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한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이러한 성향은 미적이고 생각의 창의적 발전의 순수한 단계로 나타난다. 아이에게 세상은 탐험을 위한 놀이터이며, 우연한 발견으로 이어지는 깊은 탐구적 감각에 의해 이끌어진다. 이 상태에서 그들은 그게 단순한 본능인지 아니면 모두에게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성질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학습만을 강조하고 그들의 창조력을 기르는 활동을 무시하는 전통적인 교육 체제에 들어가면, 그들의 삶 내내 지속하는 이와 같은 성향은 사라진다. 어떤 아이들은 나중에 이와 같은 성향을 갖거나 되찾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의 경험과 활동적인 사용으로 인해, 그들은 미적과 창조적 발전이라는 세련된 단계로 접어든다. 이제는 성인이 된 그 아이는 이와 같은 성향의 중요성과 쓸모를 깨닫고 지속적으로 그것을 더 다듬는다. 이러한 것을 통해 그의 창조적 시도의 결과는 미숙한 이에게는 가끔 아이의 미술과 같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은 형상을 갖추고 있지만, 예술가는 세련되고 숙련된 사고를 통해 의식적으로 그의 예술을 아이의 예술과 다르게 만들고자 노력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야투의 작업은 이러한 사고를 통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다른 사고의 성격과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람자들에게 그러한 작업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들은 그 일부만을, 아이의 작업과 다를 바 없다고 볼 것이다. 라샤르드는 워크샵 기간 동안 별다른 작품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내민 메모리스틱에는 여러 점의 작품이 담겨있었다. 넝쿨을 이용한 드로잉 작업과 자신의 몸을 이용한 그림자 작업 그 외에도 아주 다양한 작업을 보여준다. 어느새 이런 작품들을 했단 말인가. 그의 작업을 다 소개 할 수 없는 지면이 아쉽다. 나는 그의 그림자 작업은 단지 손가락으로 가위 바위 보를 하는 듯한 최소한의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 작품이지만 그의 모뉴맨탈한 조각 작품만큼이나 명료하고 깔끔한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맑은 하늘에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과 함께 만들어 낸 가장 선명하지만 소유 할 수 없는 조형물이었다. 산도르 바스 Sandor Vass는 땅에 자신의 등을 밀착시켜 생긴 자국을 보여주고 있다. 솔방울과 솔잎 그리고 나무 가지들의 흔적이 뚜렷하다. 산도르 자신도 별로 본적이 없을 등에 있는 점들과 붉게 새겨진 자연의 한 단면이 너무나 잘 어울린다. 산도르는 이번 비엔날레에서 발로 걸어 자연과 만나고 그 여정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드로잉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 비엔날레에서 그는 온 몸으로 자연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산도르 바스 ‘자연의 흔적’ 자연에서 나온 우리 몸이 그 조물주로부터 멀어지는데 반하여 우리 안에는 자연을 잘 조작하려는 욕구가 있어서 이기적으로 자연의 외관에 점점 큰 상처를 낸다. 최근 우리의 몸에 다양한 문신을 하는 것이 유행인데,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서 자연이 스스로 문신을 하도록 선택권을 넘겨야 한다. 수지 슈렉 Suzy Sureck은 워크숍 기간 중에 두 점의 작품을 했다. 실제 뱀과 뱀과 기가 막히게 닮은 끈을 이용한 작품이 그 하나이고, 다른 작품은 계곡물에 머리카락 적시기 동영상 작품이다. 이응우 회원과 함께 한 이 작품은 두 사람이 긴 머리칼을 풀어 물과 함께 흐르도록 하는 작품이다.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추어 고개를 들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마지막 순간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진지한 몸짓으로 출발하다가 마침내 모두의 웃음을 끌어내는 코믹하면서도 특이한 작품이다. 수지 슈렉은 연미산으로 돌아와 워크숍에서의 여운을 살려 손수 만든 자신의 키보다 큰 대나무 붓으로 한지위에 여러 점의 드로잉 작품을 제작했다. 붓의 움직임이 마치 자신의 머리칼에 기억된 계곡물의 흐름을 담아낸 것 같다. Bamboo drawings -plants marks with Sumi ink on paper - Suzy Sureck 2010 ‘Snakes’ ‘Hair washing performance’ by Suzy Sureck and Eungwoo Ri 에이조 사카타 Eizo Sakata 도 동영상과 설치작업을 병행했다. 나는 그의 짧은 동영상 작업에 더 마음이 간다. 솔방울에 솔잎을 끼워 세워 놓은 작품이다. 연약한 솔잎이 위태롭게 버티며 흔들리다가 일순간 불어온 바람에 의해 화면에서 사라지는 작품이다. 카랜은 이번 야투워크샵에 참가한 작가들 중에서 가장 산뜻한 작업을 보여주었다. 그가 행한 나뭇잎과 손금을 이용한 일련의 시리이즈 작업은 다른 설명이 없이 그 자체로 설득력 있는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담쟁이 잎과 같은 방향으로 손을 늘어뜨리고 있는 작업도 마음에 와 닫는 작업이다. 머리카락과 마른 풀 잎을 대비시키는 작업도 애써 작품 같은 모양새를 취하지 않아서 좋다. 그냥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과 인간의 몸이 만나고 있다. 카렌 메이처-네스타 "생명의 선을 따라서“ 우리가 원골에서 야투 워크숍에 참가했을 때, 그것은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자연의 기분을 느끼고 스스로를 쉬게 하는 최고의 기회라 생각되었다. 나는 다른 작업 방법을 찾았으며, 걸어 다니고 지나다니는 길에서 발견한 자연물을 가지고 노는 것이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받았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개인적인 경험으로서의 이러한 연결성은 자연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많지 않은 도시에서보다, 원골에서 훨씬 더 뚜렷했다. 그것은 환상적인 경험이었으며 나는 다시 이 워크숍에 참가하는 기회를 갖고 싶다. 토니 쉘러는 자신이 발견한 거미줄을 찍었다. 비엔날레 작업 기간 내내 말없이 성실하게 작업하는 작가이다. 깊은 신뢰감을 주는 웃음과 함께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이런 작업은 처음이었으리라. 나중에 그의 이미지 파일을 정리하다가 꽃 위에 앉은 나비를 찍은 작품 몇 점을 추가로 발견했다. 아마도 토니는 이 사진들을 작품이라고 생각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숨겨둔 다른 사람의 보물을 훔쳐오듯이 소중하게 나의 컴퓨터로 옮겨 놓았다. 토니 쉘러 '거미줄' 내가 생각하기에 거미줄은 지적 네트워크(인터넷) 또는 자연의 세포 구조이다. 이것은 우리의 생명과 지구의 생존을 위해서 중요하며, 긍정적인 네트워크가 없는 삶은 불운하다. <P style="MARGIN-LEFT: 14pt" class=바탕
72 no image Where is your mind? 2
소나무
5481 2011-02-12
3. 야투 워크숍 현장 그동안 비오는 날이 많아 작업 일정이 바빠진 작가들이 워크숍 참가를 썩 내켜하지 않는 것 같다. 조금은 우려되는 기분을 안고 원골 자연미술의 집으로 향했다. 빈손과 빈 마음으로 자연을 만나는 것이 야투 워크숍이니 만큼 진행자인 나 자신부터 마음을 비우고 편안한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원골 자연미술의 집에 도착하여 자연미술 워크숍의 진행 일정에 대한 간단한 안내를 마치고 1층 넓은 홀에 짐을 풀었다. 너무 더운 날씨 탓에 모두들 쉽게 몸을 움직일 태세가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이 필요하다. 마음이 움직여야 몸도 움직이는 법 자연이 그들을 불러낼 때 까지 기다릴 따름이다. 그동안 야투 사계절 워크숍은 나에게 자연과 만날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해주곤 했다. 평상시 혼자서 숲속을 걸을 때와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을 갖게 되고 자연은 사계절 워크샵을 통해서 그 속내를 털어 놓듯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았던가? 119회째 맞이하는 2010년 9월 3일 야투 여름 워크숍에서도 주옥같은 작품을 만나게 되리라. 이번 비엔날레 워크숍의 마수걸이 작품은 가나 작가인 패트릭 타고 턱슨으로 부터 나왔다. 안 마당의 빨래줄 바지랑대의 엑스자 구조에 몸을 일치시키는 역동적인 제스처로 이루어진 퍼포먼스는 폴란드에서 온 파웰과의 공동 작업으로 이어졌다. 그는 이번 워크샵을 통하여 가장 활동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나는 자연미술의 집을 나와 고승현 회원과 농로를 따라 산 쪽으로 오르면서 작업을 했다. 빗물을 따라 흘러내린 작은 돌들이 눈에 들어왔다. 길을 따라 오르면서 몇 작품을 할 수 있었다. 기분 좋은 출발이다. 계속해서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 큰 느티나무를 지나 산을 향해 좀 더 오르면서 몇 점의 간단한 작업을 더 하였다. 전원길 자연미술의 집으로 돌아 왔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아직도 실내에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간의 작업으로 힘든 몸을 누이고 쉬는 작가들도 있다. 김용익 선생님이 나를 찾는다. 마을 빈집을 찾아서 작업했는데 사진 촬영을 해달라고 하신다. 사람이 떠난 빈 집으로 선생님을 따라 들어섰다. 마당은 풀과 쓰레기로 뒤엉켜있다. 마루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다. 그리고 얼른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황금색 기둥이다. 썰렁한 빈집 기둥에 황금기둥이라니. 참으로 극단적인 대비가 아닐 수 없다. 뭔가 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생각하기 보다는 지금은 그냥 보기만 하는 것이 좋다. 점심을 먹고 난 뒤에도 작열하는 태양은 기세가 꺾일 줄 모른다. 작가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는다. 부르릉 붕붕 오토바이 소리가 난다. 허 강 회원이 멋진 오토바이를 타고 대문을 들어선다. 뒤를 이어 안케멜린은 자전거를 끌고 나타난다. 이응우 회원으로 부터 작품사진을 찍어 달라는 연통이다. 카메라를 챙겨서 허강 회원과 함께 느티나무 옆 개울가로 갔다. 맑은 물이 흐르는 야트막한 냇가에 작은 돌부터 큰 돌을 쭉 설치해놓았다. 사진을 찍으려니 허강 회원이 말했다. “이 선생도 돌처럼 앉아 있으면 좋을 것 같구먼. 웃통이라도 벗고 앉지 그래”. “아니 벗으려면 다 벗어야지” 이응우 회원이 답했다. 아 좋다! 돌들과 마주앉은 명상적 분위기이다. 점점 작아지는 돌들을 통하여 자연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하다. 아니 돌들을 따라 자연으로 부터 나와 앉아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또 다른 작품은 나무 틈에 작은 가지들을 꺽어 끼워놓는 작업이었다. 이 응 우 녹색막대기들(The green sticks) 색깔은 형태와 함께 시각요소 중 가장 매력적인 것이다. 아주 선명한 녹색을 띠고 있는 나뭇가지는 다른 색깔의 나뭇가지 보다 선명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더욱 생명력이 있어 보인다. 가늘고 긴 연한 녹색의 나뭇가지를 활용하여 다른 색깔을 띠고 있는 나무의 그루터기로부터 굵은 줄기의 비좁은 틈, 줄기와 줄기의 사이에 끼워 놓는 이 작업은 시각적으로 매우 단순하며 작품의 이면에도 복잡한 내용을 담는 모호성을 띠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단순하다고 할 만큼 쉽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녹색 막대기들(The green sticks)"은 관자에게 생명과 자연사물에 대한 순수한 만남과 자연의 생명으로부터 오는 맑은 소리와 같은 여운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기를 기대한다. 선을 따라서(Follow the line) 더운 여름 크고 작은 바위와 조약돌 사이의 깨끗한 모래톱 위로 흐르는 계곡의 맑은 물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한 매혹적인 대상이다. 그 맑고 깨끗한 자연의 품에서 우리는 문득 자연에 동화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문득 자연의 일부인 내 자신도 이곳 물가에 여기 저기 놓인 돌들과 다름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나의 작업 “선을 따라서(Follow the line)"은 의도적으로 재배치한 돌들과 나 자신이 동일한 대상으로 보이기를 희망한다. 아치(Arch) 자연의 재료들은 너무 다양한 형태, 색채, 크기 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특성에 따라 그들을 활용하는 것은 자연미술의 묘미인 동시에 큰 장점이 된다. 가늘고 긴 어린 나뭇가지를 구부려 땅에 꽂는 단순한 행위로 아름다운 녹색의 아치를 만들어 볼 수 있다. 물론 이 아치는 잡초들 사이에 있으므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나 가늘고 곧은 나뭇가지의 적당한 유연성과 긴장감은 시각적인 호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도심의 콘크리트 숲속에 거대한 녹색의 아치를 환경조형물로 세운다면 삭막한 도시의 공간을 다소나마 유연하게해줄 수 있을 것이다. 계곡에서 내려와 등나무 그늘 아래 앉았다. 따가운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커다란 바위 위에 떨어진다. 동그란 예쁜 햇살 무늬가 돌 위에 새겨진다. 나는 주변에 있는 동그란 나뭇잎을 따서 눈부신 햇살 위에 올려놓았다. 전원길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서 유승구 작가가 작업하고 있다. 원골 자연미술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본 정원 한가운데 눈에 띄게 자라 오른 풀 그 풀이 그에게 말을 건넨 듯 싶다. 밤송이를 가져다 풀 주변에 성을 쌓듯이 올려놓는다. 이름 모를 그 풀은 이제 밤성의 성주가 되어 더욱 의젓하다. 야투 워크숍에서 작가는 때로 자연과 자연의 만남을 중개한다. 자신의 눈에 들어온 자연물과 그 주변에서 발견한 다른 자연물과의 만남을 주선함으로서 자연 스스로 자연을 이야기 하게 한다. 유 승 구 "Body Guard" 무성한 잡초들 사이에 자라는 길쭉길쭉한 또 다른 잡초 군락이 눈에 띄었습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우리의 시선은 마냥 관대하고 평등한 것만은 아닌 거 같습니다. 이름 모를 야생초이지만 그들의 우아함은 단연 돋보였고 그들을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야투 워크샵에 처음 참가하였습니다. 워크샵 진행에 대한 사전정보를 듣기는 했지만 왠지 소규모라도 뭔가 작업을 하고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원골에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원골의 편안한 느낌과 여러 작가들과의 만남은 바로 그런 부담감을 떨쳐버리게 하였습니다. 여러 재미있는 시도들이 연출되었고 즐겁고 유쾌한 창작의 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른 미술 작업을 할 때는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가 지속될 경우가 많은 데 야투 워크샵은 긴장이 풀려 완전히 이완된 일종의 휴식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편안한 상태에서의 결과물들은 작가들의 비엔날레 본 작업에 못지않은 신선함이 있었습니다. 원골 외딴집에서 부산스런 움직임들이 느껴진다. 송미애 작가는 녹음용 마이크를 들고 숲속의 벌레소리 바람소리를 채집하고 있다. 뉴질랜드에서 온 도널드는 웃옷을 벗은 채 풀 섶 뒤에서 떨어진 나무 가지를 꺾고 있다. 잠시 뒤 이종협 회원이 고현희 회원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포도와 덩킨 도넛을 사가지고 왔다. 작가들이 샘물가에 앉아 포도를 씻어 맛있게 먹는다. 조금 이르다 싶지만 바비큐를 위한 불을 피운다. 야투 워크숍은 역시 바비큐와 함께해야 제격이 아니던가. 고승현 회원을 따라 밭에 들깨 잎을 따러 몇몇 작가들이 올라간다. 고기가 구어지고 술이 돌고 모두들 기분이 좋아진다. 모두들 먹느라 정신없는 가운데 카메룬에서 온 네리우스 패트릭은 가위를 들었다. 로저의 머리카락이 잘려나간다. 아프리칸 헤어스타일이 필립핀 아티스트의 머리에 옮겨진다. 자리를 실내로 옮겼다. 김용익 교수의 인상적인 프레젠테이션과 함께 밤은 깊어갔다. 이방 저방 잠자리를 배정한다. 코고는 사람은 한방에 모여서 코골이 합창으로 밤을 지새울 것이다. 늦게 까지 남아서 이야기하던 이응우 회원과 김용익 교수 그리고 리샤르드와 나는 수건를 들고 느티나무아래 개울가로 갔다. 옷을 벗고 몸을 담그기 까지는 약간 썰렁한 한기를 느꼈지만 조금 있으니 아주 시원하고 좋았다.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그렇게 물안개 피어오르는 개울에서 선녀(?)들 처럼 목욕을 했다. 야투 워크샵 2일차다. 아직 어젯밤 술을 많이 마신 탓으로 몸이 무거운 사람이 많다. 누가 시작 했는지 줄지어 서서 앞사람의 어깨를 주물러 준다. 보기 좋은 인간의 풍경이 아닌가. 이제는 많이 친근해진 작가들 끼리 앉아 생각을 나누고 마음을 나눈다. 대전서 온 이민우 선생 다른 작가들이 힘을 합해서 바람에 부러진 나뭇가지를 줄로 묶는다. 이렇게 해서 부러진 나무에 물이 오를까 싶지만 생명을 위한 인간의 배려가 담긴 액션이다. 원골에 익숙해지자 아쉽게도 떠나야 한다. 비엔날레 작업 일정을 고려하여 조금 일찍 철수하기로 했다. 모두들 원골을 떠나려고 채비를 하고 있는데 안케 멜린이 자전거에 비디오카메라를 장착한다. 비디오카메라를 자전거 뒷자리에 설치하고 자연미술의 집 문을 나선다.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허강 회원은 리샤르드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먼저 떠났다. 아무래도 허강 회원 보다는 리샤르드가 오토바이를 모는 것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문단속과 뒷마무리를 이응우 회원에게 맡기고 연미산으로 향했다. 오는 길에 산도르 바스, 카랜, 로저, 패트릭과 차안에서 야투 워크숍에 대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부분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번 야투 워크숍을 통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야투워크숍의 의미를 발견하였다. 자연과 더불어 생각하고 자연이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이는 동안에 충만한 자유로움을 누렸다. 예술가로서의 이름을 얻으려는 욕망 혹은 상업적 성과에 대한 기대에서 벗어나 작업 할 수 있다는 것이 야투 워크숍의 갖는 중요한 가치라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자유로운 마음이 아니고서는 단지 나뭇잎을 따서 손바닥위에 올려놓는 카랜의 작업이나 나뭇가지를 휘어 땅에 꼽아놓는 이응우회원의 담백한 작업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술가의 자유는 이렇듯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작업까지도 진심으로 할 수 있을 때 얻어지는 것을 아닐 런지. 연미산 현장으로 돌아온 작가들은 다시 자신의 비엔날레 작업으로의 복귀를 위한 마음가짐을 추스른다. 야투 워크숍에서의 작업이나 보다 구체적인 작품으로 남는 작업을 할 때나 동일하게 유지되어야 할 점은 자연이 어떻게 실질적으로 작업 안에서 작용하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단지 자연물을 이용한 조각적 설치작품은 일반적인 작업과의 차이점을 확보할 수가 없다. 야투 워크숍 작품들은 자연물이 자연이라는 원상태를 유지하면서 미술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자연을 품은 채 미술로서 작용하는 작품들을 통해서 자연의 생명력을 전달 받는다. 이런 작품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오면서도 자연의 유기적인 구조를 작품에 포함하기 때문에 볼 때마다 다른 감흥을 준다.
