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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no image 김지하의 ‘한국’과 새 ‘문명론’
2056 2007-06-05
김지하의 ‘한국’과 새 ‘문명론’ 생명학에 뿌리 둔 신문화운동 펼치는 시인 김지하는 7월 16일 조선일보 특별기획 인터뷰기사(기자 김광일) 에서 문명과 한국과 관련 아래와 같은 대담기사를 남기고 있다. (대담 기사 일부) - 한국은 무엇을 걱정해야합니까? - “새로운 문명에 대한 견해를 세우지 못하면 우리나라 통일 못합니다. 문명론을 세우고 사는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됩니다. 남북이 동북아 허브, 특구 설정 같은 경제적 비전을 공유하면서 큰 예기를 밀고 나가야 작은 얘기도 해결됩니다. 동북아의 허브는 物流 중심국이 아니라 문료(文流) 중심국으로 가야합니다. 한국은 이제 문명의 중심, 문명의 교차로 노릇을 해야한다고 봅니다.” - 우리에게 잠재된 문화의 힘을 실감하고 계신다고 했지요? - “월드컵 때 광화문 거리를 가득 매운 붉은 악마들을 보십시오. 붉은 악마들은 집단적 예언자 노릇을 했습니다. 따다다 따따, 라고 하는 그들의 엇박자에는 혼돈의 수인 세박자와 질서의 수인 두박자가 어울려 있습니다. 이들이 상징으로 삼은 치우 천황의 비전을 현대에 재현하면, 유목과 농경을 한 곳에 모아 놓은 셈입니다.” ‘생명과 평화의 길’ 내달 창립 사단 법인 ‘생명과 평화의 길’ 구상은 지난 2월 김지하 시인이 부산에서 강연을 하다가 처음 꺼냈다. 국내에 여러 가지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생명 운동들과 연대하면서 좀더 조직화된 단체를 세우자는 취지였다. 김 시인은 문규현 신부의 ‘미증물’, 실상사 에 있는 도법 수경 스님의 ‘생명 평화 탁발순례단’, 이병철씨의 귀농운동, 이시재교수의 새만금생명학회 같은 예를 들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시인의 제안이 있은 후 봄철 내내 박재일, 강대인, 지민자, 정성헌, 김정헌 같은 이들이 의논을 진행시켰고, 여러 차레에 걸친 실무모임과 준비모임이 있었다. 고영조, 권오국, 김봉준, 김성종, 김영진, 박재천, 심현정, 윤형근, 이청산, 임진택, 정호, 주요섭, 최정명, 황선진 같은 이들이 참여의 폭을 확대해갔다. 이들은 지난 4월 21일 13인으로 구성된 준비위원회를 구성했고, ‘우리말 살리기’ 등 농민운동에 헌신해온 정성헌(한국DMZ 평화생명마을 추진위 공동대표)씨를 창립준비워원장으로 선임했다. 김지하 시인은 작년 12월 ‘세계생명문화포럼’을 앞서서 주도한 바 있으며, 올해는 사단법인 ‘생명과 평화의 길’이 주최가 되서 가을에 국내 생명 평화 포럼을, 내년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동아시아 포럼을, 그리고 후년인 2006년에는 다시 세계 생명 평화 포럼을 열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정성헌 위원장은 14일 이 단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1) 생명학의 정립 (2) 생명학에 토대를 둔 새로운 문화운동의 전개 (3) ‘2014 의제’ 설정 세 가지로 꼽았다. 김광일 기자
65 no image 책읽기(2)
2047 2007-06-05
책읽기(2) [예술가로 산다는 것]과 [식물성의 사유] -박영택의 두권의 책 교보에서 미술평론가 박영택의 “예술가로 산다는 것”과 막닥뜨린지도 반년까가이 된다. 서점에 들릴때마다 이따금 열람하는 기분으로 이 책을 찾아 내어 서서 읽어갔었는데 이 책이 나의 눈에 띈 것은 책의 제목과 더불어 저자의 이름이 작년 9월에 슈-뤂의 전시회 참관여부를 둘려사고 논란이 되었던 경기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박영택교수와 동인임을 알았기 때문이였다. 허나 책을 읽으 가는 도중에 나는 있었던 헤프닝의 선입견에서 벗어나면서 이 책의 내용에 매료되어 나의 立讀리스트에 올려 놓고 조금씩 읽으가는 재미를 이어왔었다. 프로필에 나와 있는 작가의 사진은 돗배기 안경을 쓰고 손으로 턱을 고인 폼이 현 대학의 강단에 서는 대학교수의 이미지보담 2-30년대의 문학가의 인상을 풍기고 있다. 그의 작가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사진이다. 나는 교보에서 입독리슽트에 올려 놓고 자기에게 품파는 식으로 보는 책들이 수 없이 많은데 일본서적코너에서 500페이지가 넘는 [타이타이닠]란 책을 도서관 다니는 셈 잡고 집중적으로 서서 완독한 일도 있고 지금도 이 코너에서 재미 보고 있는 책들이 께 있다. 월간지는 내가 흥미있는 기사를 발견하면 눈치 보지 않고 버티고 서서 계산대 옆에서 읽는 페퍼토리의 하나다. 입독을 계획적으로 하게된 이유중에 하나는 나이 문제도 있고 기 소장하고 있는 책을 처리해야 할 형편이리 가급적이면 책을 구입하지 않기로 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그렇게 억제하는데도 한달에 책구입에 들어가는 돈이 수월찮다. 박영택교수의 [예술가로 산다는 것]도 읽어가면서 차츰 이 책이 뒤 늦게 미술감상학습에 들어간 나에게 앙성맞춤의 교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의 작가와 예술을 함께 잡아내는 문체의 탄력성과 실재에 정확하게 와 닿고 있는 깊이가 심상치 않는 수준에 와 있기 때문에 이에 매료된 탓일것이다. 그가 선정한 작가들 대부분이 우리사회의 어긋남에서 밀려난 일종의 Outsider들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서 결국에 가서는 이 책을 완독하게 됬다. 이런 맛보기식 독서를 죄없는 盜讀이라야 해야 할지 잘 분간은 가지않으나 몇 달을 걸처서 모두 읽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 책이 갖고 있는 무개가 심상치 않음을 말해 주고 잇다. 한참 시간이 흘려 지난후에는 앞에 읽었던 내용들을 까먹는 수가 생기기도 하고 메모장을 가지고 다니지 않을때도 있고 보니 집중력이 께 필요로 하는 품이기도 했다. 그 열명의 작가중에서 나의 의식을 강타한 작가가 바로 작업실도 없고 전업작가도 아닌 船員으로서 떠돌아 다니는 ‘청도’란 화가였다. 박교수는 이분의 그림전시회를 두번이나 주선했지만 그냥 ‘청도’라고 부르고 있을 뿐 제대로 된 이름도 모르고 지냈다고 한다. 이 ‘청도’란 작가의 [파도 (1992,캔버스.유채,60x50)] 란 작품을 보았을 때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어떤 충격을 받았었는데 한밤의 망망 대해에서 요동치는 파도가 넘실거리는 광경이 너무나 실감있게 그려저 있어 박영택교수가 해설해 놓은 글과 함께 오래토록 나의 의식에서 떠나지 않했다. “사실 그의 그림은 무엇보다 그 자신의 절절한 체험에서 우려나온 것이란 점에서 그 감동 이 증폭되고 있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후에 관찰된 그 바다와 폭풍은 그런 의미에서 관조적인 품경과는 거리가 멀다. 풀론 작가는 그 자신의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공포를 거대한 자연의 힘과 위용 속으로 밀어 넣고 있긴 하지만 밤바다의 파도와 구름, 폭풍은 너무도 생생한 심리와 영혼의 격렬한 반향이 짙게 베어 있다. 몇가지 순색과 급박하게 덪칠되고 빠르게 마무리된 그의 바다와 파도 그림은 사투를 벌이면서 자신의 온 몸으로 생생하게 부딪친 육화된 바다 그림이다.” (예술가로 산다는 것. P.77) 나는 요 몆칠전 교보에 들렸을 때 그가 내 놓은 또 다른 책 [식물성의 사유]와 함께 오랫동안 책방서가에 두고 찔금 찔금 보던 [예술가로 산다는 것]을 함께 구입하였다. 이 두권의 책은 우리 주변의 진지한 작가들의 생생한 작품세계와 예술혼을 수시로 이께워준다는 의미에서 나의 所藏리스트에 편입되었고 이제 나의 방에서 필요 할때마다 라이브뮤-직역활을 톡톡히 해 내리라 생각한다.
