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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6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2691 2017-01-26
15. 크라이브.벨(Clive Bell) 바뀌어친 포말리즘의 [敎義] 크라이브.밸은 항상 로쟈.프라이와 더불어 거론된다. 특히 포말리즘의 페혜를 이야기하는 1960년대말이후의 문헌에서는, 자주 [프리아=벨의 포말리즘비평은……] 하고 말해젔었다. 하지만, 양자간에는 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크라이브.벨은 켐브릿지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당초에는 미술이나 미술사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학생이었었다. 도욱이, 프라이가 자신도 화가로써의 경 력을 갖는데 비해 벨은 작품제작에 손을 데지 안 했다는 사실은, 이미 양자간의 차이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되고 있다. 벨이 브름즈벨리.그룹에 참여하는 계기는 급우 안에 후에 브름즈벨리의 멤버가 있 크라이브.벨(Clive Bell) 었기 때문이다. 허나, 한때는 프라이도 적을 을 두고, 타의 급우들도 적을 두었던 [使徒會]에서는 벨만 빠져 있었다. [사도회]란 겜브릿지의 특별히 선발된 비세속적인 세례를 몸에 지닌 학생들만이 모이는 조직이었다. 전형적인 [속인]이었던 벨은 입회가 허용되지 안 했던 것이다. 벨은 정치학의 자료조사로 찾았던 파리에서 모-던.아트와 만나고, 수년을 파리에서 보낸 후 귀국하여 브름즈.벨리의 중심적 화가 붸넷사에 구혼을 한다. 이 혼인이 벨에 브름즈벨리에서 중앙에 자리를 잡게 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10년에, 로쟈.프라이가 브름즈벨리.그룹에 들어 와 일약 그 주도자가 되었을 때 벨은 자신이 프라이의 최량의 이해자이며 후계자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기에 프라이는 벨 보담 15세 년상이다. 이해 프라이가 [마네와 포스트인상파전]을 개최할 때 벨은 협력을 아끼지 안 했으며, 12년의 [제2회포스트인상파전]에서는, 프라이로부터 영국부를 맡긴다. 14년에 벨은 [아-트]를 출판했는데, 이것 역시 多忙을 이유로 프라이가 출판사로부터의 의뢰를 벨에 양도했기 때문이었다. 그 내용은 말하자면, 포-말리즘을 극한까지 밀어 올린 것으로, 이하에 그 몇 개소를 인용해 본다. “[미적인 감동을 환기하는 모든 객체는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가. …..가능한 답은 오-직 하나 -- 의미 깊은 포름(significant form)이다. 가기 다른 예술작품에서는 선과 색채는 어느 고유한 방식으로 맺으저 있으며, 어떤 포름, 혹은 포름끼리의 관계성이 우리들의 미적 감동을 끌어 내는 것이다. 이 관계와 선과 색채의 조합, 즉 이들 미적인, 사람을 감동시키는 포름을 나는 [의미 깊은 포름]이라 부른다. 그리고 [의미 깊은 포름]이란 시각예술의 전 작품에 공통되는 하나의 質일 것이다] [재미있게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자극적인 그림이라도, 우리들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것을 나는 [기술적회화]라 부른다. 그기에는 포름은 감동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감동을 암시하던가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써 받아 들여진다. 그들은 나의 가설에 따르면, 예술작품이 아니다. 포름이 아니고, 그것이 전달하는 관념이나 정보가 사람을 끌어 들일뿐이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을 향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포름와 색채와 삼차원의 공간에 관한 지식 이외는 아무것도 없다]”. 벨 본인은 프라이의 의도를 대변한 것으로 생각했다. 후에 가서 포말리즘비판의 전반적인 최대의 결함으로 지적되었던 것으로 이 [의미깊은 포름]이란 추상개념 역시 프라이에 의거했었던 것이라고, 친절하게도 서장에서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이론의 단순성으로 인하여] 대단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실제, 출판 직후부터 再版이 이어지면서 같은 해 뉴-욕에서도 출판되어 미술계에서는 비구상회화가 연이어 나타나면서 또한 수년후에는 타국에서도 변역자가 넓혀진다. 프라이는 직후에 서평의 모양으로 수정을 시도하는 것으로, 이렇게 [프라이=벨]란 해석이 스스로 걷기 시작해 버린다. 한편, 벨은 이 후에도 [의미깊은 포름]에 집착해 갔다. 단지 벨에 대한 연구서를 낸 W. 바이 워터 주니어에 의하면 [아-트]이후, 벨 자신도 [의미깊은 포름]의 개념에 대폭적인 수정을 가해, 프라이를 따라 예술가와 관자와 회화간의 복잡한 상호관계를 주장하는 [휴-머니즘]쪽으로 변모해 간다. 그러나 벨의 주저는 지금도 여전히 바로 그 [아-트]라고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정치학 출신의 벨은 그 분야의 일도 손을 데면서 그기서도 프라이의 일관된 사회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대립해 간다. 벨도 1910년대에서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내 걸었던 활동가였었나 28년에 [문명]을 출판할 때 즈음에는 독재자를 문명의 [구세주]로 간주하고 대중(노동자)에게 자기 분수를 헤알리게 하고 소수의 문명인에게 안락을 제공하는 것을 이상으로 내 걸며, 30년대에에서는 반유대인사상을 공언하기 까지 이른다. 오늘날 미술에 있어 포-말리즘비평의 [엘리트 주의][배타주의]라 불리는 것은 벨의 정치상의 자세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헌데, 모-리스.도니의 [한장의 회화는 ---- 군마, 나부 혹은 어떤 종류의 일화이기 이전에 – 그 본질에 있어 어떤 일정한 질서 아래 뫃아 진 색채로 덮어 씨운 평면이다] 라고 하는 말이, 추상에로 나아가는 모더니즘의 예언이라고 하는 정설도, 실은 벨의 날조한 것이다. 벨이 처음으로 도-니의 오리지널 문장을 읽은 것은 1926년6월, [십구세기회화의 도표]의 집필중이었다. 각주에서 벨은 [그것은 현대의 동향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부끄럽지만 고백하건데 --- 나는 이 최종장을 쓰는 도중에 가까스로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이 책은 내가 이미 굳게 保持하고 있던 확신을 더욱 굳게 해 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도-니의 [금언]으로 하여 [이것이 이제 와서 포스트인상파의 것이다]라고 단정케 했던 것이다. 이렇게 도-니가 약관 19세였던 1890년에 나비파와 상징주의를 응호하기 위해 쓴 [신전통주의의 정의]의 모두 부분이 도-니의 사상전체의 소개도 없이 도-니 자신의 의도도 무시한 모양새의 단순한 포-말리즘의 [교의]로 바뀌처 버렸던 것이다. 略歷: 1881년, 영국 바쿠샤 생. 켐브릿지의 트리니티 대학에서 정치학을 배움. 수년간의 파리 滯在나, 15세 년장의 로쟈.프라이등과의 교유를 통해 미술연구의 길로 나아 감. 영국에서 포스트 인상파를 알리는 데 공헌함. 1914년에 출판된 [아-트]는 포말리즘의 이론가로써 널리 읽혔다. 64년 몰. 主著: Art, Chatoo & Windus, 1914년. Since Cezanne, 1922년. Landmarks in Nineteen-Century Painting, 1927, An Acount fof French Painting,1931. Enjoying Pictures,1934. Peace at Once, 1916. On British Freedom, 1923. Civilization, 1928.
1385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3573 2017-01-19
14. 로쟈.프라이(Roger Fry) 포말리즘 批評家로써의 神話 로쟈.프라이는 오늘날에는, [포말리스트/모더니스트]의 典型 혹은 元祖로 간주되고 있다. 실제로 반세기후 미국에 등장하는 크레멘트.그린버그類의 [포말리스트/모더니스트]도 프라이를 모범적 선구자로 간주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프라이는 완전한 포마리즘을 관철해 왔던 것은 아니고 純然한 모더니스트라고도 부르기 힘들다. 오히려 그를 [포말리스트/모더니스트]라고 하는 일종의 神話를, 그의 주변에 있었던 브름즈.베리 그뤂, 더욱이 크라이브.벨이 창작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라이가 가장 포말리즘의 경향을 띠웠던 것은 그가 주최했던 [마네와 포스트인상파전](1910)후, [제2회포스트인상파전(1912)의 전후가 된다. [포스트인상파(Post-Inpressionist)]란 프라이의 조어이며, 이때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했던 말이다. 그의 의도로써는 [안티 인상파]에 가깝다. 당시 영국에서는, 가까스로 인상파가, R.A.M.스틴븐슨이나, D.S.맛골 이라고 하는 비평가의 盡力에 의해 世間에 받아 들여젔던 시기였다. 이들 인상파응호진쪽이 오히려 철저한 포말리즘을 기반으로 하여 내용중시의 왕립아카데미로부터 주권을 빼았었던 것이다. 미술계의 중요한 포스트는 대부분이 인상파풍의 화가들에 의해 점하기 시작했다. 실은 이러한 상황아래서의 프라이는 르넷상스 미술사가. 감정가로써의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화가로써는 불우했다. 초기 르넷상스의 거장풍이라고 평해젔던 건축적 구성과 뎃상을 득의로 했던 그의 화면은 인상파 우세의 시대에 맞지 안 했던 것이다. 당시 일반적으로 인상파로 간주되었던 세쟌이나 고-갱의 화면에, 프라이는 수동적인Im-presssion이 아닌 능동적인 화면구성의 의지Ex-pression 를 읽으 내어 자신의 화풍과의 공통성을 발견하였다. 학생시대 죠반이.모렐식의 형태학적 공헌을 배웠던 프라이는 그 감정안을 갖고 인상파론진에 도전하게 되는 [포스트 인상파]를 말하기 위해 스스로 포말리즘을 전략적으로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급속히 모던.아-트를 독일의 마이야.그레훼와 프랑스의 모-리스.도니의 저작에서 배워, 이를 바탕으로 1910년의 전람회를 열었다. 그러나 마이야.그레훼는 순수한 포말리즘이 아니고 화가의 내면표출.자기표현을 존중하는 비평가이다. 또한 盛期 르넷상스 이전을 의미하는 [프리미티브]란 말을 이전부터 선호했던 프라이는 도니를 따라 이를 [無碍한 표현력]을 가르키는 것으로 다용하였다. 관자의 눈[目]으로 포름을 분석한다기 보담 이 時点에서 프라이는 제작자의 입장에 時点을 두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상파진으로 부터는 당연히 실랄한 공격을 받는다. 