71 no image Where is your mind? 1
소나무
4273 2011-02-12
2010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야투워크숍 기획 후기 전원길 1. 들어가는 말 2010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야투(yatoo) 워크숍은 지난 2008년 비엔날레에 이어 두 번째로 열렸다. 야투의 자연미술운동의 정신을 비엔날레 참여작가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기획된 야투 워크숍은 비엔날레 작품 제작기간 중인 2010년 9월 2일 부터 3일 까지 이틀 동안 공주시 신풍면 동원리 원골에 위치하고 있는 야투 자연미술의 집에서 열렸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고 작가들로서는 처음 참가하는 워크숍이었지만 자연 속에서 오랫동안 작업해온 작가들답게 다양하고 멋진 작업들을 보여주었다. 애초에는 좋은 작품만을 골라 비엔날레 본 전시 작품을 소개하는 작가들의 페이지에 함께 편집하려고 계획했었다. 하지만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 중 어느 것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모두 훌륭한 작업들이었고, 자연미술 워크숍이 갖는 중요성을 고려 할 때 보다 비중있게 다루어야 한다는 의견을 반영하여 워크숍에 참가했던 모든 작가들의 작품을 작가들이 보내온 글과 함께 소개하게 되었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단지 야투워크숍 작품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워크숍 기간 중 제기된 야투의 작업에 대한 비판적 의견에 대한 반론을 통해서 야투작업의 성격을 보다 잘 이해 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틀간의 야투 워크숍을 스케치 하듯이 소개함으로서 그 분위기를 전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함에 있어서 작가들이 보내온 작품에 대한 설명과 야투워크숍에 대한 소감문을 함께 보여줄 것이다. 작가들의 육성과 함께 그들의 작품이 더욱 생생하게 전달되리라 믿는다. 2. 야투의 방법론에 대한 비판적 의견 야투 워크숍을 시작하기 전날 나는 외국 참여 작가들에게 야투의 정신과 그 방법론에 관하여 소개하였다. 그 소개한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야투회원들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인간의 예술 의지가 균형을 이루는 지점을 찾으려고 노력해왔다. 즉 자연을 가급적 변형시키지 않으면서 인간의 생각을 자연과 더불어 표현해내는 것이 야투 작업의 중요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야투의 작가들은 작업을 위한 아무런 준비 없이 빈 몸과 빈 마음으로 자연 안으로 들어가 자연이 그들에게 던져주는 영감을 바탕으로 작업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작업은 자신의 몸을 이용한 절제된 행위로 이루어지거나, 자연 현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자연물로부터 작업을 시작할 때가 많다. 야투의 작품들이 최소한의 행위나 설치 그리고 간단한 드로잉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현장에서 그 작품을 실제로 본 사람이 많지는 않다. 쌓고, 연결하고, 긋고, 끼우고, 던지는 등의 일상의 기본적인 행위가 자연 속에서 곧 바로 미술작업의 방법이 되는 야투의 작업들은 작품을 보는 사람들을 수동적인 감상자의 위치에 머물게 하기보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적극적인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나는 한국의 한 지방 소도시에서 자생적으로 출발한 야투의 자연미술운동이 다른 나라에서의 이루어지고 있는 자연 속에서의 미술(대지미술 land art, 환경미술environmental art, 에코아트eco-art, 장소특정적 미술site specific art 등)과는 그 궤도를 달리하는 새로운 시도였음을 주장하였다. 나의 주장에 대하여 몇몇 작가들의 반론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야투의 작업이 영국의 앤디 골드워시의 자연물을 이용한 작업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를 물었다. 앤디 골드워시는 인공적인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발견한 자연물만을 이용하여 오랫동안 작업해 오고 있는 작가이다. 야투의 작가들이 때로 자연물이 아닌 드로잉 도구나 부분적으로 인공적인 도구를 사용하는데 비하여 그는 거의 맨손으로 자연물만을 이용하여 작업한다. 작품에 대한 놀라운 집중력과 완성도 그리고 잘 촬영된 사진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어 1980년대 이후 유럽에서 많은 반향을 일으킨 작가이다. 나 역시 처음 앤디 골드워시의 작품을 접하고(1980년대 후반쯤) 야투작업과의 유사성에 놀라고 그 아름다운 작업에 감탄한 적이 있다. 앤디 골드워시도 한국에서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작가들이 자연 속에서 자연물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는 줄은 몰랐겠지만 1980년 초 야투 회원 중 그 누구도 앤디 골드워시의 작품을 본적이 없었다. 당시 영국과 한국에서 기존의 대지미술과는 다른 양상의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앤디 골드워시의 작품과 야투의 작품에는 비슷한 시기에 자연물을 이용한 많은 작품을 남기기 시작했다는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대하는 대도에 있어서나 결과물에서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많지 않은 것 같다. 앤디 골드워시는 자연 속에서 발견한 자연물 오브제를 자신인 원하는 결과에 부합하도록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비록 자연물을 가공해서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는 자연물을 재료로서 다룬다. 마치 물감대신 나뭇잎을 사용하여 회화적인 표현을 하고 나무나 돌 혹은 얼음 등을 사용하여 조각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야투 작가들은 자연을 재료로만 사용하지 않는다. 회원들 간에 차이는 있으나 그들은 순수 자연을 미술 상태로 바꾸어 놓는 법을 알고 있다. 대부분의 작업들은 시각적이기 보다는 개념적이다. 명료한 의미전달 보다는 시적인 직관성을 반영한다. 야투의 작품은 자연으로 부터 분리 되지 않은 채 미술과 연결 되어있거나 투명하게 겹쳐있음으로 현장의 시각적 풍경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손이나 몸을 자연과의 접촉 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미술적 의미를 발생시킨다. 앤디 골드워시의 작품이 시간에 의해 사라진다면 야투의 어떤 작품들은 작가가 손을 치우거나 자리를 뜨는 순간 작품이 사라지는 행위적 양상을 보인 작품이 많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야투 작업에 대해 핵심을 건드리는 두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야투 작업들은 어린아이들의 유희로 보인다. 깊은 생각과 노력 없이 아주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작업들이다. 야투의 작업들은 마치 단순한 일지 형태로 느껴지며 보다 큰 규모의 진지한 작업을 위한 하나의 출발은 될 수 있을 것 같다. 단지 사진작업 혹은 자료처럼 보일뿐 진지한 자연미술작업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작가의 의견이 아무런 편견 없이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그대로 이야기 해준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말들은 기존의 전통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단점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현대미술을 전혀 새로운 영역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강점이기도하다. 1980년대 초반 야투의 젊은 회원들은 어떻게 해야 미술계에 진출해서 성공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술대학에서 배운 바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작업하였다. 한 회원의 회고에 의하면 “이런 것도 미술이 될 수 있을 까 생각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처음에는 반신반의 하면서 자연 속에서 작업하였고 처음에는 자연을 작품을 놓는 장소로서 자연을 대하다가 점차로 자연을 작품 속에 받아들이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무엇을 만든다든가, 무엇을 보여준다든가 하는 태도에서 벗어나면서 점차 자연과의 교감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두면서 작업하였다. 또한 자신이 계획한 무엇인가를 자연에 던지기(throw into nature) 보다는 자연이 우리에게 던져주는(given from nature) 것을 가지고 작업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위치 전환은 단순히 마음가짐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작업의 양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전 까지는 자연이 하나의 작업을 위한 도구였다면 이제는 작업 속에서 작용하는 실체가 되었다. 인간의 행위는 가능한 한 절제하는 대신 자연 그 자체가 드러나도록 하였다. 야투의 작업은 이제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에 이르렀다. 야투회원들은 아무도 이끌어 주는 이가 없는 길에 서서 자연으로 부터 전해져 오는 영감을 따라 움직이며 작업하였고 마침내 자연과 미술의 접점에 서게 된 것이다. 이렇듯 야투의 작업들은 자연과 더불어 표현하는 자신들의 방법을 획득함에 있어서 일련의 진화적 과정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작가로서 분명히 인식하는 터 위에서 작업한것이지 어린아이들의 놀이와 같은 단발적인 차원에서 행한 것이 아니다. 야투의 작업에서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몸짓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장점이지 폄하할 내용은 아니다. 작가의 수공적 노력의 결과를 탐색한다면 야투의 작품에서는 잡히는 것이 없을 때가 많다. 그러나 인간의 작위적 미술행위가 모두 빠져나간 마지막 순간에 작가가 지시하는 자연을 볼 수 있다면 작품 속에서 작용하는 살아있는 자연을 만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관자의 시선이 완전히 작품을 빠져나가는 것은 아니다. 간단한 드로잉이나 설치 혹은 행위와 같은 작가의 표현 장치 없이는 그 자연과의 만남은 예술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이 되고 만다. 야투의 작업들이 보다 본격적인 작업을 위한 출발로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는 작품으로서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일 게다. 나는 그가 공예적 완성도만을 예술적 가치로 삼는 작가가 아니라면 하기 힘든 말을 했다는 생각까지 든다. 야투의 작업에도 좋은 작업과 그렇지 못한 작업이 있다. 그러나 작가 스스로 그 작품을 받아들인다면 그 자체로서 독립된 작품이다. 나는 야투 워크숍이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야투회원들이 익명으로 작업했던 것은 아니지만 각자의 작업이 자신으로 부터 나온 것이 라기 보다는 자연의 소산이라는 공동의 이해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개인의 존재 가치가 극대화 되고 각자의 사적 이야기에 함몰되어있는 현대 예술가들의 제작 태도와는 구별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특히 1980년대 초중반 야투의 자연미술 방법론이 형성될 무렵 이러한 태도가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었음을 본인은 야투 현장의 경험을 통해서 기억하고 있다. 모든 인류의 보편적 삶의 터전인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예술적 만남을 아름다운 합창으로 들려 줄 수 있는 자기 해방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야투 사계절 연구회 작업들은 현장에서 바로 사라진다. 사진이 아니고서는 그 작품을 만날 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로 사진은 현실보다 더 명료하게 작가의 의도를 전달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은 얼마나 고마운 매체인가? 사진자료는 작품이 될 수 없다는 생각도 이 시대의 확장된 미술의 개념 속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다. 구체적으로 남는 오리지널만이 작품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다양한 면면을 표현하는 예술의 가능성은 상당히 제한될 것이다.
70 ‘자연미술 그 숨쉬는 미술로서의 가능성을 위하여’ 2010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실내전 ‘자연의 위치’
전원길
7463 2011-02-12
I. 2010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2006년 비엔날레의 특별전 ‘동물이라는 자연’에 이어 다시 실내전을 기획하였다. 2008년 비엔날레 당시 전시장 상황이 여의치 못해 야외전만을 진행했으나 2009년 연미산자연미술공원 입구에 건립된 금강국제자연미술센터에서 본 비엔날레의 실내전을 다시 열게 되었다. 전시 구성면에서 공모를 통해 이루어지는 야외전과 달리 실내전은 책임 기획자에 의해 전시 컨셉이 정해지고 이에 따라 작가들이 선정되었다. 금년 비엔날레는 야외전과 실내전이 동시에 열림으로써 자연과 더불어 작업하는 자연미술의 다양한 양상들을 볼 수 있는 비엔날레가 되었다.자연의 위치/ Where is Nature? 라는 제목으로 열린 실내전에는 국내작가 12인, 외국작가 2인이 참가하고 있다. 영상, 설치, 사진, 음향, 드로잉, 그리고 작업의 과정이 기록된 사진과 텍스트 등 현대미술의 다양한 표현 방법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내용에 있어서도 자연에 대한 제각기 다른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전시 기획자로서 본인은 초대작가들이 그동안 보여준 작품을 통해서 자연과 미술이 어떻게 생생하게 관계를 맺어나가고 있는가에 주목하였다. 미술 작품 중에 자연과 관련을 맺지 않은 작품은 없다고 해도 과언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선정된 작가들은 자연이 작품 속에서 물질로서 혹은 개념적으로 실질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자연과 미술이 작품 속에서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지 혹은 서로를 어떻게 포함하고 있으며 어떻게 서로를 보여 주고 있는지 한 작품씩 살펴볼 것이다. 그런 다음 자연미술은 자연물을 이용하여 제작되고 자연 속에 설치되는 미술이라는 다분히 폐쇄적 정의로는 그 성격을 분명하게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할 것이다. 아울러 자연미술이 그 독특한 성격을 가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미술로서 인간성이 충분하게 발휘되는 가운데 자연과의 조화로운 동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자연미술은 자본에 예속된 이 시대 미술을 해방시켜줄 유일한 미술로서 그동안 그 가능성을 야투野投사계절연구회를 통해 실험해 왔음을 알리겠다. 마지막으로 작품 속에 숨쉬는 자연의 존재 여부가 자연미술의 새로운 미적 판단의 준거 틀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점과 이를 토대로 기존의 미술과의 개념적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II. 권오열- 자연과의 존재론적 만남 권오열/ 낯선 숲/ 디지털C프린트/ 76.8cm × 76.8cm × 8pieces/ 2007-2010 권오열의 작업은 한 마디로 자연은 자연대로 보여줄 것을 다 보여주고, 사진(작가)은 사진(작가)이 본 것을 아무런 미적 꾸밈없이 할 수 있는 한 정직하게 보여준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진은 너무나 정직해서 오히려 그것이 사진임을 잊어버리게 한다. 여백이나 배경이 사라진 그의 사진들은 나뭇잎으로만 가득 차 있고 우리의 몸을 자연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으로 이동시킨다. 마치 잭슨 폴록의 올오버 페인팅(all over painting)이 전해 주는 존재론적 각성처럼 그의 사진은 아름답다든지 잘 찍었다든지 하는 생각을 없애버리고 그냥 그것과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만을 하게 한다. 나는 그가 자연의 유기적 관계와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연결시켜 생각하는 방식으로 그의 작품을 읽고 싶지 않다. 그가 한 장의 사진을 얻기 위해서 벌이는 힘겨운 과정 또한 나의 주요 관심사는 아니다. 다만 권오열이 렌즈 안에 가득 찬 나무잎 혹은 풀잎과 딱 맞닥뜨렸을 그 순간의 느낌에 깊이 공감하며 자연의 숲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이종협- 자라나는 드로잉 이종협/그림자드로잉/ 150x300cm/ 오동나무, 가죽나무, 수성색연필, 썸머셋 롤지/2010 이종협의 드로잉은 식물의 자람을 따른다. 시간을 두고 이루어지는 그의 드로잉은 식물이 커감에 따라 변화하는 그림자의 형태를 종이 위에 옮기는 작업이다. 그의 드로잉은 일기처럼 이어지며 때로 지인들의 메시지도 포함된다. 그가 전에 했던 꽃잎을 직접 프레스에 눌러 찍어내는 작업이 점.차. 사.라.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면 이번 그림자 드로잉은 자.라.나.고 드.러.나.는. 확산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어쨌든 그의 작업은 깔끔한 감각을 드러내면서도 완결형이 아닌 진행형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게 된다. 식물의 그림자 따라 그리기 작업은 자연의 실재 현상을 쫓지만 항상 어긋난다. 그리는 순간 움직이는 빛과 자라는 식물로 인함이다. 따라서 그의 드로잉의 리얼리티는 항상 찰라적이다. 마치 우리가 알고자 하는 진실은 언제나 불확정적이고 영원히 잡히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의 작업은 삶과 자연은 규정되거나 정의될 수 없다는 역설적 리얼리티를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동조- 물의 있음과 없음 유동조/물-행위 & 설치 프로젝트 2004-2014 물이 있으면 “물”이 없고, 물이 없으면 “물”이 있다. / 사진, 텍스트, 돌 유동조의 물 작업은 2004년 안양천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이집트의 아스원 호수를 비롯, 캄보디아와 호주의 호수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앞으로 그는 페루의 티티카카 호, 중국의 동정호, 미국의 미시건호 등 2014년까지 총12개국 12개의 호수에서 ‘물’을 던지는 작업을 할 예정이다. ‘물’이라고 새겨진 돌을 호수에 던지는 그의 작업은 지구상의 물이 말라 버릴 수 있다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바다같이 넓은 호수가 말라버리면 호수 바닥에 가라앉은 ‘물’이라고 쓰인 돌을 발견하게 되겠지만 아마도 그 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호수의 크기에 비할 바 없는 아주 작은 돌 하나를 던짐으로써 그는 호수 전체에는 물론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미래의 어떤 시간과 상황까지도 작업 안으로 끌어들인다. 유동조의 물 작업은 아주 간단한 행위를 통해서 막대한 자연과 그 내용을 담아내는 멋진 작업이다. 산도르 바스- 발로 그리는 드로잉 산도르 바스(형가리)/평화를 위한 순례/ 도보길54km/ 비디오,GPS/ 2010 산돌르 바스 Sandor Vass(헝가리)의 GPS드로잉은 연미산 인근 지역 54km 구간에서 이루어졌다. ‘자연과 평화’라는 주제로 열린 본 비엔날레의 주제에서 비롯한 그의 작업은 몸은 하나인데 머리는 두 개인 샴쌍둥이를 통해 한반도의 분단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본인이 그린 지도상의 드로잉대로 위성항법장치 GPS의 도움을 받아 3주간에 걸쳐서 직접 걸었으며 그 여정을 사진과 비디오로 기록하였다. 작업을 하며 걷는 동안 한국의 농부들과 만나고 아름다운 저수지를 발견하기도 하였으며 저녁이면 하루 동안 움직인 행로를 지도상에 표시하고 영상자료를 편집하는 한편 다음 날 지나가야 할 길을 점검했다. 산도르의 작업은 하루가 다르게 그 면모를 일신하는 다른 작가들의 작업과는 달리 아무런 가시적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법으로 4주간 진행됐다. 그는 ‘그린다’는 미술의 기본적인 것은 물론이고 자연과 만나는 자연미술의 방식에 있어서도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우리의 시점을 저 높은 대기권 밖으로 이동시킨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다시 한국의 작은 도시 공주의 한적한 전원 풍경으로 우리를 이끌고 거기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두 마음을 품은 인간의 모습, 그리고 그 두 마음의 욕심이 충돌하면 갈등이 싹트고 마침내 싸움이 나고 그 상처는 오래 간다는 이야기 말이다. 전원길- 나를 울리는 당신 전원길/ 나를 울리는 당신/ 227x182cm /전동밸브, 근접센서, 물, 우레탄호수, 캔버스, 아연판, 흙, 배추씨/ 2010 전원길의 눈물 시리즈는 2006년부터 시작된다. 연미산의 마르지 않는 유일한 샘으로부터 공급되는 물이 작가의 신체 사이즈를 반영한 철제 조형물 내부로 주입되어 눈물로 흘러내리는 작업 이 후 네 번째 작업이다. 이번 작업은 실내로 들어오면서 사뭇 다른 면모를 보여 철제 조형물로 이뤄졌던 눈물의 주체가 평면 회화의 기본 재료인 캔버스로 옮겨진다. 산 너머 마을로부터 연결된 지하수는 사람들이 캔버스에 다가서는 순간 두 줄기 눈물이 되어 흐르며, 흘러내린 눈물은 캔버스 아래 설치된 작은 화단에 뿌려진 씨앗을 자라게 하여 마침내 Nature & Peace라는 글씨로 드러난다. 물은 땅 속에서 올라와 파이프를 따라 캔버스 위를 흐르고 다시 땅으로 돌아간다. 작품은 자연과 인간의 만남의 접점이다. 접점의 순간 단순한 물은 인간의 감정을 담은 눈물이 된다. 전원길은 자연과 대응하는 인간의 감정을 마음의 창이랄 수 있는 두 눈을 통해 순수 자연인 물을 진정성의 상징인 눈물로 치환해 낸다. 송미애/ 유승구- 낮선 소리 야생의 소리 송미애.유승구/ 어느덧 잊혀진/ 나무토막, 피아노 부품, 사운드/ 2010 송미애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함께 작업한 유승구는 조각가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무엇을 가능하게 했을까? 그들은 들을 수 없었던 소리를 찾아내어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들이 찾아낸 소리는 피아노 현에 담겨있으며 그것은 화목으로나 쓰일 버려진 나무토막들 위에 놓여 있다. 나무토막과 이 소리는 어쩐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쌓여진 나무더미는 자연의 파편들이다. 아니 그것은 자연이라기보다는 화목으로 불리는 것이 자연스럽다.(사실 그 나무들은 전시가 끝나면 화목으로 쓰일 것들이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피아노의 현판은 시각적 혹은 물질로서의 오브제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두드리면 여전히 소리를 내는 이 이상한 악기는 예전에는 들을 수 없었던 소리를 찾기 위해 정교하게 어긋나도록 조율되었으며 이로부터 발생하는 낯선 소리들로 그들은 야생의 음악을 만들었다. 백남준이 피아노를 도끼로 부수면서 그 피아노의 몸의 소리를 듣고자 했다면 이들은 피아노 안의 쓰지 않던 근육들을 작동시킨다.