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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9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전제를 마치고
63 2017-11-21
[20세기의 미술과 사상] 씨리즈, 轉題를 마치고. 2016년 10월 31일부터 [대안 미술공간 소나무 갤러리]의 칼럼에 약 일년 동안 번역을 하여 전제했던 글로, 이 글의 원전은 일본 [미술수첩사]가 2002년 3월 20일자로 발행한 [20세기의 미술과 사상]에 관한 특집이다. 총 47인의 현대사상가의 글과 여기에 대응하는 일본의 석학들을 그 전문영역에 따라 배정하고 주제와 연관시켜 소개하고 있다. 執筆者紹介欄을 보면, 현대 일본의 지성들이 모두 동원되다 싶이 하여 일본의 지적 저력을 실감케 해 준다. 미술이 한 사회의 문화의 중심적 근간을 이루며 그것이 곧 인류문명의 보편적인 대세속으로 녹아 들어 간다고 보면, 이 특집은, 바로, 그러한 맥락을 제대로 짚고 있다. <편집-목차란에 실린 글> Art and Ideas in The 20th Century 시대를 인도한 사상가 47인 현대미술의 비평 ----- 새로운 파라다임 “본서는 20세기미술의 사상의 확립에 공헌한 미술사가, 미학자, 비평가, 철학자 등 47인을 선출하여 각각의 언설을 소개하면서 전체로써는 ‘20세기미술’을 독해해 보려는 시도이다. 가지각색의 미술사적인 접근에 더하여, 여기서는, 시대나 문화의 양상을 읽으 내려는 적극적인 연구자들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일본에서 번역이 되지 않으며, 소개가 들 된 중요한 사상가에 대해서도 그 내용을 가능한데로 소개하도록 노력했다. 물론, 여기에 다루지 못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으나 양해를 기대하며, 이 기획이 우리나라의 미술환경에서 활성화의 일조가 되기를 기대하는 바다.” 谷川屋{감수} 西野眞季[편집협력] 동원된 석학들과 일본의 해설자들의 면면을 다시 훑어 본다. 소개되는 원작가 소개글 제목 소개글 집필자 시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 – “작품해석에 새로운 지평을 연 정신분석” 다니가와 아쯔시 쟉.라캉(Jacques Lacan) – “회화의 기능의 근본원리를 묻다” 아오야마 마사루 구스탑. 루네. 호케(Gustav Rene Hocke) “마니에리슴을 예술현상전반에 적용 다니가와 아쯔시 아로이스. 리글(Alois Riegl) “미술사에서 뷘학파 최대의 공로자” 미야시다 마고도 하인릿히. 뷀프린(Heinrich Wollflin) “순수한 감상형식으로써의 미술사” 미야시다 마고도 엘빈. 파노브스키(Elwin Panofsky) “세계의 정신까지 독해해 내는 이코노로지-를 확립” 잇죠.가스히코 E.H. 콤브릿지(E.H. Gombrich) “심리학. 사회이론을 원용하면서 미술을 독해한다” 마즈에다. 이다루 그로드. 레비. 스토로우스(Claude Levi Strauss) “기호론으로 예술을 독해한 구조주의자” 시노하라.모도아끼 메이야. 샤피로(Mayer Schapiro) “현대미술비평을 역사연구로 삼고 자리매김하다” 마즈에다.이다루 료자.프라이(Roger Fry) “포마리즘비평가로써의 신화” 가와다 도끼고 그라이브.벨(Glive Bell) “바뀌친 포-말리즘의 [교의]” 가와다 도끼고) 올데가. 이. 가셋드(Jose Ortega y Gasset) “선구적인 20세기예술론” 다니가와 아쯔시 도날도. 프레쯔이오지(Donald Fresiosi) “[미]를 [과학]하는 근대미술사학의 부곡을 지탕함” 스쯔끼 마리꼬 에우에니오. 돌즈(Eugenio D’ors) “20세기 미술에 깔리는 바로크개념” 다니가와. 아쯔시 안드레 브루턴(Andre Breton) “눈은 야생의 상태에서 존재한다” 다니가와. 아쯔시 죨즈 바다이유(Georges Bataille) “물질의 강한 힘에 의해 인도된 [모양없는 모양] 지바.후미오 밋셀 레리스(Michel Leiris) “피카소에서 베이콘으로, 창조행위로써의 비평” 지바.후미오 로-란 발도(Roland Bartthes) “Signifiant, 혹은 빠져 나가는 알벨찌누” 스즈무라 가쯔나리 작끄 데리다(Jacque Derrida) “있는지 없는지 알쏭달쏭한 베일” 스즈무라 가쯔나리 질 도울즈(Gilles Deleuze) “차이와 표층의 철학” 다니가와 아쯔시 밋셀.후-코(Michel Foucault) “시각문화의 제도성이나 이데올로기를 다시 묻다” 아오야마 마사루 쟝 프란소와 리오탈(Jean-Freancois Lyotard) “포스트 구조주의에서 모-던에로..시대를 표류” 시노하라 모도아끼 윌리엄 루빈(William Rubin) “미국현대미술의 융성에 기여” 오사끼 신이치로 하롤드 로젠버스(Harold Rosenberg) “Action Painting의 명명자” 오사끼 신이치로 그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포마리즘비평의 확립자” 오사끼 신이치로 마이켈 프리드(Michael Fried) “포마리즘비평에서 최상의 성과” 오사끼 신이치로 로자린트 크라스(Rosalind Krauss) “20세기의 미술의 역사 그 자체를 재검토하다” 고니시 노부유기 뒤엘리 드 듀-브(Terry de Duve) “뒤샹이란 어떤 자인가” 다니가와 아쯔시 T. J. 크라-크(T.J. Clark)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의 사회사” 다니가와 마사유기 폴 크라우즈(Paul Crowther) “포스트모던에 있어서의 작품의 미적가치론의 소생” 가와다 도기고 노-먼.브라이슨(Norman Bryson) “뉴-아-트 히스토리-의 기수” 스즈기 도기고 이브 알랜 보와(Yve-Alain Bois) “모더니즘이 억압했던 표상 시스템을 분석하다” 다나가 마사유기 한스 벨딩(Hans Blting) “미술사의 파라다임 쉽트” 마스터 도기유기 아-사. C. 단토(Arthur C. Danto) “팝 아-트를 철학자로써 논하다” 스즈기 마리고 할 포스트(Hal Foster) “저항의 포스트 모더니즘” 구레누마 노리히사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카메라라고 하는 미디어가 탄생시킨 지각의 미학” 마에가와 오사무 데오돌 아드르노(Thodor W. Adorno) “”자본주의하의 문화비판의 실직한 선구자” 미나미 쇼-고 마-살 막르한(Marshal Mcluhan) “미디어는 멧시지이다” 아가미 마리고 에드워-드 사이도(Edward W. Said) “역사와 문화를 대상으로 부상시키는 비판의 눈” 다게나가 히도시 보-리스 구로이스(Boris Groys) “전위 예술이란 [새로운 것을] [수집하는 것이다] 라고. 아사누마 게이소 쟝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소비사회에서 소멸하는 예술을 고발함” 쯔가하라 후미 W. J. T. 밋첼(W.J.T. Mitchell) “화상이 시각을 능가하는 현대의 시각문화를 비판” 스쯔기 마리고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역사적 변전을 거듭하는 세계시스템의 끊임없는 해석자” 미나미 쇼-고 기-도우볼(Guy Debord) “자본주의 사회와 예술의 일상을 비판” 이사라시 다로 볼 뷔리리오{Paul Virillio} “정보문명이 갖는 부정적측면을 각성시킴) 요시오가 히로시 린다 녹크린(Linda Nochlin) “미술사에 젠다-의 시점을 초래함” 사가가미 게이고 그리젤다 보록(Griselda Pollock) “휘미니스트에 의한 미술사의 파라다임쉽트” 사가가미 게이고 발행사: ㈜ 미술출판사 ISBN4-568-40063-5 C3070 ©Bijutsu Shuppan-Sha, Ltd, 2002 http: //www.bijutsu.co.jp Printed in Japan
1428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 누락분
78 2017-11-13
*漏落分 구스탑 . 루네. 호케(Gustav Rene Hocke) “마니에리슴을 藝術現像전반에 적용” 로벨트. 그루티우스는, [유럽문학과 라틴중세]에서 마니에리슴을 [아마도 고전주의에 대립하는 모-든 문학적경향의 공분모]라고 불렸다. 그것은 모-든 시대의 고전주의에 대한 補足現像]이며, [유-럽문학의 하나의 定數]이다, 라고. 그루티우스의 제자였던 구수탑.루네.호케는, 그의 [迷宮으로써의 세계]에서, 이 의론을 예술현상전반에 일거에 적용하여, 고전주의와 마니에리슴을 인간성의 두 [原身짓]이라 규정하고, 양자의 관계를 아래와 같은 계열간의 대립으로 번역한다. 구조 – 현상, 남성적 – 여성적, 로고스 – 비밀, 자연적 – 기교적, 승화 – 폭로, 평형 – 불안전, 통일성 – 분열성, 통합 – 분해, 경화 – 해체, 성격 – 개성, 아니무스 – 아니마, 형태 – 외곡, 위엄 – 자유, 질서 – 반항, 원- 타원, 관습 – 인공성, 신학 – 마술, 교양학 – 신비학, 밝음 – 비밀 -------. 하위계열에 표시한 마니에리슴의 규정을 보면, 그것이 바로크 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 같다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호케는 도울즈의 바로크론에 22종의 [바로크]이 올려진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지나치게 풍부함으로 해서 오는 공혹]을 갖으 온다고 비판하고 있다. 호케는 역사적 바로크양식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바로크에 관해서는 판단정지한 모양새로 의론을 밀어 간다. 크라식을 한쪽으로 두면서 다른 한편 바로크라 하는 [아이온]이 오는가. 니면, 마니에리슴라 하는 [원신흔들기]가 오는가, 라고 하는 문제는 그러함으로 해서 시점의 상위에서 뿐 아니라, 본질적인 의미의 미결정 그대로이다. 헌대, 호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마니에리슴의 신화적 조상은 마르시아스이며, 위엄과 광휘에 넘친다고 하면서, 지금으로써는 약간 한물간 존재로 되어, 고전주의의 선조는, 말하자면, 아포론이다]. 사듀로우스의 한사람인 마루슈아스는, 피리를 잘 부는 자신의 기술을 믿고, 불손하게도, 피리의 명수 아포론에 악기연주의 경기를 도전한다. 승자는 폐자를 어떻게 다루드래도 좋다는 약속으로, 무-샤를 심판으로 하고, 경기를 진행했지만, 쌍방 모두 비슷하게 훌륭한 연주를 보여 주었다. 그래서 아포론은 악기를 거꾸로 해서 불수 있는가라고 마루샤스를 도발했다. 견검에서는 이것이 가능하지만, 피리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폐한 마르샤스를, 아포론은 소나무에 묶고 매달아 놓고 전신의 껍질을 벗겼다고 하였다. 호케에 의햐면, 마르슈아스는 또 카인이며 캬리반이며 아포론은 또 아벨이며 아이엘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전자들은 후자들을 끊임없이 타도하려고 생각했다. 헌데, [은총을 입는]자 아벨은 한순간의 죽음의 뒤에 가서 한층 더 광휘에 빛나는 소생을 할 것이다]. 마니에리시슴은 고전주의를 우선 平板化에서 살려 내고 그런 후에 보다 강렬한 표현수단을 고전주의에 획득케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타원의 종족, 달의 종족]인 마르슈아스는 [원의 종족, 태양의 종족]에 지나지 않는 아프론에 대해 [불가결의 보각을 이룬다]라고 하는 것이다. 호케는 유럽의 가장 중요한 마니에리슴 시대로 다음의 다석가지를 들고 있다. 알렉산드리아기(전 약350년-150년), 로-마의 [白銀라틴]시대(14-138), 1520년부터 1650년에 이르는 [의시적]마니에리슴시대, 더 나아가서, 로망파, 특히 1800년부터 1830년에 이르는 라틴계의 로망파, 최후로, 1880년에서 1950년에 이르는 시대. [미궁으로써의 세계]는, 이 [의식적] 마니엘슴의 세계를 종횡으로 논하며, 팔미쟈니.노-, 알친 보래도, 몬스.지지트리오라고 하는 종래 전혀 알려지지 안했던 화가들에 조명을 데며, [蛇狀曲線形], 이나, [환상모방]과 같은 마니엘슴 특유의 개념을 밝히면서 자유롭게 시대를 초월하는 점에 매력이 있다. 20세기의 예술가들, 키르히나-.칸딘스키, 쿠레, 삐카소, 뒤샹, 엘른스트, 디.키리코, 단키, 다리, 그리고 특히 파브릿쯔. 그래릿지가, 마니엘슴의 개념에 들어 간다. 호케에게는, 슈리얼리즘 란 것은, 마니엘슴라고 하는 [원신 짓]의 20세기적 현현에 지나지 않는다. 호케는 [미궁으로써의 세계] 2년후에 [문학에서의 마니엘슴] (1959)을 냈다. 스승 쿠루티우스의 일을 기점으로 삼고, 마니엘슴개념을 범 유럽적으로 확대한 실로 놀라운 서책이다. [미그나. 그라에기아](1960)는, 희랍적 남부이테리편력]의 부제가 말하고 있듯이 이 시대의 희대의 석학의 지중해세계에로 지향한 고고학적기행소설이다. 이 사람의 지적탐구의 헥심에 무엇이 있는가를 암시하는 적절한 읽을 꺼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호케는 1974년에 [절망과 확신 20세기말의 예술과 문학을 위해]를 公간했다. [미궁으로써의 세계]가 마니엘슴개념을 가지각색의 각도에서 다루면서, 그 경이의 샹상에 자유롭게 놀아난 것이었다면 본서는 제2차대전이후의 특히 60년대이후의 20세기예술의 대부분의 양상에 [불안과 절망]을 보게 되는, 철저한 페시미즘에 물든 책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도르노의 [미힉이론]과 通底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호케는 이 [불안과 절망]의 극점에서 [확신]이 나오리라는 것을 논증하려 한다. [절망-확신]의 긴장관계가 20세기말의 예술에서 읽을 수 있는가 없는가 가 본서의 주제가 되어 있다. 현대예술의 문제를 확대한 知의 지평상에서 저상에 올리는 호케의 논점은 새삼 고려에 넣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대예술을 마니에리슴개념과의 관계로 생각하는 가능성 혹은 불가피성을 나타낸 것으로, 호케는 각별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약력 * 1908년 브릿셀에서 태어나다. 본대학에서 E.R.그르티우스에 관한 글로 철학박사 학위 취득. 이후 작가. 비평가로써 활약. 87년 몰. 주저 * [미궁으로써의 세계] 1966. [문학에 있어서의 마니에리슴] 1971. [절망과 확신] 1977. [마그나 그라에키아] 1996. [유-럽의 일기] 1991.
