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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no image 늦게 온 소포
2862 2007-06-05
늦게 온 소포 고두현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런 글씨를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헤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매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몇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을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이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혜쳐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시집 ‘늦게 온 소포’중에서 어허 참, 그 집 어머니가 혹시 우리 어머니가 아니던가? 어찌면 그리도 세상의 어머니는 한결같을까. 주름진 손마디로 자식 먹이고 싶은 것들 주섬주섬 ‘싸고 또 싸서 속엣거보다 포장 더 무겁게’ 만드는 솜씨나, 늘 듣는 익숙한 어휘 몇 개로 금세 화롯불처럼 마음 달구는 솜씨나 영락없는 그 어머니가 내 어머닐세. ‘늬들 고생하며 큰 생각하믄 너희 머리카락 하나 빠지는 것도 아깝다’던 우리 어머니, 이제 ‘늦은 소포’ 하나 붙일 수 없는 머언 곳으로 가셨지만 글쎄 자식들 놔두고 아예 가셨을라고, 나는 아직도 내 몸을 스치는 바람이 어머니의 숨결인 줄을 알고 있다네. 우리가 누리는 세상만물 모두 우리 어머니들이 낳은 크나큰 유산인 걸 알고 있다네. 반철환 시인 <펴온이의 변: 늦은 저녁 한강을 낀 제방을 거닐면 지는 해의 마지막 붉은 광휘가 서쪽 하늘을 물들이고 하늘엔 물오리, 떼를 지어 어딜 날라가는지 그 비상의 실루엣은 자연의 힘차고 아름다운 고동을 전하면서 도심지의 유일한 위안으로 다가 온다. 그기에 꼬리를 물고 철저히 궁핍하던 삶을 감당하면서 나를 키우던 어머니의 절대적인 사랑과 신뢰의 품속에서 멋모르고 행복해 하던 한 광경이 주마등 같이 지나간다. 현실의 그 절대적인 궁핍은 모자간의 사랑을 더욱 순수하게 그리고 강하게 맺고 있다. 그것은 흘려 가버리고 잃어버린 것이 였을까? 새끼들 조금이라도 잘 먹일라꼬 시골 친척 집을 찾아서 얻언 쌀을 행여나 빼앗길 가봐 방탕조끼 같이 엮어서 가슴에 안고 기차역을 행하던 어머니가 품고 있던 쌀을 적발하여 온갖 욕설을 퍼붓고 빼앗던 일제 순사의 주재소의 횅포를 아련히 떠 올린다. 내 나이 일곱살 때의 일. 낙동강 제방을 걸어 나오고 삼량진역에 와서 당했던 일이다. 우리는 이제와서야 그때의 어머니의 아픔의 헤하릴 것 없는 사랑의 의미를 깨닭는다. 아버지는 백내장으로 앞을 보지 못하고 집에서 혼자 우리들이 돌아 올때를 기다리고. 이제와서야 아버지의 그 애듯한 아픔을 헤아린다. 한강의 그 유유한 흐름은 나 자신의 애한의 이야기뿐만 아니고 우리민족의 애완을 일께워준다. 그 아버지가 초장동 화장막에서 재로 나오는 것을 보고 어머니를 같은 화장막에서 화장을 한뒤 나는 6.25 동란에 참전하였다. 부산중학 5학년때의 일. 나는 이 전쟁속에 휘말리면서 민족의 비극을 체험하였다. 부모들의 애듯한 사랑과 수난의 아픔 못지 않는 엄청난 민족의 수난을 합한 역사의 체험을 유산으로 물려 받았섰다. 수난과 고통이야 말로 자식들이 안을 수 있는 가장 값진 유산이란걸 께우친다. 이것은 한 인간이 한 인간으로써 삶을 유지해 가는 동력의 원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동아일보의 ‘이 아침에 만나는 시’ 반철환 시인의 해설을 읽을 때 마다 반철환 시인이 왜 이런 시들을 편집하고 있는가를 새삼 헤알일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과거가 현재이고 현재이면서 미래가 된다는 ‘각성’의 장으로 다가 오기 때문으로 안다. 오래된 미래의 변증법을 두고 우리를 울리고 있는 기획물이다. 나는 아주 우연하게도 발견한 이 시리즈의 ‘시들’을 계속해서 칼럼에 실고 있다. 우리자신이 우연한 던져진 존재가 아닐수 밖에 없다는 인식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해서. 나는 이 시리즈의 시들이 나를 충격적으로 유발해 주는 나의 삶의 새로운 각성을 받아드리고 있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를 초절의 세계로 이끌어 가게 하는 원점이다. 조규현.>
29 no image 꽃씨
2822 2007-06-05
28 no image 김인자의 문학산책
2766 2007-06-05
27 no image 문명론 (1)
2752 2007-06-05
문명론 (1) - 환상적 예술과 문명론. A Fantastic view of Art and Civilization - 여는 말 본인에게 배당된 기획자의 엉뚱하고 예리한 그러나 께 무리가 수반될수 있는 “문명론”이란 과제는 우선 그 과제가 “히말라야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잡아야한다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고 보고 일단 수용하기로 했다. 찬찬히 생각해 보면, 그동안 김성배와 만나기만 하면 떠 벌리던 현대예술에 관한 담론에서 필자도 어지간히 [문명]이란 낱말을 주책없이 많이 쓴 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고 이 또한 우연한 일로만 치부할 수 도 없는, 요설이 하나의 업이 되어 부-메랑과 같이 듸돌아 온 것 같이 느껴진다. 김성배역시 그가 가슴에 품고 있던 예술과 이 세계에 대한 정념이 알게 모르게 대화속에서 나의 ‘문명’론적 수사를 유발할 정도로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였을 것이다. 필자는 역사학을 공부한 일도 없고 문명사를 삺혀본 일도 더욱이 완전한 미술의 국외자이지만 현대의 우리의 지적 사회적 현실과 세계사적 흐름속에는 문명이란 계념은 추상이 아니라 박진감 넘치는 실시간으로 다가오는 사건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고 있어며 이젠 이 말이 가지고 있는 객관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우리는 ‘문명’이란 우산을 함께 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스람의 알 카에다에 의한 미국에 대한 동시다발 공격을 영상을 통해서 보면서 이 ‘문명=시각적 icon’ 이란 도식을 떠올린 일이 있다. 그것은 문명간의 충돌의 서곡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각적으로는 미국문명의 앞날을 예언하고 있는 그림으로도 보였다. 이 사건은 종교와 종교, 문화와 문화간의 더 나아가서는 문명과 문명간의 충돌 자체로 보이기도 했고, 각기 다른 역사의 앞과 뒤를 보여주고 있었는데, 이를 또한 현대의 디지털문명이 실시간의 영상을 확산시키고 있다는 의미에서 ‘문명’을 본다란 환각을 불려 일어키고 있는 경험을 했다. 슈-뤂이 추구해 왔던 이념적 기치가 지역 문화 국가의 정체성과 중심축을 아우리면서 현대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을 던지고 있을때, 그 연장의 단층선상에 놓여 있는 [문명]이란 계념을 피해 갈수는 없었을 것으로 봤다. 미술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백두대간.히말라야 프로제트의 또 다른 상황적 조건은 현대예술의 혼미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현대예술이 그 전통의 틀을 해체당해가는 과정에서 이제 예술은 생산자로서 또는 발신자로서의 위치에서 벗으나 도착된 입장에 놓여 있어며, 자기존재의 아라바이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처음에는 켄바스가 다음에는 재현성이 부정되고 다음에는 전통적인 예술의 콘텐쯔가 증발해 버리고 서구중심의 예술사조도 자기모순에서 허우적거리고, 제3세계의 예술의 발흥이 거세짐과 더불어, 말기적현상과 혼미를 맞이하고 있는 양상이다. 이는 서구문명이 여타 문명권을 압도하면서 역사의 종국을 맞이한다고 보는 시각이며 인간문명권이나 지구문명권으로 통합되면서 일어나는 전체적인 인류문명의 흐름의 과도와 격동의 증표로 볼수 있고, 또 한편에서 냉전시대의 종국으로 세계가 더욱 원심적으로 분열해 가면서 그동안 잠복해 있던 지역별 집단, 민족, 종교적 이헤가 상충하면서 정체성을 다시 찾으려는 분극현상에서도 유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혹은 일반적으로 단극적 서구적 예술의 파래다임이 해체되면서 동시에 그 표현의 가능성을 전방위적으로 끝없는 원심력으로 브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일종의 빅뱅 혹은 아포리아(aporia)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직감적으로 찾아낸 미학의 가능성이 히말라야의 숭고함과 성스려움이고 역사의 실체로서의 백두대간발견은 김성배에게 대단한 매력으로 다가 왔을 것이다. 이제 히말라야의 ‘체험’자체만으로도 그러한 굴례를 벗으날 수 있을것으로 보고 있다. 정확한 방향이 잡힌 물음은 그 자체가 그안에 답을 내포하고 있는 법이다. 그가 그동안 보여준 히말라야를 모티브로 연출한 예술활동의 푸닥거리에서도 이미 그 징조가 나타 나 있었다.이건, 안도니.가우디가 그의 새로운 조형세계를, 자연과 그 속에 내재하고 있는 ‘시원으로 돌아가’려는 카달루니아정신(인습적인 지역성)과 원시기독교적인 질박한 신앙심을 가지고 찾아 나선 것을 떠올리게 한다. 산은 인간에게 항상 신성시되어 왔던 존재였고 예술적 영감을 안겨주던 성소가 아니 였던가. 이제 남은 일은 묵묵한 산이 김성배가 던지는 크다란 물음에 어떻게 답을 해 올것인가? 그는 그런 답이라도 받아 낼것인가? 이 켐패인에 참가하고 있는 여러분들 역시 이 거대담론의 발신자이며 동시에 수신자가 되기도 할것이다. 미술가로 출발을 하다가 최근에는 자신을 ‘예술가’로 변모시키면서 도병훈씨의 표현데로 “거대담론”을 개진하기 시작한 김성배는 이제 자신의 생애를 걸수 있는 하나의 도표를 백두대간.히말라야에서 찾기 시작했다고 본다. 그는 조선반도 백두대간을 축으로 한 포물선을 끗기 시작하여 인도아대륙을 품에 안고 있는 히말라야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백두대간과 이어지는 히말라야의 맥을 짚고 예술적 감성으로 인간정신의 갱신을 추구하려는 ‘정신 축의 발견’이란 환상을 보기시작한것이다. 마치 한국전래의 오행사상의 현대판을 보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그가 예술가이면서 한 시대의 문명사적 새로운 파래다임을 추구할 수 있는 오브제를 찾아 낸 것은 어떤 내재적 필연에서 비롯 되였을것이다. 세잔이 생트.뷕드왈산에 집착하고, 가우디가 몬세라도산을 그의 예술혼의 조형적 정신적 영감의 원천으로 본것이나 김성배가 백두대간.히말라야에 집착하는 것의 맥락은 같다고 본다. 그에게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역사 문화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 연장선상에 잡히는 히말라야는 인류보편으로 향하는 icon 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역사를 보면 문명이 보이고, 문명을 뒤집어 보면 문화가 보인다고 할수 있다. 인류문명은 같은 ‘인류’란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서로 다른 종의 ‘모양’의 가지를 말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드래도 히말라야와 한반도는 그리 인연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이 산군의 자락에서 인류사의 새로운 획을 끄었던 4대종교중 2개가 탄생했고 그 중 불교는 중국을 거처 조선반도에 들어 와 신라의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했다. 신라는 외래종교인 불교를 받아드리고 원효대사와 같은 결출한 승려가 이를 아주 독창적으로 해석 수용케한데 큰 공헌을 했고 특히 그의 민중불교의 발현은 신라로 하여금 국가적 힘의 결집을 가능케하여 결국에 가서 삼국을 통일케하는 역량을 길려주게 된다. 아놀드.토인비의 문명의 도식으로 본다면, 신라는 불교와 삼국간의 세력다툼이란 ‘만남 encounter’이 초래한 도전(challenge)에 매우 성공적으로 응전(response) 한 셈이다. 우리는 신라통일이후의 한반도의 얼개를 하나의 매우 수준 높은 ‘단독 문명’으로 평가 하지 않을수 없다. 이 사실이 가려지고 있는 건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현혹된 서구역사학계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한반도의 고유한 ‘문명’은 중국과 일본의 그것을 능가하는 높은 수준의 문화를 동반하고 있었으며 아직도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국가의 지리적 덩치가 문제가 되기 보담 그 단위의 문화적 특성과 높음이 중요하다는 대목이다. 1929년 인도의 타고르(Rabindramath Tagore 1861-1941. 1909년 시집 ‘기탄자기’로 노벨문학상 수상)은 이 신라문명을 파래드하여 한편의 시를 당시의 동아일보에 기고를 했었는데 이 시에서 타고르는 신라문명의 찬란했던 황금기를 일께워 주고 있어며 일제식민지하에 신음하고 있던 조선사람들에게 깊은 동정과 격려를 나타내고 있다. “일직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코리어, 그 등불 한 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처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렵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에 굳어진 습관의 모래 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 무한히 퍼저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 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당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어여 깨어나소서” 타고르의 조선민족에게 보낸 이 한편의 시는 멀리 인도에서 보내온 일종의 계시와 같은 것이었다. 백두대간.히말라야 프로젝트와 관련 지우면서 문명을 생각하는 필자에게 자연스렵게 떠올라 온 영감이다. 어찌 이것 뿐이라…….. 우리가 보다 수준 높은 정신성을 갖도록 해준 불교도 그 줄기가 인도의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새로 독창적으로 열언 대승 선불교의 영향이 아니 였던가. 김성배가 개진하고 있는 이런 ‘거대담론’은 곧 바로 그 자체가 문명론적인 인식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문명이란 역사와 사회문화 일반의 총체적인 집합체계를 표현하는 유일한 말이고 그의 거대담론역시 이 수위에 까지 올수 밖에 없는 스케일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초기의 전시회도록에 실린 글들을 훑어 보면 이점이 쉽게 이해가 간다. 그는 자신의 미술가로서의 예리한 감성으로 켄버스의 그림 그리기보담 세계문명의 그림을 보려고 했어며 이마쥬의 축지법으로 여기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도전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는 1996년 슈-뤂기획전에 기고한 글에서 [중심축] – 세계속의 한국적 힘의 원천 탐구 –란 돈키.호대식? 거창한 제를 부친 글을 발표하고 있다. “다음의 글은, 한국적인 힘의 원천에 관한 현재와 미래의 가능성이다.” 과연 ‘한국적인 힘’의 원천과 범주는 우리가 조상 대대로 살아가고 있는 한반도의 환경과 생활체험에 국한되어 있는 그 무엇인가? 또는 한반도가 속해있는 세계, 즉 넓고 둥근 지구 전체로부터 비롯되는 것인가? 