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낯선 소리를 찾아내어 가공되지 않은 생생한 자연음으로 되돌려주는 것이다. 이 생生소리는 음 자체이며 존재 자체로서 아름다운 생명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문순우- 예술가들의 선배 올챙이 문순우/Cantata, 봄날은 간다/ 영상, 사운드 설치/ 자연물/ 2010 강원도 올챙이가 안성 문순우의 작업실로 모셔져 왔다. 적당히 자라기를 기다려 오선지가 그려진 수조에 넣었다. 높은음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 그리고 오선이 그려져 있을 뿐 음표는 없다. 올챙이가 움직이면 그것이 음표가 되고 악보가 된다. 움직이는 올챙이를 따라 눈도 같이 움직이고 오선지를 오르내리다 보면 긴 음악이 끝이 난다. 전시장으로 옮겨진 수조 속에는 지난 여름 자신들을 간질이던 올챙이의 몸짓을 기억하는 수초들만 남았을 뿐, 오선지를 오르내리던 올챙이들은 모두 개구리가 되어 떠났다. 그리고 다시 밤이면 밤마다 작업실 주변에 모여들어 전혀 다른 형태의 음악을 시작한다. 올챙이 시절 오선지에 그렸던 자신들의 음악을 밤새 연주하고 노래한다. 결코 올챙이 시절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악보는 인간의 음악을 대변하는 강력한 상징물이자 법칙이다. 그러나 그 위를 움직이는 올챙이들은 그저 움직이고 헤엄칠 뿐이다. 작가 문순우가 이 작업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무엇일가? 외형적으로는 오선지가 새겨진 수조 안에 올챙이를 초대했지만 사실 그가 미술가로서 행한 행위는 올챙이와 오선지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인간의 예술 형식을 자연 속에 담가 투영해보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재즈 마니아이고 오디오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컬렉션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의 올챙이 작업은 어쩌면 그가 아는 모든 음악적 지식의 함축된 표명이며, 오랫동안 사진, 회화, 드로잉 그리고 설치등 미술 전 분야에 걸쳐 엄청난 열정과 집중력을 보여준 작가로서 미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미술은 수조 속의 오선지처럼 자연과는 무관하며, 자연을 모방할 수도 따를 수도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영역 속에서나 유효한 것이라고 말이다. 카린 반 더 몰렌- 자연의 상실과 회복 카린 반 더 몰렌(네델란드) / 연결된 패턴/ 나무껍질, 컵, 핀/ 2010 네델란드의 컵과 접시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전통문양을 이용한 작품이다. 카린은 죽은 나무의 껍질을 떼내어 철망에 붙인 다음 진주색을 입힌 둥근 머리 실핀을 이용해 작업하였다. 핀을 하나씩 꼽아 만든 문양은 진주색으로 빛나는 둥근 점들로 이어져 마침내 선명한 식물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나무껍질의 표면에서 3-4cm정도 떠보이는 문양은 마치 현실을 벗어난 환상적 이미지처럼 가볍고도 아름답다. 그녀가 단지 공예적 관점에서 무늬를 만들었다면 이 작업은 별 흥미를 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언제부터인가 자연과 자주 몸으로 만나지 않아도 될 만큼 사회적 역할 분담이 이루어질 즈음부터 그녀의 조상들, 아니 인류의 조상들은 자연의 이미지를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옴으로써 자연과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고 한다. 특히 네델란드의 여인들은 가장 친근히 여기는 식물의 형태를 패턴화하여 자신들이 자주 사용하는 그릇에 그려 넣었다는 것이다. ‘이미지를 통한 자연과의 관계 유지’라는 그녀의 추리는 자연과 인간이 맺어온 필수불가결한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의 어릴 적 추억은 대부분 자연과 함께 남아 있다. 소라를 귀에 대고 듣던 어릴 적 기억을 그리워하며 만든 대형 소라 작업과 아울러 이 작업은 자연을 향한 인간의 그리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김도명- 초록 물고기 김도명/초록 물고기/ 종이, 영상 설치/ 2010 김도명의 작업은 수작업으로 수조를 만들고 그 위에 영상을 통해 인생사의 한 토막을 담아내고 있다. 그의 손작업은 골판지를 점점 크게, 점점 작게 자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포장재로서의 기본 쓰임에서 변용되어 하나의 그릇으로 바뀐 공간 안에 물을 담고 개구리밥이라고 불리는 작은 수초들과 풀잎들을 담는다. 종이와 물의 만남은 부적절한 만남이다. 비록 방수 처리가 돼 있다고는 하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뭇 염려스러운 긴장감을 갖게 한다. 이 긴장감은 물과 수초 위를 헤엄치는 두 마리 물고기의 어긋난 인연이 마침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상의 흐름 내내 함께 한다. 그의 작업은 원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 자연현상을 재현해내는 영상 작업과 손을 이용한 인간의 기본 조형 방식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종이는 처음에는 탄탄한 구조를 유지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형태도 색도 변한다. 나는 작가 김도명이 꽤 오랫동안 종이 작업을 지속하는 이유가 종이가 갖는 이 불완전한 재료적 특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너무 짧지도 너무 길지도 않은 종이 작품의 변화 과정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요소인가? 이번 비엔날레 작업에서 김도명이 보여주고 있는 물고기 영상 작업은 그가 구성한 두 마리 물고기의 이야기와 아울러 시간성을 전제로 한 영상 매체, 그리고 느리지만 인간의 관찰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종이의 수명과의 조합이 주는 그 구조적 관계성으로 인하여 더욱 흥미롭다. 유지숙- 10년의 자화상 유지숙/10 Years Self-portrait/ 단채널 비디오, 라이트박스/ 1999.7.1-2009.7.1 유지숙의 10년간의 자고 깬 얼굴 사진 찍기는 이미 여러 차례 전시된 바 있다. 내가 처음 본 것은 2002년, 그러니까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3년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처음 본 느낌은 ‘후련하다’였다. 인간은 내일이라는 문을 열어야 내일을 알 수 있는 제한된 조건 속에서 살아간다. 나는 철이 들었다고 생각되는 어느 시점부터 인생은 통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다. 과거 현재 미래의 개념이 없는 그냥 통시적 개념의 삶 말이다. 당시 유지숙의 작품은 10년 프로젝트 중 겨우 3년을 지나고 있었지만 그 작품은 이미 온전한 작품 전체를 보여주고 있다. 10년이라는 정해진 끝이 있었지만 이미 그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가져다줄 감흥을 미리 다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통시적 삶의 상징적 모델로서 나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즉 삶은 다 살아서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프로젝트를 대하는 태도에 의해서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이미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후련한 프로젝트를 이제 여기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에서 보기 원하는 것은 단지 그녀의 프로젝트가 갖는 시간 개념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몸도 자연이다’라는 생각을 보여주고 싶었다. 유지숙은 자연으로서의 몸, 특히 자신의 얼굴을 대함에 있어서 가장 자연적인 시점, 즉 잠에서 깨어난 단지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겨우 작동하는 그 시간을 택하고 있다. 그녀는 그야말로 추하게도 느껴질 수 있는 무작위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연이라는 완벽한 아름다움의 일부로 자신을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정장직- 8개의 막대기(8괘)가 펼치는 만인 만형의 세계 정장직/자연위에 올린 행운의 픽토그램/ LED. digital print. PVC/ 40 x 40 x 15cm (5 pieces) 정장직은 동양의 자연관을 반영하는 8괘에서 모티브를 얻어 작업을 시작한다. 막대형 추상 형태를 기본으로 한 그의 작업의 관심은 만인만형萬人萬形의 얼굴에 집중되고 있다. 얼굴은 그 사람의 삶의 결과이며 가능성이기도 하다. 무표정한 직선들의 조합을 통해 단순 간결하지만 온갖 표정을 가진 인간의 얼굴을 그려낼 수 있다. 본 비엔날레에 출품된 ‘얼굴’은 金,木,水,火,土의 특성을 드러내는 이미지를 배경으로 제작되었다. LED 조명 박스로 제작된 그의 작업은 얼굴로 대변되는 인간의 삶과 자연의 5가지 요소로 대변되는 자연과의 관계를 시도하고 있다. 인간의 운명이 자연 속에서 형성된다는 동양의 운명론과도 관계를 갖고 있는 듯하다. 사실 그의 막대그림은 흔히 팔자八字라고 불리는 인간의 운명론을 형상화하기 위한 8괘에서 출발하고 있지 않은가? 자연을 인간과 대응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타고난 시간과 장소가 가져다줄 조건적 흐름에 순응해야 한다는 자연에 대한 겸허한 생각이 깔려있는 동양의 사상이 아니고서는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는 동양의 세계관을 중요한 축으로 삼고 있는 정장직의 작업이 본 전시의 주제인 자연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리라 생각한다. 김주연-마음 남기기 김주연/ 잡초/12개의 잡초 화분 / 2010 김주연의 잡초 작업은 일견 싱거운 작업이다. 갖가지 잡초들이 심겨져 있는 화분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다는 것 외에는 작가로서의 어떤 제작 행위도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 해 봄직했으나 막상 하지 않은 아니 너무나 평범해서 할 수 없었던 작업을 김주연은 이번 전시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김주연은 자연을 작품 안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미술을 자연 속으로 되돌려 보내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하다. 이렇듯 자연과 미술, 일상 사이에 놓인 그녀의 잡초 작업은 누구라도 선뜻 미술 작업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나는 김주연이 그동안 보여준 일련의 작업, 즉 분명한 작업 컨셉으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던 생태 작업들의 흐름 속에서 이 작품을 받아들이며 작가와 함께 휴식의 심정, 비움의 심정을 갖게 된다. 그녀의 작품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미술에 대한 갖가지 선입견을 버리고, 작가가 풀을 들여다보고 선택하고 자신의 집으로 옮겨와 물을 주고 보살핀 간단치 않았을 그 과정을 생각하며 그녀의 마음을 읽어 본다면 정녕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자연 혹은 일상 그 자체는 미술이 아니다. 일상의 오브제가 작품이 될 수 있는 미술사적 맥락을 따르더라도 여전히 미술은 인간의 어떤 것이 작용하는 순간에 작품으로서 존재한다. 나는 ‘잡초 화분’이 미술로서 존재하는 것은 현란한 이론이 아니라 작가의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을 위한 미술적 장치 이를테면 기술적 흔적이나 손맛을 드러내기 위한 최소한의 드로잉 혹은 다른 어떤 것과의 개념적 관계 같은 것이 모두 배재된 상태에서 보이는 것은 작가의 마음뿐이다. 잡초를 바라보는 작가의 마음이 거기에 있다. 고승현- 서랍속의 정보와 생명, 그리고 아름다움 고승현/정보.생명/ 도서목록카드함, 씨앗들/ 2010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도서관 도서목록카드가 담긴 서랍이 있다. 여기에 담긴 자료들은 인간의 지식이 담겨있는 책의 정보로서 마치 식물의 유전자 정보를 담고 있는 씨앗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가지런히 정리된 자료들 위에 각종 씨들을 담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서랍들을 열어 그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인간과 자연의 대화를 보고 듣는다. 예술가는 어느 순간 운명처럼 예술적 영감과 만난다. 고승현의 이 작업의 아이디어는 버려지는 도서목록카드 보관함과 만나는 그 순간에 떠올랐을 것이다. 그가 그 보관함을 작품의 오브제로 받아들인 것은 예술가로서의 본능적 판단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서랍장은 생명의 정보를 담고 있는 씨앗의 잠재적 의미를 최대한 이끌어 낼 수 있는 장소로서 안성맞춤한 명쾌한 오브제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설치 작업들이 그 미술 오브제가 어떻게 놓이는가 혹은 다른 오브제나 공간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작품으로서의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처럼 고승현의 작업에서 어딘가에 보관되어 파종시기를 기다려야 하는 각종 씨앗들과 도서목록카드서랍은 기능상, 의미상 절묘한 만남을 이룬다. 서랍 속에 가득 찬 종이카드들은 적절히 씨앗의 습도를 조절해 줄 수도 있고 이름표를 붙이면 씨앗을 구분하기도 수월하다. 그 만남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오히려 단순해 보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조용한 만남이 전해주는 의미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집은 온갖 야생화와 나무들로 가득하다.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고 탐스런 과실이 열리는 정원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씨앗은 곧 자연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가능태이면서 이미 씨앗 자체가 아름다움이요 생명이다. 예술가로서 작품 속에 담아내야 할 아름다움을 그는 심각한 미술적 장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서랍장을 이용한 작품 속에 정성들여 채집한 씨들을 담아 놓은 것이다. 이인희- 밀실로부터 출발하는 유토피아적 공간 이인희/ 수면공간Sleep Space/생선비늘과 혼합재료, 테이블과 의장 등/가변크기 설치/2010 이인희는 물고기 비늘로 작업한다. 물고기의 외형을 감싸고 있는 비늘을 떼어내어 다시 작.품. 물.고.기.의 피부로 이식하는 것이 그의 작업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나는 그녀가 왜 물고기 비늘을 가지고 작업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사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녀가 보여주는 물고기의 리얼리티에 대한 더블 트릭이 흥미롭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인희의 작품을 볼 때 ‘물고기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물고기가 아니다. 여기서 한 번의 트릭(눈속임)이 발생한다. 하지만 다시 사람들은 그것이 그려진 것이 아니고 ‘진짜 물고기 비늘’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여기서 또 한 번의 트릭이 발생한다. 그의 작품은 대상의 이미테이션 과정에서 ‘비늘’이라는 대상 오브제가 작업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실재와 모방 사이에 일종의 혼돈감을 주지만 동시에 작품과 그 모방 대상 사이에 일종의 공유 통로를 만든다. 이것은 사실주의 미술이 갖는 생래적 한계점 즉, 잘 묘사된 그림은 훌륭한 눈속임에 불과해지는 한계를 비켜가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인희의 이번 작품은 단지 위에서 지적한 내용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탁자 위의 물고기들 앞에는 거울이 놓여 있다. 거울에는 구름이 그려져 있다. 더러는 고기비늘로 덥혀 있고 연속 무늬의 천으로 씌워져 있는 것들도 있다. 반으로 잘려져 마치 벽으로 들어가거나 나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몇 마리는 의자에도 올려져있다. 이 초현실적인 분위기는 단번에 우리의 의식의 한 켠에 저장된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우리 앞에 나타난 현실로 나타난다. 마치 언젠가 본 듯한 그래서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III. 실내전 참여작가들의 작품은 자연과의 접촉 방식과 표현 방법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자연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반영하고 있지만 전시장에서는 그 자료를 통해서만 자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들이 있다. 예를 들면 유동조, 권오열, 산도르 바스, 문순우 등의 작품들이다. 다음으로는 전시 작품 안에서 자연의 요소가 직접 작품을 구성하는 작업으로 김주연, 이종협, 전원길 등의 작품이다. 그 외에 자연 혹은 몸과의 만남을 영상작업으로 보여준 김도명, 유지숙의 작업이 있고, 고승현과 카린 반 더 몰렌 그리고 이인희의 작업은 자연물을 직접 사용하되 자연과 인간세계의 관계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장 회화적인 작업을 보여주고 있는 정장직은 동양의 세계관을 통해 바라본 자연의 기본 요소를 개념적으로 작업에 접목시켰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 중에는 자연미술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기보다는 현대미술가로서 동시대 미술의 실험적 방법론을 통해 자신의 작품세계를 열어온 작가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본 전시는 이러한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내재된 자연과의 교감의 방식에 주목하였으며 그것은 자연미술이 보다 다양한 현대미술의 제방식과 접목함으로써 오히려 자연미술의 미학적 기반을 풍부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시도는 그동안 은연중에 유지해 왔던 자연미술의 성격 즉, 자연물을 이용한 미술이라는 단순한 정의에서 벗어나 폭넓은 방법론적 전개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1980년대 야투의 자연미술연구회를 통하여 발전된 자연미술의 방법론은 순수 자연과의 만남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그 내재된 형식과 정신은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현대미술의 모든 매체를 통해서 실현 가능하다. 자연미술이라는 이름하에 제작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연성과 인간성이 미술을 통해 균형을 이루는 지점을 찾아 움직이는 미술은 부지중에라도 그 작품이 자연미술 안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이 함께하는 자연미술, 그 공존의 미학의 필연성은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는 우리 삶의 현실에서 찾아진다. 우리의 삶이 자연과의 불가분의 관계에서 맞물려 돌아가고 있고 우리가 사이버 세계의 아바타가 아닌 이상 자연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인간의 삶의 터전이며 생명의 원천인 자연과 직접 관계하는 자연미술의 가치를 미적 판단의 한 축으로 제시함으로써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조화롭게 풀어가기 위한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의 사적 경험이 자본과 결탁하여 신화화되는가 하면 노동의 가치가 미술의 가치로 전도되는 작금의 미술계의 흐름 속에서 자연과 함께 숨쉬는 미술로써 다시금 미술의 보편성과 진정성을 회복하게 한다면 자연미술은 그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희망이 아니겠는가? 2010비엔날레 기간 중에 열린 자연미술워크숍은 최소한의 조건 속에서 최대한의 미적 해방감을 맛볼 수 있는 프로그램임을 참여 작가 모두가 경험하였다. 30년간 사계절 워크숍을 진행해온 야투의 작가들의 작품과 그 차이점을 찾기가 힘든 이들의 작업들을 통해서 한편으로는 ‘아, 이것은 전문적인 작업이 아니고 다분히 유희적이고 아마추어적인 가벼운 미술이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보라. 야투의 사계절연구회에서 보여주었던 작업들, 예를 들면 강희준의 ‘풀잎 사람’이나 고승현의 ‘작은 갯소라로 그린 작은 원들’ 혹은 필자의 ‘거북이’ 작업과 같이 자연에 대한 미술적 접근을 통해 자연의 어떠함을 분명하게 보여주면서도 시적 메타포를 가지고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 기억되는 작업 말이다. 이런 작업들은 비록 순간적인 발상으로 아주 짧은 시간에 완성된 작품이지만 대규모 프로젝트와 동일한 감흥을 줄 수 있다. 미술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들을 다 갖추었음에도 외견상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거나 무심한 행동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야투적이라고 할 만한 방법들이 각각의 예술가들에 의해서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고 할 때 반드시 그것이 자연 속에 있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단지 자연물로만 제작되어야 하고 일정기간 존재하다가 자연 속으로 사라지는 한시적(temporary) 미술일 때만이 자연미술이 가능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자연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캠페인적 성격을 직접 드러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미술이 황폐화해 가는 전지구의 환경문제와 맞물리면서 이슈적 공감대를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사회적 명분이 강한 미술은 창의성을 상실하고 대의명분을 위한 도구가 되어 생명력을 상실하기 쉽다. 따라서 자연미술은 그 내재된 형식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하는 형식적 제안을 해야 하고 그것을 소화해서 사회의 어떤 형태 혹은 흐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역할로 남겨 두어야 한다. 나는 이미 2007년 프레비엔날레 야투워크숍을 통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여기서 나는 다소 수정된 질문을 다시 던지고자 한다. 1. 자연물을 사용하면 자연미술이 되고 인공물을 사용하면 자연미술이 될 수 없는가? 2. 자연 그 자체를 지목하는 것으로도 자연미술이 되는가? 3. 자연미술은 자연 속에서만 가능한가? 4. 자연미술은 기존의 미술과 다른 미적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자연미술의 정당성은 인간의 미술일 때 찾아진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연과 인간의 만남의 가능성은 자연의 자연성과 연결될 수 있는 인간의 자연성의 발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인간성의 외현적 발현이 이성적 사고와 판단의 형식을 취하지만 그것이 예술이라는 통로를 지날 때에는 고양된 어떤 상태로 점프한다. 이 상태는 자연의 자연성과 접촉하기 위한 상태로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의 자연성(이것은 인간의 창의성 혹은 고양된 예술의지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의 미술의지가 균형을 이루며 함께 작동하는 자연미술은 인간성의 진정한 발휘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연을 그 자체로 두는 것이 아니며, 자연물을 사용하든 안 하든 혹은 자연 속에서 이루어지든 아니든 그런 것들이 자연미술의 전제 조건이 되지 않는다. 다만 거기에 자연의 어떤 요소가 어떻게 미술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지를 볼 것이다. 자연미술이 자연 속에서 탄생하여 그 개념을 부여 받았으나 이 세상 어디에든 있을 수 있고, 어떤 미술이든 그것이 열린 구조를 가지고 자연과 함께 숨쉬는 미술이라면 자연미술로 칭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연은 그 한계를 설정할 수 없는 이 세계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제 자연은 미술의 시각적 모방 대상으로 혹은 예술적 영감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단순히 재료로서 작품에 참여하거나 단지 작품이 놓이는 장소로서의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자연은 작품 제작을 위한 영감의 원천으로서뿐만 아니라 작가의 예술 의지와 함께 작품 속으로 들어와 직접 미술을 작동시키며 살아서 숨쉰다. 이제 나는 자연미술이 기존 미술과의 관계에서 대응 전선을 형성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한다. 자연미술이 기존의 현대미술 내부에서 분리작용을 일으켜 독립적 개념을 형성한다면 다원주의적 가치 판단으로 인해 피아가 없는 작금의 현대미술에 지각 변동을 일으켜서 예술 전반에 활력을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미술이라는 개념을 보다 분명하게 하려는 이 글을 마치면서 나는 미술의 역사 속 가장 멀리에서 그러나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자연미술을 본다. 그것은 고대 원시인들이 그렸다는 동굴벽화이다. 동굴 속 표면의 바위틈과 요철이 만들어낸 선들과 명암들 속에서 생동감 넘치는 들소들의 이미지를 단숨에 잡아내었던 그들의 그림이야말로 자연과 미술, 그리고 그들의 삶이 하나로 어우러진 빛나는 자연미술이었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발견된 그 벽화는 생생한 자연의 표면을 그림 속에 포함하고 있어 자연과 연결된 열린 미술, 숨쉬는 미술로서의 가능성을 역사 저편으로부터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69 no image 2010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을 마치며
