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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no image ‘Cross point -▲▲로부터’ - 의미 있는 ‘시공時空의 사건’을 꿈꾸며
도병훈
2962 2015-05-22
‘Cross point -▲▲로부터’ - 의미 있는 ‘시공時空의 사건’을 꿈꾸며 도 병 훈(작가) 1. 21세기 들어서도 세계는 끊임없는 갈등으로 수많은 비극이 일어나고, 19세기 말 이래 숱한 제국주의의 침략 사건으로 점철된 동북아의 질서도 재편되는 형국이다. 이 와중에 한반도는 아직도 분단이라는 냉전 체제의 유산이 드리운 짙은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역사, 경제, 문화, 종교, 환경, 예술 등 이 모든 영역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서로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우리의 문제는 곧 세계의 문제이기도 하니, 국지적이고 미세하게 보이는 현상이나 사건에 대해서도 근본적이고 다각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근대 이후 극히 짧은 시간에 개발이란 명목아래 범지구적으로 자연이 훼손되어 왔으며, 그 부작용으로 기후 변화까지 초래되는 상황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례없이 급속한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이전의 모습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변화가 생긴 곳이 많다. 자연은 스스로의 복원력으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며 새로운 자연을 생성하고 있지만 우리는 도처에서 그 상흔과 마주하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나라의 서해안과 남해안의 대부분은 ‘코흐 눈송이’를 닮은 ‘프랙탈(fractal)’한 비-유클리드적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무수한 주름은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의 흔적이다. 주름 속 주름인 갯벌 뻘밭의 무늬들은 시간의 미립자들이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진행된 대규모 간척 사업으로 서해안 곳곳은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땅이 되었다. 너무도 짧은 시간에 실로 장구한 시간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렇게 바다가 육지로 바뀌는 과정에서 한 때 이곳에 깃들었던 정주민들은 쫓겨나고 그들의 삶터인 자연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다. 이 대규모 파괴의 명분은 바로 새 땅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형도 역시 이러한 새 땅을 위해 비워진 땅으로 이제는 더 이상 섬도 아닌, 두 동강난 돌산으로 남아 있다. 자연이 무조건적 지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은 진작부터 있어 왔다. 자연과 개발은 흑백 논리로 재단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며, ‘환경’ 또는 환경보전’이라는 미명으로 감당할 문제도 아니다. 환경 문제는 여러 복합적인 측면이 얽혀 있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시대는 무엇보다 자본의 논리가 지배적이다. 그런데 이 자본이 특정 계층이나 집단만의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이 되어버리면 환경 문제도 자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최근 문화 선진국일수록 이러한 문제에 대해 다각적으로 성찰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조성하려는 실천적 움직임이 활발하다. 산업화 시대의 낡은 유산이나 개발의 잔재를 무조건 없애는 대신 재활용해서 공적 의미와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가치를 지닌 새로운 삶과 문화 예술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예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자연과 장소에 대한 심미적 감성이나 예술적 가치에 주목하고 이를 창조적 가치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2015년 매홀환경미술제 ‘Cross point -▲▲로부터’는 ‘매홀자유창작네트워크’에서 추진된 것이다. 매홀(買忽)은 수원, 화성, 오산의 고구려 때 지명으로 그 의미는 ‘매’는 ‘물’을 뜻하고 ‘홀’은 ‘성(城)’이므로 ‘물이 많은 땅’이란 뜻이다. 수원의 ‘프로젝트그룹 문화 복덕방’, 오산의 ‘스페이스 까마귀’, 화성의 ‘스페이스 알’을 거점으로 참가한 제3세대 프로젝트 대안공간인 ‘매홀자유창작네트워크’는 물리적 문화공간의 역할을 넘어선 문화생산자인 작가와 향유의 주체인 대중을 연결하는 소통과 진화를 꿈꾸며 결성되어, 로컬 문화예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하는 단체이다. 이들은 작가와 미술사학, 고고학, 생태인류학, 향토사학, 미학, 예술비평, 큐레이터, 공연, 문학, 음악, 전시기획자(정형화 되지 않은 도전하는 젊은 작가 혹은 그룹과 나름의 방식과 담론을 통하여 저변 확대와 진화의 과정에 들어선 작가 그룹)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연합하여 그들 고유의 인식 지형과 작업 공간을 네트워크화 하고 있으며, 지역을 넘어선 문화예술전반의 실천 가능한 대안 행위를 모색해왔다. 이들은 구체적 활동으로 2014년 12월 수원 매향동 빈 집+일파문화공간에서 <예술을 믿습니까?> 전을 개최하였다. 이들이 전시 주 공간으로 삼은 ‘빈 집’은 자본주의 시장의 전시 공간인 ‘화이트 큐브’와 극점을 이룬다는 점에서 그 문제의식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어 2015년 1월, 서해 시화호 내 형도를 답사하면서 미술로 가능한 새로운 방식의 접점을 탐색한다. 그리고 발상에서 시작하여 전시회를 기획하고 국제전으로까지 확장하는 계기를 금년 초에 마련하게 된다. 2.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는 전 국토의 70%가 산인데다 그 형세가 다채롭고 주름이 많다. 그 중에서도 서해안은 남해안과 함께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다. 육지에 바닷물이 들어오면 산줄기는 반도나 ‘곶[串]’이 되고, 골짜기는 ‘만(灣)’이 된다. 일반적으로 곶은 반도보다 규모가 작다. 또한 사취가 발달하면서 곶이 형성되기도 한다. 또한 곶과 같은 의미로 ‘갑(岬)’과 같은 한자도 썼으며, 단(端)·각(角)·취(嘴)·말(末) 등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경기도 시흥시 월곶동 등에는 월곶(月串)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월곶은 달곶이(달고지)가 한자로 표기된 곳이다. ‘달’은 산의 옛말이다. 즉, 월곶은 산이 돌출한 곳을 의미한다. 형도의 ‘형(衡)’은 저울 형자이다. 바닷물의 주기적 파동(波動), 즉 조수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저울 역할을 한 섬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지명의 역사는 이 땅의 사람들이 자연을 인식해온 세계관을 드러낸다. 주름이 많은 지형은 사람의 감정 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감정이 풍부하고 흥과 한의 양극 사이에서 역동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사계절의 변화와 함께 이러한 지형의 특성도 간과할 수 없다. 한반도의 지형적 특성인 주름 많고 굴곡진 비-유클리드적 공간이 우리 전통 예술의 프랙탈한 역동성과 구성짐의 특성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형도 지역은 여러 측면에서 헤아릴 수 없는 다층적 공간이다. 그리고 이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이 땅에서 그 어느 지역보다 밝음과 어둠이 교차한 사연을 많이 간직한 역사적 질곡의 땅이다.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원래 마한과 백제의 땅이었다가 고구려 땅이 되고 잠시 백제가 탈환했으나 곧 신라의 땅이 되었다. 이 같은 이 지역에 대한 치열한 쟁탈전은 신라가 이곳을 점령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신라는 이 지역 덕분에 삼국통일의 거점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형도 아래로 깊숙한 만이 있는 지역이 바로 옛 당항성(唐項城)이 있던 곳이다. 우리의 고지도인 <청구도>와 <대동여지도>를 보면 이 지역은 몇 개의 큰 섬과 작은 섬이 바다에 떠 있다. 어도와 대부도, 선감도 등이 보이지만 형도란 지명은 청구도에도 대동여지도에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위치상 ‘결오리도’나 그 주변 섬이 형도로 추정된다. 이러한 고지도를 들여다보면 우리 선조들의 세계관이 드러나는 산과 물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특유의 지세와 당대의 사회 문화, 역사를 알 수 있다. 청구도와 대동여지도를 보면 형도 바로 아래 ‘해문(海門),’ 즉 ‘바다의 관문’이란 지명과 함께 중국과 왕래하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한 ‘남양’이란 지명이 크게 표기되어 있다. 특히 청구도에는 남양의 서쪽 해문과 청명산 사이에 ‘고당성(古唐城)’이라고 적혀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고당성이 표기되지 않고 남양지역 왕모산, 청명산 아래 작은 산, 비봉산 등에 옛 성을 뜻하는 둥근 구멍을 산 모양의 형상 가운데 표시해 놓았다. 그런데 현재 학계나 이 지역에서는 남양의 동쪽에 위치한 비봉산(현 구봉산)의 고성을 당항성으로 보고 성까지 복원해놓았다. 그리고 산꼭대기 위에 삼각 뿔 형태의 기호가 있는 곳은 통신 역할을 한 옛 봉수(화)대를 뜻하는데, 어도 근처 해운산과 염불산에 이 기호가 보인다. 형도에도 산꼭대기에 봉화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청구도에도 대동여지도에도 표기되어 있지 않다. 이 지역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꼽히는 원효(元曉,617~686)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땅이다. 원효는 7세기 이전 인도와 중국에서 격렬하게 요동치던 불교사상을 종합함으로써 최전성기를 이룬 7, 8세기 동아시아 불교를 대표하는 사상가였다. 7세기 중엽 이전의 중국불교는 인도불교의 수용 단계였다. 5세기 중국 남북조 시대의 역경승인 구마라지바(鳩摩羅什 343~413)에 의해 전해진 나가르주나(龍樹150년경-250년경)의 불교 이론은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는 연기(緣起) 중심의 ‘공(空)’사상이었다. 즉 유(有)에도 무(無)에도 집착하지 않은 공(空)인 중(中)의 지혜, 이것이 나가르주나가 말한 ‘중관론(中觀論)’이었지만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능동적인 니힐리즘에 이르지는 못했다. 중관불교 뒤에 중국에 수입되었던 불교가 바스반두(世親,5세기경의 인도 학승)의 유식(唯識)불교였다. 이 사상은 감각기관에서 무의식에 이르기까지 ‘식(識)’이 없으면 존재가 없다고 보고 여덟 개로 인간의 식을 정세하게 나누어 인류의 철학적 사변에서 인간의 마음에 대해 가장 정밀하고 심오한 분석을 행했다고 평가된다. 그렇지만 식 중 최고의 식인, 알라야식도 어두운 업(業)의 그림자 밑에 두었다. 6세기 말에는 지의(智顗,538-597)에 의해 천태학(天台學)이 세워지지만 인간의 악, 번뇌의 깊이를 응시하는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6세기, 7세기에 걸쳐 민중 사이에 유행했던 정토교는 이 세상에 대한 절망감으로부터 미래의 아미타 정토를 꿈꾼 사상이었다. 이와 달리 7세기 이후 동아시아에서의 불교는 세계와 인간을 긍정하게 된다. 이 무렵 인도와 중국 초기 불교의 어두운 그림자를 벗어 던지는 선구자 역할을 한 이가 신라에서는 원효이며, 중국에서는 원효보다 한 세대 아래인 법장(法藏, 643~712)을 꼽을 수 있다. 원효가 도달한 사상적 차원은 스펙트럼이 다양한 그 삶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661년(문무왕 원년) 원효는 의상(義湘,625~702)과 함께 중국 당(唐)의 현장(玄奘602~664)이 인도에서 새로 들여온 신유식(新唯識)을 배우기 위해 바닷길로 당나라로 떠나고자 이곳 당항성 근처에서 땅막(土龕 움막)인줄 알고 무덤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어젯밤 잠자리는 땅막이라 편안했는데 오늘밤은 귀신의 집(무덤)에 의탁하니 마음이 어지럽구나. 알겠도다!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墳)이 둘이 아님을. 삼계(三界), 즉 세상의 온갖 현상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며, 모든 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 나는 당에 가지 않겠다!(前之寓宿, 謂土龕而且安, 此夜留宵, 託鬼鄕而多崇, 則知! 三界唯心, 萬法唯識。心外無法, 胡用別求? 我不入唐!)’ 원효는 이 사건 이후 분황사로 돌아가 이전의 불교사상을 종합한 사상을 제시하였다. 신라에서의 불교 공인 144년 만에 스스로 주체적 위상을 갖는 출발점이 이곳 당항성 지역이었던 것이다. 원효 사상의 핵심은 큰 바다와 같은 넓은 마음인 ‘일심(一心)’으로부터 여러 개로 흐르는 지류와 강같은 서로 다른 주장이나 신념을 화해시키는 ‘화쟁(和諍)’ 또는 ‘원융회통(圓融會通)’이며, 이를 바탕으로 ‘무애(無碍)’, 즉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다. 원효 사상을 대표하는 핵심어인 ‘일심’은 『대승기신론』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해석한 그의 저서인 『대승기신론 소· 별기』에 잘 표명되어 있다. 『대승기신론』은 깨달은 사람의 마음을 마음이 맑은 ‘지정(智淨)’과 헤아릴 수 없는 작용을 한다는 ‘불사의업(不思議業)’ 두 가지로 본다. 원효는 『대승기신론 소·별기』에서 욕망이나 유행에 휩쓸리는 마음(무명)과 자성, 즉 청정한 마음(진여)을 차이를 두어 해석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그 둘이 다르지 않다고 본다. 『대승기신론』과 원효에 의하면 무명의 존재는 바다의 원래 모습을 망각하고 파도만을 바다로 보는 것과 같다. 원효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바다가 고요하고 잔잔하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바다와 파도는 서로 나눌 수 없는 세계이다. 오히려 바다의 성질을 알 때 미풍에도 섬세하게 반응하는 물결 그 자체가 아름다울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대승기신론』에서의 ‘불공(不空)’은 공(空)의 부정(否定)이다. 이에 대해 원효는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有)를 부정하고 공(空)을 좋아함은 나무를 버리고 큰 숲에 다다름과 같다, 비유컨대 청(靑)과 남(藍)이 동체이고, 얼음과 물이 같은 원천이고, 거울이 만 가지 형태를 다 용납함과 같다”고. 원효의 교학은 유식의 심식설을 바탕으로 인간의 마음을 치밀하고 정교한 논리로 분석하는데, 이러한 논리적 분석의 치밀함은 그가 지은 『판비량론』에 잘 나타난다. 원효는 언어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인간들이 이론이나 세계에 대해 집착하고 논쟁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언어가 지닌 이중성, 즉 진리를 전달하기도 하지만 왜곡할 수도 있으므로 분열된 생각 이전의 상태인 마음의 근원을 회복하면 누구나 ‘붓다(buddha),’ 즉 ‘바르게 아는 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마음의 근원이 넓은 마음, 곧 ‘일심(一心)’이다. 원효에 따르면 일심은 모든 법, 즉 모든 존재와 현상의 근거이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을 해석하면서 일심에서 보면 미혹되고 망령된 생각이 사라진 ‘진여(眞如)’와 상대적이고 현상적인 ‘생멸(生滅)’이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따라서 마음의 근원을 회복한다는 것은 차별 없이 만물을 사랑하는 자비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원효는 일심을 『열반종요』에서는 일미(一味), 즉 ‘한결같은 맛’으로도 설명한다. 그러므로 세움(立)과 깨뜨림(破), 줌(與)과 빼앗음(奪), 같음과 다름, 있음과 없음, 가운데(離邊)와 가장자리(非中), 분열된 마음이 사라진 일심과 일미의 세계가 바로 그가 꿈꾸는 정토(淨土)이다. 이는 현상의 다양성이나 차이를 부정한 전체주의적 획일성을 지향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타자의 관계를 좀 더 깊게 들여다보라는 극히 현실적 메시지이다. 모든 것을 융합하고 아우르는 화쟁 사상과, 특정한 세계에 머물지 않는다는 ‘부주열반(不住涅槃)’ 사상, 그리고 논리와 주관과 객관을 부정한 직관적 실천인 ‘일미관행(一味觀行)’이 원효 사상의 주요 핵심인 것도 이러한 해석과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원효의 사상은 당시 중국을 대표하는 불교사상가인 법장과 징관(澄觀,?~839) 등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까지도 그 파장은 진행형이다. 『삼국유사』에서 원효를 다루는 제목이 ‘원효불기(元曉不覊 ; 어떠한 굴레와 걸림이 없이 자유로운 삶을 산 원효라는 뜻임)’인데서 알 수 있듯, 그는 단지 사상가에 머물지 않은 삶을 살았다. 인도와 동아시아 문명 간의 사상적 교류의 정점에서 다양한 주장을 일심, 즉 넒은 한 마음으로 회통시킨 원효는 나아가 표주박을 두드리고 ‘무애가’를 노래하며 춤을 추는 해학적 흥과 풍류 정신의 실천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자유롭고도 흥취 넘치는 예술가적 삶의 면모로 해석할 수 있다. 3. ‘리좀’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어느 대학의 한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정말 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 옆을 스쳐갑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를 알지 못한 채 죽고, 그것을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근현대 주요 사상가들은 인간의 지각과 직관이 미리 정해진 관념이나 규범적 진리 아래 종속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 이후 근현대의 사상가들이 중요하게 다룬 주제 중 하나는 예술의 힘이었다. 현대예술은 그 특성상 개념과 가치에 동화되지 않은 채,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의 얼굴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근현대 주요 예술가들은 예술에 대해 개념 체계들이 갖는 은유적 기원을 상기시키고 이 세계를 이해하는 또 다른 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근대 이후 예술가들이나 예술작품의 존재 방식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랐으며, ‘미의식’도 변천되어 왔다. 현대미(예)술은 근대미(예)술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제기하는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결과, 다양한 존재 방식의 현대미술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미술은 상업자본주의 상품이나 의미 없는 행사의 수단으로 전락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순수한 열정과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가려는 치열한 정신이 요구되며, 그만큼 다차원적이고 지속적인 실천만이 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미적, 예술적 가치는 지역과 시대 상황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점과 점이 만나 선을 이루어 그물이 만들어지고 그 그물은 끊임없이 출렁이며 새로운 구조를 만든다. 이 구조는 불교 화엄사상 용어로 표현하면 ‘중중무진(重重無盡, 무한히 다층적이고 복합적의 구조)’으로 중첩되어 있고 우리는 그 구조를 이루는 한시적 존재이다. 이처럼 단일한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개의 사과는 저 혼자 가지 끝에 달린 열매가 아니다. 모든 것은 구조다. 은하단이 거대한 빈 공간을 사이에 두고 은하들이 모여 있는 것이라면, 원자도 원자핵과 전자 사이에 상상할 수 없이 광대한 빈 공간을 사이에 두고 있다. 원자핵이 수원 행궁 앞 축구공이라면 전자는 서울시청 앞에 떠도는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차원에서 크기와 거리는 같은 것의 다른 이름이다. 온갖 크고 작은 구조를 만들어내는 극소량의 원자와 나머지 대부분의 허공으로 변화하는 공간이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단일한 ‘시점’에서 볼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은 없다. 우리 인간 역시 아무 의미도 없는 티끌이며, 동시에 우주 전체만큼이나 크고 복잡한 존재이다. 우리는 허공에 부유하는 새털같이 가벼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태산보다 무거운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이번 미술제가 기하학적 시점(a geometrical point of time)의 단발적인 이벤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세상은 급속하게 변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린 채 멈추어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지만 만남과 인연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항상 좀 더 나은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야 한다. 파괴와 자연이 공존하는 형도 지역에 축적되고 집약된 온갖 문제 상황은 이 지역만의 특별한 역사성과 함께 이제 우리 예술가들의 국제적 화두가 되었다. 간척 사업 이전의 형도 지역이 한반도의 그 어떤 곳보다 주름과 굴곡이 많은 비-유클리적 공간이었음에도 불과 수 십 년 만에 유클리드 공간으로 변모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어떤 경우에도 다시 이전의 공간으로 환원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끝없는 자본을 투입하는 개발의 논리만으로 이곳의 자연을 훼손하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다. 정치적인 개입이나 경제 논리만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정치는 정권 획득이, 경제 논리는 이익이 우선이지만 참된 예술가들은 이러한 특정 집단이나 계층, 또는 자본을 위한 차원을 넘어 더 나은 공생과 협력을 위한 본 프로젝트에 동참한다. 문화예술적 감성을 바탕으로 한 프로젝트일 때 좀 더 온전하고 종합적인 미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질의 일부에서 일어난 주기적 진동이 퍼져 나가는 현상인 파동은 비단 물리적 현상에 국한되지 않으며, 우리의 정신에도 영향을 미친다. 서해의 역사, 문화적 상징성을 지닌 형도가 다시 한 번 풍성한 사유의 파장의 중심, 즉 현재의 ‘교점’이 된다면 이미 지워져버린 주름진 세계의 이면을 사라지기 전에 밝힐 수 있다. 따라서 참여 작가들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타인과 환경에 대한 저마다의 교류를 통해 그 자신의 진폭을 확장할 수 있다. 뜻 있는 예술가들이 한 마음으로 협력한다면 그 시너지가 능히 우리의 아름다운 미래에까지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2015.5.18)
162 no image 마크 로스코와 윤형근 예술세계의 단면
도병훈
2781 2015-05-14
