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전원길 칼럼입니다.
조회 수 : 3949
2007.06.05 (13: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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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_만남을 찾아서 심포지엄을 보고(최 선) (2003.11.3)

전원길 옮김  

2004/2/20 (23:15)

이우환_만남을 찾아서 심포지엄을 보고


                                               최   선 (작가)



무너진 기대

지난 10월 23일 삼성미술관과 삼성생명 그리고 중앙일보의 주최로 최근 호암갤러리와 로댕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우환의 전시회에 따른 학술행사가 열렸다. 학술행사의 자리를 위해 국내 대학의 저명한 학자들이 발제와 질의를 마련한다고 해서 내심 공부할 좋은 기회라고 여겨져 일찌감치 예약을 하고 시간을 내어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 유명한 분들의 발제와 질의가 미술작품의 동기와 제작의 이해조차 없는 것이어서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학자적 자존심을 뒤로하고 스스로 준비가 소홀해서 죄송하다는 무책임한 발언을 연거푸 내뱉는 발제자와 이해의 차원을 떠나서 알아듣기조차 힘든 발성으로 말하는 발제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던 것은 여간 곤혹스런 일이 아니었다.

현대미술을 현대미술이게 만드는 수많은 동기들이 있을진대, 그러한 동기들과 그 주변맥락의 이해와 그 동기를 통해 만들어진 '미술작품'이 보여주는 또 다른 가치를 살피기보다는, 방법론적 오해와 형태적 유사성을 들어 작품의 맥락을 오독誤讀하고 함부로 재단하는 비평의 오류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미술현장의 프로세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발제자 자신들의 지적 한계의 틀로써만 해석하고 재단하려 드는가 하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해내고 담론을 형성해 가는 미술비평의 순기능에 역행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것 같았다.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이 땅의 미술비평과 이론의 현장이 얼마나 한심한 수준에 있는지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또한 대중에 대한 현대미술의 이해를 도와야만 하는 책임이 있음에도 발제를 사전에 비평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학술행사를 진행한 삼성미술관측의 무책임한 모습 또한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발제내용에 대한 검증은 고사하고서라도 오 · 탈자나 아예 페이지가 빠진 발제문을 들고서 양해를 구하는 사회자의 비굴한 모습이 바로 이 시대, 이 땅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미술관의 위상이란 말인가?

전시회를 기해 학술행사를 갖는 이유는 아마도 한 작가의 시대적 경험을 통해 문제의식과 그 대안, 그리고 그러한 대안의 표상물로 드러난 작품을 통해 이 시대의 새로운 가치는 무엇일 수 있는지를 살펴보며 새로운 담론을 형성해 가자는 데에 있었을 것이다. 이번 학술행사도 그러한 목적의식을 바탕으로 발제와 토론이 진행되리라 기대했지만, 정작 삼성미술관의 학술행사가 보여준 행태는 내용적 빈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준비에서조차 소홀한 것 같아 매우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발제에 관하여

첫 번째 발제를 맡은 김미경 교수는 한국 현대미술과 이우환의 영향관계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며 그 동안 한국현대미술의 전개에 얽힌 이우환의 오해를 독자들에게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특별히 무리가 없었다고 보여진다. 특히, 다른 이해를 돕기에 풍부한 도판자료와 보충설명을 곁들여 성실한 발제준비의 모습을 보였다고 하겠다.

하지만,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이인범 교수는 부정확하고 속도조절이 안된 발음으로 발제에 앞서 자신의 발제준비가 소홀했음을 먼저 고백했으나, 그 고백이 발제에 앞선 학자적 겸손의 표현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부터 발제가 끝나기를 기다리는데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했어야만 했다.