1427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76 2017-11-05
50번쩨(最終回) 그리젤다. 보록(Griselda Pollock) “훼미니스트에 의한 美術史의 파라다임의 變革” 그리젤다. 보록은, 린다.녹크린과 나란히 훼미니즘, 젠더의 시점에서 미술을 새로 잡아 내려고 하는 현대의 대표적 논객의 한사람이다. 1970년대의 훼미니즘운동과 같은 시기에, 여러가지 논고를 연 이어 전개해 왔으며, 그 가장 두드려진 특징은 개별의 작품이나, 작가를 다시 읽음으로써 미술의 역사의 일부를 하나씩 새로 쓴다는 작업도 그렇거니와 오히려 전체를 포괄하는 시점의 묘색이, 그 논술 넘어 아주 큰 목표로 잡혀 있었다. 일반적으로 훼미니즘의 관점에서 미술의 새로 읽기는, 70년대 기타의 훼미니즘운동과 연동하여, 우선, 역사속에 매몰되 있는 여성미술가의 발굴을 첫 단초로 삼고, 과거에 있었던 여성예술가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재능을 상찬하는데서 부터 시작했었다. 허나, 80년대 들어 와서는, 이러한 방법에 의한 여성예술가의 역사를 구축하는 것은 단순히 여태까지의 남성의 視座로 형성된 미술사에, 빠져 있는 여성 예술가를 첨가하고 [보족]하는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 혹은 여태까지의 미술사가 [백인 남성의 미술사]라고 한다면, 이를 180도 되집어서 [백인 여성의 미술사]로 바뀌 쓰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많은 휘미니스트들이 알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데체, 여성판의 레오날드나 미칼란제로를 만드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것으로는, 여성들 역시 남성의 과오를 되풀이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보록은 남성들이 여태까지 행해 왔던 일방적인 미술의 역사의 구축을 두번 다시 여성이 되풀이 하는 것의 무의미함을 알고, 여태까지와는 전적으로 다른 파라다임의 제안이야 말로 이러한 파라독스를 분쇄하는 것임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거장]과 [작품]을, 역사를 따라 줄을 세운다는 남성들이 구축해 왔던 미술사의 규범의 틀 그 자체를 새로 물어야 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보록의 시선은 이리하여 기존의 미술사의 틀의 타파와 새로운 파라다임의 제안으로 향하게 되었다. 허나 여기서 주목 해 봐야 할 것은 보록이 목적하였던 바 결코 종래의 미술사학이라고 하는 쫍은 영역속의 파라다임의 변환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록은 분명하게 그녀 자신의 연구가 [새로운 미술사]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보록은 이 경우에 미술사 라고 하는 개념조차 벗겨 내려고 하는 것이다. 즉 보록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훼미니스트미술사]가 아니라, 복수의 [미술의 역사]에 휘미니스트로써 개입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본다면, 그것은 [문화의 역사를 전면적으로 새로 쓰게 되는 파라다임의 변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파라다임의 변경의 주장과 묘색은, 저작물들이 쌓일때 마다 강하게 주장하기에 이르는 바, 허면, 보록이 주장하는 훼미니스트의 시점의 개입에 의한 아-트의 역사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보록의 주장에 의하면, [훼미니스트에 의한 개입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만드는 측에서 보는 여성의 연구이다. 로지카.바-카-와의 공저 [女. 아트. 이데올로기] 에서는, 고대나 중세부터 시작하여, 소프니소바.앙길라소, 알데 미지아. 젠 디렐스키, 유딧트.라이스텔, 아드라이트. 라비유=귀알, 앙게리카.카프만, 로-자. 보늘, 베르트.모리죠, 메아리.카삿트, 슈쟌느.베라톤, 레오놀.휘-니, 메렛드.오펜하이머, 마리솔.에스코발, 에봐.헷세, 메아리. 케아리 등 현대에 이르는 수 많은 여성 아-티스트들의 작품과 활동이, 상세하게 다루어저 있다. 그녀들의 작품을 진지하게 분석함으로써, 여성의 예술에 관해 한결 같이 되푸리 되던 [여성다움]이라고 하는 스테레오 타잎의 비평이, 부각되어 왔다. 단지, 이는, 어디까지나, 여성 아-티스트의 역사가 아니고, [여와 예술과 이데올로기의 상호관계를 분석한 것]이라고 말한다. 1981년의 [시선과 차이 – 훼미니즘로 읽는 미술사]에서도, 만드는 자의 입장의 여성을 연구하는 것에서는, 시점이 바뀌지 않았다. 예를 들면, 여기서는, 메아리.카삿드와, 베르트. 모리죠를 중심으로, 그녀들의 작품을 19세기 후반의 근대 도시 빠리의 사회적 배경안에서 비추어 내고 [여성적인 것]이라고 하는 말자체에, 계급적 함의가 있었음을 논하고, [훼미니스트에 의한 개입이, 단순한 여성의 문제에 머물음이 없이, 계급이나 인종의 문제에 관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인상파를 특징짖는 [현대생활]을 그린 회화가 섹슐알리티를 둘려 싼 제문제와 연결되 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 해서 모더니스트의 미술사관의 偏向을 지적하고 있는 점이 더욱 흥미롭다. 더욱이 이 저작에서는, 라파엘전파가 그린 [기호로써의 여성]의 문제를, 정신분석적 해석을 통해 논하고 있는바, 이는, 최근의 보록에 특히 현저하게 접근하는 것을 뜻한다. 여하턴, 보록의 언설의 매력은, 스스로 언급하고 있듯이, 여성의 역사를 불평등과의 투쟁의 역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여성들이 여성임으로 해서 곤난한 상황을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문제 삼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헌데, 훼미니즘의 사상은, 어떻튼 탁상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사상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며, 실제 보록의 경우도, 실천가로써 70년대의 훼미니스트.아-트에 관해 언급할 뿐 아니라, 가지 각색의 여성들의 예술활동의 장을 설립하기 위해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넓혀 갔었다. [브릿팃시.훼미니스트 아-트 앤드 히스토리즈 넷워-크]의 설립과 운영에서 보여준 공헌은, 그 일례라 할 수 있다. 보록의 새로운 규범, 파라다임의 묘색의 의지는, 이렇게 저작과 활동의 양면에서 아직도 여전히 착실하게 의욕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때로는, 그 난해한 문장과 혼란스려운 이론의 전개는, 자주 비평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허나, 경우에 따라서, 훼미니스트의 시점에 의한 미술사나, 리비죤니즘의 미술사가 빠지기 쉬운 측면에 관해서도 세심한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미술사의 틀을 넘어선 장대한 파라다임의 제안에 도전하는 보록의 자세에는, 가지각색의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약력: 옥스포-드 대학에 이어 런던대학 부속 코들트 연구소에서 역사와 미술사를 배움. 현재 영국의 리-즈 대학예술학부 교수 및 동대학 문화연구소 소장. 주저: [여. 아트. 이데올로기](로직카.파-카와의 공저) 1992. Old Mistresses: Women, Art and Ideology(1981 London: Pandora Press) [시선과 차이] 1998 일본. Vision and Difference – Feminity, Feminism and the History of Art(1998 London: Routhledge) Mary Casatt: Painter of Modern Women(1998 New York : Thames and Hudson) Differencing the Canon : Feminist Desire and Writing of Art’s History(1999 London : Routledge) Looking back to the future : essays on art, life and death(2001: G + B Arts International).