마크 로스코와 윤형근 예술세계의 단면 지금 서울의 예술의 전당에선 마크 로스코 전(Mark Rothko,1903-1970)이, 청와대 근처에 새 전시장을 마련한 PKM갤러리에서는 윤형근(1928-2007)전이 동시에 열리고 있다. 마크 로스코 전 도록은 2권의 두꺼운 책으로 만들었는데, 한 권은 그림 위주로 한 권은 강신주라는 젊은 철학자가 로스코의 삶과 예술에 대해 쓴 것이다. 그의 글은 로스코의 삶과 작품에 대해 심도 있게 접근해서, 국내 그 어떤 미술비평가가 쓴 글보다 참신했다. 윤형근전 도록은 영문판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마크 로스코는 생전에 예술가로서 누릴 수 있는 호사와 영광을 다 누렸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독이 되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윤형근은 최근 단색화 미술이 부각되면서 미술시장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그의 작품에 대해 깊이 있는 비평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 이들의 작품이 대대적으로 전시되고 고가에 거래되는 이면과 달리 작품의 예술적 가치와 의미는 별개의 문제이다. 평생 고독하게 자신의 길을 걸었던 두 작가가 성취한 독자적 작품들은 화면이 매우 단순하고 색 면만으로 화면을 구성했다는 유사한 특성을 공유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의 그림은 매우 다르다. 삶의 시간과 공간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두 작가는 당대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극한적으로 경험했다. 로스코는 1,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시대에, 윤형근은 20대 초반에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이다. 로스코는 잭슨 폴록과 함께 전후 미국 추상미술을 대표는 작가이다. 로스코는 예일대 철학과를 중퇴한 후 초기에는 20대 후반 아이들을 가르치며 오히려 아이들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이는 “예술가는 아이들처럼 어떠한 검열도 없이 단순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그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초기의 구상적, 신화적 그림에서 이른바 다양한 형태를 뜻하는 ‘멀티 폼’ 그림에서는 부유하는 듯한 여러 개의 색 덩어리를 그리다가, 1949년 후반부터는 캔버스의 크기도 커지고 색 덩어리를 사각형으로 확정하고 몇 개의 색 면, 또는 상하 두 개의 색 면만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색의 관계나 형태, 그 밖의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단지 기본적인 인간 감정들, 그러니까 비극, 황홀, 숙명 등을 표현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내 그림을 대할 때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린다는 사실은, 내가 인간의 기본 감정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내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 느낀 것과 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 같은 마크 로스코의 작품에 대해서는 독일 미술사학자 베르트 하프트만의 다음과 같이 통찰력 있는 해석과 평가가 있다. 그림은 어두운 빛을 받으며 바탕으로부터 솟아오르고 또 바탕으로 가라앉는 몇몇 색 면들로만 명료하게 스크린이 되었다. 이들 빛의 스크린들은 틀에 끼워진 그림들과 더더욱 공통점이 없다. 그것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그 속에 정령이 살고 있는 거대하고 무한하며 우주적인 공간을 상징한다. 오직 암시적이고 최면을 거는 듯한 색채의 힘만이 관념과 내용을 결정한다.1) 로스코의 작품이 이같이 바탕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듯이 보이는 것은 여러 겹의 색을 겹쳐 표현했기 때문이기보다는 색 면의 모서리를 둥글게 하고 가장 자리 부분을 흐리게 처리한 데서 오는 느낌이다. 이와 달리 윤형근의 작품은 마크 로스코보다 더욱 단색에 가까우며 여백과 화면이 어우러져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데 때로는 여백이 더 비중이 큰 듯이 보이기도 한다. 윤형근의 그림은 울트라마린 블루(군청색)에 엄버(암갈색 안료)를 섞은 색과 캔버스의 바탕 천으로 이루어져 있다. 린넨(마) 캔버스에 수직으로 내리 그은 색 면이다. 그래서 가장자리 부분만 번지면서 스며들고 배어나온 흔적이 드러난다. 칠한 부분은 짙은 색이지만 옅은 색을 반복해서 칠했기 때문에 맑고 깊은 느낌을 준다. 그의 그림은 그린 부분과 그리지 않은 여백 부분의 화면 구성이 조성하는 흔적으로 충만하다. 검은 청색과 다갈색을 섞은 ‘번트 엄버 앤 울트라마린 블루(Burnt umber and ultramarine blue)’는 윤형근이 구축한 독창적인 회화 세계로, 1974년 이전에는 푸른색이, 이후에는 거의 짙은 원두커피 색에 가까운 암갈색조로 그렸다. 전시는 1970~80년대 초기작들 위주로 꾸려졌다. 세로 1m가 넘는 대작 9점과 소품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이번 전시회를 PKM 갤러리의 대표는 “윤형근은 단순히 단색화 작가로 분류하기보다 ‘담화淡畵’의 카테고리에서 새롭게 해석돼야 한다.” 면서, “그리기를 넘어서 획 긋기와 같은 전통 서예의 방법론이 현대적인 재료를 통해 구현된, 현 시대의 문인화 같은 작품”으로 본다. 이런 특성이 있긴 하지만 윤형근의 작품은 근본적으로 험한 시대를 살아남은 자로서의 실존적 산물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 중에는 전쟁 부상자들을 출혈 부위를 감싼 붕대에 배여 있는 피, 또는 1회용 생리대가 없던 시절 월경을 할 때 몸밖에 나온 피를 흡수하도록 샅에 대는 ‘개짐’에 피가 번져 배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도 있다. 후기로 갈수록 색면은 정제되고 기하학적 구성 같은 형상으로 변모되는데, 조형의 근본적인 측면은 이전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귀족적인 외모와 달리 그는 결코 평탄한 삶을 살지 않았다. 한국 전쟁을 전후해서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자로서, 또는 현실 사회와 불화하면서 그러한 현실을 부정하듯 그 울분 같은 것을 그림으로 표출한 것이다. 그의 그림은 그러한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을 치유하는 행위의 소산이며, 바로 이 점에서 윤형근 그림의 독자성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최근 피카소의 한 그림이 2000억에 가까운 금액에 팔려 바로 이전 프랜시스 베이컨이 세운 경매 기록을 경신했다고 한다. 이처럼 현대미술가들 중에서는 신화화되고 우상화 되는 작가들이 많아 그 작품의 값이 천문학적 액수이다. 역설적이게도 현대예술의 미적, 예술적 가치는 이러한 거품 현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성립한다. 어디까지나 감상자와의 관계 속에서 작품의 가치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즉 분별력 있는 감상자에 의해 작품의 가치가 드러날 수 있고, 이로써 그 작품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로스코와 윤형근의 작업은 각각 당대의 세상과 직면했던 삶의 흔적이다. 우리는 캔버스 위에 발라진, 혹은 스며든 흔적을 바라보며 예술과 인생이 무엇인지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2015. 5. 14) 1)The picture became a screen, illumined by dark light articulated only by a very few coloured fields which rise from the ground and sink back in to it. These screens of light have nothing more in common with framed pictures; they symbolise the great, unlimited, universal space surrounding us, in which the numen has its place. Only the suggestive, hypnotic power of colour determines the idea and content. Werner Haftman(1965). 『Painting in the Twentieth Century』, Volume One, New York : Praeger Publishers. p.369
161 no image 김병기 선생과의 만남, '이상‘과 '이야기가 있는 그림'
도병훈
2450 2015-04-27
김병기 선생과의 만남, ‘이상’과 ‘이야기가 있는 그림’ 직업의 귀천이나 배움의 유무, 삶의 길고 짧음을 떠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온갖 풍파를 겪은 사연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역사적 의미를 갖는 시대 상황에 대한 남다른 증언자들이 있는데, 우리 미술계에서는 김병기 선생이 있다. 김 선생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된 불과 몇 년 후인 1916년에 태어나서 100세가 된 지금도 생존해 계신 ‘살아 있는 전설’로, 남한과 북한 공히 다방면에 걸쳐 미술문화 활동과 관련된 ‘최초’의 직함을 가지신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시다. 김 선생의 삶을 들여다보면 단지 미술에 국한되지 않는 우리 근현대사의 이면과 실상으로 확장된다. 이 분이 살았던 당대의 역사는 오래 전의 이야기같지만 현재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급속한 변화의 연속인 우리 근현대사 속 인물은 신화화되거나 망각되어 버린 경우가 많다. 한국 근현대미술의 선구자였지만 동년배인 이중섭이나 박수근에 비해 김병기 선생이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1965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커미셔너로 참가했다가 그 길로 뉴욕에 정착했고 2006년 이후에는 LA에 거주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미술계를 지배하는 왜곡된 신화와 비평적 담론 부재 현상들과도 상관이 있다. 봄비가 내리던 지난 4월 19일, 후배 현대미술작가인 김도희의 주선으로 김병기 선생을 함께 찾아뵈었다. 주1) 오후 4시에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인 평창동 가나아트 센터로 갔다. 경북궁 앞에서 자하문과 세검정을 지나 산세가 수려한 북한산의 산자락 언덕배기에 위치하고 있는 가나아트 센터에 도착하니 때마침 봄이어서 막 새잎이 돋아나는 숲과 봄꽃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전시장에 들어서서 김 선생이 계신 곳을 찾으니 바로 옆에 있는 음식점 겸 카페에 김형국 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와 부인이 동석 중이었다.(*김 교수는 『장욱진: 모더니스트 민화장>(열화당)』, 『우리 미학의 거리를 걷다>(나남)』 등의 책을 쓰신 분이다.) 김 교수님 사모님이 김병기 선생님 바로 옆 자리에 앉기를 권해서 앉은 후, 먼저 내가 집필위원으로서 마무리 단계 중인 김 선생 그림을 실은 고등학교 미술창작 교과서 글을 보여드렸더니, “아주 익사이팅한 일이야!” 하며 좋아하셨다. 내가 집필을 한 단원은 ‘분석과 적용’ 중 ‘생각의 힘을 키우는 작품 분석’인데, 이 중 ‘같은 대상 다른 그림’의 예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과 김병기 선생의 <인왕제색>을 비교하고 분석하는 내용을 교과서에 실었던 것이다. 그리고 작년 12월부터 금년 3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김 선생의 전시회 ‘감각의 분할’전을 보고 쓴 <흩어진 선과 복합적 면의 시공(時空), 김병기의 삶과 예술>이란 비평 글을 보여 드렸는데, 무려 1시간여에 걸쳐 미동도 없이 끝까지 정독하셨다. 나의 글을 다 읽으신 김 선생은 “이 글에 나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있네.” “길게 썼어도 끝까지 읽혀지는 글이야!”라며 과분한 칭찬을 해 주셨다.(단 한 부분 해방공간 시기에 활동한 화가인 ‘문학수’에 대한 내용만 잘못됐다며 그 부분을 지적해주셨다). 또한 이 글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시기에 훗날 발간할 책에 실을 계획이라고 했더니 흔쾌히 그대로 실으면 되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어 미술창작 원고 중 내가 집필을 맡은 단원인 김병기 선생의 <인왕제색>이 실린 글을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으시고는 특히 도판으로 나온 이브 클랭의 작품이나 자코메티의 작품 등을 예로 드시며, “작품 선정이 특별히 잘 됐다,” “이런 내용이 실린 미술 교과서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어요.” 라며, 또 분에 넘치는 칭찬을 해주셨다. 그리고 김병기 선생의 작품에 대한 비평 글에서 밝혔던, 대학원 시절 내가 그린 옛 그림 작품을 포트폴리오 사진으로 보여 드리자, ‘아주 깊이가 있어’라고 호평해 주셨다. 또한 지난 2007년에 내가 쓴 『나와 너의 세계 미술』이란 책을 서명한 후 드렸는데,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끝까지 책을 펼쳐보시되, 특히 현대미술에 대해 기술된 부분들은 눈여겨 읽어 보신 후, “전체 글이 대범하고 보편성이 있어!”, “영어로 번역되어 다른 나라 사람들도 읽어야 할 책이야!” 라는, 또 분에 넘치는 말씀을 하셨다. 이런 일로 시간이 지나가는 바람에 정작 여쭈어 보고 싶었던 질문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질문지를 읽어보시는 것으로 대신하고, 그 중 문학가인 이상(李箱, 1910~1937)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고 했더니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다. 주2) 이상을 만난 계기가 주영섭(朱永涉, 1912~ ?)을 통해서 입니다. 주영섭은 연극 리더로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동생인데, 보성전문을 나와 동경에 있는 법정(法政, 호세이) 대학에 재학 중이었어요. 주3) 세 살 위 친구야. 어느 날(*1936년도 임) 엽서가 왔는데, 일본 말도 아니고 한국말도 아닌 글인데, ‘내가 너한테 갈께!’ 였어요. 그래서 이상을 데리고 왔는데, 이상은 동경에 와서 ‘불령선인(不逞鮮人, 후테이센진)’ 으로 낙인 찍혔어! 주4) 그 뜻은 ‘서스피셔스(suspicious) 조센징’, 의심스러운 사람! 최악의 칭호지! 이상은 당시 20대인데, 처음 이상을 봤을 때 50대로 보일 정도로 몸이 망가진 상태였어요. 주5) 폐는 다 썩어서 몸에서 냄새가 났어요. 동경에 있는 주영섭의 방이 너무 좁아서 이상이 내 방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침대가 하나 밖에 없거든? 일본 유카타를 그에게 입히고 침대에 눕게 하고 나는 바닥에 잤어요! 그런데 이상은 하룻밤을 뜬 눈으로 새웠어! 낙숫물 소리 세느라,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를 세느라 한 잠도 못 잤어요! 내가 그때 ‘다섯 개의 원’을 그렸는데, 이상이 “원이 있구만!” 이라고 했어요. “칭찬도 아니고 까는 것도 아니야!” 그때는 칭찬을 안 해! 그림 뭐 이래! 너는 뭔데? 시시한 놈... 그런 분위기였어요. 수 십 년 지나, 근래인 60년 후 LA에서 붉은 바탕에 이 그림을 다시 그렸어요. 한국 사람은 선, 일본 사람은 색채,... 한국은 내리긋는다고! 완당(김정희), 정선은 내리긋는다고! 외국 사람들은 이런 선을 못 긋는다고! 맨 처음에는 평양, 동경, 서울, 미국, LA ... 이 그림이 ‘클로니클(chronicle)’ 즉 <연대기>입니다. 이 그림의 “붉은 바탕은 ‘차이니즈 버어밀리언’인데, 사람들이 다 좋다고 그래! 원은 사람의 형체로 만들었어! 붉은 색으로 그려나가면서 흰 선이 존재해. 잭슨 폴록과 같아!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거든? 초점이 ‘연대기’가 됐어! 그게 이상의 작품하고 관련이 있어.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상의 그런 얘기하고 내 그림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 그건 나만이 아는 <연대기>야! 거긴 무슨 연대기도 없어! 사실은 그냥 붉은 색과 면이 있을 뿐이지. 거기에 무슨 동경, 평양이 있는 건 아니야,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만 보려고 해요. 이건 동경이고 이건 평양이고, 서울이고 그리고 미국으로 갔다, 그런 애기만을 좋아해요. 내 그림은 안 보고...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우리 다시 만나리(랴)’, 좋은 점은 안 보고, 어디서 만나리에 가슴을 친다고. 그것만 얘기해요. 그건 하나의 미스테익이야! 그런데 김환기는, 그 제목이 그런 얘기를 가지고 있어! 하여튼 나는 그림이 그런 얘기를 갖게 하고 싶어요. 그림이 무슨 얘기를 갖게 하고 싶다고! 현대회화는 이야기가 다 없어졌어! 뻔뻔한 담벼락이 됐다고! 거기서 우리가 뭘 하는 거야! 뻔뻔한 담벼락에서... 박서보는 뭐 이렇게도 하고, 이렇게도 하고... 그러나 그건 대동소이한 거야! 그 뻔뻔한 담벼락에서 갈 길이 없어요. 미니멀리즘으로 가는 첫 단계야! 최소 한 줄... 나는 거기서 다시 형상성을 도로 찾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형상성은 벌써 얘기가 있잖아요. 그러나 과거의 설화적인 형상성의 얘기는 아니야 예쁜 얼굴 그려서 예쁘다, 뭐 성모마리아가 아기를 안고 있다, 성스럽다, 뭐 이런 얘기가 아니에요! 그러나 미술이 어떤 얘기를 가지지 말란 법이 어디 있어! 단지 그것을 설화적으로가 아니라 예술의 본질을 무엇으로 설명하는 거야? 얘기로 밖에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런데 현대예술은 얘기가 다 거의 없어졌어! 그러나 없어진 것도 아니야! 이브 클랭의 작품 같은 것을 보면 캔버스거든! 자동차 바디를 만드는 오일 탱크에 그걸 넣었다 뺀다고! 그러면 캔버스가 찌그러질 거 아니야. 마르는 도중에! 그것을 한 15점을 죽 걸었어. 스위스 뮤지엄에. 1965년에. 나는 그 찌그러진 캔버스에서 감동을 받았어! 이 사람은 오브제를 보는 거예요. 그리는 회화가 물체(오브제)로 변하는 게 이 시점이야. 그리고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같은 박스 속에 살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30평, 어떤 사람은 60평, 어떤 사람은 100평, 그런데 너희 집은 30평이지, 우리 집은 90평이야 자랑하고 있다고! 어처구니없는 얘기에요! 마음속으로 인간이 박스 속에 살고 있는 것이 행복한가, 아닌가를 우리는 검토해야 하는데 박스 속의 경쟁들을 하고 있다고! 이런 어리석음이 우리 서울을 지배하고 있어! (그래서) 강남의 아파트는 좀 비싸! 어처구니없는 얘기예요! 한데 그런 것을 프랜시스 베이컨은 박스 속에 밥 먹고 오줌 싸고 자고 하는 것을, 하나의 놈팽이들이 하는 그것을 그대로 그렸어! 선으로! 프랜시스 베이컨이 역사상 현대미술가로는 제일 높은 가격으로 팔렸어! 돈 많이 받았다고 하는 얘기 아니에요. 그런 평가를 받았다고 하는 예기예요. 그건 상당히 좋은 거예요. 그런데, 그런 평가의 시작은 반 고흐의 <해바라기>입니다. 이 <해바라기>를 일본 야스다 깅코 (安田銀行 *화재 보험회사)가 세계 옵션에서, 5000만 불에 샀어! 일본의 야스다 깅코가 (1987년에) 5000만 불에 샀어요! 세계가 깜짝 놀랐어요! 일본 야스다 깅코에서 산 이유는 일본이 한국 전쟁 덕분에 갑자기 부자가 됐어! 전패국(*전쟁패전국)이! 전패국이 5년 후에 세계 제2 경제대국이 됐다고! 그러니까 자기들이 우등 나라이고 문화가 높은 나라라고 하는 것을 천명해야 자기 물건들을 세계 각국이 안심하고 살 테니까 문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 그렇게 한 거야! 그건 맞았어! 야스다 겐코의 은행에 있는 반 고흐의 <해바라기>는 신주쿠에 있는 초고층 빌딩(*구 야스다 화재 해상 빌딩을 말하며 현재는 ‘손해보험 재팬 빌딩’임)의 어떤 (미술관) 방에 걸려 있고, 사람들은 돈 내고 들어가서 보고 모나리자를 보듯이 줄을 서 보고 있어! 그런데 내가 사실은 동경에 가서 공부할 때, 문화학원에, ‘시키바 류 자브로(式場隆三郞, 직접 종이에다 자필로 한자로 명기함)’라고 하는, 정신의학 박사인데, 시키바 류사브로 정신의학박사가! 여기까지가 그날 김 선생님이 하신 이야기였다. 이 일본의 정신과 의사 이야기를 막 시작하려는 순간에 김 선생님이 한국에 있는 동안 스케줄을 관리하고 작품 활동도 도와주는 가나아트의 이호재 회장이 들어와서, ‘우리 선생님 큰 일 나시겠네!’하며 오늘 12시부터 지금까지 앉아 계셨다며 건강을 염려하시며 계속 말씀하시려는 것을 만류하는 바람에 얘기를 중단하신 것이다. 우리 역시 김 선생님이 무리하시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아쉽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김 선생님은 이날 마지막으로 우리가 준비해 간 각각의 도록에 자필로 서명하다가, ‘오늘 무슨 요일인가요?’라고 물으셨다. 4월 19일이라고 하니, “4. 19구나! 혁명이 일어난 때구나!”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당신의 이름 밑에 날짜를 적으셨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우리 보고는 “내가 더 설명할 수가 없어요. 이미 다 아시는 분들이야! 대단히 훌륭한 분들이야!”라고 끝까지 과분한 말씀으로 주시고는 이호재 대표와 함께 자리를 뜨셨다. 최고령 미술계 대선배로서 아직도 청년 작가처럼 작업을 하시는 김 선생님과의 만남은 나로서는 평생 잊지 못할 뜻 깊은 사건이었다. 워낙 짧은 시간인데다 노령으로 인한 난청 때문에 충분한 대화를 나누지 못해 아쉽기 그지없었지만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서양미술의 도입기를 몸소 체험한 분과 아직도 같은 대기를 호흡하며 생생한 육성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최근 이웃나라 일본의 극우적 행태에서 알 수 있듯, 우리 근현대사는 20세기 일제강점기와 맞닿아 있다. 이 때문에 이 땅의 사회 문화적 현실도 20세기의 역사부터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짧은 대화였지만 동경에서 이상과 만났던 소설같은 일화는, 당시 이미 망가진 몸의 상태라든가 ‘불령선인’이라는 말을 통해 이제는 신화적 존재가 되어버린 이상의 실존적 삶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군국주의로 치닫고 있던 당시 시대 상황에서 이국땅 낯선 집에 와서 한 잠도 자지 못하고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 소리를 밤 새워 세고 있는 이상의 모습은 식민지 시대를 살아야 했던 한 비극적 지식인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상에 대한 일화의 설명 끝에 나온, ‘이야기가 없어져 버린 현대미술’에 대한 김 선생의 언급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촌철살인의 핵심적 화두였다. 이를테면 현대미술이 잃어버린 이야기를 과거의 설화적인 형상성이 아닌 그림의 본질로서 다가가야 한다는 메시지는 그림에 대한 큰 깨우침을 주는 값진 메시지다. 또한 “오늘이 4. 19구나, 혁명이 일어난 날이구나.” 라는 한 마디 말도 노대가로서 이 분의 삶과 우리의 근현대를 함축적으로 느끼게 한다. 당대의 경험에 대한 살아남은 자로서의 유일한 증언은 그 자체로 귀중한 사료적 의미를 갖는다. 물론 모든 역사적 증언도 경험한 자의 주관이 개입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란 이러한 과거의 경험(사건)과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 재해석된 기록인 것이다. 2015. 4. 25. 도 병 훈 주1) 김도희 작가는 김병기 선생의 전시회와 거의 같은 시기에 국립현대미술관 바로 옆 전시장에서 열린 젊은 모색전의 작가로 참여했다. 이번 김 선생의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 중 <산악도>와 김도희 작가의 <야뇨증>이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유사한 면이 있었으며, 이전부터 김병기 선생의 작품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다. 주2) 그날 이상에 대해서만 질문을 하게 된 것은 미술사 관련 부분은 다른 대담 자료에서 본 데다, 최근 출간된 서울대 김민수 교수의 『이상 평전 : 모조 근대의 살해자 이상, 그의 삶과 예술』을 통해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다층적인 시각에서 재해석된 이상의 삶과 문학에 대해 흥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상 문학 연구자들은 이상을 여성편력의 화신, 퇴폐주의의 전형, 근대도시를 거닐던 권태로운 산책자 등으로 규정했지만(*이상에 대한 연구 논문만 1 만 편이 넘지만 대개 이러한 관점에서 쓰여 졌다.) 김 교수는 이 책에서 그간의 이상 문학에 대한 이러한 오해와 편견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각에서, “이상의 작품을 시각 예술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 의하면 이상은 병으로 총독부 기수직을 그만둔 뒤 가족의 빈곤과 생활고에 절망했다. 그럼에도 불굴의 투지가 담긴 시 <且(또)-팔-씨의 출발>로 새 출발을 다짐했다. 이상은 이 시에서 ‘식민지 근대화, 도시화’의 허구와 모순을 말했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상을 둘러싼 모든 오독과 곡해의 근원은 바로 시 <또- 팔- 씨의 출발>에 있다. 이 시는 연구자들에 의해 지독하게 오독됐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과 건축가로서의 이상을 생각해보면 폐결핵으로 죽음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실존의 땅’을 계속 파야만 하는 ‘또-팔-사람의 출발’이란 뜻이다. 식민지 땅에서 건축가로서 열심히 계속 땅을 또 파려는 한 인간의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 시다. 시의 본뜻을 안 저자는 이상의 처절한 삶에 전율하고 눈물 흘린다. 김 교수는 1928년 경성고공 졸업반 때인 19살 때의 이상이 그린 자화상을 이후 ‘모든 이상’을 푸는 열쇠로 본다. 이 자화상은 섬뜩한 모습이다. 그림은 삶과 죽음으로 양분된 좌우 대칭이지만 왼쪽 눈동자는 지나치게 빛나는 반면 오른쪽 눈엔 안구가 없다. 그래서 저자는 이 땅에 서양화 기법이 유입된 이래 이 자화상만큼 강력한 표현주의는 없었다고 본다. 이상이 당대 여러 현대예술을 섭렵한 뒤 내면화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며, 그래서 <1928년 자화상>은 이후 전개되는 모든 이상의 글의 원형이자 출발점으로 본다. 이를 바탕으로 저자는 이상을 문학가이기 전에 화가이자 건축가로서 일본제국주의가 이식한 ‘모조 근대’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감성과 지성으로 드러낸 융합예술가로 보았다. 주3) 평남 평양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에 다니면서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막심 고리키의 《밤주막》을 공연했고, 극단 신건설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 배우로 출연했다. 에리히 레마르크의 반전 소설이 원작인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카프 계열 연극인들이 신건설 창립작으로 올렸다가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을 불러온 작품이다. 이후 일본에 유학하여 호세이 대학에서 수학하면서 마완영 등과 함께 1934년 도쿄학생예술좌를 창립했다. 도쿄학생예술좌는 창작극 공연에 의미를 두고 창립작으로 유치진의 《소》와 주영섭의 《나루》를 공연했다. 주영섭이 《신동아》에 발표한 《나루》는 당시 농촌 현실을 그린 작품이다. 1939년 도쿄학생예술좌 사건이 발생하여 마완영, 박동근, 이서향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이 사건 이후 귀국하여 유치진의 현대극장에 가입하고 함대훈의 국민연극연구소에서 활동하며 친일로 전향했다. 이후 현대극장 창립작으로 유치진의 친일 희곡 《흑룡강》을 연출해 공연하였고, 함세덕의 《추석》, 유치진의 《북진대》 등 친일 연극들을 연출했다. 평론가로서도 활동을 펼쳐 「연출론점묘(演出論點描)」(1936)·「현대극서론(現代劇序論)」(1937)·「연극과 영화」(1937)·「시나리오 문학과 시나리오」(1938)·「문학과 영화」 등의 다수의 평론을 발표하였다. 해방 직후 월북한 것으로 추정되나 그 후 활동은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주4) ‘불령선인’은 일본 제국이 일제 강점기 식민지 통치에 반대하는 조선인을 불온하고 불량한 인물로 지칭한 용어이다. ‘불령(不逞, 후테이)’는 멋대로 행동함, 도의에 따르지 않음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5) 이상이 도쿄에 도착한 시기는 1936년 말이었다.
