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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2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2923 2017-09-11
46번쩨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R. Jameson) “歷史的 變轉을 지속하는 世界시스템의 끊임 없는 解析者” 역사에 씨나리오를 구하는 것이 점점 낡은 愚行으로 보이고, 점점 곤난한 시도로 사료되는 상황속에서, 제임슨은 1960년대 이후 일관되게 그 시도를 지속해 왔다. 더욱이 强진한 분석력과 광범위한 퍼스팩티브로 그 시도에 설득력을 띠우면서, 그것이 愚行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상황에서 한층 중요한 知的實踐임을 증명해 왔다. 그리고 오늘날 그는 미국에서도 가장 존경을 받는 비평가의 한 사람이 되고 있다. 그의 비평활동에 착상과 지침과 활력을 주고 있는 것은, 의심할 필요 없이, 칼-마르크스 와 그 의도를 이어가는 최량의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이다. 70년대 중엽까지 제임슨은 사르트르나 루카치나 프랑크프르트학파의 사상을 연구하는 것으로, 마르크스주의 비평의 액추얼한 가능성의 수맥을 파내는 작업을 해 왔다. 더욱이 비평행위의 형식에 주목하여 그 전통을 계승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그는, 동시에, 러씨어.포-말리즘나 P. W. 루이스를 바탕하는 문학작품을 지속적으로 정치하게 해석하면서 언어표현과 이야기의 구조속의 정치적 함의를 분석하는 방법론을 세운다. 허나, 오늘날에 와서 뒤돌아 보면서 그의 비평의 전망이 크게 열렸던 것은, 80년대에 들어 와서 그의 비평적 안목이 자본주의의 현행시스템의 총합적분석에 눈을 돌렸었때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물론 그의 가장 유명한 것이, 역사감각이 결락된 고도소비사회의 발전단계를 명쾨하게 특징지워 갔던 포스트 모더니즘의 이론이다. 이 이론의 임팩트로 제임슨의 이름은 [포스트 모던의 사상가]로써 가장 잘 알려진 것 같은데, 그 자체가 역사감각의 부재를 전형적으로 반영한 이 켓치프레이즈 보담 오히려 역사적변전을 지속하는 세계시스템의 끊임없는 해석자라고 하는, 얼만간 地味로운 記述쪽이 한층 정확히 그의 비평활동의 특징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지 모른다. 사실, [변증법] [유-토피어] [물상화]라고 하는 그의 분석어휘는, 그의 방법론이 최첨단의 유행이라기 보담 매우 오-소독스한 전통의 활용을 기도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며, 이들 일견 이미 쓰먹은 개념에서, 眼前의 현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해방의 가능성을 묘색하기위한 새로운 활력을 최대한 인출해 내는데, 그의 비평의 비범한 점이 놓여 있는 것이다. 제임슨은 훌륭한 마르크스주의 사상가가 반드시 갖추고 있는 實直함과 지속성과 헤안이 서로 맺으저서 그 통합에 성공한, 희유한 비평가라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뉴-히스토리즘와 俗流 디컨스트락선이 유행하고 [역사의 종국]이 소리 높이 외처 지고 있는 시니컬한 언설상화속에서 (시대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묻고 자본주의의 발전단계를 분석한다는 자세를 일관해 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제임슨의 광범위한 비평활동의 근저에 일관되고 있는 것은, [물질적생활의 생산양식은 사회상 혹은 정치상 내지 정신상의 생활과정일반을 조건지우고 있으며 물질적기반의 변화에 따라 상부구조전체가 변혁된다]라고 하는 마르크스의 정식화에 기초한 견실한 자본주의의 현상분석이다. 이 모델을 고집하면서 그는 네이선을, 철학언설을, 미디어와 컴뮤니케이선의 현재를, 제3세계와 마이노리티의 해방을, 그로발리제이선과 넷워크화를, 그리고 문학과 건축, 영화를 명쾨하게 그리고 유연하게 논해 가고 있다. 소비엩연방이나 베를린의 壁과 더불어, 미국 언설계의 시니시즘도 과거로 밀려, 한번은 끝났다고 사료되는 역사의 발전속으로 샘켜지고 있는 상황속에서, 이러한 제임슨의 수비일관된 비평자세가 새로운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60년대이후의 자본주의와 문화의 발전단계를 포스트모더니즘로 보고 이를 分節化했을 경우, 제임슨은 그 異種混㴗성의 모델을 포스트모더니즘건축에서 보고 있으며, 그 때문에, 그는, 문학과 더불어 건축에 관해서 발언하는 기회를 많이 갖어 왔었다. 또한 80년대 후반부터는 영화비평에도 적극적으로 간여해 왔다. 허나 쫍은 의미에서의 美術 그 자체에 관해서는, 그의 언설에서 특별한 비평적공헌이 있었다고는 말하기 곤난하다. 물론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예술을 모더니즘에서 확정하기 위해서 포-트.리얼리즘나 폽 아-트나 컨셒추얼. 아-트에서 언급은 하고 있어나, 이는 상식적인 지식에 기반한 역사적 정리란 것에 지나지 않으며, 파노브스키-나 뷀브르그연구소의 업적을 들어 내는 것도, 역사적 시점의 한 유파를 대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이들 미술사가들의 작업들이 회화분석의 내부에까지 들어 와서 논한 일은 없었다. 이로부터, 혹은 도그마틱한 공산주의로부터의 개입의 기억과도 겹치면서,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비평과 시각예술 사이에 그렇게 생산적이라 말할 수 없는 관계를 귀결시킬는지 모른다. 그러나 알췌셀에 의한 이데올로기-장치의 분석이나 벤야민의 시각미디어론을 처음으로 하고, 여기서부터 더욱 해명해야 할 문제를 품은 세련된 시각성의 의론의 흐름은, 확실히 마르크스주의비평의 전통속에서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임슨 역시 영화비평에서 시각영역에 있는 욕망과 가치와 권력의 결합태를 분석하면서, 이마지나티브한 스크린의 세계와 그것이 투영되는 역사적현실과의 관계를 물을려고 할 때, 그러한 의론의 전통의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그의 비평과 시각예술의 분석과의 생산적인 관계의 가능성은, 이러한 理論展開안에서 찾아 내야 할 것이다. 원래, 역사에 싸나리오를 부여하는 시도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결정론적 인과론에 의해 사후적으로 역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변전하는 상황과 개념의 기능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현재의 사상을 세계시스템의 총체와의 관계속에서 해석하는 틀을 끊임없이 새롭게 설정 해 가는 것을 말한다. 제임슨의 비평적실천의 서늘한 날이 스스로 증명해 왔듯이 그러한 해석에의 의지는 결코 낡은 것이 되지 않는 것이다. 아-트의 비평에서도 만찬가지이다. 略歷: 1934년 미국 태생. 예일대학 졸업후, 프랑스의 엑스대학, 독일의 뮌헨,벨르린 양대학에 유학하고, 하-버드대학, 예일대학, 캘리포니아대학교 내지 산디에고대학 및 산타그르즈교에서 가르치다. 현재는 듁대학의 비교문학 교수. 제2차대전후의 영어권에서 가장 첨예한 마르크스주의문예비평가로 알려저 있다. [비운다리 2 ] 의 편집위원이나 [비평공간]등의 편집고문을 맡았고, 문학이론뿐만 아니라, 대중문화론, 건축비평, 영화비평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발휘하고 있다. 主著: [변증법적비평의 모험] 1980 일본. [정치적 무의식] 1989 일본. [사르트르] 1999 일본. [시간의 종자] 1998 일본. [뒤에 태어나는 자에게] 1993 일본. [언어의 감옥] 1988 일본. The Geopolitical Aesthetic, BFI 1996 Signatures of the Visible, Routledge, 1993 Brecht and Methode, Verso 1998
1421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3367 2017-09-06
45번쩨 W. J. T. 밋첼(W.J.T. Michell) “畵像이 言語를 凌駕하는 現代의 視覺文化를 批判” 근대미술사학의 이론적 틀이나 방법론적前提를 문제 삼는 연구자가, 적지 않게 그 케리어의 단서에서 윌리엄. 브레이크 연구에 손 데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미술사란 [보이는 것을]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하는 곤란한 작업에 지나지 않으며, 이미지와 택스트를 자유로히 왕복했던 19세기의 환시자 브레이크야 말로 미술사학에 내재하는 그러한 곤란을 훌륭히 상기 시켜 주기 때문이다. 시카고 대학교수로 영문학과 미술사의 교편을 잡고, [크리티컬.인콰이어리]지의 편집인을 오랫동안 맡았던 밋첼 역시 그러한 한 사람이었다. 그의 중요한 관심은 회화와 시, 화상과 언어, 이미지적인 것과 택스트적인 것,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의 착종된 관계에 있었다. 회화나 詩라고 한다면, 이내, [시는 회화와 같이]로 시작하는 古來중요한 문제군을 제시해 왔지만, 밋첼은 이미지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의 분석을 통해 이러한 관계를 권력과 가치의 체계로 잡는다. 단지, 이미지. 택스트간의 역학에 관한 그의 고찰은 시대와 더불어, 아니, 시대의 요청과 더불어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그의 주저의 하나, [이코노로지-: 이미지. 택스트. 이데올로기]에서는, 일반적으로 관습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이미지와 택스트의 차이가 이데올로기-의 산물임]을 설파되고 있다. [시와 회화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묘체고유의 본질, 묘체가 표상하는 대상, 혹은 인간정신의 법칙에 의해 항상 주어지는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밋첼은 언어와 이미지간의 차이가 [개인간, 집단간, 국가간, 계급간, 젠다-간, 그리고 문화간의 착종되고 갈등하는 사회적. 역사적관계]의 산물이며, 특정한 가치관, 권력, 이헤=관심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을, 렛씽, 바-크, 곤브릿지, 굿먼등에서 그 예증을 구하며 논하고 있다. 헌데, 택스트와 이미지간의 경계선 만들기에는 항상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내재하고 있음을 지적한 [이코노로지]에서, [자매편]으로서도 예고된바 있는 [픽쳐.세오리]에서는, 이 경계선의 [침범]이 논해지고 있다. 예술실천의 장에서는 택스트적인것과 언어적인것의 상호침범이 오히려 [常態]임을 논하는 대목에서는 바로 브레이크연구자의 面目躍如라 할만 하다. 즉, 이미지 / 택스트관계는 異쟝르, 異표상형식, 異미디어간에서 구축될 뿐 아니라 단일한 쟝르속에서도 인정된다. 말하자면, 순수한 언어적인 예술도, 순수한 시각적인 예술도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으며, 시각미디어이건 언어미디어이건 [일체의 미디어는 믹스 미디어이며, 일체의 표상은 異種混成이다]라고 된다. 밋첼은 시각적인것과 언어적인 것이 맺으지는 복합적. 총합적개념으로, [이미지 택스트]를 제기하고, 영화, 테레베, 연극이나 揷畵 그림의 택스트에서, [이미지-택스트]관계 위상이 여하히 정치적. 제도적, 사회적 抗爭의 場이며, 지배적관습에 응답 내지 저항하고 있는가를, 고찰함의 중요성을 설한다. 이미지와 택스트의 分節化를 고의적으로 피한 [이미지택스트]란 개념이 등장한 배경에는, 오늘날의 예술, 미디어, 컴뮤니케이선의 간단없는 혁신의 조류속에서, 시각적인 것과 택스트적인 것과의 상호관계가 종래와는 달리 일신된 것을 들 수 있다. 