1426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81 2017-10-31
49번쩨 린다. 녹크린(Linda Nochlin) “미술사에 젠더-의 視点을 도입하다” 린다. 녹크린은, 그 전적으로 새로운 視点에 입각하여 미술 연구에 크-다란 족적을 남긴 제1인자로, 후세에도 기억되고 있는 가장 위대한 현대 美術史家의 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녹크린이 쏘아 올린 新視点으로 무엇 보담 중요한 것은 훼미니즘, 젠더-(gender)로 부터의 접근이다. 대체적으로 남성위주의 연구자들에 의해 다루저 왔던 미술작품은 여성의 눈으로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1970년대 다방면으로 전개한 여성해방운동과 유동하는 모양으로 진행한 녹크린의 착실한 연구는 이후 다양하게 발전해 가는 젠더-의 시점에 의한 새로운 미술사사연구를 선도하는 것이 되었다. 녹크린의 초기의 연구는, 역사속에서 매몰된 여성 아-티스트의 문제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미술의 영역을, 개관했을 때, 녹크린의 의문은 먼저, [왜 여성의 대예술가는 나타나지 안했던가]에 도달한다. 녹크린은 여성의 대예술가가 나타나지 안 했던 이유가, 여성자신의 예술적 재능의 결함으로 귀결되는 문제가 아니고, 그것이, 그녀들을 역사속에서 배제하고 엄폐해 왔던 미술사의 저자들이었던 주로 남성들의 미술사가들의 문제였음을 먼저 고발한다. 당시, 대학의 미술사의 택스트의 定番으로 사용되었던, [미술의 역사]의 저자 W. 쟌송은, [한권의 책으로 미술사를 나타내려면 다루어야 할 여성 아티스트는 한사람도 발견하지 못한다]라고 호언하고, 한사람의 여성 아-티스트도 수록하지 안 했을 정도이다. 이와 같이 미술의 역사가, 남성의 일방적인 이론에 의해 재구축된 작위적인 것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나타 냄에, 1976년 녹크린이, 안. 사쟈란드.하리스와 공동으로 계획한, [여성 아-티스트 1550 – 1950]展은, 여태까지 미술의 역사에서 쓰여지지 안했던 여성 아-티스트들에 빛을 조명했던 것으로, 가장 중요한 이와 같은 종류의 작업으로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녹크린의 시점의 귀중함은, 오히려, 이하의 문제 제기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여성들이 가지 각색의 사회적 [제도]나 [인습]에 의해, 말하자면, 역사에 남을 만한 대작으로써의 공공미술작품에 손대는 아-티스트가 되지 못했다는 사회구조적문제가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부각시켰던 사실이다. 공방이나 미술학교에서 행하는 공식적인 미술교육에서 여성들이 불과 100년전만 해도 문전 박대를 당했었다는 사실, 가정안에 갇혀있었던 여성들이, 가정내의 수공예품에서 발휘했던 미술적재능은, 공공미술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오늘날의 미술사관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잡아 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시점을 축으로 하여 녹크린이 연 이어 잡아 냈던 미술작품이나 아-티스트에 대한 해석들은, 우리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측면을 밝혀 내고 여태까지의 개념들을 전복시키며 신선하고 자극적인 충격을 안겨 준다. 그루배의 연구에서 출발했던 녹크린이 여태까지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구체적으로는, 드라구라와, 제-리코, 미레-, 라파엘전파, 마네, 드가, 카삿드, 모리죠, 르느왈, 봔 고흐, 도울즈, 로드랙, 쓰라등으로, 어떤때는 역사를 소급하며 또는 다른 때는, 20세기현대미술에 이르기 까지 넓혀 나간다. 허나 녹크린-의 업적은 이런 젠더의 시점에 특별히 중심을 놓은 것으로 평가 할 수 있다는 한편, 젠더-에만 종시하는 한정된 것이 아님을 여기서 특별히 강조해 두고 싶다. 녹크린-의 저서 [繪畵의 政治學]의 서문에서, 자신의 미술연구의 기본이 [미술사를, “他者性”의 시점에서 생각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남성을 주체로 했을 때의 객체인 여성은, 바로 [타자]이며, [훼미니즘]나 [젠더]의 시점은, [타자성]의 문제를 생각할 때 가장 유효한 시점의 하나이지만, 그것만이 녹크린-의 목적은 아니고, 그것은, 그녀가 지향하는 새로운 미술사의 구축을 위한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현재 나오고 있는 주된 3가지의 논문집 안의, [회화의 정치학]에서도, 특히, 폭넓게 [타자성]의 문제가 다루어저 있다. 즉, [支配者]와 [被支配者], [强者]와 [弱者], [主體]와 [客體], [中心]과 [周邊]등의 문제가 남녀의 관계성에서만의 문제가 아니고, 빈번히 나타나고 있는바, 구체적으로는, 세계의 중심으로써의 구라파와 변경으로써의 오리엔트, 미술의 주류인 아카데미즘와 아반가르드,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관계성등이 나타나고 있다. 이 노문집에서는, 오리엔타리즘의 미술작품에서 검증한 [허구의 오리엔트]이나, 부엘토리코의 화가를 그루배와의 관계성에서 논한 [그루배, 오리엘장소의 의미], 반유대주의를 다룬 [드가와 도레휘스事件]은, 그러한 의미에서, 어느 것도 매우 흥미 깊은 말하자면, [정치적]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몰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녹크린은 젠더의 시점에 의한 연구의 제1인자로써 잘 알려저 있는 바, 그 연구는 빈번하게 오해를 받게 되듯이, 젠더나 훼미니즘 자체가 목적이 되 있는 것은 아니다. 녹크린의 연구가 젠더의 시점에 의한 비슷한 연구언애서도 한층 돋보이는 것은, 그것이, 보다 장대한 역사적, 정치적 시야에서 초래된 것에서 온 것의 다름 아닐것이다. 녹크린의 언설은 기존의 가치기준이나 평가에 의존하는 것을 단호히 물리치고 항상 작품의 진지한 분석과 사회적. 역사적 視座의 물음을 기초로 이들을 적확하게 서로 연결시키며 독자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것으로, 여태까지의 미술연구에서는 없었던 신선한 접근을 연이어 전개하고 새로운 미술연구의 가능성을 개척하였던 것이디. 약력: 1931년, 뉴-욕 브륵크린에서 태어남. 51년 봣사 대학 졸업(철학전공).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사호를 획득(17세기 영국문학). 뉴-욕대학 아-트 인스트튜-트에서 박사호 취득(그루-베론). 봐사 대학 및 예일대학등을 거처, 현재 뉴-욕대학 아-트 인스트티우트 교수. 연구중심은 19세기근대미술. 주저: [회화의 정치학] 1996년 일본. The Politics of Vision; Essays on Nineteenth Century Art and Society(1989) New York: Harper and Row) Women, Art, and Power and Other Essays(1998 New York: Harper and Row)(1부 방역 있음: 제1장 [여성. 미술. 권력] [여성미술대학기요]2000년; 제7장[왜 여성의 대예술가는 나오지 않는가?] 1976. Representing Women(1999 New York : Thames and Hudson) (일부 방역 있음: 제2장 2절[시작으로 끝나는 젠더의 중심성] [언어문화] 1995년. The Body in pieces : The Fragment as a Metaphor of Modernity(1994 New York Thames and Hudson) Realism (1971 New York: Penguin Books)
1425 no image 20세기사상과 미술 씨리즈
80 2017-10-23
48번째 폴. 뷔이리리오(Paul Virillio) “情報文明이 갖는 不定的側面을 自覺케 한다” 왜 뷔이리리오를 읽는가? 그것은 正氣로 돌아 오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은 미친것인가? 그렇치는 안타. 리얼타임로 配信되는 방대한 정보에 현혹되어 우리들은 [이 세상이 미치고 있다]리고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광기 그 자체는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것은 광기 보담 더한 것으로, 거이 痲痺狀態인 것이다. 이 마비를 갖으 오게 하는 것이, 情報化이다. 정보화는 지금 여기에 앉아 있으면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안다고 하는 상황을 만든다. 이 사실은 물론 [진보]란 것이며, 생활이나 일들을 한량없이 효율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움직이지도 않고, 모-든 것을 瞬時的으로 알게 하는 상황이란, 지식과 신체. 행위가 결락된 것을 의미한다. 고도로 발달된 정보환경속에서 알려진 사항들의 의미의 중심은 腐植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이 손쉽게 손에 들어 오면 올수록 지식은 범용해 가게 되는 것이다. 헌되, 우리들은 그 점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자명해 보이는 이 세계의 틀 속에서 구멍이나 금을 보는 것인데, 완성된 정보공간속에서는, 모-든 것이 – 쌕스나 잔학행위와 같은, 한때는 충격적인 것들 조차 – 보통으로 일상적인 것으로 간주해 버린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상황이 마비작용을 불려 일으키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知的作用의 전영역에까지 미친다. 예를 든다면, 이런 것이다. 20세기의 중요한 토픽, 중요인물을 열명, 오십명, 혹은 백명을 들 수 있다. 이들 각자에 관해서 한권의 책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몇 페이지로 개관해 볼 수도 있다. 데이트 베이스는 모-든 곳에 산재해 있으며, 이를 이용한다면 임의의 길이의 택스트를 생산해 낼 수 있고, 편집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지식을 콤팩트하게 압축하여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니쁜 일일까? 아니다, 그것은 조금도 나쁜 일이 아니다. 단지 그것은 침묵을 만들어 낼 뿐이다. 정보가 과부족 없이 제시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미술가나 인문과학의 학생들은 [나에게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우선 매뉴얼이나 키-워드집으로 기초를 갖추고]있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정보는 분명 레-포트로 A를 받는 데는 유효 할런지는 모른다. 허나 그것은 그것으로 끝나 버린다. 그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총체화된 정보에는 不定性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정성이란, 데칼트의 회의와 같은 것, 공인된 세계를 전체로써 거절하는 사고의 힘이다. 부정성은, 직접 무엇인가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닐것이다. 그것은 단지 우리들을 매료한다. 상식을 부정하는 것, 일상적현실을 마비 혹은 작술로 느끼게 하는것, - 사상서를 읽는 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경험에 매료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뷔이리리오는 우리들의 일상적 현실을 만들고 있는 정보 태크노로지가,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정보화에 관해서, 프라스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모-든것의 측면에 대해서, 뷔이리리오는 부정을 내 밀고 있다. 모-든 사람이 정보화에 의해 무엇인가를 얻는 것에 대해 논의하는 대신, 그는 정보화로 인해 무엇이 상실되고 있는 가에 대해 주의를 환기 시키고 있다. 20세기의 위대한 성취로 간주되고 있는 것 – 수송. 통신 태크노로지의 발달에 의해 초래되고 있는 그로벌이제이선이나, 전자 넷워크가 가능케한 리얼타임의 쌍방향적 콤뮤니케이선 – 그것과 더불어 상실된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비행기가 초음속을 실현한 이래, 세계의 모-든 大洋이 가치를 상실해 버렸다]라고 뷔이리리오는 말한다. 한때 긴 시간이 걸렸던 여행을 통하여 신체의 운동과 결부됨으로써 의미를 갖고 있었던 대양은 [지금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바다의 넓음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시속 천킬로로 공간을 이동하는 흐라이트의 시간의 무의미성을 떠 올린다면 좋을 것이다. 그기에서는 여하히 쾌적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가가 문제될뿐이다. 수송 태크노로지에 의해 인류는 거리를 극복하고 공간을 정복하였다. 허나, 이 사실이 동시에 공간의 무의미화를 초래했던 것이다. 전자태크노로지는 더욱 고속으로, 지구상의 모-든 장소를 연결하고 그 고유의 시간. 공간이란 제약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그 결과, 모-든 장소에서의 세계동시성, 리얼 타임의 정보환경이 성립해 가고 있다. 허나, 이로 인해 행위 내지 행동에 입각한 의미는 공동화된다. [우리들은 자기자신과 목표간에 [행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가치를 잃어 버리고, 즉시적인 [상호작용-인터락선]만이 가치가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인터락선은 액선 즉 행동을 소외하고, 인간을 단순히 반응하기 위한 존재로 만든다. 테크노로지-가 세계의 공간을 축소하여 무의미화시키고 살아 있는 신체와 행위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한다 – 이와 같이 기술해 버리면, 뷔이리리오의 사상이란 결국, 반문명적인 패시미즘이 아닌가 라고 말 할지 모른다. 그는 정보화사회의 과속이나 굴절을 적당히 지적함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듣기 좋은 IT 어용학자는 아니다. 그의 사상은 정보문명이 갖는 근본적, 원리적으로 부정적인 측면을 자각케 하고 있다. 뷔이리리오 사상의 헥심은, 바로 이러한 철저성에 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실랄한 비판을 통해, 현대의 미디어나 태크노로지의 모습이 오히려 생생하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뷔이리리오는 반태크노로지-적이라고 부르기에는 오히려 너무 태크노로지에 매료되어 있고, 패시미즘라 부르기에는 그의 문체는 힘이 넘치고 있는 것이다. 뷔이리리오로 인해 논하게 되는 현대문명의 양상은 무서운 것이나, 동시에, 그것은, 뷔이리리오를 이해하지 않고 태크노로지의 소박한 예찬자가 발설하는 해 묵은 풍경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이며 신선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비판적사고가 갖는 각성작용, 우리들을 正氣로 되돌려 놓는 힘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IT]란 이름의, 총통없는 파시즘가 지배하고 있는 일본의 종통문화가 완전히 결하고 있는 점이다. 약력: 1932년생. 열 다섯살 때 연합군에 의한 난토 폭격을 경험. 스탠드 그라스 작가가 되려고 빠리의 공예학교에 입학하여 야간에 소르본느 대학에서 철학강의를 청강. 75년에 빠리 건축학교 교장. 훼릭스. 카다리와 자유방송 [라디오 토마도]를 창설한다던지, 가리레-출판사에서 [비판공간] 코랙선을 주재한다. 또한 주거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후생문제를 정비하는 활동을 했다. 자기 스스로 [철학자]가 이니고 [도시계획자]라 규정했다. 주저: [속도와 정치] 1989년 일본. [戰腦世界 – 최악의 씨나리오에 대응] 1998년 일본. [순수전쟁] 1999년 일본. [정보화 폭탄] 1999년 일본. [전쟁과 영화] 1999년 일본. [환멸에 대한 전략] 2000년 일본. 기타, 불어 원서 다수.