잘못된 띄어쓰기와 오탈자는 우선 그 내용에 앞서 공식적 학술행사에서 학자가 발표하는 글로서 명백히 불성실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질의응답 시간에 발제자가 질의자(김수현)의 질의서(묶음으로 묶이지 못하고 낱장으로 삽입되어 있음)를 미리 받아보지 못했다는 고백은, 역으로 자신의 발제준비가 뒤늦게 서둘러 이루어졌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발제준비를 서두른 만큼 그 내용 또한 참신함을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점에 있다. 그는 발제의 서론부분에 이르기를 "(이우환을) 어떤 울타리에 가두어 계보화하는 것 역시 그렇게 자명한 일만은 아니다"라고 발언하면서 이우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내 비출 것 같았으나 결국 글의 말미에 이르기까지 이우환과 일본현대미술의 관계에 대한 단순소개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소개 또한 발제자 자신의 관점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책, 남의 글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누가 무슨 말을 했고 어떤 일이 있었나하는 정도의 내용 소개에 그치고 말았다.

그의 글은 결국 자신의 이우환 읽기가 아닌 이우환과 일본현대미술의 거친 소개서 또는 초보적 리서치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인범 교수가 밝히고 있는 "일본미술과의 관계 속에 이우환의 예술을 제대로 읽어내려면 생애 전반, 아니 적어도 그가 등단한 이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와 주변의 대화 · 조응관계 속에 일어난 미세한 흔들림들을 잡아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필자로서는 벅찬 일이다."라는 이유 때문이라면 우리는 모두가 이우환 자신이 되거나 그만큼의 시간을 연구에 투자해야만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고, 그래야만 학술행사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모두가 이우환이 된들 그것이 또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지 모를 일이다. "미세한 흔들림을 잡아내야 할 것이다."는 문제를 앞두고 자신은 어떤 흔들림을 잡으려 했는지부터 묻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발제 전반에 걸쳐 자신이 생각하는 '미세한 흔들림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론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묻고 싶다. 접근 방법의 부재는 곧 논점 없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므로, 그의 글 속에서 두어 번 반복되는 "이우환을 속단해서는 안된다."는 논지의 언급은 자신의 발제 준비의 소홀과 지적 역량의 부재를 감추기 위한 일종의 방패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할 뿐이다. 결국, 글의 에필로그에 가서 "이상이 '이우환과 일본현대미술'이라는 숙제에 대한 필자의 스케치이다."라고 스스로 글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고자 하는 저의가 의심스럽다. 무엇 때문에 발제준비에 소홀했는지 알 수 없지만 다만, 자신의 시각이 없다면 학자로서 차라리 그런 자리에 나서지 말고 침묵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굳이 그러면서까지 발제를 수락한 이유가 무엇이며, 그런 발제를 통해 무엇을 얻고 있다는 말인가?

서론에서 이우환 읽기의 난점을 고백하고 그에 관한 속단을 주의하고자 하는 언급을 하면서 이우환의 일본미술 속 위상에 대한 치바 시게오千葉成夫와 미네무라 도시아끼峯村敏明 두 사람의 비평을 통해, 일본 비평계에 비추어진 이우환의 위상을 언급하고 있는 점도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발제문에 밝히고 있는 작년 이맘때의 한 세미나(ICAS주최 "한국현대미술다시 읽기Ⅲ 2차 세미나(2002. 11. 23 - 홍익대학교 K동 103호)"에서 이인범 교수가 사회를 맡아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세미나에서 치바 시게오와 미네무라 도시아끼가 직접 발제자로 나섰는데 그때의 그 둘 비평가의 모습이 인상 깊어서인지 발제문에 두 비평가의 입장을 거론하고 있었다. 그러나 앞서 인용에 사용한 치바 시게오의 "현대미술일탈사現代美術逸脫史"나 미네무라 도시아끼의 글이 서울현대미술연구소(ICAS)에서 출판된 "한국 현대미술다시읽기 Ⅲ-Vol.2(2003)"에 모두 언급되어 있음은 우연의 일치인가? 일본에는 이우환의 모노하론에 대한 입장 표명이 그 둘 비평가밖에는 다룰 사람이 없어서인지, 이미 책으로 출간되어 다루어진 비평가를 언급하기보다는 또 다른 비평을 다루어 보는 게 훨씬 참신한 발제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결국 발제에 앞서 준비가 소홀했음을 고백하던 모습이 겸손에서 비롯된 모습이 아니라 실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유사성 속의 큰 차이