화상이 언어를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적 습관차원이나 대중문화에서의 시각체험의 추세나, 학문적언설에서 [한때 언어와 같이, 회화=화상이 인문諸學의 의론의 중심을 차지하는] 화상중심주의적 경향을 가르켜, 밋첼은 [언어론적轉回]가 아닌 [화상론적전회]라 부른다. 그리고 이 사태에 상응하여 [좋턴 나쁘던. 이미지가 갖는 힘에 주의를 환기 시키고 이미지 사용이 갖는 다양성이나 역사적특이성을 인식하는 시각문화비판]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시각문화(Visual Culture)]는 이와 같이 시각문화 비판을 위해 90년대 중엽에 창도된 프로그램이다. 이는 미술사, 건축사, 정치사, 영화사, 문학사, 일반사라고 하는 전통적학문영역의 틀을 들어 내고 [시각체험의 사회적구축에 관한 연구]로써 [미디어의 재현, 시각예술에 있어 시각체험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시각체험의 문화적구축에 초점을 맞추고] [미술사가, 영화학자, 공학기술.이론가, 현상학자, 정신분석학자, 인류학자의 대화를 필요로 하는…….경계를 횡단하는 諸學의 수렴과 대화의 장]이다. 종래의 미술사가와 같이 하이.아-트뿐만 아니라 모든 시각경험을 학제적으로 연구하는 [시각문화]의 도구로써 밋첼은 [비판적 이코노로지]를 든다. 일체의 사상을 예술의지의 [상징형식]이라고 하는 [大다페스토리]속으로 짜 넣어 버리는 파노브스키의 이코노로지-가 로고스(언어)에 의해 이콘(도화)을 억압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코노로지-는 이 직물을 해체해 내고 이콘으로 하여금 로고스에 저항하도록 하며, 이를 억압함을 노린다. 말하자면, 요 삼천년래의 로고스에 의한 이콘의 지배를 대신하여, 이콘을 스스로 말하도록 촉진하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써 [회화는 실제로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에서 밋첼은 사발단다스.스타디이즈에 유래하는 [사발단.모델]을 제시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미지의 힘에 대한 밋첼의 견해의 역전이다. 이미지는 종래 생각해 온 것 만컴 강력하지 않고, 오히려, 개인에게 상처를 입히던가 이데올로지 조작을 해 내는 [이미지의 힘]이라고 하는 레토릭 내지 집단환상이야 말로 [시각문화]는 비판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약자의 입장에 선 이미지는 [타의 게급의 헤게모니하에 놓여 있는 게급 즉 종속게급 서발턴]으로 처우되어, [화상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화상이 무엇을 바라는가] 즉, 화상의 결여에 유래하는 그 욕망을 이야기 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대의 요청에 즉응한 논조를 전개하는 밋첼은, 례를 들면, 스파이크.리 감독 [Do the Right Thing]와 천안문사건과 퍼브맄.아-트 문제를 보드레스를 중심으로 하는 세쪽으로 논하는 [퍼브맄.아트의 폭력]에 보여지는 바와 같이 폭 넓은 의론을 제시해 간다. 약력; 1942년 태생. 죤즈.홉킨즈 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77년부터 시키고대학에서 교편을 잡다. 현재는 동 대학 교수[미술사]. 주저: [이코노로지-: 이미지. 택스트. 이데오로기-] 1992년 일본. Iconology: Image, Text, Ideology,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6, Chicago and London. [이야기에 관해서] 1987 일본. On Narrative, ed., By W.J.T. Mitchel, 1980,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and London The Last Dinosaur Book: the Life and Times of a Cultural Icon, 1998,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and London Picture Theory: Essays on Verbal and Visual Representation,1994,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and London Blake’s Composite Art: A study of the Illuminated Poetry, 1978, The Princeton University Press Landscape and Power, ed., by W.J.T. Mitchel, 1994,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and London Art and the Public Shere, ed., by W.J.T. Mitchell, 1992,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and London Against Theory: Literary Studies and The New Pragmatism, ed,, by W.J.T. Mitchel, 1985,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420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3055 2017-08-30
44번쩨 쟝.보드리얄(Jean Baudrillard) “消費社會에서의 아-트의 消滅을 宣言” [物의 體系]로 1968년 파리의 5월혁명 직후의 사상계에 등장했던 보드리 얄은, 그 후, 30년 이상에 걸쳐서 현대세계의 지적 씬(scene)에 독자의 자극을 헛뿌리고 있는바, 그 사상은 시대의 변화를 선취하면서 미묘한 변용을 이루고 있다. 전후 얼마되지 않아, 독일어의 대학교수자격을 취득하고, 사회학자 앙리.루훼벨의 조수로써 마르크스의 저작의 프랑스어역에 몰두한 과거를 가진 보드리 얄은, 60년대 후반에 신설된 파리대학난델교에 사회학교수로 초빙되는 것을 계기로 마르크스의 경제학비판, 프로이드의 정신분석, 쇼-슐의 언어기호론을 패스로 하는 현대사회의 기호론적분석을 제안하고, 세계적주목을 받은 이 시기의 주저 [소비사회의 신화와 구조]에서는, 물질의 소비에 의한 차별화 (소위 말하는), [차별화]의 넷워-크에 사회전체가 포장되고 있다는 상황이 선명하게 제시 되어 있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의 포스트 모던의 시대에 쓰였던 [象徵交換과 죽음]이나 [슈밀러 쿨와 슈미레이선]등의 택스트에서는, 그의 관심은 소비사회 깊숙히 파고 드는 [부정적인 것]의 종결로 향한다. 벤야민이 [아우리의 소실]을 착상케 한 오리지널과 코피의 二項對立이 이미 의미를 잃어 버리고 현대사회가 슈미레이선 원리에 입각한 거대한 시스템으로써 결정적전환을 이루는 과정을 보드리 얄은 그려 낸다. 오리지널을 소거하고 모-든 형태의 차이의 변조에 의해 출현되는 과정이 지배적인 단계에서는 현실 그 자체가 슈밀러 쿨이 되어 하이퍼 현실속으로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현실은 끝났다, 역사는 끝났다 라고 주장하는 보드리 얄의 예상을 배반하는 것 같이 90년대에 들어 서면, 세계는 동구사회주의의 해체부터 灣岸戰爭에로, 새로운 격동을 경험하게 된다. 이 변화에 대응하여 사상적 쉽트를 기도했던 것이 90년대의 보드리 얄이다. [투명하게 보이는 악]에서부터 [완전범죄]로 이르는 저작에서, 그는 [부정적인 것]을 추방하고 자기면역성을 상실한 소비문명의 현상을 에이즈나 컴퓨-트.윌스와 같은 [투명해 진 악]이 불가시의 막으로 인류의 공동체를 덮으 시우기 시작하는 단계로 규정하고 그기서 同化나 根絶도 불가능한 [래디컬한 타자성]의 발생을 보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경과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른 보드리.얄의 사상은, [80년대와 90년대의 미술과 문화적생산에 이례적일 정도로 영향을 입히고]. 이미 70년대에 [보-블효과]나 잡지 [토라뷀스]를 통해 현대미술의 세계에 특이한 논조를 전개한 그는, 90년대 초에는 [트란스.에스틱]의 제안을 하며 [예술의 소멸]을 선언한다. [20세기라고 하는 시대의 엠브렘였던 아반가르드], 시대를 선취하고 현상에 래디컬한 비판을 던진다는 의미의 아반가르드는, 정치의 세계에서나 예술의 세계에서도 이미 소멸했다, 라고 보드리얄은 언명한다. [비판적인 것]의 끝에 대응하여, 소비사회의 원칙인 [추한 것은 팔리지 않는다]라고 하는 스로건이 관철된 결과, 모든 것이, [미적인 것]이 되버리면, [美나 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안케 되고, 예술 그 자체가 소멸한다]는 것이다. 허나 다른 한편에서는, 마-켓로써의 [예술]은 어디서나 번영하고 있고, [예술]에 대한 언설도 급속히 퍼지고 있다. 이 모순된 상황에서 멸망해 가는 것, 바로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고, 현실과는 또 다른 장면을 대응하는 능력]으로써의 아-트인것이다. 한때 예술이 하나의 유-토피어, 즉 현실의 일부가 되기 위해 모든 수단으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라 해도, 현재로써는 멀티.미디어와 버추얼.리얼리티를 통해 이와 같은 유의 種은 완전히 실현되고, 지금에서는 누구도 잠재적인 창조자가 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서는 [뒤샹이 레이디 메이드의 빈병걸이를 설치하고, 워-홀이 한대의 기계가 되기를 원했던] 반예술적 시도까지도 이미 현실의 일부로 긍정되 버린다. 이 단계를 보드리 얄은 [미적인 것을 넘어선]=[트란스 에스틱]라 칭하게 된다. 라고 함으로써, 보드리 얄은, 다다나 구성주의와 같은 역사적 아반가르드 부터 밮.아트, 미니멀.아트, 컨셒추얼 아트등의 현대미술에 이르는 다양한 작가들을, 여러가지 경우에 따라 논하고 있는데, 物이 기호화되는 소비사회론에서 출발한 그의 최대 관심사는 아마도 워-홀에 있지 안 했겠나, 생각된다. 보드리 얄은, 위-홀을 논했던 중요한 택스트 [기계적인 스노비즘]에서 그를 트란스.에스틱한 훼티시즘을 최초로 도입한 아-티스트]로 규정한다. 그건, 주체의 욕망으로써의 대상을 갖지 않는 훼티시즘이며, 그럼으로써 위-홀이 제시하는 이미지는 일체의 가치관으로부터 단절된 공허함 속에서 [인공적인 빛을 내고 빛나는 기호]가 된다. 역사적 아반가르드가 시도했던 [작품]과 [표상]의 파괴와는 달리, 위-홀은 아티스트란는 존재와 그 창조행위를 파괴해 버린다. 스스로를 기계로 만들어 버리는 이 스노비즘야 말로 [기계적인 스노비즘]인 것이다. [예술의 음모]]에서 보드리 얄이 [모-든 아-트는 현실속에 비현실을 침입시킴으로써, 현실의 드라마틱한 올터너팁이 될 수 있었다]라고 쓰면서, 그런 아-트의 시대가 끝난 이상, 이제서야 아-티스트에게 남겨진 것은 [나는 무이다]라고 절규하는 스노비즘만이 라고 끝맺는다, 는 것을 상기하기 바란다. 헌데, 최근의 보드리 얄은 [철학자. 사진가]로써의 활동이 눈에 띈다. 도시의 페허나 황페해 진 교외등을 테-마로 한 사진집을 이미 몇권체 발표하고 있을 정도다. 21세기 에 들어 와서도, 그의 다체로운 활동은 계속 해 갈 것 같다. 약력: 1929년 프랑스 태생. 최초에는 앙리.루헤풀의 조수를 맡고 프레히드나 베-타 바이스등 독일문학의 번역에도 손을 덴다. 파리대학 난델교의 교수직을 거처 라디컬한 문명비판적 스탄스에 선 집필활동을 하고, 현대사상.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던지고 있다. 81년, 오토마.캐매라를 선물받은 걸 계기로, 사진 제작에도 행하고, 붸네치아.비엔날레등에 출품한 일도 있다. 일본 방문도 수차. 주저: [물의 체계] 1968년 일본. [소비사회의 신화와 구조] 1970년 일본. [상징교환과 죽음] 1976 일본. [슈미르쿨와 슈미레이선] 1983년 일본. [아메리카] 1986 일본. [투명해진 악]1990 일본. [완전범죄] 1995 일본. [보드리 얄] 1995 일본. [소멸의 기법] 1998 일본. [불가능한 교환] 2002 일본.