160 no image 흩어진 선과 복합적 면의 시공(時空), 김병기의 삶과 예술
도병훈
2330 2015-04-27
*아래 글은 지난 3월 초에 쓴 글입니다. 워낙 긴 글이어서 일부만 올립니다. (각주도 생략함) 흩어진 선과 복합적 면의 시공(時空), 김병기의 삶과 예술 (글 앞부분 생략) 1989년, 작가는 자신의 길을 만든 거장들을 만나는 유럽 여행을 한다. 이 여행이후 그린 그림으로 <생(트) 빅투아르 산에서의 독백>을 꼽을 수 있다. 전시장의 한 벽을 차지한 스케치와 작가의 육필을 통해 당시의 여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잔의 窓門(창문)’이란 제목의 스케치 아래 다음과 같은 연필로 쓴 글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글씨체로 메모되어 있었다. 뜻밖에도 <산하재> 시리즈를 그리게 된 배경이 이 글 속에 담겨 있었다. 「山河在(산하재)」의 對象(대상)을 한국에만 局限(국한)할 필요는 없다. 유럽旅行(여행)에서 얻은 것, 본 것, 생각한 것, 모두다 「山河在(산하재)」의 다른 한 면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세잔느의 窓(창), 르노와르(르누아르)의 庭園(정원)의 오(올)리브 나무, 모네의 庭園(정원), 이런 것들에서 볼 수 있는 19세기 말에서 世紀初(세기초)에 이르는 鄕愁(향수)의 프랑스와 오늘의 狀態(상태)를 對照(대조)하는 것이다. 모네의 庭園(정원) 다리에서 본 벧(베)트남 少年(소년)과 프랑스 少年(소년), 꽃을 가꾸는 黑人(흑인) 庭園師(정원사)의 모습, 암스텔담(암스테르담)의 데카당스, 落書(낙서)들, 뽐삐두(퐁피두)앞 噴水坮(분수대)옆 廣場(광장)을 춤추듯이 지나가는 한 少年(소년)과 少女(소녀)의 모습을 생각해본다. 「山河在(산하재)」의 이것은 하나의 긍정의 世界(세계)다. 긍정 속에 있는 페이소스, 페이소스를 뚫고 허우적거리는 긍정, 이것이 나의 世界(세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의 갈 길이 보인다. 미국과 유럽을 헤매이는 한 東洋人(동양인)의 보고, 생각하는 것, 이러한 비판的(적)인 현실을 그려야 할 것이다. 6/28 89 (*한자가 섞인 원문대로 실음, 괄호 안은 필자가 음을 달았음)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산하재> 시리즈 작품들은 날카로운 면 분할과 함께 화면이 우리 고유의 붉은 단청 빛 채색으로 울긋불긋하게 채워져 있다. 산하재는 두보의 시 ‘국파산하재 성춘초목심(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즉 나라는 망해도 산과 강은 그대로 있고, 도성에 봄은 와서 초목은 깊구나.’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화면에 칠해진 붉은 색면들은 이중적 이미지이다. 찬란하고 강렬하면서도 너덜너덜하게 찢긴 천 조각이 펄럭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이는 한 대담에서 밝혔듯, 한국 전쟁이후 분단국가로 남은 조국으로서의 갈등 상황과 함께 산업적으로는 유례없는 성취를 이룬 당시 한국의 복합적 현실에 대한 마음을 강렬한 붉은 색채와 분열적 이미지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2000년대 이후에도 <글라디올러스와 석류B(2002>)와 같은 정물화를, 거주지를 로스앤젤로스로 옮긴 이후에는 <산의 동쪽, 시공(2012년)>, <공간 속의 인간(2013)>, <연대기(2013)> 등의 작품을 남겼다. 화면은 더욱 얇아지고, 화폭 곳곳에는 캔버스의 원 바탕천이 그대로 드러날 만큼 작업의 과정과 흔적이 생생해진 것이 이 시기 그림의 특징이다. 이 시기 작품 중에서 특히 마음에 와 닿았던 작품 중 하나로 <공간 속의 인간(2013)>이 있다. 거침없이 그은 무수한 선들이 겹쳐진 화면을 지우듯 칠한 얇은 붓질과 붉은 점과 선에 가까운 색 면들 사이에 사람인 듯한 선들이 보인다. 자코메티는 인간을 가는 선으로 나타냈지만 김병기의 그림에서는 얼핏 보면 인간의 형상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수직선처럼 보이는 가는 면 뒤에 이리저리 교차하는 선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이미지를 형성한다. 내게는 이 그림 속 거의 보이지 않는 인간이 남북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 없었던 김병기의 자화상이기도 하고, 나아가 20세기 이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한 곳에 정주할 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유난히 두드러진 미완성 화폭에 자유롭게 그어진 유희적인 선과 깃발 같은 빨강 면이 생의 긍정과 넉넉함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김병기 그림에서는 젊은 시절에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정물이나 풍경은 비교적 형상성이 더욱 두드러진 반면, 인간의 도상은 그 형체가 거의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추상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마치 선사시대의 벽화들에서 동물들은 놀라운 구상성을 나타낸 반면, 인간의 도상은 비인간화되어 부정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양상과 유사하다. 이러한 인간의 부재화(不在化)는 그림에서는 선이나 색 면의 변질로 나타난다. 주11) 앙드레 말로는 현대 회화가 주제로부터 자율화 되는 순간을 표면성의 현재화로 설정한다. 전통적으로 표상되어 왔던 주제란 것은 물질적인 회화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존재하며 회화를 규정하고 있다. 근대에서 주제가 소멸한다면 그 때 회화의 심층은 사라지고 회화는 회화만의 존재가 되며 물질적인 표면으로서 현재화된다. 이렇게 하여 회화는 자율화되어 색채나 형태의 유희가 된다. 이러한 말로의 근대화에 대해 바타유는 이의를 제기하며 또 다른 하나의 메꾸어 졌던 표면에 그럼에도 열려 있는 또 하나의 구멍을 본다. 근대 회화가 주제를 기각할 때 표면성과는 다른 또 하나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따라서 바타유에게 현대 회화에서 주제의 폐위는 단순한 주제의 부재 그 결과인 표면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제가 파괴될 때 거기에는 표면이 아니고 주제의 부재 자체가 입을 연다. 바타유가 마네의 그림을 봤을 때 찾아냈던 것은 그 열려져 있는 상처였다. 그의 마네론의 특이성은 또 하나의 현대성을 제시한 것에 있었다. 주12) 이처럼 말로와 바타유는 마네를 현대 회화의 기원으로 보지만 바타유는 말로를 비판하면서 마네와 인상파 사이의 단절을 강조한다. 바타유에 의하면 마네의 그림은 표면과 부재 사이에 생기는 파열, 투시법에 의한 공간 표현이 없음으로 얕으나 밑바닥을 알 수 없으므로 깊은 공간이 열려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마네의 그림은 그림을 보는 동시에 전통적 회화의 부재를 함께 보도록 하는데 이는 인상파의 시각적 표현성과는 달리 전통적인 주제를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의도적 조작이라는 것이다.(*올랭피아의 현전은 이 그림이 차용한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부재이다) 따라서 이러한 ‘조작’이야말로 마네와 인상파를 본질적으로 가르는 차이이다. 말로가 마네 그림의 근대성을 표면적 색채의 자율 속에서 보았지만 조작의 중요성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바타유의 생각이다. 이 조작이 이전까지의 ‘보는 것’과 ‘아는 것’을 혼돈상황으로 이끌어감으로써 오히려 ‘비-지(非-知)’, 즉 비합리적 감성의 세계로 이끈다는 것이다. 김병기의 작품 세계 이면에는 이 같은 근대 회화의 문맥이 있으며, 인상파에서 벗어나 비지의 감각을 지향한 세잔의 새로운 도전도 이러한 문맥의 연장선에 있다. 따라서 김병기 그림은 이러한 근현대회화의 문제의식과 함께 이 땅의 전통적 정신이 공존한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1970년대 이후부터 흩어진 선과 다층적 면이 공존하는 그림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어떤 선은 떨림으로 점에 가까웠고, 어떤 선은 날카로웠지만 공간 속에 스며들며 사라진다. 이는 선과 선이 만나 새로운 면과 시공간을 구성하고 ‘조합’하는 정신적 의지로 표현된다. 이처럼 다원적 시점, 또는 움직이는 시점은 자아가 자신의 원리에 의해 세계를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방식과는 다른 차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작가는 동서 회화의 거장들이 성취한 빛나는 정신으로부터 예술과 인생, 자연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이를 새로운 ‘가능세계’로 표현한 것이다. 김병기 그림의 표면은 두껍지 않지만 그 층차(層差)는 얇지 않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는 담백하기까지 하지만 그 이면은 우리 사유의 한계를 넓히는 시공을 가진다. 김병기 그림의 특성은 만년으로 갈수록 고착화된 색도 형태도 존재하지 않으며, 선과 면 사이의 유동성에 있다. 선은 선이 아니고 면은 면이 아니다. 구상과 추상이라는 모순된 세계가 하나가 되는 화면이다. 이런 관점에서 김병기의 작업은 일종의 포토몽타주(photomontage) 어법을 연상케 한다. 포토몽타주는 여러 가지 장면을 하나의 작품에 모아서 제시하거나 서로 접속된 모티브를 가지고 조작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넓은 의미의 포토몽타주는 반드시 사진 이미지의 합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차원에서 포토몽타주 어법은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의 형상을 제시하는 것이고, 현실의 표절, 파편의 형태를 띤 현상을 추구한다. 제작물이 완료된 불변성을 거부하는 하나의 진행 중인 과정적 미술의 이미지를 원하는 표현방식이다. 이번 전시작품 중 특히 포토몽타주적 어법이 두드러진 작품으로는 <나이테가 보이는 컴포지션(1975)>, 날카로운 직선들이 그어진 허공에 거미 형상의 난초가 떠 있는 듯이 그린 <공간 속의 난초(1980)>, <창변(1980)>, <북한산 세한도(2001)>, <인왕산(2005)>, <소나무 밑에>, <공간 속의 형태들>, <붉은 사각형의 공간> 등이 있다. 주13) 이러한 표현으로부터 김병기의 그림은 인간과 현실, 역사, 자연,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포에지’를 드러낸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병기의 그림은 『풍경과 마음』을 쓴 김우창의 다음 글을 떠올리게 한다. 예술의 공간은 일단 객관적인 사물의 모사와 구도의 문제로 환원된다. 그러나 더 심각한 예술적 성찰에서, 이것은 예술가 또 일반적으로 인간의 주체적 경험에 있어서 공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문제로 나아간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사람이 세계에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또는 하이데거와 말한 바와 같은 세계와 삶의 근원으로서 이 존재의 열림에 대한 성찰로 나아갈 수도 있다. (중략) 기술적 문제는 한편으로 공간의 체험자를 어떻게 화면에 관계시키느냐 하는 문제에, 다른 한편으로는(이 점은 주제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지만) 이 공간을 단순히 평면적인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것으로: “무한하고 소진되는 않은 근원”으로, 존재의 열림으로, -또는 메를로 퐁티의 말을 빌어 “공간화된 공간으로부터 (나아가) 공간화하는 공간”으로 느끼게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관계된다. 주 14) ‘나무를 쪼개보아도 그 속에는 아무 꽃도 없네.’라는 말이 있다. 작품을 자세히 분석한다고 해서 그 속에 작품의 본질이 있는 건 아니다. 분석적, 논리적 관점만으로 작품에 접근할 수 없는 이유다. 선과 면이 만나고 어긋나고 지우고 다시 면과 면이 만나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그러한 과정에서 형성된 김병기의 회화적 지층과 그 단면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복합성의 세계는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해서 말할 수 없는 비합리성의 영역이다. ‘세계는 사실들의 전체이지 사물들의 전체가 아니다.’ 그러니 여전히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 ’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세계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함축한 철학적 성찰이다. 아픔, 상처, 단절, 외로움처럼 ‘그림은 원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주15) 김병기는 이러한 비합리성의 영역을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영역으로 본다. 3. 1970년대 이후 고도의 기술 발달과 함께 미술에서도 여러 매체에 의한 표현 방식이 확장되어 스펙터클한 볼거리가 넘치는 시대이다. 그런데도 서양근현대미술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는 세잔의 고투와 자신이 겪은 실존적 체험이나 사건을 재해석하면서 그 복합성으로부터 독자적 회화세계를 구축해온 김병기의 그림은 실로 많은 느낌과 생각을 갖게 한다. 이번 전시회는 개인적으로 내가 그림에 뜻을 둔 이후 겪어야만 했던 미적, 예술적 가치에 대한 고민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선을 긋고 다시 지워버린 흔적만이 남은 듯한 <산의 동쪽, 시공(2012년)>이란 작품은 1980년대 후반 나의 작품들과도 비슷해서, 스스로 내 자신의 옛 작업들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공유하는 고민이 있으며,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작품이 형성된다는 사실은 새삼 예술적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주16) 외부 세계의 표상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은 실로 다양하다. 활자는 활자대로, 영상은 영상대로, 조각은 조각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각자의 장치와 문법이 있다. 독서나 영화를 통해서만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세계가 있듯이, 그림은 그림을 통해서만이 느낄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정선의 금강산도가 실제의 금강산과 다르듯 세잔의 사과는 실제의 사과와 다른 사과이다. 그런데 정선의 금강산 그림들과 세잔의 <사과가 있는 정물>만이 선사하는 경험이 있다. 한 작가의 작품 세계는 이처럼 독자적인 면이 있다. 그것은 그림만이 갖는 복합적 현실성이다. 이러한 그림만의 현실성 표현은 통찰과 지혜가 필요하다. 김병기는 격변과 혼동으로 점철된 시기에 파란만장한 혼돈과 갈등의 삶을 살아온 작가로서 그러한 경험에서 얻은 지혜는 우리의 값진 문화적 자산이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한 생애를 걸고 고투해도 겨우 몇 사람만이 기존의 미적, 예술적 성취의 틀을 깨는 새로운 틈을 연다. 20세기 들어서 회화의 종말까지 논의되었지만, 선사시대 동굴벽화의 탄생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 만년에 걸친 회화의 역사는 곧 인류의 탄생과 함께 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감성으로 표현해온 역사이기도 하다. 작가에 따라서는 미술사적 주요 쟁점들이 교차하는 ‘존재면’을 남긴 이들이 있다. 김병기의 작품 세계도 실로 복합적인 현실성을 느끼게 하는 존재면이 있다. 근현대 예술적 성취에 대한 깊은 독해와 통찰을 바탕으로 삼아 한 세기를 살아 온 한 노대가의 삶과 예술은 우리에게 이토록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한다. 2015. 03. 02. 도 병 훈
159 no image 조선 청화백자의 역사적 층위와 아름다움의 이면
도병훈
2883 2014-11-18
조선 청화백자의 역사적 층위와 아름다움의 이면 만추의 계절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선 청화, 푸른빛에 물들다’전을 보았다. 한‧중‧일 명품 청화백자(Blue and White Porcelain)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회로, 수 백 년에 이르는 동서의 역사와 문명의 무늬로서 희디흰 색과 맑은 청색이 어우러져 더욱 빛나는 듯했다. 조선시대의 청화백자들은 생몰연대 조차 모르는 이름 없는 도공들이 빚어낸 것이었다. 근대이후 현대미술에서는 지나치게 우상화된 몇몇 예술가들의 예술작품만이 주목과 찬사의 대상이 된다. 작가를 브랜드로 내세운 상품으로서의 예술작품인 것이다. 이 때문에 청화백자든 현대미술이든 표면만 보아서는 자신의 취향을 전제로 그 형태나 색을 보게 된다. 푸른색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에는 금은이나 보석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은 색채였다. 그림에서의 고급 청색은 청금석에서, 도자기의 청색 안료는 페르시아가 원산지인 산화 코발트(cobalt)에서 채취했다. 블루 모스크로 유명한 이란의 이스파한은 이슬람 문명에서의 청색의 위상을 알게 한다. 이슬람에서 푸른색은 물을 상징한다. 동아시아에서 코발트를 ‘회청(回靑)’이라고 했던 것도 이슬람 지역에서 생산된 안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견딜 수 있는 안료는 철, 코발트, 동(銅)이 있다. 코발트는 불의 온도에 따라 색깔이 다르며, 1300도에 이르러야 선명한 청색을 띠게 된다. 그러나 페르시아에선 청화백자를 만들지 못했다. 그 지역의 흙은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형체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청화백자는 중국에서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 결국 이슬람과 중국 문명의 만남에서 청화백자가 탄생했다. 그것은 중국문명과 이슬람 문명 간 교류와 융합의 산물이었다. 이처럼 중국에서 세계 최초로 청자를, 이어 백자까지 만들었는데, 백자는 중국 원나라 때 청화백자의 탄생을 통해 또 하나의 기술 정점에 도달했다. 그리고 18세기 이전까지 중국과 대등하거나 어떤 관점에서는 그 미감을 능가하는 청화백자를 만들 수 있었던 유일한 나라가 조선이었다. 청화백자의 대표적인 문양은 당초문(唐草文)이다. 이 무늬는 이집트 무덤에서 시작되어 그리스 로마를 거쳐 이슬람 문화와 융합되어 이어지면서 마침내 중국 청화백자의 주된 문양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청화백자를 청화(靑華)로, 일본에서는 청화(靑花)로 쓴다. 조선에서는 청화(靑花)· 화자기(畵磁器)·화사기(畵沙器)·화기(花器)·화기(畵器) 등으로 표기했다. 왕실의 전유물로 만들어진 조선 전기의 청화백자와 종류와 용도, 형태가 다양해지는 조선 후기 영‧정조시기에 만들어진 청화백자는 우리 전통문화예술의 높은 수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중국이나 일본의 청화백자는 그 기술적 기교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와 달리 조선의 청화백자는 중국 청화백자를 그대로 모방한 듯한 일부 조선 전기 청화백자와 조선 말기의 장식적 문양이 과다한 청화백자를 제외하고는 대개 넉넉한 여백, 맑고 투명한 느낌과 그리고 어중간한 듯한 틈이 느껴질 정도로 모호한 특성을 드러낸다. 이처럼 조선의 청화백자는 함께 전시된 중국의 청화백자나 일본의 도자기의 그 완결된 듯한 세공품의 이미지와 달리 어딘가 비어 있고 불완전하다. 전통한옥의 공간이나 사방탁자 위와 같은 장소, 구부러진 매화 한 가지와 더불어 완성되는 관계의 미학이 반영된 것이다. 반복적인 그림의 소재들인 당초문, 대나무, 소나무, 모란, 용, 불수감(佛手柑, 부처의 손과 비슷하게 생겨 다복을 상징함), 박쥐 문양 그림들이지만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그러나 명품들의 경우, 한 번 그은 붓질마다 드러나는 맑은 느낌과 더불어 그림을 그린 사람의 숨결까지 그대로 드러난다. 국보 222호인 매화 대나무무늬 항아리, 18세기에 만든 석류 분재 무늬 항아리, 오사카 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청화백자 풀꽃무늬 항아리 등이 특히 그러하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 느낌을 감성적 언어로 표현한 시인의 시 구절이 떠오르듯, 조선 청화의 푸른색은 그 아득한 느낌만큼이나 다가갈 수 없는 그리움, 또는 심연의 색으로 마음에 와 닿는다. 이런 차원에서 청화백자에 대한 동서고금의 각별한 기호는 인간의 원초적, 무의식적 동경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평생 평면과 깊이 사이에서 공간적 심도를 추구한 폴 세잔에게 푸른색은 사물의 근본적 존재이자 핵심이었다. 그래서 푸른색은 그가 만년에 그린 생트 빅투아르 산의 주조색이다. 온통 기교적이고 장식적인 청색 문양으로 가득 채운 조선말기 청화백자의 특성은 당대 역사의 자화상이다. 시대적 정신이 빈곤할수록 그러한 결핍은 기교와 장식으로 채워진다. 아무리 기교와 장식이 뛰어난들, 그것이 주는 감동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마음을 포함한 정신과 물질이 그 바탕이며, 근원적 감동은 바로 이에 대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청화백자들과 함께 푸른색을 주조로 한 몇몇 현대회화들을 볼 수 있었지만,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의 작가인 수화 김환기를 제외하고 그들의 그림들이 과연 청화백자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수화 김환기의 그림도 청화백자보다는 달 항아리 같은 백자의 이미지를 ‘소재’로 시대적 감수성을 표현한 경우가 많다. 그의 청회색조 유화도 조선 청화백자 특유의 색과는 다른 감수성을 느끼게 한다. 아무래도 이번 전시회에서 청화백자와 연관 지은 현대회화는 구색 맞추기에 급급했다는 느낌이다. 지난 90년대 초반 이래 내 그림의 주조색은 청색이다. 대개 세로 2m, 가로 4~6m에 이르는 대형의 두껍고 거친 광목천에 담묵(淡墨)과 파묵(破墨)에 연원을 둔 우연적 흔적을 배경으로 흩뿌려진 점이나 몇 가닥의 굳센 선들로 세상의 변화와 나의 내면적 마음과 생명력(힘)을 함께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왜 한 결 같이 청색인가? 흰 바탕, 또는 약간의 황색 끼의 화폭을 바탕으로 깊은 느낌의 청색만큼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감각을 일깨우는 색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청색에 대한 나의 선택은 매우 까다롭다. 당연히 표준 색상에는 없는 색깔이다. 코발트 불루도 울트라마린도, 푸르시안 블루도 번트 엄버도 아니며, 반 고흐의 청색도, 이브 클랭의 블루도 아니며, 전성기 조선 청화백자의 푸른색과도 다른 특성이 있다. 그러나 분청사기, 조선 청화백자, 달 항아리 같은 순백자에 대한 관심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숱한 감상의 기회를 가졌으므로 무의식적으로 청화백자의 색조와의 만남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왔다. 샛노란 은행나무 잎들 사이로 유난히 하늘이 높고 푸르렀던 이 가을, 시대와 계층과 신분에 따라 향유하는 계층이 달랐지만 한‧중‧일의 청화백자는 저마다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감성을 드러내는 매개물로 보였다. 무엇보다 당대를 대표하는 조선 청화백자의 흰색과 푸른색에서 세상사 온갖 변화와 다채로움을 무색하게 만드는 예민한 인간의 감성과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표면적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이름 없는 도공들의 생생한 숨결과 만나는 감동이었다.(2014. 11. 17) 매화 대나무무늬 청화백자, 국보 222호