세 번째 발제자로 나선 김정희 교수는 이우환 작품(주로 모노하 시기의 작품)을 논하면서, 제작방식에서 "인위적 구성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 만들어진 것이 아닌 듯하며," 등 이우환의 작품이 미니멀리즘에 대한 이해와 오해라고 주장했다. 이우환이 개념적으로는 미니멀리즘의 영향을 받았으나 개념과는 상치되는 제작방식, 즉 구성을 중시하는 제작방식을 따른다고 지적한다. 이는 미니멀리즘이 배제하려던 주요소임을 밝히고, 그가 미니멀리즘에 관해 오해를 빚은 것이라 결론 내린다. 말하자면 이우환이 미니멀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잘못 따라했다는 말이고, 반면 자신은 미니멀과 이우환의 오해를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언급을 통해 역으로 발제자가 미술작품과 그 제작이라는 미술현장에 대해 작가의 입장, 그리고 작가가 영향을 받는 과정을 얼마나 도식적이고 단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한다는 점은 참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우환이 스스로를 '장소적 미니멀리스트'라고 지칭하는 것은 그가 미니멀리즘을 극복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장소성'이 그 대안적 방법론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즉, 작품의 대상성(object-hood)을 빗겨 서서 인간의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속박에서 벗어나는 '열린 세계'를 제시하고자 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미니멀리즘과 커다란 담론의 차이를 보이는 점이다. 미니멀리스트들과 이우환은 작품 제작에 있어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개입의 방법이 전혀 다르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것은 예를 들어 미니멀리스트들이 작품제작을 공장에 의뢰하는 방식으로 제작을 거부한 반면, 이우환은 신체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전시회장 안의 안내 비디오에서도 보여주듯이 그는 '조응'이라는 작품제작을 위해 다른 종이 위에 크기가 비슷한 점을 찍어서 미리 캔버스 위에 놓아 본 후 완성된 구성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한다. 이것은 그가 작품을 '제작'한다는 사실은 물론, '만남'을 강조하는 그가 어째서 미리 다른 종이 위에 점을 찍어서 캔버스 이곳 저곳에 놓아보는 것인지 의아한 대목이었다. 그것은 혹시 바로 자신의 미학 또는 생각인 '만남'을 표상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작품을 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미학 또는 생각과 작품제작이 구분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 모든 점들은 미니멀리즘의 오해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니멀리즘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적 문제일 뿐이다.

철학과 미술이 같은 것이 아니라면, 이우환의 미학적 주장과 작품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우환의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것을 가리켜 김정희 교수는 "미니멀리즘 회화와 조각에서 배제하려던 주요소들이다."라고 언급, 이 점이 미니멀리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으나, 내가 보기엔 김정희 교수야말로 수많은 현대미술품 속에서 목격할 수 있는 유사성간의 너무나 큰 담론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유사성 속에서 발견되는 큰 차이가 사실상 다른 가치를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 즉 오늘날 현대미술 맥락 속에서 오리지널리티와 모방, 혹은 유사성의 문제를 미술의 Identity를 결정짓는 요소로 보고 있는 것 자체가 김정희 교수의 현대미술에 관한 이해의 수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 점은 이미 김정희 교수의 작가 안규철에 대한 비평과 서울현대미술연구소의 한국현대미술 다시읽기Ⅰ-2000년에서의 발제 등등에서 보여주었던 한계를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어서 실로 한심해 보인다.