이것들에 대한 반론을 시도하는 중 프라이는 서서히 포말리즘의 [辯術]의 기술을 몸에 익히고 권토중래를 도모하여 1912년의 전람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프라이는 [포마리스트/모더니스트]의 동료가 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는 본질은 그렇치 안했다. 켐브릿지의 학생시대 프라이는 아-트 앤드 그라프즈 운동에 깊이 간여하며, 스스로도 아-트 워-크즈.길드에 들어가 있었다. 학우 Ch.R.아슈비등과 더불어 라스킨의 예술론.경제론에 감명받아, 윌리암.모리스의 강연회에 나가기도 했다. 아슈비라고 하면, 후에 貧者구제를 위한 [수공업길드] 나 [수공업학교 및 길드]를 설립하는 인물이다. 프라이 역시 사회주의자로써 휘에비언협회에 이름을 언고 죠-지 버너드 쇼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다. 10년에는 [포스트 인상파]의 기치를 내 걸 때 프라이는 명목상으로 길드를 탈퇴한다. 그렇치만 프라이를 모더니스트로써 신봉하는 브름즈베리.그룹의 젊은 화가들의 [빈곤을 구제]하기 위해 13년에 오메가공방을 개설한 프라이의 근저에 있었던 것은 모더니스트들에게는 금기시되는 전시대의 정신이며, 길드제도였던 것이다. 오메가공방에서는 陶器나 家具등의 공예품을 제작.판매하고 있었는데, 공예품 자체를 만드는 것을 험오하며 기성품에 그림을 그려 넣기만 하는 여타의 화가들과는 달리 프라이는 13년부터 열심히 작도를 배워 스스로 길드의 [직인]과 같은 행세를 하였다. 오메가제품에는 서명을 넣는 것 조차 금지했다. 이로 인해 여타의 [예술가]와충돌을 하기도 했다. 또한 프라이는 그라이붸.벨의 반대를 무릎쓰고 에릭.길의 석조작품을 12년의 [제2회 포스트인상파전]에 출품시켰다. 길드는 예술가로써의 교육을 받지 않았던 [석공]이었으며, 지금은 타이프그라피로 이름을 남기고 있는 인물이다. 길은 모리스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성요셒.성도미니크길드]를 주최하며, 질박경견한 생활모범속에서 [직인]으로써 살아 왔었다. 프라이는 이 [경견한 신앙심의 출현]과 [직인기질]울 이유로 길을 찬양하였고 모던 아-트의 세계로 그를 끌어 넣었던 것이다. 파인.아-트의 자율성.순수성을 존중하고 포름이외의 요소를 비판기준에서 제외하는 것이 [포마리스트/모더니스트]의 정석이라 한다면, 프라이의 자세는 이와는 확연하게 먼 것이다. 이 가장 포마리즘에 근접했던 시기를 지나, 프라이의 관심은 더욱 더 여기서부터 벗어난다. 예술작품이란 예술가와 관자와의 심리적. 감정적인 교류의 [場]이라고 강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24년의 [예술가와 심리분석]에서는, 예술가의 미적 표현의 욕구와 관자의 심적인 공명 수용을 말하기 위해 프로이드의 심리분석을 비판적으로 검증하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사후에 편찬된 [최종강의]에 이르러서는 곤브릿지가 뒤에 가서 적절히 [봉마고]라 말한 바와 같이 [로망주의적] [共理論]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프라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선기와의 유비로 말해 본다면 예술가는 발신기이며, 예술작품은 묘체가 되며 그리고 관자는 수신기일것이다. … 작품의 멧시지는 예술가의 잠재의식속에 숨어 있는 경험의 총체를 응축한 것이다]. 略歷: 1866년 런던생. 런던대학에서는 처음에는 자연과학을 전공하였는데, 이내 회화로 전향하여 미술사연구를 한다. 영국에서의 포스트.인상파의 소개자. 1905-10년 메토로.포리탄미술관(뉴-욕)관장. 1910년 런던의 그라프톤화랑에서 개최한 [마네와 포스트인상파전]을 조직했다고 알려젔다. 벨, 그림버그와 더불어 포말리즘의 이론가의 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34년 몰. 主著: Giovanni Bellini, at the Sign of the Unicon, London, 1899. Manet and the Post-impressionist Exhibition, Clafton Gallaries, 1910. The 2nd Post Impresssionist Exhibition 1912 Vision and Design, Chatto and Windus, London, 1920 The Artist and Psycho-Analysis ,1924 Art and Commerce, 1926 Cezanne: A study of His Development. London, 1927
1384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2780 2017-01-18
14. 로쟈.프라이(Roger Fry) 포말리즘 批評家로써의 神話 로쟈.프라이는 오늘날에는, [포말리스트/모더니스트]의 典型 혹은 元祖로 간주되고 있다. 실제로 반세기후 미국에 등장하는 크레멘트.그린버그류[포말리스트/모더니스트]도 프라이를 모범적 선구자로 간주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프라이는 완전한 포마리즘을 관철해 왔던 것은 아니고 純然한 모더니스트라고도 부르기 힘들다. 오히려 그를 [포말리스트/모더니스트]라고 하는 일종의 神話를, 그의 주변에 있었던 브름즈.베리 그뤂, 더욱이 크라이브.벨이 창작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라이가 가장 포말리즘의 경향을 띠웠던 것은 그가 주최했던 [마네와 포스트인상파전](1910)후, [제2회포스트인상파전(1912)의 전후가 된다. [포스트인상파(Post-Inpressionist)]란 프라이의 조어이며, 이때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했던 말이다. 그의 의도로써는 [안티 인상파]에 가깝다. 당시 영국에서는, 가까스로 인상파가, R.A.M.스틴븐슨이나, D.S.맛골 이라고 하는 비평가의 盡力에 의해 世間에 받아 들여젔던 시기였다. 이들 인상파응호진쪽이 오히려 철저한 포말리즘을 기반으로 하여 내용중시의 왕립아카데미로부터 주권을 빼았었던 것이다. 미술계의 중요한 포스트는 대부분이 인상파풍의 화가들에 의해 점하기 시작했다. 실은 이러한 상황아래서의 프라이는 르넷상스미술사가.감정가로써의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화가로써는 불우했다. 초기 르넷상스의 거장풍이라고 평해젔던 건축적구성과 뎃상을 득의로 했던 그의 화면은 인상파우세의 시대에 맞지 안 했던 것이다. 당시 일반적으로 인상파로 간주되었던 세쟌이나 고-갱의 화면에, 프라이는 수동적인Im-presssion이 아닌 능동적인 화면구성의 의지Ex-pression 를 찾아 내어 자신의 화풍과의 공통성을 발견하였다. 학생시대 죠반이.모렐식의 형태학적 공헌을 배웠던 프라이는 그 감정안을 갖고 인상파론진에 도전하게 되는 [포스트 인상파]를 말하기 위해 스스로 포말리즘을 전략적으로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급속히 모던.아-트를 독일의 마이야.그레훼와 프랑스의 모-리스.도니의 저작에서 배워, 이를 바탕으로 1910년의 전람회를 열었다. 그러나 마이야.그레훼는 순수한 포말리즘이 아니고 화가의 내면표출.자기표현을 존중하는 비평가이다. 또한 盛期 르넷상스 이전을 의미하는 [프리미티브]란 말을 이전부터 선호했던 프라이는 도니를 따라 이를 [無碍한 표현력]를 가르키는 것으로 다용하였다. 관자의 눈[目]으로 포름을 분석한다기 보담 이 時点에서 프라이는 제작자의 입장에 時点을 두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상파진으로 부터는 당연히 실랄한 공격을 받는다. 이것들에 대한 반론을 시도하는 중 프라이는 서서히 포말리즘의 [辯術]의 기술을 몸에 익히고 권토중래를 도모하여 1912년의 전람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프라이는 [포마리스트/모더니스트]의 동료가 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는 본질은 그렇치 안했다. 켐브릿지의 학생시대 프라이는 아-트 앤드 그라프즈 운동에 깊이 간여하며, 스스로도 아-트 워-크즈.길드에 들어가 있었다. 학우 Ch.R.아슈비등과 더불어 라스킨의 예술론.경제론에 감명받아, 윌리암.모리스의 강연회에 나가기도 했다. 아슈비라고 하면, 후에 貧者구제를 위한 [수공업길드] 나 [수공업학교 및 길드]를 설립하는 인물이다. 프라이 역시 사회주의자로써 휘에비언협회에 이름을 언고 죠-지 버너드 쇼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다. 10년에는 [포스트 인상파]의 기치를 내 걸 때 프라이는 명목상으로 길드를 탈퇴한다. 그렇치만 프라이를 모더니스트로써 신봉하는 브름즈베리.그룹의 젊은 화가들의 [빈곤을 구제]하기 위해 13년에 오메가공방을 개설한 프라이의 근저에 있었던 것은 모더니스트들에게는 금기시되는 전시대의 정신이며, 길드제도였던 것이다. 오메가공방에서는 도기나 가구등의 공예품을 제작.판매하고 있었는데, 공예품 자체를 만드는 것을 험호하며 기성품에 그림을 그려 넣기만 하는 여타의 화가들과는 달리 프라이는 13년부터 열심히 작도를 배워 스스로 길드의 [직인]과 같은 행세를 하였다. 오메가제품에는 서명을 넣는 것 조차 금지했다. 이로 인해 여타의 [예술가]과 충돌을 하기도 했다. 또한 프라이는 그라이붸.벨의 반대를 무릎쓰고 에릭.길의 석조작품을 12년의 [제2회 포스트인상파전]에 출품시켰다. 길드는 예술가로써의 교육을 받지 않았던 [석공]이었으며, 지금은 타이프그라피로 이름을 남기도 있는 인물이다. 길은 모리스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성요셒.성도미니크길드]를 주최하며, 질박경견한 생활모범속에서 [직인]으로써 살아 왔었다. 프라이는 이 [경견한 신앙심의 출현]과 [직인기질]울 이유로 길을 찬양하였고 모던 아-트의 세계로 그를 끌어 넣었던 것이다. 파인.아-트의 자율성.순수성을 존중하고 포름이외의 요소를 비판기준에서 제외하는 것이 [포마리스트/모더니스트]의 정석이라 한다면, 프라이의 자세는 이와는 확연하게 먼 것이다. 이 가장 포마리즘에 근접했던 시기를 지나, 프라이의 관심은 더욱 더 여기서부터 벗어난다. 예술작품이란 예술가와 관자와의 심리적. 감정적인 교류의 [場]이라고 강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24년의 [예술가와 심리분석]에서는, 예술가의 미적표현의 욕구와 관자의 심적인 공명. 수용을 말하기 위해 프로이드의 심리분석을 비판적으로 검증하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사후에 편찬된 [최종강의]에 이르러서는 곤브릿지가 뒤에 가서 적절히 [봉마고]라 말한 바와 같이 [로망주의적] [共理論]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프라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선기와의 유비로 말해 본다면 예술가는 발신기이며, 예술작품은 묘체가 되며 그리고 관자는 수신기일것이다. … 작품의 멧시지는 예술가의 잠재의식속에 숨어 있는 경험의 총체를 응축한 것이다]. 略歷: 1866년 런던생. 런던대학에서는 처음에는 자연과학을 전공하였는데, 이내 회화로 전향하여 미술사연구를 한다. 영국에서의 포스트.인상파의 소개자. 1905-10년 메토로.포리탄미술관(뉴-욕)관장. 1910년 런던의 그라프톤화랑에서 개최한 [마네와 포스트인상파전]을 조직했다고 알려젔다. 벨, 그림버그와 더불어 포말리즘의 이론가의 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34년 몰. 主著: Giovanni Bellini, at the Sign of the Unicon,London,1899. Manet and the Post-impressionist Exhibition, Clafton Gallaries, 1910. The 2nd Post Impresssionist Exhibition 1912 Vision and Design, Chatto and Windus, London, 1920 The Artist and Psycho-Analysis ,1924 Art and Commerce, 1926 Cezanne: A study of His Development, London, 1927