1424 no image 책 소개
73 2017-10-22
책 소개 [自然美學 “EINE ASTHETIK DER NATURE” 1991년] 말틴. 젤(Martin Seel)著 - ‘일본 우니벨시타스 총서’ 1002번에 등제되어 있음. 現代美學의 새로운 地平을 열다 “왜 우리들은 자연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는 가. 자연을 배려하는 것이 인간사회의 보호로 이르는 가. 왜 자연미는 인간적실존이 그 생을 슬기롭게 성취하도록 그 범례적인 장소가 되고 있는가. 자연을 미적으로 지각하는 가능성을 체계적. 규범적으로 기술하여, 미학과 윤리의 근원에 새로운 전망을 열어 본다” – (책 소개의 말) 序 자연미학이 다루는 것은, 우리들이 자연에 대해서 왜 호감을 갖게 되는가 라고 하는 그 이유에 다름 아니다. 자연미학은, 인간이 대체로 외적자연을 좋아하는 이유를 간결하게 기술함과 동시에, 자연이 생활세계로써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인간이 매료되는 이유란 실제적으로는 어떤 것인가를 아야기 하려고 시도한다. 자연미학은 인간에게 어떤 미적가치를 갖게 되는가를 해명하고 그로 하여 자연을 존중하고 보존하기 위한 각별한 이유에 관해서도 언급한다. 그것은, 그러한 관심이 자연적세계에 대한 비도구적으로 관계를 갖게 하고 응호하는데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의 응호에 미학이 공헌할 수 있는 것은 미학이 자연미를 今日的인 경험에 입각하여 실제로 말을 통해 시도해 볼 수 있을 때 만이다. 우리들이 외적자연에 대해 품게 되는 근대적인 호감의 근거란 어떤 것인가. 더 이상 내적인 의미가 믿을 수 없는 지각에 대해 자연의 감성적인 매력은 어디에 있는가. 우연적인 형태의 영역이 어떻게 하여 인간의 전일적인 삶의 가능성이 되고 있는가. 미적자연은 예술의 원상인가, 혹은 그 모상인가. 왜 자연미는 [인간적] 실존이 그 삶을 슬기롭게 성취할 수 있도록 하는 범례적인 장소가 되고 있는가. 자연을 슬기롭게 다루는 것이, 말하자면, 인간세계의 보호에 귀착되는가 – 이러한 물음에 대해 주로 18세기에 정식화된 고전적인 회답을 단순하게 반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새로운 회답을 시도해야 하는 시기에 와 있다. 본서의 회답은, 자연을 미적으로 지각하는 가능성을 체계적 더한 규범적으로 기술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기술에는 인간에 의한 자연관찰의 역사도 포함되겠지만, 본서에는 그러한 역사는 기술되지 않으며, 또한 자연에 대한 호감의 이론의 역사도 기술되지 않는다. 나의 관심사는, 자연미를 세속적으로 변명하려는 것이다. 허나 그러한 시도는 그것이 약속하는 이상의 것을 다루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자연미학이 자연을 다루며 예술 및 기타의 미적영역을 다루지 않는다면, 자연미학은 그 대상을 놓치는 것이 될것이다. 자연미학은 그 대상의 특수성을 들어 낼 수 없을 것이다. 자연미학이 그 주제를 전개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일반미학의 견취도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시도가 성공한다면, 그때는 이미 미학의 콘택스트도 넘어서 있게 될 것이다. 자연미학을 상술한다면, 그것이 삶의 긍정적인 점에 관한 일반윤리학의 일부가 될 것이 판명될것이다. 본서의 결정적인 테-제는 이와 같이 내용상 수용적인 구조로 되 있다. 자연미가 파악되는 것은 그 안에서 인간의 하나의 범례적인 삶의 가능성이 직시되는 경우에 한정된다. 그러함으로, 미학의 탐구는 행복론적윤리학을 시작하는 것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서론에서는, 미적인 자연관계와 그 철학적고찰과의 제관계가 간략하게 논해저 있다. 서론에 이어 세개의 장에서는, 미적으로 지각되는 자연의 근본형식이 하나 하나 논해저 있고, 제1장에서는, 자연은, 의미소개적 방식으로 현출이 요동치는 공간으로 제출되며, 제2장에서는 우리들의 생활을 모양짖는 장소로써 그려저 있으며, 제3장에서는 예술작품과 그 양식을 제재로 하는 즉흥으로써 자연이 묘출된다. 제4장에서는 이들 세개의 관점의 상호 연관이 탐구되어 있다. 풍경현상을 시야에 넣고 미적자연의 총일성 이론이 구상되 있다. 이들을 이어 양장 및 결론은 공히 [선행하는 서술의] 일면성을 수정하는 방법으로 이끌어 간다. 즉, 그 때 마다, 고찰의 지평이 확장됨으로써, 자연미학의 기초를 논한 제장에서 설명되지 못했던 제전제 및 그기서 제거되지 못했던 제제약이 밝혀진다. 제5장은 자연미를 미적예술 및 기술적예술의 중요성에 직면케 한다. 제6장에서는 선행하는 분석의 윤리적의미가 전개되며, 자연이 도덕적문제로 논구된다. 결론으로 미적자연의 윤리적의미가 상대화되며, 잘 성취된 삶의 형식에 관한 일반적언명이 갖는 신분이 음미된다. 제1장에서 제5장에 걸쳐서는, 콘스탄쯔대학철학부의 1989/90년 동학기에 교수자격논문으로 수리되었다. 앙겔라.케프라-, 크리스트.멘케=에카스, 칼르로스.베래타, 및 알프레히트.뷜마-로부터 받은 많은 의론과 조력에 감사한다. 율겐.하바마스와 한스.로벨트 야우스는 비판적인 코멘트를 보내 주었다. 많은 실무상의 일로 베른스트.릭데슐와 말틴.프랑크는 나를 지탕해 주었다. 벤야민과의 유보가 없었다면 모든 것이 지루한 감을 주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목차 저론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 1, 원상인가 모상인가 2, 美的관계 3, 자연학은 어떤 자연을 다루는가 4, 윤리학으로써의 자연철학 5, 미학의 용어법에 관해서 제 1장 관조의 공간으로써의 자연 1, 현출의 희롱 2, 의미를 결한 세계 3, 관조적 의식 4, 관조의 형이상학과 관조의 이데올로기 5, 관조적 판단 제 2장 조응하는 장소로써의 자연 1, 생의 반영 2, 형성하는 공간 3, 조응적의식 4, 조응의 형이상학과 조응의 이데올로기 5, 조응판단 제 3장 상상의 무대로써의 자연 1,예술이라고 하는 가상 2, 세계와의 희롱 3, 상상적의식 4, 예술의 형이상학과 예술의 이데올로기 5, 상상적판단 제 4장 자연지각의 시간 미적자연의 통일성 양의적 경험 자연의 규범적개념 풍경의 자연의 회고 자연풍경. 문화풍경. 도시풍경 제 5장 예술의 위대함 1, 미적인것의 세가지 차원 2, 예술작품의 통일성 3, 미적자연과 미적예술 4, 기술적예술의 기간 5, 미적자연의 상호주관성 제 6장 자연미의 도덕 1, 자연미학에서 자연윤리학으로 2, 윤리에 관한 구별 3, 좋은 삶의 세가지 관점 4, 윤리적 경험으로써의 미적자연 5, 도덕적 문제로써의 자연 저론 자연고찰의 한계 1, 그것은 자연이 아니드래도 좋다 2, 두가지 상호작용 3, 좋은 삶의 추상개념 4, 善과 옳 바름 5, 외부에의 눈짓 책 소개의 변 - 조규현 약 한달동안 미주 일원을 돌아 보고 귀국하면서, 그 동안 애독서의 하나로, 짬짬이 훑으 보았던 말틴.젤의 [자연미학]을 소개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미적탐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오고 있는데 비해 그 이론적인 맥락이 매우 빈약함을 절감한다. 예술적 문맥에서는, 우리민족이 갖고 있는 높은 감성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바, 고무적인데 반해, 그 이론적 바탕은 지역적인 것에 한정되어 전개됨으로써, 지구권으로 확상되 가는 인류문명의 차원에서 다시 우리를 볼 수 있는 대목에서는 무언가가 심히 결락되 있다는 인상을 준다. 철저하게 자기를 분석하면서 이를 객관적으로 혹은 이론적으로 정립해 가지 않으면, 설득력이 약해 지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 현대문명은 자기정체성 넘어 세계적인 차원의 파래다임으로 판단하지 않으면, 안되는 연유이다 말틴.젤의 [자연미학]은 미학적 논술이면서 동시에 문명비판의 차원으로 읽을 수 읶는 택스트가 되는 근저이다. 그는 철저한 논리와 이론으로 무장되 있다. 이는 미학에 한정되지 않으며, 타자와의 소통에 결정적인 요소로 평가하게 된다. 필자는 일어를 해독할 수 있는 덕택으로, 수십년간 일어서적들을 탐색해 오면서 그들이 보여주는 서구문명에 대한 철저한 공구를 눈 여겨 봐 왔다. 서구문명에 대한 그들의 대응은 상상을 초월하는 태도로 오늘날의 일본 현대문명을 지탕해 주는 지렜대가 되어 있음을 절감하는 바 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전 백승 한다는 이론적 문맥에서 본다면, 그들의 전략적 서구문명 수용의 열의가 어디를 행하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북한을, 중국을, 일본을. 미국을 어느정도 알고 있는가. 그리고 나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세계문명은 또한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 자문해 보게 된다.