1419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3167 2017-08-19
43번쩨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 “前衛藝術이란, [새로운 것]을 [수집하는] 것이다” 사람은 처음 강고한 세계의 모델에 둘려 싸여 있는 것 같이 생각한다. 사람은 이를 벗겨내고 상대화시키고 조소하기 위해서 있는 지혜와 힘을 짜 낸다. 헌데, 이 주변의 세계가 무너진 후에 남는 것은 無다. ……. 여기서부터 무의식중에 脫構築에서 구축으로, 意向의 전환의 프로세스가 시작한다. (이리야.가바고프) 이리야.가바고프와 보리스.그로이스. 한쪽은 예술가로써, 다른쪽은 이론가로써 [예술]의 메커니즘에 도전해 가게 되는 두 사람의 만남은 1977년, 모스코바에 있는 아트리에서 였었다. 당시 가바고프는 비공식의 작품, 즉 구쏘련의 채제하에서는 인정받을 수 없는 작품의 제작에 간여하고 있었다. 한편, 보리스.그로이스 역시 서측의 철학.사상을 극비에 수입하여 동시대의 예술가들과 더불어 접촉을 가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서로 언드그라운드의 활동에 몸을 던지고 있었던 두 사람은 1981년에 그로이스가 서측으로 망명할 때까지 몇시간에 걸치는 비공식의 대화를 여러 번 하게 된다. 이 대화는, 두 사람의 서측 이주 후에는 뷔엔나레등의 공식적인 장소에서 계속하여 하게 되는데, 때로는 두 사람이 자신의 일들에 관해 이야기하는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상대의 일을 설명하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만큼 두 사람의 일들이 가까워져 있었던 것이다. 구쏘련 체재하에서는 서측의 사상을 열심히 배웠던 그로이스, 서측에 예술의 낙원을 그리고 있었던 가바고프 였지만, 서측에의 이주는 두 사람에게 변화를 초래했다. 그로이스는 서측에 망명한후 [全體예술양식 스타-린](1988)을 저술하고 러씨아 아반가르드를 다른 러씨아의 예술, 특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와 단절시켜 정당한 미술사의 틀속으로 포함시키려고 하는 서측의 경향에 異議를 제기한다. 한편 가바고프예술 역시 [동측을 표상하는 예술]에로 변용해 간다. 즉, 여태까지 심취했던 서측세계와 직접 대치한 결과, 양자 모두 러씨아 체험을 전면에 내 세우게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이 구쏘련시대의 정신적 유대, 비공식적인 활동속에서 조성된 예술의 場에 대한 노스탈지어를 품고 있었던 것은 심리적인 사실일런지는 모르겠어나 그 이상 그 특수한 [장]은 서측에 대한 전략적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결코 자본과 금전으로 환원 될수 없는 예술의 場, [고립된] [동지들]에 의한 비공식적 場. 그러나 그로이스도 가바고프도, 단순히 구체재하에서의 자기들의 체험을 서측에 전하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그로이스는 가바고프가 [최근에는 서측에 쏘련에 관해 알린다는 일 보담, 지금, 자신을 둘려 쌓고 있는 (서측) 완결된 예술공간을 나타내고 싶다]라고 하는 발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응수하고 있다. [자네가 하고 있는 일은, 이제사 서측의 문화공간내에서의 몸짓으로 사료되고 있어, 보는 측은 서측의 예술시스템의 현실공간에서의 몸짓으로써 기능하고 있는 그것들의 일들의 의미를 묻고 있는 것이다](베네치아 뷔엔날레 [붉은 館]에 관한 대화) 이는 아서. C. 단토의 [아-트월드] 이상으로 [예술]의 제도를 문제화한 발언이다. 그로이스는 밍명후의 가바고프와의 대화를 뫃은 [인스터라이선의 예술]에서, 구쏘련하에서 고립하여 있었던] 자신들의 상황이 서측에 있었도 역시 닫혀있는 데로였음을 지적한다. 말하자면, 동에서던 서에서던 자신들이 간여했던 류의 [예술]이, 장으로서는 결코 사회속으로는 열리지 못할것을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전체예술양식 스타-린] 에서 서측비판이 강했던 그로이스는, 이 [닫힌 장]의 구조적 해명 혹은 그 이론적 구축으로 향해 간다. 그로이스의 이 방향이 가장 명확화된 것은, 1992년의 [새로운 것]에서 였다. 同著는 [새로운 것]의 형용에 어울리는 특징들을 부각시킨 후, 그 [새로운 것]을 필요로 하는 문화의 경제적 메커니즘의 존재를 지적한 것이었다. 여기서 그로이스가 시장경제와는 별도로 존재하는 그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 [아-카이브]였으며, 이것이 그의 대표적 논문 [코렉선의 논리]와 맛닿는 것이다. 1997년의 [코렉선의 논리]에 수용된 [코렉선의 논리]는 [우리들의 문화에서는, (진정으로) (자율화된) 예술은 주로 뫃여지는 것을 목적으로 생산되고 있다]라고 하는 일문으로 시작한다. 그는 동 논문에 의해 어떤때는 작품내부에, 어떤때는 작품이 표상하는 것에, 어떤때는 단순히 개인의 기호로 돌려지고 있다. 어떤 것을 예술이라고 인정하는 기능을 코렉선의 논리에 부여 했던 것이다. 이 [코랙선의 논리]에 의해 정확하게는 [미술관 코렉선의 논리]는 현실의 미술관이라기 보담, 그 자신 예술적가치의 결정권을 갖는 자율적 메커니즘을, 그로이스는 근현대의 미술관 코렉선으로 보았다는 것이 사실일것이다. 원래 코렉선은, 일례로, 코인의 수집대상이 정해지면, 같은 코인을 여러 개 뫃으지 않고, [또한 코렉선에 들어 있지 않는 신귀한 [코인]을 수집한다는 성질이 있다. [예술]을 대상으로 할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의 현실생활은 끝없는 반복의 集積인바, 코랙선은 같은 것을 끝없이 수집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테까지 없었던 새로운 것], 그리고 가능하면 특징적인것을 가하여 비대해 가려고 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1997년의 [코렉선의 논리]에 들어있는 [코랙선의 논리]는, [우리들의 문화에 있어서는 (진정) 자율적인]예술은 주로 수집되는 것을 목적으로 생산되는] 것이라고 하는 一文으로 시작한다. 그는 동 논문에 의해 어떤때는 작품내부로, 어떤때는 작품이 표상하는 것에서, 어떤 때는, 단순히 개인의 기호에 돌려진 어떤 것을 [예술]로 인정하는 기능을 코랙선의 논리에 부여했던 것이다. 이 [코랙선의 논리] (보다 정확히는 [미술관 코랙선의 논리]는 현실의 미술간이라기 보담 그 자신 예술적가치의 결정권을 갖는 자율적 메커니즘을, 그로이스가 근현대의 미술관 코랙선으로 삼았다는 것이 사실이다. 원래 코랙선에는, 일례로, [코인]등 수집대상이 처음에 정해지면, 같은 코인을 몇 개고 수집하는 것을 마다하고 [또 코랙선에 들어 있지 않는(신귀한)코인]을 수집한다는 성질이 있다. {예술}을 대상으로 할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의 현실생활은 끝없는 반복의 연속이며, 같은 것의 집적임으로, 코랙선은 같은 것을 묵묵히 수집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태까지 없었던 새로운 것], 그리고 가능하면, 특징적인 것을 가하여, 비대해 가려는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로이스는, 근대의 미술관이 잘 보지 못했던 외국의 풍물을 [예술]의 이름하에 수집하여, 전람한다는, 실로 [신귀함]의 추구속에서 발달해 왔던 것을 역사적으로 개관하고, 그기서 [또 [예술]의 코랙선에 들어 있지 않는 [새로운 것]을 덧붙히는 행위 그 자체가 자율화해 갔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원래 코랙선의 체계였어나, 그 [새로운 것]의 탐구의 자율화는, 그 장에 간여하는 사람이나 물체를 둘려 싼다. 모-던한 예술가들은, 오래된것이나, 그것의 모방, 이를 보존하는 미술관을 비난해 왔어나 실은 오래된 것을 대신하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가 모던의 논리체계속에 규정되 있었던 것이다. 이 의론이 다음의 가바고프의 말과 호응하고 있음을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나는 保存의 법칙을 믿는다. …… 오늘날에는 수장되어 가는 것의 질을 지배하는 것은, 코랙선의 체계성이다.](이리야.가바고프). 약력: 1947년 동독일 태생.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배움. 1976-1981년, 모스코-바 대학 구조언어학부에 연구원으로 근무. 1981년, 서독일로 망명. 92년 민스터대학 철학연구소를 거처 94년, 칼스르에 조형대학 예술학과 교수에 임관. 2000년 윈조형예술아카데미-학장에 취임. 주저: [전체예술양식 스타-린] 2000년 일본. [이리야 가바고프의 예술] 1999 일본. Uber das Neue Versuch einer Kultrokonomie, Carl Hanser Verlag, Muchen/Wien, 1992 Logic der Sammlung Am Emde des musealen Zeitarteres, Carl Hanser Verlag, Munchen/Wien,1997 가바고프와의 대담에 관해서는 다음 저서를 참조하기 바람: Die Kunst des Fliehens, Carl Hanser Verlag, Muchen/Wien, 1991
1418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2757 2017-08-13
42번쩨 에드와드. 사이드(Edward W. Said) “歷史와 文化를 대상으로 이를 부각시키는 批判의 눈” 사이드는 기본적으로는 文藝批判家임으로 미술을 정면 그대로 논한 일은 그리 많지 안타. 허나 그 主著의 하나인 [오리엔탈리즘]의 표지에 자주 회화가 등장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오리엔탈리즘]라고 하는 말 그것 자체가 서양미술에 있어 동양취미라는 의미로 쓰인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적어도 혹종의 사람들에게 이 말은 과거의 일부의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취미를 기술하는 것이라기 보담, 사이드가 부여했던 의미 – 지금을 사는 모든 사람에게 무관계가 아닌 광범위한 사회. 문화. 정치. 경제적 제문제의 상관성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술도 그 권외가 아니다. 저서 [오리엔탈리즘]은, 오리엔트를 제재로 하는 서양인에 의한 문학작품이나 地域硏究가 여하히 오리엔트를 표상해 왔는가에 따라서 비판적으로 논하고 있다. 허나 이 저작의 주제는 오리엔트에 대한 서양인의 단순한 무지나 편견은 아니다. 근대라는 것이야 말로 그 주제인것이다. 이교도에 대한 그리스드교도의 종교적 편견이라면, 근대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세속화가 나아간 근대가 되면서, 과학적. 합리적인 기초에 입각하여 제문화를 비교한다는 일견 냉정한 자세가 지배적으로 되어 갔다. 그러한 과학화를 선도하는 학문의 하나가 근대文獻學이었다. 이 학문이 성취한 중요한 작업은 [언어란 것은 신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유출하는 힘에 의해 생긴 것이다] 라고 하는 그때까지의 언어관을 부정한 것이였다. 이 부정에 의해 인간의 언어는 신이라고 하는 외적인 힘으로부터 독립한 하나의 [내적인 場]으로 파악하게 이른다. 근대문헌학은 내적인 수비일관성을 갖는 언어라고 하는 객관적인 연구대상을 획득한 것이다. 이후 점잔케 분석됨을 기다리는 이 연구대상을 여하히 맛있게 요리를 하여 그 안의 비밀을 고백시키는가 가 문제가 된다. 그건 말하자면, 겉치레로 다체로운 언어현상의 배후에 그 자체로 독립된 불변의 [시원] origin을 찾아 나선 旅路가 된다. 오라엔트에 대해 열렬한 관심을 품는 문학자나 연구자도 역시 근대문헌학자와 같은 자세를 취하면서 연구대상인 오리엔트와 대면하였다. 기대한 데로 오리엔트는 매혹적일 정도로 다채로운 양상을 보여준다. 허나 오리엔탈리스트는 그기서부터 이스람문화의 내재적 본질 – 하나의 닫혀있는 시스템 –을 파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야 말로, 서양의 오리엔탈리스트가 특권적으로 지니고 있을법한 [앎(知)]의 능력이며 의무일것이다. 허나, 그렇게 해서 축출해 낸 오리엔트의 본질은, 구체적인 시간. 공간의 어디에도 위치되어 있지 않다. 초시간적. 초공간적인 시스템에 지나지 않는다고 사이드는 비판한다. 그럼으로 해서 그려저 낸 오리엔트는 靜鎰하며, 논리적인 명석함까지 띠고 있는 것이다. 이때 무엇인가 배제. 엄페되어 있다고 보게 된다. 그 자신의 문예비판용어를 빌린다면, ‘중심없는 複數性의 能産的인 戰場’인 [시작 (beginning)]이 된다. 이를 나타내려고 하는 사이드의 작업은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정치적이라 말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바, [오리엔탈리즘]안에서 회화를 둘려싼 문제는 그렇게 많이 다루어저 있지 않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사이드의 의론은, 서양에 의해 식민지상주의가 전개된 19세기 후반, 제2제정기의 프랑스에서 활약한 아카데미즘의 화가 제롬이 오리엔트를 여행한 후에 그린 오리엔탈이즘 회화에도 헤당 된다고 본다. 실제로 이 저작의 표지를 장식한 그림 역시 제롬이다. 제롬이 정밀함을 극한 필적에 의해 만들어 내는 이스람세계는 영원한 靜的 세계안에서 結晶化된 것 같이 보인다. 그의 정밀한 회화수법이 기법적. 문화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은, 사진등 서양의 과학기술에 의한 시각장치의 명석함이며 그것은 근대문헌학의 (객관성)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명석함을 만들어 낸 과학기술 또한 오리엔트를 식민지로 지배하는 힘 역시 서양에 주었던 것이다. 오리엔탈리즘 자체는 단순화. 순수화를 가저오는 장치이며, 科學化的이라던가 보편적이라고 하는 형용어가 알맞은 유일 무이한 형 --- 이따금 자주 [본질]이라고 부르게 되는형 --- 으로 향하여 수렴해 간다. 여기에 대하여, 오리엔틸리즘(비판)쪽은 그것이 重層的이며 동태적인 이스람세계의 구체적인 시간. 공간이 있는 모습과 같이 섬세한 눈매를 보이고 있는 이상, 다양하며 복잡한 의론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기서는 모-든 요소가 비판의 土俵속으로 끌려 들어 간다. 예술작품이나 학술논문의 작자는 작자로써의 특권을 박탈당하고 작품의 독자나 감상자도 無傷으로 있을 수 없게 된다. 물론, 비판을 전개하는 논자 본인도 마찬가지다. 모-든 국면이 모-든 전술을 구사하는 끝이 없는 戰場으로 화한다. 라이브랄리로 700페이지가 넘는 [오리엔탈리즘]의 장대함은 이미 여기서 유래했다고 봐야한다. 따라서 사이드적인 발상을 미술에 응용하려는 시도도 단순히 하나의 종류가 아닌 각지각색의 방법이 있을 수 있는것이다. 그 중의 하나를 실천해 보인 것이, L. 녹크린이다. 사이드가 20세기의 바래스치나人이며 더욱 영문학연구자라고 하는 스스로의 개별성을 이론적입각점으로 잡았던 것과 같이 녹크린도 여성이면서 동시에 미술사가라고 하는 긴장관계를 품고 있는 개별성에 입각하면서, 서양에 의해 수동적인 대상으로써의 오리엔트를 남성적 시선앞에 노정시키는 여성이란 것과 겹침으로써 사이드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려고 하고 있다고 본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 하나의 이어받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N. 브라이손이 말하고 있는것과 같이, 사이드는 [필요불가결한 분석도구의 제공]을 제공해 주었을 뿐으로, 그것을 어떻게 쓰는 가의 문제는 우리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약력: 1935년 영국의 위임통치하의 예르살램에서 태어남. 그리스드교의 파래스치나 가정에서 자람. 예르살램. 레바논. 카이로를 왕복하면서 소년기를 보냄. 51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프린스톤대, 하-버드대에서 배움. 컬럼비아대의 영문학. 비교문학의 교수. 전문의 문학 연구뿐 아니라, 오리엔탈리즘 비판에 대표되는 바 서양적 知 전체를 비판, 나아가서 파래스치나 문제의 비판적. 실천적 간여를 행하고, 분야를 초월하는 큰 영향을 지속하고 있음. 주저: [시작의 형성 – 의도와 방법] 1992 일본. [오리엔탈리즘 상. 하] 1993 일본. [세계. 택스트. 비판가] 1995 일본. [파래스치나는 무엇인가] 1995 일본. [음악의 코라브레이선] 1995 일본. [이스람보도 --- 뉴스는 여하히 만들어 지는가] 1996 일본. [지식인란 무엇인가] 1998 일본. [펜과 검] 1998 일본. [문화와 제국주의] 1998 일본. [파레스치나로 돌아 간다] 1999 일본. [먼 장소의 기억: 자전] 2001 일본.