64 no image 시집 ‘농부’ 펴낸 최창균씨
2448 2007-06-05
시집 ‘농부’ 펴낸 최창균씨 요즘 신문 사회 정치면기사를 보기가 보통 고통스렵지 않다 못해 스글퍼지기 일수다. 아에 제목만 훑고 건너뛰어 버린다. 목적과 수단이 도착되고 진정한 사회합의의 틀이 붕괴되어 버린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진실과 이를 담보하는 용기가 없는 사회가 제대로 굴려갈 리가 없다. 우리는 언제까지 시간과 기회를 까먹고 지날것인가. 그래도 습관적으로 신문기사를 보게 마련이다. 어찌 할 수 없는 통과의례의 통을 치루는 것과 같다. 오늘 아침의 조선일보 문화란에는 등단 16년만에 첫시집낸 ‘농부’ 최창균씨의 ‘초록 농사 지어 젖소먹이고 풀빛 詩밭 일귀 햇살키우고’ 라는 신선한 기사를 읽으면서 비로서 답답한 가슴을 스려내릴수 있었다. 그의 시의 단편을 읽으 보면 바로 삶의 노동의 현장속에 완전히 동화하면서도 대단히 높은 관조의 세계를 보지 않으면 나올수 없는 울림을 잡아내고 있음을 느낄수 있다. 시어들은 진솔하면서 진하게 와 닿으며 공감을 불려 일으킬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개구리 울음소리에다/ 나는 발을 빠뜨렸다/ 어느 봄밤/ 물꼬 보려 논둑길 들어서자….// 나는 그 논배미에서/ 벌써 걸어나와 집에 누웠는데도/ 개구리 울음소리는 줄기차게 따라와/ 내게 빠져 운다/ 내 삶의 못에 빠져 운다.’(개구리 울음소리’ 부분) - 주:논배미=논의 한구역 ‘한 나무가 한 나무에 기대어 있다// 누군가에 기대어/ 한 생이 고요해지는 순간.// 거기 검은 촛불을 켜놓고/ 땅으로 걸어 내려오는 저 향기.’ (‘죽은 나무’전문) 그는 “인간에게는 자연이 최고의 책”리라고 말했다. “제가 열한 살 때 아버지로부터 선물받은 지게가 좋아서 무슨 훈장처럼 지고 다니다가 지금껏 그 지게를 벗지 못한 농부가 됐습니다. 이제 제 나이 열한 살 때처럼 詩業을 부지런히 지고 가겠습니다.” - 김광일 기자 기사에서 매일 올라오는 장영희의 영미시 산책에 나오는 시들이 흘려간 시대의 고전적인 品格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이렇게 우리들 곁에서 살아 숨쉬는 생명감을 품어내고 자연의 섭리를 디다 볼수 있는 정갈한 감수성을 담아내는 詩語에는 우리의 혼과 전신을 흔들어 놓는 아름다운 울림이 베어 있다. 아름다운 시란 음악과 같이 듣지 않으면 안된다. 그때 비로서 우리들은 시인이 도달한 유현의 합일의 경지를 맛 볼수 있다. 그는 “자연이 최고의 책”이라고 까지 말하는 경지에 까지 와 있다. 자연을 책으로 읽을 수 있는 경지란 그 오묘한 幽와 顯의 세계를 넘나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시는 그 유와 현의 경지에서 듣는 소리를 적어내는 靈媒역활을 한다고 볼수 있다. 죽은자속에 삶을 보고 산자속에 죽음을 보지 않고서는 恨魂을 불려 낼수 없다.조규현
63 no image 토인비 斷想
2288 2007-06-05
토인비 斷想 내가 아놀드 조셒 토인비 Aarnold J. Toynbee 1889-1975의 대표작인 ‘역사의 연구 A Study of History’ 를 일어판으로 구입한 것은 대학 3학년때인 1956년의 일이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인류의 역사를 문명적 관점에서 보는 시각의 넓음을 알게 되었고 토인비박사의 역사학자로서의 고결한 품격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 저술의 서문에서 역사학자가 얼마나 주관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사물을 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이것 또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란 것을 자신이 아침마다 즐겨 마시는 커-피를 예를 들면서 언급한 대목을 기억하고 있다. 커-피를 마시는 것은 개인적인 기호이며 이 개인적인 기호 습관도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후 기회가 닿는데로 토인비의 저서들을 구입하여 읽으면서 역사의식을 인류적 차원에 까지 넓혀 보게 되는 계기가 된다. 나의 토인비 탐구는 주로 일어판으로 앞의 ‘역사의 연구’외 ‘시련에 선 문명’ ‘현대가 받고 있는 도전’ ‘토인비의 종교관’ ‘토인비연구’ 등으로 이어저 갔다. 이번 ‘백두-히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등재하고 있는 ‘문명론’씨리즈의 세번쩨 토픽스로 쓰고 있는 택스트도 토인비와 이께다회장과의 세기적 대담을 엮은 [Choose Life – A Dialogue –Arnold J. Tpynbee and Daisakr Ikeda]의 일어역판이며 확실한 기억은 나지 않치만 70녀대 후반에 구입한 것이다. 문명론이란 거창한 구호를 내걸고 토인비를 피해 가지는 못한다. 나는 칼럼에 올리는 글들을 번역하면서 전적으로 책을 새로 읽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되며 눈으로 읽는 동시에 번역과 표현작법에 따르는 번거로움을 역으로 이용하여 일종의 새로운 독서법으로 여기고 있어며 동시에 ‘일일 수행’의 방편으로 삼고 있다. 하로에 가장 의식과 기분이 투명하고 정일한 시간에 번역을 하게 되면 마음이 갈아 앉으며 그속에서 아주 자연스려운 즐거움이 울어 나온다. 우리들은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어야 하며 특히 선각자들의 말씀은 자신을 새롭게 각성케하는 묘미를 느낄 수 있다. 김성배씨와 도병훈씨가 위의 대담기사중 6편의 ‘시간과 공간’ 에 관한 독후소감을 올려 놓았는데 새삼스려운 감회를 받는다는 점에서는 나도 예외가 아니다.
62 no image
2115 2007-06-05
꿈 -랭스턴 휴즈 꿈을 잡아라 꿈이 사그라지면 삶은 날개 부러져 날지 못하는 새이니. 꿈을 잡아라 꿈이 사라지면 삶은 눈으로 얼어붙은 황량한 들판이니. Dreams -Langston Hughes Hold fast to dreams. For it dreams die Life is a broken – winged bird That cannot fly. Hold fast to dreams For when dreams go Life is a barren field Frozen with snow. 꿈을 잃으면 삶의 날개도 껶여 시인은 꿈과 희망은 바로 우리의 삶에 자유를 주는 날개, 아니 생명을 주는 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시인 자신이 일생 동안 가졌던 신념이었습니다. 성공한 작가가 되기까지 흑일으로서 가난한 편모 슬하에거 교육받고 재능을 인정받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휴즈는 자서전에서 자신에게 꿈을 심어준 고등학교 영어선생 에셀 와머의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지금은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라도 바로 그것이야말로 때가 오면 사람들이 인정하게 될 아주 진실되고 아름다운 방법일 수 있다.” ‘진실되고 아름다운 방법’을 지키기 위해 운명에 대항하고 사회정의를 위해 싸웠다고 시인은 말합니다.그의 시 ‘경구’(Epiram) 는 그의 인생관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아, 먼지와 무디개의 신이여/먼지 없이는 무지개도 없다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주소서.” (Or, God of dust and rainbows, help us see / That without dust the rainbow would not be.) 나도 나의 제자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는 선생인가, 삶의 ‘진실되고 아름다운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가 자문해 본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습니다. 서강대 교수.영문학 장영희의 영미시 산책(8)에서 조선일보 7월 10일 <펴온이의 감상> 꿈은 우리들의 삶의 그늘진 고통의 반동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모호하지만 무지개와 같이 현란하다. 그러나 꿈은 사람에 따라 ‘돈’이 되기도 하고 ‘성공’이나 ‘야망의 성취’등으로 다른 색갈의 무지개를 꿈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의 꿈은 한량 없는 우주의 신비를 푸는 것일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일까요……..자신의 꿈을 지속적으로 역동케하는 힘은 어디서 부터 나올까요. 자신의 일상에서 항상 눈을 옳바르게 뜨도록 각성케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사람은 각자의 꿈이 있고 그 꿈을 역동케하는 구동력이 있게 되며 그것은 자신의 가슴속 깊이 숨겨저 있는 ‘부시’와 ‘부시돌’로 필요 할 때 ‘불’을 지피며 살아 가게 됩니다. 나는 사람이 무엇으로 움직이는가? 를 보면서 그 사람의 꿈을 헤아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꿈을 헤아리게 되면 그 사람의 인품이 나타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꿈을 갖고 있다고 해도 까가이에 가고 싶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역시 꿈은 다른 사람을 끌어 들이는 ‘여백’이 있으야 하는 가 봅니다. 칼카타의 빈민굴속에서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을 보삺히면서 편생을 살아 갔던 테레사수녀는 하느님의 계시에 따라 자신을 철저히 비운 꿈을 실천한 사람이 였습니다. 길을 걸어가다가 나는 이따금 ‘꿈’을 잃어 버린 사람을 만납니다. 꿈속에 주저 앉아 버린 사람….꿈과 현실을 분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술에 취한듯 혼자서 허공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려되면서 방향을 잃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절대적으로 無害한 그러나 자신의 진정한 꿈을 상실한 狂人을 볼 때 마다 나는 연민의 느낌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랭서턴 휴즈의 시를 읽으면서 떠 오른 단상입니다. 조규현
61 no image 토인비와의 대담(4)
2070 2007-06-05
토인비와의 대담(4) 3 宇宙에 관해서 이께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우주가 어떤 양상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古代로부터 논의됬고 많은 천문학자나 철학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한 문제이지요. 역사적으로는 멀리 기원전 3천년경의 슈메르인이 독특한 우주관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알려저 있습니다. 고대희랍의 철인들도 논리를 다하여 여러가지 宇宙像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천체의 문제가 학문으로서 말하자면 과학적으로 탐구되기 시작한 것은 루넷상스기 부터라고 말합니다. 갈리레오가 망원경을 발명한 후부터 본격적인 시대에 들어가지요. 천문학에 한하지 않고 “과학혁명”의 시대가 루넷상스를 기점으로 하여 화려하게 개화합니다. 그래서 20세기에 들어서 물리학에서 아이슈테인의 상대성이론과 그 후의 양자역학, 소립자론의 발전에 근거하여 천문학은 태양계에서 은하계를 거처 실제 전우주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 합니다. 특히 제2차대전 이후 電波망원경을 쓰기 시작함으로서 천문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1930년대, 40년대는 원자물리학의 극적인 변혁기였으며 1950년대는 생물학의 혁명적轉期의 시대 그리고 1960년대에서 70년대는 천문학의 황금시대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먼 훗날 이 시대를 뒤돌아 본다면 갈레레오가 처음으로 天空에 망원경을 쓰기 시작하고 케플라가 혹성의 움직임을 밝혀 낸 저 17세기초두와 어께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시대라고 볼것입니다. 시야가 열리면 열리는 데로 새로운 難問이 차례 차례 들어나고 있는것도 사실이지요. 특히 천문학은 직접 손을 데고 실험하고 연구하는 것이 어려운 대상인 만컴 한층 어려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우주에 관한 근본과제는 크게 나누면 2가지가 됩니다. 하나는 우주의 크기란 문제이고 또 하나는 우주의 紀元이란 문제입니다. 이 두가지는 천문학의 최대의 테마인 동시에 철학상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토인비: 오늘날 우리들은 물리적우주에 관해서, 기원전의 최후의 1천년간에 바비로니아인 희랍인이 알고 있었던 것 보담 훨씬 광대한 부분을 시야에 넣고 있습니다. 또 우리들의 관측영역내에 있는 별에 대한 조성, 온도, 운동등에 관해서도 그들보담 훨씬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허지만 우주전체의 문제를 생각한다던지 그 본질을 이해하려고 하는 단계가 되면 우리들은 先人인 바비로니아인이나 회랍인과 마찬가지로 無知하다는 걸 압니다. 물리적우주의 역사나 영역에 관해서는 우리들도 그들과 같이 한줌의 지식밖에 갖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의 全體像에 관한 우리들의 지식은 그들과 같이 단지 추측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추측에서도 역시 그들과 같이 서로 학설에 있어 차이가 있어며 결론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그런 추측의 어느것을 보드래도 증명은 없고 그것에 필요한 정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께다: 지금 박사께서 말씀하신 것은 우주에 관한 우리들의 지식의 한계를 감안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점입니다. 그런점을 고려한 뒤 우선 우주의 크기에 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여러가지 천체가 발하는 빛의 도프라효과가 발견된 이후 星雲 서로가 무서울정도의 속도로 멀어저 가고 있다는 것, 말하자면 팽창우주인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러한 星雲은 멀리 있는 것일수 록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 관측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구에서 200억광년 떨어저 있는 곳에서는 거이 광속으로 멀어저 가고 있으며 그 보다 멀리 있는 것에 관해서는 이젠 어떠한 현대적인 자연과학의 수단으로서도 인식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지구에서 반경 200억광년 이내의 우주가 우리들이 물리적으로 볼 수 있는 범위의 우주이며 그 넘으로는 우주의 지평선, 즉 “宇平線” 저 멀리 있는 것으로 감지할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기서부터 앞으로는 과학의 범위를 넘어 순순철학, 즉 인간의 사유와 상상의 문제가 됩니다. 