김정희 교수가 자료로 제시한 슬라이드 중에서 첫 번째로 제시한 "흙바닥 위에 흩어져 있는 자갈과 돌 사이로 한쪽이 1/4정도쯤 잘려 분리된 직사각형 철판을 우연히 놓인 듯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한 슬라이드는 이우환의 미학이 어떤 식으로 작품화되는지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도판자료 자체가 이우환의 작품의 입장을 선명히 드러내고 있고, 오히려 현대미술 존재방식에 대한 발제자의 인식이 근대적, 물질적 시각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이우환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편협한 지식의 차원에서 작품의 가치를 재단하려 하는 비평의 오류가 얼마나 몽매한 짓인지를 우려하는 것이다. 김정희 교수는 이우환을 평가하기 위해 왜 미니멀리즘을 비교의 기준으로 삼아야 했는지, 또 왜 아르테포베라Arte Povera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지부터 설명해야 한다. 나는 발제자의 인식이 오히려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 혹은 신식민주의 사관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미술현장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한 작가의 회고전에 비판적 발제를 맡고 나서는 것이 우리 미술 이론계의 현실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뿐이다.

김정희 교수의 발제에 대한 질의자로 나선 김현숙(미술평론)씨는 질의의 끝에 "평소에 궁금했던 점인데, 이우환이 제시한 '만남의 장'에서 진짜 만남이 이루어져 왔는지가 궁금합니다."라는 질의를 던져 심포지엄장에 웃음을 던졌다. 그가 이우환의 만남과 그 '장소성'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장소성'을 돌에서 찾을 것인가, '철판'에서 찾을 것인가? 미술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이 땅의 최고권위의 미술관은 무엇을 하는가?

이번 심포지엄을 주최한 미술관은 제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는가? 심포지엄의 주최자인 삼성미술관은 그 재정적 규모나 여론형성의 역할에 있어서 명실공히 한국 최고 수준의 미술관으로 손꼽히고, 그래서 이번 이우환전과 같은 대규모의 전시회를 개최했겠지만, 과연 내용적 측면에서도 그런지는 의문이다. 우선 이번 심포지엄의 수준만 보아도 그렇다. 자신들이 야심만만하게 기획해서 만든 전시회를, 자신들이 지명한 발제자가 서구미술의 '아류'라고 몰아붙이는 웃지 못할 일을 돈 들여서 기획한 셈이 되었다. 과연 삼성미술관은 아류작가의 회고전을 그토록 거창하게 치르고 있다는 말인가?

비록 발제자가 원고마감 기한을 지키지 않아 발제의 내용을 사전 확인할 수 없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초보적 리서치 수준에 불과한 발제와 각도 없는 중구난방의 비평을, 자기모순의 부담을 안고 그대로 발표시킬 수밖에 없었을 만큼 무기력하고 非전문적이며 또한 불성실한 것이 아닌지 묻고 싶다. 최고의 권위를 지닌 미술관은 그 위상과 함께 그만큼의 대중적 책임도 크다고 생각한다. 기획단계에서부터 신중한 발제자 선정과 발제의 방향성 그리고 궁극적 목적과 진행의 방법에 이르기까지 발제자들과 어떤 사전 논의가 있기나 했었는지 의문스럽다. 그렇게 해서 진행되었던 심포지엄은 발제는 물론 질의와 토론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 자리에 시간과 돈을 들여 참석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것이야말로 무책임한 show가 아니가? 김정희 교수의 발언대로라면 서구의 아류, 사이비 작가를 위해 대대적인 회고전을 기획 · 홍보하고 학술심포지엄까지 열고 있는 삼성미술관보다 더 멍청한 미술관이 또 있겠는가? 또 값비싼 입장료를 지불하고 멀리서부터 전시회를 보러오는 수많은 감상자들은 또 뭐란 말인가? 신문과 잡지들, 그리고 다른 미술이론가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며, 독자들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기만당해도 좋다는 말인가? 미술관의 거창한 행사에 비해 과연 독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엇이며, 이런 행사를 통해 한국 미술계의 발전을 운운한다는 말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미술관의 전시는 단순히 생산된 미술품과의 작가의 유명세를 소비시켜 이윤을 챙기는 장사와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할 일이며, 그와 같은 노력 없이는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미술관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삼성미술관은 이 전시가 성공적 전시였다고 자화자찬만 하고 있을 것인가?



2003년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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