1417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11395 2017-08-11
41번쩨 마-샬 . 맥루헌(Marshall Mcluhan) “미디어는 멧시지다” 마-샬.맥루헌은 원래 영문학자였으나, 1962년에 [구덴베르크의 銀河系-活字人間의 形性], 64년 [미디어론-인간의 확장의 諸相]을 출판하여, 일약 미디어론자로써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캐나다의 사상가이다. 일본에서도 화제가 되었었다. 그리스도교나 심리학을 위시한 폭넓은 교양을 배경으로, 가지 각색의 知의 영역을 橫斷하면서 미디아론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구덴베르크의 은하계]로 활자미디어가 얼마나 이 세계를 변화 시켰는가를 논한위에 [미디어론]에서 전자미디어를 논할 틀(파라다임)을 제시했다. 80년대에 와서는, 과거의 시대의 籠兒라고 하는 대접을 받는 경향이 강했었나,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었다. 근년의 재평가는, 인터넷의 보급을 위시하여 멀티.미디어를 위시하여 멀티.미디어를 둘려싼 정세에, 그로벌.뷜레지(지구촌)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그의 미디어론이, 적중했던 탓이다. 그가 오랫동안 근무했던 트론트대학의 맥루한.프로그램의, 미디어에 관한 연구의 지속도 그러한 평가에 공헌하였다. 그가 말하는 미디어란, 당시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던 매스 미디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제2차세계대전후 일거에 보급되기 시작하여 큰 영향력을 보였던 태레비젼의 미디어성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보다 광의의 미디어란 개념을 설정한다. 그것은 기술이라고 바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미디어론]안에서 다루고 있는 예를 들어 본다면, 말해지는 언어, 쓰여진 언어를 위시하여 수, 의복, 사진, 신문, 라디오등을 하나의 미디어의 카테고리속에서 다루는 것이었다. (정신영역에 물 개념을 도입한 것) [미디어론]의 문제에 기술되 있는데로, 맥루헌은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다] 라고 잡는다. 그에게 미디어란 인간의 감각의 활동을 신체밖으로 들어낸 것으로 이로 인해 인간의 감각비율의 변화를 이루는 것이다. 예를 들면, 라디오라고 하는 미디어는 듣는다는 인간의 감각을 확장한다. 라디오가 없으면, 디스크 죡끼의 소리는 듣는 자가 있는 장소에서 너무 멀어서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유명한 명제의 하나로, [미디어는 맷시지다]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이 의미는 미디어를 통해 보는 내용 이상으로, 미디어를 사용하는 자체로 인해 우리들의 지각은 변화를 일으킨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TV가 전하는 뉴-스이상으로, TV를 보는 것 자체로 우리들의 사유는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디어에 의해 감각비율이 변화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쓰는 문자, 활자인쇄술, 그리고 전자 미디어와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함으로 문화는 크게 변천을 걲으 왔다. 더욱이 근대의 활자인쇄술이 지배적인 문화와, 그 이후의 전자미디어가 지배적인 문화는 모-든 면에서 대비되고 있다. 쓰는 문자, 활자미디어의 등장으로, 우리들의 지각은 시각중심이 되었다. 말해지는 언어가 쓰이는 문자가 되고 활자가 됨으르써 사고나 감각은 시각화되고, 신체에서 떨어저 나와 객관화시킬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사물은 균질화되어 시계열로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고 설명될 수 있게 되었다. 미술에서는, 르넷상스에 원근법이 채용되는 것이다. 서책에서던 회화에서던 작자의 단일적인 시점에서 재구성되어 나온 세계다. 회화의 세계에서 이 원근법이 결정적으로 번복된 것은, 20세기초두의 큐비즘의 탄생이였으며, 동시기에 영화가 탄생한다. 큐비즘에서는, 단일의 시점에서 보이는 2차원의 세계를 가능한데로 균질하게 변환하는 것을 멈추고 순간적으로 느낀 대상 전체를 같은 2차원의 평면으로 그린다. 원근법이라면 함께 있을 수 없는 배면과 전면이 나란히 광택이나 질감이 조화되지 않은 채로 그려진다. 여기서는 큐비즘란 미디어가 멧시지가 된다. 그려저 있는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그려저 있는가가 문제가 된다. 활자미디어에서 전자미디어가 주류가 되는 이행기에 큐비즘이 탄생해 나왔드시,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에 수반된 감각의 변화를 제빠르게 잡아 내는 것은 예술가들이다. 큐비즘의 경우에는 시각우위의 활자미디어의 시대로부터 촉각의 복권의 징조가 보인다. 제2차세계대전후에 보급되기 시작한 TV는 시청각을 물론이거니와 全感覺을 전체적으로 가동시키는 것이라고, 맥루헌은 생각했다. 테래비전의 영상은 영화정도로 화상의 정도는 높지 않으며 모쟈이크상이다. 탤래비전 영상과 같이 주어지는 정보량이 적고 세부까지 발신자가 정해지지 않는 미디어를 맥루헌은 쿨(cool)한 미디어로 부른다. 쿨한 미디어는 듣는 측의 참가를 요청한다. TV의 경우, 영상도 그 영상을 3차원으로 보기 위해 시청자의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보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내용에 있어서도 디렉트가 세세하게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부적인 것에 관해서는 시청자의 상상력을 전제하고 제작한 것이다. 그래서 완성품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와성하는 전의 제작과정을 보이도록 짜 놓는 것이다. 활자미디어시대의 예술이 만든자와 받는자는, 단일의 시점에서 만든자의 표현하고저 하는 완성품을, 받는 자가 만든자의 의도에 따라 본다는 관계였었다. 만든자가 받는자보담 압도적으로 작품에 대해 우위에 놓여 있었다. 한편, 전자미디어시대의 예술은 전자 미디어에 따르지 않트래도 만든자의 단일 시점을 찾아 볼 수 없는 모쟈이크적인 작품의 경우가 많다. 또한 작품자체도 만든자의 의도로 완결하는 것도 아니다. 수용자가 작품에 간여함으로써 처음으로 작품으로써 완성됨으로 만든자와 수용자의 구별이 애매해 지는 것이 아닌가. 탤래비전등에 대한 맥루헌의 견해가, 그의 사후에 등장한 가지 각색의 미디어의 고찰에 응용되고 있다. 따라서 전자미디어를 사용하는 현대미술의 고찰에 그의 사상이 자주 인용되고 있는 것도 자연스려운 현상이다. 더욱이 전자미디어를 쓰지 않는 현대미술에서도 작자와 수용자(감상자)와의 관계의 변화를 하나의 계기로, 작품과 대면함에 있어 우리들이 어떤 感覺受容을 요구받고 있는가를 탐구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약력: 1911년 캐나다 알바타주 에드문턴 태생. 34년 마니토바 대학 修士號 취득. 36년 영국 캠브릿지 대학 학사호 취득. 36-44년 미합중국 위시콘신 대학, 세인트 루이스 대학등에서 교편을 잡다. 37년 카드릭로 개종. 43년 캠브릿지 대학 박사호 취득. 46년-79년 카나다 토론트대학에서 교편을 잡다. 52년 토론트대학 교수취임. 63년 토른트대학, 문화와 태크노로지의 신센트 소장에 지명되다. 80년 몰. 주저: [기계의 新婦 – 산업사회의 호-크로어] 1968년 일본. The Mechanical Bride: Folklore of Industrial Man, Vangard Press, New York, 1951 [긋덴베르그의 은하계 – 활자인간의 형성] 1986 일본. The Gudenberg Galaxy. The Making of Typographic Man, University of Toront Press, Toronto, 1962 [미디어론 – 인간확장의 제상] 1987 일본. 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 of Man, Mentor, New York 1964. [미디어는 멧시지다] Q. 후이오래와의 공저 1968 일본. The Meidum in the Message: An Inventory of Effects, Bantam, New York, 1967 [지구촌의 전쟁과 평화] Q. 후이오래와의 공저. 1972 일본. War and Peace in the Global Village, New York: Bantam 1968 E. Mcluhan 1968
1416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3241 2017-08-08
40번쩨 데오돌. 아드르노(Theodor W. Adorno) “자본주의하의 文化批判의 實直한 先驅者” 도도하게 돌아가는 멜스트림의 소용돌이 속으로 삼켜저 버린 고기잡이의 체험이라던가, 부하의 귀를 막고 스스로 帆柱에 묶으면서 세이렌들의 위험한 유혹을 뿌리 첬던 오뎃세의 위계라 할지라도, 아드르노가 시민주체의 경험을 묘사하기 위해 들고 나온 언설들은, 어느것이던, 지금에 와서 보면, 수상스렵고, 아드르노 자신의 受容狀況을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우선 외면적인 수준에서 반드시 문제시되는 택스트의 난해함과 논리의 역설적인 구성, 그 안에서 내용으로 간신히 뽑아 내는 동일성지배로 부터의 유-토피아적救濟의 도식, [아우스빗치이후]의 모든 지식인과 예술가에 대한 도의적負債의 요청, 쟈-즈를 위시한 대중문화에의 경직된 태도, 하이데카-나 아렌토나 쇼-렘등에 대한 언급관계에 있어, 논리와 원한의 혼유, 이러한 것들로 이루어진 언설의 磁場은, 이론적관심보담 휠씬 애모-선널한 환기력으로 우리들을 그 권역속으로 잡아 넣고, 배들에 대한 그 조류의 압도적인 위력을 가지고 그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삼켜저 버리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하고, 혹은 그 매혹적인 노래로 우리들을 끌어 넣고 죽여버릴려고 하는 것 같다. 도데체 20세기의 미술비평을 대표하는 사상가의 한사람으로써 아드르노의 이름을 드는 자체를 의문시하는 경향도 있다. 분명하게도 그의 비평의 본령은 음악이나 문학의 영역에서 발휘된 것으로, 미술비평 그 자체에 대해서 그가 직접 자극을 입힌 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 허나, 문화를 둘려 싼 20세기의 언설 전체에 대해 그의 사상이 던진 영향에는, 지대한 것이 있다. 그의 영향력의 거듭되는 가능성을 규명하려면, 그러나, [미메시스]나 [비동일성]이라고 하는 아드르노 독해의 쟈곤에 대해서나, 우수에 찬 비관적지식인이라고 하는 이미지에 대해서도, 일단 우리들의 귀를 막고 더욱 漏斗狀의 냄비의 안쪽으로 밀려 나가면서도 기묘한 호기심에서 중대한 관찰을 고기잡이와 같은, 사태에 눈뜬 관찰의 눈을 돌리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아드르노의 언설에서 사람을 냉정하게 두지 못하게 하는 최대의 요인은, <進步> 와 <反動>의 대비에 입각한 독특한 도의적 고발이다. 억압과 현상긍정의 계기와 비판적해방과의 긴장관계를 탐색하면서 곤난한 해결을 희구하는 그 가락을 갖고 그는 오늘날에 와서 누구도 그 매듭을 묘색하는 일이 없는 대대적인 대비관계를 탐구하였던 것이다. 도대체 그의 뒤로 누가 슌베르크와 루이.암스트롱에 대해서 동일한 이론적 측도를 적용하여 어느쪽이 반동적인가를 논하려고 했겠는가. 그 이후의 누가 문화의 總體를, 戰時下의 대량학살의 야만과의 [공범관계]에서, 즉, 어떤 필연적인 결합을 통해 폭로하려고 했겠는가. 前者의 시도에서는 아드르노를 하이.컬츄의 진정에 고집하는 편협한 에-리트주의로 야유하게 하는 전형으로써, 후자는 그를 독일 관념론 최후의 양심의 大思想家로써 영웅화했다. 