말하자면 우주는 무한히 그저 延長的으로 펴저가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별도의 우주가 존재하는 것인가 혹은 일정한 경계 밖에는 마냥 무의 공간이 전개되고 있는 것인가 라고 하는 문제입니다. 이건 상상과 관념에 의해서만 결정할 수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은 중대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우주관이 바로 우리들의 삶의 방식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팽창우주를 설명하는데 지배적인 흐름의 하나가 되어 있는 가모프의 폭발설에 의하면 약 200억년전 우주는 거대한 원초상태에서 팽창을 하기 시작했다고 되 있습니다. 그기서부터 도출해 낸 추론은 현재 퍼저가는 우주는 아무리 크다고 하드래도 유한일 것이란 것입니다. 원초의 우주자체가 처음부터 무한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다르겠지만. 그건 아마 가능성이 엷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에 의하면 이 우주는 하나밖에 없고 그 크기는 유한이며 그 경계에서 밖앗은 그저 허무의 세계가 퍼저 있을 것이란 추량입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한층 더 큰 규모로 생각해 본다면 별도의 거대한 우주가 – 이건 복수의 가능성이 고려 됩니다만 – 존재할련지 모른다 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어떤 과학자에 의하면 팽창하고 있는 우주와는 별도로 수축하고 있는 우주도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제2의 설이 진실하다고 하면 우리들의 관측에 의해 잡힌 대우주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실은 진실의 대우주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말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우주는 무한의 넒이를 갖고 그 자체는 영구불변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토인비: 우리들이 실제로 혹은 마음속에서라도 그릴수 있는 무한의 선이란 그건 열려있는 끝을 갖고 있지않는 선 즉 원이나 타원형뿐입니다. 고대 인도인이나 전기독교시대의 회랍인은 공간과 시간의 구조, 운동을 이런 순환적인 것으로 파악 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의하면 모든 事象, 모든 實在는 주기적으로 그리고 끝없이 되푸리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물리적우주에 관한 개념은 우리들 태양계에서의 諸現像과 맞아 떨어집니다. 즉 각 혹성은 일정불변의 궤도를 그리고 태양 주변을 돌고 있어며 지구는 24시간의 주기로 자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태양계의 현재의 모습이 우주전체의 구조나 운동의 見本으로서 완전한 것이다라는 증거는 우리들에게는 없습니다. 사실 이것은 우주가 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다는 학설에 의해서 부정되고 있습니다. 또한 순환설은 不可逆的인 “변화”라던가 전적으로 “노벨리티”( 奇性)라고 하는 형상이 있다는 사실과 부합되지 않습니다. 더욱 이 “변화”나 “노벨리티”는 우리들 인간의 경험에 의한 데이터(旣知事項)입니다. 허나 그런 인간의 경험이 “실재”그 것을 옳바르게 잡아낸 것으로 믿을 수 있는가 아닌가하는 것과는 별문제입니다. 토인비: “노벨리티”란 게념은 여태 존재하지 않했던 무엇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건 논리적으로는 생각할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런 신기성이 실제로 있다는 것은, 不可逆的인 변화가 존재할 뿐 아니라 이미 인간의 경험적旣知사항이 되 있습니다. 불가역적인 변화나 순수한 신기성이 실재한다면 공간이나 시간의 구조나 운동은 圓이나 楕圓과 같은 반복하는 무한은 될 수 없게 됩니다. 그건 반드시 兩端이 있는 어떤 하나의 線과 같이 유한한 것임이 틀림 없습니다. 양단이 한정되지 않는 하나의 선은 어느 방향이던 무한히 늘쿨수 있습니다. 만일 이 선이 어느 특정한 점에서 끝난다면 선의 길이의 한계는 어디까지나 자의적일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製圖家가 어디까지나 선을 끄으도 괸찮은데 마음데로 한정하여 끊어 버리는 것과 같지요. 이께다: 과연 그렇겠군요. 분명히 현상면에서만 본다면 박사께서 말씀하신 불가역적인 변화나 전적인 신기성이라고 밖에 말할수 없는 현상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수 없습니다. 자연계는 원이나 타원으로 표현될수 있는 단순한 반복, 순환을 되푸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은 항상 새로운 요소를 만들어 내며 말하자면 창조를 하면서 유동하고 있는 것이지요. 허나 박사가 제시하고 있는 “노벨리티”란 생각에 관한 것입니다만 그것이 현상면에서 본다면 무에서 유를 만든다는 전적으로 새로운 사상의 탄생이라 하다래도 나는 또 다른 관점도 가질수 있지 않나 합니다. 그것이 불법에서 말하는 “空”의 개념이란 것은 앞서에서도 말씀드린 데로 입니다만. 다음으로는 우주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워 볼까요. 앞서의 가모프의 설에서 본바와 같이 현재의 지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우주의 출발은 200억년 정도 이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단 그 시점이 일체의 출발이라고 한정할수 없습니다. 그 이전의 말하자면 원초상태이전의 우주가 어떤 모습이 였었는가 를 거론하는 것은 학문적으로는 무가치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가정해서 200억년전이 문자 그대로 일체의 출발이라고 한다면 그 시점에서 완전한 무에서 유가 탄생한 것으로 됩니다. 만일 무에서 유가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주는 무한의 과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 200억년이전은 무한의 과거에서 역으로 수축하고 있었다고 생각할수 있을 것이며 수축과 팽창을 무한히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것입니다. 또한 반대로 유가 무로 귀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주는 무한한 미래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토인비: 인류최고의 문명이 싹턴 이래 말하자면 5,6천년 옛날부터 지구자체도 또한 지구를 그 일부로 하는 우주도 여러 번의 변화를 겪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해 오고 있습니다. 어떤 사상가들은 지구나 전우주나 그기에 포함된 만물도 각기의 원초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고 따라서 종국에 가서는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다는 것 역시 틀림없으리라 추론합니다. 또 다른 사상가들은 우주는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 서로 대립하는 두가지의 이론은 오늘날 까지도 논쟁이 그치지 않고 어느쪽이 옳은 것인가 잘못된 것인가 아직 입증되지 않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는 공간적.시간적으로 유한한 우주란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만일 공간이나 시간이 무한 하지 않다면 공간을 넘어선 밖앗 쪽에 또한 시간의 앞과 뒤에 또 다시 공간이나 시간이 있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논리적 필연성은 이미 유한이란 개념에 의해서 아프리오리(선험적)로 논외로 여겨 집니다. 때문에 유한의 공간.시간이란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공간이나 시간 그것과는 다른 存在秩序의 어떤 힘에 의해서 境界되어 지는 것이 아니면 안됩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우주를 유한한것으로 생각한다면 우주는 공간과 시간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창조되고 계획된 하나의 목표에로 방향지워진 것이다 라고 결론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힘이란 것은 바뀌 말한다면 神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팽창우주설은 무에서부터 우주창조란 유대신화의 비인격화한 개정판과 같은 것이 되 버립니다. 그리고 우주의 정신적 측면에 관해서는 어떨까요. 만일 물리적우주에 의식이 있는 존재 즉 인간이 없었다면 우주의 존재자체도 알지 못했을 것이고 우주에 관해서 이런 저런 사색을 해 본다는 것도 더욱이 증명가능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이란 의식 있는 존재는 정신과 육체을 상관적으로 갖추고 있는 유기적생명체입니다. 우리들이 만일 우주를 그 물리적측면과 동시에 정신적측면에 대해서 숙고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우주관이란 것은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것이 되버립니다. 유한이나 무한이란 개념은 “실재”의 정신적영역에서는 과연 의미를 갖는것일까요. 여기서 결론을 말씀드린다면 우리들은 선인들에 비해서 우주에 관한 지식은 늘렸지만 한편으로 이해는 조금도 깊으지지 않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께다: 그것은 우주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며 결국은 철학, 종교에 맡겨야하는 성질의 것이네요. 분명히 현대인의 지식량은 증가하였어나 우주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되면 고대인의 그것과 그리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하면 그런 의미에서도 여기서 조금전에도 언급한바 유대계제종교의 우주창조설에 관한 박사의 소견을 들려 주시기 바랍니다. 토인비: 인간은 기능을 구사하여 사물을 의도적으로 변화시킬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점토에서 병을 만듭니다. 이것에서 유추하여 어떤 사상가들은 지성과 목적성을 가짐으로서 인간적이면서, 전지전능 불멸임으로서 초인간적인 어떤것의 존재가 우주를 창조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냈던 것입니다. 그런 생각안에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이 창조주는 일거에 우주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우주가 자신이 당초에 계획한 데로 전개되도록 만들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이 창조주는 항상 새로운 사색을 펄치면서 계획을 변경하며 이를 실행에 옮긴다고 하며 끊임 없이 작업을 이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지전능한 창조신의 존재를 믿어 왔던 것이 유대계諸宗敎(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의 신자들이 였습니다. 이러한 종교는 구세계의 西端部나 남북미주에서는 기존의 종교를 밀어내고 이들을 대체하였습니다. 허나 남아시아나 동아시아에서는 이들 종교자체나 그 전능하다는 창조신이란 단순한 관점도 그렇게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지 못 하였습니다. 근대 서구 사회에서는 19세기이후 이러한 유대적창조신의 개념에서 떨어저서 다른 각도에서 설명을 찾아내려고 하는 시도가 있어 왔습니다. 즉 관찰되고 추론된 변화의 사실에 관해서 – 특히 지구상의 생명의 출현에 관해서 – 또는 생물의 형태가 자꾸만 분화해 가는데 대해서 더욱이 비교적 새로운 생물종안에 보다 복잡하고 정밀한 구조를 가진 것이 많아지고 있는 것에 관해서 새로운 설명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나자신은 이 무신론적인 진화론에 대해서 논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과학적지식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허나 나의 인상을 말씀드린다면 이러한 이론은 유신론을 무신론적인 용어로 바뀌 놓은 것이던가 연이면 유실론적설명과 같은 수준의 지적설덕력이 결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변화”라던가 “신기성”이라던가 하는 말로서 표현되는 개념은 인간의 경험에서 울어 나온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들은 “변화”나 “신기성”을 경험하게 되며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허나 논리적으로는 이러한 개념은 우리들을 당혹스렵게 합니다. 또 이러한 개념에는 창조란 개념도 들어 있습니다만 이 창조란 것이 우리들을 더 한층 당혹스렵게 합니다.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기도 하는 인간적인 행위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럴 경우 행위자가 절대적인 신이라 할지라도 또는 자연계에 내재하고 있는 힘이라 하드래도 싱관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인간의 사고라는 것은 아마도 疑人的인 어구로 생각하는 걸 피할 수는 없겠지요. 단 그렇게 말하드래도 “우주의 안에, 배후에, 그리고 피안에 있는 궁극의 실재”가 인간과 같은 존재라고는 도저히 우리들의 실감으로서는 생각할수 없는 일입니다.