세계를 이루고 있는 부분과 전체와의 보편적이고 긴밀한 불가분의 상호관계는, 항상 인류생존과 문명의 중추역활을 하고 있다……………” 여기서 김성배는 인도 네팔 히말라야 이집트등지를 여행하면서 체험한 ‘문명의 환상 Fantasy of Civilization’ 을 토로 한다. 슈-뤂이란 말도 ‘높은 곳에서 세계를 조망한다’ 란 뜻으로 풀이 되고 있으며, 시각적인 동시에 귀납적이며 매우 정치적인 뉴앙스를 띄우고 있는 관점이다. 한국현대미술의 조망이 문명의식의 수준에 까지 확장되면서 그 지평을 열어가려고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적인 흐름의 특질은 논리적으로 봐서 무리가 가는 인상을 지울수 없지만 그는 이를 개의치 않으며 직관과 vision을 앞새우고 감각적으로 처리 하려고 한다. 마치 그의 히말라야 퍼포먼스가 그러듯이 더 이상의 사변을 허용하지 않고 직관을 바탕하고 즉물적으로 행위한다. 그는 단편적인 진실을 받아드리지 않는다. 그의 사유는 선가의 선승과 같이 이 우주의 상을 그 기의 그물망으로 파악한다. 그의 지각은 이제 신체적이 되어가고 있다고 본다. 대상을 사변적으로 객관화 해서 인식하는 발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성위주의 인식에는 세련되게 위장된 허위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파래다임으로 백두대간을 거닐고 히말라야를 보기를 원하며, 반대로, 백두대간과 히말라야를 거닐면서 이를 얻어 냈다고 생각할수 잇다. 이런 스타일의 접근법이 이번에 기획한 ‘백두대간.히말라야 프로젝트’의 중심에 자라 잡고 있다. 백두대간.히말라야 프로젝트란 관점에서 ‘문명’을 보고, 다른 한편, ‘문명’이란 관점에서 이 프로젝트의 자리를 가늠하는 일이 필요한 소위이다. 문명의 본질 [문명의 충돌 The Clash of Civilizations]의 저자인 새뮤엘 헌팅턴 Samuel P. Huntington은 문명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인류사는 문명사다. 인류의 발전을 문명 아닌 다른 용어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인류의 발전사는 고대 수메르와 이집트에서 그리스,메소아메리카(중미의 고대 문명을 총칭)를 거쳐 서구와 이슬람 문명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대를 통하여 전개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과 인도 문명 또한 지속적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역사 속에서 문명은 사람들에게 가장 폭넓은 자기 동일성의 틀을 제공하였다. 그래서 뛰어난 역사학자,사회학자,인류학자가 문명의 원인, 등장, 부상, 교섭, 성숙, 쇠락, 몰락을 심도 있게 연구하여 왔다.” 학자에 따라 문명을 보는 관점, 방법론, 초점, 개념에서 많은 차이를 드러내지만, 문명의 본질, 주체, 변동, 양태에 관한 중심적인 명제에 대해서는 폭넓은 함의가 이루어저 있다고 보고, 아래와 같이 그 합의점을 축출한다. 1) 단일문명(singular) 과 복수문명(plural) 문명이란 계념(혹은 어휘)은 18세기 프랑스 사상가들이 ‘야만’의 개념과 반대되는 뜻으로 쓰기 시작했어며, 이는 문명을 자기와 타자란, 우월을 가리는 기준으로 본 점에서 문명을 singular로 보는 관점이며, 이 관점과 결별하고, 문명은 여러 개이며, 각각 의 문명은 독자적 방식으로 문명화 되었다 라고 보는 역사학적 관점이 복수문명관이다. 단일 문명관은 보편적 세계문명이 존재한다는 시비의 시각에서 여전히 그 의미가 상실되지 않고 있다. 2) 문명은 문화적 실체이다. 문화와 문명을 구분하느냐 않느냐 에 따라 해석의 뉴앙스는 다르지만, 문명과 문 화의 헥심적인 요소들은 아테네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역사적으로 그 실체를 들어낸 일이 있다. 페르시아에 발붙어 스파르타를 배신하는 일은 없을 거 라고 약속한 아테네인들이 고전적인 형태로 표현한 다음과 같은 말에 상징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설사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더래도 우리의 결행을 굳세게 가로막는 다수의 고려 사항들이 존재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파괴되고 불태워진 신상과 신전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우리는 그런 짓을 저지른 자들과 타협해서는 안 되며 기필코 복수해야 한다. 다음으로 그리스인은 같은 피와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신전과 제례도 공통이다. 관습도 비슷하다. 아테네 사람이 이들을 배신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문명을 정의하는 객관적 요소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테네인이 강조했드시 종교라 할 수 있다. 인류 역사에서 주요 문명들은 세계 유 수의 종교들과 상당한 수준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민족적 뿌리를 갖는 사람들도 레바논, 옛 유고스라비아, 인도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드시 다른 신을 섬긴다는 이유로 서로를 죽일 수도 있다. 인간 집단을 가르는 핵심적인 구분선은 가치관,믿음,제도,사회 구조이지 몸집, 두상, 피부색이 아니다. 문명은 크게 씌어진 문화다. 슈팽글러는 문명을 “문화의 피치 못할 ‘운명’………발달한 인류의 종이 누릴수 있는 가장 외현적이고 인위적인 상태…….하나의 결론, 과정물 을 승계한 완성물이다”라고 파악했고, 학자에 따라 문화와 문명의 해석 에 차이가 있다. 3) 문명은 포괄적이다. 토인비가 강조하듯이 문명은 다른 문명들에 포섭당하지 않는 포괄성을 갖는다. 문명을 이루는 구성단위들은 자기들 끼리의 상호 관계나 전체와의 관련성으로 정의될 수 있다. 어떤 문명이 국가들로 이루어저 있다면, 그 국가들은 문명권 바깤에 있는 국가들보다 자기들끼리 더 많은 관련을 맺을 것이다. 경제 부문의 상호 의존도도 두드러질 것이다. 미학적, 철학적 조류에 대한 공감대도 훨씬 폭넓게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 문명은 가장 광범위한 문화적 실체다. 마을, 지역, 민족 집단, 국민, 종교 집단은 모두 문화적 혼합성의 상이한 수준에서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마을의 문화는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마을의 문화와 다르겠지만, 양자는 독일의 마을과는 구별되는 이탈리아 문화의 특성을 공유할 것이다. 유럽공동체는 다시 중국, 인도와는 구별되는 문화적 특성을 공유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 인도, 유럽은 더 포괄적인 문화적 실체의 일부분이 아니다. 이들은 독자적인 문명을 이룬다. 문명은 따라서 가장 상위 수준에 있는 사람들의 문화적 결집체이며 가장 광범위한 수준의 문화적 동질성이다. 문명은 언어, 역사, 종교, 관습, 제도 같은 공통된 객관적 요소와 사람들의 주관적 귀속감 모두에 의해 정의된다. 한 개인이 속해 있는 문명은 그가 강렬한 귀속감을 느끼는 가장 광범위한 수준의 공동체다. 문명은 우리가 저 밖에 있는 ‘그들’과는 구별되게 그 안에 있으면 문화적으로 친숙감을 느끼는 가장 큰 ‘우리’다. 문명은 중국 문명처럼 방대한 인구를 거느릴 수도 있으며 영어권 카리브 문명처럼 아주 적은 수의 인구를 가질 수도 있다. 과거의 역사를 보면 작은 인구 집단들이 광범위한 문화에 소속되지 않고 독특한 문화를 견지해 온 예가 수없이 많다. 일반적으로 크기와 비중을 기준으로 문명을 중심문명과 주변 문명으로, 혹은 중심 문명과 발전이 중지되었거나 아직 미숙한 상태에 있는 문명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4) 문명은 유한하지만 오래간다. 문명은 진화하고 적응하며, 인간의 결속체 중에서도 유독 질긴 생명력을 갖는다. 문명의 독특하고 특별한 본질은 바로 그 장구한 역사적 지속성이며 사실상 가장 오래 된 이야기는 문명이다. 제국은 일어섰다 무너지고 정권도 왔다가 사라지지만 문명은 유지되며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이념적 격변의 와중에도 살아 남는다. 보즈먼은 “정치체계는 문명의 표면에 떠 있는 일시적 부표이다. 언어적, 윤리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개별 공동체의 운명은 연속된 세대들이 중심으로 삼고 뭉쳐 있는 그래서 사회의 연속성를 상징하게 된 특정한 근원적 구성 원리의 존속에 궁극적으로 달려 있다는 명제가 타당하다는 것을 국제사는 여실히 입증한다.”고 말하고 있다. 토인비는,’ 문명이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부터 일어나며, 창조적 소수의 주도로 환경에 대한 지배력 강화의 과정을 거쳐 시련의 시기를 맞이한 뒤 보편 국가가 성립하였다가 해체의 과정으로 들어선다고’ 주장했다. 5) 문명은 정치적 실체가 아니고 문화적 실체이다. 문명은 정치적 실체가 아니라 문화적 실체이므로 치안을 유지하거나 정의를 세우거나 세금을 거두거나 저쟁을 수행하거나 협상을 벌이거나 그 밖의 정부가 하는 일을 처리하지는 않는다. 문명을 구성하는 정치적 요소는 문명마다 다르고 한 문명 안에서도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문명은 하나 이상의 정치적 단위를 거느릴 수 있다. 루이안 파이(Lucian Pye)가 지적하듯 중국은 국가를 가장한 문명이다. 일본은 국가가 곧 문명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서구, 동방 정교, 라틴아메리카, 이슬람, 힌두, 심지어는 중국 문명도 둘 이상의 국가를 거느리고 있다. 서구는 역사적으로 다수의 일반국가들과 소수의 헤심국가(가령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전성기의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문명의 헥심국가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이슬람의 헥심국이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존재한바 있는 문명의 총수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다르다. 퀴글리는 16개의 뚜렷한 역사적 실례와 여덟 개의 부수적 실례를 제시한다. 토인비는 처음에 그 수를 스물하나로 잡았다가 나중에 스물셋으로 고쳤으며, 슈팽글러는 여덟 개의 주요 문명을 명시한다. 혹자는 일본과 동방정교를 중국과 서구로부터 따로 떼어 내느냐 아니냐에 따라서도 그 총수가 달라지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최소 12개의 주요 문명에 대해서는 무리 없는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그 중 일곱개(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크레타, 그리스-로마, 비잔틴, 중미, 안데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다섯 개(중국, 일본, 인도, 이슬람, 서구)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여기에 라틴아메리카, 나아가서 아프리카 문명을 추가하는 것도 유익할것이다. 전술하다 싶이 한국은 독립된 문명권으로 보지 않고 중국문명의 한 갈레로 보고 있다. 이는 국가와 문명을 달리 보는 데서 비롯되는 분류에 의한 것이다. –다음 편에 이어감 -
26 no image '서문' - 피엘 가반느
2922 2007-06-05
'서문' - 피엘 가반느 말셀 뒤샹과의 이하의 대담은, 뉴이이의 그의 아뜨리에서 이루어젔다. 그는 일생의 반을 부인과 더불어 이 불란서의 아뜨리에에서 보냈었다. 현대예술에 있어 가장 매혹적이며 상궤를 벗어난 발명가가 자신의 행위, 반응, 감정, 선택에 관해서 이만큼 폭넓게 그리고 깊게 이야기하고 설명해준 것은 이것이 처음이였다. 여태까지 그는 1946년 및 1956년의 J. J.스의니와 그리고 1961년의 BBC방송에서 리차드.하밀턴과 대담하고 있다. 뒤샹에 관한 연구서는 극히 적고 그건 대개가 그의 여러가지 작품- 자신은 그것을 [물건]이라고 빈정되지만-에 관해서 여러가지 해석을 하고 있다. 그기에 보인 상이함은 사람들이 그에게 미친 태도, 그가 회화를 그리고 모든 조형활동을 방기했을때의 그의 행동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래서 뒤샹 자신이 자신의 생애에 걸처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를 설명할 필요가 생기고 있었다. 그는 이 일을 늘상 해 왔던것과 같이 침착한 마음의 평정을 갖고 대해 주었으며 그것이 그의 말에 의론의 여지가 없는 위대함을 안겨주고 있다. 우리들은 그기에서 그가 단지 해석을 해 주었다는 사실말고 [수호된] 인물을 보게 되는 것이다. 창조자로서의 행위를 통해 말셀 뒤샹은 새로운 혁명적인 언어들을 밀어부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한 태도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레서 이하의 대화는 하나의 놀라운 도덕의 가르침이 되고 있다. 놀만디의 공증인의 자식이고 화가 쟉크 비용과 조각가 레이몬 뒤샹 뷔용을 형으로 가지고 있는 이 뿌리째 불란스인은 사실 현대의 가장 놀라운 정신의 소유자이기는 하지만 예술에 있어서는 이 반세기동안 조각가로서만 알려지고 모랄리스트(도덕가)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이란 하나의 거대한 대륙 전체를 살아있는 회화에로 눈을 뜨게 함으로서 자기자신은 자유에의 눈을 뜨게 된것이다. 년보에 적혀있는 그의 행위는 가족 환경 시대 현실 동시대의 예술 전통적인 규범과 방법에서 한 사나이가 해방되어 가는 것을 순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것이다. 돌발적으로 뒤샹은 이렇게 대답한다. [장군들이 말 위에서 죽지않게 된 이후에는, 그림 그리기도 이젤 앞에서 죽지 않아도 괜찮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가 회화의 외적수단에서부터 자유로워지고, 단지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것에서 부터만이 아니고-그는 이미 여기에서부터는 해방되어 있었다-, 더욱이 그 내용에서 부터서도 떨어저 회화의 의미를 직시하게 되는 것은, 1913년, 뉴욕의 아모리.쇼에서 어는정도 성공을 걷운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이후의 일이었다. 그는, 절대적인 객관성안에서 그 고유의 조형적 아이덴티티를 가지게 되는, 창조된 오브제의 현실에로 접근하려고 시도하고, 그리고 예를 들면, 처녀에서 신부에의 이행을 나타내려고 했을때도 기하학이나 수학에 의해서 공간에 관념이나 형태를 [그려내는] 것에 안주하는 운동이나 상징은 물려첬다. 그것은 마치 이 조작을 수행하는 하나의 기계를 그가 조립한 것과 같엤다. [환원]의 힘에 의하여 창조가 이미 미적인 산물로 간주할수 없고, 완전히 해방된 [물] 로 보여질 정도의 지점까지 오게 해서, 뒤샹은 겨이 완전할 정도로 무활동 상태속에 묻혀버렸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그로부터 듣게 되드래도 사람들은 놀라지도 않거니와 쇼크도 받는 일이 없을것이다. 그는 그런일이 가능한 극히 드문 인물의 한 사람이 였다. [그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은 그의 시간을 쓰는 법이다] 라고 앙리.피엘.료세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뒤샹은 이렇게 생각한다. [아마도…….그렇치만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뒤에 무엇이 남아 있을까?] 그의 전 존재는 현명하게도 [아마도]라던가 [그런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는 말로 언제나 해결을 보고 마는, [왜]나 [어떻게]에 의해서 이끌리어 왔다. [나는 정말 놀라운 일생을 보냈다]. 