그 어느쪽이던, 이는, 시민사회의 理想像에서의 편차에 의해 문화의 현상을 단죄하는, 좋든 나쁘든, 고풍스려운 그의 사고의 스타일에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우리들의 관찰점은, 지금이사 역사에 의해 큰소용돌이의 외연을 응시하는 위치로 떠 내려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실은, 아드로노의 스타일을 새삼 고풍스렵게 보이게 한 것은, 그 이후, 하이 컬츄와 사브 칼츄가, 또한 문화일반과 야만이, 몰가치적으로 애매하게 공존해 왔던 상황이 아니였겠는가. 이러한 상황을 단지 아메리컨.웨이.오브.라이프의 세계제패로 논한다면 사태를 달리 보이게 되지 않을 까. 아드로느는, 미국이 초대국으로 발흥해 갈 시기에 그 문화적변영의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던 허리욷에, 유대인撲滅의 국가구상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독일의 암울한 기억과 더불어 옯겨 산다. 복제와 소비와 오락에서 세계의 최첨단을 걷고 있는 로스앤젤스에, 구래의 예술전통이 섬세함과 농후함의 극으로 성숙해 갔던 직후의 뷘의 기억과 더불어 옮긴다. 20세기전반에서 아마도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2극간의 이동을 어찌할 수 없이 실행했던 그가, 새로운 문화의 형태에 거부반응을 나타내며 奇態에 가깝울 정도로 공격적인 대중문화비판을 행했던 것은 무리한 것은 아니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암담한 기분에서 그 등장의 모습을 바라 본 새로운 세계사시스탬이, 인류전체를 번영과 행복의 환상속으로 영구히 가려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닐뿐만 아니라 또 그렇게 되서도 안된다는 것이 지금에 와서 보면 분명해 지고 있다. 그러한 속에서 萌芽期의 고도소비사회로 돌려진 아드르노의 문화비판은, 자본주의시스템에 대한 실직한 저항의 선례로 재 음미해 볼 가치를 새롭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드느로의 비평의 가능성을 보다 직접적. 구체적으로 파내려면 우리들의 시야를 한정시키고 1930년대의 벤야민과의 생산적인 공동작업의 시기에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시간적계기를 강진한 변증법점논리로 처리하는 아드르노의 사고와, 공간적대비의 선명성에서 예상치 못한 몽타-쥬를 가능케하는 벤야민의 사고와의 풍성하고 많은 영향관계(혹은 긴장)는, 두사람의 왕복서한을 당시의 논문의 교정과정과 더불어 상세히 살펴 봄으로써 선명하게 떠 올라 온다. 그리고 아드르노가 러구로나 뷔리아.드.리라단에 대해 가르치고, 벤야민이 포크너나 멜뷜에 대해 가르친다는 書簡속의 세세한 일화는, 두사람이 행복한 공동작업을 이어 갔으면, 이루었을 작업의 크기에 대해서, 우리들의 역사적 상상력을 크게 자극한다. 허나, 미국에 망명한 후의 아드로느는 30년대에 보여주었던 유연성을 그 비판에서 뻬았겨, 숨막힐 정도의 사색속에 파묻혀 버린다. 그의 고독한 집필에서는, 20세기비평전반에 대한 그의 또다른 하나의 공헌으로써, 비평언어로써의 엣쎄이란 스타일이 탄생시켰다. 허나,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변증법적비평의 살아 있는 적용은, 오히려, 그의 사후, 프레드릭.제임슨과 같은 비평가에 의해 이어저갔다고 봐야 한다. 단지 아드로느를 실망시키고, 이내 고독한 사색활동으로 침잔시킨 미국문화의 토양에서, 그 제임슨의 예민한 비평이 나타난점을, 우리들은 역사의 아이로니로 볼것인지, 혹은 변증법적전개라 부를 것인지. 약력: 1903년 프랑크프르트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남. 20대는 뷘의 알반. 베르그 밑에서 작곡을 배우면서,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독일에 귀국한 후, 홀크.하이머가 이끄는 사회학연구소와 관계하는 한편, 친구인 발트.벤야민을 도와준다. 33년 나치스의 정권장악과 더불어 영국에 망명, 38년에 도미. 미국에서는 홀크 하이머와 더불어 [개몽의 변증법]등을 집필함. 50년이후, 다시 프랑크프르트대학에서, 철학이나 사회학을 가르키면서, [부정변증법] [미학이론]을 시작으로 일련의 저작생활에 전념함. 69년 몰. 주저: [부정변증법] 1996 일본. [개몽의 변증법(홀크 하이머와 공저)] 1990 일본. [알반 베르그] 1983 일본. [말라]1999 일본. [기엘고골] 1998 일본. [불협화음] 1998 일본. [브리즈맨] 1996 일본. [인식론의 메탈그리크] 1995 일본. [본래성이란 은어] 1991 일본. [미니마 몰라리야] 1979 일본. [벤야민/아드르노 왕복서간] 1996 일본.
1415 no image [20세기의 미술과 사상] 씨리즈
7595 2017-07-29
39번쩨 발트.벤야민(Walter Benjamin) “카메라 라고 하는 미디어가 탄생시킨 知覺의 美學” 벤야민은, [複製技術時代의 藝術]에서 [아우라]의 상실을 논한 비평가로써 알려저 있다. 그는 예술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예술은 최초의 魔術的儀式에 사용되였지만, 르네쌍스 이후에는 세속화되어, [미의 예배]로써 전통속에 파묻혀가게된다. 이 의식을 지탕하고 있었던, 작품=唯一無比의 것이,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라고 하는것으로, 이를 경험하는 사이에 어떻게 말하기 어려운 아우라라고 하는 [시간과 공간이 짜 내는 직물]이 되 버린다. 허나, 19세기의 복제기술의 발명으로, 예술은 심각한 동요속으로 휘말려 들어 갔다. 예술은, 한편, 아우라의 상실을 당하고, 또 한편, 예술지상주의란 [되밖이는 신학]으로 피난하게 된다. 이러한 쇠퇴의 운명에 놓였던 전통예술과 영화나 사진등의 새로운 예술과의 대립관계가, 일회성/반복가능성/주술사/의사, 먼것/ 가까운것, 침잠/ 산만, 시각적/촉각적인 것 등 일련의 對槪念을 통해 논해 지게 된다. 벤야민은 더욱, 전통적예술이 갖고 있던 기존의 諸槪念(창조성,천재성,영원성,신비성)들이 파시즘에 의해 이용되는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우라를 무산시키며, 자율적예술을 대중사회속으로 지양시켜, [예술의 정치화]를 위한 단초로 다다의 작품, 사진이나 영화등의 기술적가능성을 구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정리를 해보면, 벤야민이란, 현재에 와서는 자명한 환경, 말하자면, 오리지널과 카피의 차이의 소실이란 사태를 선구적으로 발언한 비평가, 혹은 아우라의 분쇄를 시도한 아반가르드 예술의 분석을 행했던 예술이론가인 것이다. 허나, 벤야민이 소위 시각예술에 대해 언급한 문장은 예상과는 달리 많지 안타. 예를 들면, 표현주의, 노이에.쟜하리가이트, 다다에의 언급등, 그러한 예는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이다. 그 이유는 몇가지 있다. 첫쩨, 그는 예술을 잡아 내는 틀을 종래와는 다른 방법으로 구축하려고 했었다. 예술작품은 자명의 출발점이 아닌, 예술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언설이 반복하는 일도 없다. 예술이란 개념, 예술의 제작과 수용, 예술과 사회와의 관계, 19세기이후 예술이 지니고 있던 성립조건의 요동을 시야에 넣으면서, 예술을 새로 성형해 가는 것, 이것이 그가 비평을 지향했던 목표였었다. 그리고, 그러한 作爲의 목표가 되었던 것이 새로운 예술이라기 보담 새로운 ‘知覺形式의 組織化’였던 것도 중요한 점이다. 이러한 자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기의 [독일의 悲哀劇의 근원]을 참고할 수도 있다. 이 논문에서 그는 리-굴등 뷘의 미술사가들로부터 착상을 얻어 쇠퇴기에 들어 섰다고 종래에 봐 왔던 예술안에 [예술意思]의 표출을 본다. 이 衰退의 시대에는 고립되어 완결되는 작품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미완성이며 亞流로 밖에 볼 수 없는 복수의 작품군에 의해 [형식]만이 잡히게 된다. 벤야민의 초기와 후기의 차이 – 관념론적경향과 마르크스주의적 경향의 차이 – 는 있지만, 이러한 지향성은 [복제기술시대의 예술]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쇠퇴라고 간주되는 시대속에서 발현된 단편적인 예술로부터 줏어 오는 새루운 형식의 가능성의 묘출이 중요한 목표가 되는 것이다. 이 [형식]개념은 다음의 [기술]과 [지각]이라는 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벤야민에 의하면, 현재, 예술을 이해하려면 작품을 고립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것을 조성해 낸 생산관계의 [안]에서 작품을 놓고, 생산관계를 관류하는 기술이나 장치부터 분석하는 視点을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생산장치나 기술이 제작자나 수용자라는 주체에 미치는 작용, 이것들이 복제예술론에서는 초점이 된다. 이와 같이, 벤야민의 예술에의 자세의 기초가 되 있는 것이 獨自의 [지각론]이며, 예술의사와 변행하여, 그가 리굴로부터 얻었던 것은 다른 시대에서는 다른 지각이 조직되고, 그럼으로, 그 예술형식도 달라진다는 인식이 였다. 벤야민은 기술미디어에 의해 편성되는 지각의 형식적 특징, 그리고, 그 사회적조건에 이르기 까지 분석을 진행시킨다. 그기서 제시되는 것이, [지각적] – [촉각적]이라고 하는 지각의 대개념이다. 단, 이들 개념은 예술학에서의 동개념의 용법과는 다른 의미를 노리고 있다. 그가 말하기를, 명상이나 집중을 특징으로 하는 [시각적] 수용은, 현재의 역사적변동기에서 발생해 나오는 지각문제를 해결할수 없다. 오히려, 사진이나 영화등의 새로운 기술속에 침투되어 있는 [촉각적]수용, 건축에서 보여지는 바 같은 [익숙되는] 지각이야말로, 이러한 과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또한 촉각적지각은, 이를 영화와 같이, 연상의 흐름을 귾임없이 중단시키는 쇽크작용으로 본다면, 의식적지각인것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벤야민은, 이를 [시각적 무의식]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 [정신분석에 의해 무의식의 충동을 알게 되듯, 우리들은, 카메라에 의해 처음으로 무의식의 지각을 체험한다]. 촉각적이란 말은, [외상적]이라고도 바뀌 표현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의식에게는 사소한 세부로써 받아 들이지지만, 동시에, 무의식속으로 휘말려 들어 가서, 사후적으로 발견되는 지각인 것이다. 건축, 사진, 영화는, 세부의 사후적 발견, 그기에서 읽으 낼수 있는 지각과정의 복수성이나 시차성을 이야기하기위한 미디어로 간주된다. 그 자신 이러한 미디어를 개입한 지각을 자신의 역사인식의 미디어로 간주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예가, 19세기의 파리를 [근대의 역사]로 묘출하려고 했던 [파사-쥬론], 최만년에 까지 이어저 갔던 [역사의 개념에 대해서]이다. 회화나 사진으로부터 만국박람회, 양초인형관, 파노라마에 이르기 까지 풍부하게 시각자료를 인용한 [파사-쥬론]은, 19세기이후 상품사회의 판타스마코리*-注. 속에서 어떻게 사람들의 지각의 층에 그려 넣어저 왔던 가를, 사후적으로 발견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또한, 크레-가 그렸던 천사를 지속적으로 논의해 온 유대신비주의적인 역사의 신비주의적인 [역사의 개념]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역사의 발전축으로부터는 억압되 있는 과거의 파편=세부를 [지금이라고 하는 순간]에 구출한다는, 사후적인 회고에 의한 발견, 이 인식은, 시차를 두고 노광되는 사진근조판이나 스넾숏트라고 하는 광학적인 기록장치를 통해 논의되고 있다. 벤야민의 미학이란, [미학]의 어원 그대로, 지각을 다루는 학문, 미디어를 개입시킨 지각의 이론이라 고 단정할 수 있다. 약력: 1892년 벨르린에서 탄생. 유대인 미술상의 가정에서 자람. 