60 no image 눈가루
2436 2007-06-05
눈가루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 까마귀 한 마리 독당근나무 위에서 눈가루를 내 머리 위로 흩뿌리니 내 마음 밝아져 수심에 싸였던 나의 하루가 새로워지네. Dust of Snow -Robert Frost The way a crow Shook down on me The dust of snow From a hemlock tree Has given my heart A change of mood And saved some part Of a day I had rued. 행복은 세 잎 클로버처럼 어느 겨울날 시인은 무엇인가 수심에 차서 나무 밑을 걸어가고 있는데, 마침 까마귀 한 마리가 후다닥 날갯짓으로 가지 위의 흰눈을 흩뜨린다. 근심으로 상기된 얼굴에 차가운 눈가루가 닿는 순간, 문득 기분이 상쾌해지고 새로워진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마리아가 노래 했던 일상 속의 행복도 생각난다. “장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새끼 고양이 수염, 반짝이는 구리 차주전자…., 아작아작한 에플파이….., 내 마음이 슬퍼질 때 나는 이런 것들을 기업합니다. 그러면 기분이 휠씬 나아지지요”. 네 잎 클로버가 행운의 상징이라면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을 상징한다고 한다. 로또 복권 당첨되는 행운은 아무리 눈 크게 뜨고 찾아도 없지만, 찾기만 하면 눈에 띄는 세 잎 클로버처럼 생복은 바로 내 옆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비 오는 오후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 잔도 수심에 싸였던 내 하루를 새롭게 하는 행복이다. 서강대 교수. 영문학 장영희의 영미시 산책(6) 조선일보 7월8일 . <펴온이의 해석> 미국의 자연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는 주로 숲속의 자연을 노래한 시가 많다. 눈에 덮힌 정막한 겨울 숲을 거닐면서 한 순간 나무위에서 흩날려 떨어지는 눈가루를 맞으면서 시름에 젖던 기분을 전환하는 광경이 그대로 여가없이 떠 올라 온다. 이런 요행도 생각해 보면 사람의 내면속에 이미 그러한 조금만한 각성을 하게 하는 마음의 준비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思考의 일상적 관행에서 벗어나서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이미 내 마음속에 그것을 받아 드릴 수 있는 조건이 갖추워 있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그것은 비움으로서 새로히 담을 수 있는 그릇과 같은 것이다. 마음속의 여백이 없으면 어떠한 것도 비집고 들어갈 수 가 없다.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자신의 마음을 조금은 비워두고 어느 순간의 각성을 받아 드릴 준비를 해두워야 한다. 우리들 주변에는 무수한 ‘Dust of Snow’가 깔려 있을 것이다. 요즘의 나의 ‘눈가루’는 석양을 배경으로 한강을 타고 힘차게 비상해 가는 물오리의 시루엣이다. 나는 그 비상해 가는 역동에서 하로의 뭇 잡념을 씻어 낸다. 조규현
59 no image [인류에 빅뱅이 일어나고 있다]
1960 2007-06-05
[인류에 빅뱅이 일어나고 있다] 렌탈의 사상은 심화 한다(3) 대담: 나가니시 데루마사 진행: 마쯔이 다가후미 나가니시 데루마사씨 의 약력 교도대학종합인간학교수.전문은 국제정치학, 영국외교사. 켐브릿지대학역사학부대학원수료. 대표적저서로, [대영제국흥망사](매일출판문화상,야마모도시치헤이상수상). [외 국가는 쇄망하는가]등이 있다. 말르크스주의도 마-켓트.그로발리즘도 궁극의 본질은 [단자론]이다. 이 정념이라고 밖에 말할수 없는 사상이 세계를 덮허씨우고있다. 單子論이란 情念 마쯔이: [사회] 혹은 [세계] 라고 불리는 것은, 인간권의 내부씨스템(더 정확히는 사브씨스템)의 하나이다, 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여태까지의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은, 지구씨스템속에서 인간권의 경계조건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조건하에서, 그 내부구조가 어떻게 되여 있는가를 삺여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경계조건은 변화하는것입니다. 나가니시 선생은, 개인과 공동체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대단히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만, 실은 나 자신도 바로 그렇다고 생각할 참이 였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인간권이 지구씨스템속에서 안전한가 아닌가]라고 하는 명제에 대해서, 그것은 인간권의 내부씨스템에 의한, 즉 그 유닛트를 어떻게 취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유닛트를 가장 적게 나눈 것이 개개의 인간입니다만, 개인을 유닛트로 한 인간권이라고 하는 것은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이런 상태가 되는 것을 나는 [인간권의 빅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즉, 어떤 씨스템을 궁국의 구성요소까지 분해한 상태는, 우주적 차원에서 본다면 빅뱅과 같은 것입니다. 이 우주를 궁극의 한 점에까지 수축해가면, 온도가 비상하게 높아저가서 물질은 궁극의 구성요소에까지 분해해간다. 그것이 바로 빅뱅이란 상태이지요. 이때는 질서라든가 구조라든가 하는것들은 아무것도 없고 케이오스 입니다. 예를 들어 말한다면, 작금[인터넷사회] 라든가 [개인을 주체로 한 사회] 란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만, 이건 터무니 없는 것입니다. 이건 혼돈과 무질서 이외 아무것도 아닙니다. 현제의 인간권을 생각할 때, 국가야말로 가장 명확한 유닛트입니다. 적으도 20세기는 그런 유닛트를 바탕하여 인간권의 내부씨스템을 구축해 온것입니다. 나가니시: 나도, 별도의 각도에서지만, 이전부터 똑 같이,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이 점이 아직 모호하다고 느끼는 사람을 위해서, 나 나름대로, 역사적으로 생각하는 시점을 제시해 놓고 싶습니다. 먼저 오늘날의 그로바리즘논에서는 국가란 말이 너무 멋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첫쩨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국가라고 하지만 가지각색의 타잎이 있는것입니다. 예를 들면, 서양인들이 의론하는 국민 국가(Nation,States), 근대 국가란 것이 있고. 이건 불과 200 ~ 300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치만 일본인의 역사관에 뿌리를 가지고 있는 [구니]는 그것과 매우 다릅니다. 또한 아시아는 1000년전을 가상해보드래도, 조선은 조선, 중국은 중국, 베트남은 베트남……식으로 거이 지금과 같은 모양의 나라가 이미 만들어저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이념하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구 근대국가와는 문명사적으로 전혀 별개의, 말 하자면 자연국가란 범주로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는것입니다. 마쯔이: 자연국가를 하나의 공동체로서 추스린 구심력은 무엇이 였다고 봅니까. 나가니시: 그건, 아마 근대국가를 만든 구심력과 어느부분 같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언어,역사,문화,생산형태,지리적조건등을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단 마쯔이선생께서 말하고 있는 인간권의 내부유닛트로서 보드래도 구라파적인 국가와 이런 국가는 크게 다릅니다. 또한 이슬람이 대두한 뒤의 중국권도 틀립니다. 이민이 시작한 이후의 양미대륙도 서로 매우 다른 성질의 유닛트입니다. 역사란 축을 넣어서 생각하면 서구사에서 말하는 근대국가란 유닛트가 얼마나 인위적 그리고 편의적이고 역사적으로 한정된것인가가 보입니다. [냉전후의세계가 어떻게 될것인가]란 논의가 있습니다만 다섯개정도가 정리되어있습니다. 하나는 후란시스.후구야마의 [역사의종국]논으로, 세계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받아드리는 사람들이 소위 [하나의세계]를 만든다는 것과 두번쩨로 사뮤엘.헌팅턴의 [문명의충돌]논으로서, 세계는 몇 개의 문명권으로 나누어진다는 것과 세번쩨는 EU라든가 ASEAN과 같이 경제를 중심으로 생각한 유닛트를 설정하는 지역통합론…..네번쩨로 키신저등 고전주의자들이 주창하는 힘의 구조가 국제사회의 기본원리임으로 더더욱 국가중심으로 되간다는 설……다섯번쩨로는 “우주선 지구호”의 이미지로 에코로지스트라든가 인터넷공동체론과 같은 개인이 전세계에 直結한다고 생각하는것등. 마쯔이: 그 설명은 각각 근거가 있어 알기쉽습니다. 나가니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각각 서로 형식은 다르지만, 단위성을 문제시 하고 있습니다. 21세기에 세계가 어떻게 되는가의 주장의 궁극의 분기점은, 무엇을 유닛트로 보는가에 의하여 갈라진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것입니다. 마쯔이: 21세기의 인간권은 20세기의 그것과 경계조건이 대폭으로 다르기 때문에, 20세기적인 유닛트를 생각하드래도, 아마 파탄할것입니다. 지금부터는 무엇이 새로운 인간권의 내부씨스템을 구축해가는가 가 과제입니다. 이때 개인을 단위로 한 것이 안전적이지 못한다는 것은 역사를 보드래도 확실합니다. 마쯔이: 옳바른 지적입니다. 그러나, 특히 제2차세계대전후, 그리고 냉전종식후도 그렇습니다만, 대 전쟁이 끝나후는 언제나 인간권안에서 개인만이 가장중요한 성원으로서 존재하는 질서가 가장 좋다 라고 하는 精念과 같은 것이 유행합니다. 일본에서는 여타지역에서 보지못하는 단순한 반응이 눈에 띄입니다만, 마르크스주의든 마케트.그로바리즘이든, 결국 도달하는 점은 단자론입니다. 개개가 훝어저있어도, 인류사회란 유일의 공동체로 직결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해방의 이념이기도 했고, 지금의 시장원리도 극단으로 가보면 여기에 귀결합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라이프닛지, 볼텔, 루소까지의 개몽주의와, 그 이후의 불란스혁명, 미국독립선언이후, 마르크스주의에 이르는, 소위 말하는, 원리주의적인 단자론이라고 할까 개인주의 이념과는 상당히 달라서 후자는 특히 산업혁명이후, 근대 서구를 움직인 정념이지요. 그기다, 공산주의에 승리하여 지금끝 기고만장하고 있지요, 더욱, 인터넷나 금융공학등의 테크노로지는, player(조작하는 사람)를 궁극의 개인에 두고 있습니다만, 이건 많은 사회과학의 이론에도 배치되는것으로, 역설적으로, 안전적인 씨스템을 만드는것과는 역의 방향으로 정념이 가버리고 있다. 따라서, 이데로 가면 이 행태의 그로발사회론은 21세기의 비교적 빠른 시기에 여러가지 의미에서 파탄을 맞이할 가능성이 큽니다.뉴욕의 금융시장이 한번에 무너지면 다시 한번 국경이 중요해지는 시대로 되돌아 갈것이고, 이 흔들이(振子)가, 어떤 리듬으로 흔들릴것인가, 이 메가니즘을 역사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나는 이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의 의론이 필요한데도, 지금만컴 이에 맞지않는 시대가 없다는 매우 파라독스하다고나 할까 매우 아이로니칼한 상황입니다. 냉전의 종국이 이런 지독한 결과를 초래히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요. 마쯔이: 인간권이란 물질권 혹은 구성요소는 원래, 인류가 혹종의 共同幻像하에 여러가지 구심력을 가동 시켜 그 내부구조를 규정하는 유닛트를 만들어 온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20세기란 경계조건하에서 성립한 몇가지의 공동환상으로부터 벗으나려는 것은, 그 와중에 있어서 그것이 환상이라고 누구도 생각하지않는다고 하는 의미에서 매우 어려운 상태입니다. 그래서 21세기의 인간권이 붕괴하는 것은 공동환상의 중요한 몇 개가 붕괴해갈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때 공동체의 구심력은 상실되고 결국은 지리멸열해 가는것입니다. 그런데, 나가니시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역사란 것은 매우 중요하다란 것을 새삼 실감합니다. 