말셀 뒤샹은 이 일생을 제한하려고 하는 것, 파묻어버릴려고 하는 것, 무겁게 억눌려 오는 것, 중요성을 가지는 것들에 대한 조용하고 유연한 그러나 자유로운 도전으로 일관했다. 뒤샹은 이후, 단지 오브제의 내용이나 의미뿐만 아니라 창작자 자신에 의한 스스로의 행동에 관한 절대적인 필요불가결한 성찰이 시작되고 있다. 오늘날 소위 네오.리어리스트라던가 오브제파로 불리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이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처음 몇 년간은 애교로 받아드린 면이 있지만, 그후에는 매우 큰 중요성을 획득해갔다. 즉 예술가의 숙고끝에 행하는 선택이 오브제의 본래의 운명을 바뀌고 여기서 예상도 하지 않은 표현력을 획득해 갔던 것이다. [자전거바퀴]나 [샘-변기]로부터 반세기가 지난후 그의 반예술적인 행위는 새롭게 실증성을 얻기 시작하고 거기에는 새로히 각성한 능력을 부여받은 작품이란 생경한 사실의 한 가운데서 여태와는 다른 창작자의 태도가 나타나 있다. 만일 뒤샹이 주장한데로 [예술]이란 말이 산스크리트에서 유래한 것이고 [만드는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그의 행위와 선택은, 4세기에 걸친 유마니스므의 문화적. 조형적 획득물을 전적으로 전도시켜버리는 하나의 위생도덕을 제기하고, 최종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미술관을 항상 예배의 장소로서, [거장]들을, 피카소나 마티스 루오등으로 불리는 반신(半神)으로 숭상해 온 시대의 표준은 이것으로 무너저갔다. 말셀 뒤샹은 노드가씨가 잃어버렸던 것에 대해서 탄식해마지 않았던 그 마술쟁이의 모자를 다시 한번 쓴 꼴이 되었던것 이다. [이제서야 우리들의 비밀은 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버렸다]라고 드가는 한탄을 했지만, 놀만디의 공증인의 개구쟁이 아들 덕택으로 그 비밀도 이제서야 지성과 명석함과 유-모어의 덫에 걸려든 것이다. 그러나 뒤샹은 모자안에 그대로 앉아 있는것이다. 그는 소리를 거칠게 내지도 않고 조용히 침착하게 이야기했다. 그의 기억은 놀라울 정도로 확실했고 그가 쓴 말들은 자주 인터뷰를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동적이며 습관적인 투는 찾아 볼 수 없고 아주 성심성의껏 대해준 결과물이다. 그가 [언어의 제 조건, 소어의 탐구]를 쓴 사람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가 격렬하게 반응을 일어켰던 것은 마지막에서 두번째 질문,[ 신을 믿습니까?]라고 했을때였다. 그가 자신의 창작물을 가르킬 때 [물 chose]이란 말을, 그리고 자신의 창작행위를 가르킬 때 [만든다 faire] 란 말을 시종 쓰고 있는 점을, 독자도 아마 알아차렸을 것이다. [놀이] 라던가 [재미있다], [나는 즐기고 싶었습니다] 라고 하는 말들도 자주 나온다. 이것은 그의 무활동을 증명하는 빈정거림의 표식이다. 말셀 뒤샹은 항상 녹색의 가는 줄무늬가 들어간 장미색의 셔쓰를 입고 있었다. 그는 쉬지 않고 하바나(권연)를 피웠고(하루에 열가치 정도) 외출은 하지 않고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않았어며 전람회나 미술관에도 가지 안했다. 그를 신봉하는 젊은 화가들은 많았지만 그들은 뒤샹을 만나러 가는 일은 거의 하지 않했고, 뒤샹 자신도 그런 이단적인 후계자들에 대해서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하나의 전형입니다. 어느 시대고 그런 하나 정도의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는 신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것에 초월적인 정일함을 가지고 대했다. 그는 말한다.[해결이란 있을수 없다. 문제가 없으니까………]. 우상파괴자------그는 특별히 자기자신에게 그러했다. 승부사--------그는 우연의 극한까지 가 본다. 8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서 제작한 [큰유리]가 뿌셔젔을 때 그는 물리적인 의미로서는 그것을 고치지 안았다. 반대로 그는 자신의 작품에 가해진 이 사고앞에서, 없었던 운명의 징후를 분명하고도 흡족하게 생각하면서 받아드렸다. 말셀 뒤샹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의 한 사람이였다. 그의 작품이 처음으로 아모리 쇼에 전시되였던 1913년이후, 그가 자기자신은 국외자이라고 언명했던 예술가라고 하는 인종이 득실거리고 있는 이 시대에 제일의 그리고 가장 창의력이 풍부한 계시자란 사실은 널리 인정받고 있다. 절대의 탐구자였던 뒤샹은 20세기의 후렌 호파이다. 그러나 그는, 발작크의 작중인물과 같이 작품을 태워버리는 일은 안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방기하고 이미 50년도 앞서 아포리넬이 말한바와 같이 그 [사람이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힘]을 가지고 자신의 자식을 버리는 부모로서의 생애를 불가사의하게 보내고 있을 동안 작품이 스스로 공유한 생을 길러가게 한 것이다. 대서양의 대안에서는 러우센버그에서 짐.다인, 올덴버그에서 로젠퀴이스트에 이르는 자식과 손자들, 여러 친인척들로부터 얻은 전혀 새롭고 눈부신 영광에 둘러싸인 한편, 불란스에서는 뒤샹은 오히려 하나의 신화가 되었었다. 그것은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루이.가레화랑에서 뒤샹=뷔용의 [슈발.마쥴]의 오프닝때,그를 주의 깊게 관찰한 일이 있었다. 그는 홀쭉한 몸매, 샹냥한 말씨와 음성, 좀 어색해보이는 모습, 출석자들 사이를 안아무인격으로 빠져다니는 행태등은 그의 전 인격에 일종의 가벼움을 뛰우고 있었다. 그는 실제로 지금 있는 자리에서 보다는 어딘가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몸에 지니고 있다. 그는 그 나름대로 관객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화를 다시 읽어 주었더니, 그는 나에게, [여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나타나 있다.]라고 한다. 실제 말셀 뒤샹의 생활과 작품과 인격 그대로 만큼, 자연스렵고 투명하고 맑게 보이는 것은 없다. - 1966년 9월, 피엘 가반느. ********** [뒤샹은 말한다] # 8년간의 수영훈련 - 말셀 뒤샹씨, 금년은 1966년입니다. 앞으로 몇 개월이 지나면 당신은 80세가 됩니다. 당신이 미국으로 간지가 1915년이며 이후 반세기가 지났습니다. 여태까지의 인생을 뒤돌아 보고 당신이 가장 만족스렵게 생각한 것이 무엇입니까. * 먼저 운이 좋았던 것을 들수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나는 여태 생활을 위해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일이 없었어니까. 생활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보드래도 좀 바보스러운 일같이 생각됩니다. 나는 언젠가는 사람들이 무리하게 일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수 있는 시대가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운이 좋았던 탓으로 나는 그럭저럭 헤쳐올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한때 인생을 지나치게 무겁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들과 더불어, 마누라 라던가 아이들, 별장이나 좋은 자동차등 때문에 헛되게 보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닭았지요. 그래서 다행하게도 일찍부터, 보통생활을 영위함으로서 당했을 여러가지 곤란한 일들에 부딛치지 않고 오랫동안 독신생활을 보낼 수 있었지요. 실제로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자신이 매우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커다란 불행이나 슬픔을 만난 일이 없습니다. 신경쇠약에 걸린 일도 없었습니다. 거기에다 산고의 아픔(회화를 창작하는 일)- 나에게는 회화가 배출구역활을 한 일도 없었습니다.-이라든가,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억제할 수 없는 욕구를 느낀 일도 없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종일 뎃상을 하고 싶었다던가 스켓치를 하고 싶었던 욕구도 없었습니다. 전혀……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말할수 있는 것은 그것 뿐입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억울하다고 생각한일은 무었일까요. *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나에게는 어떠한 부족함도 없었습니다. 인생의 종국에 와서도 시작때 이상으로 나는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 당신은 20세기의 가장 지성적인 사람이라고 안드레.브르똥은 말했는데, 당신에게 있어 지성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 그말은 내가 당신에게 들어보고저 하는 말입니다. [지성]이란 말은, 사람이 발명해낸 것중에서 가장 융통성있는 말입니다. 논리적이고 데까르트적이란 지성의 틀이 있습니다. 그렇치만, 브르똥이 말하고저 했던것은 그것과는 다른 것이 였을겁니다. 그는 슈리얼리즘의 관점에서 보다 자유스러운 모양으로 문제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의 지성이란, 말하자면 보통의 평균적인 인간이 이해할수 없는, 혹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의 침투입니다. 어떤 종류의 단어에는 의미의 폭발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 말들은 사전에 쓰여저 있는 의미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는것입니다. 브르똥은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으로서 우리들의 사물을 보는 방법에는 공통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안고 있는 지성의 관념, 확대되고 늘어진 그리고 부풀어진……… 그런 지성이란 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당신 자신의 [지성]에 띠라서, 말하자면 당신이 스스로 창조의 한계를 확대하고 부풀린 폭발시킨 그런 의미에서………… *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창조란 말은 무서운것입니다. 보통의 사회적인 의미에서는, 창조란 대단히 샹냥한것입니다만, 실은 나는 예술가들의 창조적기능이란 것은 믿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같은 인간 그것뿐입니다.무엇을 만든다는 것 그것이 그들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비지네스맨 조차도 무엇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치요. 반대로 [예술]이란 말에는 대단히 이끌립니다. 만일 내가 들을대로 산스크리트에서 온 것이라면 이 말은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무얼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켄버스를 향해서 틀안에 잡힌 무엇을 만드는 사람이 예술가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한때는 그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로 불려지고 있었습니다- 직인입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직인입니다. 시민생활에 있어서, 군대생활에 있어서, 혹은 예술생활에 있어서. 루-벤스나 누군가가 화구를 필요로 했을 때 그는 그걸 몇그램인가를 길드에 주문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50그램 혹은 60그램, 혹은 더 이상의 물감을 주어도 좋은가를 가지고 토의를 했던것입니다. 계약서에서 볼수 있는 이런 사실들은 바로 직인사회의 일입니다. [예술가]란 말은 화가가 군주제 사회에서 하나의 인격이 되고, 이어서 지금의 사회에서 신사가 되었을 때 처음으로 발명한 말입니다. 그는 누군가를 의하여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에 관련된 누군가가 화가가 만들어낸 것에서 골라서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대신, 예술가는 이전의 군주제 밑에서의 경우에 비교하면 양보를 강요받는 일이 훨신 줄어든 것입니다. - 브르똥은 당신이 20세기에서 가장 지적인 인물의 한사람이라고 말했을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는 가장 성가신]이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만. * 그건 당대의 유행에 따르지않는 일이, 거기에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반대, 혹은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대항물을 보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라고 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했습니다. 그것은 브르똥이나 그의 그룹에게만 존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때 하고 있었던 일과 다른 일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 당신은 많은 사람을 당혹스협게 했다고 생각합니까. * 아니요. 이점에 있어서는 전혀 그렇치 않습니다. 나는 공적생활을 전혀 하지 안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공적 장소에 나갔던 일은 브르똥이나 기타의 내가 약간의 접촉을 하고 있었던 그룹안에서만 이였습니다. 나는 정말로 공적생활을 한 일이 없습니다. [큰유리/ Large Glass]조차도 전시한 일이 없었으니까. [큰유리]는 줄곧 차고안에 방치되어 있었으니까. - 당신의 도덕적인 입장이 당신의 작품이상으로 사람들을 당혹케 할까요. * 그점에 있어서도, 나는 입장이란 것이 없습니다. 나는 조금은 가트르트.수타인과 같았습니다. 그녀는 어떤 그룹안에서는 재미있는 작가로 보이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점에서 여태까지 없었던 그런 면에서 말입니다. - 당신을 가트르트.수타인에 비교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했는데요………. * 그것은 이 시대의 사람들을 비교하는 하나의 형입니다. 말하자면, 시대마다 그 시대의 풍조를 타지않는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이는 누구를 성가시게 하는 일은 아닙니다. 내가 거기에 있었던 없었던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지금에 와서, 40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사람들을 당혹케 했던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런 일이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었는데 말입니다. - 좀더 상세한 이야기에 들어 가기전에 당신의 일생의 열쇠가 되는 일에 대해 짚고 가야겠군요. 바로 약25년 동안이나 회화에 종사해 오다가, 당신이 돌연, 그걸 방기해버렸다는 일입니다. 이 단절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 거기에는 여러가지 일들이 관계하고 있습니다. 