베르린, 흐라이브르그, 벨른, 프랑크훌트에서 철학을 공부하였어나, 교수자격논문이 거부되어 아카데믹한 세계로 나가는 길이 투절됨. 1933년, 히틀러정권 수립과 더불어 파리로 망명하여 프랑크프르트 사회연구소의 공동영구원이 됨. 40년 독일의 파리 침공을 계기로 파리를 탈출하여 미국망명을 노렸어나 그 도중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사이의 마을, 폴.보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음. 주저: [독일 비애극의 근원] 일본번역-2001. [圖說 寫眞小史] 1998. [벤야민 코렉선, 1.2.3] 1995. [폭력비판론 타 10편 벤야민의 작업 1] 1994. [보-드렐 타5편 벤야민의 작업 2 ] 1994. [파사-쥬론 I, II, III, IV, V] 1993-95년. *-주: 판타스 마코-리(Phantasmagorie). - 벤야민이 자신의 상품분석의 열쇠로 삼았던 개념. 이 개념은, 칼.마르크스의 [자본론] 제1부의 제1편 제1장 제4절의 [상품의 物神的性格과 그 秘密]이라고 말한 부분에서, 잠간, 인간에 대한 물의 관계의 幻影的形態(die phantasmagorische Form)라고 표현된 것으로 나온 어휘이다. 이 절은, 물신성 혹은 물상화를 둘려 싼 신좌익적인 논의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습니다. 판타스마코리의 본래의 의미는 [幻燈裝置]입니다. 간단하게 말해 본다면, [影繪]입니다만, 등신대의 영회가 아니고, 스크린-상에, 귀신과 같이 크게 투영되는 장치입니다. 자본론의 경우, 스크린이라 하는 것은, 아마도, 인간의 원망, 사회적으로 구성된 원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순수하게 상품이 소비자에 의해 유용하며 필요함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속에서 그 상품에 대해 사람들 사이에서 여러가지 이미지-가 탄생해 나오고, 유포되며 서로 혼합되어 혹은 투쟁하는 것을 통해 그 상품에 대한 평가가 형성된다. 타인이 평가하는 것은 나도 가지고 싶고, 타인이 평가하지 않는 것은 나도 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商品은, 본래의 사용가치를 크게 초월한 – 혹은 크게 밑도는 – 교환가치를 시장에서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실체를 벗어나서 間주관적으로 형성되는 가치의 환영이 [판타스 마코리]입니다. 마르크스자신은 판타스마코리-에 대해서 많은 언급을 하지 안하고 있습니다만, 벤야민은 마음끝 확대해석하는 모양새를 띠우면서 [물]로써의 [상품]속에 들어 있는 사람들의 욕망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더욱, 자본주의발전의 메커니즘전체를 분석하는 수법을 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벤야민의 이 분석수법은, 2007년에 죽은 쟌.보드리얄(1929-2007)에게 강한 영향을 입혔습니다. 보도리얄은, 60년대말에서 70년대초에 걸처서 자본주의를 消費와 記號라는 측면에서 분석하는 사회학자로써 주목을 뫃았고, 80년대초 일본에서도 어느정도 유행했던 사람입니다. 보도리얄은 벤야민으로부터 직접 인용을 하면서 자기의 기호론적인 상품분석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今村仁司씨는, 보도리얄의 번역자, 연구가 이기도 합니다.
1414 no image [20세기의 미술과 사상] 씨리즈
19442 2017-07-22
38번쩨 할.호스트(Hal Foster) “抵抗의 포스트 모더니즘” [68년을 증오하며, 그 否認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상징계나 상상계에 속한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68년은 결코 상징계나 상상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순수한 현실계가 침입해 온 것이 68년이니까 요](돌즈의 [기호와 사건]). 카운터. 칼츄가 넘실거리는 레이드.시크스티-즈에는, 일례로, 우드 스토크에서 짐.헨드로크스가 인간의 청각을 폭격하는 현실계의 노이즈를 侵食시키려고 했다. [상상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상징으로써의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전자기-타로 구기는 것과 같은 짓이다. 그런데, 쟈-후-가 71년의 [Won’t Get Fooled Again]에서 불렸던 것과 같이, 70년대에 들어 가면, 카운트 칼츄에 의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에는 더이상 속지 않겠다는 의지가 스며 있다. 후-코가 [性의 역사]의 제1권에서, 섹슐알티는 [억압에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권력의 도구가 될 수 있는 可態性이 크다는 것을 논했던 것이 78년, 그와 같은 해에는 쟈.이-글즈가 [호텔.칼리포로니아]에서, 사라저 가는 현실계의 아쉬움을, [We haven ‘t had that spirit here since nineteen sixty nine’. And still those voices are calling from far away’ 라고 노래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70년대 후반에 비판가로써의 자신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할.포스트가 [현실계의 회귀] (The Return of the Real), 레이트 식스티-즈에 발표한 카운터.칼츄어의 소리는, 그 스프릿이 [상실된 때]안에서 다시 그것을 찾아 내고저 했던 것인지는 알수 없다. 아니, 미술비평가 호스트- 에게 현실계의 침입이란 레이트.식스티-즈의 카운터 칼츄 보담 오히려, 20세기 초두의 아반가르드라고 하는 카운터.칼츄에 있는 것 같다. 허나 그것의 어느쪽이던 먼데서 들려 오는 카운터.칼츄의 소리를, 이 현재에서 노스탈지어로서가 아니고 다가 오는 것으로 듣고저 했을 때 ---- [꿈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69 노스탈지어로서는 체울 수 없는 러브]Love Psychedelico<노스탈직69’>2001) --- , 포스트의 저작에 끌리는 것이 있는 것은 어쩐일인가. 그것은 아마도 미술비평가 속에서도 호스트-가 가장 명확하게, 끝임없이 저항의 의지를 나타내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그가 생각하는 현대미술史란, 스타일이 순차적으로 바뀌는 平板한 역사가 아니고, (과거로 후퇴해 갔던 사건(아반가르드)이 미래에서 회귀해 오는 것 같은 현재를 조직하는)라고 하는 비틀어진 시간의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한 시간에서는 [반동적인 힘이 아무리 멀리 나아가드라도, 또는 힘의 반동화가 아무리 깊은 것이라 하드래도, 반동적인 힘은 회귀하는 것이 아닐까. 볼품없이 적은 반동적인 인간은, 회귀하지 못할 것이다](돌즈의 (니-체와 철학)이 라고 하는 희망을 지우지 않고 지날수 있다. 호스트가 [反美學]의 [序文]에서, [저항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반동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립시켰던 것은 비교적 잘 알려저 있다. [오늘날의 문화의 정치정세에서는, 모더니즘을 탈구축하고, 현상에 저항할려고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와, 모더니즘을 거절하고 현상을 찬양하는 포스트모더니즘와의 근본적인 대립이 존재하고 있다]라고 하는 底意다.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에 유-토피아를 보는 모더니즘에는 복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항의 희망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세계에서도 저항의 희망을 단념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은 끝이 없는 [저항의 실천]은, [視覺論]의 [서문]에서도 이어저 있다. 그기서 호스트는 [어떻게 사물이 보이는가, 어떻게 볼수 있는 것이 가능한가, 허용되며 강제되는가]를 물어 가는 프로그램,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視의 제도]에 저항하는 프로그램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허면, 어떤 저항의 원리를 호스트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저항의 실천]은 性差나 민족이나 도시나 미술관이나 미디어나 테크노로지-등의 복수의 場에서 진행하고 있는바, 아마도, 90년대의 호스트가 [치명적인 매력]을 느끼고 있는 저항의 원리는, 슈-리얼리즘이 침입시킨 현실계의 섬듯한 反復强迫일것이다. 이미 [반미학]에서도, 슈-리얼리즘이라고 하는 카운터 칼츄가 포스트 모더니즘의 예술속으로 회귀한다고 씃던 호스트는 [강박적인 미 (Compulsive Beauty)]에서 슈-리얼리즘의 저항의 원리를 읽고 있었다. 섹슈얼리티에 의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노래 부르는 공식적인 슈-리얼리즘이 아닌, 섬듯한 반복강박에 의해 침입된 [안쪽의] 슈-리얼리즘. 도라우마성의 숏크를 계기로, 현실계의 반복강박을 침입시켜 버리는 망각된 슈-리얼리즘이다. 호스트에 의하면, 이 [안쪽의] 슈리얼리즘의 망각된 [기원]은, 의학생이었던 젊은 프루스트가 제1차세계대전중에 신경정신과 병원에서 [스처 지나간] 시엘숏크환자들 – 참호전의 포탄의 굉음과 진동에 의해 도취감을 맛보는 한편, 숏크를 지속적으로 받은 결과 손발이나 안면의 경련이 그치지 않는 [자동인형]이나, 악몽을 되푸리하여 보게 되는 [기계]과 같이 되버린 병사들 – 의 반복강박에 있다. 이 망각에 반발하여 현실계의 반복강박을 침입시킨다는 저항의 원리는, 물론 누구든지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과혹에서 벗어날수 있는 것은, 섬듯한 것을 여성에 투영시키는 섹시즘에 기울어 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공식적인 슈-리얼리즘을 품은 해방의 모더니즘이나, 무엇이든지 있다風의 [반동의 포스트모더니즘]이 망각을 지속해 오던 현실계의 반복강박은, [저항의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근원적인 저항의 원리이며, 호스트-는 그기에서 미학.비평의 최대의 특이점과 저항력을 찾아 내려고 한 것이 아닐까. 그러한 때, 제1차세계대전의 戰場을 [原音響]으로 삼고, 이를 억압함과 동시 회귀시켜 왔던 롯크음악을 호스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약력: 할.호스트는 1980년대 후반, [反美學- 포스트 모던의 諸相]의 편자로써 일본에 널리 알려젔었다. 또한 저서, [기록-예술, 스펙트클, 문화의 정치]나 편저 [시각론]으로 합중국의 비평계에서 영향력을 강화한 호스트는, 코넬대학 준교수 이어 동대학의 교수(미술사.비교문학)에 취임하고, 주저 [강박적인 미]와 [현실계의 회귀]를 출판. 현재는 프린스턴대학교수(미술사)로써, 또한 잡지 [Art in America]의 수석편집자로 활약하고 있다. 주저: Hal Foster, Gordon Hughes, and B.H.D. Buchloh(eds), Richard Serra,2000, October Files, MIT Press. Hal Foster and Richard Cluckman, Space Framed: Richard Cluckman Architect,2000, Monacelli Press. Hal Foster, Paul Shimmel, and Robert Gober,1997, Charta. The Return of the Real,1996 MIT Press. Compulsive Beauty, 1993, MIT Press. Hal Foster(ed), Discussion in Contemporary Culture,1987, Bay Press. Hal foster, Recording, Spectacle, Cultural Politics, 1985, Bay Press.