전원길
3653 2011-02-12
16개국에서 42명이 참가하여 한 달간의 작품 제작과 3달간의 전시행사를 가졌던 4번째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종료되었다. 이제 곧 참여 작가와 진행부의 열정이 담긴 카탈로그가 발간되면 금년 비엔날레는 마무리된다. 비엔날레를 돌아보면 아쉬웠던 점이 많다. 향후 자연미술운동이 취해야할 정신과 방법 등에 대한 생각도 다시 하게 된 의미 있는 비엔날레이기도 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하여 야투의 자연미술운동이 어떻게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발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몇 가지 생각들을 정리 해보고자 한다. 아울러 비엔날레를 진행하면서 직간접적으로 들었던 애정 어린 조언과 충고의 말들을 남겨 다음 비엔날레의 발전적 모색의 지침으로 삼고자 한다. 1. 자연미술운동과 비엔날레 사실 야투가 추구해온 자연미술은 비엔날레라는 대규모 국제미술제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자타의 비판을 접해왔다. 그러나 지역의 작은 미술운동이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비엔날레라는 공식적인 행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은 아직 새로운 미술운동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에는 그 토양이 척박하다. 따라서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와 같은 활동의 장을 스스로 마련하지 못했다면 그 발전의 기반을 다질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적은 예산으로 전문적인 기획과 운영이 필요한 국제적인 행사를 진행해야한다면 회원들에게 과중한 일이 될 것이다. 이젠 비엔날레 운영에 관한 기술적인 해결점을 찾거나 과감한 변화를 시도해야 할 시점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로서 스스로 활동의 장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작업 이외에 많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집중력 저하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국내외 초대작가들에게는 작품발표의 기회를 마련해 주면서 정작 자신들은 활동의 영역을 확장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같은 울타리 안에만 머물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일이다. 물론 그동안 자연미술이라는 일관된 정신을 유지해온 비엔날레의 특성과 비엔날레와 연계된 자연미술운동의 효율적인 추진을 생각할 때 일각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당장 외부전문가를 영입하여 전시를 진행해야한다는 생각은 섣부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부분에 관해서 심도 있는 고민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젠 매 해 행사를 치루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보다 긴 시간적 텀을 놓고 행사의 각 부분을 전문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어떻게 갖추어나가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2. 지역사회와 비엔날레 야투의 자연미술운동이 공주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해 왔고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역시 공주시의 지원을 받아 개최되고 있다. 미술계에서는 공주하면 야투와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떠올릴 만큼 지역 문화의 아이콘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장 두드러진 자연미술운동을 펼치고 있는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로 인하여 공주는 자연미술의 메카로서 그 이름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공주시민들도 이제 지역의 중요한 미술행사로 알고 물심양면의 도움을 아끼지 않고 있다. 작가들의 작업에 필요한 일이 있으면 소방서에서도 도움을 주시고 공주시내에 위치한 연춘당 한의원에서는 무료로 행사기간 중에 외국작가들의 치료를 맡아 주기도 한다. 공주식물원조경의 이영섭 사장은 지난 비엔날레에 이어서 올해도 자신의 농장을 작가들을 위한 숙소로 제공해주고 있다. 지역 학교의 미술교사와 학생들도 작가들의 작품제작을 위해 자원봉사자로 기꺼이 도움을 주었고, 행사도우미를 자처하여 음식준비를 해주시는 고마운 시민들도 있다. 연미산에 오르는 시민들은 공원에 설치된 작품들을 훼손하지 않고 있는 자리에서 시간에 따라 사라지는 과정을 보고 즐기는 문화시민의 성숙한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지역사회와 긴밀한 협조관계가 없이는 비엔날레와 같은 국제적인 미술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루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갖는 그 미술사적 의미와 가치를 지자체가 공유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하나의 미술행사에 예산을 지원한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해서 세계미술계에 의미있는 족적을 남기고 있는 자연미술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의미에 공감하고 함께 발전을 적극 모색하는 기회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3.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성격 그동안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야투가 지향해 왔던 소박하면서도 자연과의 보다 긴밀한 관계를 추구해왔던 본연의 모습 보다는 외형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조각적 작품들이 비엔날레의 이미지를 대변 해왔다. 이로 인하여 관심 있는 분들의 지적도 지적이거니와 기획팀 역시 아쉬운 감을 지울 수 없었다. 지난 2008년 3회 비엔날레와 금년 비엔날레를 통하여 시도된 참여작가 야투 워크샵과 그 결과전을 통해 야투가 지향해왔던 자연미술의 정신을 비엔날레 속에 부분적으로나마 담아내려는 노력을 해왔지만 만족스러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거듭되는 비엔날레를 통하여 자연미술 미학을 보다 분명하게 천명할 수 있는 발전적 연구가 이루어졌음을 나는 소중하게 생각한다. 자연미술은 자연과 미술이 균형을 이루면서 살아있는 자연이 시각적으로든 개념적으로든 작품 속에서 생생하게 작용하는 미술을 일컫는다. 이것은 규모와 방법 매체에 한정 되지 않고 동시대미술의 다양한 양상들로 부터 성취 될 수 있다. 다만 80년대 야투의 사계절연구회에서 보여주었던 방식 즉 인간의 조형적 의지가 최소화 되는 가운데 자연과 만나는 접점에서 이루어지는 야투적 자연미술의 방법론은 자연미술의 방법론적 전형을 예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자연미술은 자연의 풀잎과 이슬과 같은 소소한 부분을 통해 실현되는 최소한의 미술로 부터 시작하여 시각적으로 혹은 시간적으로 전 우주를 아우르는 광대한 미술로 최대화되는데 까지 그 스펙트럼을 풍부하게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현 미술계에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자연으로 부터 생명을 공급 받고 살아가는 인간의 미술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시로서의 특성을 살려나가야 하며 단지 장소나 재료의 문제에 국한된 관점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4. 국제적 네트워크와 새로운 운영 시스템의 필요성 야투는 야투라는 말의 뉘앙스만큼이나 외로운 길을 걸어왔다. 앞으로도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야투에 대한 국내미술계의 무관심과 무시에 대하여 투덜거릴 일도 아니다. 서구미술을 답습해온 한국미술계는 자생적인 미술운동을 전개 했던 경험이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한국 미술계는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보고 그것을 세계 미술계의 한 축으로 작용하게 하는 짜릿한 경험을 한 적이 없으므로 그런 것에 관심 갖기가 어렵다. 야투는 이러한 한국미술계의 현실 속에서 자생적 미술운동으로서 세계인들에게 자연에 대한 새로운 접근 가능성을 논하게 해주는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미술 같지 않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한번 경험한 사람은 자연을 다르게 볼 수 있는 태도를 갖게 한다는 데서 나는 야투의 자연미술운동의 가치를 보는 것이다. 나는 야투의 자연미술운동이 보다 전략적인 판단을 해야 할 시점에 왔다고 생각한다. 일체의 대외적인 행사기획을 접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미술을 더욱 심화시켜나가던가(나는 이런 태도가 오히려 ‘야투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만약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자신들이 경험한 것을 보다 적극적으로 알리고 나눔으로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미술을 접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메신저 역할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동안 국제적인 교류를 통하여 쌓은 네트워크를 보다 실질적인 관계로 발전시켜 단발적인 만남이 아니라 지속적인 교류의 차원으로 발전시켜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울러 자연미술이라는 특정한 미술의 미학적 담론을 심화시켜나감으로서 하나의 미술운동이 갖추어야할 추진력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한 방법으로는 자연미술워크샵 프로그램을 오픈하여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서 그동안 관계를 맺어온 많은 작가들이 지속적으로 참여 할 수 있도록 한다든지, 자연미술과 관련한 중요한 이론가 혹은 기획자를 초대하여 그간의 자연미술운동의 성취와 가능성에 관하여 토론 하는 장을 마련하는 일 등 적극적으로 시도해볼 일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일이 이미 개별 작가 혹은 한 미술 그룹을 통해서 시도 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다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미술관이나 연구소와 같은 전문적 기관을 통해서 이루어질 일이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향후 비엔날레의 기획과 운영 역시 지금과는 다른 시스템이 필요 할 것이다. 5.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에 대한 다양한 의견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에 대한 관심에 근거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그중에서 몇 가지는 의미 있는 충고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로는 비엔날레 현장 분위기에 관한 참여 작가의 의견이 있었다. 자연과 함께한다는 기본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생각한다면 도회적인 소란하고 복잡한 분위기보다는 템플스테이에 준하는 조용하고 단정한 분위기 속에서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작가의 숙소와 식당 사무실 실내전시장 그리고 작업 장소가 모여 있는 연미산의 시설 주변을 정리하여 쾌적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필요 할 것이다. 정리 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있는 재료를 정리하고 작품이나 시설물들도 시각적 쾌적성을 고려하여 재배치하면 좋을 것 같다. 다음 비엔날레 때는 숙박을 원골자연미술의 집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자체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렇게 하면 작업과 휴식공간이 분리되어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물리적인 환경 이외에도 현장의 분위기를 보다 명상적이고 진지하게 만들기 위한 일정한 규칙들도 요구된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를테면 비엔날레 캠프내에서는 과도한 성적 접촉을 금한다든지, 지나친 음주와 가무로 작업에 대한 명상적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행위도 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서 부득이한 경우가 있다면 캠프 밖에서 이루어져야한다. 또 한 가지 생각은 야투 회원들과 스텝들이 먼저 자연미술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통한 행동 양식이 몸에 배어있음으로서 방문한 작가들도 현장의 독특한 분위기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내적인 것 뿐 만 아니라 입고 먹고 자고 생활하는 양식에 있어서도 구별되는 방안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두 번째로는 비엔날레 홍보에 관한 것이다. 오히려 외국의 자연미술가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국내 미술계에서는 거의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 반복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비엔날레 평가단의 일원으로 공주를 방문한 심상용 선생은 서울에 자연미술을 적극적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을 주었다. 국내 문화예술 관련 행사와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서울에서 관심을 이끌어 내는 일은 중요한 일임에 분명하다. 전시 혹은 자연미술관련 세미나를 서울서 개최함으로서 자연 보다는 도시문화에 탐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감흥을 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틀린 생각이 아니다. 홍보와 관련하여 비엔날레 홈페이지를 통한 홍보가 활성화 되고 있는 않은 점에 관하여 안타깝게 생각하는 회원이 있었다. 우선은 예산의 확충을 통하여 예술적인 분위기를 살린 홈페이지로의 개편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실시간 업데이트를 통하여 비엔날레의 생생한 현장과 진행 내용이 전달되어지는 역할과 아울러 참여 작가들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 확대해나가는 네트워킹의 도구로서의 기능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는 야투워크숍의 확산이다. 사계절 연구회를 오픈하여 서울에서 활동하는 도회적인 작가들에게 자연미술의 신선함을 수혈하여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비죤을 갖게 하자는 의견이다. 이 생각은 전술한 비엔날레 홍보와 관련해서도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방안으로서 역시 참여 작가 중의 한 분이 제안하였다. 1990년대 이후 국제자연미술제와 비엔날레가 진행되면서 야투워크숍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만약 서울과 다른 지역으로 부터 젊은 작가들에 의해서 야투 워크숍이 활성화 된다면 그동안 침체되었던 야투사계절 연구회는 새로운 활력을 띄게 될 것이고 다양한 작업을 하는 작가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야투와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국내에서 보다 활기찬 역할을 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네 번째로는 프레비엔날레 운영에 관한 외국작가의 조언으로서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본 비엔날레를 위한 공모와 전시 그리고 작가선정이 프레비엔날레의 중요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프레비엔날레의 공모내용이 카탈로그로 제작되고 비엔날레 참여 작가가 결정되면 이미 다음 해 열리게 될 본 비엔날레의 면모를 미리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정작 본 비엔날레에 대한 기대감이 떨어지게 된다는 의견이다. 그동안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통하여 관계를 맺은 작가들이 수 백명이 넘고 회원들이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심포지엄과 컨퍼런스에 참가하면서 만난 작가들과 기획자들이 적지 않다. 이제는 기존의 인적 데이터를 활용하면서 비엔날레 주제에 적합한 작업을 하는 작가들을 지명 초대하는 방식을 취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하면 작가들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예측 가능한 비엔날레 전시 기획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섯 번째는 야투에 의한 자생적 미술운동을 자연미술이라는 말에 대한 것이다. 그 동안은 자연미술이라는 말을 영어로 그대로 번역하여 Nature Art라고 표기해 왔으나 영어상 Nature Art는 자연물을 이용한 공예적인 미술활동으로 인식되기도 하고 자연물을 이용한 미술체험프로그램과 관련하여 쓰이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미술로서의 정체성을 살리는 의미에서 그냥 소리 나는 대로 Jayeon Misul 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김종길 선생이 이미 제안한 바도 있다. 야투 회원들 간의 논의가 이어지길 바란다. 마지막으로는 총감독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지금까지 총감독은 비엔날레 운영의 상징적 대표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공모방식을 통해 작가가 선정되고 야투회원들이 운영위원이 되고 총괄 본부장과 총감독 그리고 기획팀장이 실행위원이 되어 진행하는 시스템 속에서 총감독이 자신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찾아나가지 않는 한 총감독의 역할은 제한적 일 수밖에 없다. 차기 비엔날레가 공모가 아닌 전시 컨셉에 의해서 작가를 선정하게 된다면 총감독의 역할은 보다 강화 되어야 하고 그 책임 또한 막중해 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총감독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적임자가 그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총감독은 전시 기획을 위한 큐레이터와 어시스턴트를 선정하고 기획팀을 지휘하여 전시 준비뿐만 아니라 전시 중에 이루어져야 하는 도슨트 운영과 교육프로그램 등 비엔날레 전반적인 내용과 분위기를 컨트롤 하는 그야말로 전시 전체를 책임지는 역할을 해내야한다.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전시공간이 확정된 실내공간에서 완성된 작품을 전시하는 방식이 닌 순발력 있게 현장 작업의 요구들을 조절해 나가야하고 지자체 행정기관 및 지역사회의 광범위한 협조와 연계를 필요로 하느니 만큼 현재 운영위원장과 운영위원들의 협조적 역할의 중요성은 다시 말 할 필요가 없다. 이 이외도 섬세하고 정교하게 그동안 비엔날레 운영에 관한 반성과 대안적 비판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관심 있는 많은 분들의 우정 어린 충고와 질책을 기다리는 바이다. 본인은 그동안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총괄 기획팀장과 큐레이터라는 책임을 맡아 총괄본부장 그리고 총감독과 함께 비엔날레의 내용을 만드는 일을 해왔다. 위에 제시한 개선해야 할 많은 부분들은 나의 역량의 한계이기도 하다. 작가로서 이러한 기획과 실행을 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면서도 언제나 부담스러운 역할이었다.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내용을 발전시킬 수 있다면 그것을 좋은 일이다. 하지만 다음을 이어 갈 사람이 없는 가운데 그 일을 계속 한다는 것은 계속적인 발전을 위해서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연미술에 관심을 갖고 참가하려는 젊은 작가나 평론가 혹은 기획자들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 부터라도 명분과 기회를 만들어 이 일을 알리고 만나고 교류하면서 다음을 이야기 할 차세대 자연미술작가 혹은 기획자들을 만나야 할 것이다. 그들이 그동안 야투회원들이 개척한 자연미술이라는 신세계를 활짝 열어 제치고 나가게 되길 바란다.
68 no image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어디로 가야하나?