자연과학은 요소환원주의와 이원론을 가지고 시물을 이해하려고 합니다만, 그런 관점에서는 포착되지 않는 복잡계등 의 현상이 많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사물의 전체의 거동을 이해하려면 종래의 자연과학적인 관점에서 는 볼수 없는 현상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씨스템와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권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변해갈것인가를 생각할 때, 그 역사를 딛고 논하지 않으면 아마 알기 힘들것 입니다. 歷史的 思考의 중요성 나가니시: 역시 역사적사고의 축을 넣어서 보면 여러가지 이야기가 매듭 짓기 쉽습니다. 인간의 선택이란, 다음과 같이 말할수도 있다. 시장경제에서는, 신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수요와 공급이 자연스렵게 균형을 유지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그건 언제나 인간이 하는 것은 어자피 혼돈에 이르기 때문에, 뛰어난 英智를 가지고 여기에 손을 쓰서 보완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생각하는 편도 있습니다. 이 두개는 문명권으로써는 서로 전혀 다른 이질적인것입니다. 이 갈림길은 결국 역사의 사고에 귀착해 가는 면이 있다. 물론 철학적인 의미의 차이는 있읍니다만, 그건 역시 [인간의한정성]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은 항시 한정되어 와서, 아주 깊은 데서부터 말한다면 그리스트교의 humility(겸손.비하)라고 할까,[인간의 작음]의 자각이란 것입니다. 이건 그리스사상이나 동양사상에서나 일본의 전통적인 사고의 안에서도 있습니다.전부가 역사적존재로써 의 경험을 쌓아온 것이 종교로 체계화 된다든지 사상이 되고 인류공통의 지혜가 되기도 하고 문화가 되여 온 것이고, 결국 이것들은, 문명은 다르드래도 인간의 사유의 집적이라고 생각됩니다.그래서, 종교나 역사, 말하자면, 넓은 의미에서의 경험에서 탄생한것과, 순수의 사고, 논리합리주의가 만들어낸 것과는 단순한 접근의 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읍니다만, 실언 양자는 인간의 삶의 방식으로써 서로 대극에 서는 것입니다. 이중 어느것을 취하는가 하는 문제 제기야말로 현대와 같은 시대에서는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마쯔이: 과연. 그 문제는 매우 본질적입니다. 실체로서 궁국의 것이 있어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해간다는 사고와 상호의 관계성이나 법칙이 사물의 성질까지 결정한다는 사고는 서로 전혀 다른것입니다. 그건,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 라고 해도 좋습니다. 상대적인 쪽은, 역사가 그런 관계성을 결정한다고 말해도 괜찮은 거지요. 나가니시: 그렇습니다. 知의體系의 본질은 지금 말씀한데로 역사입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지의체계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인간의 한정성, 즉 겸손밖에 없다는것입니다. 마쯔이:그렇습니다. 본질은 상대적이다라는 것은 나가니시선생의 말씀데로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절대적이란 우리들이 모든 것을 컨트롤할수있다고 생각하는것이니까요. 그것이 [지구에는 상냥하다]와 같은 발상이 만들어진다. 나가니시: 그 발상도 원천적으로 교만하고 무한정입니다. 마쯔이: 맞습니다. 사람이 지구를 얼마나 더렵히던 지구로 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일이니까. 우리들이 존속할수 없을 뿐이지, 만일 지구란 것이 인격이 있다면, 지구로 봐서 지구환경을 더렵히는 인류가 없어주는 것이 happy한것으로, 그런것을 [지구에는 상냥하다]라는 발상을 한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나가니시: 요컨데, 이 인간의 벗으날수 없는 자기중심성이란 것을 어떻게하면 그 視点(보는 관점) 을 무마할수 있을까가 문제입니다. 마쯔이:그런 시점을 얻을수있는 것은 역시 俯瞰的인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20세기의 제일의 특징은 인간이 달에 갔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그 결과 땅에 억매있었던 시점에서 문명의 역사상 가장 높은 고도에서 부감적시점을 얻었던것입니다.그러다보니, 태양계46억년의 시공 스케일로, 지구라든가 우리들의존재,우리들의 한정성이라고 하는 문제들이 잘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걸 인식하는 것이 21세기의 인간권을 생각해 가는데 있어 기본적인 스탄스가 아닌가 합니다. 나가니시: 과연 그렇군요. 마쯔이: 결국은 말입니다, 빅뱅이후의 역사, 혹은 더 이전일지도 모르지만, 이 우주란 것은 어떤 관계성에 입각하여, 입자라던가 무엇이든지 속성이 정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 속성이 왜 정해저 있는가 하는 것은, 실은 우주란것도 지금의 우주탄생전에 여러가지 시행착오가 있어, 지금의 우주가 탄생할때까지의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는 생각도 있는것입니다. 따라서, 절대적인 무엇이 있어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있다고 생각하는가, 역사가 어느 종류, 그때그때를 조종하면서 관계성을 결정하고 있는가, 이건 서로 전혀 다른 입장입니다. 변화하지 않는것에 주목하라 나가니시: 요는 역사란 것은, 끊임없이 인간존재를 검증해가는 과정입니다. 말 하자면 자신의 시점, 존재란것을 끊임없이 상대화시켜가는 것은 역사의 사고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건 역으로 말 한다면, 우리들의 불변의 인간존재를 어떻게 볼것인가 하는데 뒤돌아 옵니다. 그러나 역사관에는 두개가 있어, 하나는 무엇이 어떻게 변하는건가 에만 쫓아 가는 것. 역사가는 이걸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함으로, 특히 과도하게 [변화]에 강조점을 두고 역사가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 개는, 역사의 본질이 [왜 변화하지 않는가] 란것을 논하는 것이 역사가의 근원적인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과 그 환경 혹은 그 관계성등 안에서, 인간존재의 변화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란것이 미래를 향해 무슨 골(목적)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면,---예를 들면 유물사관이면 [인간해방]의 이념이 됩니다만---여타의 진보주의도 포함해서 역사는 선형모양으로 나아간다고 하는 직선사관은 근대의 업이였습니다만, 지금은 그런 골을 향한 사관은 성립할수 없게 되였다. 그런 골을 잃어버린 시대에 역사를 보는데 중요한 것은 순환의 사상입니다. 말 하자면 지구씨스템속에서의 인간권속의 인간의 요동으로써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틀이 바뀐 것 같이 않다. 또한 인간이란 존재는 옛날부터 여러가지 종교나 문명을 만들어 왔지만 모두가 서로 매우 큰 공통성이 있기 때문에, 이런 점에 착목해가면 역사란 것은 [변화지않는것], 혹은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되푸리해 간다고 생각해야 할겁니다. 여기에 인간의 근본적인 한정성이란, 여태까지의 모든 문명이나 종교가 만들어 온 에쎈스가 있고, 근대의 논리합리주의속에 모든 것이 환원되지않는 [한정의사상] 과 같은 것이 나오지 않겠나 하고 생각하는것입니다. 지구씨스템이란 골조를 생각할 때는, 인간이 할수 있는 최고의 지적영위는 바로 이것이다라고 나는 여깁니다. 마쯔이: 역사에서 무엇이 변하지 않는가, 우주,지구,생명등 모든것의 역사에 공통한 것은 무엇인가. 좀전에 이것 저것 생각하다가 도달한 생각입니다만, 그건 실언 [분화]가 아니겠는가, 라고. 다-원 이후 정착하고 있는 [진화]는 아닙니다. 分化란, 均質한것이 異質적인 것으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인간권도 기본적으로는 분화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나의 인식입니다. [인간권이 분화한다]라고 하는 것은 공동체와 같은 어떤 종류의 구조가 태어나는 것을 말 하는것입니다. 구조가 태어나는 것은 정보가 태어나는 것이기도 한다. 왜 우주나 지구 와 생명이 분화하는가? 우주가 팽창하여 씩어가기때문입니다. 우주가 탄생한 순간은 모든 것이 초고온상태입니다. 이것이 팽창해 가는 과정에서, 뜨거운 부분은 별의 중심이라든가 은하의중심등에 국소적으로 남고, 한편 우주전체로서 본다면 씩어간다. 그르면 온도차가 확대해간다. 그런 변화가, 구조라든가 질서 라든가 정보가 탄생하는 배경에 있다. 지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가 탄생했을 때도 불덩어리상태였습니다.지표도 진득하게 녹아 내부 외부의 온도차가 없었다. 이것이 씩어가면서 분화가 일어난다. 그러면, 인간권을 두고 말 한다면, 온도라고 해도 쉽게 와 닿지않는데………. 인간권의 경우에는 이걸 [정보]로 대치해서 생각하면 될것입니다. 정보가 확산하지않고 어떤 한곳에 집중하고 있는가 혹은 확산하고 있는가. 이것이 인간권에서의 분화 혹은 유닛트를 생각할때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봅니다.그럼으로서 이런 시점에서 지금의 인간권, 21세기의 인간권이 어떻게 있는가를 생각해보려는 것입니다. 분화의 방향이란 정보가 태어나는 즉 구조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반대의 방향이 균질화입니다. 균질화라고 하는 것은 20세기의 인간권의 共同幻像의 하나입니다. 균질화해 가는 것이 좋다고 보는것입니다. 나는 무한발전의 환상도 마찬가지로 균질화도 환상으로 이르는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문명교체의 리듬 나가니시:추적해 가 보면, 역사의 본질은 마냥 [변화해 맞이 않는]것이라고 밖에 말할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본질적이면 본질적일수록 단층적인 것으로 일어난다. 이것도 열의 원리와 같습니다. 근대사란 짧은 스팬으로 생각하드래도 확실히 균질화가 어느 종류의 극점에 까지 이르면 반드시 단층적변화가 옵니다. 에보류션날(연속적)한 변화가 아니고 그 process를 끝내게 하는 씨스테믹한 붕괴가 일어납니다. 문명의 교체란 것은 모두가 그렇습니다. 공동체를 만들어 그기에 정보가 만들어저서 문명체계가 되고 그것이 확산해 가다가 그 체계의 균질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구심력이 없어지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이때 일어나는 것은 일거의 붕괴입니다. 근대사의 경우에는 [혁명]입니다. 마쯔이: 혁명이란 어떻게 일어나는것일까요. 나가니시: 여태까지 나아가던 연속적process가 어느시점에서 일순간 전체가 핵이 되어주던 물질을 상실함으로서 일어 난다고 봅니다. 마쯔이: 그건 매우 본질적이고, 나는 이것을 인간권의 相移轉(응고.증발등 물질의 상태가 변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나가니시: 바로 그것이 혁명이란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불란스혁명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서 말 해 봅시다. 혁명전의 절대왕정의 실페, 대외전쟁에서의 페배, 재정의 파탄,……….모든 사회적인 프렛샤가, 카토릭교회를 하나의 헥으로서, 그기에 응집해 있었던 것을 용해하고 물방울과 같이 여러가지 불만이 표면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그것이 추풍낙엽과 같이 떨어저가면서 정치구조에 feed-back되어, 용해가 가속화되어 갔지요. 더욱이 혁명의 몇 년전부터는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감소 하기 시작하여 불만을 흡수할수 있는 장치가 일순간 없어저버렸습니다. 그런 구성원리를 일순 상실한데서 일어나는 혁명이란 진짜혁명입니다. 러시아혁명,미국독립혁명,공산당이 출현하기전의 중국혁명등 자연발생적인 혁명은 모두 그런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한 원리는 나에게는 설덕력이 있군요. 