1413 no image [20세기의 미술과 사상] 씨리즈
2900 2017-07-16
37번쩨 아-서-. C. 단토(Arthur C. Danto) “팝 아-트를 철학자로써 논하다” <브리로.박스>라고 하면, 단토, 단토라 하면 <브리로.박스>라고 하듯이, 아-트 월드의 이론이나 미술사의 종국의론에서 낮익은 거인, 크럼비아大學철학명예교수 단토의 출발점은, 역사철학, 철학적심리학, 행위론, 지식론에 관한 분석철학이다. 따라서 뒤에 가서 손데기 시작하는 예술철학, 미학, 혹은 1984년 이후 [더 네이션]지에 기고하고 있는 ‘미술비평’도 비평의 원리로써 철학을 固持하는 분석철학자의 자세나 역사관에 일관하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견해에서, 아마도 사변철학을 환영하지 않는 미국의 예술철학에서도, 예술종국론이나 예술의 역사 단계설, 예술의 존재론, 더욱이 [미]와 [예술]의 필연적 연관의 결여, 라고 하는 세 관점에서 독일관념론의 전통과의 변행현상이 보이는 것을, 쟝.마리-.시에후에-저 [근대의 예술: 칸트에서 하이뎃가-에 이르는 예술철학](2000)에 보낸 서문에서도 일관되게 지적하고 있는것도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허면, [미]라는 것이, 價値品質이 아니라고 한다면, 예술의 신분을 결정짓는 요인이란 무엇인가. [보-그]지에 앞서 철학誌가 워-홀을 게재하는데 한 역할을 한, 단토가 술회하는, 예술철학분야에서의 그의 최초의 논문에서는, 그것은 [아-트 월드]라고 논해 진다.([아-트월드]1964년 10월호 초출). 白紙의 중앙에 직선이 끄으진 구형의 파넬을 反미메시스적 예술작품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창고에 쌓여 있는 洗劑箱과 외견상 변함이 없는 위-홀의 [브리로.박스]의 실제의 洗劑箱과 혼돈하지 않고 예술작품이란 신분에 처하는, 지각되는 작품의 특성과는 관계없이 선행하는 예술이론이나 미술사의 지식이라는, 환경, 말하자면, [아-트월드]에 의해서만 가능한것이다. 단지, 예술이라 하는 신분을 부여하는 [제도]로서의 아-트월드에 의해 단지 이러 저러한 것이 예술이라고 하는 자의적으로 선언되는 것 만으로 불충분하고, [이유부여의 디스쿨]에 의해 예술로서의 그러한 [칭호부여]가 정당화될 필요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은, 뒷날의 [세계와의 커넥선](1985)에 의한 견해다. 더욱이 1997년의 [예술의 종국 이후]에서 이 [정당화의 디스쿨]을 더욱 충실하기 위해, 예술의 신분을 부여하는 규범으로써, 단토는 [對한 性(aboutness)]과 그 내용의 [구현화]를 들고 있다. 즉, 예술이기 위해서는 내재적으로 [해석]과 연결되 있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하는 네오.리프리젠테이선 이론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헌데, 예술의 정의의 틀을 고찰해 보려고 하는 [凡庸한것의 變容](1981)에서 이미 단토의 관심은 미술사의 철학적문제에 있었다. 말하자면, [어찌하여 예술의 역사는 가능한가?] 라고 하는 물음이다. [[미술사가로써] 재현예술의 역사를, 메이킹.앤드.맷칭]] 이라고 한 곰브리지나, 또한 [비평가로써] 모더니즘의 역사를 자기비판의 첨예화로 만든 그린버-그도 손데지 안했던 모더니즘 이후의 예술, 더욱이, 팝.아-트에 관해서, 단토는 [철학자로써] 논하기 시작한다. (브리로 박스)에 촉발된 예술의 제도이론에 의한 예술의 자리매김이 있은 이후 또 다른 시점에서 브리로.박스의 철학적 의의를, 단토는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예술의 역사의 종국], 즉, 1964년의 스티블.갤러리에 있었던 브리로.박스에 의해 예술은 그 역사의 종국에 도달했다 라고 하는 통찰이다. 허나, 단토가 [예술의 역사의 종국]에 의해 의미하려는 것은, 동시대의 미술상황을 반영하면서 변화고 있다. 당초, [예술의 역사의 종국]이란 [예술]을 [예술]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하는 예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물음에 대해, 브리로.박스에 의해 해답을 얻는 것으로, 모더니즘의 자기비판의 탐구의 최종해답이 주어지고, 모더니즘의 진보적 역사의 [이야기]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이었다. 예술자신이 스스로 자신에 관해 철학적으로 물을 때까지 철학이 이를 묻지 안했는데, 한번 물음이 발하기 시작하자, 예술은 힘이 딸려 사후를 철학이 이어받는다, 라고 하는 구도를 그는 그려 보고 있었다. 말하자면, 예술활동은 [예술을 다시 만들어 내기 위해서 가 아니고, 철하적으로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한] [철학의 기회]라고 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종국]이후의, 과거의 차용이나 도용이 橫行하고, 많은 流儀가 공존하는, 무엇이든 있다, 라는 70녀대, 80년대의 상황을 가르키면서, 단토는 예술을 [미술사의 시대 이후] 그것이라고 말한다. [이야기=역사의 후]의 시대, 어떤 것도 역사적으로 예술이 있는 것에 관해 지도를 받지 않고, 어떠한 것도 그것에서부터 배제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에술로 허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만이 무엇이든지 된다는 [예술]을 견디낼 수 있는 眞정한 예술의 철학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예술개념에 대해서 오랫동안 논하고, 근년에 와서는, 네오.리프리젠테-셔나리스트의 입장을 취하는 단토는, [신체/신체문제(1995)]에, 전통적 철학의 주류과제인 [주체]에 관해서, 심적표상과 물질적으로 실현된 표상으로써의 예술작품이란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는바, 소재의 제논고는, 우리들의 이해안에서는 예술의 철학과 역사의 철학은 불가결이며, 철학과 예술은 깊이 연결되 있다, 라는 그의 신념에 의해 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대서양의 대안의 盟友, 한스.벨딩과 더불어 예술의 종국을 노래 불렸던 단토는, 그러나, [철학하는 예술/예술을 철학한다(1995)]에서는, 예술이 철학으로 전향할 때 예술의 역사는 종국한다는 견해를 더 이상 견지하지 않는다, 라고 밝힌다. 예술에 관해 적확한 물음을 발하는 입장에 서서 비로서 예술은 종국되는 것이며, 어떠한 작품을 앞에 두고서도 [우왓]이라고 탄성을 발하지 않아도, 예술의 모체에 의하여 예술의 철학을 수행했던 워-홀이라고 하는 희대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현대의 예술은 그렇게, 철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약력: 1924년 미쉬건주 안아-버에서 탄생. 66-67년 컬럼비아 대학교수(철학)로 니-체등을 연구.현대미술의 철학적 접근은 방대한 저작과 논문에서 보는 그대로. 만하-턴에서 아-티스트인 처 바바라. 웨스트먼과 살고 있다. 주저: [언어와 철학의 세계] 일본, 1980년. [이야기로써의 역사: 역사의 분석철학] 1989. The Madonna o the Future: Essays in a Phulalistic Art World, Farrar And Giroux, 2000 Philosophizing Art: Selected Essays,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9 The Body/Body Problem: Selected Essays,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9 Encounters and Reflections: Art in the Historical Presen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1997 Beyond the Brillo Box: the Visual Arts in Post-Historical Perspective,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1993 Connections to the World: the Basic Concept of Philosophy, Haper and Row, 1989 The Philosophical Disenfranchisement of Art, the Columbia University Press,1986 The Transfiguration of the Common Place: A Philosophy of Art, th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1
1412 no image [20세기의 미술과 사상] 씨리즈
2881 2017-07-10
36번쩨 한스. 벨딩(Hans Belting) “미술사의 파라다임 쉽트” 19세기 후반의 유-럽을 지배했던 키-워드의 하나를 든다면, [發展]인 것일까. 다짐하거니와, 년대를 몇 개 복습해 두자. 1848년의 [공산당선언] 발표에 이어, [자본론] 제일권 간행이 1867년, 한편 [종의 기원]이 1859년이다. 미술사에서 말해 본다면, 뷀프린의 처녀작 [르넷상스와 바로크] 가 1888년으로 [고전미술]이 1899년. 역사는 일어난 일들의 무작위한 나열이 아니고, 그기에는 질서와 의미가 있다, 라고 하는 사상이 매력적이 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20세기 후반의 知的營爲의 적지 않는 부분은, 이 [발전]이라고 하는 사고법의 속박에서 벗어 나려고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보면, 그레골리.베이드손 ([정신과 자연])이나 다니엘. C. 데넷([다윈의 위험한 사상])등의 이름을 들어 보면 알것이다. 미술사의 틀안의 [발전]을 비판하는 벨뒹의, 배경을 확인해 두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30대에서 40대에 걸처 벨뒹은 비쟌틴미술이나 서구중세미술에 관한 모노그라프를 연이어 세상에 물었다. 여하튼, [고고학적]이라고도 평할 수 있는, 정치한 수순을 밟은 저작이었다. 비쟌틴과 서구의 중세미술과 변행하여 연구했던 것은, 그에게 무엇을 안겨 주었을까. 비쟌틴의 양식은 6세기 전후에 확립되어 그 이후 15세기의 제국멸망까지, 그렇게 크게 변화하는 일은 없었다. 특히 8,9세기의 이코노크라슴(聖像破壞運動)기의 의론을 거처, 비쟌틴화가들은 입체적인 인체파악, 깊이 있는 공간묘사를 단념하고, 2차원성안에서 聖性의 顯現을 지향했다. 로마네스크, 고씩, 르네상스로 이어지면서 바로크에 이르는 서구미술과 같은 [발전]을, 비쟌틴미술이 갖지 못했던 서구(서양이 아니다!)미술의 연구자, 내지 애호자의 눈에는 천년 바뀌지 않는 양식을 지닌 비쟌틴미술은, 이상하게 보이는 것 같다. 뷀프린류의 양식사에 이의를 제기하고 사회사적미술사나 수용미학의 방법론을 모방하는 연구자는 적지 않으나, 비쟌틴연구에서 출발한 뷀딩은 서구의 양식[발전]이라고 하는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웠다. 서구를 상대화할 수 있는 視点을 스스로 갖게 되었다고나 할까. 생물과 같이, 미술도 [成長, 成熟, 衰退]의 순환과정을 갖는다. 양식은 유기적, 자립적으로 발전한다. 한때 자명한것으로 여겼던 이 모델은 어쩌면 본질적으로 서구적인 것이다라고 할수 있다. 벨딩은 이러한 파라다임의 기원을, 바자리와 달리 비판한다. 그렇다면, 라고 당연히 이어갈것이다. 미술사가 단순한 작품의 나열이 되지 않기 위해서 어떤 시점이 필요한가, 라고. [직선적인 발전사가 아니고, 무엇이 이미지를 만드는가, 무엇이 그 이미지를 특정한 시점에서 납득이 갈 수 있도록 [진리]의 像이 되도록 하는가. 라고 하는, 줄곧 새로운 문제의 항상 새로운 해법의 역사]가 그의 모범 답이다. 벨딩의 방법을 [사회사적미술사]라고 요약해 버리는 것은 너무 안일한 짓이다. 