전원길
4548 2009-08-22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어디로 가야하나? 전원길 / 참여작가, 2008 GNAB 기획총괄팀장 I. 세 번 째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마쳤다. 지난 두 차례의 비엔날레 행사운영을 통하여 얼마만큼 일머리를 터득한 가운데 치러진 행사였지만 아쉬운 점이 많다. 작은 연구모임으로 시작한 야투가 이처럼 큰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한다는 것은 어떤 비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인지 그 목적부터 재점검해야 하는 시기인 것도 같다. 1990년대 국제미술전을 개최할 당시는 주류미술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발표의 장을 만들어 간다는데 의미가 있었고 그것은 그 자체로서 명분이 분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들의 발표와 활동의 장을 확장하는 범위를 넘어서 자연 속에서 작업하는 국내외 자연미술가들의 활동의 장으로서 그 입지를 확인 받고 있는 시점에 와있다. 따라서 지역사회는 물론이고 국내외 미술계에서 거는 기대도 더욱 커지고 있으며 이에 어떻게 부응해야 하며 이와 함께 야투의 비전과 비엔날레의 비전이 어떻게 공조 할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II. 한국 미술계에서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갖는 의미 약속을 한 것도 아니면서도 국내의 비엔날레는 모두 짝수 해에 열린다.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서울미디어시티 그리고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그렇다. 게다가 주변 국가들에서 열리는 상하이비엔날레, 싱가포르비엔날레와 요코하마트리엔날레까지도 지난 2008년에 열렸다. 국내의 중요 미술잡지들이 국내외 비엔날레 소식을 특집으로 다루었지만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광주비엔날레나 다른 비엔날레와 같은 비중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아트인컬쳐에서 관심을 가지고 다루어 준 것이 어쩌면 유일한 리뷰였다. 메이저급 미술행사라기 보다는 지역의 유사 비엔날레 정도로 처리(?)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년 비엔날레에 참가한 독일 작가가 국내 미술잡지에서 한국과 아시아에서 열리는 비엔날레를 소개하는 내용에 왜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빠져있는지 의아해 하면서 나에게 그 내용을 보여 주었다. 그 이유를 딱히 설명하기 어려운 탓에 얼버무리며 상황을 피했지만 한 번쯤은 따져서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본 비엔날레를 기획하고 진행한 기획팀의 일원으로서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가지는 특수성과 국내미술계의 안타까운 한계를 인식하고 있는 필자가 그 불공평함을 주장하여 너절한 느낌을 만들 생각은 없다. 내가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그야말로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갖는 국내미술계에서의 의미이고 자연미술운동의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국제적인 역할에 관한 비전을 어떻게 실현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 3회 째 비엔날레를 마친 후 미래의 비젼을 생각하는데 비엔날레 주최 측이나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는 분들을 위해서 필요한 논의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III.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행사 기간 중에 다녀가신 진지한 관객들 중의 한 분인 아르코 미술관의 백지숙 관장이 모 일간지에 2008년 비엔날레 핫 시즌에 열린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탐방 소감을 올렸다. 나는 ‘지역미술의 재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이 짧은 탐방문 속에 비쳐진 야투와 자연미술비엔날레가 갖는 국내외 미술계에서의 의미를 볼 수 있었다. -전략- “반 나절의 짧은 방문이었지만, 한국 미술계에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나름의 명성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이 비엔날레는 공주를 중심으로 ’80년대부터 활동해온 작가그룹 ‘야투’가 ’90년 이후 지속적으로 기획해온 자연미술제의 연장으로, 굳이 비엔날레라는 이름을 달지 않아도 될 만큼 자기 성격과 입지를 뚜렷이 확보해 왔다. 자기 지역작가가 비엔날레에 몇 명 초대되는가가 지역 언론의 주요 관심사인 한국의 다른 국제비엔날레와 달리, 이 비엔날레는 지역미술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자기 존중감과 끈기 있는 성의, 그리고 제대로 된 열정에 기초하여 현대미술의 개방과 환대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어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작품의 크기나 초대작가의 숫자, 프로그램의 양을 보건대, 예산은 앞에 거론한 대표적인 한국 비엔날레의 몇 십 분의 일도 안 될 것으로 추측된다. 확실히, 공주시는 다른 지자체에 비해서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하략- 나는 백 관장이 본 비엔날레에 대하여 긍정적 평가를 해준 것에 대하여 감사한다. 백 관장이 단 하루 동안의 탐방을 통해 느낀 것이라고 할지라도 한국미술계의 중심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녀의 안목이 분명 그렇게 느낄만한 지점을 확인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말이 아닌 현실적 증거로서 보여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평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야투의 회원으로서 그리고 지난 비엔날레의 집행부에 속했던 한 사람으로서는 앞으로 야투가 목표로 삼고 나가야 할 중요한 지점들을 미리 제시해 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즉 강점으로 보여 지는 것은 더욱 강화하고 부족하지만 가치 있는 부분은 살려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즉 한국미술계에서 야투와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갖는 의미는 아직 미완성으로 보고 싶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비엔날레의 성격과 입지를 분명하게 확보해 나갈 것’ ‘자기의 정체성을 존중하고 초심을 잃지 않고 끈기 있게 성의를 다해 전진할 것’ ‘낭만적 열정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열정으로 방향을 잡아 나갈 것’ ‘현대미술의 다양한 양상들 속에 자연미술의 정신을 녹여내어 그 영역을 확장할 것’ 등의 미래적 방향 제시로 받아들여 심기일전의 지표로 삼는다면 선의의 칭찬을 비엔날레의 체질과 정신을 강화하는 보약으로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백관장의 견해에 기대어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가지는 국내외적 의미와 앞으로의 발전 방향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성격과 입지를 분명하게 확보해 나갈 것. 그야말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야투’의 활동은 재기발랄한 컨셉과 물량주의의 대규모 프로젝트 또는 기민한 홍보역량으로 해서 알려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리석을 만큼 홍보 마인드가 없었고 (필요성은 느끼면서도 여전히 미숙함을 유지하고 있지만) 초창기 야투의 작업들은 소수의 참가자들만이 그 내용을 알고 지나가는 익명의 장소에서 숨어서 작업하듯 하였다. 또한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세우기보다는 자연과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미술적 감흥을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자연스런 감성적 반응에 기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투의 활동이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와 더불어 일정한 입지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그 자생적 독특성과 순수성 그리고 지속성과 역동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자생적 독특성이라고 한다면 한국의 자연미술운동이 서구 개념미술의 방법론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인의 자연에 대한 전통적 정서를 반영하는 즉 자연과의 동행적 삶의 양식을 미술적 방법으로 풀어내면서도 시적이고 유희적인 작업을 순간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을 자연 속에서 발견해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들은 예술가로서 가시적 성과를 전제로 한 것이기 보다는 자연과의 주고 받음의 즐거움에 몰입하는 작업 자체의 목적성이 컸다는 데서 야투작업의 순수성이 유지 되었다고 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결과는 중앙작가들이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작가로서의 성공 사례를 가까이 할 수 없었던 지역의 작가들의 불리한 조건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한 아이러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순수성과 지속성은 관련이 없을 수 없다. 그동안 야투를 거쳐 간 작가들이 많다. 야투에서 보다는 다른 활동을 통해서 어떤 가능성을 생각했다면 야투에 오래 머물 수가 없다. 현재 활동 중인 야투의 주요 멤버들은 그간 활동의 집중도에는 차이가 있겠으나 지속적으로 야투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 이후 국제적인 활동으로 활동의 장을 마련하면서 몇몇 작가들이 새로 합류하기도 했으나 결국 초창기 멤버들의 열정과는 다를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새로운 멤버들의 활동은 한시적이었다. 따라서 ’80년대 중반 자연 속에서 자신들의 작업의 방향을 최초로 확인하면서 자연이 던져주는 영감의 가치를 깊이 느꼈던 작가들로 인하여 야투는 오랜 결속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야투가 창립 이래 28년 동안 역동성을 유지하면서 자연미술의 집 건립을 비롯한 자산의 확대와 국제적인 전시기획을 통한 야투의 활동의 장을 넓혀 올 수 있었던 것은 야투멤버들의 자연미술에 대한 애정과 고승현 회장의 열정이 있었기 때문임을 부인 할 수 없다. 그가 공주지역을 떠나지 않고 끊임없는 창조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야투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음으로 해서 모임을 떠났던 회원들도 다시 복귀하여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러한 야투의 특성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백지숙 관장의 2008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에 대한 소감들을 현실적으로 살려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자기의 정체성을 존중하고 초심을 잃지 않고 끈기 있게 성의를 다해 전진 할 것 야투가 자신의 정체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단지 오래된 그룹이어서도 아니고 국제적인 비엔날레의 주최 단체여서도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미술계의 척박한 토양 속에서 참으로 특별한 과정을 통해서 피어난 소중한 미술운동으로서 향후 그 발전의 가능성을 실현해야 하는 주체로서 가져야하는 자존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투는 순수 미술연구단체로서 출발을 했으며 활동 해왔다. 우리나라의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몇몇 진지한 미술연구모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소그룹 활동을 통해 순수한 연구모임을 하고 있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야투가 가지는 특별함은 그들의 연구 텍스트가 서구 현대미술의 특정한 경향이나 이론서가 아닌 우리 인류의 모든 지식의 원천이 되었던 자연과 더불어 작업하는 길을 택했고 자연을 통해서 미술적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법을 작업으로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소중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나라의 1960-70년대 실험미술의 양상들을 되짚어 볼 때 어쩔 수 없는 학습기 즉 서구의 방법론을 소화하기에도 바쁜 시절을 보냈다. 서구의 미술양상을 흉내 내거나 서양의 미술이론에 근거한 자기적용에 그치는 시절을 보내야했다. 이것은 일찍이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필연적 당위성을 확보하면서 전진해온 서구미술과 마주했을 때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하지만 야투가 단순한 차용과 적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업의 원천을 자연에 둠으로서 인간과 자연이라는 일차적 조건 속에서 작업을 이끌어내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것은 놀라운 소득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을 이미 다른 지면을 통해 당시 야투멤버들이 얼치기작가들로서 이론적 비무장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했다. 그러니 앞으로 이런 일이 또 발생하기는 힘든 일이다. 대부분 실험적인 미술운동은 전통적인 미술에 대응하는 태도를 갖게 마련이고 그러한 태도를 갖추기 위해서는 당대의 시대정신과 미술의 양상을 역사적 맥락 안에서 볼 수 있는 일정한 학습이 이루어져야한다. 하지만 야투의 자연미술 운동은 자연과 맞대면함으로서 그 모든 예속의 절차를 피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야투의 작가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가? 아니다 이젠 자신들의 작업을 되돌아보고 그 의미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는 작업이 안과 밖에서 이루어 져야 한다. 또한 이제 50대에 들어선 작가들로서 자연을 바라보는 달라진 관점을 반영하는 작업이 나와야 하고 자연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는 현 시점에서의 자연과의 새로운 대화도 필요할 것이며 자연의 그 풍부한 질서 속에 내재된 숨겨진 면모를 통해 창의적 상상력이 작용되어야 한다. 아울러 현대미술의 다양한 양상이 적용되는 작업도 가능할 것이다. 다행하게도 야투의 작가들이 개별 작업을 통해 이러한 전진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그야말로 초심을 잃지 않고 끈기 있게 성의를 다해 전진함으로서 과거의 성취를 더욱 빛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3. 제대로 된 열정으로 방향을 잡아 나갈 것 제대로 된 열정이란 무엇일까? 제대로 된 열정이라는 말이 갖는 긍정적 의미의 상대편에는 열정적 행위의 결과가 헛일이 될 수 도 있는 그런 열정도 있다는 말일 것이다. 야투의 열정이 방향을 잃지 않고 정확하게 나갈 길로 전진 하지 않는다면 자칫 자신을 소진 시키는 소모적인 열정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야투는 어디로 전진해야 할까? 특히 많은 정열을 쏟고 있는 비엔날레는 야투의 비전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 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주최자가 바뀌지 않는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한번 기획되고 끝나는 일회적 기획의 다른 비엔날레와는 다르다. 비록 예산은 몇 십분의 일이지만 하기에 따라서는 더욱더 효과적인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 특히 야투가 자연미술운동이라는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출발한 이상 이 목표를 구체적으로 실현 할 수 있는 장으로서 비엔날레를 살려나가야 할 것이다. 1980년대 야투적 방법론을 실험하고 90년대 국제적인 교류를 통해 전시기획역량을 키웠다. 이제 비교적 안정적인 기금을 통해 비엔날레를 개최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야투의 비전에 마침표가 찍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제야 전문적인 자연미술운동의 동력을 확보했고 자연미술의 정신을 보다 풍부하게 발전시켜 세계의 미술인들에게 그 새로운 미술운동의 가능성을 확인시켜나가야 할 것이다. 이제 야투멤버들은 보다 전략적인 결속을 통해서 서로간의 발전을 도모함은 물론이고 국내미술계의 후학들에게도 그 방법론의 미술사적 중요성을 알려나가면서 그 미래적 비전을 새롭게 갱신해 나가야 할 것이다. 4. 현대미술의 다양한 양상들 속에 자연미술의 정신을 녹여내어 그 영역을 확장 할 것 야투의 자연미술운동이 이제는 역 확산을 시도해야한다는 이야기는 본인이 창립비엔날레를 마치고 쓴 글을 통해서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현대미술의 다양한 방법들 사진이나 영상작업 혹은 전통적인 드로잉이나 회화의 영역과도 다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전시를 위한 프로젝트형 작가가 되어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풍부한 창의적 자연성을 다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비엔날레의 실내전의 필요성을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는 백지숙관장의 야투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쓴 긍정적인 평가의 글을 우리 자신의 실제 상태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야투와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아직 미완의 프로젝트이기 하지만 새로운 미술운동으로서 이 시대 인류가 처한 환경적 정신적 상황에 유의미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으며 척박한 한국미술계에서도 더욱 열악한 작은 지역에서 출발한 야투가 오히려 한국미술계에 하나의 희망이 될 만한 가능성을 가지고 꿋꿋한 행진을 계속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Ⅳ. 삼세번의 비엔날레를 마쳤으니 국내에서 자연미술관련 전시운영에 야투만큼 경험을 쌓은 단체나 기획요원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적은 인원과 적은 예산에 예기치 않은 난관이 많이 있었지만 이심전심으로 해야 할 일을 소리 없이 해낼 수 있는 노하우를 쌓았다. 그렇다고 이제 기어를 중립에 놓듯이 힘을 빼고 그냥 가는대로 가서는 머지않아 그 추진력을 잃고 멈추어 서게 될 것이다. 오히려 엔진을 점검하고 보다 강력한 출력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숨 가쁜 노력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벌써부터 제기된 바 있다. “첫째는 그동안 야투의 중요한 활동 중의 하나였던 사계절 연구회의 현재 분위기를 일신하여 보다 실제적인 연구의 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상시 자신이 일하고 거주하는 장소를 중심으로 개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연구회 기간에는 자신의 작업을 공개하고 회원 및 초대된 전문가와 더불어 토론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또한 필요한 분야의 강의를 청해듣는 재충전의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자연에 반응하는 우리의 지성과 감성이 더욱 탄력적인 상태를 유지하게 될 것이고 작업의 폭은 확장될 수 있다. 물론 초대된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프로그램을 통해 공적 사적인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향후 야투가 진행할 다양한 사업의 지원그룹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전략적 효과 또한 중요하다. 둘째는 자연미술 관련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이다. 명실 공히 자연미술의 본산으로서 학술적 연구가치가 있는 자료를 제공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미술 관련 정보를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세계의 중요한 작가들과 기획자 및 미술이론가들을 불러들이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한다. 셋째는 그동안 관계를 맺어온 자연미술가 및 단체들과의 국제적인 네트워킹을 활용하면서 자연미술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해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해외의 자연미술운동의 현장을 방문하여 그들의 움직임을 직접 살펴보고 그들의 연구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확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넷째는 지금 야투가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젊은 작가들이 작업하는 살아있는 작업공간과 대안적 미술 연구 장소로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국제적인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발전된다면 더욱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운영함으로서 자연미술운동에 합류하는 젊은 작가를 맞이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차세대 자연미술 작가가 없으면 야투는 자동 소멸된다. 마지막으로는 자연미술이 지금의 현대미술(Contemporary art)과 불가분의 관계선상에서 이해되는 만큼 다양한 매체와 방법론으로 작업하는 현대미술작가들과 열려진 관계 속에서 교류하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해나가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확장된 태도를 바탕으로 야투만의 자연관과 작업방법론을 강화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도를 통하여 야투는 창립 당시의 정신을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시대적 임무(?)를 실현할 수 있으며 제시한 방안들을 추진하는 과정을 통하여 차기 비엔날레는 그 내용의 무게를 더할 것이다.” 위 글은 2004년 창립비엔날레를 마치고 쓴 글 중의 일부로서 야투에 거는 기대와 바람을 적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4년이 지난 지금 몇 가지는 실현되고 있거나 준비 중이지만 아직도 미흡한 점이 있다. 그중에서도 사계절연구외의 활성화는 여전히 어렵게 느껴진다. 비엔날레와 프레비엔날레로 이어지는 행사로 인하여 아무래도 관심의 순위에서 밀리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 중에도 2008년 비엔날레 기간 중에 야투워크숍을 통해 외국작가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야투의 사계절 연구회의 분위기를 함께 맛볼 수 있었던 것은 소중한 실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외부의 작가들이나 일반인들을 함께 초청하여 행사를 진행하는 방식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제시했던 자료의 수집과 관리도 여전히 답보 상태이다. 오프라인의 자료 뿐 아니라 온라인상의 자연미술관련 사이트와 작가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여 비엔날레 홈페이지에 연결하는 일 그리고 회원들 각자가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야투 홈페이지를 통해서 연결하는 작업도 시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이야기한 국제적인 네트워킹 역시 본격적인 가동이 되고 있지 않다. 국제적인 자연미술심포지엄에 참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야투를 소개하고 그 후속적인 프로젝트를 만들어내는 노력을 통하여 상호적인 유대와 교류가 지속적으로 일어나도록 함과 동시에 보다 진지한 전문작가나 이론가들과의 교류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2006년 방문했던 그린뮤지엄의 샘 바우어, 영국의 클라이브 아담스 그리고 이론연구자로 참가했던 젊은 평론가 김종길과의 만남은 소중하다고 할 수 있으며 2008년 비엔날레의 발제자였던 존 그랜디와의 만남도 그러하다고 할 것이다. 아울러 이응우 선생이 참가했던 호주의 프로젝트에서와 본인이 참가했던 헝가리 전시에서의 야투를 소개하는 세미나 역시 보다 적극적인 야투 홍보 활동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초적인 활동과 아울러 이제는 그간의 인적 네트워크를 구체적으로 엮어내기 위한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 레지던스 프로그램과 관련해서는 올해 좋은 소식이 있다. 원골 자연미술의 집을 활용한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비록 충분한 기금은 아니지만 효율적으로 운영한다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보다 깊이 있고 폭넓은 국제적인 교류를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함과 동시에 비엔날레의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도 기여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국제자연미술센터의 건립도 어느 정도 그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다는 것은 야투의 활동의 폭과 책임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2004년에 제시한 야투에 대한 바람 아니 야투멤버 전체가 공유해야할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야투 회원 전체가 전문가로서 제몫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센터에서는 교육 프로그램과 전시기획 자료실의 운영 등 해야 할 일이 많다. 2006년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모니터링했던 한국문화예술경영지원센터의 평가보고서에서 많은 점들을 지적하면서도 대부분 적절한 예산지원이 선행된다면 해결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예산과 상관없이 할 수 있는 일들 중에 중요한 한 가지는 비엔날레의 주제에 관한 것이다. 자연미술운동을 통해서 이 세계에 던질 수 있는 이슈를 찾아내고 그에 걸 맞는 전시와 관련 이론연구 프로그램과 체험학습 등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이 시대 전체를 읽어내는 통찰과 분석적 능력이 요구되느니 만큼 강의와 토론 등의 자체 워크숍을 통해 의미 있는 아이디어를 형성해나가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2006년 비엔날레 주제 설정 당시 이응우 총감독이 제안한 ‘자연과 인간의 데탕트 시대를 열자’라는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2010년 자연과 인간의 평화를 위한 비엔날레를 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와 관련한 많은 생태학적 인문학적 미학적 담론이 가능하고 자연미술이 마침내 지향해야하는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는 전 세계 전 인류적인 화두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이다. Ⅴ.