먼저 첫째로, 매일같이 예술가들과 접촉을 한다는 것, 즉 예술가들과 함께 생활을 하고 예술가들과 함께 어울린다는 일이, 나에게는 매우 불쾌하였습니다. 1912년에 한 조그마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일이 나를 매우 흥분시켰었는데 내가 앙데빵당전에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를 출품하고, 벨류니 사-지의 앞에서 이를 철거하도록 요구당했던 일입니다. 당시로서는 가장 앞서있었던 사람들 그릅안에서도, 몇사람은 법외의 경계심을 갖고 있었고, 어떤 공포심을 불러 일어킨 것입니다. 그래도 그레-즈와 같은 매우 지적인 사람들은 이 나체가 여태까지 그들이 걸어왔던 길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큐비즘은 벌서 2-3년 동안 이어져오고 있었고, 그들을 이끈 한가닥 실은 이제부터 일어날것들을 예측할 수 있게, 완전히 명료한 곧바른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런점이 매우 바보스렵게 보였습니다. 그러한 때, 내가 자유스럽다고 믿고 있었던 예술가 편에서 그런 차가운 푸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그 반동으로 나는 직장을 갖기로 했습니다. 샹드.쥬니비에부 도서관의 사서직을 얻었습니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한 것은, 혹종의 환경, 태도로부터 벗어나서 평정한 의식을 돌이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도 있었습니다. 나는 25세가 되어 있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사람들로부터 들어 왔습니다. 그후 전쟁이 일어나서 뒤죽박죽이 되버리고 나는 미국으로 가버렸습니다. 나는 [큰유리]에 무려 8년동안이나 시간을 들이고 있었으나 다른 일도 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켄버스나 그림틀과는 연을 끊고 있었지만. 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그때 그 두개 모두에게 진절머리가 나 있었는데, 켄버스나 그림틀은 충분하다고 할 정도로 그렸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눈에는 그것이 반드시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유리]는 그 투명성으로 해서 나를 구해 주었습니다. 무엇인가 따브로(회화)를 그리려고 하면 비록 그것이 추상화라도 반드시 일종의 구실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그 이유를 자문해 보았습니다. 나는 언제나 자신을 향해서 [왜]란 말을 연발하고 있었습니다. 질문하는데서부터 의문이 일어납니다. 모든것에 대한 의문이. 나는 의문을 품게되였고, 1913년에는 [자 이정도면 충분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로 아침에 모든 것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나는 미완의 [큰유리]를 그곳에 남겨 놓은채ㅡ 미국에서 불란스에 돌아 왔습니다. 내가 돌아 왔을 때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 났습니다. 나는 결혼했습니다. 그것은 1927년으로 기억합니다. 따라서 생활이란것도 중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 일을 8년동안이나 해 왔습니다만 그건 고의적으로 엄밀한 계획에 따라서 만들어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일종의 내면생활과 같은 것의 표현으로 만들고 싶지는 안했습니다. 제작에 이렇게 긴 시간을 들인것도 아마 그런 탓에서 일겁니다. 유감스렵게도 때가 지나면서 차츰 모든 종류의 제작의 불꽃이 나로부터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이미 나의 관심 밖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무슨 숏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돌연한 결의가 있었던것도 아닙니다. - 전통적인 수법을 차츰 거절해 가버렸다. * 그렇습니다. -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있습니다. 체스에 대한 당신의 정열………….. * 그건 대스로운 것은 아닙니다. 있기는 있었지만. - 그러나 나는 이 정열이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있을 때 더욱 격렬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요……….. * 하긴 그렇습니다. -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상상해 볼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시기에, 공간 속에서의 말(체스판 위의)의 움직임은, 당신의 눈에는 자신의 따브로와 같은 현실의 창작물과 같은 가치를 지니고 더 나아가서는 공간 속에서의 새로운 조형적 기능을 확립하는것과 같은 창작물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하고. *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습니다. 체스의 하나의 게임은 시각적 조형적인 하나의 물건이며 정태적인 의미에서는 기하학적이라고 까지 말할수 없드래도 움직이기 때문에 역학적인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뎃상, 메카닉한 현실입니다. 말은 그 자체로는 그렇게 아름다운 것은 아니고 게임의 형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아름답게 느끼게 하는 것은 운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콜더의 모빌과 같은 의미에서 바로 하나의 메카닉입니다. 확실히 체스게임에는 특히 운동의 영역에서는 매우 아름다운 것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시각적인 영역에서는 없습니다. 이때 미를 만들고 있는 것은 운동의 혹은 몸짓의 상상력인 것입니다. 그건 완전히 머리속에서의 일입니다. - 요는 따블로에서와 같은 기능적인 형의 놀이와는 대조적인 아무런 근거가 없는 모양의 놀이가 체스에는 있다는 말씀이군요. * 맞습니다. 놀이가 그렇게 무근거적인 것은 아니드래도 선택이 있다…………….. - 하지만 목적은 없는겁니까. * 네, 사회적인 목적은 없습니다. 이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 이상적인 예술작품일까요. * 그럴런지 모릅니다. 그리고 체스 프레이어의 환경은 예술가와 비교하면 훨씬 바람직합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신경이 둔한 거이 눈먼것과 같이 한쪽에 기울러진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인간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미친사람과 같다고 할수 있지요. 예술가가 그렇게 여겨지는 것과 같이. 그들은 실제 그렇치는 않는데……. 일반적으로는 역시, 내가 가장 흥미를 느꼈던 점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40세 나 45세까지는 체스에 강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후부터는 차츰 열이 식어갔지요. - 이쯤해서 당신의 유년시대까지 거슬려 올라가보기로 합시다. 당신은 1987년 7월 28일 세-느.미르팀현의 브랑뷜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공증인이였습니다. 집에서는 체스를 둔다든가 음악을 연주한다든가 해서 밤을 새우는 일도 있었고요. 당신은 7형제의 세번쩨였는데 형제중 한사람은 일직 죽었지요. 삼형제중 가장 위인 카스톤은 쟉.뷔용이되고, 레이몬은 조각가의 뒤샹.뷔용이됩니다. 최후의 말셀은 당신자신입니다. 그리고 슈쟌느,이본느,마그도레느의 삼자메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니, 아이들이 난 해가, 1875-1876년, 1887-1889년, 1895-1898년으로 매우 규치적인 리듬에 따라서 배열되 있습니다. 놀만디의 께 신분이 높은 가정에서 태어났고, 당신은 시골풍의 매우 후로벨적인 환경에서 자란것입니다. * 맞습니다. 리의 바로 이웃이기 때문에 보봐리부인이 이브또에로 가는 승합마차를 잡던곳이 바로 그 동네였지요. 바로 후로벨이지요. 정말로. 그러나 이런일들은 뒤에가서나 알게 됩니다. 17세때 보봐리부인을 읽기 까지는 말입니다. - 당신의 최초의 예술적으로 중요한 일은 1905년 루앙의 인쇄소에서 견습공으로 일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 당신은 그기서 께 깊이 인쇄기술을 습득했겠습니다. * 그건 정말로 이상한 이야기가 됩니다만. 의무병역에 관한 2년복무법의 실시가 절박해왔기 때문에 군국주의 이거나 호전적이지 못한 나는 어떻게 해서 구래의 3년법을 이용하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원을 하면 1년이면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필요한 손을 써서 변호사나 의사가 아닌 인간은 어떻게 해야좋은지 알아 보았습니다. 이것들 2가지가 봍오의 면재직이 였습니다. 그래서 기술공의 시험이 있어 그것에 통과하면 의사나 변호사와 같이 3년대신 1년간의 병역으로 마칠수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종류의 기술공이 될수 있는지 찾아 보았습니다. 활판인쇄공이나 판화.엣찡 인쇄공이 있었습니다. 그런것이 기술공이라 불려지고 있었습니다. 나의 조부는 노련한 조판사였었는데 집에는 그가 판 옛날의 루앙의 기묘한 풍경의 동판이 몇장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인쇄공을 찾아가서 그 동판을 파는 기술을 가르켜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는 그렇게 해주었고 그와 함게 자업을 한후 루앙에서 시험을 보고 합격을 했습니다. 시험관은 직인의 어른들이였으며 그들은 레오날드 다뷘치에 관해서 몇가지 상세한 점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미리 정해진데로 판화를 파고 자기가 할수 있는 것을 해 보이는 것이 시험이였슴니다. 나는 조부의 판화를 파고 시험관에게 하나씩 나누워주었습니다. 그들은 어김없이 그것에 매혹되어 나는 50점 만점에 49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2년분의 병역을 면재받고 사관후보생의 일단에 배속되였습니다. 1년째의 끝에 와서 우에서 면재자의 반을 지휘하고 있던 대위가 병사 한사람 한사람에 질문을 하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나는 기술공이라고 답했을 때 그는 내가 불란서군의 사관단이 하로에 7프랑밖에 못버는 직공을 그 대열에 넣을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을 알았고, 자기는 직업군인으로서는 크게 출세할수 없을 것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 그는 당신의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계란에 지나지 않을 때 뿌셔버린 셈입니다. * 정말입니다. 그래도 그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퇴역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방면되였던 것입니다. - 당신의 최초의 유화로 알려진 것은 1902년의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12살이 된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태어난 [프란블의 교회당]의 그림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회화란 것을 발견 했을까요. 가족들이 해보라고 했던가요. * 우리들이 살고 있던 집에는 고향의 판화를 잔득 만들었던 조부의 기념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형의 쟉그.뷔용보다는 12세, 레이몬.뒤샹.뷔용보다는 11세나 아래였고 그들, 특히 뷔용은 전부터 예술가였습니다. 나에게는 이미 그점을 생각해 보았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로 부터는 아무런 반대가 없었습니다. 두형들로 인하여 이미 익숙해젔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금전적인 도움까지 해 준다고 했었으니까요. - 당신의 어머니도 역시 예술가였지요. 어머니께서는 식기셑에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까. * 도기를 굽기까지 하려고 했지요. 그러나 70년간의 생애에서 거기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종이 위에서는 스트라스불의 도기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잘 그리지는 못했서도. - 그렇다면 가족은 예술에 이해를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 네 그랬습니다. 그런 면에서의 어려움은 없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 당신과 가장 사이가 좋았던 분은 여동생 수쟌였습니까. * 네. 그녀와는 [동료사이]와 같은 점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평생 그림을 그리고 지냈으니까. 작품수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나보다 훨신 끈기있고 훨씬 열심이였습니다. _ 그녀는 당신의 마음에 드는 모델이기도 했지요. *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녀밑에도 동생이 둘이나 있었습니다. 그들 전부가 모델이 되여 주었습니다. 한사람씩 말입니다. 그쪽이 간단했으니까. - 징병기간을 끝내고 당신은 빠리에 가서 아카데미/쥬리안에 입학했습니다.당신은 벌서 1904년에 뷔용과 함게 그곳에서 1년간 지내고 있습니다. 그 당시 뷔용은 신문에 만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당신도 그기서 힘자랑을 해볼려고 했지요. 쥬리안에서 가르쳐준 선생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 전연 기억하지 못합니다. 물론 쥴.류페불과 같은 훌륭한 분도 계셨습니다만 내가 그곳에 있었을 때 그가 그곳에서 가르치고 있었는지 확실치 않습니다. 훨신 젊은 분이 계셨습니다. 이름을 전혀 기억할수 없지만. 그리고 쥬리안에서는 1년 남짓밖에 있지 안했으니까. 내가 한 일 말입니까. 오전중에는 아트리에에 나가는 대신 당구를 치곤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미술학교의 입학시험을 치룬 일도 있었습니다. 그건 영어로 말하는 ‘실패’였습니다. 일차시험은 나체의 목탄뎃상이 였는데 나는 여기서 떨어젔습니다. - 그렇다면 당신은 당시 그렇게 많았던 미술학교 낙제생의 한사람이 였군요. * 맞습니다. 그렇치만 지금은 그걸 자랑스렵게 생각합니다 만. 물론 그때는 [미술을 지망하고 싶은] 무지한 친구들의 정열을 나도 가지고 있었지요. 그후 다시 쥬리안의 수업에 나가게 되고 동시에 만화도 그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루. 스릴]라던가 [루.꾸리에.후란스]에, 4분의 1페이지 10후랑 받고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건 당시로서는 꽤 좋은 보수였습니다. 내가 거기에 들어갈수 있었던 것은 뷔용 덕입니다. 알다싶이 편집장인 쥴.록크란 사람은 대단히 색다른 사람이였습니다. 뷔용은 월요일 아침에 그가 출근하는 걸 기다렸다가 잡아서는 약간의 돈을 받아내려고 회사까지 찾아가곤 했습니다. 