마쯔이: 단, 인간권의경우에는 역사적으로 볼 때, 코뮤니케이트하는 영역이 역사적으로 변화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순환은 아니다. 뭔가 스파이럴한 정보가 전달하는 범워가 변화한다. 나가니시: 그기서는 정보의 알맹이가 관련될는지 모릅니다. 큰 변화가 일어나기전에는 정보의 전달에 심각한 기능저하가 생깁니다. 그기서 특히 재미있는 것은 어떤정보가 전달하기 쉽고 어떤 정보가 전달되지 않는가, 역사의 안에서 정보전달메카니즘입니다. 마쯔이: 그 정보의 생성과 확산의 메커니즘이 중요한것입니다. 정보의 집적이야말로 공동체를 생성시키고 유지하는 구심력 같은 것이니까요. 나가니시:그렇습니다. 전달하기 힘든 형의 정보를 보아가면, 절박한 문명이나 체제의 붕괴가 보입니다. 가령, 저 로-마의 장대한 문명이 만들어 젔는데도, 그것이 왜 최종적으로 망해버렸는가 를 생각해보면, 종교에 관해서도, 사회.경제 혹은 기술, 서민의 생활감각같은것에서도, 전달되지않는 정보가 어느시기에 집중하여 덮어씨워진다. 그런 일이 벌서 쇄망하기 몇십년전에 , 혹은 몇백년전에 벌서 일어나고 있어며, 그 후 시간차를 두고 결정적인 쇄망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시간차에도 왜 긴 것이 있고 짧은 것이 있는가 에 대해서 나는 흥미를 가지게 됩니다. 20세기도 예외없이 이 것이 맞아 떨어 저서, 현대의 마-케트.그로바리즘의 씨스템은 조금씩 이지만 중요한 정보가 전달되기 어렵게 돼여 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FRB(연방준비네도이사회)의 금융정책 책임자 그린스반이 가지고 있는 노.하우가 다음세대에 어떻게 연계되어 갈것인가 같은, 계승계수의 문제는 망각되고 있다. 영국의 역사를 풀어보면, 제국질서의유지란 점에서는, 점보의 세대계승이 대단히 잘 이루어저 갔다. 오랫동안 제국을 보전할수있었던 최대의 이유는 역사의 지혜 같은 것이 세댸간에 잘 계승되여 갔기 때문입니다. 정보,지혜, 또는 인사의 기, 통치의 기술(아-트), 이런것의 계승이란 면에서 본다면, 근대 일본 만큼 무관심한 문명은 없습니다. 근대이전에는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전체 문화의 씨스템속에서 자연히 계승되어간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하게 되니 근대일본은 언제나 벼락치기씩 번영을 이룬 후에는 또 이네 쇄테해 간다. 일본문명의 앞날 나가니시: 나는 여러종류의 세계, 문명의 역사를 연구해 왔고, 현대일본에 눈을 돌려 보았을 때, 매우 뚜렸하게 말 할 수 있는것은, 인간의 한정성, 작음, 겸양성이 인간존재의 본질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가장 생각 하지 않는 사회가 되 가고 있다는것입니다. 이 인식은, 세계의 여러 사상속에 문명의 기본형태로서 짜넣어저 있습니다. 여러가지 인간중심적으로 들리는 의론을 하고 있지만, 서구에는 어딘가에서 그것이 반드시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받아넘기는 현대일본의 정신구조에는,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것으로, 보이는것만 보고 그걸 받아드린다는 것이 문명개화, 근대화, 국제화인것 처럼 생각하고 반응해 왔다. 마쯔이: 역사학습에서 어쩐지 부의 이미지가 느껴지는 군요. 나가니시: 느껴지다 마다요. 특히 전후에 말입니다. 마쯔이: 무언가 뒤걸음 치는 느낌이군요. 나가니시: 역사를 보다 자연체로 가르치고, 자연체로 역사를 읽는 정신의 유연함을 몸에 익히면 자연스러운 인간관을 갖게 된디. 그렇치 않으니까, 기묘한 반발이 일어나고, 또한 이상한 무한정한 수용론으로 기울어지고……..그 바란스야 말로 제일 중요한데………….지금 말씀드린바 같은 문제는, 마쯔이선생이 인용하는 경계조건의 변화에 의해, 현대일본문명이 가지고 있는 바이아스를 수정해갈수 있는 가능성, 혹은 자연히 그런 힘이 육성될수 있는 가능성은 있는것입니까. 마쯔이: 그건 어렵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일본의 교육에 문제가 있기때문입니다. 교육의 근간은, 타자와의 관계성속에서 자기란 계념을 형성하여, 1만년정도 이어갈수있는 인간권에서의 보편적인 인간관을 길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일본의 교육은 그걸 일체 차단해 버리고 있습니다. 인권이란든가 자기란 계념이 처음부터 있다고 전제를 하고 교육씨스템이 구축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란 계념을 만들어 갈 과정이 없습니다. 그 결과, 매우 가상적이고 단순한 제멋대로 자기주장만을 하게되는 자기란 계념을 심어준다. 따라서, 자기자신 스스로 사물을 판단할수 가 없다. 나는, 세계의 어떤 사람도 발상하지 않는 것 같은 발상을 하고, 계념으로서 추상화하고 나자신의 말로 말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는 드물지요. 나가니시: 녜, 매우 적지요. 마쯔이: 그러나 이건 구라파쪽을 가게 되면 상식입니다. 그런 당연한 일이 일본에서는 아주 드문것이다. 그래서 이 점을 바꾸지 않으면 매우 간단하게 일본은 망해 버릴수 있을겁니다. 나가니시: 그렇습니다. 역사의 기억이 절단된 문명이 오래 간 예가 없습니다. 이 경우, 몇십년이 경과하여 서라도 반드시 그 절단을 다시 이어보려는 시도 가 일어난다. 그런 다음 그 기회와 가능성이 완전히 상실된때, 최종적인 파국이란 틀에 함몰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문명의 연속성을 항상 의식하고 그 계승을 열심히 해 온 문명에 공통되는 점은, 인간의 한정성을 자각하고 역사환경전체안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식적으로 자리매김해 가는 젓입니다. 대담을 마치고 씨스템이란 그 구성요소, 그것들사이의 관계성, 내지 그 관계성을 만들어 내는 구동력을 특정함으로, 그 특징이 밠혀진다. 특히, 구성요소를 어떻게 잡는가 가 중요하다. 가령, 지구씨스템의경우, 그 구성요소는 지구를 구성하는 개개의 물질권을 생각하면 된다. 그 구성요소의 하나로서 약 1 만년전, 인간권이 분화해 나왔다. 이제까지의 대담에서도 여러차레 지적한데로, 이 것이 현대의 특징이다. 따라서,그것은 지구사란 시간스케일에서도 대륙의탄생이나 생물권의 탄생에 필적하는, 에폭.메이킹한 시대라고 할수있다. 인간권도 씨스템이다. 그 구성요소, 말하자면, 유닛트를 어떻게 잡는가가 지구씨스템와 조화적인 인간권을 생각할 때 중요한 문제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인간권의 내부구조론이며 그기에 근거한 내부씨스템론이다. 현제 세상에서 언당한 것으로 논의되고 있는 유닛트는 개인이다. 이것은 개인을 주체로 하는 사회라고 하는 켓치프레이즈에 단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빅뱅이후의 우주의 역사에서 생각해보면 대단히 위험한것이다. 빅뱅과 같은 상태로 돌아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번호의 대담은 이 유닛트를 어떻게 잡는가가 큰 테마였다. 나가니시씨와는 그 역사인식의 시공스케일에 큰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의식에서도 결론에서도 공통점이 많았던것에 감명을 받았다. (마쯔이) <펴온이의 해설: 이상의 글은 백두-히말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필자가 번역해서 한번 올린 것을 다시 교정을 해서 올린다. 그 냉용으로 봐서 21세기를 살아 가는 우리들에게 이 세계를 보는 시점을 새롭게 해 주는 힘이 있기 대문이다. 조규현>
58 no image 어른과 아이
2288 2007-06-05
어른과 아이 - 앤 모로 린드버그 (1906-2001) 일하는 것은 우리 속에 사는 어른 밥벌이를 하고 내일을 계획하려 근심스렵게 저녁 하늘을 훑어보고 걸을 때 서두른 것은 우리 속의 어른 이웃을 의심하고 가면을 쓰고 갑옷 입고 움직이고 눈물을 감추는 것은 어른. 노는 것은 우리 속에 사는 아이 오늘 이후에서 행복을 찾지 않고 기쁨으로 노래부르고, 경이로워하고 또 울 줄도 알고 가면 없이 솔직하고 변명을 하지 않고 단순하게 잘 믿고 가식도 전혀 없고, 사랑하는 것은 우리 속에 사는 아이.(부분) It is the man in us works; Who earns his daily bread and anxious scans The evening skies to know tomorrow’s plans; It is the man who hurries as he walks; Who moves in armor and who hides his tears. It is the child in us who plays; Who sees no happiness beyond today’s; Who sings for joy; who wonders, and who weeps; Open and maskless, naked of defense, Simple with trust, distilled of all pretense, It is the child in us who loves. 네 안엔 맑고 순수한 아이가 있지 아침마다 나는 가면 쓰고 갑옷 입고 세상이라는 전쟁터로 나간다. 내 안에 있는 순수한 마음, 남을 믿는 마음, 경이로움을 느낄 줄 아는 마음을 억누르고 무관심과 무감각의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한 다음, 삶이라는 커다란 용과 싸우러 나간다. 밥벌이를 위해 서둘러 걷고, 남을 의심하고 미워하고, 내가 한 발짝이라도 더 올라서기 위해 남을 무시하고 짓밟기도 한다. 저녁이 되면 오늘의 싸움에 만족하지 못하고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내일의 계획을 짠다. 오늘의 행복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접어두고, 가끔씩 왠지 사는 게 서글퍼져 눈물이 날라치면 매몰차게 마음을 다잡고 다시 딱딱한 갑옷 입고 총알 쏟아지는 적진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가면 없이 솔직하고 기쁨으로 노래 부르고 사랑하기 좋아하는 내 안의 아이는 참 살기가 힘들다. 해설: 장영희: 서강대교수.영문학 장영희의 영미시 산책(5) 조선일보 <펴온이의 변: 세상의 어둡고 가식적이며 혼탁한 면과 그 대각선상에 놓여 있는 밝고 진솔하며 투명한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눔으로서 작가가 의도하는 이미지는 분명하게 잡히는 것 같지만, 사실 이러한 관점은 자칫 어둠과 밝음, 가식적인것과 진솔함과 혼탁과 투명함이 따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여기서 존재의 한 실재가 배제되는 위험이 암시되고 있다. 밝음과 어둠이 원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저변에 깔려 있는 “空’을 볼수가 있다. 공사상의 위대한 점은 어둠속에서 밝음을 인식하는 데 있다. 따라서 어둠을 배제의 대상으로 생각할 수가 없다. 사랑이 증오의 반동으로 일어난 것을 안다면, 진솔함과 순진함이 가식의 반동으로 생겨 나온 것을 안다면 우리들은 같은 인격속에 이러한 이중적인 분열증적인 실재를 고착시키지 않아도 될것이다. 엔 모로 린드버그가 살았던 20세기의 서구문화는 아직도 동양과 동양적 종교가 갖고 있는 또 다른 우주관을 높이 평가 하지 못하고 지났어며 세기말쯤에 가서야 서구 철학의 위기가 닥쳐 온다. 우리는 역으로 다중적 사고에서 이중적 사고로 한정되면서 정신문화적 사고의 갈등을 겼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의 이상적인 부흥현상은 비록 그것이 어떠한 종교 보담 우수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하드래도 한 국가의 정신적 향방을 가늠하는데 심상치 않는 문제를 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종교는 여타의 어떠한 정신적 신앙적 가치 체계를 배제하는 논리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제의 논리는 반드시 갈등을 빚게 마련이다. 이 점을 극복하는 데 우리사회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조규현
57 no image 화살과 노래
2953 2007-06-05