1423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81 2017-10-20
47번쩨 기. 도우볼(Guy Debord) “資本主義社會의 藝術과 日常性을 批判” 1968년은 20세기의 크다란 전환점으로 기억되고 있다. 현대건축을 개관하는 몇 개의 저작은 이 해를 중요한 節目으로 자리매김한다. 일반적으로도, 이 전후에 近代가 끝나고 포스트모던의 시대로 변용되었다고 사료되고 있다. 또한 라칸의 [에크리], 후-코의 [언어와 사물], 데리다의 [그라마토로지에 관해서], 도울즈 .카타리의 [차이와 반복] 등 사상사의 흐름을 바꾸는 저작도 집중적으로 간행되었다. 그리고, 1968년은, 학생과 노동자가 연대하여 점거한 칼체.라단에 바리케이트를 구축했던 파리의 5월현명이 일어났던 해였다. 이 혁명의 공기를 준비했던 것이 시츄아시오니스트의 활동이고, 그 중심적 사상가가 기. 도우볼이 였다. 시츄아시오니스트는 1950년대에 결성되어 슈-리얼리즘의 흐름을 이끄는 그룹이다. 그들은 개인의 무의식보담 도시의 무의식에 착목하여 상황분석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있어 상황의 구축을 노렸다. 그래서 5월혁명에서는 코믹형식의 전단을 뿌리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당시, 도우볼의 저작은 노도와 같이 읽히고 있었고. 그는 앙리. 루훼블이 주창한 일상성에서의 생활의 변혁의 영향을 받았섰는데, 그러나, 그 낡아 빠진 예술관이나 투쟁에 참가하지 않는 이론가적 입장에는 비판적이었다. 도우볼은 1931년 태어 났고, 磯崎新과 같은 나이다. 허나 그의 1968년의 체험이 시츄아시오니스트에 닿지 않했던 것과 같이, 그렇게 많이 일본에 소개되지 않았다. 小倉利丸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첫쩨, 마르크스주의의 지식인이 아니고 아-티스트로 활동했음으로 정치적인 문맥에서 벗어나 있었다. 둘쩨 안드레 브르톤의 명성에 다른 슈리얼리즘의 전개에 가려젔다는 것, 제3에는, [예술]의 틀을 넘어, 도시의 일상생활의 변혁을 지향했기 때문에, 예술의 측에서는 일탈로 간주되어, 정치운동의 입장에서는 노동자나 공장의 문제가 결략되어 있다고 간주되었다. 허나 1990년대에는 著作이나 전람회를 통해 세계적으로 재평가의 파도가 일어 난다. 일본에서는 木下誠이나 上野俊재가 정력적으로 소개한다. 도우볼의 주저 [스팩타클의 사회](1967)는 세상 모든 것이 눈요기에 지나지 않게 된 현대도시의 일상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근대의 자본주의사회는, 일방향의 컴뮤니케이선에 의해, 사람들을 분리시키고, 비인간적 존재로 만듦으로써 이를 지배하고, 직접적으로 살아 있는 경험을 表象과 代理의 세계로 밀어 내 버린다. 그리고 미디어의 과잉화는, 스팩트클의 사회를 전체적으로 갑싸버린다. 스택트클이란 노동이나 생산을 추상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스팩트클에서, 세계의 일부가 이 세계의 목전에서 연출되고 {대리. 표상되어}, 그기다 이 세상보담 더 낳은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고로, 시츄아시오니스트는, 그 顚覆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된다. 본서는 221의 단편적인 택스트로 구성되고, 서책의 형식도 정해진 목표에의 수집이라는 스팩트클화에 항거한다. 그리고 無斷轉用을 장려하고, 저작권을 거부한다. 언어는 노상에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오-픈 소-스적 발상이다. 시츄아시오니스트의 主戰略은 [漂流]와 [轉用]이다. 우연에 맡기면서 도시에서 꿈틀거리며, 일상적인 의식을 절단하는, [실천적인 행동양식]이다. 예를 들면, 한밤중에 해체현장에 침입한다던지, 끊임없이 힛치 하이크를 한다던지. 도우볼의 [표류의 이론](1958)에 의하면, 많은 소 그뤂에 의해, 심리지리학적인 기폭이나 도시넷워-킹의 끊킨 틈새를 인식하고, 데이타의 集積과는 다른 地圖의 작성이 가능해 지게 한다. 그들은 자동차가 보행자를 갈라 놓는 도시계힉을 부정했다. 心理地理學的地圖는 도시의 물질적인 존재로 보지 않는다. 사람들의 생을 해방시키는. 地圖인것이다 한편, [전용]은, 본래의 장소에서 사물을 탈백시켜, 새로운 창조의 가치를 겨냥하게 한다. 그들의 정의에 의하면, [전용]이란, 앞서 존재하는 예술적 제요소를 새로운 단위속에서 재사용하는 것]이다. 허나, 이것은, 희롱하는 바로디는 아니다. 미를 구축하는 것도 아니다. 게릴러적인 것이다. 도우볼은 [전용의 사용법]에서 [전용]이 문학이나 영화에서 건축이나 도시의 레벨로 확대하여, [상황의 구축]으로 이르게 한다, 라고 쓰고 있다. 그기서 심리지리학적으로 도시를 조사하여, 도시의 스펙트클장치나 교통의 [전용]을 생각한다. 시츄아시오니스트는, 르 콜비지에의 도시 계획이 기능주의로 생활을 산산쪼각 내 버리고 자본주의에 봉사하는 것을 비판하여, 생활의 전체성을 회복하게 하는 도시의 상황을 바꾸는 제안을 행한다. 일례를 들면, 공원의 야간해방, 교회를 귀신집으로 전용하고, 미술관을 페지하여 가두나 술집에서 전시한다, 감옥에 외부 사람들이 자유롭게 출입하게 하며, 땅 이름의 젼용이나 가로명의 변경, 모뉴-멘트의 파괴등이다. 그러나, 그러한 저항이 스팩트클화 하지 않토록 유의한다. 그리고, 5월혁명의 바리케이트나 스쿠오딩등, 공간의 자본화에 대항하게 하는 가지 각색의 운동을 장려한다. 건축에의 보조선을 끄 놓는다. 특히 베르날.츄-미는 시츄아시오니스트와 5월혁명의 영향을 받아, 공간의 이용의 문제를 고려하여, 건축에 이벤트를 발생시키는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예를 들면, 교회를 보-링장으로 한다던지, 의도하지 않는 용도에 시설을 전환하는 그로스 프로그램잉은 [전용]과 닮았다. 그의 프로그램론이 슈리얼리즘적인 것도 납득이 간다. 90년대 이후의 젊은 건축가들이나 아-티스트들은, 도시에 이미 있는 것들 을 유용하여 시츄아시오니스트적인 태도를 보인다. 허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젊은이들이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것이다. 이를 타협으로 볼것인가, 유연으로 볼것인가는 판단이 갈라질것이다. 시츄아싱니스트는 예술가와 공동전선을 폇는데, 허나 도우볼은 예술적인 미나 창조하는 주체의 실현도 인정하지 않는다. [새로운 미는 狀況的 美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 엄격함과 순수함으로 하여 그들은 건축적인 프로젝트를 배제하고, 최후에는 情性化한 스스로의 조직을 무너터린다. 루페뷜이나 시츄아니즈트의 이론으로 시작하면서 출발하여, 消費社會를 분석한 쟝.보드리얄도 60년대후반에 건축가와 [유-토피아]라고 하는 그룹을 결성하였는데, 5월 혁명이후, 이론과 실천의 乖離로 인해 결열하였다. 사상가와 작가가 만나는 어려움을 여하히 극복하는가가 크-다란 과제가 된다. 약력: 1931년 파리 출생. 레토리숨의 운동에 참가하지만, 그 신비화와 비실천적인 태도에 반발하여, 52년에 좌파의 친구들과 [레토리스트 인터내선날]을 결성. 자본주의 사회의 예술과 일상성을 비판하였다. 57년에는 [시츄아니스트. 인터내선날]을 결성하여, 72년의 해산까지 중심적 지도자가 됨. 이들 기관지에 많은 메니페스트를 발표하였다. 집필활동 이외도 [轉用]을 사용하는 [사-드를 위한 절규](1952)등 스팩트컬을 배재한 영화도 제작하였다. 주저: [스팩트컬의 사회] 1993. [인터내선날.시츄아니스트 전 6권 [상황의 구축에] [미궁으로서의 세계] [무장을 위한 교육] [孤立의 技術] [스팩털의 정치] [하나의 時代의 始作] 1945. 일본. 등.
1422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208 2017-09-11
46번쩨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R. Jameson) “歷史的 變轉을 지속하는 世界시스템의 끊임 없는 解析者” 역사에 씨나리오를 구하는 것이 점점 낡은 愚行으로 보이고, 점점 곤난한 시도로 사료되는 상황속에서, 제임슨은 1960년대 이후 일관되게 그 시도를 지속해 왔다. 더욱이 强진한 분석력과 광범위한 퍼스팩티브로 그 시도에 설득력을 띠우면서, 그것이 愚行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상황에서 한층 중요한 知的實踐임을 증명해 왔다. 그리고 오늘날 그는 미국에서도 가장 존경을 받는 비평가의 한 사람이 되고 있다. 그의 비평활동에 착상과 지침과 활력을 주고 있는 것은, 의심할 필요 없이, 칼-마르크스 와 그 의도를 이어가는 최량의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이다. 70년대 중엽까지 제임슨은 사르트르나 루카치나 프랑크프르트학파의 사상을 연구하는 것으로, 마르크스주의 비평의 액추얼한 가능성의 수맥을 파내는 작업을 해 왔다. 더욱이 비평행위의 형식에 주목하여 그 전통을 계승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그는, 동시에, 러씨어.포-말리즘나 P. W. 루이스를 바탕하는 문학작품을 지속적으로 정치하게 해석하면서 언어표현과 이야기의 구조속의 정치적 함의를 분석하는 방법론을 세운다. 허나, 오늘날에 와서 뒤돌아 보면서 그의 비평의 전망이 크게 열렸던 것은, 80년대에 들어 와서 그의 비평적 안목이 자본주의의 현행시스템의 총합적분석에 눈을 돌렸었때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물론 그의 가장 유명한 것이, 역사감각이 결락된 고도소비사회의 발전단계를 명쾨하게 특징지워 갔던 포스트 모더니즘의 이론이다. 이 이론의 임팩트로 제임슨의 이름은 [포스트 모던의 사상가]로써 가장 잘 알려진 것 같은데, 그 자체가 역사감각의 부재를 전형적으로 반영한 이 켓치프레이즈 보담 오히려 역사적변전을 지속하는 세계시스템의 끊임없는 해석자라고 하는, 얼만간 地味로운 記述쪽이 한층 정확히 그의 비평활동의 특징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지 모른다. 사실, [변증법] [유-토피어] [물상화]라고 하는 그의 분석어휘는, 그의 방법론이 최첨단의 유행이라기 보담 매우 오-소독스한 전통의 활용을 기도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며, 이들 일견 이미 쓰먹은 개념에서, 眼前의 현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해방의 가능성을 묘색하기위한 새로운 활력을 최대한 인출해 내는데, 그의 비평의 비범한 점이 놓여 있는 것이다. 제임슨은 훌륭한 마르크스주의 사상가가 반드시 갖추고 있는 實直함과 지속성과 헤안이 서로 맺으저서 그 통합에 성공한, 희유한 비평가라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뉴-히스토리즘와 俗流 디컨스트락선이 유행하고 [역사의 종국]이 소리 높이 외처 지고 있는 시니컬한 언설상화속에서 (시대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묻고 자본주의의 발전단계를 분석한다는 자세를 일관해 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제임슨의 광범위한 비평활동의 근저에 일관되고 있는 것은, [물질적생활의 생산양식은 사회상 혹은 정치상 내지 정신상의 생활과정일반을 조건지우고 있으며 물질적기반의 변화에 따라 상부구조전체가 변혁된다]라고 하는 마르크스의 정식화에 기초한 견실한 자본주의의 현상분석이다. 이 모델을 고집하면서 그는 네이선을, 철학언설을, 미디어와 컴뮤니케이선의 현재를, 제3세계와 마이노리티의 해방을, 그로발리제이선과 넷워크화를, 그리고 문학과 건축, 영화를 명쾨하게 그리고 유연하게 논해 가고 있다. 소비엩연방이나 베를린의 壁과 더불어, 미국 언설계의 시니시즘도 과거로 밀려, 한번은 끝났다고 사료되는 역사의 발전속으로 샘켜지고 있는 상황속에서, 이러한 제임슨의 수비일관된 비평자세가 새로운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60년대이후의 자본주의와 문화의 발전단계를 포스트모더니즘로 보고 이를 分節化했을 경우, 제임슨은 그 異種混㴗성의 모델을 포스트모더니즘건축에서 보고 있으며, 그 때문에, 그는, 문학과 더불어 건축에 관해서 발언하는 기회를 많이 갖어 왔었다. 또한 80년대 후반부터는 영화비평에도 적극적으로 간여해 왔다. 