그는 전혀 임금을 지불할 생각을 하지 않했습니다. - 잠시 당신의 성장배경을 요약해 봅시다. 불루죠아지 의 가정에서 태어나, 매우 양순한 그리고 매우 인습적인 예술교육을 받았든것으로 됩니다. 당신이 뒤에 가서 반예술적인 태도는 이런 상황에 대한 반동 내지는 복수 같은 것은 아니였는지요. * 네. 그렇치만 나는 그렇게 자신을 갖고 있지 안했다. 특히 처음에는. 아이때는 철학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법이지요. [내가 올바른가 틀렸는가]라고하는. 다른 것 보다 재미가 있어보인다 라고 하는 것만 가지고 하나의 길을 가버리게 되지요. 하고있는 것의 유효성 같은 것은 별로 신경쓰지 않고 말이지요. 옳바른가 틀린것인가 그리고 지금부터 바꿀수 있는것인가 라고 자문해보는 것은 한참 뒤에 가서야 생기지요. 1906년에서 11년에 걸처 나는 몇가지 틀렸던 생각속에서 왔다 갔다했습니다. 포브. 큐비즘. 때로는 보다 온건한 고전적인 여러가지 흐름들 사이에서 말이지요. 나에게 중요했던 일은 1906년 인가 7년에 마띠스를 발견한 일이였습니다. - 세쟌이 아니고? * 네 세쟌이 아닙니다. - 당신은 뷔용과 함께 동년대의 즉 20세에서 25세 정도의 예술가들과 접촉하고 있었으니까 그기에서는 세쟌느나 고-강, 봔 고흐가 화제가 되고 있었을텐대요. * 아니오. 마네에 관해서는 자주 이야기를 하였습니다만. 그는 위대한 사람이였습니다. 인상주의도 화제가 되지 안했지. 스-라등은 완전히 무시되고 있었고 이름조차도 알려지지 안했습니다. 나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화가가 아니고 만화가란 사실을 주의하십시오. 내가 살고 있었던 곳은 몬말트의 고란굴통이며 뷔용의 집 부근이였는데 우리들이 자주 접촉하고 있었던 친구들은 뷔렛드, 레안돌, 아벨.후에불, 죨주.유알라고 하는 사람들이고 전혀 다른 분위기 였습니다. 나는 당시의 화가들과는 접촉이 없었습니다. 후앙.그리조차도- 나는 얼마후에 그와 알게되지만- 삽화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뽈.이리브라고 하는 포스트-도안가가 하고 있었던 잡지사에 함께 가곤했고, 고란글가의 카페등에 가서 자주 당구도 치곤했습니다. 우리들은 ‘힌트’를 함께 나누웠고 돈은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1페이지에 20프랑이였지만. - 별 나쁘지는 않군요. 물론 정말로 그정도의 돈을 받는다면 말이지만. * 그때 그리와 조금 사귀고 있었습니다. 그렇치만, 나는 1908년에는 몽마르트를 떠났어. - 누이이에서 지내고 있었지요. * 네. 1913년까지. 지금 내가 살고 있는곳의 바로 가까운데지요. - 1905년에는 사롱.도든누에서의 그 유명한 [야수의 우리]가 있었고 또한 같은 때 마네, 앙그르의 회고전도 열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흥미를 끈 것은 이 뒤의 것으로 압니다만. * 물론입니다. 회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때는 언제나 마네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세쟌느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는 일시적인 열에 지나지 않했지……….. 물론 이 이야기는 나의 주변 이야기입니다만. 프로의 화가들 사이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젔으리라 생각합니다. 여하간 내가 그림을 그릴수 있게 된 것은 1905년의 사롱 도톤느였어. - 당신은 이미 하고 있었던건 아닌지. * 네 이런저런 정도였습니다만 내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뎃상였습니다. 1902년인가 3년경 나는 인상주의풍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잘 소화되지 않는 인상주의를. 루안에서는 피엘. 듀몽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도 같은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도는 더 심했지만. 그리고 나서 나는 포비즘으로 전향했습니다. - 특별히 강열한 포비즘였지요. 필라델피아 미술관에는 알렌스버그가 기증해준 덕택으로 -그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당신의 全작품이 전시되고 있습니다만, 포비즘의 작품은 그 극열함에서 더욱 강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당신의 전기작가의 한사람인 로벨.루벨은 그들 작품의 삐걱거리는 예리함을 반.돈갱에 겨누면서 독일 표현주의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 사실 어떻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아- 물론 마띠스입니다. 그가 뿌리입니다, - 그와는 친교가 있었습니까. * 아니오. 전연. 나는 전혀 그를 몰랐습니다. 그를 만난 것은 여태 3번 정도입니다. 그러나 사롱 도 돈느에 출품한 그의 작품에는 대단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적과 청을 일면에 칠한 커다란 그림에서. 그 당시의 대사건이였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리우에도 마음이 끌리고 있었지. - 그는 아주 짧은기간 동안에 영광을 누렸지요. * 그리고 완전히 사라저 버렸어. 그에게는 일종의 종교성이 있어 거기에 나는 이끌렸었어. 나는 그런 종교성을 어떻게 하면 자기손에 넣을수 있는지 알수 없었지. - 사롱 도돈느 이외 당신은 화랑을 자주 다녔습니까. * 네, 로와일가의 도우리유페 화랑에, 포브에 반항하던 앙티미스트의 최후의 작품, 보날, 뱌이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봐로돈도. 나는 봐로돈에는 언제나 감탄하고 있었지요. 적과 녹색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던 시대에 그는 매우 깊이가 있는 다른 색, 차고 빛바랜 색조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큐비스트들의 파렡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피카소와는 1912년인가 13년까지 만난일이 없었습니다. 브라크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그에게 인사를 해도 상대는 모른척했습니다. 그는 전에 사귀어오든 사람외는 별로 접촉하지 않았슴니다. 년령의 차이란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 피카소에 대해서 뷔용이 말한 것이 기억납니다. 내가 몬말트에서의 그들의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라치면 그는 뒷걸음치는 모습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멀리서 그를 보았을 뿐이다]라고. 같은 세대, 혹은 거의 같은 세대에 속하면서 같은 장소에 드나들면서 같은 사람들과 만나던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 그런 거리가 있는것에 대해서는 나도 놀랐습니다. 브라크와 피카소는 당시에 이미 다른 사람과는 전혀 별개의 세계에, 그들이 살고 있는 테두리안에, 그들자신의 예술속에 파묻혀서 그 어느 쪽에도 전혀 나오는 일없이 생활해 왔다는 것은 정말이군요. * 정말입니다. 당시 파리는 크게 분활되어 있어서 피카소와 브라크가 살고 있었던 몬말트의 가장자리는 딴곳과는 분명히 구분되여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거기에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쁘란세와 함께였습니다. 쁘란세는 이상한 사람이였습니다. 사립학교의 수학선생에 지나지 않았는데 4차원 세계에 통달해 있는듯 행세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우렸습니다. 벳쯔앙쥬는 대단히 머리가 좋은 사나이로 그걸 충분히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제4의 차원이란 것이 어떻게 생긴것인지 모르면서 사람들의 화제에 올라 있었습니다. 지금도 비슷한 사정이기는 마찬가지지만. - 그 당시 당신의 친구나 동료는 어떤 사람입니까. * 누이이-에서는 뷔용과 함께였으나 그 외로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쀼리에에 가면 얼마간의 지인들이 있어 도로네가 대의론을 하고 있는 것을 멀리서 본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 누이이란 곳은 당시에는 당시로는 세계의 끝과 같은 곳이였을건데 그누이이에서 살겠다고 한 것은 그런 화가들과 어느정도의 거리를 두려고 한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 아마 그랬을겁니다. 1909년에서 1910년에 걸쳐 나는 그림을 얼마 그리지 않했습니다. 1911년말에 가서 나는 그레-즈,멧쯔앙쥬,레제등과 만났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사이클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화요일마다 그루브보아의 그레즈집에 모여서 멧쯔앙쥬와 함께 큐비즘에 관한 책을 구상하기도 했습니다. 일요일도 뷰-도에서 뫃여 그기에서는 사롱도든느의 모든 멤버와 안면이 있는 나의 형의 덕택으로 많은 사람들이 얼굴을 나타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따금 콕토도 왔습니다. 그 놀라운 말탄. 발쟌도 있었습니다. 그와는 미국에서 몇번 만났습니다만 그는 매년 1907년이후의 자신의 전작품을 수록한 아주 큰 책을 영어와 불어로 출판했습니다. 그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아마도 80세를 넘었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은 미국인인데 미국 뉴욕의 콜롬비아대학의 학장을 하고 있습니다. - 아포리넬은 알고 있엇냐요. * 아주 조금은. 하여간 그를 잘 알고 있었다는 사람을 당시에서는 없었으니까요. 극히 일부의 주변인물 외는……..마치 나비와 같았습니다. 우리들과 함께 큐비즘을 아야기했는가 하면 다음날은 사롱에서 빅톨 위고를 읽고 있었으니까. 당시의 문학자의 재미있는 점이란 문학자가 두사람만 모이면 이미 딴사람은 말을 거들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리 계속해서 거짓과 엉터리의 불꽃이 튀기 시작하고 전혀 손댈 수 없는 상태가 되여 버리니까. 그런 말씨를 흉내낼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지요. 어느날 나는 피카피아와 함께 막스 쟈콥과 아포리넬이 동석한 모임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건 믿을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불안한 느낌 속에서 시끌벅적한 웃음소리 사이로 왔다갔다하는 겁니다. 그들은 둘다 아직도 1880년경의 상보리즘시대의 문인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겁니다. - 당신은 1909년에 처음으로 앙데팡당전에 출품하였습니다. 그건 2점의 유화로서………….. * 그중 하나는 상.구루-의 조금만한 풀경화로 100프랑에 팔렸습니다. 그때는 정말 기뻣습니다. 놀라웠습니다. 아무런 뒷받침도 없었어니까요. 1910년인가 11년의 사롱.도돈느에서는 나체의 스케치가 이사도라 던칸에 팔렸습니다. 그때는 나는 그녀에 대해서 알지못했었는데 뒤에 가서 나는 다시 한번 더 이 그림을 보려고 했습니다. 이사도라와는 미국에서 만난일이 있었지만 그 이야기는 나오지 않했습니다. 그녀는 그 그림을 어떤 친구의 한사람에게 크리스마스선물로 주었던것으로 압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여있는지 모릅니다. - 그때의 당신은 화가 생활이란걸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 처음에는 화가 생활같은 것은 보내지도 않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1910년 이후가 됩니다. - 당신은 회화의 세계에로 진출했고, 그기에 무엇을 기대하였습니까. * 모르겠습니다. 실제 나에게는 뚜렷한 계획이나 예정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습니다. 나의 그림을 팔아야할지 않해야 할지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이론적인 기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몬말트의 보헤미안과 같았습니다. 살며 그리고 그리는 것. 그림그린다는 것은 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그건 지금도 분명한 일입니다. 사람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말하자면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매일아침마다 회사에 나가는 일이 싫은거지요. - 사회생활에 대한 일종의 거절반응같은 겁니까. * 네 맞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장래에 어떻게 될것인가 하는데 까지는 아무런 뚜럿한 계획을 갖지는 않했지요. - 내일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않는다는,, * 네 전연 간여치 않했습니다. - 그리고 1908년이란 해는 당신이 누이이-에 거주를 정한 해입니다만 그해는 큐비이즘의 해이기도 했지요. 그해 가을에 칸웨이렐화랑에서 브랔크가 에스탁크에서 그린 풍경화의 전시가 있었고 그뒤를 쫓아 볼셀이 처음으로 이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몇 개월전에는 피카소가 [아비용의 처녀들]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그림이 안고있었던 중대한 혁명성을 의식하고 있었습니까. * 아니요. 전연. 우리들은 [아비뇽의 처녀들]을 본 일이 없습니다.그것이 전시되는 것은 몇 년후의 일입니다. 나 자신은 뷔니용가의 간뷔이렐의 화랑을 몇번이나 방문하였고 큐비즘에 사로잡혀던것도 그때였습니다. - 물론 그건 브라크의 큐비즘이지요. * 그렇습니다. 나는 몬말트의 그의 아트리에에 간 일이 있습니다. 훨신 뒤의 1910년인가 11년의 일입니다만. - 피카소를 찾아간 일은 없습니까. * 그 당시에는 없었습니다. - 그는 예외적인 화가로 보였습니까. *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와 반대입니다. 피카소와 멧쥬안제의 사이에는 이렇게 말해도 될지는 몰라도 일종의 정신적이 일치가 있었습니다. 큐비즘이 사회적으로 틀을 잡아가기 시작했을때는 특히 멧쥬안제가 화제에 올랐습니다. 그는 큐비즘을 설명을 했습니다. 피카소는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않해는데. 이런저런 여러가지 일들을 많이 이야기하는것보담 말을 아끼는 것이 좋다란 것을 알기까지는 후 몇 년이나 걸려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멧쥬안제가 피카소에 대해서 큰 경의를 가지고 있었다는 데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그 이상의 어떤점이 결여되어 있었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모든 큐비이스트중에서 종합적인 정식에 가장 까갑게 다가간 것은 그였으니까. 그렇치만 잘 나가지 안했지. 왜 일까. 나에게는 알수 없습니다. 피카소가 선두를 달리기 시작한 것은 휠씬 후의 일입니다. 대중은 언제나 선두주자가 되는 인물을 필요하지요. 그이든 아인슈타인든 혹은 다른 누구든지………. 요는 앞의 문제의 답은 반은 대중의 측에 있습니다. - 당신은 좀전에 큐비즘에 사로잡혔다고 했는데 그건 어떤내용입니까. * 대강 1911년경입니다. 그때 나는 포브를 버리고 내가 이미 보았고 나의 흥미를 끌었던 별도의 것 즉 큐비즘 쪽으로 옮겼습니다. 나는 그일을 아주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 불신의 염을 가지면서지요. 