화살과 노래 -H W 롱팰로 공중을 향해 화살 하나를 쏘아 올리니 땅에 떨어졌네 내가 모르는 곳에, 빠르게 날아가는 화살을 내 눈이 따를 수 없었기에. 공중을 향해 노래를 부르니 땅에 떨어졌네 내가 모르는 곳에. 누가 그처럼 예리하고 강한 눈을 가져 날아가는 노래를 따를 수 있으랴.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어느 떡갈나무에서 그 화살을 발견했네 부러지지 않은 채로 그리고 온전한 그대로 그 노래를 한 친구의 가슴속에서 다시 찾았네. The Arrow and the Song - H W Longfellow I shot an arrow into the air It fell to earth, I knew not where; For, so swiftly it flew, the sight Could not follow it in its flight. I breathed a song into the air, It fell to earth, I knew not where; For who has sight so keen and strong That it can follow the flight of song? Long, long afterward, in an oak I found the arrow, still unbroken; And the song, from beginning to end, I found again in the heart of a friend. 그대 한마디, 세월도 지울수 없네 풀이: 장영희 아프리카 어느 부족은 너무 웃자라 불편하거나 쓸모 없게 된 나무가 있을 경우 톱으로 잘라 버리는 게 아니라 온 부락민들이 모여 그 나무를 향해 크게 소리 지른다고 한다. ‘넌 살 가치가 없어!’ ‘난 널 사랑하지 않아!’ ‘차라리 죽어버려!’ 이렇게 상처 주는 말을 계속하면 정말 나무가 시들시들 말라 죽어버린다는 것이다. 과하적으로 얼마나 증명이 가능한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말 한마디가 생명을 좌우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하다는 뜻일 게다. 어떤 때는 무심히 내뱉은 말이 남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히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내 말 한마디에 힘입어 넘어졌던 사람이 다시 용기를 갖고 이러나기도 한다. 그만큼 내가 지금 하는 말은 그냥 허고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가습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 노래하는 마음, 시를 쓰는 마음으로 하는 말은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여우언히 보석처럼 빛난다. –장영희의 영미시 산책 (3) 서강대 교수.영문학 조선일보 7월5일 문화란 에서 옮김 <옮긴이의 변> 반칠환시인의 토속적인 언어의 향연이 구수한 된장 맛을 내는 것이 었다면 장교수가 소개하는 영미시는 아무래도 서양냄새가 묻어 있는 투명하고 합리적인 이미지로 다가 온다. 화살과 노래를 우리가 범사에서 함부로 시불어되는 ‘말’로 대치하여 풀이하고 있는데 이 또한 조금도 트집 잡을 때 없는 논리 정연하고 목적에 부합하는 해석이다. 원문을 읽을 때 느끼게 되는 음율이 주는 맛은 없드래도 우리말로 옮긴 영시는 나름데로 가슴에 와 닿는 구석이 있다. 문학이 보편성으로 나갈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신약성서에서도 ‘말씀’이 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할 만큼 언어란 생각해 보면 인간의 어떤 궁극적인 실재가 담기는 그릇이며 그 그릇은 곧 바로 만물의 근원이요 본질이라고 볼수 있다. 본질과 표상이 합일되는 어떤 원형질적 실재 그것이 우리가 함부로 쓰고 버리고 구기고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를 향한 독화살로 쏘아되는 저주와 욕설의 무기로 쓰고 있는 언어이다. 사람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 힘이 있어니 이 또한 심상치 않는 힘을 내장하고 있는 메체요소인건 틀림없어 보인다. 우리들은 인간이 발명해 낸 ‘언어’가 인간의 작위적인 조성으로만 만들어 낸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것은 우주의 생성과 소멸의 양태에서 비롯된 소리를 바탕하여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치 않고서는 어떻게 나무가 인간의 저주를 받아 말라 죽는 일이 일어 나겠는가. 인간이 만들어 낸 저주나 욕설이 인간끼리만 통하는 코드가 아닌걸 알아야 할것이고 우리가 나고 죽는 도덕율을 선천적으로 몸에 지니고 있듯이 이 우주의 만물역시 같은 맥락의 율법에 의해 함께 호흡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우리의 육신은 이 우주에 직속된 실재라면 우리의 정신은 그 본질에 와 닿는 또 다른 차원에 소속된 事像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힘을 갖고 있다. 나는 한때 내가 좋아 했던 영국의 작가 D H 로랜스의 단상집 [The Fantasy of Unconscious 무의식의 환상]을 읽고 로랜스의 천재성을 엿본 것 같은 느낌을 가진적이 있는 데 그는 이 책에서 인간과 우주와의 상관관계를 프로이드의 심리학의 틀을 께는 또 다른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와 우주와의 접촉의 양태에 관해서 이야기한 것을 떠 올린다. 그는 인간의 무의식이란 인간에 한정된 차원의 혼돈한 세계라기 보담 이 우주와 교통하고 교신하는 역동적인 기능을 하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의식’을 광속도 따를 수 없는 물리적인 속성을 가지고 우주를 유영하는 실재로 보았어며 하물며 ‘태양’이 끊임 없는 자기연소를 되푸리하는 것은 다른 혹성과의 ‘관계망’ 그 자체에서 찾아내며 이 관계망에서의 인간의 의식의 움직임은 엄청난 임팩트를 던지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 였다. 그가 던진 말의 화살은 아주 먼 훗날 다시 나에게 뒤돌아와서 꽂치고 있다. 조규현
56 no image 토인비와의 대담(3)
2267 2007-06-05
토인비와의 대담(3) 이께다: 앞서 잠간 언급했습니다만 나는 모든 인간생명은 個個의 존재인 동시에 그 생명의 깊은 곳에서는 우주생명이라 할 수 있는 실재에 合一되고 있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사가 말씀 하시는 “우주의 배후에 있는 궁극의 정신적실재”도 이렇게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허나 죽음에서 육체가 무기물에 환원되는 데 대해서 한 저서속에서 [인간의 혼은 우주의 배후에 놓여 있는 초인적인 정신적실재속에 흡수된다]라고 하신 박사의 所說은 정신을 하나의 독립된 실재로 여기는 것 같이 들립니다. 물론 육체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끊임 없이 변화며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세포는 대부분이 一新됩니다. 또 죽으면 전체가 무기물로 환원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를 들면 3세였던 A이란 사람이 30세가 되었다고 합시다. 이럴 경우 A는 육체적으로는 변화했지만 그 속에 일관되어 지속하는 본질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육체는 그 자체가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깊은 곳에 있는 生命的傾向性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역으로 말씀드린다면 내재하는 정신적실재가 끊임 없는 육체적 경향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다 본질적인 인식이 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죽음에 의해 현실의 육체는 무기물로 환원되드래도 정신적실재에 내포되어 있는 육체적 경향성은 지속한다고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緣에 스치면서 다시 현현되는 모양으로 육체가 지속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죽음에 의해 육체와 정신이 분단되어 버린다는 생각은 아마도 知性이 犯할 수 있는 잘못이며 사실은 이렇게 생각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토인비: 인간의 정신적요소와 육체적요소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지성의 레토릭입니다. 그것은 경험에 의한 旣知事實(데이터)은 아니고 경험적 데이터를 고찰한 뒤 축출해낸 하나의 결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생각해 낼 수 있는 유일의 결론도 아닐 뿐만 아니라 여태까지 인간이 도출해낸 유일의 결론도 아닙니다. 경험에서 본다면 우리들은 육체를 떠난 영혼이라던가 혼이 없는 인체라던가 하는 것과 만나는 일은 없습니다. 물론 정신적결함자나 치매노인의 경우에는 그 정신적기능에는 이상이 생긴 것이고 육체적결함을 안고 있는 사람이나 불구자의 경우도 신체적 측면이 불충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함 모두 例外로 보아야 하며 정신과 육체가 갠관적사실로서 각기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인간을 정신과 육체란 관념상의 2요소로 지적으로 분석하는 것과 분명히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이께다: 앞서 박사깨서 사후의 생명의 존재방식에 관해서 그건 시간차원을 넘어선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나도 그건 옳바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발 더 파고 든다면 현재 살아 있는 이 생명도 그 본질의 실재에 있어서는 시간차원을 넘어선 것이다라고 생각됩니다. 왜냐 하면 만일 인간의 생명이 시간이란 틀에 갇힌 존재라면 인간의 지성에 의해서 그걸 이해하는 것도 가능할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관련하여 나는 베르그송의 고찰을 떠 올립니다. 베르그송은 “흘려가는 시간”이란 개념을 주장하는데 과거.현재.미래란 시간적구분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의 흐름이 과거.현재.미래란 내적인 지속을 실감하면서 만들어 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흘려가는 의식”이란 것도 인간생명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하간 생명자체에는 원래가 과거.현재.미래란 현상적시간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구별은 생명이 육체와 정신을 갖춘 존재로서 구체적활동을 영워해 갈 때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토인비: 칸트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인간의 사고에서는 불가피한 범주임을 지적하였습니다. 또 아인슈테인의 지적에 의하면 시간.공간이란 두개의 지적범주를 구별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지성의 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과학상의 관찰을 함에 있어서는 시간은 공간에 의해서, 공간은 시간에 의해서 측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3개의 지적범주 – 시간.공간.시공 – 이 객관적실체를 가지고 推定될수 있는 근거를 우리들은 과연 가지고 있을 까요. 이런 知的範疇도 어디까지나 인간의 우주이해력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이께다: 시간.공간이란 것은 인간이 창조한 관념이며, 인간의 생명이 그 활동함에 있어 만든 틀이라고 봅니다. 만일 이 생명의 發動이 없다면 시간도 공간도 없는 것이 되겠지요. 따라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 틀에 생명을 박아 넣어 규정하려는 것 자체가 本末을 顚倒시킨 생각이 아닐까요. 시간이란 우리들이 우주생명의 활동이나 변화를 통해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체험에서 말 하드래도 시간의 움직임은 우리들의 생명활동의 상태에 의해서 여러가지로 변화합니다. 즐거울때는 시간은 날라가듯 빨리 지나가고 괴로울때는 시계바늘이 아주 느리게 나아갑니다. 