이론주장형이 아니고, 오백페이지, 육백페이지를 넘는 大著를 多産하는 그의 입장의 하나를 지적한다면, 그건 [상]이란 점이다. 우선 [중세에 있어서의 상과 그 관자](1981)에서는, 그리스도수난과 관계되는 특수한 도상을 만들어 내어서 그 典例상의 기능, 사회사적 역할을 논한다. 하나의 도상을 축으로, 비쟌틴과 서구, 중세말기와 르네상스가 연속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바자리, 뷘겔만, 뷜프린으로 이어지는 양식사관에서 강조해 오던 단절이, 여기서는 가법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극복된다. 이어지는 [상과 예배](1990)는 그 응용편으로, [<미술의 시대>이전의 상의 역사]라고 하는 부제하에, 17세기까지를 시야에 넣은 비쟌틴과 서구의 미술을 논한 것이다. 20세기의 2,30년대에, 祈念像이란 장르를 파노프스키등이 규정해 보여 쥤다. 피에타상을 중심으로 [기념]이란 기능을 읽으 냈던 것이나, 이 제법 과다 이념적인 개념을 역사성속에서 전개하려고 한 것이, S. 링그봄의 [이콘에서 나라티브로](1965)였다. 그러나 링그봄은 비쟌틴의 作例를 시야에 넣치 안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서구적인 [발전]의 선을 강조하는 것이 되 버렸다. 벨딩의 二著는, [이콘적인 것]과 [나라티브적인 것]의 상극을, 살아 있는 사회속에서, 발전사적 틀에 떨어지지 않고 잡아 낸 것이다. [이콘]과 [나라티브]의 對槪念은, 현대미술을 생각할때도 중요할것이다. 임달이 주장하는 [이코닉]란 개념도, 벨딩의 [상]을 거처야만 이해가 간다. 文學의 분야에서 [발전]을 바뀌 말해 본다면, [因果律]이란 것이 된다. 바람이 불어서 통집이 돈을 번다. 원인과 여기에 수반하는 결과가 있어, 이야기의 줄거리가 이루어진다. 우리들은 이러한 인과율안에서 안심하고 이야기를 향수할 수 있었다. 소설가들이 이러한 인과율을 약간 불편하게 느끼기 시작한 것도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무상의 행위]를 엎고 나와서 인과율을 반역하기 시작 했다. 짓드의 [사슬을 벗으난 프로메듀-스]가 뷀프링의 [고전미술]과 같은 해에, 라고 하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소설가가 화가보담 시대에 예민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기전환기에 보였던 쟈포니즘나 비쟌틴.리버이블의 동향은 미술에 있어서의 [서구모델]로부터 탈피하려는 예술가의 자각적 시도였다. 그러나 그런 한편에서 간딘스키나 몬드리언, 크레-등의 畵業을, 르네상스이래의 발전사속에서 자리잡아서 기술하는 것도 가능한 일일 것이다. [像과 禮拜]이후의 대저, [보이지 않는 명작: 미술이란 근대의 신화](1998)는, 19세기부터 동시대까지의 미술을 발전사관에서 자유롭게 논했었다. 벨딩류의 스리링한 [槪說]이다. 그리고 최신작이 [상의 인류학: 像 의 學과 관련된 구상]. 앞서 벨딩의 手續을 고고학으로 말했지만, 사람의 얼굴이란 [상]개념을 고금동서의 시각문화에 적용하여, 서구를 상대화 하려는 그의 방법은, 바로 인류학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뷜프린이나 파노프스키의 [解毒劑]로써 邦譯이 기대되는 바다. 약력: 1935년 독일태생. 하이델베르그 대학 교수, 뮌헨대학정교수를 거처, 칼-술-에. 뉴미디어대 학교수. 비쟌틴미술(후기에 관한 저작 중심), 초기에서부터 고씩에 이르는 서구중세미술 (이태리의 성당의 모노그라프 수점 이외), 르네상스미술(판 아이크나, 죠반니.베르니니)과 저서, 논문은 多岐에 걸처 무수하다. 20세기 미술에 관해서는 막스 베그만을 위시하여 시 그마.볼께, 도니-샤-먼, 토-마스 슈톨등의 모노그라프를 저술하고 있다. 주저: [미술사의 종국?] 일본역. 1991. [독일인과 독일미술: 난삽한 유산] 1998 Das illumnierte Buch in der spartbyzantinischen Geselshaft, Heidelberg 1970 Die Oberkirche von Sanfrancesco in Assisi. Ihre Decoration als Aufgabe und die Genese Einer neuen Wandmalerei, Berlin 1977 및 기타 다수.
1411 no image [20세기의 미술과 사상] 씨리즈
2771 2017-07-02
35번쩨 이브= 아랑. 보와(Yve-Alain Bois) “모더니즘이 抑壓해 왔던 表象시스템을 分析한다” 어쩌면 편견일지 몰라도, 이브=아랑.보와 만큼 근년에 와서 특히 일본에서 일종의 팻션으로 각광을 받은 비평가는 없지 않을까. 더욱이 일본어에 의한 역서가 지금도 충분히 출판되고 있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그렇다. 이는 어느 특정한 방법론이 팻션으로 떠 오르는 현상에 강한 경고를 해 왔던 보와에게는, 납득이 잘 가지 않는 일일런지 모른다. 허나 모더니즘을 비판적으로 넘어선 위에다 포-말리즘을 심화시키고 그 가능성을 추구하고저 희망하는 사람에게는 아마도 로쟈린드.크라우스나 마이켈.프리드와 나란히 앙성맞춤의 길잡이가 되어 주고 있는 것이 그의 여러가지 논고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보와의 이론을 왜소화시키는 위험을 무릎쓰고 말해 본다면, 그의 관심은 무엇보담 작품의 [됨됨]을 분석하는데 있다. 물론 그것은 습작에서부터 완성작으로 가는 한가닥 길을 명료하게 그려 내 보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직선적으로 진행하는 이야기에 대한 통렬한 반박이다. 일례를 든다면, 그가 마티스의 작품을 둘려 싸고 전개해 온 의론은 작품이 성립하는 과정을, 전진이나 후퇴로도 말할 수 없는 착종된 蛇行을 생생하게 부각하는 것이었다. 보와에 의하면 마티스의 두 유채화(호사, 정일, 일락)과 (생의 환희)는, 그 작품의 실현이란 점에서는 확연하게 서로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한쪽이 신인상주의에서 배운 점묘법으로 그려지고, 다른 쪽이 몇 개의 색면을 조합함으로 구성되어 있다라는 표피적인 기법적 내지 양식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작품을 성립시키고 있는 구조가 근본적인 문제인것이다. 작자의 마음속에 생긴 이미지가 몇가지의 예비적 습작을 통해 서서히 명확한 형상을 부여 받아 가면서 하나의 완성작으로 결실되 가는 이야기로 기술될 수 있는 것이 (호사, 정일, 일락)였다면, (생의 환희)는, 실제상의 작업과정 속에서 작가가 작품과 대치하며 격투함으로써, 想念과 形象이 동시에 하나의 착지점에 내려 앉은 것 같이 보이는 것이다. 후자에서는 전제로써의 마음속의 이미지가 처음부터 부정되고, 팽개처 버리려진 것이다. 마티스가 (생의 환희) 에서 이루어 냈던 것이 그렇다면, 이는 단순한 제작과정의 변화로써 이해해 버릴 수 있는 사태가 아닐 것이다. 보와는 마티스에서의 색채의 문제로 이와 같은 의론을 전개하였던바, 그기에 멈추지 않고, 이 또한 서양에서의 표상의 문제에 혁명적인 전환을 초래하였다고 말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고대 희랍 이후, 표상은 줄곧 심적 이미지와 불가분으로 연결된 것으로 이와 대응관계에서 회화를 잡아 내었던 것이다. 그러함으로써, 현실의 사물을 봄으로써, 얻으지는 지각상과 회화를 봄으로써 얻어지는 지각상이 서로 식별될 수 없을 정도로 회화가 그 사실성을 회득하는 목적론적 발전사, 진보사로써 서양미술을 볼 수 있게 한 것이 었다. 마티스는 이 매듭을 끊어 버림으로써 스스로의 작품의 표상으로써의 기반뿐만 아니라, 서양에서의 표상시스템 자체까지 크게 바뀌 놓는 결과에 이른다. 보와의 의론은, 이와 같은 작품의 곁보기와는 다른 내부에 침잔해 들어 가서 그 뒷면에서부터 이를 지탱하고 있는 시스템나 구조를 줄곧 선명하게 前景化시켜 보여 주었던 것이다. 같은 일이 미술을 둘려싸고 있는 언어로써 무비판적으로 다용해 오고 있는 [영향]이라고 하는 말이 품고 있는 문제에도 적용된다. 마티스의 [생의 환희]에는 그것이 아-고스티-노.가랏지의 판화를 전거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본들 (그건 그것데로 중요한 사실의 발굴이라고 하드래도), 작품의 표상으로써의 내실엔 얼마만컴 박진해 오겠는가. 이와 같이, 마티스의 어떤 작품에 피카소 등에서부터의 영향을 지적하고, 차용원이라고 들어 봐도 그건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들려 주는데 지나지 않는다. 허나, 어떤 작가의 작품과, 또 다른 화가의 작품간의 관계성은, 그러한 일방통행적 내지 수동적인 맺음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보와는 그러한 단순한 인과론적사고를, 미하엘.바푸친이나, 하롤드.부름, 루네.지랄와 같은 문학이론가들의 성과를 원용하여, 대화적인 교환의 의론으로 바뀌 놓고, 두 작가의 다른 작업에 의한 작품을 맺는 間택스트的인 관계를 잡아 내려고 하고 있다. 마티스와 피카소에는, 상호간의 화법이나 응답으로 제작된 작품이 다수 있다. 때로는 완벽하게 보일정도로 모방하면서도 때로는 상대의 작품을 무리하게 곡해도 하면서 혹은 야유를 하며, 한방 먹이는 꼴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능동적인 작위였다. 그리고 그 대화적관계는, 승화에로 향하는 변증법적 전진운동은 물론 아니고, 체스 게임과 같이, 순간 순간의 제빠른 대응뿐만 아니라 게임의 진전에 따르는 아주 긴 시간의 지속속에서 과거 역시 그때 그때 소환해 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기서는 어느 한수=작품에 대해 십수년의 시간이 지난 한수=작품을 부딛쳐 볼 수 있는 것이 가능해 지며, 전진이나 후퇴 어는 개념도 무의미하는 것이 된다. 죨즈.바타이유로부터 차용하고, 그가 크라우스와 더불어 짜낸 [앙포르멜( 부정형)]만 해도, 작품의 됨됨의 구조에의 새로운 인식을 수반하는 개념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모더니즘이 금과옥조로 삼아 왔던 순수한 형식(폴름)이라고 하는 개념(과 이와 항상 함께 차의 양륜으로 대비하는 주제란 개념)을, 전적으로 무화시키는 것이다. 순수한 형식으로써 완결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특정한 주제에도 회수되는 것도 아니고, 거꾸로 이것들에 공격을 가하면서 떨어저 나가는 것, 카테골리화되는 개념이 아니고, 어떤 종의 [작동 operation]이 작품에 가해지는 동적인 양상을 가르키는 것이, [앙폴름]이다. 모더니즘이 억압해 왔던 바로 표상시스템을 분석해 보이는 보와의 의론은, 표상으로써의 작품의 다이나믹한 모습을 밝혀 내기 위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 가는 것이다. 略歷: 알제리 생. 하-버드대학 교수(근대미술사). 마티스, 피카소부터 전후 미국미술, 특히 미니멀 아-트에 이르는 20세기 미술에 대해 폭 넓은 연구를 함. 94-95년에 하-그, 워싱톤, 뉴-욕를 순회한 몬드리언 회고전을 공동기획하고, 96년에는 로자린트.크라우스와 폼퓨트.센트(파리국립근대미술관)에서 개최한 [안.폴름; 유-자즈.가이드]전을 기획하다. 바넷.뉴-먼의 카타로그레조네의 제작에도 간여한다. 主著: [마티스와 피카소] 일본경제신문사 2000년. Painting as Model, The MIT Press; Cambridge, MA, and London, 1990 I’nforme; mode d’mploi, Editions du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1996 “L’aveuglement” Matise1904-1917, Edition du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1993 The Iconoslast, Pier Mondrian, National Gallery of Art,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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