그 감정은 뷔용이나 뒤샹=뷔용도 마찬가지였겠지요. * 체계화란것에 대한 불신. 나에게는 이미 만들어진 정식을 받아드리고,전날밤 어딘가 화랑에서 본걸 생생하게 상상해볼 정도로, 모방한다던가 영향을 받는다던가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 1910년가을에 그린 매우 아카데믹한 [체스.게임]과 1911년의 [소나타]나 [초상 혹은 달시네아]등의 사이에는 완전한 단절이 있습니다. * 맞습니다. 완전한 단절. [체스.게임]는 1910년 사롱.도든느에 출품했습니다. 그리고 [소나타]를 그린 것은 1911년의 1월입니다. 그후 이그림에는 9월에 손을 뎁니다. 다섯연성의 실룻헷을 단계적으로 겹친,[달네사아]도 같은 시기에 제작했습니다. 특히 기법상의 차이의 크기에는 놀랍습니다. - 한쪽에 치우치는 것에 주저한 것입니다. * 네, 큐비즘의 새로운 기법은 적응하기 위해서 어느정도의 수작업이 필요했으니까. - 실제 큐비즘의 기법은 그 정신 이상으로 당신을 끌어 당긴것 같이 보입니다. 즉 볼륨을 통하여 켄버스위에 표현한다. * 바로 그겁니다. - 색체를 통하는 이상으로. 나는 당신이 말한 수작업이란 말에 주의를 해보고 싶습니다. 당신이 그당시에 회화와의 단절을 결정지원 것은 도데체 무슨 쇽크였습니까. * 모르겠습니다. 아마 칸웨이렐이란곳에서 무엇을 봤겠지요. - [체스.게임]이후에는 1911년의 9월에서 10월에 걸처 [체스.프레이어]을 위한 목탄과 오일의 습작이 몇게나 있습니다. 그건 12월에 제작된 [체스.프리이어의 초상]을 앞건 것입니다. * 네, 그것들은 전부 1911년의 10월에서 11월사이의 일입니다. 현재 파리의 근대미술관에 있는 그 스켓치, 그리고 그전에 그린 3-4매의 뎃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일 큰 [체스.프레이어], 결정판이 옵니다. 나의 두형님이 승부를 겨누는 것으로서 지금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있습니다. 이들 [체스.프레이어], 혹은 [체스.프레이어의 초상]쪽이 보다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유리의 빛 아래에서 그린 것입니다. 그 실험에 나는 매우 끌려있었습니다. 가스의 빛깔, 옛날의 아우와-등의 빛이 녹색이란걸 알고 계시겠지요. 나는 색체에 변화를 주는 것을 원했던것입니다. 녹색불빛 밑에서 그린 것을 다음날 햋빛 아래서 보면 자색이 걸친 회색조의 색갈이 되어 당시의 큐비이스트들의 화법을 닮는것입니다. 그것은 색조를 떨어뜨리는 것 말하자면 그리쟈유-을 위한 간단한 방법이였습니다. - 그건 당신이 빛의 문제에 관심을 쏟은 희소한 경우의 하나이지요. * 네, 실은 빛 그 자체는 아니였습니다. 나를 비추고 있는 빛입니다. - 광원보다 주위의 분위기가 훨신 중요했다,, * 네 바로 그대롭니다. - 당신의 [체스.프레이어]는 세쟌느의 [드램프놀이를 하는 사람]에서 대단히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 네, 그렇치만 나는 거기서부터 탈출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알다싶이 이것들은 순식간에 이루어젔습니다. 큐비즘에 끌렸던 것은 불과 몇 개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1912년 말에는 나는 벌서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어떤 확신이라기보담 하나의 실험의 모양같은 것이였습니다. 1902년에서 1910년까지 나는 그럭저럭 잘 헤염처 왔습니다. 8년간의 수영연습을 한 셈입니다. - 뷔용(듀샹의 형 마르셀 뷔용)의 영향도 있었습니까. * 그건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특히 뎃상에서. 그의 놀랄만한 솜씨에는 탄복하고 있었지요. - 이 실험적인 년대, 화가들이 자신의 연구나 발견이나 불안을 교환해 가면서 그뤂을 만들고 혹은 패거리를 만들어 생활해 온 시대, 그리고 우정이란 요소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시대에, 내가 가장 큰 감명을 받은 것은, 당신이 자유에의 욕구를 품고 거리를 두는 것, 운둔하는 것을 좋아했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적은 어긋난 영향을 받은 일은 있었다고 해도, 당신은 단지 운동이나 유행이나 사상에 대해서뿐만 아니고 예술가 자신으로 부터도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런 운동을 숙지하고 있고 자기자신의 언어를 만들어 가는데 있어 도움이 되는 것을 배우는 것에 소홀히 하지 않했습니다. 이 시대에 당신을 움직이고 있었던 것은 어떤 감정이였을까요. * 남다른 호기심이지요. - 이상 조규현 번역
25 no image 말셀 뒤샹
3174 2007-06-05
말셀 뒤샹 [1] 왜 새삼스렵게 뒤샹인가- 미술감상 입문의 길목에서 만난 말셀 뒤샹은 초보자에게는 겁을 주는 이단자같이 느껴지고 생소한 존재였지만, 수원의 김성배화백이 한때 그 이단성?에 심취했고 피엘 가반느와의 대화집을 어려운 여건에서도 번역(일어판)을 해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그후 김화백의 매우 이색적인 작품들과 그의 히말라야숭상 행적들을 만나면서 그 사상적인 영향이 혹시 뒤샹이란 사람부터 온 것이 아니가 하는 의문이 생기고 이런저런 일들이 계기가 되어 같은 일어판을 구해서 일독을 하였고, 최근에 국내에서 출판된 김광우씨의 [뒤샹과 친구들], 일어판 의 죨주.샬보니에의 [뒤샹과의 대화]등으로 호기심이 이어저 가면서 필자의 뒤샹에 관한 인식은 전혀 다른 모습을 띄기 시작했다. 유명한 [샘]( 시장에서 파는 변기를 그대로 전시장에 출품함)이 주는 전설적인 신화와 같았던 “ready made” 가 함축하고 있었던 의미를 조금씩 해독해가면서부터 필자도 시각예술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지 않을수 없었다. 서구 현대미술의 계보를 따라가다 보면, 시대상황에 띠라 야수파 큐비즘등을 거치면서 표현형식의 급급한 변화가 이어지고 일부작가들의 미국이주를 거치면서 후기모더니즘 운동의 장이 미국에서 꽃을 피우고 급기야 black hole와 같은 ‘자기해체’의 강력한 흡인력을 가진 하나의 매듭 을 만날수 있는데 이 단초를 열어보인 작가가 바로 뒤샹이다. 그는 일련의 ready made 란 작품을 가지고 미술사의 한 홱을 새로 여는 발상의 혁명을 일어키고 포스트 모드니즘적인 패러다임을 열어놓았던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필자도 뒤샹의 세계를 만나면서 이전과 이후의 현대시각예술의 향방을 가늠하는 여러 유파의 작품들을 감상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런 연유로 김화백이 개설운영하고 있는 슈-뤂의 홈페이지의 조규현칼럼에다 가반느의 [뒤샹과의 대화]를 소개해 보기로 하였다. 대중문화매체의 과잉지배현상에 의한 시각예술의 입지가 쫍혀가고 시대변화에 대한 해석과 Vision제시가 어려워저가고 있는 상황에서 옳바른 예술의 당위성을 묘색해가는 필요의 일환으로 엄혹한 예술의 진실을 고집했던 뒤샹을 통해서 어떤 단초를 잡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 이상 조규현 의 소개하는 글. [2] 미술의 혁명가 마르셀 뒤샹 -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 의 서문에서 인용- 전 세계 지역문화의 울타리들이 모두 무너지자 6백년 이상 존속한 르네상스 패러다임은 종말을 고하였다. 미술계는 이처럼 세계화되는 과정을 겪으며 급변하는 새로운 기술을 이용하여 다양한 유형의 작품들을 쏟아내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미술에 포함된 주제와 그 표현의 폭이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만큼 예술가들은 과거에 누려보지 못한 자유를 최대한으로 만끽하고 있다. 어떤 의미만 있다면, 어떤 재료의 구성만 갖춘다면 미술품으로 인정받는 시대에서 굳이 미술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노구나 관심만 있으면 미술가일수 있다. 우리 모두 한계가 없는 예술의 무한한 가능성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르네상스 패러다임으로 비롯된 서양미술에 대한 개념의 폐기를 의미한다. 뒤샹을 미술사에서 가장 난해한 작가로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바로 미술에서 이러한 놀라운 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를 난해한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행위는 미술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시각예술은 눈으로 보는 외형상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개념상의 문제이며, 물질없이도 미술이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하는 행위였다.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미술이란 오래된 정의를 부인함으로써 르네상스 이후의 서양미술 또는 서양미술사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뒤샹은 피카소에 비해 차세대 예술가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여섯살밖에 차이가 없다. 동시대 예술가로서 그는 피카소와 달리 일찍부터 미술의 전통 밖에서 모더니즘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을 조소했으며, 피카소가 입체주의에 여념이 없을 때 그는 자전거 바퀴를 의자에 거꾸로 부착하고, 포도주 병을 씻어말리는 주방용품인 병걸이를 사서 미슬품이라고 소개했다. 이는 당시 유렵 미술의 정황으로 보면 대경실색할 행위였다. 공장에서 쏟아저 나오는 대량생산품을 선정하여 예술품이라고 제시한 레디 메이드 ready made 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미술이란 사고의 한계를 뛰어넘어, 이미 만들어진 것이라도 보기에 따라서는 미술품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레디 메이드를 미술품과 동등하게 취급함으로서 미술의 개념으로 정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에 없에버렸다. 모더니즘의 입장에서 보면 여간 뻔뻔스려운 행위가 아니겠지만 사람이 만든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미술품이 될수 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미술품이 예술가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이런 의미에서 뒤샹은 미술사에서 피카소보다 더 중요한 예술가로 평가할 만하다. 그가 이 같은 혁명을 꾀한 것은 일찍이 1910년대 후반이였으나 사람들이 그의 혁명적 의도를 파악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타계한 1968년 이후부터였다. 기계주의를 찬양하는 미학이 그로부터 비롯되였으며 그에게 미술은 더 이상 감정의 문제가 아니였다. 그는 미술은 진지해야한다는 고정관념에 반발하고, 언어적 장난으로 감성의 문제를 가볍게 여겼다. 1912년에 그린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는 기계주의와 유머가 혼용된 모더니즘에 대한 첫 공격이였다. 오늘날 흔히 포스트 모던이니 후미술사적 시대니 하는 말로 모더니즘 종식 이후 새시기가 열였음을 말하는데 이런 시기를 연 사람이 바로 뒤샹이다. 1910년대에 이미 모더니즘의 종식과 서양미술상의 종식을 선언한 그는 1918년 서른한살 때 [덤] 을 그린 후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회화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음을 선언한 것이다. 뉴욕패러다임의 중심 필자가 뉴욕을 중심으로 벌어진 20세기 미술을 조명하려는 책들을 집필하면서 뒤샹을 가장 중요한 예술가로 꼽는 이유는 그에 의해서 패러다임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뒤샹은 파리를 중심으로 성행한 모더니즘을 거부하고 예술의 수도를 떠나 뉴욕으로 왔다. 그가 81세의 생을 마치고 1968년에 사망했을 때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예술가의 타계소식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은 [뉴욕 타임즈]를 비롯한 뉴욕의 주요 신문들이었다. 그의 조국 프랑스의 [르 피가로]지가 그의 타계소식을 스포츠란에 소개할 정도로 그의 조국에서는 그의 예술은 그의 체스 실력보다도 인정받지 못했다. 뒤샹은 미국에 속한 예술가였다. 뒤샹의 영향은 존 케이지, 로버트 라우젠버그, 재스퍼 존스, 엔디 위홀 등으로 이어지면서 뉴욕 패러다임의 근간을 이루웠다. 세상을 떠나자 마자 그는 이내 전설의 인물이 되어 영원히 미술의 혼으로 남았다. 후세의 많은 예술가들이 그에게 한없는 존경심을 표했으며 그에 의해 창작의 무한한 자유를 맛보았다. 레디 메이드는 케이지의 수집된 소리로, 해프닝으로, 팝아트 혹은 신사실주의로 이어저 갔다. 뒤샹은 의미 혹은 귄위를 사전에 무시함으로써 남성적인 과시를 부정했다. 그의 행위가 여성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같은 부정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어며, 포스트모던니즘에 패미니즘이 두드러진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혹자는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미술사적 시대를 위홀이 열었으며 미술의 새 이정표로 삼는다. 그러나 뒤샹이 없었다면 과연 위홀이 존재했을까? 모더니즘에 대한 그린버그의 응호가 없었다면, 다시 말해서 그린버그의 저항이 없었다면 뒤샹의 반모더니즘은 미술의 종말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린버그가 그를 오래 가로막았던 것이다. 생고기를 씹는 맛 “대가와 친구들” 세번쩨 책을 출간하면서 필자의 저술의도와 방법에 관해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앞서 출간한 [폴록과 친구들]과 [위홀과 친구들]을 읽은 독자들의 반응은 새로운 형식의 미술사라든지 흥미있게 읽었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생고기를 씹는 맛”, 혹은 “사실들의 나열”이라고 한 의견도 기억한다. 그것이 바로 나의 저술의도이며 또한 방법이다. 이십 년 이상 뉴욕에서 살면서 거기서 나온 책들을 주로 섭렵했는데 평론집이 아닌 경우 내가 읽은 대부분의 책들은 사실에 역점을 둔 것들이었다. 특히 미술가의 일대기를 다룰 경우 일종의 역사서이기 때문에 사실의 근거는 필연적이다. 나는 사실들을 엮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한 일로 여긴다. 오직 사실 안에서 뒤샹의 위대함을 부각시키는 것이 나의 의도이다. 나의 개인적인 판단과 평가는 머리말과 에필로그에서 밝히고 본문에서는 독자가 투명한 사실의 바다를 마음껏 헤염치면서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고 정리하도록 하였다. 독자가 안심하고 실제의 세계를 탐험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혹 가이드를 따라서 여행하는 데 익숙한 미술관광객으로서의 독자가 있다면, 나의 저술에서는 가이드 없이 관광하는 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독서의 가장 자율적인 방법이다. 이 책은 현대미술에 관한 비중있는 책들과 뒤샹에 관한 주요문헌들을 나름대로 분석 정리한 내용들로 구성되였다. 참고한 책들은 이 책의 말미에 정리해놓았지만 리스트에 빠진 문현들도 적지않다. 도서관에서 빌려 본 책들의 재목과 저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 그것들을 밝히려면 뉴욕의 여러 도서관을 다시 방문해야 하는 수고를 요한다. 