158 no image 북악산과 인왕산, 경교명승첩을 그린 가양동 탐방 소감
도병훈
2473 2014-10-22
북악산과 인왕산, 경교명승첩을 그린 가양동 탐방 소감 지난주 이틀 동안 겸재 정선이 태어나서 살던 북악산 및 인왕산 일대와 경교명승첩을 그린 가양동 궁산을 탐방하였다. 두 곳 중 한 곳은 당일에 즉흥적으로, 다른 한 곳은 고향 출신 사람들과의 정기 모임 차 가게 된 것이지만 오랫동안 미루어둔 숙제를 한 순간에 해결한 기분이 들 정도로 감회가 깊었고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먼저, 2학기 중 1차 지필고사 기간 중이었던 지난 목요일 오후에는 인왕산 근처에서 유년 시절과 중고등학교를 다닌 후배 작가의 안내로 겸재가 태어나고 자란 북악산 자락과 중년 이후 겸재가 거주하고 많이 그린 인왕산 일대를 탐방했다. 현 경복고등학교 교정과 인왕산 자락에서부터 겸재가 인왕산의 주봉을 올려다보는 고원법으로 그린 장소, 또한 겸재가 그림을 남긴 인왕산 주봉 아래 계곡인 수성동 기린교 일대, 북악산과 멀리 남산을 바라보며 당시 서울의 전경을 그린 주요 장소를 실제로 확인하였다. 특히 겸재가 고원법의 시점에서 압도적 필치로 대담하게 그린 치마바위를 본 시점에서 인왕산을 올려다보면서 겸재가 그 주변의 특징적 바위들까지 포착해서 그렸다는 사실에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탐방 시작 직전부터 갑자기 불어온 찬바람과 함께 쾌청한 날씨여서 그날은 북악산과 인왕산의 맑고 굳센 기운을 더 온전히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난 1990년대 초반에 간송미술관에 다녀온 이후, 특히 1990년대 후반에 겸재 정선이 지금의 경북 포항시 청하현감 재임 시 그림을 그린 곳인 내연산 계곡을 답사하고 그곳 바위 절벽에 새겨진 정선의 이름까지 직접 탁본하면서 나름대로 그의 그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외에도 평해 월송정, 울진 망양정, 영양 입암, 안동 도산서원, 삼척 죽서루 등 정선이 그린 곳이라면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2002년에는 북한에 위치한 금강산 일대와 삼일포 등까지 정선이 그린 곳을 답사한 적도 있다. 그런데도 정작 가까운 곳인 인왕산 근처에는 1990년대 초반 무렵 인왕산에 한 번 다녀온 이후 정선 예술세계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계곡에는 이번에 처음으로 간 것이다.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에 위치한 궁산은 지난 주 토요일에 다녀왔다. 고향을 떠나 온 일가들이 1년에 4번 모이는 데, 이번 모임을 주관한 일가 형님이 궁산 자락에 있는 겸재정선미술관(원래 겸재정선기념관이었으나 최근 명칭이 바뀜)에서 모이기로 장소를 정했기 때문에 가게 된 것이다. 이 미술관은 수 년 전 겸재 정선의 ‘청하성읍도’가 소장되어 있다고 해서 간 적이 있었고, 또 한 번은 학교 미술탐구반을 데리고 갔던 곳이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그날 약속시간에 맞추어 겸재정선미술관에 도착해서 기다리는 데, 모임 일행들 일부가 미술관 바로 옆에 위치한 양천향교로 오게 되어 미술관 뒤쪽에 있는 야산인 궁산근린공원 쪽으로 가게 되면서 이곳 궁산 소악루 일대가 바로 겸재 정선이 양천현감으로 지내면서 경교명승첩을 그린 장소임을 알게 되어 탐방하게 된 것이다. 겸재정선미술관이 있는 궁산 일대는 겸재 정선이 영조 때인 1740년 65살의 나이로 현감으로 부임하여 4년 두 달간 머물며 당대 최고의 시인인 이병연과 시와 그림을 서로 주고받기로 약속하면서 한강 주변의 풍광을 화첩으로 남겼다. 이 그림들이 바로 <경교명승첩>이다. 향교에 오기로 약속한 일행들이 다 모여 양천향교에서 궁산근린공원 쪽으로 올라갔더니, 겸재를 기념하는 사생대회에 참가한 많은 어린이 및 청소년들이 한 정자 주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소악루(小岳樓)였다. 최근에 복원한 건물이었지만 한강과 한강 북쪽의 광경이 멀리 북한산까지 한 눈에 들어 왔다.(*집에 돌아와서 검색해보니 원래의 소악루는 지금의 위치보다 조금 아래인 가양동 세숫대바위 근처에 있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어 1994년 구청에서 한강변 조망을 고려해 현 위치에 신축했다고 적혀 있었다). 소악루는 '작은 악양루(岳陽樓)'란 뜻으로, 악양루는 중국 양쯔강 유역에 있는 동정호 주변에 좋은 전망을 가진 정자로 시성(詩聖)과 시선(詩仙)이라 일컫는 이백과 두보가 이곳에 악양루에 가서 그 풍경을 보고 시를 남긴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고등학교 다닐 때도 배웠던 두보의 시 '등악양루(登岳陽樓)'가 유명하다. 소악루는 겸재가 살던 시기에 궁산(*조선시대는 파산, 또는 성산이라 부르기도 했다)아래 양천현청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던 소와(笑窩) 이유(李愉, 1675~1753)가 지은 누각이다. 그는 왕의 후손으로 그의 나이 63세(1737) 때 궁산 기슭 한강이 잘 바라보이는 땅에 소악루를 지었다. 이유보다 한 살 적은 정선은 65살인 1740년에 양천현령이 되었으므로 소악루가 짓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소악루 난간을 마주하고 서니 탁 트인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누각 밑으로 보이는 올림픽 대로, 강폭이 넓은 한강 건너 마주 보이는 정면으로는 안산(鞍山) 뒤로 멀리 북한산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안산은 인왕산 남쪽, 연세대학교 뒷산이다. 조선시대에 평안도 강계와 의주에서 한양으로 연결되는 제 3 봉수와 제 4 봉수 자리가 안산에 있었다고 한다. 정선은 저녁 시간에 안산의 봉수불이 피워진 모습을 그렸으니 이 그림이 바로 경교명승첩에 나오는 <안현석봉(鞍峴夕烽)>이다. 그림 왼쪽으로는 백련산이 솟았고 안산 뒤로는 인왕산과 백악(북악산)도 자리잡았다. 이 그림은 겸재가 궁산에 올라 한강 건너 안산(鞍山 : 길마재)에서 피워 올리는 저녁 봉화불을 바라보고 그 아름다움에 취하여 사생해낸 진경산수화이다. 이 그림과 관련하여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이 지은 시가 전한다. 계절 맛 참으로 좋은 때(有味老淸時,유미노청시) 발 걷으니 산 빛이 저물었구나 (捲簾山色晩,권렴산색만) 웃으며 한 점 별같은 불꽃을 보고(笑看一點星,소간일점성) 양천(陽川)밥 배불리 먹는다.(飽喫陽川飯포끽양천반) 안산 오른 편의 동북방향에는 난지도 쓰레기 매립지에 조성된 거대한 산이 길게 가로 누워 남산의 상부만이 겨우 보일 정도였다. 겸재가 이 지역을 그린 ‘목멱조돈’이나 ‘금성평사’와는 너무도 다른 광경이었다. ‘금성평사’는 겸재가 궁산에서 한강 상류 쪽을 보며 그린 그림으로, 금성산에서 한강 하류 쪽이 난지도이며, 이 섬에 쌓인 모래가 '금성평사'이다. 이 지역의 한강을 조선시대는 서호(西湖)라 불렀는데 모래톱이 강물의 흐름을 느리게 하여 호수 같았기 때문이다.(*지금의 마포구 성산동이란 땅이름도 금성산에서 유래함) 겸재 그림과 지금의 서울을 비교해보면 참으로 상전벽해란 말을 실감하게 된다. 정선의 그림에서 강이 흐르던 곳에 올림픽도로가 만들어져 차들이 달리고 강가에 있던 탑산과 증미산은 강에서 멀어졌다. 강물이 깊숙이 들어왔던 곳은 메워져서 아파트가 생겼다. 겸재가 그린 <목멱조돈>은 궁산에서 본 한강 건너 멀리 두 개의 봉우리로 짙게 우뚝 솟은 남산 옆으로 막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남산 아래는 만리재, 애오개, 노고산, 지금의 홍대 뒷산인 와우산 등이 나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고 그 앞에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소악루에서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 산 정상을 지나니 한강 하류 쪽이 보이고. 겸재가 ‘소악후월(小岳候月,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다)’을 그린 장소가 있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소악후월’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책자(간송문화 제66호, 회화 41 대겸재, 2004)를 찾아보니, 이 그림을 그린 곳은 한강하류 쪽이 아니라 한강상류로 나와 있었다. 그림을 자세히 관찰해본 결과, 책자의 설명이 맞았다.(*구청에서 겸재 그림을 그린 곳을 새롭게 조성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오류인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의 양천현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양천구와 강서구를 포함하는 땅이름이었다.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지역의 경치 좋은 꼽아 팔경이라 이름 붙였다. 양천의 팔경은 소악루에서 느껴보는 맑은 바람(岳樓淸風,악루청풍), 양화진 앞 한강에서 불을 밝히고 고기잡는 풍경(楊江漁火,양강어화), 남산으로 아침 해가 돋는 풍경(木覓朝暾,목멱조돈), 계양산으로 해지는 풍경(桂陽落照,계양낙조), 행주로 돌아오는 고깃배를 바라보는 풍경(幸州歸帆,행주귀범),개화산에 저녁 봉화불 오르는 풍경(開花夕烽,개화석봉),저녁에 개화산에서 들려오는 종소리(寒山暮鐘,한산모종), 이수(안양천이 한강과 만나는 곳) 모래밭에 갈매기가 쉬는 풍경(二水鷗眠,이수구면)을 말한다.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도 대체로 이러한 풍경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팔경 뿐 만 아니라 다양한 소재로 그렸다. 최근에 와서 겸재 정선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깊어지면서 ‘진경산수화’라는 주제의식 편중에서 벗어나 좀 더 종합적인 시각에서 겸재의 예술세계를 조망하는 추세이다. 단지 기행사경도에 근거한 진경산수화라는 주제 중심이 아니라 시의화, 방고(관념)산수화 등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에도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산수화, 이상향을 그리다 전’을 통해 한·중·일 산수화가들을 보면서 관념적인 ‘방고산수화’와 실경을 대상으로 한 ‘진경산수화’를 이분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모두 이상향을 그리고자 한 열망의 표현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특정 공간이나 장소에 대한 체험과 그리고 이러한 그림들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체로서 오늘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비록 짧은 순간의 경험에 지나지 않지만 이번 두 군데의 진경산수 근거지 탐방을 하면서 다시 한 번 현장 답사를 통한 체험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겸재의 그림으로 대표되는 우리의 옛 그림들은 바로 이 땅의 풍토를 체험한 소산이었다. 그러면서도 겸재의 그림이야말로 동아시아 그림의 특징인 손, 눈, 마음(정신)이 잘 종합된 그림임을 새롭게 실감할 수 있었다. 얼핏 보면 인왕제색도로 대표되는 서울주변의 그림과 경교명승첩의 화풍은 매우 이질적일 정도로 다르다. 화강암벽이 많은 서울 주변의 산과 계곡은 주로 ‘한 번에 쓸어내듯 휘두른 빠른 붓질(일필휘쇄(一筆揮灑)로 그렸다면 넓은 강과 토산 위주의 한강주변은 청록훈염법(*훈염暈染은 해무리와 달무리 지듯 물에 먹이나 채색을 약간 섞어 우려내는 설채법임)으로 그림으로써 섬세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전자가 강한 필치와 풍부한 묵법을 구사하였다면 후자는 절제된 담백한 필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처럼 상이한 기법의 그림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장소를 기준으로 한 시각적인 사실성보다는 역시 주관적 변형성과 즉흥적인 흥취를 표현하는 개성적인 화풍으로서 기본적인 필치라든가 그림을 구성하는 능력 같은 면에서 공통점이 보인다. 상이한 스타일이면서도 이들 그림 모두가 기존의 정형산수화풍을 갱신한 새로운 화풍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겸재가 보여 준 표현의 진폭이 이전보다 더욱 넓고 깊다는 발견이야말로 이번 뜻밖의 탐방에서 얻은 작은 깨달음이다.(2014. 10.22)
157 no image 이 가을, 함허정에 담긴 정신을 생각하며
도병훈
2379 2014-10-13
이 가을, 함허정에 담긴 정신을 생각하며 올해 들어 크고 작은 여러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자주 생각하게 된 말이 ‘함허(涵虛)’이다, 이 말에는 극히 함축적인 뜻이 담겨 있다. ‘젖다’, ’잠기다‘, ‘넣다’는 의미의 ‘함(涵)’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그 어떤 크기나 공간으로 규정할 수 없는 비움을 뜻하는 ‘허(虛)’가 그러하다. 노자나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식으로 말해서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기호화할 수 없으나 기호화된 역설적 언어인 셈이다. ‘함허’라는 말은 ‘함허정(涵虛亭)’이란 옛 정자에 들어 있는 말이다. 현재 함허정이란 이름을 가진 정자는 전남 곡성과 경남 함양에 남아 있으며, 이외에 지금은 없지만 경남 김해에도 함허정이 있었다고 한다. 이 중에서 그 어느 곳도 직접 가보지는 못하고 사진으로 보았지만 특히 전남 곡성 섬진강변에 위치한 함허정은 건물 안팎이 조응하는 중층적 구성으로 그 이름에 담긴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산과 물이 어우러진 공간과 장소에 누정, 즉 누각과 정자를 많이 지었다. 이 중 많은 누정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지역마다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장소에 옛 선비들의 풍류의 흔적으로 유서 깊은 정자와 누각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누정에 올라 자연의 이치를 깊이 느끼거나, 대자연의 변화를 온 몸으로 체감하며 시를 읊조리던 전통은 사라졌다. 그 대신 낡고 퇴락한, 아니면 조악한 안목으로 복원된 건물만이 현대적 건축물이나 시설물에 둘러싸인 채 과거의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정자나 누각의 이름은 그 건물을 지은 사람의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예컨대 경남 지리산 자락의 농월정(弄月亭), 충북 영동의 월류정(月流亭), 안동 병산서원의 만대루(晩對樓)처럼 자연과 함께 하겠다거나, 경북 영양 서석지의 ‘경정(敬亭)’처럼 수양의 의미가 담긴 이름이 많다. 전자가 노장(老莊)의 공간이라면, 후자는 공맹(孔孟)과 성리(性理)의 공간이다. ‘함허’는 「함허정기(涵虛亭記) 」를 쓴 소식(蘇軾, 1037년~1101년, 흔히 소동파蘇東坡로 불림)의 글에 나온다. ‘비록 작고 초라한 정자이지만, 그 위에 오르면 비어있는 벽을 통해 온 우주가 담겨진다.’는 말이다. 이 말은 거슬러 올라가면 노장(老莊)사상에 그 연원이 닿는다. 허(虛), 즉 비움이야말로 노장 사상의 핵심 언어이다. 노자 사상은 ‘유무상생’으로 집약되는데, ‘무’는 곧 ‘허’를 말한다. 동양에서는 그 어떤 정신도 물리적, 자연적 대상의 경험으로부터 생성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어떤 사물을 대상화해서 분석적으로 나누지 않는다. 조선시대 뜻 있는 문인화가들만 하더라도 몇 몇 사물의 겉모습(形似, 형사))이 아닌 사물의 전체적 관계성을 뜻하는 ‘신사(神似, 신사)’를 그리고자 했다. 전체를 내려다보며 조망하려는 심원(深遠), 즉 부감시(俯瞰視)로 그린 화폭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원래 우리 선조들의 세계관에서는 산을 오른다는 등산의 개념이 없었다. 그들에게 산이란 ‘입산(入山)’의 장소였다. 산은 계곡이 있는 곳이며, ‘허’ 또는 ‘텅 비어 있는(沖,충)’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산과 물, 그 중에서도 잠시도 머물지 않고 변화하는 물에 대한 관조는 한자문화권에서 여러 의미 깊은 기호로 존재한다. ‘함(涵)’이란 글자가 삼수변과 함께 구성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가변성이 내포된 글자인 것이다. 따라서 함허는 시간이 부재하는 초월적 공간이 아니라 비움과 채움의 연속인 우리 세계를 무한히 느끼게 하는 공간이다. 함허의 세계 속 우리 삶은 유동적이다. 누정은 있음(有)와 없음(無)이 대립하는 경계에서 구분과 차별로써 한쪽을 선택하는 ‘지(知)’나 정의를 내리는(define) 장소가 아니라 밝음과 어둠이 함께 하는 경계에 서서 통찰하는 ‘명(明)’의 공간이며, 현묘(玄妙)한 공간이다. 그래서 그곳은 신비롭기도 하구나(湛兮, 담혜)!와 깊기도 하구나(淵兮, 연혜)!라는 감탄의 공간이다. 소나무나 대숲이 있는 누정에 가면 나그네는 바람소리로 세상을 느낀다. 이 때 누정은 더 이상 세상에 고립된 채 한 인간이 잠시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오감으로 경험하는 장소가 된다. 이 오감으로부터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원인과 결과를 생각하게 되고 마침내 우리의 느낌과 생각은 우주로까지 확장된다. 내가 발견하고 느낀다면 이 가을 발길 닿는 모든 장소는 ‘함허’이며, 이 세상은 우주의 한 그물망인 것이다.(2014년 10월 13일)
156 no image 공감각적 체험으로 상상력을 확장하는 융합적 미술교육 방안
도병훈
2818 2014-09-21