1383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3147 2017-01-14
13. 메이야. 샤피로(Meyer Schapiro) 現代美術批評을 歷史硏究로 자리잡게 하였다 메이야.샤피로는 세살 때 리또아니아에서 미국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고 있다. 전형적인 유대인의 이주라 말하는 사람도 있어나, 그의 불가사의한 국제성은 이러한 出自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일찍부터 미술을 배우고 작가가 되려는 희망을 품었다고 한다. 눈부신 성공은 얻지는 못했었나 매우 폭 넓은 영역의 조형표현에 대한 視点이, 이러한 경험을 통해 단련되었음은 사실일 것이다. 그의 학위논문은 프랑스의 교회모쟈이크에 관한 것이었어나 이 논문은 학계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여기서 그는 로마네스크미술에 관한 연구의 제 일인자가 되었었는데, 이뿐 아니라, 현대미술을 둘려 싼 비평을 역사연구로써 자리 잡게 한 인물임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를 희망하고 있었던 샤피로는 현대 미술을 향한 눈짓도 버리지 않았었다. 미술사연구자로써의 샤피로는 일직부터 유-럽의 미술연구의 정수를 흡수하고 있어, 뷜헬름.호게, 하인릿히.붤브린, 마크스.보뷜쟉크, 아이로스.리굴 같은 뷘학파의 성과를 배우고 있었다. 한편, 유럽의 아성에 머물지 않고 미국은 물론, 아세아에도 관심의 눈을 돌려 넓은 학식을 익히고 있었다. 따라서 샤-피로가 로마네스크미술에 쏟은 관심은 참신하였고 또한 모험심 넘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최초의 저작이 세상에 나왔을 때 어떤 학자는 이 책을 평하기를, [샤피로는 일군의 로마네스크조각을 처음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미술작품으로서 논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샤피로는 그때까지 중세의 환상과 같이 취급되어 오던 彫刻群에 대해 당시의 사회와 국가의 의미부여를 대치시켜 깊은 정신성의 영역에 까지 파고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예술이 문화의 전체와 서로 맺는 깊은 관계성]을 계속 묻고 있었던 것이다. 그 성과는 [선집]의 여러 책에서 상세하게 나와 있는데, 한 묶음으로 정리된 邦譯(일본 번역판)은 없다. 물론 엄밀한 미술사가로써의 샤피로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샤피로가 유명해 지는 것은 로마네스크연구에 기반을 두면서 그기서 대단히 다양한 영역으로 시야를 넓혀 갔기 때문이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샤피로는 현대미술을 정면에서 다루기 시작한 최초의 미술사가의 한 사람이 었으며, 또한 많은 작가를 길려 냈다는 점에 있다. 그는 로마네스크미술의 추상성을 현대미술의 추상적인 형체와의 유사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는 쟉크슨.보롴 나 디.쿠닝의 작품을 역사의 조류위로 밀어 올려, 광대한 문화의 들판속에 자리 매김하려고 했던 것이다. 먼저 샤피로는 사실주의의 문제를 다루면서 구로-배, 고흐, 세쟌느를 논하였는데, 이들의 활동은 고전주의와 로망주의 갈등과 같은 양식관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단히 구체적이며 개인적인 현상으로써 다루지는 것이다. 그래서 세쟌느는, 이러한 양식을 해명해 내며 무효화함으로써 제빨리 20세기를 선취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구상에서 자유로운 추상으로 라는 가장 근본적인 변혁에서 50년이 지나고 자연에 밀착하고 있다고 하는 것으로 이제서야 시대에 뒤떨어진것으로 본 세쟌의 그림이 실은 아직도 신선함을 갖고 있으며 현대의 젊은 화가들의 자극제가 되어 있다. 그는 유파를 만들지는 안 했지만, 그의 사후의 대부분의 새로운 운동에 직간접으로 고무를 주고 있었다]. 이와 같은 확신에서 그는 [세쟌의 사과]에 대해 쓰게 되는 바 이 고명한 논문에서 대담하게 정신분석의 방법을 사용하여 [억압된 욕구의 무의식적상징화]를 보고 있었다. 바로 샤피로 다운 관점이었엇다. 헌데, 샤피로는 [추상회회의 인간성]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오늘날의 추상회화는 논리상의 추상이나 수학과는 관련이 없다. 그것은 켄버스의 밖의 물체의 세계나 관념을 묘사하지 않아도 그것만으로 충분히 구체적이다. 우리들이 켄버스상에서 보는 내용의 대부분은 그기에 속하고 있는바, 어디 밖의 것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태 없었던 그 과정의 필촉성, 그의 생기와 기분을 진행중의 제작과정의 결단의 드라마를 떠 올려 준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그는 실로 매우 빠른 시기에 막스.로스코를 논평했으며, 보롴을 평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논쟁의 사람이기도 하여 하이뎃가의 [예술작품의 시작]울 극열하게 비판하였는데(고흐의 그림에 관해) 이 논쟁은 쟉크.데리다에 의해 재검토된다. 이러한 샤피로의 자세는 정신분석뿐만 아니라 보다 더 깊은 현대사상에도 접근하게 되었다. 그 백미가 되는 저작이, 강연에서 비롯한 [말과 회회]이다. 이 강연은 [시각예술의 기호론을 둘려 싼 제문제에 관하여: 이미지=기호의 영역과 묘체]라고 하는 선구적인 작업을 반영하는 것이며, 고대중동의 신상의 몸짓 표현에서 현대미술의 제문제에 걸친 광범위한 화제를 통해 이미지와 기호의 문제를 논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회화기호론자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회화를 택스트로 보는 점은 같다고 할 수 있어나 회화는 기호분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고찰의 출발점이며 해명해 내어야 하는 목표인것이다. 샤피로는 자주 아비.붤브르크와 비교하여 논해지는 데 붤브르크의 처는 화가이며 그 또한 동시대의 미술에 뜨거운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최후로, 샤피로의 70歲기념의 전람회에 참가한 작가들의 이름의 약간을 여기에 들어 보기로 한다. 쟈스파 죤즈, 엘스와스.케리, 아렛산드.리프만, 로이.리켄슈타인, 안드레.맛슨, 그래서.오덴버그, 로버트.라우젠버그, 프랑크.스테라, 웬디. 워-홀……. . 약력: 1904년 리또아니아 생. 3년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감. 회화와 미술사를 배우고, 코럼비아대학을 졸업후, 2년간 유럽와 중동을 여행하고 그기서 자신의 연구영역 을 로마네스크미술로 결의함. 한편, 쟉슨.보롴등의 미국현대미술가들을 최초로 평가한 사람으로써 또한 교육자로써도 훌륭한 인재를 배출했다. 미술사가인 레오.슈타인 버그, 화가의 도널드.쟛드등이 그의 학생이었다. 96년 몰. 주저: [세쟌느(화집해설)] [고흐] [세쟌느] [모-던 아-트] [양식-(EH콘브릿지와의 공저)] [Words and Pictures] [Meyer Shapiro] [Mediavel Art] [Theory and Philosophy of Art]
1382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3037 2017-01-11
12. E.H. 곰브릿지(E.H. Gombrich) 心理學, 社會理論을 援用하면서 미술을 讀解한다 곤브릿지의 학식의 넓음은 간단한 요약을 허용하지 않는다. 뷘대학에서 傳統的인 美術史의 훈련을 받았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미술관에서의 실습 동안 엘런스트.그리스와 알게 되어 일찍이 예술과 심리학과의 미묘한 관계에 눈을 뜨게 된 것도 그의 연구의 넓음을 알게 된다. 곤브릿지가 미술사를 배운 유리우스.폰.슈롯사는 뷘학파의 중진이며, 미술품을 동시대의 精神風土와 관련 지워 해석하려는 방법을 철저하게 講習했었다. 그러함으로, 이 위대한 미술사가로부터 다양한 학자가 태어나, 예를 들면, 슈-롯사의 뒤를 이어 뷘대학교수가 된 한스.제돌마이어 역시 독자적인 심리주의적 입장을 취하는바, 그는 말하자면 곤브릿지의 으뜸 弟子였었다. 곤브릿지는 나치스의 대두와 더불어 영국에 건너가 이미 함브르그에서 런던으로 옯겨진 워버그연구소에 들어 가는 것으로 되는데, 이 역시 엘른스트.그리스나 옷또.구르쯔란 친구들과 함께 결행했던 행동이 였었다. 그리고 곤브릿지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와 마주 치게 되는 것이다. 잘 알려진바와 같이 독일의 미술사가 아비.뷜브르그로 시작하는 워버그연구소는 [워버그의 방법]이라 불리고 있던 이코노로지(도상해석학)를 상제하고 있었고 가지 각색의 응용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곤브릿지는 저작집 [신보리그. 이미지]의 서설로 [이코노로지-의 목적과 한계]를 두고, 이 방법의 풍요로운 미래를 확인할 뿐 아니라 오해에 입각한 安益한 응용에 경종을 울리고 있기도 한다. 이때 그는 정신분석의 방법과 일종의 의미론적인 분석방법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는바, 항상 해석의 한계를 뀌뚫어 보는 감성의 필요를 강조하고 있다. 아마도 이를, 그는 붤브르그이 남겨놓은 방대한 초고에서 배운 것이 아니였을까. 워브그연구소에 착임한 당시, 연구소장은 휘릿즈.쟉슬 이었다. 독일군의 공폭에 시달리고 있던 런던에서 쟉슬은 연구소와 그 문고들을 지키기 위해 바쁘게 뛰어 다녔는데, 문고의 관리는 붤브르그의 비서를 맡고 있었던 겔돌트.빙그에 맡겨저 있었다. 그녀는 붤브르그의 유산관리인이기도 하였는데, 곤브릿지는 그녀의 조수가 되어 초고의 정리를 도우고 있었던 것이다. 쟉슬은 전쟁의 종결을 보고, 평생의 책무로 여겨왔던 붤브르그의 전기에 착수하는데, 1948년 돌연의 죽음으로 메모만 남기는 것으로 멈추게 되었다. 