허나 쫍은 의미에서의 美術 그 자체에 관해서는, 그의 언설에서 특별한 비평적공헌이 있었다고는 말하기 곤난하다. 물론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예술을 모더니즘에서 확정하기 위해서 포-트.리얼리즘나 폽 아-트나 컨셒추얼. 아-트에서 언급은 하고 있어나, 이는 상식적인 지식에 기반한 역사적 정리란 것에 지나지 않으며, 파노브스키-나 뷀브르그연구소의 업적을 들어 내는 것도, 역사적 시점의 한 유파를 대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이들 미술사가들의 작업들이 회화분석의 내부에까지 들어 와서 논한 일은 없었다. 이로부터, 혹은 도그마틱한 공산주의로부터의 개입의 기억과도 겹치면서,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비평과 시각예술 사이에 그렇게 생산적이라 말할 수 없는 관계를 귀결시킬는지 모른다. 그러나 알췌셀에 의한 이데올로기-장치의 분석이나 벤야민의 시각미디어론을 처음으로 하고, 여기서부터 더욱 해명해야 할 문제를 품은 세련된 시각성의 의론의 흐름은, 확실히 마르크스주의비평의 전통속에서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임슨 역시 영화비평에서 시각영역에 있는 욕망과 가치와 권력의 결합태를 분석하면서, 이마지나티브한 스크린의 세계와 그것이 투영되는 역사적현실과의 관계를 물을려고 할 때, 그러한 의론의 전통의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그의 비평과 시각예술의 분석과의 생산적인 관계의 가능성은, 이러한 理論展開안에서 찾아 내야 할 것이다. 원래, 역사에 싸나리오를 부여하는 시도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결정론적 인과론에 의해 사후적으로 역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변전하는 상황과 개념의 기능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현재의 사상을 세계시스템의 총체와의 관계속에서 해석하는 틀을 끊임없이 새롭게 설정 해 가는 것을 말한다. 제임슨의 비평적실천의 서늘한 날이 스스로 증명해 왔듯이 그러한 해석에의 의지는 결코 낡은 것이 되지 않는 것이다. 아-트의 비평에서도 만찬가지이다. 略歷: 1934년 미국 태생. 예일대학 졸업후, 프랑스의 엑스대학, 독일의 뮌헨,벨르린 양대학에 유학하고, 하-버드대학, 예일대학, 캘리포니아대학교 내지 산디에고대학 및 산타그르즈교에서 가르치다. 현재는 듁대학의 비교문학 교수. 제2차대전후의 영어권에서 가장 첨예한 마르크스주의문예비평가로 알려저 있다. [비운다리 2 ] 의 편집위원이나 [비평공간]등의 편집고문을 맡았고, 문학이론뿐만 아니라, 대중문화론, 건축비평, 영화비평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발휘하고 있다. 主著: [변증법적비평의 모험] 1980 일본. [정치적 무의식] 1989 일본. [사르트르] 1999 일본. [시간의 종자] 1998 일본. [뒤에 태어나는 자에게] 1993 일본. [언어의 감옥] 1988 일본. The Geopolitical Aesthetic, BFI 1996 Signatures of the Visible, Routledge, 1993 Brecht and Methode, Verso 1998
1421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244 2017-09-06
45번쩨 W. J. T. 밋첼(W.J.T. Michell) “畵像이 言語를 凌駕하는 現代의 視覺文化를 批判” 근대미술사학의 이론적 틀이나 방법론적前提를 문제 삼는 연구자가, 적지 않게 그 케리어의 단서에서 윌리엄. 브레이크 연구에 손 데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미술사란 [보이는 것을]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하는 곤란한 작업에 지나지 않으며, 이미지와 택스트를 자유로히 왕복했던 19세기의 환시자 브레이크야 말로 미술사학에 내재하는 그러한 곤란을 훌륭히 상기 시켜 주기 때문이다. 시카고 대학교수로 영문학과 미술사의 교편을 잡고, [크리티컬.인콰이어리]지의 편집인을 오랫동안 맡았던 밋첼 역시 그러한 한 사람이었다. 그의 중요한 관심은 회화와 시, 화상과 언어, 이미지적인 것과 택스트적인 것,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의 착종된 관계에 있었다. 회화나 詩라고 한다면, 이내, [시는 회화와 같이]로 시작하는 古來중요한 문제군을 제시해 왔지만, 밋첼은 이미지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의 분석을 통해 이러한 관계를 권력과 가치의 체계로 잡는다. 단지, 이미지. 택스트간의 역학에 관한 그의 고찰은 시대와 더불어, 아니, 시대의 요청과 더불어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그의 주저의 하나, [이코노로지-: 이미지. 택스트. 이데올로기]에서는, 일반적으로 관습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이미지와 택스트의 차이가 이데올로기-의 산물임]을 설파되고 있다. [시와 회화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묘체고유의 본질, 묘체가 표상하는 대상, 혹은 인간정신의 법칙에 의해 항상 주어지는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밋첼은 언어와 이미지간의 차이가 [개인간, 집단간, 국가간, 계급간, 젠다-간, 그리고 문화간의 착종되고 갈등하는 사회적. 역사적관계]의 산물이며, 특정한 가치관, 권력, 이헤=관심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을, 렛씽, 바-크, 곤브릿지, 굿먼등에서 그 예증을 구하며 논하고 있다. 헌데, 택스트와 이미지간의 경계선 만들기에는 항상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내재하고 있음을 지적한 [이코노로지]에서, [자매편]으로서도 예고된바 있는 [픽쳐.세오리]에서는, 이 경계선의 [침범]이 논해지고 있다. 예술실천의 장에서는 택스트적인것과 언어적인것의 상호침범이 오히려 [常態]임을 논하는 대목에서는 바로 브레이크연구자의 面目躍如라 할만 하다. 즉, 이미지 / 택스트관계는 異쟝르, 異표상형식, 異미디어간에서 구축될 뿐 아니라 단일한 쟝르속에서도 인정된다. 말하자면, 순수한 언어적인 예술도, 순수한 시각적인 예술도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으며, 시각미디어이건 언어미디어이건 [일체의 미디어는 믹스 미디어이며, 일체의 표상은 異種混成이다]라고 된다. 밋첼은 시각적인것과 언어적인 것이 맺으지는 복합적. 총합적개념으로, [이미지 택스트]를 제기하고, 영화, 테레베, 연극이나 揷畵 그림의 택스트에서, [이미지-택스트]관계 위상이 여하히 정치적. 제도적, 사회적 抗爭의 場이며, 지배적관습에 응답 내지 저항하고 있는가를, 고찰함의 중요성을 설한다. 이미지와 택스트의 分節化를 고의적으로 피한 [이미지택스트]란 개념이 등장한 배경에는, 오늘날의 예술, 미디어, 컴뮤니케이선의 간단없는 혁신의 조류속에서, 시각적인 것과 택스트적인 것과의 상호관계가 종래와는 달리 일신된 것을 들 수 있다. 화상이 언어를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적 습관차원이나 대중문화에서의 시각체험의 추세나, 학문적언설에서 [한때 언어와 같이, 회화=화상이 인문諸學의 의론의 중심을 차지하는] 화상중심주의적 경향을 가르켜, 밋첼은 [언어론적轉回]가 아닌 [화상론적전회]라 부른다. 그리고 이 사태에 상응하여 [좋턴 나쁘던. 이미지가 갖는 힘에 주의를 환기 시키고 이미지 사용이 갖는 다양성이나 역사적특이성을 인식하는 시각문화비판]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시각문화(Visual Culture)]는 이와 같이 시각문화 비판을 위해 90년대 중엽에 창도된 프로그램이다. 이는 미술사, 건축사, 정치사, 영화사, 문학사, 일반사라고 하는 전통적학문영역의 틀을 들어 내고 [시각체험의 사회적구축에 관한 연구]로써 [미디어의 재현, 시각예술에 있어 시각체험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시각체험의 문화적구축에 초점을 맞추고] [미술사가, 영화학자, 공학기술.이론가, 현상학자, 정신분석학자, 인류학자의 대화를 필요로 하는…….경계를 횡단하는 諸學의 수렴과 대화의 장]이다. 종래의 미술사가와 같이 하이.아-트뿐만 아니라 모든 시각경험을 학제적으로 연구하는 [시각문화]의 도구로써 밋첼은 [비판적 이코노로지]를 든다. 일체의 사상을 예술의지의 [상징형식]이라고 하는 [大다페스토리]속으로 짜 넣어 버리는 파노브스키의 이코노로지-가 로고스(언어)에 의해 이콘(도화)을 억압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코노로지-는 이 직물을 해체해 내고 이콘으로 하여금 로고스에 저항하도록 하며, 이를 억압함을 노린다. 말하자면, 요 삼천년래의 로고스에 의한 이콘의 지배를 대신하여, 이콘을 스스로 말하도록 촉진하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써 [회화는 실제로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에서 밋첼은 사발단다스.스타디이즈에 유래하는 [사발단.모델]을 제시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미지의 힘에 대한 밋첼의 견해의 역전이다. 이미지는 종래 생각해 온 것 만컴 강력하지 않고, 오히려, 개인에게 상처를 입히던가 이데올로지 조작을 해 내는 [이미지의 힘]이라고 하는 레토릭 내지 집단환상이야 말로 [시각문화]는 비판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약자의 입장에 선 이미지는 [타의 게급의 헤게모니하에 놓여 있는 게급 즉 종속게급 서발턴]으로 처우되어, [화상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화상이 무엇을 바라는가] 즉, 화상의 결여에 유래하는 그 욕망을 이야기 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대의 요청에 즉응한 논조를 전개하는 밋첼은, 례를 들면, 스파이크.리 감독 [Do the Right Thing]와 천안문사건과 퍼브맄.아-트 문제를 보드레스를 중심으로 하는 세쪽으로 논하는 [퍼브맄.아트의 폭력]에 보여지는 바와 같이 폭 넓은 의론을 제시해 간다. 약력; 1942년 태생. 죤즈.홉킨즈 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77년부터 시키고대학에서 교편을 잡다. 현재는 동 대학 교수[미술사]. 주저: [이코노로지-: 이미지. 택스트. 이데오로기-] 1992년 일본. Iconology: Image, Text, Ideology,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6, Chicago and London. [이야기에 관해서] 1987 일본. On Narrative, ed., By W.J.T. Mitchel, 1980,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and London The Last Dinosaur Book: the Life and Times of a Cultural Icon, 1998,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and London Picture Theory: Essays on Verbal and Visual Representation,1994,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and London Blake’s Composite Art: A study of the Illuminated Poetry, 1978, The Princeton University Press Landscape and Power, ed., by W.J.T. Mitchel, 1994,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and London Art and the Public Shere, ed., by W.J.T. Mitchell, 1992,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and London Against Theory: Literary Studies and The New Pragmatism, ed,, by W.J.T. Mitchel, 1985,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420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197 2017-08-30