*아래 글은 2014년 9월 20일에 개최된 한국미술교육학회 제39차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입니다. 공감각적 체험으로 상상력을 확장하는 융합적 미술교육 방안 1. 공감각적 미술교육의 필요성 및 목적 근래에 와서 학제적 경계를 넘어 통섭적 창의성이나 융합형 인재를 기르는 교육이 화두가 된 것은 리좀(rhizome)적 세계관에 근거한다. 리좀이란 유동적으로 접속되고 연결되는 네트워크에 의해 모든 것이 새롭게 생성되는 것을 말한다. 쾌적하면서도 질 높은 삶의 공간을 조성하기 위한 조경(Landscape architecture)만 하더라도 기반시설, 건축, 문화적 표현, 생태체계, 디자인 등 서로 다른 영역의 경계를 넘어 도시의 장을 조직화하는 융·복합적 차원에서 만들어진다.(James Corner, 2014. p. 305) 융·복합적 사고를 가능케 하는 원천은 우리 몸의 감각이다. 감각이란 오감을 바탕으로 한 지각, 감정적 깊이 및 감성 등이 종합된 것이다. 우리의 미술교육은 주로 시각 중심의 기능적 표현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어 통합적 감각을 깨우고 키우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실정이다. 이번 연구는 감각을 키우고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는 공감각적이고도 융합적인 미술교육방안을 구안한 것이다. 2. 공감각 키우기를 통한 상상력 확장하기 1) 공감각을 통한 융합적, 창의적 사고 예술인류학을 주창한 나카자와 신이치에 의하면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서로 다른 영역을 횡단할 수 있는 ‘유동적인 마음’에 있다. 니체 이후 현대사상가들이나 사회생물학자들은 우리 자신의 감각이나 사고가 야생의 상태였다는 것과 인간을 포함한 종(種,Species)은 생물학적 본성 외에 그 어떠한 목표도 갖고 있지 않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 현대의 주요 사상가들이나, 예술가들은 이 무의식 속에 잠재된 감각과 야생을 깨어나게 하는 공감각적이고 지성적인 활동을 ‘예술’로 본다. 공감각이란 말은 그리스어에 어근을 두고 있는데, 융합, 결합을 뜻하는 ‘syn’과 감각을 뜻하는 ‘aisthesis’가 합쳐진 말로 한꺼번에 느낀다, 혹은 감각의 융합을 의미한다. 질 들뢰즈에 의하면, 감각이란 쉬운 것, 이미 된 것, 상투적인 것의 반대일 뿐 아니라 ‘피상적으로 감각적인 것’이나 자발적인 것과도 반대이다. 감각은 현상학자들이 말하듯이 세상에 있음이다. 나는 감각 속에서 되고 감각 속에서 무엇인가 일어난다. 그려지는 것은 나의 신체이며 감각이다.(질 들뢰즈, 2008, p. 47) 또한 수많은 화가나 음악가와 같은 예술가, 여러 과학자들도 그들의 창조적 성과를 형성한 바탕이 공감각임을 밝히고 있다. 감성과 감각으로써 ‘판에 박힌 것들’에서 벗어나는 도전과 모험으로 새로운 세계를 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일깨우는 감각적 능력이말로 창의성의 근본이며. 이런 차원에서 생각의 본질은 감각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다. 2) 촉각적-광학적 세계의 융합, 공감각적 활동 ‘본다는 것’은 ‘보고 느낀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보고 느낀다는 것.’은 시각을 넘어서 모든 감각의 반응을 종합하여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전국미술교과모임·문화연대, 2008). p.61) 세잔의 그림을 눈으로 만지는 회화라고 한다. 색채의 변조를 통해 눈으로 만지는 촉각적 세계를 그려내었기 때문이다. 또한 세잔의 그림은 내부에 풍경의 냄새를 품고 있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그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실감할 수 있다.(로버트 루트번스타인, 2007. p. 399) 반 고흐는 건물의 평범한 벽을 무한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색으로 표현하였다. 외적 대상과 자신의 심리적 내면을 요동치는 선으로 융합한 것이다. ‘생각의 탄생’을 쓴 저자에 의하면,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은 시각과 소리, 그 밖의 다른 모든 감각들이 서로 뒤섞인다. 이런 차원에서 ‘음악을 들으며 손가락으로 점을 찍으며 그리기’와 같은 공감각적 교과융합 수업은 교육활동의 과정 속에서 표현의 즐거움을 향유하면서도 감각을 자극하고 오감을 확장하는 훌륭한 방식이 될 수 있다. (조슈아나무 미술교육연구소, 2013). pp. 14~19) 감각의 지평을 넓히고 상상력을 확장하는 융합적 교육은 교사의 교육과정 재구성 및 지원 역량에 따라 아날로그적 활동을 통해서도 큰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관찰도구인 돋보기, 색지와 핀 볼펜만 준비해도 새로운 창의적 표현이 가능하다. 3. 공감각과 상상력 확장을 위한 교사의 역할 ‘생각의 탄생’ 공동 저자인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미셀 루트번스타인은 나보토프와 라이트 힐의 말을 빌려 모두 공감각은 사물을 한가지의 지각양식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서의 경험과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열쇠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공감각적 융합능력은 수많은 근현대과학자, 예술가들의 삶이 입증하듯 창의성의 원천이다. 이 때문에 촉각으로 관찰하고, 그림을 ‘듣고’ 음악을 ‘보는’ 융합적 미술교육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미술교육은 자유로운 실험이나 실수가 허용되어야 한다. 상상력의 확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도전적인 일이다.(Shaun Mcniff, 1998). p. 4) 그러므로 교사는 학습자에게 감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고와 발견,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만들기’와 같은 교과 융합적 활동은 모둠별 수업 같은 협력적 과정을 통해 감각의 융합과 상상력의 확장이 이루어질 수 있다. 정보화 디지털 시대의 교육은 지식과 정보 그 자체의 습득을 목적하기보다 그것을 융합적으로 가공하고 새롭게 디자인하는 바탕인 감각 키우기와 상상력의 확장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미술, 또는 예술교육의 핵심은 어떻게 감각을 키우고 상상력을 확장하는가의 문제이다. 따라서 교사는 무엇보다 교육의 과정 속에서 학습자의 감각을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교육활동 과정에서 교사는 감각을 키우기 위한 새로운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4. 결론 및 제언 미술 교과는 공감각적 체험의 확장을 통해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의 폭이라든가 다양한 변수가 융·복합적으로 개입하는 과정에 따라 통합적 창의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교과이다. 따라서 공감각적인 자극과 체험으로부터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는 미술교육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세우고 현대디자인 탄생에 지대한 역할을 한 그로피우스의 다음의 말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융합적 미술교육의 방향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대생활과 교육에 남겨진 과제는 시와 물리학, 미술과 화학, 음악과 생물학, 무용과 사회학, 그리고 기타 가능한 모든 미학적 지식과 분석적 지식을 재통합해서 사람이 알고자 하는 것을 느끼게 하고, 느끼고자 하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로버트 루트번스타인, 2007. p. 410) 【 참 고 문 헌 】 로버트 루트번스타인·미셀 루트번스타인 지음/박종성 옮김(2007). 『생각의 탄생』. 서울 : 에코의 서재 질 들뢰즈/하태환 옮김(2008).『감각의 논리』. 서울: 민음사. 조슈아나무 미술교육연구소(2013). 『미술로 몸과 마음의 힘을 키우는 조슈아나무 《씨앗심기》』. 서울: ICAS. 나카자와 신이치(2009). 『나카자와 신이치의 예술인류학』. 서울: 동아시아. 전국미술교과모임·문화연대 지음(2008),『시각문화교육 관점에서 쓴 미술교과서』. 서울: 휴머니스트 장용수 옮김(2010).『현대건축과 철학적 모험』. 서울: 미메시스. Shaun Mcniff(1998). 『Trust the Process』, Boston: Shambhala. James Corner(2014). 『The Landscape Imagination』New York: Princeton Architectural Press. 江澤健一郞(2003). 『バ タイユ』. 河出書房新書 065
155 no image 황금비율과 아름다움
도병훈
4832 2014-08-20
황금비율과 아름다움 1. 지난 8월 18,19일 양일 동안 황금비율에 대한 비밀을 탐색한 다큐 프라임(프로그램)이 EBS 교육 방송국에서 방영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Golden ratio’, 즉 황금비율이 형성된 역사와 함께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주요 문화유산 및 미술작품들을 대상으로 그간 잘못 알려진 황금비율의 사례들에 대해 다루었다. 두 번의 다큐 프로그램 중 제1부는 ‘숨은 그림 찾기’란 제목 아래 불가리아 바르나 지역에서 출토된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황금 유물에서부터, 이집트 피라미드 이래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등 동서고금의 문화유적이나 미술작품, 그리고 앵무조개, 해바라기 꽃, 미인의 얼굴 분석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성한 비율로 여겨온 황금비율에 대해 다루었다. 제2부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진리’에서는 1부에서 황금비율을 적용한 사례로 제시된 건축물이나 조각 작품, 그림들이나 앵무조개 등을 계측한 해본 결과 그것들이 사실은 황금비율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면서 아름다움에 대해 근원적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2. 제1부 다큐 프로그램의 도입부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황금비율이 나타난 유물을 소개하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1976년부터 불가리아 바르나에서 BC 4600년 전 청동기 유적인 3천 개가 넘는 황금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 중에 사각 판이나 토우(진흙인형), 황금 소 등에 황금비율이 숨겨져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가장 오래된 황금비율 사례로 꼽히는 피라미드보다 2000년 앞섰고,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4500년 앞선 시기에 이미 황금비율이 사용됐다는 것이다. 이어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이집트의 피라미드 등으로 예를 들면서 황금비율에 대해 서설명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 중 이집트의 한 피라미드는 (빗변)160.2÷(높이)99= 1.61818로 황금비율이 나왔다. 이어 성당의 파사드(정면 장식 부분), 조각상, 아테네 조각상, 새의 날개, 모나리자, 밀로의 비너스 등을 대상으로 이 모두가 황금비율이 적용되었음을 밝히는 장면이 영상과 함께 제시되었다. 그리고 신경생리학자로서 파르마대학교 진씨아 디디오 교수가, ‘우리 뇌는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라는 실험 결과를 말하면서, 그들이 사용한 모든 조각상이 황금비율에 맞았다고 주장했다. 전두엽 활성화 부분으로 보아 황금비율의 조각을 볼 때가 변형된 조각들보다 좋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 그 실험의 결론이었다. 이어 황금비율을 활용하여 성공했다는 얘기가 나왔으며, 다음은 애플사 마크가 나왔는데, 역시 황금비율이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마크를 디자인한 디자이너는 황금비를 계산해서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그렸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이어 애니쉬 카푸어의 유명한 광장 조각인 구부러진 거울 같은 곡면 형태의 추상조각은 황금비가 적용되지 않아도 아름답다는 예로 제시되면서 제2부 프로그램을 예고했다. 제2부는 1부에서 황금비율의 소개하는 내용으로 시작되었으며,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황금비가 1 : 1.618란 비율이란 것을 최초로 발견했다고 알려진 BC 300년경의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가 ‘기하학 원론’에서 붙인 이 비율의 진짜 이름은 ‘양 끝과 부분의 비율’이었다. 이 비율이 16세기 초인 1509년 루카 파치올리에 의해 ‘신성한 비율’로 인정되고, 1525년 알브레히트 뒤러에 의해 ‘신성한 비율을 예술작품에 접목’하게 되었다. 그 후 1611년에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는 ‘우주 만물에 신성한 비율이 들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835년에 마틴 옴이 이 신성한 비율을 ‘Golden ratio’, 즉 ‘황금비율’로 명명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성스러운 비율’이라든지 ‘황금비율’이라는 명칭을 붙이면서 이 비율을 가장 아름다운 객관적 미의 기준인양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먼저 이집트 학자 뉴욕예술대학 교수인 잭 조셉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황금비율 1.618은 피라미드를 완공하고 2천년 뒤에 유클리드가 처음 언급했습니다. 기원전 2600년 피라미드를 건축할 당시 고대 이집트인들은 기하학과 대수학을 전혀 몰랐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파피루스도 피라미드보다 천 년 뒤에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집트들의 당시 수학으로는 황금비율을 계산할 수 없었습니다. 기울기 역시 천 년 후에야 계산할 수 있었습니다. ‘린드 파피루스(아메스 파피루스)’에 나와 있죠. 이 파피루스에는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많은데 황금비율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면서 피라미드를 지었습니다. 지금처럼 정교한 설계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설계도 같은 건 없었습니다. BC 2650년경에 만든 스네프루 피라미드의 경사는 두 번의 실패 끝에 만들어졌습니다. 그 두 번의 경험으로 지금의 각도가 나온 거죠. 피라미드를 최대한 높게 짓고 싶었지만 동시에 실현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피라미드에 대해 말할 때 너무 감상적으로 접근합니다. 그리고 기원이나 건축 방법에 대해 신화처럼 말합니다. 이어 1부에서 다루었던 파르테논 신전이 다시 나오면서, 관광 안내인이 파르테논 신전을 황금비율이 적용된 첫 건축물의 하나로 소개하는 장면이 나왔다. 관광객들도 안내인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이러한 사실을 알고 보니 ‘눈도 편하고 또 감동적이고 더 크게 보이는 것 같아요. 라든가 ’황금비율이 적용해서 그런지 매력적이고 균형이 정말 잘 잡힌 것 같아요. 참 보기 좋아요.‘등으로 말했다. 이에 대해 아테네 국립기술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인 마놀리스 코레스는 파르테논 신전은 황금비율이 적용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황금비율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이를테면 파르테논의 정면의 가로는 30.88m, 비율을 계산할 때 필요한 높이는 기단의 상단부터 돌림때(기둥 상단의 장식) 끝까지를 말하는 데 13.73m 이므로, 이렇게 하면 30.88÷13.88=2.249, 밑에 기단까지 포함하면 30.88÷19.73=1.565이라는 것이다. 이 장면 다음으로 다시 파르테논 신전에 황금비가 있다고 한 사람을 찾아가자, 그는 파르테논 신전은 제일 위쪽 기중 테두리 중 극히 일부분만 황금비율의 사례로 제시했다. 이어 수학·공학자이자 스토니브룩대학 조지 하트 교수가 나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파르테논 신전이나 모나리자를 조사할 때 의도적으로 황금비율을 찾으면서 조금씩 치수를 조정하는 것에서 여러 가지 오해가 비롯됩니다. 사람들은 파르테논 신전이 왜 훌륭한지 묻곤 하죠. 정말 답하기 힘든 질문입니다. 어떤 미술품이 왜 아름답고 중요한지 설명하기가 힘들죠. 하지만 쉬운 답변을 원하는 사람들은 황금비율을 찾아보자고 합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답변이니까요. 다음은 프린스턴대학교 수학과 교수 키스 데블린의 말.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황금비율의 예로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건축에 황금비율을 썼다는 증거는 없지만 이건 서양 수학의 사조에 대한 뿌리 깊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사실이 아님을 1부에서 황금비로 제시한 밀로의 비너스 상이 실제로는 배꼽기준으로 1 : 1.555이며,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도 실제로는 배꼽기준으로 1: 535임을 실측으로 보여주었다. 이 장면이후 천체물리학자이자 존스 홉킨스대학 과학연구소 교수인 마리오 리비오는 이렇게 말했다. 1.6은 1.618인 황금비율에 근접합니다. 하지만 황금비율은 아닙니다. 황금비율은 매우 구체적인 숫자입니다. 제 주방에 있는 작은 텔레비전을 재보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이건 그냥 우연이죠, 무엇을 재보든 1.6에 가까운 비율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다큐 프로그램은 이러한 예로 다큐는 신용카드와 주민등록증의 가로 8.5cm, 세로 5.4cm, = 1.574, 스마트 폰 화면 5.1cm 7.6cm = 1.490 등을 제시하였다. 다음은 조지 하트 교수가 30개의 마름모가 있는 구형을 만지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이 모형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30개의 마름모가 있는데요. 그리스어로 ‘30개의 얼굴’이란 의미로 이 마름모형을 ‘트리아콘타헤드론’이라고 합니다. 짧은 대각선 반지름과 긴 대각선 반지름의 비율이 ‘황금비율’이라는 겁니다. 저는 이게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데 전체적인 구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지 대각선들의 비율 때문에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실제로 황금비율이 있긴 하지만요. 만약 계산을 해봤는데 대각선이 1.7비율이라고 해도 이 조형은 여전히 아름다울 겁니다. 이어 그는 흔히 황금비율로 알고 있는 앵무조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계속 반복되는 주장 중의 하나인데요. 앵무조개에 황금비율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앵무조개를 자로 재보면 1cm, 3cm, 9cm입니다. 모두 3배로 증가하고 있죠. 이건 황금비율이 아닙니다. (황금비율)의 피보나치 선을 그려서 나타내는 게 아닙니다. 피보나치 나선은 한 번 돌 때마다 7배 정도의 비율로 커집니다. 그러므로 황금비율과 앵무조개 사이에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황금비율은 무엇이며 앵무조개에 황금비율이 존재하는가를 실제의 앵무조개를 보면 한 번 돌 때마다 크기가 3배로 커집니다. 1,3,9,27이렇게요. 그리고 플라스틱으로 만든 이 조개는 피보나치수열로 커지게 했습니다. 이건 돌 때마다 7배의 크기로 커집니다. (진짜 앵무조개와는) 전혀 다른 비율입니다. 다음은 프린스턴 대학교 수학과 교수 키스 데블린의 말. 예전에는 앵무조개에 황금비율이 있다고 얘기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렇게 믿었으니까요. 사무실에 앵무조개를 뒀는데 황금비율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앵무조개 사진을 넣어 책도 썼습니다. 정말 오랫동안 믿어왔죠. 그런데 어느 날 누가 연락을 해왔습니다. 자기는 생물학 분야에서 일하는 데 “앵무조개는 황금비율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이에 대해 ‘왜 남들에게 얘기하기 전에 조개를 직접 재보지 않았나요? 질문을 제기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을 만했거든요. 황금비율이 동식물의 성장과 관련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자연 스스로 성장을 위해 최상의 선택을 한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었죠. 제 과학 지식에 비춰봤을 때 앵무조개에 관한 설은 매우 신빙성이 있어 보였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과 황금비율의 관계는 옳을 때가 많습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요. 그래서 그냥 받아들인 겁니다. 그리 중요한 사실은 아니지만 그냥 (황금비율을 설명하기에) 좋은 사례였습니다. 사람들은 다빈치가 황금비율을 그의 작품에 인용했다고 말하죠. ‘모나리자’나 ‘비트루비우스’에도 자주 언급되고요...각 잎사귀의 각도는 성장에 가장 이상적인 황금비율이라고 하죠. 이건 과학이론이에요. 당신이 실제로 그 각을 재보면 천분의 일까지 재도 황금비율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황금비율은 이론 차원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황금비율을 가지고 아름다운 얼굴을 만들 수 없다고 봅니다. 정말로요.