그래서 이 일은 빙그에 게승되었는데, 그녀 역시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그래서 곤브릿지가 전기를 완성하게 되는 것은, 1970의 일이다. 이러한 경위를 자사하게 적은 것은, 연구소의 이러한 고투속에 곤브릿지가 말려들어갔던 것, 아니 뛰어 들어 갔던 것이야 말로 그의 광범위한 학식을 기초해 주는 것이 였기 때문이다. 붤브르그와 면식이 없었던 곤브릿지는 [아비. 붤브르그傳]의 집필은 매우 고통스려웠던 것이었어나, 어떤 의미에서 이 書는 그 자신의 變成을 증좌해 주는 이정표가 된다. 곤브릿지의 작업은, 이와 같은 붤-브르그의 思想圈과의 만남에서 크다란 의미를 갖는 것인바 한편 지각심리학의 분석에의 높은 관심이라고 하는 독자적인 영역에서도 많은 성과를 남긴다. [예술과 幻影] 내지 [裝飾藝術論]이 이 영역에서의 주저들이며, 인간과 지각과 形狀의 인식에 있어, 방대한 자료를 구사하여 분석을 시도하고 있어나, 한편, 그는 심리학자나 인류학자와의 공동작업을 통해 영역의 확대를 도모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는 종래의 미술사라고 하는 범주를 벗어났다고도 볼 수 있어나, 청년기에서 얻은 착상을 일관되게 추구하여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추구해 갔디고 할 수 있다. 또 한편, 곤브릿지는 이러한 시각적 경험경험을 사회의 가치판단 안에서 비판적으로 새롭게 보는 시스템이 있으며, 이것이 역사 안에서 가지각색의 비판감각을 탄생시켜왔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가지각색의 문화현상을 개인의 지각과 사회의 운동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잡아 보려는 자세가 엿보인다. 미술사가로서의 곤브릿지의 작업은 르네상스연구에 그 핵심이 놓여 있는데, 그것 역시 심리학적 연구나 사회이론적인 연구와 따로 떨어저서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전체적 총합으로써 결실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르네상스연구로는 [규범과 형식] 내지 [심보릭.이미지]가 邦譯되어 있으며, 더욱, [아베레스의 유산] 및 [새로운 빛으로 조명되는 과거의 거장들]이라고 하는 저작이 있다. 최초의 [규범과 형식]이 사회심리학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면, [심보릭.이미지]는 이코노로지적인 방법에 의한 르네상스의 상징표현의 분석이며, [아베레스의 유산]은 지각의 심리학의 응용편이라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시대의 반영이라 볼 수 있으나 곤브릿지는 가지각색의 관심은 서로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각적인 관심속에서 이미지의 비밀을 밝혀 가야 한다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또 [捧馬思考]는 어린이의 놀이개인 말을 위시하는 고찰등이 수용되어 있는 바, 이 역시 매우 학재적인 관심을 반영하는 논문집이다. 공브릿지의 저작에는, 이따금 불가사의한 유-모어가 나타나는데 이것들을 읽게 되면, 강연의 달인이라고 한 말이 납득이 가게 된다. 또한 젊은이를 위한 미술사 안내로 쓰인 [미술의 걸음]은 개몽서이지만 그의 視点을 가깝게 하기 위한 적당한 안내서이기도 하다. 더욱 곤브릿지의 저작은 잘 정리된 시리즈로 재편집되어지고 있다. 언젠가 그 전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略歷: 1909년 뷘에서 태어남. 뷘대학에서 유리어스.폰.슈롯사밑에서 미술사를 배움. 후에 나치대두하의 런던으로 이주하여 워바그연구에 들어감. 그는 아비.붤브르그의 초고를 정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소장인 쟉슬, 이어 소장이 된 빙그가 세상을 등지는 바람에 이 유지를 이어 받아 [워버그傳]을 저술하였다. 59-79년 사이 연구소의 소장을 맡았고, 많은 저서를 냈다. 구미각지의 교육기관에서 교편을 잡았다. 主著: [아비 붤브르그전] [이미지와 눈] [규범과 형식] [예술과 환영] [예술과 진보] [수단과 목적] [심보릭. 이미지] [장식예술론] [미술의 발자취] [봉마고] [양식](메이야.샤피로와의 공저)
1381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2778 2017-01-05
11. 아로이스. 리-굴(Alois Riegl) 美術史에서 뷘학派(Vienna School) 최대의 공로자 2000년말, 예상치도 안했던 유리우스.폰.슈-로프샤의 [[미술사][뷘학파]]의 일본 변역판이 중앙공론미술출판에 의해 출판되었다. 細田雄介(호소다)의 노작이었다. 필자는, 이 사라저 가는 것에서만이 발하는 광망을 몸에 걸친 슈-로프샤의 名著가, 허나, 그 내용의 전문성으로 해서 여하한 타국의 학통에 그대로 과분의 경의를 지불하고 그 祖述에 임해, 스스로 갖는 미덕까지 찾아 내는 이 나라에서 조차도 번역물이 나오리라고 예상하지 않고 있었던 처지였다. 이 책은 그 타이틀이 나타내고 있는 바와 같이 서구미술사학의 産褥의 하나로, 오-스트리아는 뷘에 있는 그 학통을 1934년 당시 그 정당한 유산관리인을 자처했던 폰.슈-로프샤가 뷘인 답게 일말의 애수와 아이로니컬한 눈매를 갖고 [회고]한 서책이다. 이 책속에서 가장 많은 페이지를 활애한 부분이 다름 아닌 ‘리-굴’ 이다. 두터운 處遇에는 그 상응의 근거가 있다. 여하간에 리굴야 말로 [미술사에 있어 뷘학파]최대의 공로자였다. [예술의욕]으로, 예술의 역사를 관류하는 [동작因]을 [발견]하고, 이것을 가지고 예술의 시간적 경위를 인과율에 저촉하는 일 없이 따라서 학문적으로 일련의 [이야기]로 기술해 가려는 것으로, 전적으로 그의 단독의 힘으로 증명해 낸 것이 리굴이였다. 그 교설에는 헤-겔의 형이상학이 크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기는 하다. 오해를 무릅쓰고 말해 본다면, 그가 등장하기 끼지에는, [미술사의 繼者]로써까지 저하 됬던 고대말기의 공예=예술이나, 바록의 여러 작례를 [유년-청년-장년-노년]이라고 하는 말하자면 의인적발전사관에 비추워 [퇴페]로 치부되는 [편견]으로부터, 맑은 하늘과 같이 멋 있게 해방시킨 것이 리굴이었다. 그의 서책에는 필자의 관심을 더욱 자극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그것은 리굴의 학설을 상세히 논하고 있는 一章에서 아니고 일화와 같이 나타난다. 실로 기묘한 회화가 떠 오른다. --- 당시 가까스로 떠 올라 왔던 리얄트.슈트라우스의 [가정교향곡]연주에 대해서, 리굴에 대해 이뜨금 전했던 일이다. 원래의 리굴와는 멀어 보였던 부분으로써 자신의 역사이론과 무엇인가 통하는 바가 있다고, 여기서 인정하고 있는 새로운 징후, [자연음]에 대해 흥미를 갖는 모습, 이것은 나의 추억 속에서 인상이 강한 것으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이 줄곧 사변적-역사적인 자세로 사물을 잡아 내는 리굴은, 진정한 역사편집자로써 [표현주의]의 [뒷면 보는 예언자]의 한 사람이 되어, 당시의 표현주의 최초의 섬광을 바야흐로 생사의 바닥에 서서 보았던 것이다. 슈트라우스는 말할 것 없이 20세기 독일의 대표적 작곡가의 한 사람이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두에 걸처 [돈.판] [영웅의 생애]등의 교향시로 와그나의 음악을 게승하고 악극 [에레크트라]로 19세기적 화성을 극한까지 확대, 자극적인 음향으로 센세이션을 불려 일으키면서, 一轉 뷘의 대표적 작가 호프만 스타일의 대본에 의한 악극 [장미기사]로 平明한 화성에 의한, 爛熟을 極한 회고적세계를 탄생시키고, 이후, 급진파로부터 야유당하면서 그러나 독일의 대표적인 작곡가=지휘자로 나치정권하에서 조차 절대한 명성을 향수하였다. [가정교향곡]은 1903년말에 완성을 보고 다음해 뉴-욕에서 초연되었다. 그의 교향시군중에서는 매우 늦은 편에 들어 가는 것이다. 가정의 이런 저런 분란을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 프로그램로서는 실로 하찬케 보이는 작품이었으나 작곡 당시의 악기법, 관현악법의 상식을 지나치게 일탈하여 대담한 그 음향과 최극의 엄밀성으로 구성된 악곡으로써의 형식미는, 당시의 일반적 청중에는 매우 충격을 안겨주었던 모양이다. 따라서 리-굴이 이 작품에 [새로운 징후]를 찾아 냈다 해서 그리 부당한 일은 아닐 것이다. 허나 이 에피소드에서 폰.슈-롯샤가 [표현주의] 은은 한 것은 조금은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한다. 슈투라우스가 표현주의적 경향을 일시적이기는 하나 그 작품에 각인시켰던 것은 오히려 1909년 초연의 [에렉트라]에서 였고, 1905년의 악극 [사로메]에서 조차 오히려 상징주의적 봐그네리즘라 말할 영역의 작품이다. 폰.슈-롯샤는 리굴의 동시대미술과의 [교감현상]에 독자의 눈을 돌려 놓으려고 성급한 결론을 내린 모양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에 불구하고 그의 지적은 리-굴와 20세기예술과의 연관성을 탐색하는데 거이 절대적인 것이다. 왜? 1904년, 슈트라우스의 라이발, 말-라는 뷘宮廷歌劇場의 지휘자로써의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이미 일곱개의 교향곡을 완성하고 있었다. 이 법외의 새로운 오-케스트라 작품은 앞서 인용한 바 [자연음] 그대로의 공허한 화음에 의해 막을 연다.(말라는 오히려 [원음]이라 부를 것이다). 억측의 영역을 벗어 나지 않지만, 인용하는 바 [자연음]이란, 말-라가 준비하고 다음 세대 즉 슌베르그를 위시한 [신뷘학파]에 의해 실현된 [無調], 그 엄격한 構造化인 [十 二音技法]을 예감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수상하게도 슌 베르그는 표현주의미술의 제일인자 간딘스키-와 더불어, 한때 [미래의 예술]에 관해 공통적인 꿈을 추구한다. 화가는 繪畵要素의 自律性을 목표로 삼고 기어코 [추상]이라 하는, 궁극적으로는 [구조] 그 자체가 줄곧 내재적으로 전개되는 예술을 탄생시키고, 작곡가는 화성이라고 하는 19세기적시스템을 무효화시키며 음계를 구성하는 십이의 음에 전적으로 같은 가치를 부여하며, 音高의 수학적질서만이 골격으로 부상해 나오는 [極北의 音樂]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크림트, 실레등의 활약한 세기말 뷘을 살아 가며 조형요소가 아라베스크모양의 독자성에 자리를 내 준 유-겐슈테일을 한 옆으로 보면서 [추상]을 예감한 리-굴은 조형의 배후에 그 展開를 지배하는 그 자체로서는 형을 갖지 않는 [예술의욕]속에 그 학설의 핵심을 보았다. 수상하게도 리-굴의 사상을 가장 충실하게 體現한 미술사가 뷜헬름.붜린가는 그의 주저 [抽象과 感情移入](1908)에서 표현주의미술의 이론의 초석을 세운다. 略歷: 1858년 오-스트리아 린쯔 태생. 법학을 익히고 이어 철학과 역사학, 끝에 가서는 미술사를 연구함. 83년 오-스트리아역사연구소근부를 거처 86년 프란쯔.뷔그호프의 후임으로 오-스트리아미술공예박물관직물미술부문의 부장에 역임. 그 사이, 89년이래 원외교수를 맡고 있었던 뷘대학에 정교수로 초빙되어 1905년 사거할 때 까지 그 직에 종사함. 主著: [미술양식론] [미술사와 보편사](미학예술학의 현대적 과제) [새로운 미술사] 등.