44번쩨 쟝.보드리얄(Jean Baudrillard) “消費社會에서의 아-트의 消滅을 宣言” [物의 體系]로 1968년 파리의 5월혁명 직후의 사상계에 등장했던 보드리 얄은, 그 후, 30년 이상에 걸쳐서 현대세계의 지적 씬(scene)에 독자의 자극을 헛뿌리고 있는바, 그 사상은 시대의 변화를 선취하면서 미묘한 변용을 이루고 있다. 전후 얼마되지 않아, 독일어의 대학교수자격을 취득하고, 사회학자 앙리.루훼벨의 조수로써 마르크스의 저작의 프랑스어역에 몰두한 과거를 가진 보드리 얄은, 60년대 후반에 신설된 파리대학난델교에 사회학교수로 초빙되는 것을 계기로 마르크스의 경제학비판, 프로이드의 정신분석, 쇼-슐의 언어기호론을 패스로 하는 현대사회의 기호론적분석을 제안하고, 세계적주목을 받은 이 시기의 주저 [소비사회의 신화와 구조]에서는, 물질의 소비에 의한 차별화 (소위 말하는), [차별화]의 넷워-크에 사회전체가 포장되고 있다는 상황이 선명하게 제시 되어 있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의 포스트 모던의 시대에 쓰였던 [象徵交換과 죽음]이나 [슈밀러 쿨와 슈미레이선]등의 택스트에서는, 그의 관심은 소비사회 깊숙히 파고 드는 [부정적인 것]의 종결로 향한다. 벤야민이 [아우리의 소실]을 착상케 한 오리지널과 코피의 二項對立이 이미 의미를 잃어 버리고 현대사회가 슈미레이선 원리에 입각한 거대한 시스템으로써 결정적전환을 이루는 과정을 보드리 얄은 그려 낸다. 오리지널을 소거하고 모-든 형태의 차이의 변조에 의해 출현되는 과정이 지배적인 단계에서는 현실 그 자체가 슈밀러 쿨이 되어 하이퍼 현실속으로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현실은 끝났다, 역사는 끝났다 라고 주장하는 보드리 얄의 예상을 배반하는 것 같이 90년대에 들어 서면, 세계는 동구사회주의의 해체부터 灣岸戰爭에로, 새로운 격동을 경험하게 된다. 이 변화에 대응하여 사상적 쉽트를 기도했던 것이 90년대의 보드리 얄이다. [투명하게 보이는 악]에서부터 [완전범죄]로 이르는 저작에서, 그는 [부정적인 것]을 추방하고 자기면역성을 상실한 소비문명의 현상을 에이즈나 컴퓨-트.윌스와 같은 [투명해 진 악]이 불가시의 막으로 인류의 공동체를 덮으 시우기 시작하는 단계로 규정하고 그기서 同化나 根絶도 불가능한 [래디컬한 타자성]의 발생을 보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경과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른 보드리.얄의 사상은, [80년대와 90년대의 미술과 문화적생산에 이례적일 정도로 영향을 입히고]. 이미 70년대에 [보-블효과]나 잡지 [토라뷀스]를 통해 현대미술의 세계에 특이한 논조를 전개한 그는, 90년대 초에는 [트란스.에스틱]의 제안을 하며 [예술의 소멸]을 선언한다. [20세기라고 하는 시대의 엠브렘였던 아반가르드], 시대를 선취하고 현상에 래디컬한 비판을 던진다는 의미의 아반가르드는, 정치의 세계에서나 예술의 세계에서도 이미 소멸했다, 라고 보드리얄은 언명한다. [비판적인 것]의 끝에 대응하여, 소비사회의 원칙인 [추한 것은 팔리지 않는다]라고 하는 스로건이 관철된 결과, 모든 것이, [미적인 것]이 되버리면, [美나 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안케 되고, 예술 그 자체가 소멸한다]는 것이다. 허나 다른 한편에서는, 마-켓로써의 [예술]은 어디서나 번영하고 있고, [예술]에 대한 언설도 급속히 퍼지고 있다. 이 모순된 상황에서 멸망해 가는 것, 바로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고, 현실과는 또 다른 장면을 대응하는 능력]으로써의 아-트인것이다. 한때 예술이 하나의 유-토피어, 즉 현실의 일부가 되기 위해 모든 수단으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라 해도, 현재로써는 멀티.미디어와 버추얼.리얼리티를 통해 이와 같은 유의 種은 완전히 실현되고, 지금에서는 누구도 잠재적인 창조자가 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서는 [뒤샹이 레이디 메이드의 빈병걸이를 설치하고, 워-홀이 한대의 기계가 되기를 원했던] 반예술적 시도까지도 이미 현실의 일부로 긍정되 버린다. 이 단계를 보드리 얄은 [미적인 것을 넘어선]=[트란스 에스틱]라 칭하게 된다. 라고 함으로써, 보드리 얄은, 다다나 구성주의와 같은 역사적 아반가르드 부터 밮.아트, 미니멀.아트, 컨셒추얼 아트등의 현대미술에 이르는 다양한 작가들을, 여러가지 경우에 따라 논하고 있는데, 物이 기호화되는 소비사회론에서 출발한 그의 최대 관심사는 아마도 워-홀에 있지 안 했겠나, 생각된다. 보드리 얄은, 위-홀을 논했던 중요한 택스트 [기계적인 스노비즘]에서 그를 트란스.에스틱한 훼티시즘을 최초로 도입한 아-티스트]로 규정한다. 그건, 주체의 욕망으로써의 대상을 갖지 않는 훼티시즘이며, 그럼으로써 위-홀이 제시하는 이미지는 일체의 가치관으로부터 단절된 공허함 속에서 [인공적인 빛을 내고 빛나는 기호]가 된다. 역사적 아반가르드가 시도했던 [작품]과 [표상]의 파괴와는 달리, 위-홀은 아티스트란는 존재와 그 창조행위를 파괴해 버린다. 스스로를 기계로 만들어 버리는 이 스노비즘야 말로 [기계적인 스노비즘]인 것이다. [예술의 음모]]에서 보드리 얄이 [모-든 아-트는 현실속에 비현실을 침입시킴으로써, 현실의 드라마틱한 올터너팁이 될 수 있었다]라고 쓰면서, 그런 아-트의 시대가 끝난 이상, 이제서야 아-티스트에게 남겨진 것은 [나는 무이다]라고 절규하는 스노비즘만이 라고 끝맺는다, 는 것을 상기하기 바란다. 헌데, 최근의 보드리 얄은 [철학자. 사진가]로써의 활동이 눈에 띈다. 도시의 페허나 황페해 진 교외등을 테-마로 한 사진집을 이미 몇권체 발표하고 있을 정도다. 21세기 에 들어 와서도, 그의 다체로운 활동은 계속 해 갈 것 같다. 약력: 1929년 프랑스 태생. 최초에는 앙리.루헤풀의 조수를 맡고 프레히드나 베-타 바이스등 독일문학의 번역에도 손을 덴다. 파리대학 난델교의 교수직을 거처 라디컬한 문명비판적 스탄스에 선 집필활동을 하고, 현대사상.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던지고 있다. 81년, 오토마.캐매라를 선물받은 걸 계기로, 사진 제작에도 행하고, 붸네치아.비엔날레등에 출품한 일도 있다. 일본 방문도 수차. 주저: [물의 체계] 1968년 일본. [소비사회의 신화와 구조] 1970년 일본. [상징교환과 죽음] 1976 일본. [슈미르쿨와 슈미레이선] 1983년 일본. [아메리카] 1986 일본. [투명해진 악]1990 일본. [완전범죄] 1995 일본. [보드리 얄] 1995 일본. [소멸의 기법] 1998 일본. [불가능한 교환] 2002 일본.
1419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205 2017-08-19
43번쩨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 “前衛藝術이란, [새로운 것]을 [수집하는] 것이다” 사람은 처음 강고한 세계의 모델에 둘려 싸여 있는 것 같이 생각한다. 사람은 이를 벗겨내고 상대화시키고 조소하기 위해서 있는 지혜와 힘을 짜 낸다. 헌데, 이 주변의 세계가 무너진 후에 남는 것은 無다. ……. 여기서부터 무의식중에 脫構築에서 구축으로, 意向의 전환의 프로세스가 시작한다. (이리야.가바고프) 이리야.가바고프와 보리스.그로이스. 한쪽은 예술가로써, 다른쪽은 이론가로써 [예술]의 메커니즘에 도전해 가게 되는 두 사람의 만남은 1977년, 모스코바에 있는 아트리에서 였었다. 당시 가바고프는 비공식의 작품, 즉 구쏘련의 채제하에서는 인정받을 수 없는 작품의 제작에 간여하고 있었다. 한편, 보리스.그로이스 역시 서측의 철학.사상을 극비에 수입하여 동시대의 예술가들과 더불어 접촉을 가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서로 언드그라운드의 활동에 몸을 던지고 있었던 두 사람은 1981년에 그로이스가 서측으로 망명할 때까지 몇시간에 걸치는 비공식의 대화를 여러 번 하게 된다. 이 대화는, 두 사람의 서측 이주 후에는 뷔엔나레등의 공식적인 장소에서 계속하여 하게 되는데, 때로는 두 사람이 자신의 일들에 관해 이야기하는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상대의 일을 설명하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만큼 두 사람의 일들이 가까워져 있었던 것이다. 구쏘련 체재하에서는 서측의 사상을 열심히 배웠던 그로이스, 서측에 예술의 낙원을 그리고 있었던 가바고프 였지만, 서측에의 이주는 두 사람에게 변화를 초래했다. 그로이스는 서측에 망명한후 [全體예술양식 스타-린](1988)을 저술하고 러씨아 아반가르드를 다른 러씨아의 예술, 특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와 단절시켜 정당한 미술사의 틀속으로 포함시키려고 하는 서측의 경향에 異議를 제기한다. 한편 가바고프예술 역시 [동측을 표상하는 예술]에로 변용해 간다. 즉, 여태까지 심취했던 서측세계와 직접 대치한 결과, 양자 모두 러씨아 체험을 전면에 내 세우게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이 구쏘련시대의 정신적 유대, 비공식적인 활동속에서 조성된 예술의 場에 대한 노스탈지어를 품고 있었던 것은 심리적인 사실일런지는 모르겠어나 그 이상 그 특수한 [장]은 서측에 대한 전략적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결코 자본과 금전으로 환원 될수 없는 예술의 場, [고립된] [동지들]에 의한 비공식적 場. 그러나 그로이스도 가바고프도, 단순히 구체재하에서의 자기들의 체험을 서측에 전하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그로이스는 가바고프가 [최근에는 서측에 쏘련에 관해 알린다는 일 보담, 지금, 자신을 둘려 쌓고 있는 (서측) 완결된 예술공간을 나타내고 싶다]라고 하는 발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응수하고 있다. [자네가 하고 있는 일은, 이제사 서측의 문화공간내에서의 몸짓으로 사료되고 있어, 보는 측은 서측의 예술시스템의 현실공간에서의 몸짓으로써 기능하고 있는 그것들의 일들의 의미를 묻고 있는 것이다](베네치아 뷔엔날레 [붉은 館]에 관한 대화) 이는 아서. C. 단토의 [아-트월드] 이상으로 [예술]의 제도를 문제화한 발언이다. 그로이스는 밍명후의 가바고프와의 대화를 뫃은 [인스터라이선의 예술]에서, 구쏘련하에서 고립하여 있었던] 자신들의 상황이 서측에 있었도 역시 닫혀있는 데로였음을 지적한다. 말하자면, 동에서던 서에서던 자신들이 간여했던 류의 [예술]이, 장으로서는 결코 사회속으로는 열리지 못할것을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전체예술양식 스타-린] 에서 서측비판이 강했던 그로이스는, 이 [닫힌 장]의 구조적 해명 혹은 그 이론적 구축으로 향해 간다. 그로이스의 이 방향이 가장 명확화된 것은, 1992년의 [새로운 것]에서 였다. 同著는 [새로운 것]의 형용에 어울리는 특징들을 부각시킨 후, 그 [새로운 것]을 필요로 하는 문화의 경제적 메커니즘의 존재를 지적한 것이었다. 여기서 그로이스가 시장경제와는 별도로 존재하는 그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 [아-카이브]였으며, 이것이 그의 대표적 논문 [코렉선의 논리]와 맛닿는 것이다. 1997년의 [코렉선의 논리]에 수용된 [코렉선의 논리]는 [우리들의 문화에서는, (진정으로) (자율화된) 예술은 주로 뫃여지는 것을 목적으로 생산되고 있다]라고 하는 일문으로 시작한다. 그는 동 논문에 의해 어떤때는 작품내부에, 어떤때는 작품이 표상하는 것에, 어떤때는 단순히 개인의 기호로 돌려지고 있다. 