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있고 물론 이런 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공식을 만들 수는 있지만 하나의 비율로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황금비율보다 얼굴의 대칭을 더 좋아한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이어 1부에서 황금비율 마스크를 제작했던 성형외과 의사 마쿠어트의 말. 대학에서는 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숫자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을 계량화 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스크 실측 연구 장면 후)얼굴이 이 마스크에 가까울수록 더욱 매력적이라고 느끼는데요. 연구하면 할수록 이를 증명해주는 결과가 나옵니다. 황금비율 마스크는 대칭적입니다. 사람들은 대칭성이 아름답다고 하는 데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황금비율 마스크는 수학적으로 완벽하니까 당연히 대칭이죠. 하지만 얼굴이 대칭적이라고 해서 항상 아름다운 건 아닙니다. 못생긴 얼굴은 대칭적으로 만들어도 여전히 못생긴 거죠. 그리고 몇몇 아름다운 얼굴은 대칭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차이점입니다. 우리의 얼굴은 대칭보다 마스크에 가까울수록 아름답습니다. 이에 대해 천체물리학자이자 존스 홉킨스대학 과학연구소 교수인 마리오 리비오는 이렇게 반박한다. 사람들은 우리의 키와 머리에서 배꼽까지 길이가 황금비율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거죠? 한국인가요? 스웨덴 사람인가요? 어떤 사람인가요? 수많은 사람을 재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비율이 나오겠죠. 1.5에서... 뭐 잘 모르겠지만 1.7, 1.8 그 정도가 나올 겁니다. 황금비율은 그 범위 안에 있죠. 하지만 그건 황금비율이 아닙니다. 황금비율은 1.618에 해당하는 단 하나의 숫자입니다. 1.6이 나온다고 해도 그건 황금비율이 아닙니다. 이어 1부에서 역시 황금비율을 입증한 사례로 소개된 페히너 이론도 사실이 아님을 다음과 밝혔다. 나중에 다른 사람이 한 연구에서 페히너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주장과 맞지 않은 실험 결과를 누락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예를 들어 타원 기둥의 긴 부분이 짧은 부분과 비례할 때는 정말 황금비율인데, 사람들이 이 모양을 선호하지 않았다고 해서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다른 연구자가 페히너의 실험을 다시 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은 황금사각형을 약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미학적으로 정확하게 황금비율을 선호한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우리 눈으로는 1.6비율과 1.618비율의 차이를 모릅니다. 우리는 너무 길거나 짧지 않은 적당한 비율의 사각형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1.5비율이나 1.6비율의 사각형을 좋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황금비율이 아니죠. 19세기 자연과학자이자 정신물리학의 창시자로서 최초로 황금비율에 대한 심리실험을 한 페히너(1801~1887)의 실험은 1:1.50 비율의 직사각형, 1 : 1.618비율의 직사각형, 1 : 1.77의 직사각형의 선호도 조사였는데, 선호도 실험 결과는 각각 20.6%, 35%, 20%가 나왔다. 이와 같은 페히너의 실험을 소개한 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 세 개의 직사각형이 있습니다. 이 중 하나는 황금비율입니다. 다른 직사각형보다 황금비율이 적용된 직사각형이 아름답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냥 직사각형일 뿐입니다. 과학이나 수학을 풀기 위해 수학을 이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문제를 수학으로 풀기는 어렵습니다. 이어 황금비 활용 광고 청바지 광고 디자이너 등이 마케팅 차원의 허구임을 드러내는 장면이 나왔. 그리고 몸 짱인 한국 모델들의 나왔는데, 그들의 신체 비율은 황금비율이 없고 제각기 달랐다.(늘씬한 키의 여자는 1: 1.467, 남자 모델은 배꼽기준으로 70cm 107cm이었음) 다시 키스 테블린의 말. 유클리드가 붙인 이 비율의 진짜 이름은 ‘양 끝과 부분의 비율’입니다. 장담하건대 누군가가 ‘성스러운 비율’이라든지 ‘황금비율’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면 아무도 이 비율에 신경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화가도 “ 이 작품을 양 끝과 부분의 비율로 그렸어”라고는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보니 정말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황금비율에 대해 완전히 거짓되된 이야기를 지어냅니다. 이어 1부에서 최초의 황금비율 유물로 제시되었던 BC 4600년 출토 유물 바르나 유물이 다시 나온 후 이 유물에 대한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가 충돌하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고대박물관 관장 블라디미어 슬랍제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끼리만 해도 다양한 의견을 가졌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오늘날 유물에서는 황금비율 밖에 안 보이지만 몇 년 후에는 다른 것이 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학의 가치이자 다른 학문 분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이에 대해 다시 이어진 조지하트의 말. 저는 황금비율이 언제 적용되고 언제 적용되지 않았는지 자세히 봤습니다. 정말 자세히 관찰하면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어진 마쿠어트의 제2부 마지막 멘트. 인생은 모험이고 황금비율도 모험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완전히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찾든 그것이 진실이라면 미래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제가 옳은 지 틀린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틀린 것에 매달려 고치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틀렸다면 그것이 다른 누군가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3. 수학을 중시한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전주의 미학은 아름다움의 객관적 기준이 수에 있다고 믿었으며,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황금비율이 그 핵심이었다. 따라서 황금비율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 미의 기준이었다.(* 동양에서도 고대부터 황금비와 유사한 ‘금강비’라는 것이 있었으며, 이를 기준으로 석굴암이나 세한도를 분석한 사람도 있다) 19세기이후 현대에 와서 이러한 미의 기준은 파기되었으며, 특히 다다 이후 황금비율을 근거로 한 전통적 미의식은 부정되거나 무한히 확장되었다. 그런데도 지금도 동서양에서는 황금비율과 같은 수치화된 비율로 아름다움의 객관성을 제시하는 경유가 많다. 우리나라 중등 미술교과서에도 앵무조개나 그리스 조각들과 같은 잘못된 정보를 토대로 황금비율이 객관적 미의 기준인양 제시되어 있기도 하다. 게다가 황금비율은 오늘말 상업자본주의적 마케팅의 연장선에서 활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황금비율이 보편적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믿게 된다. 위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자각할 수 있지만 이러한 미적 기준은 유클리드 이래 서구 문명 특유의 수학적 전통에서 나온 의식의 산물이다. 다차원의 복잡계인 이 세상을 1차원적 선상의 특정 수치를 보편적 아름다움으로 입증하려는 것은 너무도 단순한 생각이다. 특정한 수치로 재단할 수 없으므로 새로운 관점에서 무수한 가능성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2014. 8. 20. 개학 이틀 전을 앞두고)
154 no image 이방인과 현실적 삶
도병훈
2556 2014-05-20
이방인과 현실적 삶 ‘타자는 지옥이다.’ 올 봄 어느 날 무심코 펼친 책에서 본 구절인데, 때마침 타자에 대해 생각하던 중이어서 그 우연의 일치에 놀란 적이 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간 10년 넘게 거의 매달 한 두 편의 글을 쓰던 일을 중지했다. 대외적인 발표에 의미를 두기 보다는 그 때 그때의 생각을 기록하거나 개인적 공부에 더 가치를 두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글쓰기를 지속할 수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매너리즘에 늘 신경이 쓰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지난 몇 달 간을 정신이 없을 정도로 쉴 틈 없이 어떤 일들에 매달리다 보니 벌써 몇 달이 지났다는 느낌이다. 그 일에는 중학교 미술교과서를 집필하거나, 어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것들과 함께, 산행이나 오역 논쟁으로 화제가 된 이방인 읽기도 포함된다. 방금 직접 갈아서 필터로 내린 맑고 그윽한 커피의 빛깔과 향기와 맛을 음미하듯, 이방인을 다시 읽었다. 오역 논쟁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문과 한글 번역을 같이 읽었는데, 삶의 우연성,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통찰은 다시 읽어도 언어를 뛰어 넘는 듯한 진실성을 느끼게 했다. 전통적 진술 방식은 물론 감정이나 일체의 추상적인 신념을 배제한, 찬란히 부서지는 지중해의 햇살과 물결이 몸에 닿는 듯 촉각적인 현재만을 서술한 한 문장 한 문장이 다시 또렷하게 뇌리에 와 닿았다. 무엇보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를 포함한 모든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진술하는 한 개 한 개의 낱말과 문장까지 끊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녀는 손가방을 열고 작은 네모진 종이 한 장과 연필을 꺼내 계산을 해보고 나서 팁을 더한 정확한 값을 포켓에서 꺼내 자기 앞에 놓았다. 그때 오르되브르(*프랑스 음식)를 가져왔는데 그녀는 그것을 잽싸게 먹어치웠다. 다음 요리를 기다리면서 그녀는 또 손가방에서 파란 연필과 이번 주의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이 실려 있는 잡지를 꺼냈다. 그녀는 정성스럽게 하나씩 하나씩 거의 모든 방송에 표시를 했다. 잡지는 열두어 페이지나 되었으므로 그녀는 식사를 하는 동안 줄곧 세밀하게 그 일을 계속했다. 내가 식사를 끝마쳤을 때도 그녀는 여전히 열심히 표시를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일어서서, 그 변함없이 자동인형 같은 몸짓으로 웃옷을 입 고 밖으로 나갔다.(중략) 그녀는 엄청난 속도와 정확한 걸음으로, 옆으로 비키거나 뒤돌아보지도 않으면서, 자기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위의 글은 이방인에 나오는 한 장면으로, 현대인의 기계적인 삶을 묘사한 것이다. 직접적인 체험이나 삶과 현실세계에 대한 냉철한 시각 없이는 결코 쓸 수 없는 글이다. 이러한 감동의 여운은 교실로도 이어져, 수업 중 이방인을 떠올리며 삶이나 운명이 얼마나 우연적이고 가변적인지 아이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무렵, 세 살 아래인 고종 사촌이 생을 마감했다. 이미 작년부터 몸이 좋지 않아 지난 설날에 본 이후 꽃 피는 봄날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올해 들어 설날(구정) 직전에 한 살 위의 고종사촌도 교통사고로 갑자기 생을 마감한 적이 있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슬픔 너머 삶의 유한성에 대해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 그날 이후 바다는 TV 화면만으로도 물살에 따라 ‘정조기’와 ‘대조기’가 달랐고, 자연의 거대한 힘을 느끼게 하는 속살을 드러내었다. 전쟁 중 일상을 간결한 문체로 기록한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바다에 대해서는 물결의 높이까지 왜 그토록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는지 새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바다 물결의 상황에 따라 잠수부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물속에 드나들었고, 시신들을 건져 올렸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성토의 목소리와 사건에 대한 진단의 장면은 언론매체와 TV 화면에 수없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집 밖을 나가보면 아무 일 없는 듯 날씨는 화창했고, 막 새싹에서 벗어난 연하고 맑은 연두 빛 나뭇잎은 더 없이 청신했다. 그 나뭇잎은 하루가 다르게 짙어 갔다. 사건 후 수 십 일이 지나자 연일 참사 보도가 계속되던 TV에서는 다시 연예 및 스포츠 뉴스, 자본주의 광고가 방영되는 횟수가 점차 늘어났다. 그리고 다시 아침마다 사람들은 버스 정류장을 향해 달려가고, 길을 걸으면서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다시 바쁜 일상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올 봄에 여러 일들을 겪으며 반복되는 우리 삶의 의미와 가치가 그 어떤 신념의 틀로 규정할 수 있거나 자본의 문제가 아님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실존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생에 대한 의지와 한 순간 한 순간 형성해나가는 현실적 실천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지와 실천은 타자에 대한 관계의 문제로, 이는 그 어떤 규정과 판단 이전에 섬세한 감수성이 필요하다. 우리의 일상이 또 다른 타자에게 상처를 주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폭력이 되풀이 되고, 심지어 ‘존재하는 것이 폭력이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 것은 어떠한 사건이 단지 시스템이나 특정한 개인의 잘못이 아님을 방증한다. 이 때문에 세상이란 캔버스에, 아니 한 장의 종이에 진실한 몸짓으로 채색하기가 그토록 어렵고, 바로 이 때문에 그 의지의 흔적만으로도 아름다운 것이다.(2014. 5. 19)
153 no image 연극 <레드>와 마크 로스코
도병훈
4808 2014-02-08
연극 <레드>와 마크 로스코 1. 2014년 1월 9일, 가족과 함께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연극<레드>를 보았다. 레드는 러시아출신 미국의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와 가상인물인 조수 켄의 대화만으로 구성된 2인극이다. 주1) 주2) 연극은 벽화 제작에 얽힌 로스코의 실화를 다루었다. 생을 마감하기 12년 전인 1958년, 200만 달러란 거액을 받고 미국 뉴욕의 38층 오피스빌딩 시그램 타워 내 레스토랑 ‘포 시즌스Four Seasons’의 벽화를 의뢰 받은 로스코는 모든 열정을 쏟아 30점을 완성했지만 호화판 레스토랑 ‘포 시즌스'에 오는 손님들의 허영심이 자기 그림을 가치 없게 만들 거라는 염려 때문에 결국 계약을 파기했다. 연극 레드는 이 사건을 소재로 하되, 연극적 구성으로 세대 간의 갈등 및 현대미술의 단면을 심도 있게 다룬다. 지난 2006년 삼성미술관 리움Leeum의 ‘마크 로스코: 숭고의 미학전’(*2006.06.22 ~ 09.10)에서 1930년대 구상화, 1940년대 신화화, 1950년대와 60년대 색면 그림들이 시기 별로 전시되어 그의 회화 전반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스코 작품의 특성인 조명의 중요성을 살리지 못한 평범한 디스 플레이 때문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연극 <레드>의 무대는 100분 내내 하나의 공간에 머문다. 자연광을 차단한 작업실, 무대 정면 한 가운데에는 거대한 캔버스가 놓여있다. 무대는 마치 실제 작업실을 옮겨 놓은 듯, 물감과 팔레트, 붓 등은 물론 바닥에는 물감이 떨어지고 뿌려진 자국들이 보인다. 두 사람이 직접 물감 통을 들고서 가로 세로 2미터가 넘은 캔버스에 함께 붓질을 하기도 하지만 로스코(강신일 역)와 허구의 인물인 조수 켄(강필석 한지상 더블 캐스트)이 그곳에 처음 찾아온 날부터 2년 뒤 해고되는 날까지 나눈 대화가 극의 전부다. 또한 연극 대사에 대한 관심은 연극 영어 원문 대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대사를 원문으로 보면서 좀 더 그 묘미를 느낄 수 있었다. 2. 로스코 : 기다려, 좀 더 가까이. 가까이 다가가야만 해. 그림이 고동치게 해. 너한테 말을 걸게 하란 말이야…."더 가까이. 너무 갔어. 거기 서!. 이것이 펼쳐진 것을 보라. 너의 팔로 감싸듯이 하라; 이것이 너를 포옹하도록 해라. 너의 피상적인 눈으로 가득 채운다면 존재한 것도 아니며 존재할 수도 없다. 이 그림을 위한다면 신을 위하듯이 다가서야 해! 앞으로 다가 서. 이 그림에 의지해. 이 그림에 참여해! 지금, 너는 무엇을 보니? 기다려, 기다려, 기다려! 주3) 이처럼 연극은 까다로운 감상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되면서 앞으로 전개될 사건을 암시한다. 이 연극은 작업실에서 객석을 노려보듯 바라보는 로스코의 정지된 동작에서 시작된다. 문을 두드린 후 작업실에 등장한 조수 젊은 화가 켄에게 로스코는 가까이 오라는 손짓과 함께 “뭐가 보이나?” 라고 묻는다. 이어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친절하게 인간적으로 말해봐. 인간이 되어라. 그것이 네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야. 너의 삶에서 단 한 번이라도 인간이 되어라!” 또는 “잘 봐. 그래, 뭐가 보이지?” “레드요!” “마음에 드나?”라는 등의 대사가 연이어 계속된다. 이어 ‘무엇이든 겉만 보고 좋다는 식의 무분별한 세태를 비판하는 로스코의 대사가 나온다. 로스코는 역사적인 존재로서의 작가 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는 “하지만 진지함이나 의미를 열망하지 않는 이들은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터너, 마티스, 나 로스코를 포함해서 앞서간 선배들, 분투하고 극복해낸 사람들의 그림자조차 밟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야.”라는 대사에서 잘 드러난다. 주3) 다시 조수로서의 역할을 강압적인 언사로 알려주는 대사가 나오고, 곧 바로 그림에 대한 철학적인 대화가 이어진다. 이는 “붓질 한 번 한 번에 비극이 담겨 있어.”“니체 읽어봤나? 프로이드, 융, 바이런… 그러면 햄릿은?” 등에서 알 수 있다. 주4) 그리고 나서 뉴욕의 새 빌딩의 식당에서 벽화를 주문 받은 것과, 로스코 자신은 그곳을 그림을 명상하는 ‘사원’을 만들로 싶다는 뜻을 피력하면서 그림 제각에 몰두하며 음악을 듣는 것으로 첫 번째 장면이 끝난다. 두 번 째 장면은 모차르트와 슈베르트 음악이 축음기에서 나오는 광경으로 시작된다. 그리고는 곧 자신의 이전 세대인 입체주의자들이 드 쿠닝, 폴록, 바넷 뉴먼, 자신과 같은 동세대 작가들이 짓밟아 숨통을 끊어 놓았다는 직설적이고 강한 대사로 이어진다. 주5)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를 몰아내야 해, 존경하지만 살해해야 하는 거야” 라는 이 연극의 명대사가 나온다. 이어 자신은 빈 캔버스와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마네와 벨라스케스 같은 거장과 맞선다고 한다. 연극은 로스코의 대사로 극에 대한 몰입도를 높인다. 그림에서의 조명의 중요성과 함께 자연 빛은 자신의 예술작품과 상극임을 주장한다. 이어 자신이 처음에는 평범한 인상주의 그림을 그리다가 로마에서 카라바조(*17세기 화가로서 극적인 명암대비의 화풍으로 렘브란드 그림에 영향을 줌)의 접하고 난후 자신의 그림 세계가 크게 바뀌는 계기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다시 두 사람은 사과? 해돋이? 자전거에 슨 녹? 동맥을 흐르는 피? 하며 ‘레드’에 대한 대화를 이어간다. 이어 로스코는 마티스의 ‘레드 스튜디오(1911년)’, 즉 붉은 작업실이란 작품으로부터 깊을 영향을 다음과 같은 대사로 고백한다. 로스코 : 벽은 선명한 레드에 바닥과 가구도 레드야. 레드 컬러가 마티스한테서 뿜어나오고 있어. 모든 걸 다 삼켜버릴 것 같아. 이 그림이 뉴욕현대미술관에 처음 걸렸을 때 난 몇시간 씩 그 그림을 보고 지냈어. 매일 매일 들렀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작업의 기원이 바로 그 그림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로 거슬러 올라가면 돼, 그림이 작용하고 움직이게 한는 마티스의 그림들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내 심장은 고동쳤고 난 푹 빠져버렸어. 