1380 no image Cold Mountain
3347 2016-12-22
Cold Mountain [콜드 마운틴]에서, 내가 너에게 꼭 들려 주고 싶은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게 ‘왜 지금 ‘콜드 마운틴’인가 묻지 마라. 나 자신도 아직 확실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 이 소설을 한국판으로 출간 당시 구입하여 1999.1.26 일독했다는 기록과 2016.2.17 2차로 읽었다는 메모 옆에 2016.12.24, 3차 종독의 메모를 적어 넣었다. 메번 읽을 때 만다 새로운 의미를 깨우치게 되면서 문학예술의 진미를 맛보게 해 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새로운 의미를 일께워준 대목을 소개한다. <“freewill savages (원서 p. 284), ‘상처의 유산’ (한국판. 64패이지.)” 에서 따 옴.> ……. . “전쟁을 겪고 나서 내 음악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루비는 여전히 의심스렵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쟁 전에는 공짜로 술을 얻어 먹을 수 있을 때만 바이올린을 연주했잖아요.” 그야 옛날 얘기지. 지금은 신들린 사람처럼 연주를 한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야. “ 스토브로드(Stobrod)가 말했다. 그의 말로는 뜻밖의 순간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됐다고 했다. 1862년 1월 초순, 리치몬드 근처에서였다. 당시 그가 소속되어 있던 부대는 겨울용 막사에 머물러 있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바이올린을 켤 줄 아는 사람을 찾아 막사로 왔다가 스토브로드에게 안내되어 왔다. 그 남자는 올해 열다섯 살 된 딸아이가 있다고 했다. 그의 딸이 그날 아침 어느 때와 다름없이 불을 피우다가 막 점화된 불씨 위에 등유를 부었는데, 활활 타고 있던 석탄 위로 등유가 쏟아지면서 난로 뚜껑을 덮자마자 폭발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난로 뚜껑이 머리로 날아와서 세게 부딪쳤고 난로 구멍에서 불기둥이 솟으면서 뼈가 거의 드러나 보일 정도로 딸의 얼굴을 태웠다고 했다. 이제 딸은 얼마 안 있어 죽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딸은 사건이 일어난 지 한두 시간 후에 의식을 찾더니, 조용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스토보로드는 바이올린을 들고 그 남자를 따라 한 시간을 걸어갔다. 침실엔 일가족이 침대를 빙둘러 앉아 있었다. 화상을 입은 소녀가 베개에 파푿힌 채 누워 있었다. 머리카락은 거의 모두 날아가 버렸고 얼굴은 마치 가죽을 벗긴 너구리 같았다. 벗겨진 피부에서 흘러나온 진물이 베갯잇을 홈뻑 적시고 있었다. 난로 뚜껑에 맞은 귀 윗부분에는 깊이 패인 상처가 있었다. 피는 멈췼지만 핏자국이 선명했다. 소녀는 벌겋게 벗겨진 얼굴과 대비되면서 섬뜩하게 보이는 하얀 눈동자를 굴리며 스토보로드를 위 아래로 처다봤다. “아무거나 들려 주세요.” (Play me something, she said.) 스토보로드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바이올린의 음을 고르기 시작했다. 줄감개를 얼마나 오랫동안 빙빙 돌렸던지 소녀가 “아저씨 …… 저를 조용히 보내주시려면 이제 연주를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스토보로드는 <냄비 속 완두콩>과 <샐리 앤> 등을 차례로 연주해 여섯 곡으로 이루어진 래퍼토리를 모두 끝냈다. 모두 댄스곡으로, 스토보로드는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곡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천천히 연주했지만 아무리 탬포를 늦춰도 엄숙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여섯 곡을 끝내고 난 후에도 소녀는 아직 숨을 거두지 않았다. “다른 곡을 …….. 더 들러주세요.” 소녀가 말했다. “어쩌지? 더 이상 아는 곡이 없는데.” 스토보로드가 대답했다. (I don’t know no more, Stobrod said.) “없다구요? ……. 무슨 바이올리니스트가 그래요?”(That’s pitiful, the girl said. What kind of a fiddler are you?) “떠돌이인데다가 가짜라서 그래.” 그 말을 들은 소녀는 잠시 미소를 지었지만 다시 고통이 오는지 금새 얼굴이 일그려졌다. “그럼 아저씨가 …….. 지어서 들려 주세요.” 소녀가 말했다. 스토보로드는 그 말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여지껏 작곡을 해보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왜요? ……..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세요?” “응.” “그럼 지금이라도 …… 얼른 해보세요. 시간이 ……. 없으니까.”(Best go to it, she said. Time’s short.) 스토보로드는 잠시 동안 생각하다가 줄을 뜯으며 다시 조율했다. 바이올린을 턱에 괴고 활로 켜기 시작하다가 자신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멈췼다가 이어졌다가 하면서 천천히 맬로디가 흐러 나왔는데, 단조로운 가락과 윙윙거리는 쉼표 속에서 나름대로 분위기를 찾아갔기 때문이다. 뭐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음산하고 소름이 오싹 돋는 프리지아(소아시아의 고대 국가)풍의 노래였고, (He could not have put a name to it, but the tune was in the frightening and awful Phrygian mode.) 이 노래를 듣던 소녀의 어머니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며 밖으로 뛰어 나갔다. 연주가 끝나자 소녀는 스토브로드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 곡 ……… 참 좋네요.” “뭘. 그저 그랬지.” 스토브로드가 겸손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 , 정말 좋았어요.” 소녀는 고개를 돌러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소녀의 아버지가 다가와 스토브로드의 팔을 잡고 부엌으로 데리고 갔다. 스토브로드를 식탁에 앉히고 우유를 한 잔 따라 주고 나서 다시 계단 위로 올라갔다. 스토브로드가 우유를 다 마쎴을 쯤 소녀의 어버지가 다시 나타났다. “눈을 감았어요.” 그 남자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스토브로드의 손에 쥐어 주었다. “선생 덕분에 아이가 편하게 세상을 떠났네요.” (You eased her way some up there, he said.) (게속됨) 2. [콜드 마운틴] 12장 “상처의 유산” 이어짐. 스토브로드는 셔츠 주머니에 돈을 넣고 그 집에서 나왔다. 막사로 걸어가는 동안 그는 처음 보는 물건인 것 처럼 바이오린을 몇번 식이나 쳐다봤다. 여지껏 실력을 늘리기 위해 노력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갑자기 귀가 뻥 뚫린 듯한 기분이 들면서 모든 곡을 연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토브로드는 소녀를 위해 만들었던 곡을 그후로도 매일 연주했다. 한번도 질린 적이 없었고, 오히려 평생 매일 연주해도 매번 새로운 곡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줄을 짚고 팔로 활을 켜며 그 곡을 수도 없이 연습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연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음을 떠올리려고 애써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었다. 밤이 찾아오면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고, 이중으로 문단속을 하는 사람도 있고,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바이오린에서 저절로 흘러 나오는 그 곡은 이제 스토브로드가 하루를 마감하는 습관이 되었다. 그 소녀 일이 있던 날부터 스토브로드는 음악에 대한 생각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이제 전쟁에 관심이 없어졌다. 전투에 잘 나가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도 없었다. 스토브로드는 시간이 날 때마다 리치몬드의 선술집을 찾았다. 씻지 않은 몸 냄새, 쏟아진 술 냄새, 싸구려 향수 냄새, 요강 냄새가 나는 술집이었다. 사실 전쟁 내내 시간이 있을 때마다 그런 선술집을 찾기는 했지만, 이제는 술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 연주를 하는 흑인들이 주요 관심사가 된 것이다. 스토브로드는 숱하게 많은 밤을 이 술집 저 술집 돌아다니며 현악기를 제대로 다룰 줄 하는 사람, 기타나 밴조의 천재를 찾아다녔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동이 틀 때까지 함께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매번 새로운 기술을 배웠다. 처음에는 주로 조율과 손가락 놀림과 악구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다 흑인들이 부르는 노래 가사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들이 삶에서 느끼는 욕망과 두려움을 얼마나 정확하고 자랑스렵게 노래로 표현하는지 감탄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예전에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자기 자신에 대해 조금씩 알아 가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깨달은 놀라운 사실 한 가지는 그에게 음악이란 단순한 즐거움 이상이라는 사실이었다. 음악에는 의미가 있었다. 허공으로 소리가 울려 나올 때면 창조의 법칙에 대해 뭔가 이야기가 들여 왔다. 세상 만물에는 법칙이 있기 때문에 인생은 그저 뒤죽박죽인 채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형태와 목적을 갖추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모든 일은 그저 우연히 일어나게 마련이라는 생각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말이었다. 지금 스토브로드는 900곡의 바이오린곡을 알고 있는데 그중 몇백 곡을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루비는 900이라는 숫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여지껏 살아오면서 숫자를 셀 일이 있을 때마다 열 손가락이면 충분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뭐든 열 개가 넘을 만큼 가져 본 적이 없잖아요.” 루비가 말했다. “900곡을 알고 있다니까.” 스토브로드가 말했다. “그럼 한 곡 연주해 보세요.” 루비가 말했다. 스토브로드는 잠시 앉아서 생각에 보다가 엄지손가락으로 바이오린 줄을 쓰다듬으면서 줄감게를 감고 다시 또 쓰다듬고 다른 줄감개를 감더니, E선을 3프랫 정도 낮취 A선의 세 번쩨 키에 맞추는 색다른 조율 방법을 택했다. “아직도 이곡 이름을 뮈라고 할까 생각중이지만 ‘녹색 눈을 가진 소녀’라고 부르면 될 거야.”-(I’ve mever stpped to name this one, he said But I reckon you could call it Green- Eyed Girl.) 새 바이오린 위로 활을 올려놓은 순간 선명하고 또렷하고 순수한 곡조가 흘러 나왔고, 이색적인 조율로 독특하면서도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듯한 화음 효과가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그 맬로디를 들으면, 인생은 흘러가는 구름 같은 것이고 지나고 나면 붙잡을 수 없는 것이라는 슬픈 진실이 손에 잡히는 듯했다. 그리움이 그 곳의 주제였다. 아다와 루비는 스토브로드가 연주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쓸쓸한 분위기의 그 곡을 연주하면서 그는 다른 바이올린 연주자들처럼 물결치듯 짧게 활을 늘리는 주법이 아니라, 길게 활을 켜는 주법으로 달콤한 음악을 자아냈다. 루비는 그런 멜로디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다도 마찬가지였다. 숨을 쉬듯 자연스러우면서도 바이올린을 삶의 중심으로 삼을 만하다는 확신에 찬 연주였다. 수토브로드가 연주를 마치고 희색 수염이 난 턱에서 바이올린을 치우자 오랫동안 침묵이 흘렸다. 개울가에서 지저귀는 새소리가, 다가오는 겨울 때문에 슬퍼하면서도 희망을 안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스토보르드는 연주가 어땠는지 평해 주기를 기다라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루비를 쳐다봤다. 아다도 루비를 쳐다봤다. 루비는 한 가지 이야기와 바이올린 한 곡으로 싸늘하게 식어 버린 심장을 녹일 수는 없다는 표정을 띠고 있었다. 루비가 아다를 보며 말했다. “저 나이가 되어서야 자기가 잘할 수 있는 뭔가를 갖게 되다니 별나기도 하지? 햄을 훔치다가 붙잡혀서 말뚝으로 홈씬 두들겨 맞은 후에야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형편없던 사람이 말야.” 아다는 다른 사람도 아닌 스토브로드가, 인간이 아무리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과거의 삶을 적어도 일부분은 보상할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증인이 되어 나타나더니, 참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 * [Cold Mountain]의 저자 찰스 프래지어(Charles Frazier)는 1950년 노스캐롤라이나의 산악 지방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했으며 콜로라도 대학과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교수직을 역임하기도 한 그는 역사를 새롭게 재현해 내는 풍요로운 상상력을 지닌 시인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자주 들러주던 탈영한 증조부에 대한 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이야기를 깊은 산속 오두막에서 갈고 다듬어 작품 [콜드 마운틴]으로 그려 냈다. 이 작품은 1997년 말 현재까지 2년 간이나 그 상위권을 계속 유지하며 미국의 독서계를 휩쓸고 있으며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전세계 로 소개되기도 함. 20여 개 국에서 번역 출판되어, 세계적 베스트셀러로 화제가 되고 있다. 찰스 프레지어를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시킨 이 작품은 1997년도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받아 <전미국 도서 대상(National Book Award)을 수상했다. 한국어판은 1998년 문학사상사에서 출간하였다. 2004년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영화(주드.로, 니콜.키드먼, 르네.젤워거 출연