내게는 편집광적인 기질이 있어서 자료를 수집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지만 많은 자료들이 편집과정에서 배제되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펄치는 것이 독자들에게 혼란을 야기시킬수 있다고, 여러 곳에서 삭제할 것을 건의해와 그럴 때마다 승락했다. 독자들이 원하는 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많은 부분을 요약하고 정리하였다. 그러고도 400페이지 분량의 책으로 엮어젔지만 사실을 한곳에 축적하여 주인공 마르셀 뒤샹에 관해서 속속들이 밝히려면 나의 욕심은 만족하지 않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위의 글은 김광우저 [뒤샹과 친구들] 의 머리말에서 인용 아래는 [말셀은 말한다] 를 번역한 Iwasha Tezuo씨의 소개글 마르셀 뒤샹이 그의 [그야말로 놀라운 일생]을 끝내고 벌서 30년이 지났다. 피엘 가반느가 [서문]에서 [뒤샹에 관한 연구서는 불과 얼마되지 않는다]라고 탄식했던 사태는 대폭 변화여 필라델피아미술관(1974년), 빠리 본 퓨-트 센트(1977년), 고륜미술관, 세존미술관(1981년), 바로세로나(1984년), 베네치아 바라치오 그랏쓰(1993년)등으로 대규모적인 회고전이 이어저 열렸고, 그때마다 상세한 카다로그가 출판되어 뒤샹 연구의 최전선의 성과를 보여주었었다. 각별히 특기할만한 것은 파리의 전람회에서 간행이 예고되고 3년후에 출판된 미공개의 뒤샹의 메모집 Marcel Duchamp: Notes (Paul Mattisse ed, Centre National d’Art et de Cultures Pompidou,1980) 을 들수있다. 여태까지의 메모집과는 달리 책형태로 나왔다고는 하나 [극박 inframince]이라고 하는 말과 같이 미지의 개념이나 [큰유리]에 관한 새로운 메모군, 수많은 말장난등 뒤샹 애호가들의 이목을 끄는 내용이 담북 담겨저 있어 온갖 의론을 불려일으켰다. 또한 베네치아의 카다로그에 담겨진 제니퍼.고프와 구파 그리고 쟉그.고-몬에 의한 말셀 뒤샹과 로즈 세라비의 생애의 기록은 [일일 열람]이란 그 형식- 해마다 가 아니고 일부(하로단위)에 의해 데이터가 이어저 있다- 뿐만 아니고 하로단위로 기록되여 있는 내용의 풍부함 상세함에 놀라게한다. 예를 들면 이 문고판('말셀 뒤샹은 말한다'의 일본어문고판을 말함)의 출시가 예정되여 있었던 5월10일자 페이지에는 1908년의 이날 파리에서 열린 Salon des Humoristes 에서 그가 출품한 만화의 기사로 시작하여 1967년의 이날에 역시 파리에서 행해진 만.레이를 둘려산 토론회에서, [왜 그림을 그만 두었습니까?]에 대한 질문에서 [모든것을 그만 두었기 때문이지요] 라고 대답하고, 그후 아무말도 하지 않했다는 에피소드에 이르기까지, 9항목이 줄지어 있다. 이제서야 우리들은 뒤샹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무슨 용건으로 전화를 했는가를 알 수 있는 지경에 이르고 있는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 언급한 이외에도 몇 개의 대담이 공개되였고 CD로 뒤샹의 육성을 들을수 있는 것도 있고(Georges Charbonnier, Entretiens avec Marcel Duchamp, Andre Dinanche Editeur, 1994), 뒤샹의 의문을 샤이록 홈즈가 푼다는 사람들의 뒷통수를 친 취향의 영화[말셀 뒤샹사건](Marcel Duchamp Case,……on Sundays ART VIDEO LIBRARY #1)에서는 실제의 뒤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30년간에 우리들은 그의 사람됨을 좀더 많이 알게 되였다. 한편 작품에 관해서는, 이미 정평이 나있는 카다로그인 “알트우르 슈발쯔”의(Complete Works of Marcel Duchamp, Abrahams, New York,1969 초판)이 전면개정되어 1997년에 제3판이 출판되고 있다(Delano Greenidge Editions, New York) 여기에서도 수록작품수가 초판의 411점에서 663점으로 50%나 증가하고 있고, 코렉트/연구서에 의한 뒤샹탐색의 열의를 짐작케한다. 뒤샹론.작품론으로서는, 1959년의 뒤샹에 대한 최초의 모노그라브(Sut Mrcel Duchamp, Trianon, Paris,1959)를 발표한 로벨.루벨이, 역시 그의 정정개정판으로 볼수 있는 책(Robert Lebel, Marcel Duchamp, Pierre Delfond, Paris)을 1985년에 간행하고 있다. 기타, 뒤샹의 평전인 Alice Coldfarb Marquis, Marcel Duchamp:Eros, cest la vie ( The Whitston Publishing Comapany, New York,1981년), 탁월한 착안과 정치한 논리로 뒤샹을 분석한 쟝.후란소와.리오탈(Jean. Francois Lyotard, Transformateus Duchamp, Ed.Galilee, Paris,1977), 철학적 사색을 천착하는 디에리.드.듀-브(Thierry de Duve, Nomialisme pictural: Marcel Duchamp, la peinture et la modornite,Ed.de Minuit,1984;Au nom de lart : pour une archeologie de la modernite,Ed. De Minuit, 1989; Resonances du readymade :Duchamp emtreavan-gardeet tradition, Ed. Jacquline Chambon, 1989), 사진과 4차원과의 관계를 명석하게 논한 쟝. 그렐(Jean Clair, Marcel Duchamp on le grand fictive, Ed. Galilee.1975; Duchamp et la Photographi, Le Chene, Paris,1977), 작품과 메모의 정밀한 독해를 통하여 동시대의 과학-예술사상과의 관련을 해명하는 린다. 그루린블.헨드선 (Linda Darymple Henderson, The Fourth Diemension and Non-Enclidean Geometry in Modern Art, Pricenton University Press,1983; Duchamp in context, Princeton University Press,1998) 등등 주목할만한 연구는 일일이 열거할수 없을정도로 많다. 일본에서도 이 분야의 선각자인 ‘용구수조’씨 이후, 제 1인자로 뒤샹연구를 이끌고 왔던 히가시노씨의 두권의 책,[말셀 뒤샹] (미술출판사,1977년), [말셀 뒤샹 유작론 이후](미술출판사, 1990년)에서 대표되는 훌륭한 연구들이 잡지의 특집등으로 다수 말표되어 있다. 그리고 대망의 뒤샹의 메모집의 전역판이 [말셀 뒤샹 전저작] ( 번역: Michel Sanouillet ed., Duchamp du signe, Flammarion, Paris,1995) 간행되어 일본어로 읽을 수 있게 된것도 금후의 뒤샹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본다. 초판의 말미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 대담집을 번역하게 된 것은, 당시 계획이 진행되였던 [큰유리] 동경판 제작이 그 계기가 되였다. 이 레프리카는 3년여의 작업을 거치면서 1980년 봄에 완성하여 현재 동경대학 교양학부 미술박물관에서 상설전시되고 있다. 가반느와의 대화는 그의 희대의 예술가=직인 말셀 뒤샹이 (아무것도 않함)의 극의에 대해서 스스로를 토로한 귀중한 기록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아무것도 않한 모라리스트)가 [유작]이라고 불리는 터무니 없는 작품을 통해 스스로 직인의 솜씨를 완수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대화도 그러한 [예]의 안에 자리하고 있다. 50년이나 되는 옛날에 [만든] [물건]이나 [골르기]와 레디 메이드를 통해 어느새 명성을 누리고 그 이후는 [아무것도 않암]을 통해 시대의 최첨단을 걷는 [반예술의 혁명가]로 추앙을 받데 된다는 바야흐로 금세기 미술을 특징짖는 최고의 신화적 존재가 되면서도 여전히 [만드는 것] 즉 [예술]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는 뒤샹의 묘한 책략-[그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은 그의 시간을 사용하는 법에 있다]라고 앙리 피엘 로제의 말을 깊이 새겨볼 일이다. 뒤샹이 이 대화를 끝내고 2년후 세상을 떠난후 30년이 자났지만 그는 아직도 20세기 예술에 있어 최대의 거장일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자신 혹은 그의 작품 역시 항상 허상이기 때문에가 아닐까. 그의 뒷북을 치는듯한 아이로니와 이에대한 일관한 성실, 여기에서, 우리들은 [반예술=예술이 아니기에는 불가능함]의 모순을 체현한 실로 놀라운 일생을 보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 [이건 뒤샹이 아니다라고 말해 본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뒤샹이다] -죤 케이지
24 no image 느티나무와 민들레
2737 2007-06-05
느티나무와 민들레 최두석 간혹 부러 찾는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아래 민들레 꽃씨가 앙증맞게 낙하산을 펼치고 바람 타고 나는 걸 보며 나는 얼마나 느티나무를 열망하고 민들레에 소흘하였나 생각한다 꿀벌의 겨울잠 깨우던 꽃이 연둣빛 느티나무 잎새 아래 어느 새 꽃씨로 변해 날으는 민들레의 일생을 조망하며 사람이 사는 데 과연 크고 우람한 일은 무엇이며 작고 가벼운 일은 무엇인가 찾아본다 느티나무 그늘이 짙어지기 전에 재빨리 꽃 피우고 떠나는 민들레 꽃씨의 비상과 민들레 꽃 필 때 짙은 그늘 드리우지 않는 느티나무를 보며 가벼운 미소가 무거운 고뇌와 함께 어울려 사는 모습 떠올린다 시집 ‘꽃에게 길을 묻는다’ 중에서 한 그루 느티나무로부터 더위에 지친 나그네는 그늘만 보고, 장롱 재목 고르는 목수는 등치만 보고, 조경업자는 수형만 볼 것이요, 날마다 기둥을 오르내리는 개미는 평생 한 눈에 느티나무를 담을 수 없겠지요만 어떤 시인의 안목 앞에서는 느티나무의 원경과 민들레의 근경이 한꺼번에 잡히기도 하는군요. 어지간히 꽃구경, 나무구경 좋아하는 저도 수없이 바라본 느티나무요 민들레건만 저 이야길 들으며 새삼 무릎을 칩니다. 느티나무도 제 발 밑 꽃잎 상할까봐 새 옷을 더디 입는구나. 저 시인이 느티나무로부터 ‘크고 우람한 일’을 배우고, ‘민들레’로부터 ‘작고 가벼운 일’을 배울 동안 나는 그저 나비처럼 향과 색에 취했을 뿐이로구나. 이제 느티나무 곁을 지날 때마다 자꾸만 그 발 밑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반철환 시인. <펴온이의 변: 자연은 같은 근원을 두고 뻗어 나온 諸相이요 서로 진화란 법칙에 의존하며 연속적 부정형의 공간속에서도 생명의 존귀함을 일께워주는 낱의 가치와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함께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個가 多속에서 그 생명을 조화롭게 이어저가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감정과 이성의 각을 세우는 인간세계의 ‘矛循’ 과 ‘葛騰’에서는 이 자연이 보여주는 힘과 균형의 비밀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우연한 것 같이 보이는 것이 실은 우연이 아니란 사실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아름다움의 비밀을 자연속에서만 찾아 낼 수 있습니다. 느티나무와 민들레의 공생방식은 서로가 같은 뿌리의 존재들이란 걸 헤아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으며, 하나만 보고 둘을 못보는 愚뿐만 아니라 하나만 보고 다른걸 지워버리는 惡을 예사로 저질어되는 인간사를 되돌아 보게 합니다. 조규현>
23 no image 근심의 별에게
2707 2007-06-05
근심의 별에게 김은자 근심하지 말라 이렇게 께어 있으니 근심으로 잘들 수 없으니 나뭇잎들이 그 이름 없는 것들조차 묻은 자리에서 떨어져 바람 안에 안길 때까지는 반짝이는 일만으로 세상의 구름 안에 반짝이므로, 나의 이마 위에 언제나 더운 피 한 방울 아침에 새로 돋는 이슬 안에 너의 꿈이 편안하기까지는, 나의 별이여 나는 근심할지라도 너는 말라 너의 빛 너의 사랑 흐려지므로 -사집 ‘떠도는 숨결’중에서 그러고 보니 새하얀 목련이 사흘뒤 저 아래 진흙 위로 떨어질 것이 두려워 함박웃음을 잃은 적이 있던가. 낙화암 진달래들은 매년 강물 위로 몸을 던져도 올봄 또다시 연분홍 단장을 하지 않던가. 입시생은 시험 걱정, 주부는 살림걱정, 가장은 벌이 걱정, 노처녀 노총각은 시집 장가 걱정, 지나가는 사람 백을 잡고 물으면 내겐 근심 걱정 없다며 꽃처럼 환하게 대답할 이 몇이나 될까. 걱정이 있으니 대비도 있고, 걱정이 있으니 성취도 있는 게 사실이지만, 우리는 아직 닥치지 않은 걱정에 현재를 소모하거나 필요 없는 걱정까지 쌓아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미국 성 마리아 대학의 학교장인 수녀 캐렬 가코스키는 ‘죽기 전에 들려주고 싶은 마지막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라.’ 우리는 모두 맨몸으로 왔으니 온세상이 통쩨로 선물이 아닌가. 선물도 마냥 지고 다니면 짐이 된다. 그때 그때 풀어보고 행복해 하자. 반 철 환 시인 <펴온이의 변: 이번주말 토요일의 ‘이 아침에 만나는 시’에는, 근심과 행복의 對位法을 가지고 엮은 김은자 시인의 ‘근심의 별에게’ 가 올려젔다. 詩語는 농축되어 반짝이는 아침 이슬 방울과 같고 이를 해설하는 반철환 시인의 평은 우물위를 스쳐 지나가는 뜬 구름과 같이 툭 터인 세계에 시원한 느낌을 안겨준다. 세상의 근심이란 따지고 보면 사물을 굴절된 체로 보는 데서 유원한다. 인간관계건 자신의 내면세계를 추스리는 데 그 맥을 정확히 보지 못하는데서 오는 심리적 불안이 바로 ‘근심’의 正犯이다. 사물을 정확히 보지 못함은 자기에게 지나치게 집착해 있기 때문이다.자기에게 지나치게 집착함은 자기를 제대로 보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나는 불교의 정견 평정 비움의 화두를 다시 떠올린다. 자신을 어디까지 비우게 되면 자연의 진정한 모습이 스스로 자기에게 와닿는다. 사물의 헥심이 술술 풀려 나온다. 비운다는 것은 ‘버린다’는 것이며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또한 헛것들을 벗겨낸다는 것이다. 有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우주만물의 섭리에 동화해감으로서 마음을 편히 가진다는 것이다. 正見이야 말로 근심을 없세는 확실한 방편이다. 바로세로나에 몰리는 그 많은 관광객들이 안토니 가우디의 성속재성당(SAGRADA FAMILIA)을 보기위해 긴 줄을 서고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그가 그 성당을 조성해가면서 남겨 놓은 말을 머리에 떠 올렸다. “모든 것은 자연에 의해 쓰여진 위대한 책속에서 배운다. 인간이 만드는 작품은 모두 이 위대한 책속에 이미 쓰여저 있다.” 우리는 옳바로 보기만 하드래도 어떤 미망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창조의 秘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는 건축물이 하느님과 사랑의 세계에 각을 세우고 군림하는 모양으로 세워저 있는 것에 대해서 이를 거부한다. 그는 조형의 내면적인 법칙을 자연과 하느님의 은총에 대응해가면서 여태 누구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VISION이 투영된 건축물들을 만들어 냈다. 그의 조형애 대한 이러한 태도는 그 뒤의 위대한 스페인의 천재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현대건축의 하나의 지표가 되게 했다. 근심에서 부터의 해방을 노래할 것이 아니라, 한 발을 더 나가서, 창조의 비의를 발견하는 노래도 있을법 하다. 조 규현 >
22 no image 유연복판화전-딛고 선 땅 해설을 읽고
2722 2007-06-05