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관객들의 반응을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접할 수 있었다. 비엔날레에 대한 전문가, 작가, 교수, 일반인 등의 반응들이 천차만별이다. 그중에 한 관람객이 쓴 비엔날레 탐방기 중에 다음과 같은 아주 솔직한 반응도 보인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서 비엔날레의 향후 발전을 위한 논의를 제안하고자 한다. “ 땅바닥에다 웬 피티병을 죽 박아 놓고는 저게 미술 작품이래는데 난 당최 모르것다. 모든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예술은 없나? 특정인만 알아보고 감탄하는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을는지.......... 그저 빈병만 벌려논거 같은 게 오스트리아에서 온 예술가가 만든 우는 곰 이란 작품이라네........ 모르니께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이것도 나무때기 엮어논 걸로 보이고......... 이건 그냥 장승인거 같고.......... 저것도 우리아파트 어린이 놀이터에 있는 거나 별반 다를 게 없고......... 이것도 나뭇가지에 못질해서 세워 논거 말고는 모르겠으니........ 난 차라리 이 꽃이 눈에 더 띄고........ 이 바위가 더 맘에 든다. 이젠 미술작품 관람로를 벗어났다. 이제부턴 등산로에 접어들었다. 이후론 예술다운 예술작품이 눈앞에 펼쳐진다. ” 글 말미에 이 분은 “연미산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한마디로 입장료가 아까웠다.” 라고 쓰고 있다. 비엔날레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그 비전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써주신 공주대학교 교수님도 계셨지만 이 투박한 글이 머릿속에 남는 것은 비엔날레를 방문한 많은 분들이 이러한 심정을 감추고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비단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는 현대미술전반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의 수준이고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단지 특별한 점은 이분이 자연에 대해 느끼는 감성이 자연미술가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더욱 순수한 친밀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자연미술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을 구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이 미술을 읽는 방식 즉 미술에 대한 선입견과 이에 비추어 생기는 거부감이 먼저 작동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걸러지지 아니한 심정들에 대하여 적절하고도 친절한 안내를 통해 공감을 이루어가는 것이 비엔날레의 내용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즉 관람객에 대한 감상도우미 프로그램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2006년 비엔날레에도 중요성을 제기했고 시도도 해보았으나 미진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비엔날레 기간 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자연미술에 대한 지속적인 홍보와 교육을 지속적으로 진행함으로서 다음 비엔날레의 작품을 궁금하게 여기면서 기다리는 마니아 관객을 늘려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공주의 야투의 작가들 ,국내 참여 작가들 외국 작가들, 볼런티어들이 서로 어우러져 땀 흘리며 작업하고 아마추어 시민 밴드에 맞춰 춤추고 노래 부르는 모습에서 참으로 건강한 미술 생태적 삶을 보았습니다. 이런 생태적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가고 유지, 지속 시키려면 이 생태적 삶의 조건들을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건 공주라는 지역성을 지키는 일이 되겠지요. 제가 섣불리 이 비엔날레를 더 비약시키고 더 잘나가는 전시로 키우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바로 지역성을 지키라는 요구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글로벌 메이저 미술 질서에 편입되지 않으려는 말 이구요. 동시에 이 말은 글로벌 메인스트림의 미학과도 거리를 두어야한다는 말 이구요. 글로벌리즘에 한번 휩쓸리면 그 하이어라키는 유구하기에 언제나 위를 쳐다보며 헐떡이고 스스로 열패감에 휩싸이고 로컬리즘과 글로벌리즘 사이에서 분열증을 일으키고 맙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지요.” 위 글은 2008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초대작가이자 자연미술국제학술세미나의 질의자로 참가했던 김용익 선생이 이메일을 통해 보내준 글이다.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비전과 관련하여 깊이 있게 생각하면서 받아들여야 할 글로 생각한다. 어찌 보면 우리가 바라는 바와 반대의 길을 이야기 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우리가 걸어온 길을 그냥 그대로 쭉 나가라는 권고이기도 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공의 울타리라고 생각하는 메인스트림 안으로 들어가기를 기를 쓰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메인스트림 미술계와 미학에 충격을 주고 영향을 끼치는 적극적인 돌파력을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자체적인 역동성을 상실하면 강한 쪽으로 말려들어가는 물리적인 법칙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류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그 소박한 물줄기를 큰 흐름으로 확장해나갈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공주시는 앞으로 무엇을 가지고 공주시의 백년 살림을 준비할 것인가? 공주시의 백년 살림은 역사와 문화와 자연과 교육을 터전으로 해야 한다. 이러한 핵심 가치들을 구현할 수 있는 과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공주시의 백년 살림의 한 축을 해내고 남을 일거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게다가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글로벌 조건까지 만족시키고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끝으로, 문외한의 짧은 소견인지라 염려도 되지만, 순리(順理)를 따르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 작은 희망을 더 적어본다. 우선 공주시가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 행사에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아예 행사를 공주시가 주최했으면 어떨까 한다. 그리하여 작가들은 오로지 작품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그리고 한국의 미술계 또한 지방 행사라든지 또는 주류에서 벗어난 것이라 치부하여 오불관언(吾不關焉)하지 않았으면 한다.” 지역출신의 지역소재 대학의 교수로서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바라보는 시각이 남달랐을 이달우 교수의 윗글에서,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공주시가 가지고 있는 얼마나 큰 문화적 자산인지에 대해서 주장하고 있다. 모임에 속한 당사자들 보다 더 큰 틀에서 그 가치를 생각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이 비엔날레를 이끌고 있는 회원들의 정체성과 관련해서도 많은 염려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공주시가 이 일을 감당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렇다고 회원들의 딜레마 즉 작가로서의 삶과 그 복잡한 행사를 운영하는 운영주체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작가로서의 길을 포기할 수 없음을 생각할 때 반드시 생각해야 할 점이기도 하다. 하나의 대안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사무국요원들의 전문화이다. 적어도 비엔날레의 행정과 예산 그리고 일반관리를 맡아줄 사무국장 이외에 자연미술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전시 및 교육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 할 수 있는 전문적인 기획담당자가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상근자로서 야투를 위해서 해야 할 많은 일들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고 야투작가들은 지속적으로 자연미술작품을 생산하는 본연의 활동영역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글 서두에서 나는 야투의 비전과 비엔날레의 비전을 어떻게 공조해 나갈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했다. 위에서 이야기한 적절한 인적 시스템이 갖추어지고 자신에게 적합한 일을 찾아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해나간다면 그 합일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비엔날레를 통해 야투의 그룹으로서의 비전 즉 자연미술운동의 세계적 확산을 이룰 수 있으며 많은 발표 기회들을 통해서 자신의 작가적인 역량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Ⅵ. 글을 마무리해야 할 이 시점에 나는 지난 비엔날레에 취재를 왔던 옌스 기자(독일 미술잡지 ‘쿤스트포럼’)의 취재내용이 쿤스트포럼에 실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중심으로 광주와 부산의 비엔날레를 다룬 내용이었다. 국내 잡지에서는 함께 묶어 다루는 것 조차 인색했지만 독일의 잡지는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메인으로 다루었으며 그 분량도 다른 두 비엔날레와는 차이가 많다. 애초에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주 타켓으로 삼고 한국에 왔던 것이긴 하지만 외국의 미술계가 바라보는 시각의 일단을 확인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외형적으로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국내미술계가 관심 여부와는 상관없이 비약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연미산 자연미술공원을 확보하고 이미 두 차례의 국고지원 국제 비엔날레를 개최하였으며 회원들은 지역사회의 핵심 지도자들의 협조를 끌어낼 만큼 전공분야와 사회적 활동에서 연륜을 쌓았다. 이제 야투가 비전을 새롭게 하고 자기 발전을 위한 전략적 목표를 정확하게 설정한다면 30주년을 맞이하는 야투의 역사는 한국미술계에 있어서 중요한 족적으로 재평가 될 것이며, 한국미술사에 유래가 없는 국제적 미술운동을 이끌어갈 리딩 그룹으로서 기록될 것이다. 아울러 지역사회의 문화 발전과 시민문화예술교육이라는 이 시대의 교육적 역할을 통해 역사적 소임을 충실하게 해낸 그룹으로 기록되리라 생각한다.
67 no image 공간과 평면사이에서(인상주의에서 추상미술까지)
전원길
5835 2009-01-20
공간과 평면의 세계-회화 전 원 길 우리는 르네상스 이후 발전한 사실주의의 주요 요체를 형태의 사실성에서 찾기보다는 평면속에 공간의 형성이라는 점에 방점을 찍고 미술사적 접근을 하는 것이 이후 미술사의 형식주의적 변천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본격적인 르네상스시대가 전개되기 100년전 지옷토는 그림그리기의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이미지와 신과의 관계에 인간을 개입시키는 것 이였으며 인간이 인간 자신의 눈으로 본 세계의 기록이기도 하다. 지옷토로부터 시작된 화면속의 공간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수학적 비례의 법칙을 반영한 보다 정교한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세련되고 자연스러운 공간의 표현은 사람들에게 사실성의 정복이라는 긍지를 갖게 했지만 미술사의 긴 흐름 속에서 본다면 양식의 발전은 정형화된 규범을 만들게 되고 말았다.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기를 원하는 예술가들은 양식적 승리의 그늘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았다. 모더니즘 회화의 진앙지로서의 인상주의는 혁신적인 미술양식을 창출했으며 인상주의자 자신들도 예상치 못한 결과 즉 추상미술을 낳게 되었다. 인상주의자들이 아카데미즘의 강력한 영향 아래에서도 자신들의 세계를 열어 낼 수 있었던것은 그들이 본 자연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법식의 권위보다는 자신들이 경험한 자연의 실재에 정직하게 반응했던 이들의 작품은 이전에 쌓아올렸던 사실주의 탑을 허물어 원상으로 돌리는 과정의 출발이 되었다. 즉 르네상스 화가들이 창조했던 평면속의 공간을 압축시켜 평면으로 환원시키는 동시에 색채의 활기와 물감의 물성적 현실성을 살려냄으로서 시각적 일류전의 힘을 물감의 현존성 즉 화면의 질감이 가져다주는 생생한 에너지로 대치하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과 자연의 고유성은 빛과 물체 중 어느 것에 기준을 두고 접근하느냐 하는 문제로서 포괄적인 진리의 문제는 아니지만 시각적 사실의 한 단면을 새롭게 증언한다는 점에서 인상주의의 시도는 한 시기를 마감하고 또 다른 회화세계를 열어나가는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이후 전개되는 형태의 자율성과 평면성의 추구가 사진기의 발명과 맞물리면서 궁여지책의 회화의 도피적 선택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사진기의 발명 이전부터 추구해온 회화의 독립성의 확보의 움직임 즉 17-18세기에 걸쳐 진행되었던 문학적 스토리를 그림에서 배제하고 그림 자체로서의 세계를 추구하려는 정물화나 풍경화등의 시도를 생각한다면 단지 사진의 발명이 추상미술을 낳았다고 전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옳은 판단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상주의가 성공적이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살아있는 자연의 논리를 회화의 논리로 표현해냈다는데 있을 것이다. 자연이 변한다는 것은 자연이 생생하게 작용한다는 것이고 이를 표현하기위하여 인상주의자들은 물감의 채도를 유지하면서도 대상의 분위기를 전달 할 수 있는 방법 즉 병치혼합(시각혼합)의 방식을 채택하였다. 색은 섞이면 섞일수록 그 선명성(채도)이 떨어진다. 즉 죽은 색이 되고 만다. 인상주의 자들은 외광의 광휘로움을 살려내기 위하여 순색을 사용하였으며 즉발적인 감각적 판단을 화면에 반영해 냄으로서 색의 활력과 동시에 붓질의 활력을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서 얻어진 또 하나의 효과는 화면이 화가에 의해서 완결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들의 눈에서 색이 섞여지고 확실치 않은 형태를 구성하려는 감상자의 눈의 작용이 화면 속에서 계속 이루어지게 함으로서 화면은 어떠한 것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거나 잘 정돈된 어떤 미적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시각적 개입을 자연스럽게 반영하는 가운데 작품이 존재하는 상태의 이른바 회화적 그림을 창출하였다. 인상주의 운동의 동력은 위에서 언급한 사진기의 발명을 통한 순간의 기록 즉 분절된 시간의 관찰 가능성이외에도 내연기관의 발명을 통해 등장한 기차의 속도감이 가져다주는 역동성에 대한 경험이 함께 작용 하였을 것이다. 아울러 쉽게 보관 이동 할 수 있는 튜브물감의 사용 등은 의외의 변화를 가져다준 요인이 되었다. 인상주의 이후 추상미술에 이르려면 방법론적으로 세잔느와 입체파를 거쳐야 하지만 그 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분석적 퀴비즘을 실험하고 있을 무렵 이미 1910년 최초의 추상화가 그려졌으니 말이다. 모네가 1873년 ‘해돋이-인상’을 그린지 불과 47년만의 일이니 말이다. 칸딘스키가 1895년 인상파전에서 모네의 그림을 보고 감명을 받아 진로를 바꾸어 화가가 된지 15년 만에 일이었다. 비록 인상주의로부터 추상에 이르게 된 기간을 길지 않지만 그 사이 우리는 칸딘스키의 내적필연성에 의거한 추상을 넘어 보다 넓은 세계 즉 사물의 세계로 미술이 완전히 환원될 수 있는 가능성의 조짐을 세잔느와 피카소를 통해서 볼 수 있음으로 해서 시간의 간극 그 이상의 거리를 느끼게 해준다. “모네는 눈뿐이다 그러나 얼마나 훌륭한 눈인가” 라고 말했던 세잔느는 인상주의가 발견한 색채의 가치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인상주의자들의 자연에 대한 감각적 접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세잔느는 세계에 대한 고전적 인식 즉 존재하는 자연에 대한 확고부동한 접근점을 색채의 가치를 희생시키지 않고도 찾을 수 방법을 모색했다. 세잔느가 과제로 여겼던 색채와 존재라는 두 마리 토끼잡기는 그의 평생을 통해 추구되었으며 과제의 성취여부는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다. 세잔느는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향해 다가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색채라는 빛의 세계와 존재의 세계가 공존하는 현실 세계의 존재 구조를 회화적인 논리로 풀어내려는 그의 노력은 마침내 성과를 거두게 되고 이후 현대미술의 중요한 지표로서 작용하게 된다. 그렇다면 세잔느가 사용한 회화적 방법은 무엇인가? 세잔느는 "색과 빛이 있는 곳에서 푸생을 그리고 싶다"라는 말로서 자신의 회화적 과제를 이야기하였다. 푸생은 17세기 활동한 프랑스 화가로서 근대회화의 시조라 불리운다. 그는 화면 속에 이상적인 세계를 구현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정제되고 단정한 화면구성을 중요시하였다. 화면속의 이상세계는 자연을 그대로 옮겨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상주의가 자연에 대한 감각적 접근을 통해서 여과 없이 자연을 느꼈다면 세잔느는 푸생이 화면 속에 구축한 이상적 구성을 위해서 보이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접근가능성을 시도하였다. 즉 보이는 자연을 희생시켜서라도 화면 속에 또 다른 자연 즉 회화세계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세잔느가 “모든 물체는 원구와 원통 그리고 원구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이러한 세잔느의 목표와 관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세잔느는 사물에게 부여된 이름을 지워내고 물체 자체의 존재성에 주목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물이 가지고 있는 기본형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느꼈고 그것은 외적 이미지가 아닌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물체를 인식하는 것이었다. 즉 보이는 자연이 아닌 존재하는 자연을 느낄 수 있을 때 부수적인 것을 생략하고 그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세잔느가 의도한 화면속의 또 다른 세계 즉 회화세계를 위하여 사물의 형태를 단순화 하거나 변형 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한 가지 해결하기 힘든 문제로 여겨지는 부분은 색채에 대한 것이다. 색채는 존재의 세계가 아닌 빛의 세계이며 존재의 세계를 표현하기위해서 고전주의자들은 명암법을 활용했다. 보이는 명암이 아닌 원리적 명암의 질서를 반영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잔느는 자신의 세계를 다시 고전주의자들의 방법으로 되돌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색채를 색면으로 사용함으로서 3차원공간 속의 물체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특성에 색채를 부합시킬 수 있었다. 이로서 세잔느 인상주의자들이 발견한 색채의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빛이 없어도 존재하는 물체를 표현하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었으며 푸생의 강령을 자신의 회화 속에 재해석 해냄으로서 자연으로부터 독립된 회화의 자율적인 세계의 가능성을 제시 할 수 있었다. 세잔느의 사물에 대한 접근 태도와 그 방법론적 성취는 곧 바로 파리의 재능 있는 두 화가피카소와 브라크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세잔느적 세상보기는 입체파적 방법론으로 승화되었다. 입체파는 세잔느가 회화적인 방법론을 통하여 구현하고자 했던 존재하는 물체에 대한 노골적인 해석을 통해 새로운 사실성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이들이 새로운 세계의 문턱에서 그 방향을 가늠하면서 두리번거리는 가운데 눈에 띈 것이 아마도 아프리카 가면등과 같은 조각의 표현방법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인상주의자들이 그들의 방법론을 정당화하는 데 참고로 삼았던 일본의 우키요에 판화의 평면적 표현과 색채의 가치 그리고 그 구도의 대담성을 눈여겨 본 것과도 유사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어떤 경로를 거쳐서 그토록 극단적인 해체의 과정을 겪었는지는 놀라운 일이지만 아마도 세잔느가 화면의 독립적 가치와 그 조형적 세계를 추구해나가는 가운데 보여주었던 물체의 단순화 즉 물질화된 물체의 원속성에 대한 생생한 인식이 그러한 과정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물체의 외형과 그 이름에 대한 사람들의 보편적 인식의 관점이 아닌 물자체의 존재성에 주목하는 새로운 접근이 아니었다면 입체파의 방법론적 전진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입체파의 전개과정에서 피카소와 브라크가 협업을 통해 일구어내었던 분석적 퀴비즘의 시기는 입체파의 가장 진지한 탐구의 시기였다. 흐르는 시간의 연속선상에서의 물체는 일정한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그 고유한 형태성을 갖는다. 하지만 입체파는 시간의 분절을 통하여 사물을 바라보고 그 분절된 파편들을 다시 재조합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시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주었다. 일상에서는 쉽게 인식하기 힘든 세계의 구조를 회화적인 방법을 통해서 일깨워준 중요한 시도라 할 것이다. 입체파는 세잔느조차도 그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했던 색채를 희생시키면서 암갈색의 무채색을 사용하였으며 명암의 대조적 사용을 통해서 분절된 물체들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추상적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해체된 물체들 사이의 공간을 만들에 내고 있는 대조적 그라데이션은 각각의 파편들이 단지 해체된 상태가 아닌 마치 진동하면서 본래의 형태를 회복하려는 운동성을 갖게 된다. 또한 이것은 보는 사람의 심리작용 즉 완전한 추상의 문턱에서 원래의 형태성을 찾아내려는 관람자의 본능적 의지와 함께 작용함으로서 더욱 효과적인 상태가 된다. 이로서 회화는 觀者로하여금 그림과의 시지각적 심리작용을 통해 그림에 참여하도록 하는 장치를 갖게 되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더 나아가 보는 사람과의 일종의 게임구조를 형성하면서 작업을 해나갔는데 그것은 숫자와 글씨 등 원래 평면적인 속성을 가진 것들을 공간으로 느껴지는 부분 위에 가로질러 배치함으로서 화면에 형성된 공간의 비현실성을 다시 현실적 물체의 표면으로 되돌려 놓는다. 화폭위에 물감이라는 오랜 재료의 구조를 벗어나 인쇄된 종이 즉 제조된 인공물을 화면에 끌어들이면서 사람들은 더욱더 화면 공간상의 실제에 대한 새로운 제시에 어리둥절하게 된다. 여기서 꼴라쥬된 오브제나 화폭에 붙어있는 물감이라는 오브제나 그 본질상 차이는 없다는 당연한 생각을 하기까지 일반 사람들에게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해체의 과정에서 손실된 형상의 리얼리티를 글씨라든가 실제물을 화면에 도입하면서 회화적 표현과 리얼리티의 균형을 잡으려고 했던 이들의 시도는 회화를 오브제의 세계로 이끌었으며 화가의 손 기술의 빈 여백을 개념적 표현이라는 새로운 표현 요소로 채워나가게 된다. 이제 회화는 더 이상 외부세계의 등가물로서의 위치를 고집하지 않는다. 회화는 묘사와 표현이라는 오랜 방식을 벗어버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다 본격적인 양상은 반예술운동을 표방했던 다다이스트들에 의해 펼쳐지겠지만 우리는 먼저 화면 속에서 모든 이야기와 형태를 무화시켰던 추상미술의 세계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최초의 추상화를 그린 칸딘스키의 추상에 대한 변은 ‘내적필연성’이었다. 그가 추상화의 가능성을 찾아낸 것은 자신의 그림에서였지만 그로 하여금 추상미술의 가능성을 실현하게 한것은 역시 화면 자체의 세계의 가능성을 실험했던 세잔느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의 논리를 회화의 논리로 풀어내려는 그의 노력은 대상성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서 회화의 독자적 예술적 가치를 찾도록 해주었다. 대상이 사라짐으로서 우리의 정신은 화면 안에 순수하게 머물게 되고 그 자체와 조응하는 우리의 정신의 작용을 맛보게 된다. 비록 그가 그의 그림을 구성함에 있어서 어떤 메시지를 전제하고 있더라도 그것을 상징하는 자신의 코드를 창조해내고 그것을 언어로 사용하는데 있어서 오로지 자신의 내부에서 솟아나는 자발적 상상력에 의존 했다. 그 코드화의 과정과 그것을 엮어가는 조형적 감각의 작용은 인간이 지닌 그 고유한 창의성이 꽃으로 피어나는 것을 보는 것 같다. 칸딘스키보다는 조금 늦게 추상작품을 선보였던 몬드리안은 칸딘스키와는 달리 보다 원리적인 틀을 가지고 귀납적인 도출과정을 시도했다. 그가 살았던 화란의 지형적 특성과 엄격한 기독교적 가정의 분위기등이 금욕적인 화풍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우주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은 하나의 원천에서 비롯되며 정신과 물질은 불가분하게 통합된다’는 신지학의 철학에 심취함으로서 자신의 방법론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몬드리안의 추상작업을 통해서 마침내 추상을 향한 긴 여정에 일종의 마침표가 찍히는 느낌이 든다. 기본색과 기본형으로 이루어진 그의 화면은 여전히 어떤 구체적인 형태로의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듯한 칸딘스키의 그림과는 달리 가능성 이전의 상태로 더욱 멀어진 위치에서 완결된 느낌을 준다. 말레비치는 “창작이란, 이미 자연 속에 창조되어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어떤 것도 취하지 않은 형태, 회화성의 요소로부터만 연주 되었으며, 자연 물체의 최초 형태를 반복하거나 변형시키지 않은 형태가 작품에 나타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가시적 세계를 넘어 서기위해서는 가시적 대상을 해체하고 지극히 추상화된 형태를 통해 우리의 제한된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인간의 직관적 성찰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러시아 혁명당시의 유물론적 사상이 그의 회화론에 작용하고 있음도 간과 할 수 없겠지만 순수형태를 통해 현실의 반대편에 있을 그 세계로 가는 통로를 제공하려는 그의 시도가 더욱 중요하지 않을 까 생각한다. 우리가 사물을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도대체 우리는 제대로 보고 있기나 한 것인가? 추상미술에 도달했던 세 사람 모두 자연 형태 너머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들의 작품세계를 통해 확장되는 세계 속에서 자유와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가?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작가들의 일련의 작업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속한 세계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의 보편적인 경험에 대응하는 예술가들의 특별한 경험은 추상세계 를 넘어 현실공간의 실물 오브제와 일상의 행위 그리고 비디오와 컴퓨터 영상등의 새로운 매체를 통해서도 계속 이어진다.