1379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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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리젤다. 보록(Griselda Pollock) 훼미니즘에 의한 美術史의 파라다임의 變革 그리젤다. 보록은 린다.녹크린과 나란히 훼미니즘, 줸다의 視点에서 미술을 새로 보고저 했던 현대의 대표적 논객의 한 사람이다. 1970년대의 훼미니즘운동과 시기를 같이 하여 가지 각색의 논고를 연이어 전개해 왔으며 그 제일의 특징은 개별의 작품, 작가의 새로 읽기를 통하여 미술의 역사의 일부를 하나씩 새로 쓴다는 작업은 말할 것 없고 오히려 전체를 포괄하는 파라다임의 변경 자체를 겨냥하는 시점의 모색이 그 논술들의 저변에 깔려 있었다. 일반적으로 훼미니즘의 시점에 의한 미술의 새로 읽기란, 70년대 그와 다른 훼미니즘운동과 연동하여 우선은 역사 속에 매몰되었던 여성미술가의 발굴을 최초의 단초로 하고 과거에 있어 여성 아-티스트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재능을 賞讚하는 데서부터 시작했었다. 허나 80년대에 들어 와서는 이러한 방법에 의한 여성 아-티스트의 역사를 구축하는 것은, 단순히 여태까지의 남성의 視座로 형성된 미술사에, 빠진 여성 아-티스트를 첨가하고 [보족]하는 것 밖에 안된다는 것, 혹은 여태까지의 미술사가 [백인남성의 미술사]였다고 한다면, 이를 180도 뒤집어 [백인여성의 미술사]로 치환하는 것 밖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많은 훼미니스트들은 알기 시작했던 것이다. 과연 여성판의 레오날드.다뷘치나 미갤란제로를 만들어 낸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여성들 역시 남성이 범했던 잘못을 되풀이 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닌가. 보록은 남성이 여태까지 행해 왔던 일방적인 미술의 역사의 잘못을 다시 여성이 되풀이 하는 것의 무의미에 눈뜨자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파라다임의 제안이야 말로 그러한 파라독스를 뿌셔버리는 것임을 주장했던 것이다. [巨匠]과[작품]을, 역사의 순에 따라 세운다는 남성이 구축해 왔던 미술사의 규범의 틀 그 자체를 다시 되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록의 시선은 이렇게 기존의 미술사의 틀의 파괴와 새로운 파라다임의 모색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야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보록이 겨냥했던 것은 결코 종래의 미술사학이란 쫍은 영역안에서의 파라다임의 변환이 아니란 것이다. 보록은 아주 분명하게 그녀 자신의 연구가 [새로운 미술사]가 아니란 것, 보록은 이때, 미술사라고 하는 개념조차 벗겨 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보록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훼미니스트 미술사]가 아니고 복수의 [에술의 역사]에 휘미니스트로서 개입하는 것이다, 란 것이다. 바뀌 말한다면, 그것은 [문화의 역사를 전면적으로 다시 쓰는 것이 되는 파라다임의 변혁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파라다임의 변경의 주장과 모색은, 저작이 겹처침에 따라 강하게 주장되어 가지만, 그럼, 보록가 주장하는 훼미니스트의 시점의 개입에 의한 아-트의 역사란, 구체적으로는 어떤 것인가. 보록의 주장에 의하면, [훼미니스트에 의한 개입이 첫쩨로 해야할 일은, 만드는 축의 여성을 연구하는 것이다. 로직카.파-카-와의 공저[女.아-트. 이데올로기]에서는, 고대나 중세서부터 시작하여 등장하는 여성 아-티스트들, 쇼포니.소바, 안기랏소, 알데미지아. 젠디레스키, 유딧트.라스텔, 아데라이트.라비-유=기알, 안게리카.카프만, 로-자.보눌, 베르트.모리죠, 메아리.카삿드, 슈쟌느.뷔라돈, 레오놀.휘이니, 베랫드. 오펜하임, 마리솔.에코스발, 에바.헷세,메아리.케아리등, 현대에 이르는 수 많은 여성 아-디스트들의 작품과 활동이 상세히 다루어저 있다. 그녀들의 작품을 자사하게 분석함으로써, 여성 아-트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되푸리해 왔던 [여자 다움]이라고 하는 스트레오 타잎적 비평이 부각되었었다. 그리고 이는 어디까지나 여성 아-티스트의 역사가 아니고, [여와 아-트와 이데올로기의 상호관계를 분석한 것이다]라고 언급된다. 1981년의 [시선과 차이-훼미니즘로 읽는 미술사]에서도 제작측에 서 있는 여성의 연구란 시점은 바뀌지 않았다. 예를 들어, 메아리.카사트와 벨트.모리죠를 중심으로 그녀들의 작품을 19세기후반의 근대도시 파리-의 사회배경 속에서 조명하고 [여성적인 것]라고 하는 말 자체에, 계급적함의가 깔려 있음을 의론시 하고, [휘미니스트에 의한 개입이 단순한 여성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계급이나 인종의 문제와 관련되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인상파를 특징 짖는 [현대생활]을 그린 회화가, 성을 둘려 싼 제 문제와 관계있는 것으로 지적함으로써, 모더니트의 미술사관의 경향을 지적하고 있는 점은 특별히 흥미롭다. 특히 이 저작에서는, 라파엘 전파가 그린 [기호로써의 여자]의 문제를 정신분석적 해석을 통해 논하고 있는 데, 이는, 최근의 보록에 현저한 아프로치의 하나로 되 있다. 어떻턴, 보록의 언설의 매력은 스스로 언급하고 있듯이, 여성의 역사를 불평등에 대한 투쟁으로써 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여성이 여성임으로 해서 겪는 곤란한 상황을 어떻게 이겨 나왔나를 문제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훼미니즘의 사상은 어떻턴 탁상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사상이 되지 않으면 안됨으로 실제 보록의 경우도 실천자로써 70년대의 훼미니스트. 아-트에 관해 언급할뿐 아니라, 가지 각색의 여성들의 예술활동의 場의 설립을 위해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갔다. [브리팃시.훼미니스트.아트.앤드. 히스토리즈. 넷위크]의 설립을 위해 공헌한 점도 그 하나의 예증이라 할 수 있다. 보록의 새로운 규범, 파라다임의 모색에 대한 의지는 이렇게 하여 저작과 활동의 양면에서 아직도 확실하게 전개해 가고 있다. 허나 그 난해한 문장이나 뒤섞인 이론의 전개등은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미니스트의 視点에 의한 미술사라던가, 갱신미술사가 흔히 빠지기 쉬운 측면에도 세심한 주의를 해 가면서, 미술사의 틀을 넘으선 장대한 파라다임의 제안에 도전하는 보록의 자세에서는 많은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다.
1378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2772 2016-12-02
9. 데오돌. 아도르노 (Theodor W. Adorno) 資本主義下의 文化批判의 先驅者 轟然하게 돌아 가는 메루쉬트램의 소용돌이 속으로 삼켜지는 漁師의 체험이던가, 部下의 귀를 막고 스스로 帆柱에 묶으면서 세이렌들의 위험한 유혹을 벗어 났던 오딧세스의 僞計라 해도, 아도르노가 市民主體의 경험을 그려내기 위해 들고 나온 나라티브는, 어느것도, 지금은 불가사의하게, 아드르노자신의 수용상황을 그려 내는데 어울리는 것으로 사료된다. 먼저 외면적인 수준에서 반드시 거론되는 택스트의 뜹뜰함과 논리의 역설적인 구성, 그 안에서 내용으로 간신히 축출해 낸 同一性支配로부터의 유-토피어적 救濟의 圖式, [아우스뷧치 以後]의 모-든 지식인과 예술인에 대한 도의적 부채의 요청, 쟈-즈를 위시하여 대중문화에 대한 경직된 태도, 하이데카나 아렌트, 쇼렘와의 言及關係에 있어, 논리와 怨恨의 混融, 이러한 것으로부터 이루어진 言說의 磁場은, 이론적 관심보담은 휠씬 에모셜한 환기력으로 우리들을 그 영역속으로 끌어 넣고, 배들에 대한 조류의 저 압도적인 위력을 갖고 집어 샘키려는듯 하며, 혹은 그 유혹적인 歡聲으로 우리들을 끌어 당겨 죽어 버릴려고 하는 듯 하다. 대저 20세기의 미술비평을 대표하는 사상가의 한 사람으로써 아도르노를 든다는 것 자체에 의문을 갖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그의 비평의 本領은 음악이나 문학의 영역에서 발휘되는 것으로 미술비평 자체에 대해서는 그가 직접 자극을 주는 일은 없었다. 허나 문화를 둘려싼 20세기의 언설전체에 대해 그의 사상이 주는 영향에는 심대한 바 가 있다. 그 영향력의 보다 구체적인 가능성을 잡아 보기에는, 그러나 [미메시스]나 [비동일성]이라고 하는 아도르노讀解의 쟈-곤(jargon)에 대해서도, 우수에 찬 비관적지식인이라고 하는 이미지에 대해서도, 일단 우리들의 귀를 초로 막고, 漏斗狀의 소용돌이의 안쪽을 떠 내려 가면서도 기묘한 호기심으로 중대한 관찰을 해 냈던 漁師를 닮고, 사태에 대해 깨어 있는 관찰의 눈을 돌리는 것이 필요하다. 아도르노의 언설에서 사람을 냉정하게 두지 못하게 하는 최대의 요인은, <진보>와 <반동>의 대비에 입각한 독특한 道義的 고발의 가락이다. 억압이나 현상긍정의 계기와 비판적 해방과의 긴장관계를 탐색하면서 곤란한 해결을 희구하는 바로 그 가락을 갖고서 그는 오늘날에도 누구도 그 맺음을 묘색하지 않는 큰 대비관계(그자신은 변증법적관계라 부르겠지만)를 탐구했던 것이다. 도데체 그의 이후 누가 슌베르그와 루이.암스토롱에 대해 동일한 이론적 척도를 적용하여 어느것이나 반동적인 것이다라고 논할려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 이후 누가 문화의 총체를 전시하의 대량학살의 야만과 [공범관계]에서, 말하자면 어떤 필연적인 결합에 있어, 폭로하려고 했갰는가. 전자의 시도는, 아도르느를 하이.칼추어의 진정성에 고집하는 전형으로써 야유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고, 후자는 그를 독일관념론 최후의 양심의 대사상가로 영웅화했다. 그 어느 것도, 시민사회의 이상상으로부터 낙차에 의해 문화의 현상을 단죄하는, 좋은 의미에서나 나쁜 의미에서나, 고풍스러운 그의 사고의 스타일에서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우리들의 관찰점은, 지금이야말로 역사에 의해 대 소용돌이의 외연을 직시하게 하는 위치로 밀려 나가게 하는지도 모른다. 실은, 아도르노의 스타일을 고풍스렵게 보이게 한 것은, 그 이후, 하이.아-트와 사브칼처등이, 또는 문화일반과 야만이라던가, 몰가치적으로 애매하게 공존해 왔던 상황이 였던것이 아니였을까. 이러한 상황을 단순히 아메리칸 웨이 오브 라이프(미국식 생활 방식) 의 세계페권의 時期로써 본다면, 사태는 달리 보이게 되지 않을 까. 아도르노는 미국이 초대국으로 발흥하던 시기에 그 문화적 변영의 상징이기도 했던 허리웃에, 유대인 궤멸의 국가구상을 실행했던 독일의 암울한 기억과 더불어 옮겨 와서 살았다. 복제와 소비와 오락에 있어 세계의 최첨단에 놓였던 로스엔젤르스에, 전래의 예술전통이 섬세와 농후의 극치로 숙성해 갔던 직후의 윈(Vienna)의 기억과 더불어 옮겨 왔었다. 20세기 전반에 있어 아마도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二極間의 이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새로운 문화의 형태에 거부반응을 보이고, 기괴할 정도로 공격적인 대중문화비판을 행했던 것은, 무리가 아니 였을것이다. 그러나 그가 암담한 기분으로 그 등장을 바라 보던 새로운 세계시스템이, 인류전체를 번영과 행복의 환상속으로 영구히 덮허 시울수 없고, 또 그럴수 없다는 것이, 지금에 와서 더욱 선명해 젔다. 그런 상황속에서 萌芽期의 고도소비사회로 향했던 아도르노의 문화비판은 자본주의시스템에 대한 實直한 抵抗의 선례로 다시 읽으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도르노의 비판의 가능성을 보다 직접적. 구체적으로 뽑아 내려면, 우리들의 시야를 한정시키고 1930년대의 벤야민과의 매우 생산적인 공동작업의 시기에 초점을 맞추워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시간적 계기를 강진한 변증법적논리로 처리하는 아도르노의 사고와, 공간적대비의 선명함을 통해 예상치 못했던 몽타-쥬의 사고를 가능케 하는 벤야민의 사고의 풍성한 영향관계는 두사람의 왕복서간과 당시의 논문의 교정과정과 더불어 자세하게 살펴 볼 수 있다. 그래서 아도르노가 라구로나 뷔리에=드=리라단에 관해 가르키고, 벤야민이 호크너나 벨빌에 관해 가르킨다는 서간속의 자세한 逸話는 두사람이 행복한 공동작업을 이어 갔다면 이루웠을 작업의 크기에 대해 우리들의 역사적 상상력을 크게 자극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미국에 망명한 이후의 아도르노는, 30년대에 보였던 유연성을 그 비판으로부터 빼았겨, 숨막히는 사색에 묵묵히 전념하게 된다. 이 고독한 집필에서는 20세기비평전반에 대한 그의 또 하나의 공헌이 이루어젔다. 비평언어로서의 엣쎄이의 스타일이 태어 나기도 했다. 그러나 변화무상한 현실에 대한 변증법적비평의 살아 있는 적용은 오히려 그의 사후, 프레디릭.제임슨과 같은 비평가에 의해 계승되어 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도르노를 실망시키고, 이내 고독한 사색활동에로 침잔시킨 미국문화의 토양에서 그 제임슨의 예민한 비평이 나타 났던 것을, 우리들은 역사의 익살로 불려야 할지, 아니면, 辨證法的展開로 불려야 할지.