그 그림은 날 삼켜버렸지. 마티스가 만들어낸 그 놀라운 레드의 생명들, 에너지 넘치는 그 컬러의 형체들 그 느낌! ... 하지만 이제 그 그림들을 볼 수가 없어 ...너무 우울해서... 철저하게 엄청나게 레드에 푹 빠져 있는데도 ... 그건 거기에 있어. 옷장위 벽난로 선반에 중앙 바로 윗부분에, 수많은 컬러 특히 그 빌어먹을 옐로우 때문에 더 강조돼서 말이야. 마티스는 그것 피할 수 없게 해놨어. 캔 : 그게 뭔데요. 로스코 : 블랙. 캔 : 블랙 두 번째 장면에 마지막 대사는 “인생에서 두려운 것은 블랙이 레드를 삼켜버리는 거야”이다. 세 번째 장면은 자신과 잭슨 폴록을 니체의 『비극에 탄생』에 나오는 지성을 상징하는 ‘아폴론’과 감성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에 비교하는 대사로 전개된다. 예술가들은 이 둘 사이에서 끊임없는 불균형으로 고뇌하는 존재이며,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잭슨 폴록'의 죽음에 대해, “상업적인 대 성공 이후 자신의 그림을 제대로 보아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게으른 자살'을 택한 거라고” 말하면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대사도 캔의 반문과 함께 나온다. 주6) 이어 부모가 살해당한 조수 캔의 가정적 비극이 언급된다. 어린 시절 부모가 살해된 기억이라는 트라우마가 있는 켄을 통해서 흰색, 즉 화이트라는 색깔로 삶을 드러낸다. 하얀 침대 시트에 흥건했던 부모의 선혈에 대한 켄의 생각은 젊음의 상징인 화이트에 다가서지 못하게 한다. 그렇지만 로스코는 “마티스, 폴록, 반 고흐, 등의 화가들을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마, 그들의 고통을 헤아릴 통찰의 순간은 닿을 수 없는 저 너머에 있어”라며 캔의 생각을 부정하는 말을 한다. 네 번 째 장면에서는 조수 캔과 그림에 대한 견해가 충돌하는 대화로부터 시작된다. 말하자면 1950년 후반 당시의 인기 작가들인 제스퍼 존스나 프랭크 스텔라, 로버트 라우센버그,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 등에 대해 캔이 말하자, 로스코가 “너 정말 앤디 워홀의 작품이 백년 후에도 미술관에 걸릴 거라고 생각해? 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캔은 이미 걸려 있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로스코는 모든 것이 다 좋을 수 없다며, 두 사람의 대화는 더욱 상반된 견해로 치닫는다. 급기야 캔은 로스코의 작가로서의 태도에 대해 직설적으로 비판하게 된다. 로스코의 작업실에서 잡일을 하는 조수 켄도 극이 진행될수록 점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로스코의 예술 정신과 상업적 프로젝트를 비판한다. 이는 “그냥 위선자라고 인정하세요. 현대 미술의 거장께서 소비의 사원 벽에 그림을 그리시고 있잖아요. 예술의 상업화를 비난하시지만 결국 선생님, 돈 받으셨잖아요.” 또는 “이제 퇴장하시죠. 로스코 선생님” 같는 직설적 언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로스코는 자신의 그림들을 그곳에 두어 밥을 먹으로 오는 자본에 찌든 사람들의 입맛을 떨어뜨리게 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켄은 어떻게 그림들에게 그런 가혹한 짓을 할 수 있느냐며 놀란다. 이어 두 사람의 갈등을 나타내는 대사 끝에 로스코는 “이곳에서 너는 오늘 처음 존재했어.”라고 응수한다. 다섯 번 째 장면은 자신의 그림이 결코 식당 벽화로는 맞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출품을 포기할 것을 결정하는 내용으로 극이 전개된다. 레스토랑에 다녀온 로스코는 그곳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 이외에 벽에 걸린 그림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계약을 파기한다. 주7) “나이프와 포크 부딪히는 소리, 잡담과 소음이 난무한 식당에서 얘네(그림) 들이 견딜 수 있을까.” “아름다움을 위장한, 비극을 감춘 헛된 원색들 속에서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는가.”라는 대사는 로스코의 고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것을 상품화·사물화 하는 자본주의 시대 속에서 그는 자신의 그림이 자체의 생명력을 잃고 하나의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켄은 거액을 외면하고, 2년간 자신이 공들인 노력까지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만든 로스코의 결정에 항의를 하면서 시대 흐름을 직시하라고 독설을 퍼 붙는다. 극에 말미에 이르러 로스코는 “너의 인생은 저 밖에 있으니까 너 이제 밖으로 나가야 돼.” 세상으로 나가 “너의 주장을 펼치고 사람들이 보게 만들어 너만의 세계를 만들어가야 해!”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봐!”라고 해고 통지를 한다. 그리고, 마스코는 처음 켄이 작업실에 오던 날 했던 질문을 다시 한다. “뭐가 보이나?” 켄은 외친다. “레드요!” 연극은 로스코가 무대 뒤편 중앙에 붉은색으로 가득 찬 캔버스 앞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극히 끝난다. 주8) 3. 연극에서 다루었듯 로스코는 자기 작품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해 자본주의적 영합을 마다함으로써 화가의 자존심을 지켰다. 레드는 예술성에 대한 근본적 물음과 함께 자본주의와 예술의 분열적 관계에 대해 다시 성찰하게 한 연극이다. 보는 내내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할 정도로 연극 <레드>는 막을 내릴 때까지 긴장감 넘치는 대화의 연속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현대미술에 대한 사전 이해가 없어도 관객들이 두 인물의 설전에 집중하고 몰입하게 한다는 점인데, 이는 연극이 갖은 직접성과 현장성의 생생한 체험이기도 했다. 연극에서 ‘레드’는 로스코가 후기로 갈수록 켜켜이 덧칠한 그림의 주조색이면서 동시에 그의 젊음이고 생명이며 동시에 비극적 색채이다. 그것은 레드를 “심장박동, 열정, 동맥 혈, 마당에 세워진 자전거에 슨 녹, 폭풍처럼 번지는 불, 루소의 태양, 들라크루아의 깃발, 엘 그레코의 예복, 피렌체 대리석, 원자의 섬광, 면도하다가 밴 자국, 면도 거품 속의 피, 러시아 국기, 나치 깃발, 중국 국기, 용암, 바닷가재, 전갈, 내장, 불꽃, 죽은 야수파 화가들, 손목 긋기, 싱크대에 흐르는 피, 사탄”에 비유하며, “내 예술은 추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살아 숨 쉰다.”는 그의 어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레드는 예술과 삶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는 예술가, 나아가 우리의 삶을 대변하는 색인 셈이다. 이런 차원에서 레드는 단지 추상적 색상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다양한 현실을 집약한 색상이다. 따라서 그에게 미술은 현세적 가치 너머의 세계를 응시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탐험할 수 있는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는 모험이었다. 주9) 연극 제목은 단지 로스크를 상징하는 하나의 색을 선택했지만 극의 의미는 그렇지 않다. 이 연극은 좋아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 차원일 수 있는 지를 예술가의 고뇌를 통해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역사의 흐름 속에 물결처럼 존재하는 실존의 문제와 근현대미술사의 이면적 핵심을 둘의 긴장감 넘치는 논쟁으로 극화한 것이다. 아직도 ‘미의식’을 ‘예쁜 것을 좋아하는 의식’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은 우리 현실에서 로스코의 고뇌어린 삶은 예술의 정신적 가치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나아가 ‘레드’는 단지 신 구세대의 갈등이나 특정 작가의 외고집이 아닌 어떠한 현실에서도 예술적 가치가 삶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영역임을 자각케 한다. 주10) 로스코는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한 밀도를 가진 그림으로 마음을 적시며 감성을 뒤흔드는 새로운 미술세계를 열었다. 20세기 중후반 친자본주의적 트렌드가 미술계를 지배하던 현실을 생각해보면 빌딩 벽화를 포기하는 결단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난다. 당시 미국 사회는 요즘 우리 사회에서 실감할 수 있듯, 실존 자체가 극한의 상품화, 사물화로 치닫던 시기였다. 따라서 로스코의 포기는 모든 것이 상품으로 생산되거나 교환되고 소비되는, 즉 예술조차 자본에 예속되어가는 현실에 맞서는 결연한 대응 방식이었던 것이다. (2014. 2. 7) 주1)이 연극은 2009년에 런던에서 처음 공연한 이래 당시 참신한 소재와 탄탄한 구성으로 관객들의 큰 호평을 받았으며, 2010년 토니상 최다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작품은 2010년에 연극영화계의 핫 플레이스인 브로드웨이에서 최우수 작품상 뿐만 아니라 여러 부문에서 수상을 하면서 그 해 최다수상작이라는 큰 명예를 얻었다. 한국에서는 2011년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공연이었다. 주2)마크 로스코는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클리포드 스틸(Clyfford Still)을 포함한 뉴욕 화파 일세대 화가들 중 한명이다. 사각형 틀 안에서 각기 다른 톤으로 부드럽고 잔잔하게 색채들이 화폭에 스미면서, 얼룩져 있는 그의 예술세계는 잭슨 폴록의 그림과 함께 전후 현대미술사에 한 획을 긋는 화가로 평가된다. 주3)ROTHKO: Wait. Stand closer. You’ve got get close. Let it pulsate. Let it work on you. Closer. Too close. There. Let it spread out. Let it wrap its arms around you; let it embrace you, filling even your peripheral vision so nothingelse exists or has ever existed or will ever exist. Let the picture do its work – But work with it. Meet it halfway for God’s sake! Lean forward, lean into it!... Now, what do you see? - Wait, wait, wait! 주4)로스코는 렘브란트 판레인, 윌리엄 터너, 반 고흐 등을 존경했으며, 자신은 모더니스트가 아니라 전통주의자이며 니체주의자라 주장했다. 로스코는 프로이트, 융, 마르크스, 프레이저 등의 이론들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는데, 특히 1920년대에는 서양철학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상가중 한 명인 철학자 니체의 사상에 심취한다. 그는 니체처럼 그리스 연극의 초기 양식들에 관심을 갖고, 고대 그리스에 관한 책, 특히 3대 비극 작가 가운데 최초의 인물인 아이스킬로스Aeschylus의 저서를 읽었다. 니체는 아이스킬로스의 양식에는 아폴론형과 디오니소스형이 융합되어 있다고 말했다. 로스코는 신화에서 ‘행위, 힘, 충돌하는 지배력들의 극적인 세계’를 발견했다. 주5) But a generation that does not aspire to seriousness, to meaning, is unworthy to walk in the shadow of those who have gone before, I mean those who have struggled and surmounted, I mean those who have aspired, I maan Rembrandt,I mean Turner, I mean Michelangelo and Mattisse… I mean obviously Rothko. 주6)로스코는 12년 후인 1970년에 67세로 작업실에서 자살했다. 주7)이 때 제작된 연작 40여 점은 영국 일본 등으로 흩어져, ‘레드’ 무대 위 그림은 일본 지바 현 가와무라 기념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8)이 연극에 나오는 주요 대사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ROTHKO: Tragic, really to grow superfluous in your own lifetime. We destroyed Cubism, de Kooning and me and Pollock and Barnett Newman and all the other. We stomped it to death. Nobody can paint a Cubist picture to day. (비극적이야, 정말, 살아있는데 더는 필요 없는 존재가 돼버리다니. 우린 큐비즘을 끝장냈어, 드 쿠닝과 나, 폴록, 바넷 뉴먼 그리고 다른 작가들이 큐비즘을 짓밟아 숨통을 끊어버렸지) “이봐, 인생에서 내가 두려워하는 게 딱 하나 있는데, 그건 언젠가 블랙이 레드를 삼켜버릴 거라는 거야” “마티스의 레드의 색면들 그 느낌…옛날 얘기다. 이제 그 그림을 볼 수 없어 마티스…화가들을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마. 그들의 고통을 헤아릴 통찰의 순간은 닿을 수 없는 저 너머에 있어. 그들은 네가 닿을 수 없는 저 너머에 있어!” “침묵은 너무나 정확해!” “…모든 게 좋지 않아. 우린 좋지 않아” "요즘 사람들은“… 뭐든 좋대! 난 누군가 내 그림을 좋다고 이야기하면 토하고 싶을거야!!” “그들이 내 그림을 거절해줬으면 좋겠어.” “요즘 사람들은 즐겁고 명랑하고 밝은 것만 찾는다, 앤디 워홀의 수프 캔이나 만화 같은...하지만 예술은 그런 것이 아니야. 예술은 즐겁고 명랑하고 밝은 것 뿐 만이 아니라 고통, 우울, 당혹, 죽음 같은 것도 포괄하는 거다” “그림은 주변에 뭐가 있느냐에 의해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해.” “화가가 조명과 공간을 지나치게 통제하려 든다고? 그건 그림을 보호하려는 노력이야!” “그림들의 힘은 그들이 있는 장소를 초월해” “그림들이 장소를 만들어낸다.”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서 비싼 와인을 시키지만 자기 자신만 당황시키고 웨이터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 “이젠 그 그림에서도 레드가 안 보여…. 피할 수가 없어. 블랙을.” "선생님은 너무 가식적이에요. 낭만적이라고요!" "혼자였어. 그때가 최고의 시간들이었다.. 우리에겐 비전만 있었으니까" “나 이제 조수 필요 없다.” “넌 말이 너무 많아” “선생님만 하겠어요?” 주9) 다음은 이 연극에 나오는 대사는 아니지만 로스코가 자신의 예술을 깊이 성찰한 어록이다. “나는 추상예술가는 아니다. 나는 색, 형태, 또는 어느 것과의 관계에도 관심이 없다. 나는 오로지 기본적인 인간의 감성들을 표현할 따름이며 비극, 희열, 운명들을 표현한다.” “화가의 작업이란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는 여행과 같다.” “그림은 사람과 교감함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감성적인 감상자에 의해 확장되고 생성된다.” 주10)로스코의 회화에서 철저히 배제된 장식적 효과나 패턴의 양식, 장신구 등의 시각적 효과나 그를 위한 기법 등에 대한 단호하고도 적대적인 태도는 그의 첫 번째 결혼과도 상관이 있다. 그의 첫 아내였던 이디스 새커는 결혼 당시 보석 디자이너였는데, 무명 화가였던 로스코의 예술가적 자존심을 유린할 정도로 직업인으로서 돈을 벌기 위한 디자인을 강요함으로써 그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 주었다고 한다.
152 no image 소백산을 다녀와서
도병훈
3571 2013-11-06
소백산을 다녀와서 1. 세계는 체험의 폭만큼 넓어진다. 체험은 몸, 호흡, 목측(目測), 지질학적 토양, 빛과 색의 차이가 빚어내는 낯선 시공, 역사와 문화의 흔적 등이 어우러지면서 관념의 틀을 깨는 과정이다. 지난 토요일(10월 19일), 직장 동료 선생님 4인과 함께 한반도 백두대간(白頭大幹)의 허리인 소백산(小白山)을 다녀왔다. 최초 집결지인 광명에서는 한 선생님의 차로 안양으로 이동한 후, 아침 6시 40분경에 출발하여 영동고속도로를 거쳐 죽령 고개 넘어 희방사 주차장까지는 장 선생님의 승용차로 이동하고, 희방사 어귀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이번 소백산 산행은 지난 1998년에 3박 4일간 지리산을 종주한 이래 두 번째로 백두대간 구간을 간 것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고지도에 나타난 이 땅의 산줄기를 모티브로 하면서도 산행이란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공간과 존재를 탐구하는 작업을 해온 나로서는 이번 산행이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먼 길을 우회한 끝에 관념이 현실이 된 것이다. 경상북도 영주시·봉화군, 충청북도 단양군에 걸쳐 있으면서 영남과 충청을 가르는 소백산은 죽령 이남으로는 묘적봉(1,148m) 도솔봉(1,314m), 북으로는 제2연화봉(1,357m), 연화봉(1383m), 제1연화봉(1394m), 비로봉(1,439m), 국망봉(1,421m), 신선봉(1,389m) 등 고산연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백산은 국립공원 중에서도 지리산 군, 설악산군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넓이이다. 소백산은 삼국시대에는 신라·백제·고구려 3국의 경계에 있었던 곳이고,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들이 즐겨 유람했던 유구한 역사와 애환이 어린 장소로서 그만큼 많은 역사적 사연과 문화 유적 및 기록유산이 전한다. 그래서 이번 소백산 산행은 자연과 함께 한 선인들의 삶의 궤적과 불교, 유교, 선교 등이 융합된 우리 고유의 사상과 자연을 모티브로 삼아 넓고도 깊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형성한 이들의 삶을 더욱 강렬하게 내 몸으로 체험하고 감지하는 일이기도 했다. 나아가 특정 공간에 대한 선택과 집중 속에서 더욱 새롭게 경험하는 삶의 결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2. 희방사(喜方寺) 매표소 근처에는 뜻밖에도 웬만한 명산의 절 입구에 있는 사하촌이 없었다. 점심식사를 미리 준비하지 못해서 나와 장 선생님만 다시 죽령휴게소까지 가서 사발면과 약간의 과자류, 그리고 동동주 등을 사서 다시 출발 장소로 이동했다. 다른 일행은 먼저 출발했기 때문에 둘이서만 짐을 나누어진데다 원래 가져온 짐의 무게도 있어 배낭이 만만치 않게 묵직했다. 희방사 계곡으로 들어서서 얼마가지 않았는데 곧 약 28m 높이에서 거의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보였다. 지난 2002년에 금강산에서 본 구룡폭포에 비하면 작은 폭포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름으로만 알다가 직접 보는 희방폭포였다. 조선 전기의 학자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하늘이 내린 선경(천혜몽유처,天惠夢遊處)’이라 했을 정도로 이 폭포는 소백산의 한 절경으로서 오래전부터 영남 제1폭포로 꼽혔다고 한다. 폭포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구름다리를 건너자 희방사가 있었다. 이 절은 그 연혁이 오래된 절이지만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후 신축한 건물이어서 유장한 역사의 향기는 느낄 수 없었다. 희방사 옆으로 난 산 길을 따라 오르니 곧 숨이 가쁠 정도로 가파른 산길이었다. 이러한 산행에서의 위안거리는 형형색색의 단풍들과 시리도록 청초한 야생화들이었다. 주1) 가파른 계단 길을 계속 1시간 정도 오르자 깔딱재라는 곳에 이르렀다. 거기서 왼쪽으로 역시 경사진 산길을 계속 걸어서 점점 오르자 한 폭의 수묵화처럼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가을 소백산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서 간 김선생님과 이 선생님이 발견한 어느 바위 위에 오르자 방금 올라온 희방사쪽 계곡이 한 눈에 들어왔다. 골짜기와 능선마다 형형색색의 단풍이 비바람에 씻긴 낡은 단청처럼 조화롭고 깊은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다채로운 색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색계(色界)였다. 계속 걷고 걸어서 마침내 산 정상에 도달했다. 바로 연화봉(蓮花峰)이었다. 비로소 소백산의 주요 능선을 이루는 정상이자 백두대간에 오른 것이다. 산 정상은 완만하고 편평한 했는데, 소백산의 주요 능선과 사방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남으로는 천문대가 있는 제2연화봉, 북으로는 제1연화봉과 멀리 비로봉, 그 너머 국망봉까지 보여 백두대간의 굽이치는 연봉들을 목측(目測)으로 조망할 수 있었다. 깊고 푸른 가을 아래 흰 구름 아래로 끝없이 아득한 능선들이 구비치는 장엄한 형상은 가슴이 탁 트이는 광경이었다. 우리 일행은 연화봉 정상에 설치된 넓은 마룻바닥 한 곳에서 준비해온 컵라면과 과일, 과자 등으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제1연화봉과 비로봉을 향해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능선 길은 멀리서 본 것과 달리 내리막길과 오르막길로 이어져 있었다. 