66 no image Action & Pop
전원길
5257 2008-11-14
Action & Pop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대비되는 관점들은 어느 시대나 있는 것이지만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 팝의 대비는 매우 뚜렷하다. 이 두 미술사조가 동시대미술에 끼친 영향을 생각 할 때 더욱 흥미롭다. 추상표현주의가 인간의 실존적 공허감을 노출시킴으로서 인간의 한계를 예술적 실현을 통해서 넘어서려고 했다면 팝아트는 대량생산 대량소비시대의 유행성 상품 미학과 대중매체가 필요로 하는 스타 생산 구조를 미술의 대상으로 혹은 작가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두 계열의 작가들의 정서적 칼라도 달랐다. 알콜중독과 마약 기운을 안식처로 삼았던 추상표현주의자들의 삶은 현실세계에서의 스타적 삶을 갈망하면서 자신을 관리했던 팝아티스트들의 태도와는 달랐다. 팝 아티스트들은 추상표현주의의 엄숙한 형식적 탐구나 인간의 존재성의 해명에 방점을 찍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위태로운 존재성을 감각의 쾌락과 현재의 삶속에서의 소유와 소비 그리고 스타들의 삶을 통한 자신의 과시 욕구에 대한 대리만족에 탐닉하는 방식으로 잊어버리려 한다. 미술행위는 인간 존재에 대한 들추어냄과 덮어 버리기 망각하기 등의 일환일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추상표현주의자들의 작품 속에서 들추어낸 인간성은 무엇인가? 액션페인팅으로 설명되는 잭슨 폴록의 작품의 현존성과 공허감은 어떻게 동시에 읽혀지는지 생각해보자. 잭슨폴록은 대형 화폭 위를 걸어 다니면서 뿌린 물감의 흔적을 남김으로서 자신의 실존적 존재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였다. 그의 물감 뿌리기 작업의 가치는 화면 구성을 위한 배려가 최소화되고 단지 균질한 화면을 만드는데 온 감각이 집중되었을 때 살아난다. 샘 프란시스와 같은 뿌리는 기법을 사용한 작가들과의 대별점도 여기서 읽혀지며 그림에 눈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림 전체가 보는 사람 자신의 정신 속에서 발생하는 잡다한 생각자체를 느끼게 해주는 상황에서 폴록의 그림은 비로소 작용한다. 폴록의 그림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몸의 움직임의 기록으로서의 물감들이다. 이 물감들은 지향점이 없다. 말하자면 대상은 물론 화면의 구성이라는 전통적 목표점마저도 포기하고 있음으로 해서 향방 없는 상태로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것은 작가의 존재감이며 그것은 곧 바로 그림을 보는 나 자신의 존재감을 인식하게 해준다. 만일 어떤 이미지라도 떠올릴 수 있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남아있다면 우리 자신을 향하게 하던 그 어떤 그림의 힘은 곧바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림이 자신을 무화시킴으로서 보는 사람 자신을 보게 하는 방식은 미술사상 처음 있는 일이였다고 할 수 있다. 잭슨 폴록이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원초적 존재성에 몰두함으로서 다른 인간과의 관계성 속에서 발생하는 의미소들을 잊어버리고 방황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은 그림이 갖는 긴장감의 가치와는 별도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자신의 존재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소비시대의 다양한 양상들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했던 앤디워홀 역시 폴록과는 다르지만 자신의 존재의 확인과정을 예술적 시도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의미가 제거된 잭슨 폴록의 화면은 하나의 오브제의 상태에 다름 아니다. 단지 그 형식과 출처가 미술이라는 문맥 속에서 나옴으로서 일반 오브제와는 구분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앤디 워홀의 작업 역시 전통적인 미술이 그동안 품어 왔던 작품의 질적 가치를 포기하고 있음으로 해서 다른 지점으로 우리의 관심을 옮겨간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브릴로 박스 같은 경우 실물 오브제와 제작된 작품사이에 차이점은 거의 없다. 역시 이것이 작품인 이유는 죠지 딕키가 이야기했듯이 미술계에서 수여한 미술가로서의 자격증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워홀의 유사 상자는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보게 하는가? 잭슨 폴록이 우리자신에게 그 시선의 방향을 향하게 했다면 앤디 워홀은 향후 이 시대의 시스템이 될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에 몰 개성화될 인간의 미래를 보게 한다. 실제로 앤디 워홀은 미국의 대통령과 빈민가의 청년들이 먹는 코카콜라의 맛에 차이는 없으며 모든 사람은 기계가 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을 똑같아 질 것이라고 했다. 미술내의 요소들의 조화로운 구조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격조를 제거하고 단번에 찍어내는 인쇄기법을 통해 작업하며 이미 대중들의 생활과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자신을 대리하는 아이콘 즉 스타들의 사진과 일상용품들을 이미지화함으로써 왕가와 귀족의 전유물이던 이미지를 대중 속에 난립 하도록 하였다. 물론 그가 찍어낸 작품들이 엄청난 고가에 거래가 되고 있지만 그가 던진 그 가볍고 하찮은 이미지들은 미술이라는 이름 앞에 존재하던 묵직한 전제 조건들을 가차 없이 날려버리고 이 시대가 원하는 대리적 신데렐라 즉 스타 되기의 전략적 제스츄어를 미술의 중요 방법으로 만든 것이다. 액션페인팅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왔던 폴록의 미술적 어법과 그에 이어 등장했던 팝아트의 워홀의 시도에서 공통점을 찾는 다는 것은 억지스러운 엮어내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결국 작품자체에서 무엇인가 읽어지는 방식을 취한 것이 아니라 나라는 감상자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보이지 않는 감상의 목표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공통점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미국 금융업체들의 파산으로 인하여 야기된 세계경제의 침체국면은 무한 경쟁의 시장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하게 하도록 하고 있다. 대량생산시대의 대량소비는 더 이상 확산되기 힘든 덕목이 될 런지도 모른다. 한창 주가를 올리며 감각주의적 패션미술을 이끌었던 후기팝적 흐름이 어디로 방향을 선회하게 될 찌 궁금하다.
65 no image 전씨의 석수시장 방문기
전원길
6011 2008-11-03
전씨의 석수시장 방문기 2008년 한 여름 안양의 박씨와 안성의 전씨는 각기 다른 곳에서 미술행사기획으로 바빴다. 전씨가 짬을 내어 박씨가 벌린 미술판을 찾은 것은 전시 마지막 날이었다. 그를 맞이하는 박씨의 얼굴에 올 여름 이리 뛰고 저리 뛴 흔적이 역력하다. 전시장에 걸린 포스터와 인쇄물 자료들이 그가 그동안 해온 일들의 관록을 보여준다. 언제부터인가 언제나 파장 분위기인 재래시장 골목에 끼어있는 석수갤러리는 석수미술이라는 신비의 묘약을 제조하여 이 시장골목에 뿌려대고 있다. 누군가 약발을 받아 일상의 시름을 잊고 춤을 추기라도 바라는 것일까? 작년에 이어 올해도 그는 일단의 외국인 친구들을 불러왔다. 그리고선 시장골목 문 닫은 가게의 새로운 주인 행세를 할 것을 요구하였다. 노랑머리 파란 눈을 가진 자들과 합세하여 미술작가라는 이들이 시장 통에서 벌이고 있는 행각들은 하나같지 않다. 일부 주민들의 생존정책의 일환이었던 펄프 재생 작업을 흉내 내고 있는 마을 역사 재생가 수씨. 고층아파트 입주의 희망을 불태우게 하는 아파트 분양 쇼를 벌이는 자칭 사기꾼 랜코트씨와 얏숙씨. 빨간 파프리카, 홍옥등 유독 빨간색 과일 채소로만 샐러드를 만들어 파는 불온한 장사꾼 백씨. 썩은 요리로 말싸움을 벌이는 뇨씨. 이상한 몸짓으로 사람들을 찍어 누르는 치료미술사 김씨. 똥 먹는 동물보기장치 만들기와 오는 잠 절대로 사양하는 법이 없는 한국전철 탑승객을 몰카로 찍는 고약한 취미의 폰즈씨와 로베씨. 종이 접기 놀이를 빙자해서 기약 없는 삽질홍보대사로 나선 장씨. 밤 일로 잠 못 잔 사람들의 하품에 유독 관심을 가진 사생활 탐색가 윤씨. 꼬불거리는 철사가락 글씨로 사람들의 발길과 눈길을 끌어 보겠다는 카나자와씨, 노력봉사로 얻은 채소가 돈 되기를 기다리는 작가지망생등이 벌인 상가전시장등을 기웃거리면서 둘러보았다. 밑지는 장사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시장 통 장사꾼들은 이 석수아트프로젝트에서 무엇을 남겨 먹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시장골목을 나서는데 비행기 한 대가 바퀴를 내리고 석수 시장 상공을 맴돌고 있다. 전씨의 머릿속에 안에서는 거울로 보이지만 밖에서는 안이 들여다보이는 창문이 있는 범죄영화 속 취조실이 그려진다. 그리고 열띤 사랑의 말미처럼 민망한 기분이 왔다 갔다 한다. 금방까지도 줄 곳 동행 했던 박씨는 백씨네 가게 아가씨가 만들어준 야채샐러드를 함께 먹은 후 보이질 않는다. 근처에 있기는 하겠지만 그냥 서둘러 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아름다운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전시(시)장을 나서서 광명역을 지나 서해안 고속도로로 향하는 길로 들어섰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와글와글 거리던 머릿속이 좀 조용해졌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인가? 전씨의 뱃속에서 부터 알싸하게 올라오는 빈속 막걸리의 취기처럼 그를 사로잡는 기운 말이다. 전씨는 운전을 하면서 이 알 수 없는 기운의 정체가 무엇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침에 배가 짜르르 아프면서 설사가 나면 그는 변기에 몸을 의탁한 채 전날 먹은 음식을 하나씩 떠올리는 버릇이 있다. 그는 뱃속에 전해오는 신호에 반응하듯 오늘 그가 본 것들을 점검하였다. 유사펄프더미, 사기 쇼, 불온한 빨간색, 썩힌 음식 사진, 몸으로 치대기, 똥 빠지는 구조물, 몰래보기등등. 박씨 일당들이 초대한 작가들은 아트프로젝트라는 말과 최대한 어울리지 않는 행태들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그는 올 여름 공주 숲 속에서 함께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떠올렸다. 인간사의 생태적 작용지인 시장속의 작품들과 자연 속에 끼어든 인간의 작품들이 포토샵 레이어들처럼 겹쳐진다. 그는 다음날 아침 아주 오랜만에 쾌변의 조짐을 느꼈다. 석수미술의 약발이 자신에게 먹혔다는 생각을 한 것은 화장실 물을 내리면서였다.
64 no image 현대미술과 만나기
전원길
5386 2008-06-24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통해 미술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많아졌다. TV나 인터넷을 통해서도 다양한 형식의 미술과 만난다. 현대미술을 감상 할 기회가 많아짐에 현대미술이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많이 보다 보면 느끼게 된다고 하기도 하고, 그냥 느껴지는 대로 보면 된다고 하지만 왠지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하면 현대미술과 제대로 만날 수 있을까? 만남 1 - 예술 작품은 일반화된 세상 너머 실재 세계와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애매모호하게 포장된 세상의 가림 막을 순식간에 걷어내는 힘이 있으며 때로는 우리가 잊고 살고 싶어 하는 우리안의 추한 모습을 들추어낸다. 이러한 작품들과의 만남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실재를 느끼게 하고 우리의 인식의 지평을 확장한다. 감상을 통해 변화된 자아를 형성하게 됨으로서 같은 작품과의 또 다른 만남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진정한 예술작품과의 만남은 여느 사물과의 만남과는 달리 단 한 번에 파악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만남 2 - 언젠가 한 작가와의 대화에서 “미술을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사람들에게 정서적인 만족을 주기위해서” 그림을 그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뭐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감상자들과의 소통을 위해서 ‘그림 같은 그림’ 즉 정서적 만족을 위해서 아름다운 풍경이나 정물을 전통적인 화법으로 그린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할 찌 궁금하다. 나는 미술을 통해서 다른 사람 즉 감상자와 만난 다고 했을 때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인의 일반화된 관념에 호소하는 그림은 만남의 주체가 없는 피상적 만남이 되고 만다. 진정한 만남과 소통을 위해서는 일반화된 사고의 틀을 넘어서 작용하는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보는 사람들 역시 자신의 눈은 감고 일반화된 관점을 기준으로 작품을 대한다면 작품과의 진정한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고 결국 서로를 속이는 만남이 되고 말 것이다. 만남 3 - 이제 우리는 진정한 만남이 가능한 예술품을 어떻게 골라 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검증된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자주 감상하고 연구함으로서 좋은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을 알아차릴 수가 있을 것이다. 탁월한 감상자는 작품의 표정을 통해 작품의 진정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아무리 그럴싸하게 포장된 미술이라고 하더라도 그 진정성을 반영하는 표정을 통해서 내용을 잃어내는 전문적 감상자들의 눈을 속이기는 힘들다. 감식안이 뛰어난 감상자라면 멀리서도 그 신선한 작품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좋은 작품은 작품의 출발과 마무리의 과정이 일관성있고 유기적인 관련성을 맺으면서 전개된다. 작품의 안의 조형적 관계성 뿐 만아니라 개념적 연계와 재료의 사용에 있어서도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타당성을 획득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작가의 몸속에 내재된 자연성이 창의적 표현 과정을 통해 발휘되는 것이고 그 자연성을 타고 흐르는 것이 예술성이라 할 것이다. 여러분이 미술에 대한 충분한 경험과 연구가 있는 전문가가 아니라면 작품을 제작한 작가와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처음에는 가볍게 그리고 점차로 말을 터가면서 심도 있는 대화를 전개 해보라. 결국 작가들도 우리의 삶의 경험의 범주 안에서 고민하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혹시 전혀 공감대를 찾지 못하더라도 이 시도 자체가 다음 작가와의 만남을 유익하게 해줄 것이다. 마음이 끌리는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그 작품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작품을 볼 때마다 우리의 정신이 고양되는 감흥을 느끼게 된다면 이제까지의 준비 과정은 마침표를 찍었음을 스스로 느끼게 될 것이다. 미술세계로의 몰입은 이미 시작 된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일반화된 미감에 호소하는 작품 보다는 특수한 영역 즉 사람들이 생각지 못한 현실의 리얼리티와 관계하는 작품과 만나기를 바란다. 만남 4 - 대부분의 탁월한 현대미술 작품들은 눈뿐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을 통해서 파고든다. 눈 감각을 통해 우리의 정서에 작용하는 것 즉 보기 좋은 것이 미술이라고 생각한다면 현대미술과 만나기는 어려워진다. 이 시대의 많은 작품들이 이제 보아야 할 대상을 넘어 읽어내야 할 독해의 대상 즉 텍스트화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바른 출발선상에 서 있다고 할 것이다. 미술이 텍스트화 되었다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우리의 감흥을 이끌어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이미지가 되었든 기호 혹은 실제로 글씨들로 이루어져 있든지 그것은 다른 어떤 사실이나 현상들과 연계되어야만 효과를 발휘 한다. 따라서 관람객은 보이는 작품이 지시하는 것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나의 정신이 작품과 함께 작용해야만 작품이 비로소 감상되는 것이다. 만남 5 - 현대미술의 탁월한 작품들은 단지 보는 것만이 아닌 적극적인 해독을 통해서 감상 되어지는 것인 동시에 논리적 사유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서도 즉각적으로 깊게 공감하는 반응 즉 예술성을 경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진지한 정신 활동은 주로 나와 세계의 관계에 집착하고 있는 만큼 미술의 정신성도 역시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에서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눈의 미학을 떠난 현대의 미술은 이렇듯 철학적 사유형태를 취하면서도 예술성이라는 그 고유의 특질을 유지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술이 철학의 안으로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념화되고 철학적 사유의 형태를 띤 현대미술에서 어떻게 예술성을 찾아 낼 수 있을까 하는데 방점을 찍고 현대미술과 만난다면 본격적인 현대미술감상을 시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 작품 속에 내재하고 있는 예술성은 그 경로를 추적할 수도 없을 만큼 즉각적으로 파악되곤 한다. 예술성을 느끼는 이 특수한 판단은 작가가 지시하는 세계의 어떤 새로운 면을 공감하는 순간에 작동되어지며 그 전달의 형식이 하나의 생명체처럼 필연적 일체성을 가질 때 비로소 확신을 같게 된다. 만남 6 - 표현 기술을 익히기 위해 오랜 기간의 수련을 필요하지 않는 미술, 무엇이든지 미술이 되는 미술, 창작이 아닌 복제가 예술적 표현의 전략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예술품과 비예술품의 경계는 모호하게 느껴진다.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구분 또한 마찬가지로 쉽지 않다. 따라서 예술가의 자격의 문제는 이 시대 미술을 논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논점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시대에 예술가 되기는 자기가 자신을 예술가로 받아들이고 일반화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생생하게 살아있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 가운데 있음으로서 일반화된 세상으로부터는 독립적 태도를 견지하는 순간 누구든 진정한 예술가가 된다고 생각한다. 현대미술을 감상 한다는 것은 감상의 대상인 작품이 작가로부터 독립되어 내안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하며 감상자 자신이 현대미술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미술이 고도의 숙련을 요하는 기술적 측면이 약화되고 개념성을 강조하게 됨으로서 미술작품은 작가로부터 분리되어 감상자의 몫이 더욱 많아졌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소극적 감상자가 되기보다는 진정한 이시대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현대미술과 만나자. 현대미술과의 만남이 이 시대 이 세계의 지평을 확대하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생생하게 밝혀나가는 현대미술가로 변신하게 할런지도 모른다.