1377 no image [20세기의 미술과 사상] 씨리즈
3241 2016-11-24
8. 이브=알란.보와 (Yve-Alain Bois) 모더니즘이 抑壓해 왔던 表象시스템을 分析하다 약간 편견일런지는 모르나, 이브-알란.보와 만큼, 근래에 들어 와서, 특히 일본에서 유행으로 치부되는 비평가도 없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일본어로 된 역서가 아직 충분히 나오지 않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는 어느 특정한 방법론이 팻션(fashion)으로 떨어저 가는 것에 강한 경고를 발했던 보와 에게, 적지 않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일 것이다. 허나 모더니즘을 비판적으로 극복한 위에 포마리즘을 심화시켜 그 가능성을 추구하려는 자에게는, 아마도 로쟈린드.크라우스나 마이켈.프리드와 더불어 알맞는 길잡이 역을 하고 있는 것이 그의 제 논고임을 부정할 수 없다. 보와의 의론을 약간은 외소화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그의 관심은 무엇 보담 작품의 [됨됨]을 분석하는 것이며, 물론 그것은 습작에서 완성작으로 이르는 한길을 명료하게 그려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직선적으로 진행해 가는 이야기에 대한 통렬한 반박이다. 실제, 그가 마티스 작품을 두고 전개해 온 이론은, 작품이 성립하는 즈음의 전진이나 후퇴라 볼 수 없는 錯綜된 蛇行을 또렷하게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보와에 의하면, 마티스의 두개의 유채화, <豪奢, 靜逸, 逸樂>과 <생의 기쁨>은, 그 작품의 실현이란 점에서 본다면, 아연히 다른 것으로 되 있다. 한쪽이 신인상주의로부터 배운 점묘법으로 그려저 있고, 다른 쪽은 약간의 색면을 조합하는 것으로 구성되 있다는, 표면적인 기법적 내지 양식적 차이의 문제가 아니다. 작품이 성립되어저 있는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른것이다. 작가의 마음속의 이미지가 몇 개의 예비적 습작을 거치면서 서서히 명확한 형상을 부여 받고 있으며, 하나의 완성작으로 결실해 가는 이야기로써 기술해 간 것이 <호사, 정일, 일락> 이였던것에 비해, (이 작품에는 배후만을 그린 에스키스나 인물만 다룬 습작이 남아 있다), <생의 기쁨>은, 실제의 작화라고 하는 작업과정에서, 작자가 작품과 대치하며 격투하는 것으로, 상념과 형상이 동시에 하나의 착지점에 내려 앉는 것과 같엤다. 후자에서는, 전제로써의 심중의 이미지가 미리 부정되고, 파기되 버리고 있는 것이다. 마티스가 <생의 환희>에서 이루었던 것이 그런것이었다면, 이는 단순히 제작과정의 변화로 이해해 버릴 수 있는 사태는 아니지 않을까. 보와는 마티스의 색체의 문제로 이런 의론을 전개하였지만, 그기에 멈추지 않고, 이는 또한 서양에서의 표상의 문제에 혁명적인 전환을 초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서양에서는 고대 희랍이래, 표상은 줄곧 心的이미지와 불가분으로 묶어저 있어, 이것과의 대응관계에서 회화도 다루어저 왔었다. 그럼으로 해서 현실의 사물을 보는 데서 얻는 지각상과 회화를 봄으로써 얻는 지각상간의 구별이 힘드는 회화가 그 사실성을 획득하는 목적론적인 發展史, 進步史만으로, 서양미술사를 엮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티스는 이 연결고리를 끊음으로써 스스로의 작품의 표상의 기반 뿐만 아니라, 서양에 있어 표상시스템 자체를 크게 전환시키는 것이 된다. 보와의 의론은 이와 같이 작품의 표면상의 형식의 배후에 들어가 이면에서부터 이를 지지하고 있는 표상시스템의 구조를 줄곧 선명하게 前景化시켜 보여 준다. 같은 일이, 미술을 둘려싸서 무비판적으로 다용되고 있는 [영향]이라고 하는 말이 갖고 있는 문제에도 해당된다. 마티스의 <생의 기쁨>을, 그것이 아-고스티노-.카랏찌의 판화를 전거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보이는 데서(그것은 그것데로 중요한 발굴이라 해도), 작품의 표상으로써의 내실에, 얼마만큼 접근할 수 있을 까. 같은 의미에서, 마티스의 어느 작품에 피카소등의 영향을 지적하고, 차용원이라 내 세우드라도, 그것은 이쪽에서 저쪽으로의 직선적인 진행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화가의 작품과 또 다른 화가의 작품간의 관계성은, 그러한 일방통행적 수동적 연결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보와는 그런 단순한 인과론적 사고를, 미하엘.바푸친이나 하롤드.부름-, 누네.지랄등의 문학이론가들의 성과를 응용하여 대화적인 교환으로 치환하여, 둘의 서로 다른 작가에 의한 작품을 잇는 사이의 택스트적인 관계로 잡아 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마티스와 피카소에는, 서로의 대화나 응답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이 께 많이 있다. 때로는 보기에도 놀랄만큼 완벽하게 모방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의 작품을 억지로 구겨버리기도 하고 혹은 야유하기도 하며 [대갚음]을 안겨준다는 식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능동적인 것이었다. 더욱이 그 대화적 관계는 승하로 향하는 변증법적인 전진운동은 물론 아니고 오히려 [체스 게임]와 같은, 순간 순간 제빠른 대응뿐만 아니라 게임이 요구하는 아주 긴 시간의 지속 속에서 과거 역시 그때 그때 소환되 나온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기서는 어느 한수=작품에 대해 수십년의 시간이 경과한 한수=작품을 부딛쳐 보는 일이도 가능해 지며, 전진이나 후퇴 모두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죨즈.바타유로부터 빌리고 그가 크라우스와 더불어 구축해 온 [안.포름(부정형)]에 관해서도, 작품의 됨됨의 구조에의 새로운 인식을 안겨준 개념이라 말할 것이다. 그것은 모더니즘이 금과옥조로 삼아 온 순수한 형식(포름)이라 하는 개념(과 그것에 줄곧 차의 양바퀴와 같이 대치되어 오던 주제라는 개념)을, 전적으로 무화시키는 것이었다. 순수한 형식으로 완결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어떤 특정한 주제속으로 회수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들에게 공격을 가하면서 그기서부터 벗어 나오는 것. 카데콜리칼(범주화)한 개념이 아니고 혹종의 [작동operation]이 작품안에서 일어 나는 동적인 양상을 겨냥한 것이 [안 포름]이다. 모더니즘이 억압해 왔던 바로 표상시스템을 분석해 보이는 보와의 의론은 표상으로써의 작품의 다이나믹한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l 여기에 실려 있는 구절은 곧 바로 동양의 [바둑]의 두는 원리와 너무나 닮아 있다. [20세기의 미술과 사상]씨리즈로 옮기는 글의 원본은, 일본의 [미술수첩]편집부가 2002년 별책으로 발행해 낸 동명의 책을 번역하는 것이다. 번역자: 조규현. 略歷: 알제리 생. 하-버드대학 교수(근대미술사). 마티스.피카소부터 20세기미술에 관한 폭 넓은 연구. 94-95년 해-그, 와싱톤,뉴-욕를 순회한 몬드리언회고전을 공동기획하고, 96년에는 로쟈린드.크라우스 와 퐁퓨-트.센터에서 개최한 [안 포름: 유-자즈.가이드]전을 기획함. 이외도 바넷.누-먼의 카다로그 레조네 의 제작에 가담. 主著: [마티스와 피카소] [Painting as Model] [I’nforme; mode d’employ] [L’aveuglement” Matisse 1904-1917] [Iconoslast, Piet Mondrian]등 다수.