주위의 나무들은 해발 1300m 이상의 고지대라서 대다수가 관목들이었다. 이들 관목들은 겨울나무처럼 잎도 거의 다 떨구고 맨 가지만이 빽빽하게 길 양쪽으로 우거져 있었고, 그 사이로 더러 수명을 다한 나무들도 많이 드러나 보였다. 이러한 나무들은 모든 개체의 유한성, 즉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사라지는 필멸(必滅)의 이치를 보여주듯 수명을 다한 나무 둥치들이 흙으로 변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흙에서 또한 신생(新生)의 식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능선 길을 가는 내내 고산 지대 특유의 신기한 나무들이 많았으며, 그 중에는 짙은 분홍빛 꽃처럼 색이 강렬하고 짙은 열매도 있었다. 이어 제1연화봉을 거쳐 계속 비로봉을 향해 걸었는데, 능선 좌우는 각각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땅이었지만 그러한 인위적 구분이 무색하게 끝없이 부드러운 곡선의 산 능선들이 파도처럼 물결쳤다. 주변의 나무들을 보면 늘 거센 바람에 씻긴 자태를 하고 있었으나 이날은 바람마저 잔잔해서 맑고 고요한 길이었다. 먼 산자락 계곡 아래로 가을 저수지 물이 가을 하늘과 햇살을 담고 맑게 빛났다. 비로봉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눈앞에 초원이 전개되었으며, 다양한 야생화와 특이한 나무 열매들을 볼 수 있었다. 야생화는 흰색, 노란빛의 꽃이 주로 피는 봄, 여름과는 달리 황금빛 초원의 가을철이라 보랏빛이 흰 색 꽃들이 눈에 띄었다. 비로봉 근처에 다다르자 길 능선 왼쪽으로 고산에 서식하는 나무인 주목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비로봉(毘盧峰) 정상에 도착했다. 오후 약 3시경이었다. 비로봉으로 오르는 길 양 쪽은 황금빛 초원이 가을바람에 끊임없이 흔들렸다. 비로봉은 완만히 경사진 토산이었는데, 이렇게 높은 산이 흙산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특이했다. 그런데 정상에 오르니 편평한 곳에 호박돌들이 깔려 있었고 부분적으로는 바위들이 드러나 보였다. 산 정상에는 두 개의 정상표지석이 존재했다. 충청북도 정상표지석은 조그마했지만 영남 쪽 정상표지석은 규모가 훨씬 컸다. 예서체로 비로봉이라 쓴 정상석 뒤에는 소백산이란 시가 역시 예서체로 다음과 같이 세로로 쓰여 있었다. 小白山(소백산) 지은이 서거정 小白山連太白山(소백산연태백산) 태백산에서 이어진 소백산 逶迆百里揷雲間(위이백리삽운간)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사이 솟았네. 分明劃盡東南界 (분명획진동남계) 뚜렷이 동남방의 경계를 그어 地設天成鬼破慳(지설천성귀파간)하늘과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檀紀 四三二六年(西紀 一九九三年 十月 日) *逶 : 구불구불 갈 위, 迤 : 연이어질 이 , 慳 : 아낄 간, 인색하다. 감추어 두다. 서거정이 남긴『사가시집四佳詩集』「보유, 제3권, 여지승람(輿地勝覽) 편」에 실려 있다는 시였다. 원시집에는 제목이 ‘풍기 소백산’이지만 비로봉에 있는 정상석에는 소백산으로 쓰여 있었다. 주2) 지난 1998년 지리산 천왕봉에서 체험했던 공간의 광대함을 이 비로봉에서 다시 체험할 수 있었다. 드높은 푸른 하늘과 눈높이의 구름들이 드넓게 감싸고 있는 비로봉은 사방이 둥근 원으로 보이는 공간의 중심이었다. 『노자도덕경』에 나오는 천장지구(天長地久), 즉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간다는 구절이 저절로 떠오르는 광경이어서 존재의 근본적 근거가 땅과 하늘일 수밖에 없음과 생물학적 존재의 개체적 유한성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길을 본받는데, 길은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을 뿐이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라는 노자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이때의 하늘과 땅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으로 보면 하늘과 땅은 분리될 수 있는 실체적 대상이 아니다. 서거정이 ‘지설천성(地設天成)’이라 말한 것도 이런 차원에서 비로소 그 느낌이 와 닿고 이해된다. 비로봉에서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봉우리는 마의태자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는 국망봉이다.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신라의 국권을 되찾으려 백방으로 애를 쓰다가 실패하자 엄동설한에 베옷 한 벌만 걸치고 저 봉우리에 올라 망국의 한을 달래며 옛 도읍인 경주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린 곳이라 해서 국망봉이라 불렀다는 설화가 전하는 곳이다. 국망봉 왼쪽으로 신선봉 능선이 뻗어 있다. 일행보다 혼자 먼저 도착했기 때문에 다른 일행들이 다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 기념사진을 찍은 후 하산하기 시작했다. 하산 길은 오르는 길보다 훨씬 시간이 단축되었다. 비로봉에서 연화봉까지 4.3Km를 평지에서 걷듯 약 1시간동안 걸었다. 그러나 가을이라 오후 5시 넘어서자 곧 해가 지기 시작했다. 연화봉에서 일행을 기다렸다가 하산하기 시작했는데 그 거리가 올라 올 때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깔딱재에서부터 점점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희방사 근처에 와서는 한 치 앞이 안보일 지경이었다. 불과 몇 십분 사이에 대낮에서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이 되는 것을 보며 자연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일행이 없이 혼자였다면 얼마나 무서울까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였다. 그래서 한 걸음 한 걸음 어둠 속을 빠져나와 마침내 소백산에서의 긴 하루의 여정을 마치고 소백산을 가슴에 품고 귀로에 올랐다. 3. 소백산에 대한 여러 기록과 사연이 전한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택리지』에서 ‘병란을 피하는 데는 태소백이 가장 좋다.’라 하였고, 『정감록』에서는 병난과 질병이 없는 십승지의 으뜸으로 소백산 금계를 꼽았고, 『격암유록』을 지은 격암 남사고는 소백산 아래를 지나다가 말에서 내려 절하며,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땅에 살았던 우리의 선조들은 흰, 밝음을 숭상했기에 신령스러운 명산에 그 음을 따서 ‘백(白)’자를 넣었다. 백두대간 중 이러한 백자가 들어가는 산으로 백두산, 함백산, 태백산, 소백산을 꼽을 수 있다. 여기서 백은 ‘희다’ 는 차원을 넘어 높다, 거룩하다는 뜻도 있다. 그 외 명산 준봉들도 각각 이름이 있는데, 불교사상에 연원을 둔 봉우리 이름도 많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불교의 비로사나불에 근거한 비로봉(毘盧峰)으로, 대개 그 산의 최고봉을 비로봉이라 하며, 금강산 비로봉(1,638m)이 대표적이다. 이 외 오대산 비로봉(1,563m), 소백산 비로봉(1,439.5m), 대구 팔공산 비로봉(1,193m) 등을 꼽을 수 있다. (*치악산 비로봉(飛蘆峰1,288m)은 한자가 다르다.) 우리의 선인들은 많은 ‘유산기(遊山記)’’를 남겼다. 유산기란 유산의 기록, 즉 산을 노닌 체험을 쓴 기행문이다. 이러한 기행문은 고려시대 1243년에 쓰여진 진정국사(眞靜國師)의 <유사불산기(遊四佛山記)>를 그 원형으로 꼽는데, 고려는 불교를 중시했기 때문에 글쓴이는 제목도 불교적 색채가 짙다. 그러나 조선조 16세기 이후의 유산기는 주로 신유교, 즉 성리학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쓰여 졌다. 이들 유가(儒家)의 관자(觀者)들이 산을 향유한 방식은 겸재 정선의 화폭과 같은 전통산수화에도 잘 드러나듯, 관산(觀山)·요산(樂山)·유산(遊山) 등이다. 조선 중·후기 사대부들이 유산기를 쓴 것은 산수를 우주로 인식하는 자연관과 퇴계와 율곡이 성취한 조선성리학적 이념이 제시하는 이상적 삶을 구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산을 오른 생생한 감흥이 담긴 유산기는 당대 선인들의 자연관을 알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유산기는 대개 산행의 준비과정부터 시작되어 유산의 과정을 기술하고 글 말미에는 유산에 대한 소감을 술회하는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유산기에는 산을 오르는 과정과 동행한 사람들과의 교류, 산수 경관에 대한 묘사, 해당 산이 간직한 명승·고적·설화, 산사에 머물며 산승들과 나눈 대화, 자연으로부터 촉발된 흥취에 관한 기술 등이 담겨 있다. 단지 능선이나 정상을 오르기 위한 등산이 아니라 ‘입산’하여 산 안에서 경험함으로써 촉발되는 감흥과 더불어 산의 특정 공간을 점유하는 문화유산들까지 종합적으로 접근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공존하고 상생하는 생태적 사상을 선인들의 유산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선인들에게 산은 유락(遊樂)과 시흥(詩興)의 풍류 공간이자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심(道心)을 기르는 공간이기도 했다. 선인들의 유산 정신은 오늘날의 자연관과 등산 문화를 돌아보게 한다. 선인들은 산을 개발과 건강을 위한 매개물로 삼지 않았으며 자본주의적 발상에서 인간 위주로 개발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자연을 대상화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소백산 유산기는 퇴계 이황이 49세 되던 해에 풍기군수로 재임하던 1549년(명종 4) 4월 22일부터 26일까지 소백산을 등산한 「유소백산록」주3)이다. 그전에도 몇몇 기록이 있었다 하나 전해지지 않으며, 풍기 군수로 재임하던 주세붕의 유소백산록이 퇴계가 산행 할 당시에 석륜사에 현판으로 제작되어 걸려 있었다 하나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퇴계는 영남의 유림들이 소백산 유산록을 많이 남기지 않음을 아쉬워하였으나, 흔적을 따라 후인들이 소백산을 유람하며 남긴 유산록과 차운하여 지은 시가 많이 전한다. 퇴계의 「유소백산록」일부를 옮기면 다름과 같다. 산 위는 매우 높고 기후는 차서 세찬 바람이 휘몰아쳐 그칠 사이가 없으므로, 살아 있는 나무는 모두 동쪽으로 누워서 가지와 줄기가 거의 다 구부러지고 무지러지고 오무라졌으며, 4월 그믐께라야 잎이 피기 시작한다는데 1년 동안 크는 것이 푼, 치 정도에 불과하여, 앙상하게 (비바람에) 시달려 모두 애써 싸운 표정을 하고 있어서, 깊은 숲 큰 구렁에 난 것과는 매우 달랐는데, “거처하는 데에 따라 기운이 변하고, 기르는 것에 따라 체질이 변한다(居移氣 養移體)”는 말이, 사물이나 사람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석름(石凜), 자개(紫蓋), 국망(國望) 세 봉우리의 거리가 서로 8, 9리쯤 되는 사이에 우거져 한참 난만하게 피어 너울거려서, 마치 비단 포장 속을 거니는 것 같기도 하고, 축융(祝融)의 잔치에 취한 것 같기도 하여 매우 즐거웠다 소백산 지역은 인문지리, 자연생태, 산업·문화적 측면에서 다양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은 물론 미래 문화유산으로서 가치는 무한하다. 이 같은 가치를 재창조하기 위해 소백산 일대에서 국비로 추진되는 여러 가지 사업으로는 국립 백두대간 테라피 단지 조성사업, 산림치유단지, 국립 산림약용자원연구소 설립, 소백산 산양삼 테마 랜드 조성 등이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지자체끼리 소백산에 대한 주도권 싸움으로 비화되기도 하는데, 이 같은 지자체간의 과열된 갈등은 자칫 소백산을 훼손하는 난개발로 이어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최근 제기되는 4대강 개발의 논란은 자연에 대한 종합적이고 신중한 접근의 필요성을 절감케 한다. 이런 관점에서도 주로 경제적 측면에서만 소백산을 개발한다면 그 가치를 훼손할 수밖에 없다, 등산로를 만듦으로써 등산로 주위 자연의 황폐함을 방지할 수 있듯이 무조건 자연 그 자체로 존재하게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다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자연을 파괴하는 무분별한 난개발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4. 평지와 달리 같이 걸어도 산에서는 결국 혼자 걷는 시간이 많다. 게다가 신체적 심리적 차이는 물론 외적 자연도 경험하는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공간이 된다. 둥근 지구의(地球儀)를 놓고 보면 바다 위 조그만 돌출부에 지나지 않은 한반도이지만 산행을 다녀보면 우리 땅은 생각보다는 훨씬 크고 깊은 곳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러한 산에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나 인간세(人間世)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도 소백산은 소백, 연화, 비로에서 알 수 있듯, 산 이름부터 부드럽고 여성적이다. 아마 바위 위주의 골산(骨山)이 아닌 토산(土山)이기 때문일 것이다.(*능선 길 따라 드러난 바위들도 볼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산행은 그 과정이 힘들수록 즐거움과 환희는 배가되는 측면도 있지만 소백산은 전체적으로 토산이어서 기진맥진할 정도로 힘든 코스가 없다. 그만큼 여성적인 풍모를 지닌 부드러운 능선을 가진 산이다. 이러한 산의 특성상 소백산은 치유와 정화력을 갖춘 공간으로서도 그 가치와 중요성이 커질 것이다. 소백산 지역은 능선으로만 한정되는 공간이 아니라 하늘과 이어진 유장하고 거대한 공간이다. 천지(天地)와 산수(山水), 즉 산과 물을 중심으로 한 자연에 대한 동양적 세계관은 오늘날에도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천지와 산수를 중심으로 한 세계는 불가(佛家)의 적멸(寂滅)이나 도가(道家)의 허령(虛靈)으로는 정의할 수 없다. 이러한 세계는 색(色, 형체 있음, 땅)과 공(空, 형체 없음, 하늘)이 천변만화(千變萬化)로 공존하고, 살아 있는 생명체와도 분리되지 않는다. ‘유산’의 참 뜻을 알았던 이 땅의 옛 선조들은 그들의 기록에서 매우 다채롭고 풍부한 감성을 드러내는데, 불확정성으로 가득찬 모호한 세상으로 보는 현대물리학적 세계관이나 자유로운 현대예술가들의 감성과 대조해보아도 모순되지 않는다. 특정한 산에 대한 산행은 일회적이지만 내 몸이 느끼는 산행의 가치와 진정한 의미는 산행 이후에 생겨난다. 퇴계의「유소백산록」이나, 명산을 탐승하면서 진경산수를 그린 겸재 정선과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린 세잔 등의 그림에 특히 잘 드러나듯, 자연과 인간이 깊고 넓게 교감하는 과정에서 자연의 무한한 다양성을 체험하게 되고 그만큼 의미가 커진다. 이런 차원에서 체험의 공간은 제한적이고 그 시간도 일시적이지만 그 체험의 감응과 진폭으로부터 비롯되는 의미와 가치는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주4) 2013. 10. 24. 도 병 훈 주1)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야생 국화인 구절초이다. 나는 이번 산행 전까지 구절초와 쑥부쟁이, 그리고 개미취 이 세 가지 꽃을 구분하지 못했다. 워낙 비슷하게 생긴 야생 국화들이라서 이들을 흔히 들국화라 통칭하지만 정식 학명이 아니다. 구절초는 흰색인데 쑥부쟁이는 연한 보라색이다. 그리고 만개한 상태를 보아 꽃잎수가 많고 측면에서 봤을 때 꽃잎이 완전히 젖혀지도록 핀 것이 쑥부쟁이다. 개미취는 쑥부쟁이에 비해서 꽃잎수가 적고 만개한 꽃을 측면에서 보아 뒤쪽으로 젖혀지지 않고 앞쪽으로 몰린 듯이 보이는 꽃이다. 이외에도 소백산의 야생화는 철 따라 매우 다양해서 산국이나 감국도 이번 산행 후 소백산 야생화를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 주2) 이 시의 한글 해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 시구가 납득되지 않아 하산한 후 자료들을 찾아보았더니, 위의 해석 외에도 ‘천지자연의 비밀을 귀신도 깨뜨렸구나, 하늘 땅 이룬 조화 귀신인들 어쩌리’ 하늘과 땅이 이룬 조화 귀신도 울었소, ‘하늘땅에 귀신도 인색하지 않았구나’ 귀신인들 경계가 너무나 명백하여 감히 속이려 덤빌 수가 없구나. 등 해석이 다양했다. 이는 ‘귀파간’에 대한 해석의 차이 때문인데, 그 어느 구절도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향후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겠지만 바로 위 세 번 째 시구의 핵심이 경계가 분명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무엇보다 이 시 전체 핵심어가 ‘지설천성’이므로 ‘하늘과 땅이 함께 만들었으니 귀신도 범접할 수 없네.’ 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래서 이 시를 다음과 같이 다시 해석해 보았다. 소백산과 태백산은 연달아 이어져 백리에 걸쳐 구불구불 구름사이로 솟아 있네. 뚜렷하게 가른 동쪽과 남쪽의 경계는 하늘과 땅이 함께 만들었으니 귀신도 범접할 수 없네. 이 시에 나오는 ‘땅과 하늘’이란 동양적 세계관이나 현대 과학적 시공관에 의하면 빅뱅 이래의 거창한 시공계라기보다는 우리 이 지구라는 태양계의 혹성을 둘러싼 바이오스페어(Biosphere)를 가리킨다.(*김용옥 지음, 노자와 21세기(하) 통나무, 1999, p16 참조) 주3) 이 글은『퇴계집』에 전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퇴계는 4월 22일 소수서원에서 묵고 민서경(閔筮卿)과 그의 아들 민응기(閔應祺) 등과 함께 죽계를 거슬러 초암(草庵)으로 올랐고, 묘봉암(妙峯庵)에서 온 종수(宗粹) 스님의 안내를 받아 철암(哲庵)ㆍ명경암(明鏡庵)을 지나 석륜사(石崙寺)에서 이틀 밤을 잤다. 이어 봉두암(鳳頭巖)ㆍ광풍대(光風臺))ㆍ백운암(白雲庵)ㆍ석름봉(石凜峯)ㆍ자개봉(紫蓋峯)ㆍ국망봉(國望峯)ㆍ중백운암ㆍ상백운암ㆍ제월대ㆍ환희봉(歡喜峯)ㆍ산대암(山臺巖)ㆍ자하대(紫霞臺)ㆍ적성(赤城)ㆍ백학봉(白鶴峯)ㆍ백련봉(白蓮峯)ㆍ금강대ㆍ화엄대ㆍ금당(金堂)ㆍ하가타암(下伽陀庵)ㆍ보제암(普濟庵)ㆍ진공암(眞空庵)ㆍ하가타암을 유람하고 관음굴에서 잤다. 산행 5일 째인 26일 박달현(博達峴)과 비로사(毗盧寺)를 경유하여 욱금동(郁錦洞)으로 내려왔다. 이 같은 퇴계의 「유소백산록」을 통해 조선시대인 당시에도 소백산에 수많은 암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4) 소백산을 다녀와서 인문학적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그간 궁금했던 고향의 입향조 이름과 관련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입향조는 도운봉(都雲峯, ?~1416)공으로 여말 선초 절개를 지킨 충신으로 알려진 청송당 도응 공의 4자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청송당의 부친은 여말의 권문세족으로 황산대첩에서도 이성계와 함께 공을 세웠던 도길부공이다. 이 분이 여말에 최영과 이성계 일파와의 권력다툼 과정 중 발생한 무진화변(戊辰禍變)에서 이인임 일파로 몰려 염흥방 등과 함께 참살 당할 때, 청송당 도응 공은 장인인 우인열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게 된다. 조선 건국이후 태조 이성계는 청송당 도응 공에게 벼슬을 내리는 왕지를 여러 번 제수하였지만, 청송당은 끝내 거부하고 지금의 층남 홍성에 거주하다 생을 마감했다.(당시 내린 왕지 4점과 녹패 1점은 지난 1980년대에 보물 724호로 지정됨). 청송당의 후손들은 충청도나 경상도로 흩어져 정착해서 살게 되었는데, 청송당 공의 4자인 도운봉 공은 풍기 백운봉(白雲峯) 아래로 이주했다가 이름을 ‘운봉(雲峯)’으로 개명한 후 지금의 경북 군위군 효령면 성동의 입향조가 되었다는 기록이 문중의 문적 및 족보에 전한다. 그래서 그간 풍기와 영주 지역을 중심으로 백운봉이란 봉우리에 대해 현재의 지도는 물론 옛 지도인 대동여지도 등에서 찾아보았지만 풍기 지역에서는 이런 산봉우리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소백산을 다녀와서 이 지역에 대해 탐색하는 과정에서 소백산 자락에 위치한 예천군 상리면에 백운봉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곳이 현재의 위치상으로 풍기읍 바로 옆이어서 그 연혁을 찾아보았더니 백운봉이 위치한 이 지역이 원래는 풍기였는데 일제강점기인 1923년에 예천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된 사실이 적혀 있었다. 조선시대에 충북 단양과 영주(풍기)와 예천 사이를 가르는 소백산 줄기를 넘는 재로는 저수재(해발850m)와 죽령(해발698m) 이 있는데, 이 중 현재의 예천군 상리면으로 통하는 길은 저수재이고 죽령이 현재의 풍기나 영주로 가는 길이었다. 역동 우탁 선생(도응 공의 장인인 우인열의 선조임)을 비롯한 단양 우씨들이 단양 뿐 만 아니라 현재 예천군 상리면에 고려 말부터 세거했다는 사실을 통해, 입향조도 단양에서 저수재를 넘어 이곳 백운봉 아래로 이주했음을 실증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올해 초『도운봉공 서씨부인과 포죽도』란 책을 간행할 때, 청송당의 장인인 우인열이 고려말의 명문세족인 단양 우씨여서 도운봉공이 단양을 거쳐 영주 풍기로 이동했을 것으로 짐작된다는 추정을 한 바 있는데, 이번에 ‘풍기 백운봉’이란 지명을 지역사적 연원을 통해 그 이주 경로를 분명하게 확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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