63 no image 야투(野投)의 자연미술운동
소나무
5385 2008-04-08
야투(野投)의 자연미술운동 I 야투 야투Yatoo는 한국의 중부지방을 굽이쳐 흐르는 아름다운 금강을 끼고 있는 고도 공주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자연미술가 그룹이다. 1981년 창립 당시 20대의 젊은 작가들은 자연이 내어 주는 예술적 영감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자연과 더불어 작업하고 있다. 이제 그 역사가 사반세기를 넘어오면서 한국과 동서양의 많은 예술가들로부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Guemgang Nature Art Biennale)를 통해 전 세계의 자연미술가들이 함께 만나 작업 할 수 있는 교류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의 자연미술의 양상과는 구별된 성격을 띠고 있는 한국 야투의 자연미술은 1981년 이후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열리는 '사계절 연구회'를 통하여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한국의 자연환경 속에서 자란 이들은 계절에 따라 생성되고 소멸하는 자연의 질서와 변화, 그리고 그 다양한 양태에 반응하는 순수한 창작의지를 바탕으로 작업하였다. 회원 스스로가 작가이자 서로의 작품에 대해 한정된 감상자였던 당시의 멤버들은 작품을 통해 서로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진정 야투적이라고 할 만한 자연미술 방법론을 탄생시켰다. II. 야투 작업의 특성과 방법 1980년대 야투의 작업은 자연공간속에 단지 인간의 미술적 아이디어를 밀어 넣기보다는 살아있는 자연과 인간의 예술 의지가 균형을 이루는 지점을 찾으려고 하였다. 즉 자연성이 그대로 유지되는 가운데 인간의 생각을 부족함 없이 받아내는 상호작용의 구조를 지닌 것이 야투작업의 중요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야투의 작가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빈 몸과 빈 마음으로 자연 안으로 들어가 자연이 그들에게 내어주는 영감을 따라 작업하기를 좋아한다. 따라서 그들의 작업은 자신의 몸을 이용한 절제된 행위로 이루어지거나, 자연현장에서 발견된 자연물 오브제를 사용하여 작업 할 때가 많다. 야투의 작품들이 최소한의 행위나 설치 그리고 간단한 드로잉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현장에서 그 작품을 실제로 본 사람이 많지 않다. 비록 사진 속에 담겨진 작품들이지만 지금까지도 생생한 감흥을 유발 시키는 것은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친숙한 자연이 그 작업의 내용과 만나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쌓고, 연결하고, 붙이고, 던지고, 긋고, 바라보는 등의 일상의 단순한 행위가 자연 속에서 곧 바로 미술작업의 방법으로 활용되는 야투의 작업들은 우리들을 감상자의 위치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많은 제작비를 유발시키는 물신주의 미술과는 다른 소박한 미술이지만, 위대한 예술이 품어야할 창의적 생명력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 야투는 자연과의 관계맺음의 방식을 미술적으로 제안함으로서 균형 잡힌 관계를 회복 할 수 있는 길을 모색 한다. 이러한 야투의 작업은 인간의 삶으로부터 고립되고, 지나친 물량주의로 내달아 가고 있는 미술과는 다른 길을 지향하고 있다. III 야투의 성과 야투가 일구어낸 작업의 성과는 외국작가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확산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89년 함부르크 미술대학에서의 전시가 계기가 되어 1991년 공주에서 금강국제자연미술전이 개최되었다. 이어서 1992년에는 독일 슈베르그에서, 그리고 1994년에는 일본의 사무가와에서 자연미술전시회가 연속적으로 열렸다. 특히 1995년 공주에서 열린 금강국제자연미술전은 23개국 128명의 작가들이 모여 28일 동안 숙식을 함께하며 작업하는 미술사상 유래 없는 대규모 프로젝트로 기록되고 있다. 국제전을 통하여 야투의 회원들은 작업에 있어서 다양성과 개별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1980년대 활동이 자체 연구회 성격을 유지 하면서 자료집을 통해 외부와 소통했다면, 외국작가들과의 공식적인 전시행사를 진행한 1991년 이후에는 구체적인 결과를 현장에 남기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요구되었고 작가별로 자신만의 표현방식을 찾으려는 다각적인 시도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국제적인 전시프로젝트를 통한 자연미술의 교류를 정례화 하고 자연미술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 활동을 위하여, 야투 회원들은 2004년 자연미술이라는 특성화된 영역을 중심으로 열리는 세계 최초의 비엔날레를 출범시켰다.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작품의 제작과 발표를 현장에서 진행하며 자연미술과 관련된 다양한 학술적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이제 3회째 맞이하는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자연미술의 국제적 동향과 미래의 향방을 가늠하는 중요한 이벤트로서 자리 메김 되고 있다. 2006년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현장이 된 연미산자연미술공원(Yeonmi-san Nature Art Park)의 조성은 비엔날레의 기획과 아울러 야투의 중요한 성취중의 하나 일 것이다. 앞으로 이 공원은 많은 자연미술가들의 작품으로 채워질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찾는 국제적 명소가 될 것이다. 아울러 야투는 자연미술 공원 내에 실내전시장과 자연미술 자료실 그리고 자연미술교육을 위한 공간 등이 구비된 미술관의 건립을 추진하여 국제적인 자연미술센터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야투회원들의 자연미술에 대한 애정과 왕성한 활동이 만들어낸 또 다른 성과 중의 하나는 자연미술의 집을 통한 레지던스프로그램의 운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은 야투회원들이 손수 벽돌을 쌓아올리고 나무와 꽃을 심어 가꾼 자연미술의 집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현재 비엔날레와 연계된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으며 점차 독립적인 프로그램으로서 발전될 것이다. IV 야투의 비젼 1981년 창립 이후 야투는 서구미술의 강력한 영향아래 있던 한국주류미술계와는 거리를 두고 자연에 대한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인간 본연의 예술의지를 실현 할 새로운 미술방법을 탐색하였다. 그동안 많은 작가들이 야투의 작업현장에서 자신들의 예술적 감성을 발휘 하였으며, 비록 야투의 현장작업에서 떠났더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자연 속에서의 경험을 자신들의 작업을 통해 발전시키고 있다. 그동안 야투를 통해서 작품을 발표한 작가들은 작가는 수백 명에 이른다.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야투회원으로는 고승현, 강희준, 이응우, 고현희, 김해심, 정장직, 이종협, 신남철, 이선주, 허강, 전원길등 10여명이며, 창립당시 연장자로서 중요한 역할과 함께 국제교류 등을 함께 추진했던 임동식과 조충연, 유동조, 나경자, 등이 있었으며, 후진으로는 정연민, 강전충, 이성원등 여러 작가들이 사계절 연구회를 통하여 좋은 작품을 남겼다. 이제 야투는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연미술가들과 연계하여 자연과 인간, 그리고 예술과의 관계를 자연미술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통하여 연구하고 표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아울러 각 회원들은 이시대의 예술가로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려는 창조적 소임을 감당하기 위하여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며, 개인전시회와 개인 작품집의 출판을 통해 그동안의 야투의 활동을 정리하고, 그 미학적 성과를 새롭게 진화 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전원길
62 no image 자연과의 새로운 소통을 위하여
전원길
5201 2007-10-15
자연과의 새로운 소통을 위하여 전 원 길 작가/대안미술공간소나무 대표 I. 자연과 인간 자연을 황폐하게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만 편리하고 쾌적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지금의 인간 문명은 결코 낙관적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 듯 하다. 지구온난화를 불러온 심각한 환경오염 문제는 지역과 문화, 인종과 국가를 떠나 전 세계적으로 인류의 당면과제로 우리에게 다가와 있다. 자연환경 파괴로 위기에 직면한 인류에게 자연미술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는 일은 시대 정신을 반영한 새로운 미술운동의 방향을 설정하고 나아가는데 있어서 당연한 일이라 생각된다.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주도하고 있는 야투그룹은 그동안 환경문제를 작품의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연과의 독특한 예술적 관계를 설정해온 자연미술운동은 그동안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의미 있는 제안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통해서 나는 예술 활동의 기본 동력으로 작용하는 창의성이 자연의 섭리를 반영한다는 사실과 연계하여 ‘인간의 자연성’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았다. 또한 자연과 직접적인 만남을 추구해온 한국의 자연미술운동이 그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의미 있는 미학적 담론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측면들을 살려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비판적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II. 미술상태로서의 자연미술 인간의 자연성은 인간성의 한 부분으로서 자연의 본성과 통할 수 있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인간의 내부에 이러한 속성이 없다면 자연과의 소통은 불가능 할 것이다. 우리는 예술가들의 창의적 표현 속에서 생명력을 느낄 때가 있다. 이것은 예술작품이 생태적 생명을 취하고 있지는 않으나 작업과정 속에서 발휘된 인간의 자연성이 작품 속에서 생명력 있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은 어떤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로 존재하며, 특정한 부분을 지목해서 보더라도 완성된 상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자연은 미적 판단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한다. 숲속의 풍부한 변화와 깊이를 만들어내는 수목들의 어느 부분을 바라보더라도 아무런 어색함이나 부족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작위적인 시도와 다른 생성원리가 자연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창의적 활동의 결과물을 통해서도 자연 상태와 같은 독립적 완성도를 느끼게 될 때가 있다. 예술가들은 때때로 작품 스스로가 작업을 이끌어가며 마침내 작가 자신이 더 이상 개입할 수 없는 독립된 작품으로서 완성되는 경험을 할 때가 종종 있는데, 이렇게 완성된 작품은 절로 그렇게 움직이는 자연과 유사한 감흥을 제공하곤 한다. 자연의 섭리와 창작활동을 이끌어가는 창의성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은 자연과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는데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창조적 힘을 각기 ‘자연의 자연성’과 ‘인간의 자연성’이라는 말로 칭할 수 있을 것이다. 동서양의 탁월한 예술가들이 공유했던 이 창조정신은 자연미술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미술형식을 통해서 새롭게 드러나고 있다. 전통적인 미술에서의 자연은 제작과정에 간접적으로 관여하지만 자연미술에서는 제작과정에 뿐 만 아니라 작업이 끝난 이후에도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자연미술은 자연공간을 단지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예술적 의지가 균형을 이루는 지점을 찾아 움직인다. 따라서 자연미술은 자연으로 인해 작업이 완성되고 작업이 끝난 이후에도 자연이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서로를 내맡김으로서 자신을 생성시켜나가는 자연의 자연성과 인간의 창작의지가 만나는 그곳에서 일종의 ‘미술상태’가 발생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본인은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자연미술은 山川草木 뿐 아니라 자연생태작용의 환경이 되는 빛, 바람, 소리, 색깔, 그리고 자연 현상 속에 내재된 질서 모두와 관계하며, 자연은 인간의 접근 방식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품에 참여한다. 자연과 더불어 작업하기 위해서는 실내작업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즉 기술적, 감각적 손재간을 바탕으로 하는 기존의 회화 제작 방식과는 다르며 야외공간에 인위적 구조물을 들이밀면서 개념적 성취를 이루어내는 야외설치와도 거리를 유지한다. 자연미술은 자연을 단지 대상과 재료로만 다루지 않으며, 자연을 정의하거나 해석하지도 아니한다. 자연현장에서 나무와 그림자, 풀, 돌, 파도 등을 통해 발생되는 아이디어는 자연과 나와의 연결루트를 만들고 이런 연결 상태(방식)가 곧 미술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즉 자연과 인간의 생각이 시각적 개념적 결합을 이루며 자연과 인간 사이의 ‘미술상태美術狀態’가 된다. 이러한 결합 상태는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이 자연을 대상으로 작업하거나 자연재료를 가지고 설치작품을 한다고 했을 때 나타나는 양상과는 사뭇 다른 방식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어느 한 쪽이 또 다른 한 쪽을 완전히 장악하거나, 두 가지의 특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머금듯 하나로 존재하면서도 각각의 특질을 서로 훼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자연과 인간의 행위가 서로 맞물린 구조를 가짐으로써 主와 客의 구별 없이 서로가 서로를 새롭게 하는 생성구조를 지닌 것이 자연미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특징이야말로 인간의 예술적 의지가 자연에 대해 일방적 해석을 가함으로서 빠지게 되는 허위의 늪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 무한으로 이어지는 세계와 연결됨으로서 예술작품의 의미가 극대화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자연미술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예술적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연과 인간의 예술적 균형을 추구하는 자연미술이 인간의 삶의 태도를 바꾸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나온 인류의 역사를 통해 예술가들이 시대의 변화에 제일 먼저 반응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지금의 자연미술운동은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상생해야 하는지에 대한 예표로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III. 나도 한번 해보고 싶은 자연미술 자연미술도 다른 미술운동과 마찬가지로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며. 평면을 떠나 現實物과 오브제를 다루었던 현대미술의 방법론과, 풍경화의 실재 현장인 자연 속에서 작업했던 대지예술 등에서 그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과정과 행위, 그리고 사진 등의 매체를 이용한 개념적 표현 방법으로부터 자극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1981년 창립되어 활동한 야투그룹의 자연미술가들은 현대미술의 복잡한 이론을 전제로 자연과 만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의 현대미술 작가들처럼 ‘미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자기규정의 문제를 가지고 자연을 대했었다면 결국 미술을 위해서 자연을 도입하는 방식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연을 작품 안으로 받아들임에 있어서 자연과 인간 사이를 왕복하는 인간의 자연성을 통해 자연과 소통하기를 원했으며 마침내 ‘자연의 자연성’과 ‘인간의 자연성’이 미술이라는 형식 속에서 직접 만나되,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서로 작용하는 ‘자연.미술’를 경험하였다. 반면에 자연에서 작업하는 많은 작가들이 자연 속에 작품을 밀어넣는 방식을 취함으로서 ‘자연미술 Nature Art’이 되기보다는 ‘자연속의 미술 Art in Nature’이 되고 있다. 그러나 자연과의 적절한 ‘관계 맺음’이 없이 단지 자연물만을 이용한 작업은 자연물 설치에 머무르게 되고, 여기에는 자연과 작품이 실질적으로 함께 작용하지 않으며 살아있는 자연과 인간 의식의 깊은 작용이 결여되어 있다. 즉, 자연미술의 미적 가치는 자연과의 관계맺음을 위한 충분한 사유 작용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서로간의 소통을 위한 통로를 확보했을 때 찾아지는 것이며, 여기에서 사유 작용이란 자연을 관리하고 삶의 편리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일방적 정신작용과는 다른 사유작용이며 그것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흘러나온다고 할 수 있다. 자연미술가들의 작업은 살아있는 자연 속에 자신의 주거지를 만들고 자연 상태의 도구들이나 생생한 자연현상을 이용해 삶을 영위했던 원시 인류의 생활 방식을 작업에 반영함으로서 인간문명 이전의 삶의 원상을 회복한다. 따라서 자연미술은 현대인의 가슴 한 켠에 남아있는 삶의 본향을 일깨워냄으로서 잊혀진 미적정서를 환기 시키는 것이다. 자연미술은 관람자들로 하여금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표현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현상은 작가와 자연과의 소통이 관람객에게 전달되어지는 과정이며 자연미술이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회복을 위한 인간의 태도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IV. 자연미술 미학의 선명성을 위한 질문 최근 들어 한국의 지역 곳곳에서 자연미술 경향의 미술제들이 열리고 그에 따라 자연 속에서 작업하는 작가도 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행사들은 하나의 미술운동으로서 보다는 이벤트성 행사의 색채가 짙다. 이러한 움직임을 일종의 유행을 따르는 아류거니...하고 무시하기에는 여러가지 짚어봐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아직 명확한 자연미술의 미학적 영역을 확보하기도 전인데 불분명한 성격의 자연미술제들이 난립함으로서 정작 자연미술의 고유한 성격이 희석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야투를 중심으로 한 자연미술운동이 파괴력 있는 힘으로 작용하지 못한 것은 지역미술운동을 소홀하게 여기는 미술계의 풍토가 한 가지 원인은 될 수 있으나 외부로만 그 탓을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자연미술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들의 소박한 제작태도가 주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자연물을 이용한 조각적 상상력에 머무르는 작업은 자연미술의 특성을 살려내지 못하며, 맹신적 자연친화 정서를 바탕으로 한 막연한 작업들은 사람들의 시각과 정신 사이를 파고드는 예술성을 갖출 수 없다. 특히 자연물을 가지고 결국 눈 감각에만 호소하는 작업들이나 모방적 범주에서 미술적 의미를 찾는 일은 자연미술을 다시 전통적 미학의 영역으로 후퇴시키고 있다는 생각까지도 갖게 한다. 자연미술이라는 새로운 미술이 미학적 논점을 또렷하게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위와 같은 작품들과의 구별 없이 자연미술계가 형성되어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그간의 성과를 분석하면서 그 나아가야 할 방향을 숙고해야하는 시점에 왔다. 자연미술의 여러 가지 혼란스런 문제들을 중심으로 진지한 토론이 필요할 것이다. 자연미술의 미학적 성격을 선명하게 세워나가지 못하면 한국의 자연미술은 세계자연미술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예술세계를 열기위한 一步가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미술을 열어가는 작가들에게 있어서 한걸음의 전진은 창조적 사명 같은 것이기도 하다는 것또한 알고 있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동료 자연미술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봄으로서 창조적 노선투쟁을 제안하고 싶다. 자연미술은 단지 자연물(자연)을 이용하는 미술인가? 이 질문은 자연미술의 미학적 영토가 어떻게 독립적이며 다른 미술과 어떤 점들을 공유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며, 개념적으로 말이 되면 미술이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기도하다. 또한 자연미술의 방법론이 회화, 사진, 영상 등 실내작업으로의 확산이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이기도하다. 한국의 자연미술운동의 중심에서 역할을 했던 야투가 과거의 성과를 진화시키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고 있거나 도리어 과거의 미술로 되돌아간다면 그것은 너무나 아쉬운 일이라 할 것이다. V. 자연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 : 소통 오늘날 자연은 인간의 무분별한 횡포에 대항적 반응을 하고 있다. 이제라도 자연과의 진정한 화해를 위해 인간의 태도를 수정하지 않는다면 전 인류의 불행은 생각보다 빨리 닥쳐올 것이다. 자연은 단지 말이 없을 뿐, 인간의 행위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우리의 생존 환경을 변화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윗글에서 나는 인간에게 내재된 자연성을 통해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할 수 있을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인간과 자연 속에 내재하는 이 자연성을 매개로 자연과 새롭게 만나고, 자연과의 긴장감 있는 균형을 이끌어냄으로서 자연미술은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소통을 위한 예시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제 자연미술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의 형식을 미술로 풀어냄으로서 미술사의 한 장을 새로 쓰는 창의적 소명을 실천해나가야 할 것이다. 각각의 삶의 방식이 존중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삶의 통일성을 상실함으로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판단할 준거를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삶의 통일성과 보편적 가치의 회복을 위해서는 우리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기본 전제를 다시 생각해야하며 이를 통해 지극히 사적인 영역으로 흘러들어가 왜소해진 미술을 구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람과 자연이 서로의 존재를 충만하게 드러내는 자연미술 작품들이 이 세계의 미래를 설계할 새로운 정신에 풍부한 영감과 에너지를 공급하게 되기를 바란다. 인류의 출현 이후의 모든 문명의 역사를 이끌어 내고도 여전히 모자람이 없는 자연과, 끊임없는 철학적 정의와 과학적 확인을 거듭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이 신비로운 자연과의 예술적 소통을 통해서 우리는 신께서 부여한 인간 존재의 정당한 위치를 찾아야 할 것이다. 200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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