그래서 죽음의 문제로 뒤 돌아 갑니다만 앞서 잠간 말씀드린바 佛法에서는 사후의 우리들의 생명의 存在方式을 “空”이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공”이란 것은 현상으로서는 나타나는 것이 아니지만 엄연히 실재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실재한다고 하지만 그건 눈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와 다를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허나 실재하는 이상 緣에 스치면서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는 “無”라고 할 수 없습니다. “有”와 “無”란 두나의 개념만으로 표현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결국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생명의 본질은 “生” 즉 “有”와, “死”즉 “無”로서 표현되지만 영원히 존속해 가는 초시간적실재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토인비: 지금 말씀하신바로는 인간의 진실한 실재는 “공”의 차원에 있다고 말 할수 있겠습니다. 그것이 개인과 우주의 일체성을 확인하는 힌두교의 격언 “너의는 그것이니라”라는 것의 의미와 같습니다. 결론으로서 죽음이란 현상은 우리들이 심신일체로 낮익은 인간존재중에 육체면의 분해를 수반하는 것인데 허나 그건 ‘실재그자체’에서 본다면 실은 인간의 지적창조력의 한계에서 일어나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궁극의 실재” 나 “공”에 관한 의문은 , 공간이라던가 시간이란 관념에서 공식화 시켜 본들 해답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할수 있는 것이라면 힌두교나 불교에서 설하는 輪廻轉生의 개념에서던 조로아스타교나 유대계종교에서 말하는 한번뿐인 死者復活의 개념이나 나에게는 지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힌두교나 불교, 또한 조로스타교나 유대계제종교에서 공히 말하는 인간이 죽으서 다시 심신통일체로서 삶을 시작하기 까지 사이에 중간적 기간이 있다는 개념도 나에게는 이해가 될수 없는 점입니다. 인간의 지성으로서 이해될수 있는 시간.공간안에서의 諸현상과는 대조적으로 “실재그자체”에는 시간이나 공간도 없는 것이 아닌가. 나는 “실재그자체”에는 시간도 없을 뿐아니라 공간도 없다고 믿습니다. 라고 해서 그것이 시간과 공간에 속박된 이 세상에서부터 전적으로 유리되여 존재하는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이께다: 나도 실재그자체에서는 시간이나 공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실재가 시간.공간에 한정된 이 현상계를 벗어난 곳에 있지 않는 것은 확실합니다. 大乘佛敎에서는 “生死不二”라고 하여 생과 사란 시간.공간차원의 현상은 시.공을 넘언 실재인 생명의 두 서로 다른 나타남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개개의 생명체는 생명이 현재화한 상태이며 死란 그 생명이 “冥伏”한 상태입니다. 명복이란 무로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좀전까지 내가 제기해 온 “공”의 개념은 눈에 보이지 않트래도 엄연히 실재하는 유무어느쪽인가를 일방적으로 정할수 없는 개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현실에서 다양한 개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假”로 부르고 있습니다. 심신통일체로서의 생이란 이 “가”의 모습이며 그리고 그속에 “공”을 품고 있습니다. 사후의 생명은 “공”으로 실재하면서 그속에 “가”의 경향성, 방향성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공”을 관통하는 생명의 본질을 “中”이라고 부릅니다.어떤때는 현재 어떤때는 명복이란 모습을 취하면서 무한히 지속해 가는 생명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지속해 가는 생명의 본질이란 현대의 철학용어로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자아”라고 하는 표현과 상통합니다. 더욱 불법에서는 이 “공”과 “가” 내지 “중”은 圓融一體의 것으로 이것들을 전체로서 통일적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설합니다. 토인비: 방금 말씀하신 佛法의 “공”의 개념에 의하면 “實在그自體”가 “모든것을 포함하는 위대한 우주의 생명력”으로서의 “공”의 본질이 된다는 것인가요. 만일 그렇다면 “공”이란 조로아스타교나 유대系제종교에서 말하는 “영원”이란 개념에 상당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6개의 종교는 모두 다 방금 불법용어로 논하신데로 인간의 사후의 상태를 그려내는 문제와 시름하고 있습니다. 즉 사후, 인간의 육체적측면이 분해하여 심신통일체로서의 인간존재가 休止期間에 들어 갔얼 때 – 그 기간이 一回限이던 몇번이고 되푸리 하던간 – 인간존재는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논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인간존재의 심신통일체로서의 사후의 再生이란 이 6개의 종교에서 공통되는 근본원리를 인정한다면 나로서는 힌두교=불교적설명쪽이 조로아스타교=유대계제종교적설명보담 설덕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空” “假”라는 佛法개념의 고찰에서도 역시 지성에 의한 이해의 어려움이 나타나리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6개의 종교가 모두 하고 있듯이 사후의 생명이란 문제를 시간 공간이란 말로서 표현하드래도 해답을 얻을수 있을지는 의문스렵습니다. 생명은 과연 사후에도 존속하는 것인가. 또는 육체가 무기물의 세계에로 환원된 후 정신은 어디로 가는가. – 요는 이런 의문은 공간과 시간의 기준에서는 해답을 얻을 수 없고 “空” 혹은 “永遠”의 개념에 의해서 처음으로 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55 no image 책 읽기
2130 2007-06-05
책 읽기 토요일에는 평소보담 한두시간 일찍 일어 난다. 오늘은 새벽 어둠의 장막이 걷히기 전 네시경에 눈을 뜨고 냉수샤워를 하고 나서 침대에 누운 채 머리맡에 둔 책들을 다시 살핀다. 29일 출발예정으로 잡혀 있는 실크로드 순례여행을 위해 구입한 몇권의 책들과 김달진선생이 譯解한 [莊子] 최근에 출시된 ‘데오도어 아도르노 Therdor W. Adorno’의 [말러-음악적 인상학 Mahler-Eine msikalische Physiognomik]등을 차례대로 한 두 페이지 씩 읽는다. 이 새벽의 책읽기 儀式은 책을 읽기 보담 책과 아침인사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한 권에 국한 하지 않고 고르게 훑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기분에 따라 한 권을 골라서 읽기 시작한다. 오늘 새벽에 뽑힌 책은 ‘수잔 휫필드 Susan Whitfield의 [실크로드 이야기 Life along the Silk Road]다. 여행사에서 소개해준 실크로드에 관한 책들 중에서 신뢰가 가면서 역사를 픽션으로 재구성하여 ‘상인 이야기’ '병사 이야기’ ‘목부牧夫 이야기’ ‘공주 이야기’ ‘승려 이야기’ ‘화가 이야기’등으로 실크로드가 한창 번성하던 당시에 살았던 여러 직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의 모험적이며 비극적인 삶을 복원함으로서 독자들의 상상을 통해 시간을 뛰어 넘는 공감대를 안겨주면서 자연적으로 여행의 좋은 밑걸음이 되는 안내서 역할도 한다. 그 수 많은 책들 중에서 자기가 필요로 하는 책을 고르는 일도 어렵거니와 구입한 책들을 제대로 읽어내는 일 또한 게으름을 허용하지 않는 채찍이 될 수 있다. 게으름을 피우지 말아야 하는 정도를 가지고는 아직 큰소리 칠 단계는 아니다. 아예 생활전체의 리듬을 여기에 맞추어야 비로소 제대로 만족할 수 있는 독서생활이 보장된다. 운동 수면 식사등 신체 리듬을 좌우하는 요소들을 세심하게 제어 하지 않으면 효율이 크게 떨어진다. TV앞에서 드라마 등을 보면서 느긋하게 폼을 잡는다면 독서에는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 보통 하루에 읽게 되는 언어매체로 발행된 출판물들의 분량을 생각해 본 일이 있는데 나의 경우 대략 보통 책 2,3백 페이지 정도를 소화하고 있지 않나 싶다. 이는 시간을 좀 자유스렵게 쓸 수 있는 근래에 와서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읽는 분량을 제쳐 놓는다면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쉽게 읽히는 책과 아주 난해하여 한 페이지 가지고도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거니와 아예 중도 포기하는 겅우도 나온다. 또 일년 내 내 가지고 다니면서 수없이 재독하는 책도 몇 권 된다. 난해한 책은 자존심의 문제로 비화하여 오기로 다시 달라붙게 되지만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예 서가에는 꽂혀 있지만 서먹한 관계가 되어버린 책들도 생긴다. 최근에 욕심을 내어 거금을 주고 구입한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이 바로 이런 책에 해당한다. 위의 ‘데오도어 아도르노의 [말러-음악적 인상학]도 그리 호락하지 않다. 한때 말러에 심취하였을 때는 그의 아내였던 알마 말러의 전기부터 말러에 관한 책들을 제법 읽은 일이 있었지만(벌서 이십년을 넘는 옛날 이야기가 된다) 이번에 입수한 말러는 나의 말러에 대한 열정이나 애착만으로는 쉽게 공략하기 힘들 것 같다. 그리고 나이를 먹으면서 책을 공략하는 관점도 조금 달라지기 시작했다. 多讀과 精讀을 실용적으로 잘 분간을 해서 독서의 집중력을 높이는 쪽에 역점을 두기 시작한다. 독서의 한 변칙적인 모습으로 내가 새로 개발해 낸 것은 유명 서점(주로 교보문고)에서 몇시간이고 훔쳐 읽는 일도 놓칠수 없는 재미있는 독서법이다. 나의 경우 욕심을 많이 낼수 없는 형편이라 책을 구입하는데 제한을 받기 때문에 아예 서점에서 독서를 하는 방편도 고안해 냈다. 요즘과 같이 책값이 너무 뛰어서 닥치는대로 구입하던 옛날과는 달리 돈에도 꽤 신경을 써야 한다. 지난주말에 구입하려다 욕심은 나지만 너무 비싸서 중도 포기한 경우도 있다. [고대인이 그렸던 ‘상징’분석 – 세계의 모든 문양]은 정가가 5만 9천원에다 대형 사전정도로 무거워서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결국 이 책은 서서 좀 훑어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을 눈여겨 봐 두는 것 자체가 구입못지 않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세계에 널리 흩어져 있는 지역과 시대별로 발굴된 고대인의 모든 문양을 문화인류사적인 관점과 예술적인 시각에서 해석을 시도한 대단한 역작으로 탐이 나는 책이었다. 독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리 쉽게 현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실용적인 길라잡이식 자료들을 제쳐 놓는다 하더라도 독서가 삶과 생활에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게 하려면 상당한 기간의 숙성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독서란 평생을 걸처 아주 긴 안목에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습관화 해야 결실을 볼 수 있는 그런 호흡이 매우 긴 투자이며 삶의 본질에 와 닿는 인프라이다. 해외 여행을 하면 비행기안에서 주로 서양사람들이 책을 읽는 걸 많이 목격하게 되는데 이는 일본에서 주로 전차안에서 책읽는 사람을 많이 보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다가 오는 것이다. 선진국이란 문화를 통해 균형 잡힌 교양과 지식을 두루 갖춘 다수의 일반 국민들에 의해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연간 출판물 발행 종류와 부수에서 미국과 일본이 선두를 달리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주말 토요일은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날로서 신문사에서는 각기 책읽기 특집판을 내놓고 있다. 문화 예술의 긍지를 가지고 살아 가는 불란서에서는 국립TV채널에서 일주일에 한번 책읽기 켐페인의 일환으로 유명인사들의 독서감상 인타뷰 프로가 유명하다. 나는 그나마 주말의 이 독서특집호를 훑어 보는 재미로 주말을 기다리는 일이 많다. 오늘 아침 조선일보의 특집호 BOOKS에는 장영희의 ‘창가의 나무’ 와 ‘84년 76일동안 단독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히말라야 고산도 오른 남난희여사의 지리산 은둔생활을 기록한 ‘낮은 산이 좋다’등이 신선하게 다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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