어떤 것을 예술이라고 인정하는 기능을 코렉선의 논리에 부여 했던 것이다. 이 [코랙선의 논리]에 의해 정확하게는 [미술관 코렉선의 논리]는 현실의 미술관이라기 보담, 그 자신 예술적가치의 결정권을 갖는 자율적 메커니즘을, 그로이스는 근현대의 미술관 코렉선으로 보았다는 것이 사실일것이다. 원래 코렉선은, 일례로, 코인의 수집대상이 정해지면, 같은 코인을 여러 개 뫃으지 않고, [또한 코렉선에 들어 있지 않는 신귀한 [코인]을 수집한다는 성질이 있다. [예술]을 대상으로 할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의 현실생활은 끝없는 반복의 集積인바, 코랙선은 같은 것을 끝없이 수집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테까지 없었던 새로운 것], 그리고 가능하면 특징적인것을 가하여 비대해 가려고 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1997년의 [코렉선의 논리]에 들어있는 [코랙선의 논리]는, [우리들의 문화에 있어서는 (진정) 자율적인]예술은 주로 수집되는 것을 목적으로 생산되는] 것이라고 하는 一文으로 시작한다. 그는 동 논문에 의해 어떤때는 작품내부로, 어떤때는 작품이 표상하는 것에서, 어떤 때는, 단순히 개인의 기호에 돌려진 어떤 것을 [예술]로 인정하는 기능을 코랙선의 논리에 부여했던 것이다. 이 [코랙선의 논리] (보다 정확히는 [미술관 코랙선의 논리]는 현실의 미술간이라기 보담 그 자신 예술적가치의 결정권을 갖는 자율적 메커니즘을, 그로이스가 근현대의 미술관 코랙선으로 삼았다는 것이 사실이다. 원래 코랙선에는, 일례로, [코인]등 수집대상이 처음에 정해지면, 같은 코인을 몇 개고 수집하는 것을 마다하고 [또 코랙선에 들어 있지 않는(신귀한)코인]을 수집한다는 성질이 있다. {예술}을 대상으로 할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의 현실생활은 끝없는 반복의 연속이며, 같은 것의 집적임으로, 코랙선은 같은 것을 묵묵히 수집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태까지 없었던 새로운 것], 그리고 가능하면, 특징적인 것을 가하여, 비대해 가려는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로이스는, 근대의 미술관이 잘 보지 못했던 외국의 풍물을 [예술]의 이름하에 수집하여, 전람한다는, 실로 [신귀함]의 추구속에서 발달해 왔던 것을 역사적으로 개관하고, 그기서 [또 [예술]의 코랙선에 들어 있지 않는 [새로운 것]을 덧붙히는 행위 그 자체가 자율화해 갔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원래 코랙선의 체계였어나, 그 [새로운 것]의 탐구의 자율화는, 그 장에 간여하는 사람이나 물체를 둘려 싼다. 모-던한 예술가들은, 오래된것이나, 그것의 모방, 이를 보존하는 미술관을 비난해 왔어나 실은 오래된 것을 대신하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가 모던의 논리체계속에 규정되 있었던 것이다. 이 의론이 다음의 가바고프의 말과 호응하고 있음을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나는 保存의 법칙을 믿는다. …… 오늘날에는 수장되어 가는 것의 질을 지배하는 것은, 코랙선의 체계성이다.](이리야.가바고프). 약력: 1947년 동독일 태생.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배움. 1976-1981년, 모스코-바 대학 구조언어학부에 연구원으로 근무. 1981년, 서독일로 망명. 92년 민스터대학 철학연구소를 거처 94년, 칼스르에 조형대학 예술학과 교수에 임관. 2000년 윈조형예술아카데미-학장에 취임. 주저: [전체예술양식 스타-린] 2000년 일본. [이리야 가바고프의 예술] 1999 일본. Uber das Neue Versuch einer Kultrokonomie, Carl Hanser Verlag, Muchen/Wien, 1992 Logic der Sammlung Am Emde des musealen Zeitarteres, Carl Hanser Verlag, Munchen/Wien,1997 가바고프와의 대담에 관해서는 다음 저서를 참조하기 바람: Die Kunst des Fliehens, Carl Hanser Verlag, Muchen/Wien, 1991
1418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199 2017-08-13
42번쩨 에드와드. 사이드(Edward W. Said) “歷史와 文化를 대상으로 이를 부각시키는 批判의 눈” 사이드는 기본적으로는 文藝批判家임으로 미술을 정면 그대로 논한 일은 그리 많지 안타. 허나 그 主著의 하나인 [오리엔탈리즘]의 표지에 자주 회화가 등장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오리엔탈리즘]라고 하는 말 그것 자체가 서양미술에 있어 동양취미라는 의미로 쓰인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적어도 혹종의 사람들에게 이 말은 과거의 일부의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취미를 기술하는 것이라기 보담, 사이드가 부여했던 의미 – 지금을 사는 모든 사람에게 무관계가 아닌 광범위한 사회. 문화. 정치. 경제적 제문제의 상관성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술도 그 권외가 아니다. 저서 [오리엔탈리즘]은, 오리엔트를 제재로 하는 서양인에 의한 문학작품이나 地域硏究가 여하히 오리엔트를 표상해 왔는가에 따라서 비판적으로 논하고 있다. 허나 이 저작의 주제는 오리엔트에 대한 서양인의 단순한 무지나 편견은 아니다. 근대라는 것이야 말로 그 주제인것이다. 이교도에 대한 그리스드교도의 종교적 편견이라면, 근대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세속화가 나아간 근대가 되면서, 과학적. 합리적인 기초에 입각하여 제문화를 비교한다는 일견 냉정한 자세가 지배적으로 되어 갔다. 그러한 과학화를 선도하는 학문의 하나가 근대文獻學이었다. 이 학문이 성취한 중요한 작업은 [언어란 것은 신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유출하는 힘에 의해 생긴 것이다] 라고 하는 그때까지의 언어관을 부정한 것이였다. 이 부정에 의해 인간의 언어는 신이라고 하는 외적인 힘으로부터 독립한 하나의 [내적인 場]으로 파악하게 이른다. 근대문헌학은 내적인 수비일관성을 갖는 언어라고 하는 객관적인 연구대상을 획득한 것이다. 이후 점잔케 분석됨을 기다리는 이 연구대상을 여하히 맛있게 요리를 하여 그 안의 비밀을 고백시키는가 가 문제가 된다. 그건 말하자면, 겉치레로 다체로운 언어현상의 배후에 그 자체로 독립된 불변의 [시원] origin을 찾아 나선 旅路가 된다. 오라엔트에 대해 열렬한 관심을 품는 문학자나 연구자도 역시 근대문헌학자와 같은 자세를 취하면서 연구대상인 오리엔트와 대면하였다. 기대한 데로 오리엔트는 매혹적일 정도로 다채로운 양상을 보여준다. 허나 오리엔탈리스트는 그기서부터 이스람문화의 내재적 본질 – 하나의 닫혀있는 시스템 –을 파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야 말로, 서양의 오리엔탈리스트가 특권적으로 지니고 있을법한 [앎(知)]의 능력이며 의무일것이다. 허나, 그렇게 해서 축출해 낸 오리엔트의 본질은, 구체적인 시간. 공간의 어디에도 위치되어 있지 않다. 초시간적. 초공간적인 시스템에 지나지 않는다고 사이드는 비판한다. 그럼으로 해서 그려저 낸 오리엔트는 靜鎰하며, 논리적인 명석함까지 띠고 있는 것이다. 이때 무엇인가 배제. 엄페되어 있다고 보게 된다. 그 자신의 문예비판용어를 빌린다면, ‘중심없는 複數性의 能産的인 戰場’인 [시작 (beginning)]이 된다. 이를 나타내려고 하는 사이드의 작업은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정치적이라 말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바, [오리엔탈리즘]안에서 회화를 둘려싼 문제는 그렇게 많이 다루어저 있지 않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사이드의 의론은, 서양에 의해 식민지상주의가 전개된 19세기 후반, 제2제정기의 프랑스에서 활약한 아카데미즘의 화가 제롬이 오리엔트를 여행한 후에 그린 오리엔탈이즘 회화에도 헤당 된다고 본다. 실제로 이 저작의 표지를 장식한 그림 역시 제롬이다. 제롬이 정밀함을 극한 필적에 의해 만들어 내는 이스람세계는 영원한 靜的 세계안에서 結晶化된 것 같이 보인다. 그의 정밀한 회화수법이 기법적. 문화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은, 사진등 서양의 과학기술에 의한 시각장치의 명석함이며 그것은 근대문헌학의 (객관성)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명석함을 만들어 낸 과학기술 또한 오리엔트를 식민지로 지배하는 힘 역시 서양에 주었던 것이다. 오리엔탈리즘 자체는 단순화. 순수화를 가저오는 장치이며, 科學化的이라던가 보편적이라고 하는 형용어가 알맞은 유일 무이한 형 --- 이따금 자주 [본질]이라고 부르게 되는형 --- 으로 향하여 수렴해 간다. 여기에 대하여, 오리엔틸리즘(비판)쪽은 그것이 重層的이며 동태적인 이스람세계의 구체적인 시간. 공간이 있는 모습과 같이 섬세한 눈매를 보이고 있는 이상, 다양하며 복잡한 의론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기서는 모-든 요소가 비판의 土俵속으로 끌려 들어 간다. 예술작품이나 학술논문의 작자는 작자로써의 특권을 박탈당하고 작품의 독자나 감상자도 無傷으로 있을 수 없게 된다. 물론, 비판을 전개하는 논자 본인도 마찬가지다. 모-든 국면이 모-든 전술을 구사하는 끝이 없는 戰場으로 화한다. 라이브랄리로 700페이지가 넘는 [오리엔탈리즘]의 장대함은 이미 여기서 유래했다고 봐야한다. 따라서 사이드적인 발상을 미술에 응용하려는 시도도 단순히 하나의 종류가 아닌 각지각색의 방법이 있을 수 있는것이다. 그 중의 하나를 실천해 보인 것이, L. 녹크린이다. 사이드가 20세기의 바래스치나人이며 더욱 영문학연구자라고 하는 스스로의 개별성을 이론적입각점으로 잡았던 것과 같이 녹크린도 여성이면서 동시에 미술사가라고 하는 긴장관계를 품고 있는 개별성에 입각하면서, 서양에 의해 수동적인 대상으로써의 오리엔트를 남성적 시선앞에 노정시키는 여성이란 것과 겹침으로써 사이드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려고 하고 있다고 본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 하나의 이어받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N. 브라이손이 말하고 있는것과 같이, 사이드는 [필요불가결한 분석도구의 제공]을 제공해 주었을 뿐으로, 그것을 어떻게 쓰는 가의 문제는 우리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약력: 1935년 영국의 위임통치하의 예르살램에서 태어남. 그리스드교의 파래스치나 가정에서 자람. 예르살램. 레바논. 카이로를 왕복하면서 소년기를 보냄. 51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프린스톤대, 하-버드대에서 배움. 컬럼비아대의 영문학. 비교문학의 교수. 전문의 문학 연구뿐 아니라, 오리엔탈리즘 비판에 대표되는 바 서양적 知 전체를 비판, 나아가서 파래스치나 문제의 비판적. 실천적 간여를 행하고, 분야를 초월하는 큰 영향을 지속하고 있음. 주저: [시작의 형성 – 의도와 방법] 1992 일본. [오리엔탈리즘 상. 하] 1993 일본. [세계. 택스트. 비판가] 1995 일본. [파래스치나는 무엇인가] 1995 일본. [음악의 코라브레이선] 1995 일본. [이스람보도 --- 뉴스는 여하히 만들어 지는가] 1996 일본. [지식인란 무엇인가] 1998 일본. [펜과 검] 1998 일본. [문화와 제국주의] 1998 일본. [파레스치나로 돌아 간다] 1999 일본. [먼 장소의 기억: 자전] 2001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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