1376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2838 2016-11-20
7. 폴. 크라우저(Paul Crowther) 포스트 모던 시대에 작품의 美的價値論 蘇生시킴 포스트 모던이란 시대에서 ‘뉴 아트 히스토리’ 나 ‘컬추럴 스테이트스’의 융성을 옆눈으로 보면서, 그러나, 크라우저는 일관하여 포마리즘의 관점을 현대적으로 수정하고 소생시키는 흐름에 이어저 간다. 그의 최초의 저서는 [칸트적 崇高](1989)이다. 리오탈이 포스트 모던의 특징을 말하기 위해 [미]와 대립하는 개념으로 내 세웠던 [崇高]를 들고 나온 이래, 포스트 모던 사이에는 일종의 [숭고론 르네상스]라 불릴 유행현상이 보였지만, 크라우저는 이들을 아전인수적인 것이라 일축한다. 칸트의 초기 논문[미와 숭고의 감정에 대한 고찰]부터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과 칸트 자신의 발걸음을 따라가면서 크라우저는 감성과 이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인간에게, 이성의 우위의 자각이 숭고의 감정에 깊이 관계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칸트는 예술에서가 아니고 주로 자연을 대상으로 이 이론을 전개했었는데, 크라우저는 이를 예술에 적용시킨다. 압도적인 인상을 주는 작품은 여러가지 차원에서 이성과 관계되는 영역을 끌어 내기 때문이다. 칸트가 예술을 문제시 할 때는, 작품의 만드는 측의 능력인 [천재]의 개념이 개입되는 것이며 작품에 [天才]가 여하히 표출되어 있는가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인위를 초월한 듯한 기량이나 예술가의 개성의 표출의 모양, 그리고 주제내용에 보편적인 진리를 다룰 경우 이를 예술가가 여하히 형태화하는가 라고 하는 표현방법의 탁월함 등이다. 특필할것은, 포스트모던의 숭고론의 대부분이 바-크적인 [不快]와 관련을 중시한 반면, 크라우저는 숭고 역시 미술판단의 한 형태란 점을 강조한 점일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숭고론]을 [천재] 개념과 함께 보는 것으로 하여, 이는 모-든 예술에 적응 가능한 것으로, 특수한 포스트 모더니스트의 작품군의 성질이 되지 못한다. 칸트미학을 동시대의 예술에도 적용시킬 수 있는 소지가 여기서 세워지는 것이다. 이를 받아, 1993년의 [비판적미학과 포스트 모더니즘]에서는 [천재]에 관한 칸트 자신의 기술속에, 실은 [미술사]의 중요성이 언급되어 있었다, 라고 하는 다소 强引한 해석이 披露된다. 진정한 천재라면, 미술의 역사를 참조하여 자신의 역사상의 위치를 작품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예술작품의 감동의 원천이 되는 [미적이념]은 칸트에 의하면 [구상력]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예술에는 인간의 知覺이나 經緯자체를 좌우하는 힘이 있다, 라고 크라우저는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서 칸트미학은 미술사로, 또는 인간의 일상의 지각의 방식과 연계되면서, 열려저 간다. 그리고 더욱 이 지각의 문제를 강화하여 인간의 신체성에 까지 넓혀 나가며 독자의 새로운 비판미학을 수립하기 위해 메르르.폰티에 의거하게 되는 것이다. 칸트와 메르를.폰티를 기둥으로 하여 더욱 외적인 요인과 예술을 연결시키며 모던이나 포스트모던에도, 아니, 모-든 시대의 모든 예술에 대응하기 위해 많은 사상가들의 언설이 검증되고, 수정되어 간다. 예를 들면, 현대사회의 자본주의적공업화, 사진이나 영화등의 복제기술의 등장으로 인해 [아우라]의 경험이 상실되어 간다고 말한 벤야민. 그 경험이 더 나아가서 매스. 미디어에 의한 情報犯란으로 극단적으로 비대해 진 포스트 모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리얼리티가 없는 [슈밀러쿨러]로서만이 경험될 수 없다고 주장한 보드리.야-르. 이들은 메르를.폰티 경유로 물질적인 신체를 갖고 있는 인간의, 세계와의 맺는 방식, 지각의 변용의 문제가 되어, 이렇게 하여 포스트.모던의 현상 조차 크라우저의 비판미학의 응용범위속으로 끌려 들어 간다. 이리하여 포스트.모던의 예술의 논리는 모더니즘와는 전혀 다른 이질이라 간주하는 모든 포스트.모더니스트의 견해를 거절하고, 크라우저는 근저에 불변의 로직(논리)을 세우는 가능성을 항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다욱이 동년출판의 [예술과 具體—미학에서 자기인식으로]에서, 이것이 심화된다. 인간은 신체를 기반으로 하여, 말하자면, 개개의 특수한 [체]를 [갖춘] 존재로써 세계와 상관되면서 경험적으로 모-든 지각적 인식을 습득하고 동시에 자기에 관한 인식도 전지각을 통합하는 것으로 형성되 가는 바, 이 세계와 신체의 상호관계에서 얻어진 자기인식의 됨됨이, 이번에는 예술작품으로 [체]를 [갖추고] 구체화되어 간다. 이와 같은 예술작품을 관조하는 것은, 인간의 세계인식과 자기인식에 매우 큰 이득을 안겨 줄것이다. 이렇게 예술의 창조와 수용에서, 사람은 세계와의 풍성한 관계를 기르는 것이다. 그리고 기읏코, 1997년의 [20세기예술의 언어]에서는, 예술작품의 個的 특수성과 그 미적 가치에 착안한 모더니스트들의 포-마리즘와, 과도하게 기호론적 접근을 보인 포스트모던이스트의 예술론 사이의 [협의/화해]가 선언된다. 20세기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신체와 세계와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예를 들면서 해설해 가는데, 더욱 예술작품의 미적 가치가, 어떤 시스템로 창조자로부터 수용자에게 이어저 가며 미술사등이 형성되 가는가를 논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번에 크라우저-가 원용하는 것이, 쟉크.데리다의 [반복가능성]이란 개념이다. 데리다는, 에크치엘 뿐만 아니라 생의 충실을 갖춘 파-롤에서도 [반복가능성]을 인정했다. 즉 [지금 여기서] 발화된 특수한 주체의 현전성이나, 그것의 오리지널.콘텍스트가 소실된 이후에도 언어표현의 기본적인 기능은 보지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 인간개인의 신체와 예술작품의 특수성, 그리고 그 일회성적 조우에 의한 해석의 특수성을 넘어 작품의 보편적인 미적측면이 영속하고 [역사]를 형성해 가는 시스템의 설명에 응용되 가는 것이다. 略歷: 영국. 옥스포-드의 보리올 대학의 철학, 세인트 앤듀류스 대학의 미술사, 옥스포-드대학의 미술사 강의를 담당하여, 칸트철학, 미학을 기초로 한 포스트모던니즘에 관하여 교편을 잡았다. 센트럴.란카샤대학, 윤리전문센터의 철학과 교수를 거처 2002년도부터 브레밍국제대학예술학교수에 취임. 主著: The Kanitan Sublime: From Morality to Art. Critical Aesthetics and Postmodernism. Art and Embodiment. The Language of Twentieth Century Art. 編著書: New Art from Eastern Europe: Conflict and Idendity, Art and Design Profile. The Contemporary Sublime; Sensibilities of Trancendance and Shock, Art and Design Profile.
1375 no image [20세기의 미술과 사상] 씨리즈
2907 2016-11-17
6. 폴.뷔릴리오(Paul Virillio) 情報文明이 초래한 否定的側面을 고발한다 왜 뷔리리오를 읽는가? 제정신으로 돌아 오기 위해서다. 허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은 狂氣란 말인가? 그렇치는 않다. 리얼타임로 배송되는 방대한 정보 속에 사로잡혀 나날을 보내는 우리들은 [세상은 요지경이다]라고 중얼거린다. 여기서 알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살아 가고 있는 세상은 광기 그 자체는 아니지 않는가. 허지만, 그건 광기보담 더 하는 것, 바로 痲痺狀態 일 것이다. 이 마비를 초래한 것은 그것은 정보화의 過剩이다. 정보화는 지금 이 지점에 서서 세계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상황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물론 [진보]이며, 생활이나 일을 말할 수 없이 효율적으로 만들어 준다. 허나,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모-든 것을 순시에 알 수 있다는 상황이란, 지식과 신체. 행위간의 상관이 상실된다는 것을 의미 할 것이다. 고도로 발달된 정보환경속에서, 알려진 사물의 의미의 중심은 腐蝕해 간다는 것을, 지식이 간단히 손에 들어 오면 올수록 지식은 범용해 저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점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눈치 챈다]는 행위는 自明하게 보이던 세계의 골조에 구멍이나 쪼개진 틈을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완성된 정보공간 안에서는 모-든 것이 – 섹스나 잔학행위와 같은, 한때는 충격적이었던 것 조차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으로 변해버린다. 모-든 것을 디다 볼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 그러한 상황이 마비작용을 불려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知的世界의 전 영역에도 미친다. 일례를 든다면, 20세기의 중요한 토핔, 중요인물을 열사람, 50명, 혹은 백사람을 들 수는 있다. 이들 각각에 관해서 한권의 책을 쓸수도 있다. 몇페이지로 된 개관을 만들 수도 있다. 데이터 베이스는 어디서든지 존재하며 이를 이용한다면 임의 길이의 택스트를 생산할 수 있고, 편집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지식을 콤팩트하게 압축한 모양으로 볼 수 있도록 제시할 수 있다. 이는 과연 나쁜짓인가? 아니다, 그것은 조금도 나쁜짓이 아니다. 허나 그것은 마냥 침묵을 만들어 낼 뿐이다. 정보가 과부족없이 제시되면,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어 저 버리는 것이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을 미술인이나 인문과학의 젊은 학생들은 [나에게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우선 마뉴얼나 키워드집으로 기초를 다져둔다] 라고 소박하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한 정보는 레포-트에서 A룰 취득하기 위해서는 유효할런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그 앞은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총체화된 정보에는 否定性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정성이란, 데칼트의 회의와 같은 것, 공인된 세게를 전체적인 것으로 거절할 수 있는 사고의 힘이다. 부정성이란 직접 어떤 일을 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냥 우리들을 매료할 뿐이다. 상식을 부정한다는 것, 일상적인 현실을 마비된 것 혹은 作術로 간주하는 것—사상서를 읽는 것은, 그러한 경험에 매료당하기 때문이다. 폴.뷔리리오는, 우리들의 일상적 현실을 만들어 내고 있는 정보테크노로지가, 세계를 어떻게 변화해 버렸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보화에 관해 보통은 긍정적 가치를 부여해 놓은 모든 것의 측면에 대해 뷜리리오는 否定을 들고 나온다. 많은 사람이 정보화에 의해 무엇이 얻으젔는가에 대해 논의하는 데 그는 정보화에 의해 무엇을 잃었는가에 대해 우리들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20세기의 위대한 성취라 불리는—수송.통신테크노로지의 발달에 의해 만들어진 그로벌리제이선이, 전자 넷워크가 가능케한 리얼타임의 쌍방향적 콤니케이선 – 이들과 함께 잃어 버린 것은 무엇일까. [비행기가 초음속을 실현한 이래, 대양, 세계의 모든 대양이 그 가치를 상실해 버렸다] 라고 뷜리리오는 말한다. 한때 오랜 시간을 들였던 여행을 통해 신체의 운동과 이어짐으로써 의미를 갖고 있었던 대양은,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단지 바다의 펑펑한 ‘퍼짐’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시속 천킬로로 공간을 이동하는 비행시간의 무의미성을 떠 올려 보면 될것이다. 그기서는 어떻게 시간을 쾨적하게 보낼 수 있는가 만이 문제가 된다. 수송테크노로지에 의해 인류는 거리를 극복하고 공간을 정복하였다. 허나, 이것이 동시에 공간의 무의미화를 초래한것이다. 電子테크노로지는 더욱 빠른 속도로 지구상의 모-든 장소를 잇고 고유의 시간. 공간이란 제약에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놓았다. 그 결과, 어떠한 장소에서도 가능한 세계동시성, 리얼타임의 정보환경이 성립해 가고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행위나 행동이 갖고 있었던 공동화된다. [우리들은 우리와 목표간에 놓여 있는 [행동]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의 가치를 상실하고, 즉시적인 [상호작용]만이 가치가 있는 것 같이 생각하게 된다]. 인터락선(interaction)은 액선 즉 행동을 疎外하고, 인간을 마냥 반응하는 존재로 만들어간다. 테크노로지가 세계의 공간을 축소하여 무의미화하고, 살아 있는 신체와 행위의 의미를 소외하고 – 이와 같이 기술하면, 뷜리리오의 사상이란, 결국 반문명적인 패시미즘가 아닌가, 할런지 모른다. 그는 정보화사회의 지나침이나 굴절상을 적당히 지적한 사람으로 보도록 하자. IT어용철학자는 아니다. 그의 사상은 정보문명이 갖고 있는 근본적, 원론적인 부정적인 측면을 자각하도록 해 준다. 뷜리리오思想의 핵심은 바로 그런점에서 철저하다는 데 있다. 그리고 역설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실랄한 비판을 통해 현대의 미디어나 테크노로지의 모습이,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 나온다는 사실이다. 뷜리리오는 반테크노로지적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테크노로지에 매료되어 있으며, 패시미즘라 부르기에는 그 문체는 기운이 가득 차 있다. 뷜리리오에 의해 논의되고 있는 현대문명의 양상은 무서운 것이나, 동시에 그것은, 뷜리리로를 이해 하지 않고 테크노로지의 소박한 예찬자가 말하고 있는 김빠진 풍경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며, 비교가 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며 신선한 것이다. 그것이 야 말로 비판적사고가 갖는 각성작용, 우리들을 옳바른 정신으로 되돌려 주는 힘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IT]라고 부르는 명칭의, 총통없는 파시즘가 지배하는 일본의 정보문화에서 완전히 결략 해 있는 것이다. 略曆: 1932년생. 15세때 연합군에 의한 난토 폭격을 경험. 스탠드그라스작가가 되기 위해 파리의 공예학교에 들어 가서 야간에는 솔본느에서 철학강의를 청강. 75년 파리건축전문학교 교장. 휘에릭스.카다리와 더불어 자유방송[라디오 토마도]를 창설하고, 가리레-출판사로부터 [비판공간] 코렉선을 주제. 한편 주거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후생복지를 정비하는 활동에 종사함. 스스로 철학자가 아니라 [도시계획자]라 규정함. 主著: [속도와 정치] [전뇌세계-최악의 시나리오에의 대응] [순수전쟁] [정보화爆彈] [전쟁과 영화 – 지각의 병참술] [환멸에의 전략 – 그로벌 정보지배와 경찰화되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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