유연복판화전-딛고 선 땅 해설을 읽고 조회수 27 등록일 2004/4/27 (13:14) 유연복 판화전- 딛고 선 땅 ‘임천고치의 문화생태학적 실천’을 읽고 소나무 갤러리 게시판에 실린 위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미술감상을 새로 배우고 있는 사람으로서 위의 글은 난해한데도 없고 그러면서도 목판화예술의 깊이 있는 해설로서 대단한 설덕력을 가지고 와 닿습니다. 특히 ‘딛고 선 땅’으로 잡은 우리 주변의 가장 가까운 문화향토적 세계를 테마로 한 작품이기에 표현하는 새로운 양식으로 우리의 생활공간을 다시 보게 하는 힘을 느끼게 합나디. 현대한국미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시급한 과제는 ‘우리의 삶을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인식케 하는데 있음으로 대단히 합당한 미학논리로 여기에 초점을 맞춘 예술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목판화가 가지고 있는 특색은 대단히 민주적인 요소가 있는데 관념과 요설을 허용하지 않고 누구나가 공감 공유할수 있는 정서와 감각적인 수용이 가능한 양식으로 그려면서도 더 견고한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목판화가 가지고 있는 함축성과 그 가능성 그리고 당위성의 새로운 발견을 일께워준 임천고치씨의 해설에 찬사를 보냅니다. 유연복씨의 민중적 삶이 베여든 민족적형식의 창출은 21세기의 한국의 문화창달의 한 지표가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판화의 물질적인 매체적성격과 그것이 밖으로 보낼수 있는 멧세지의 합목적성은 전자매체와 이를 통하여 대량생산되어 무작위로 우리의 영상문화를 오도 할 수 있는 파국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낼수 있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소나무 갤러리의 게시판을 통하여 앞으로도 좋은 글들을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21 no image 석류와 오베리스크
3594 2007-06-05
석류와 오베리스크 몇장의 해묵은 사진이 놓여 있는 서가에 이번 여행선에서 들고 온 한 개의 석류가 놓여 있다. 이 석류는 스페인을 주마등 훑키식으로 이틀동안 보고 터-키에 온 다음날 이스탄불의 헥인 술탄 메호멧 사원앞의 불루 모스코광장 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조금만한 구멍가게에서 미화 일불을 주고 구입한것이다. 처음에는 점심을 먹은 후의 후식으로 먹음직해 보여서 흥정도 안하고 신이 나서 산것인데 막상 손에 넣고 보니 적당히 광택을 품고 있는 붉은 색갈과 모양새에 매료되어 먹기를 중단하고 관상용으로 들고 다니다 결국 수만리 떨어진 이곳까지 자리를 옮겨 와서 나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이 석류를 산 구멍가게는 바로 불루 모스코로 가는 광장을 끼고 있는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 광장에 바로 이집트에서 전리품으로 뽑아온 거대한 오베리스크가 한대 설치되어 있었다. 이 낮익은 거석의 기념비는 실물로는 두번쩨 보는 것인데 하나는 나폴레온 전쟁때 불란스가 한대 약탈해 가서 파리의 콩코드광장에 세워 놓았던 것으로 십수년전 파리를 여행할 때 보았었고 이번이 두번쩨 것이다. 파리의 것에 비하여 키가 월등히 작아보였다. 안내자의 설명에 의하면 운송하는 과정에서 기단을 일부 절단을 하였다고 한다. 내가 놀랬던 것은 오베리스크가 단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아니 터-키도 이 거석을 찬탈해 왔다니……..놀랍고 신기해서 안내원에게 그 경위를 상세히 묻기도 하고 돌 기단 주변을 삺이기도 했다. 이 거대한 대리석 한 개로부터 따듬어진 오베리스크의 표면에는 고도로 발달된 이집트의 신성문자와 護符 상형도형등으로 신에 대한 제례의식과 왕의 공적에 대한 서사가 기록 되어 있다. 나중에 알게 되는데, 이집트의 오베리스크는 카이로에서 비행기로 상 나일쪽으로 한시간 거리에 있는 룩솔에서 다시 도보로 40분(3km) 을 이동하여 만나는 [칼르낙]의 광대한 유적지에 집중되여 있는 아멘 大神殿에 그 대부분이 설치되어 있던 것들이다. 신전 복원도에 의하면 칼르낙 신전에만 대소 수십개의 오베리스크가 세워저 있다. 오베리스크는 왕의 독점으로 사용된 단순한 ‘전승비’가 아니고, 이집트문명의 역사만큼 오래된 이집트 고대종교의 원류인 ‘모든 눈에 보이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것의 시작이며 끝이 인’ 우주생성관에서 비롯되는 “유일절대신”에 대한 칭송과 외경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오베리스크의 하단에 왕들의 전쟁승리와 치적들이 기록되어 있는건 왕의 권력과시가 신앙적인 모뉴멘트에 얹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피라미드의 造形根據와 비슷하다. 종교와 절대권력의 과시가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고도의 정신성과 도덕율의 발원체인 신화와 왕들의 절대권력이 중첩됨으로서 한 문명의 질서와 존속이 약속되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생에 대한 단순한 미련을 가지고 신앙을 영위한 것이 아니라 우주속의 만물에 대한 매우 복잡하고 합당한 신앙체계를 발전시켜왔다. 이러한 류의 우주창조설은 거이 세계적으로 공통되는 모양을 하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단순히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써의 종교’ 일것이다라는 선입견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이들이 발전시켜온 천지창조의 신화는, 세계의 열림과 탄생의 모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시작과 끝’으로서 파악된 唯一絶對神이란 관념, 이 관념의 顯現으로서 ‘라 -神’ 이 최초로 탄생하고 ,라신의 ‘말’ 에 의하여 자신의 분신이며 우주의 성령인 ‘아-멘 Amen’ 에게 처음으로 던진 말씀(말씀인 동시에 천지창조의 원동력)에 의해 공기. 대지. 움직임. 불. 그리고 天空 과 大地가 서로 분리되면서 케이오스에서 질서가 생겼고 변식과 생명의 종자와 나무 이것들을 성장시켜주는 물들을 관장하는 ‘오시리스’와, 풍족과 사랑을 현현한 ‘이시스’신의 등장등으로 이어진다. 이집트의 고대종교는 오시리스의 신화를 통하여 열려있다. 사랑의 현현인 이시스女神은 이집트인으로부터 가장 사람받고 있으며 고대세계가 처음으로 만나는 정열과 인간미 넘치는 사랑을 상징하는 신이이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아멘’의 語源이 이집트의 이 Amen 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집트의 거석문화속의 오베리스크의 첫번쩨것은, 현재까지 알려진것으로는 ‘헤리오포리스’에 있는 세스토리스3世 의 것으로 B.C. 1970년경(약 4천년전) 높이 245m 무개 121톤의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피라밋와 함께 1000년 이상 거석조형물의 대표적인 것으로 축조되어 왔다. 자료에 의하면 1586년에는 로마의 산 삐에도로廣場에도 한주가 옮겨지고 있다. 오베리스크의 형태상의 의미는 ‘카-신이 하늘로 향하여 뻐치고 있는 팔’을 나타내고 있으며 피라미드가 [천지만물의 일체를 향해 내려붇는 태양광선]을 상징하고, 오베리스크는 반대로 [永遠]과 일체가 되기 위해서 하늘로 뻐친 만물의 [팔]을 상징하고 있다. 오베리스크의 첨탑의 모양은 피라미드의 그것과 대응하고 있으며 천공(하늘)과 땅(대지), 죽음과 부활, 태양의 빛과 대지의 어두움, 그 사이에 탄생하여 제 몫을 지키고 있는 무수한 신들의 역할과 위광등 매우 과학적인 천문학을 바탕으로 한 고도의 도덕율과 정신성을 함축하고 있는것이다. 이집트의 고대종교와 관련된 조형물의 경이로움은 이후 여러 곳에서 탄생한 세계종교에 깊은 영향을 주고 조형예술의 원점역활을 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집트가 망한 후에도 이집트의 이 놀라운 정신성과 조형능력이 그 신화와 함께 그리스나 로마 그리고 소아시아등으로 계승되어 가서 새로운 문명의 정신적인 싻을 잉태케 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 문명과 문화의 傳承이 인류공통의 역사속에 편입되는 진정한 그들이 믿었던 ‘부활’의 한 과정이 였기 때문이다. 여행은 사람을 무한한 상상력과 환상속으로 이끌어 가는 磁力과 같은 힘을 발휘하는데, 이집트에서는 오브리스크에 이어 왕가의 계곡. 가자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박물관에서 본 그 무수한 유물들이 그 역할을 대신 해 준다. 이러한 자유분방한 Fantasy속에서는 불교나 힌두교나 이스람교나 희랍정교나 그리스트교와 같은 세계종교가 서로 다투워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한 인간속에 자연스렵게 통합되어 수용되는 매우 즉물적인 체험도 하게 한다. 그것들도 이 거대한 우주의 관념의본질에서 파생한 한 가지이며 형제들이기에. 하나의 석류가 오직 그 다소곳이 아름다운 색갈과 모양으로서만 우리들에게 하나의 우주로 와 닿는것과 같이 그기에는 국경이나 이데오로기등에 의한 파편화된 경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여행하면 애국자가 된다는 통설을 뒤집고 보헤미안적인 감상에 젖었던 건 아닐까. 아니 좀 더 순화된 자기 정체성을 새로히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서는 자신이 잠시 ‘한국인’ 이란걸 잊고 있었던 것이 그리 큰 험이 되지않을꺼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의식은 나와 타자 사에에 선을 끗는 것이라기 보담, 새로운 세계인식에서 비롯되는 각성에서 잡아내는 자기 실존에 대한 확신일 것이다. 바로 온 몸으로 와 닿는 이 확신이야 말로 진정한 자기긍지로 이어지게 하며 정체성은 자신의 내부를 향해 있는 고양된 이러한 순수한 감정이며 믿음이 그 실체일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눈에 보이게끔 나타난 이미지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속에 실재하고 있는 것이다. 여행은 그 체험의 넓이와 깊이에 따라 우리를 자리매김해주는 행위예술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이후에 끝임 없이 이어저가는 싱싱한 이미지로 살아남는 그 무엇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이 우리들에게 던지고 있는 ‘임팩트’와 같이, 이집트의 오베리스크도 이후 나에게는 이집트의 역사와 문명의 코드를 열어주는 ‘오브제’ 이며 동시에 ‘키 워드’가 되고 있다. -여행 단상- 조규현
20 no image 이슬방울
2800 2007-06-05
이슬방울 이태수 풀잎에 맺혀 글썽이는 이슬방울 위에 뛰어내리는 햇살 위에 포개어지는 새소리, 위에 아득한 허공. 그 아래 구겨지는 구름 몇 조각 아래 몸을 비트는 소나무들 아래 무덤덤 앉아 있는 바위, 아래 자꾸만 작아지는 나. 허공에 떠도는 구름과 소나무 가지에 매달리는 새소리, 햇살이 곤두박질하는 바위 위 풀잎에 내가 글썽이며 맺혀 있는 이슬방울. <맺혀있기에 글썽이는 사라지기에 아름다운……..> 이슬이 아름다운 것은 맺혀 있기 때문이다. 아주 완벽한 형태를 스스로 만들고 있으면서도 이슬은,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불안전한 상태에 있다. 그래서 새벽빛을 머금고 있는 이슬은 종교적인 성스러움과 생의 덧없음이라는 상징성을 동시에 부여받는다. 이태수의 ‘이슬방울’에서 ‘이슬방울’은 자연의 사물들이 상호 조응하는 세계 안에서 글썽이며 맺혀 있다. ‘이슬방울-햇살-새소리-허공’의 사물들이 ‘상승’의 체게를 이루고 있다면, ‘구름 몇 조각-소나무들-바위-나’는 ‘하강의 질서를 만든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사물의 수직적인 연계는 마지막 연에서 다시, ‘허공-구름’, ‘소나무-새소리’, ‘햇살-바위’, ‘나-이슬방울’의 수평적인 접속으로 완성된다. 이 시의 마지막 행, “내가 글썽이며 맺혀 있는 이슬방울”에서의 ‘나’와 ‘이슬방울’의 완벽한 결합을 보자. 이 순간에 ‘이슬’은 더 이상 이 시의 대상이 아니라, 진정한 주제로 전환된다. 그러나 그 ‘이슬’은 모든 이슬의 운명이 그러한것처럼, 대낮의 햇살 아래서 사라질 것이다. 이슬을 반짝이는 존재로 만든 햇살이 역설적으로 이슬의 소멸을 재촉할 테니까. 문학평론가.서울예대 교수 이광호 <펴온이의 변: 같은 날 양대신문에 실린 두편의 시가 하나는 자연속의 인간의 코믹와 페이소스를 그린것이라면, ‘이슬방울’은 자연을 곧바로 대상화한 철학이 엿보이는 추상화 같은 시다. 안도니 가우디는 [創造는 인간을 통하여 끊임 없이 발현한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하지 않는다. 發見할뿐. 새로운 작품의 버틸목으로서, 자연의 여러법칙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창조와 더불어 제작한다. 모방하는 사람들은 창조주와 더불어 제작하지 않는다. 고로 獨創이란 起源으로 듸돌아가는 것이다.]라고 말 한일이 있는데, 그는 그의 독창적인 건축물을 조형해가면서 끊임없이 이 자연이 갖고 있는 코드를 읽어갔던 사람이고 해독해 가면서 그의 새로운 조형세계를 일꾸웠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기서 자연의 시원이란 하나의 우주적 진리와 만난다. 이광호교수의 시평에는 시어의 구조적 내면적 함축을 정확히 풀어가고 있지만 어떤 대목에서는 이 창조와 제작의 경계를 제대로 짚지 못한 그래서 말의 요설적인 측면에서 멈추워 버린 아쉬움이 엿보인다. 자연은 그 나타남이 그 시원과 완벽하게 합일하는 방식으로 살아 있는 우주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 현상에 치우치면 饒舌이 되기 쉽다. ‘자연만물들의 상생적인 관계’라고 표현하고 있는 대목도 실언 자연의 내재적 인과관계보담 자연을 대상화한 인간사의 대입인식에서 나온 말이며, 자연속에는 ‘상생’이란 관계가 부재한 곳이다. 일종의 파래디화한 표현이다. 시가 관념화하고 형이상학적이 되면 자칫 해석이 산으로 올라갈 가능성과 위험은 항상 남게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규현>
19 no image 봄날 오후
2762 2007-06-05
봄날 오후 김선우 늙은네들만 모여 앉은 오후 세 시의 탑골공원 공중변소에 들어서다 클클, 연지를 새악시처럼 바르고 있는 할마시 둘 조각난 거울에 얼굴을 서로 들이밀며 클클, 머리를 매만져주며 그 영감탱이 꼬리를 치잖여-징그러바서, 높은 음표로 경쾌하게 날아가는 징.그.러.바.서, 거죽이 해진 분첩을 열어 코티분을 꼭꼭 찍어바른다 봄날 오후 세 시 탑골공원이 꽃잎을 찍어놓는 젖유리창에 어룽어룽, 젊은 나도 백여시처럼 클클 웃는다 엉덩이를 까고 앉아 문밖에서 도란거리는 소리 오래도록 듣는다 바람난 어여뿐, 엄마가 보고 싶다 -시집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중에서- ‘징그러바서’라며, 조각난 거울에 머리 부딪치며 분칠은 왜 고친다냐, 이 봄날 꼬리치는 영감탱이 하나 없다면? 그보다 올 너머 노인네들 춘정을 혼자 듣고 혼자 웃으면 그만일 걸 굳이 서로 써서 동네방네 풍기는 심보는 무엇? 게다가 ‘바람난 어여뿐, 엄마’가 보고 싶다니, 김선우 시인, 내 조선 유림(儒林)들께 이를 테다. 이를테다, 하면서도 여태 못 이른 것은 때로 이 시를 들취보며 클클클 웃는 재미가 가별하기 때문이다. ‘봄날 오후’가 참으로 여실한다. 늙은 벚나무라 꽃피지 않는 봄날 있던가? 모든 봄나무는 죽기 전까지 꽃핀다. 잠자코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하는 혀’가 발칙하지만 늙은이를 꽃나무로 본 저 백여시가 어여뿌다. 꽃뿐이랴, 봄날 오후엔 바위도 불끈하다 절벽을 구르는 걸 본 적 있다. 반 철 환 봄의 향연 [여수 영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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