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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6 (19:4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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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센터의 특별전 ‘화가들의 천국’을 보고



지난 1월 11일,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화가들의 천국’이란 프랑스 국립 퐁피두센터 특별전을 보았다.
이번 특별전은 퐁피두센터 측에서 기획한 전시회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시회가 개최되는 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 미술문화, 그 중에서도 제도영역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나라를 대표하는 수도의 미술관이 개관이래 지난 수 년 동안 자체 기획력의 무능함을 입증하듯, 주로 유명 작가들이나 해외 유명 미술관 소장 작품 위주의 대형 전시회를 위해 장소를 빌려주는 정도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오히려 반문화적 질서를 고착화시키는 관행을 되풀이해왔기 때문이다. 전시 기획력이 관람자와 나아가 미술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고 볼 때 이러한 제도 영역의 부실함은 우리 미술계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반면에 이번 전시는 문화정치학적 역량을 축적해온 국제적 미술관에서 기획한 전시답게 최근에 본 전시회 중에서 주제는 물론 단위 작품의 선정과 배열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오류투성이의 국내의 대형 전시회에 비하면 질적인 측면에서 장소적 조건이 열악해 보일 정도로 짜임새 있고 정성을 들인 전시회였다.
그러나 전시된 작품들을 보는 내내 미리 규정된 시각을 강요당하는 듯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으며, 이는 무엇보다 소주제에 따라 구획된 작품 선정 및 배열로 인해 작가의 개성이나 개별 작품 고유의 어법(idiom)에 집중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의 커미셔너는 퐁피두센터 미술관의 부관장이자 수석 학예연구관인 디디에 오탱제(Didier Ottinger)로서 그는 ‘아르카디아(Arcadia)’란 서구의 신화적 이상향을 뜻하는 말을 화두로 삼아 이 전시를 기획하였다. 그리고 그는 프롤로그(Prologue), 쾌락(volupté), 허무(vanités), 풍요(abondance), 조화(harmonie), 낙원(l'arcadie), 암흑(nuits), 황금시대(l'agd'or), 전령사(messagers), 풀밭위의 점심식사(Déjeuners sur l'herbe) 란 소주제로 나누어 작품을 전시하였다. 이 10개의 소주제는 아르카디아가 풍요와 쾌락의 낙원이지만 암흑과 허무도 존재하는 등 다양성을 지닌 세계임을 암시한다.
아르카디아는 고대 그리스에 실재하는 땅이지만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황금시대’의 신화를 통해 이상향으로 노래하면서 서구인들에게 이상향처럼 여겨진 곳이다. 디디에 오탱제는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취지를 밝힌 쓴 ‘시간의 분할선 아르카디아’란 글에서 프랑스 고전주의의 대표작가인 니콜라스 푸생 Nicolas Poussin (1594~1665)이 그린 두 점의 <아르카디아의 목자>를 베르길리우스의 신화를 당대 프랑스 예술 속에 현실화한 출발점으로 삼는다. 주1)

이런 관점에서 기획자는 20세기 초의 야수파에서부터 1960년대의 아르테 포베라에 이르기까지도 아르카디아적 세계가 순환적으로 표현되어 왔으며, 이는 현대미술도 신화적 전통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획자는 ‘현대미술은 가능한 모든 서술성을 모티브에서 제거한 후, 남은 것을 형태로 유지한다’는 미술사학자들의 공통적 견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그 근거의 하나로 에두아르 마네가 ‘낙선전’에서 선보인<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도 보들레르의 견해 중  마네가 마르크-앙투안 레이몽디의 판화작품인 <패리스의 심판>중 일부분을 차용하여 그 구성을 적용했다는 사실에서 이는 고전의 ‘영원한 불멸성’을 현대적 감각으로 확인시킴으로써 ,아르카디아의 현대적 변용인 도시적 쾌락주의나 목가적 열정의 표현으로 해석한 것을 인용한다. 즉 이번 전시의 기획자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도 끊임없이 재창조되고 있는 황금시대의 꿈, 즉 천상의 과일을 음미하던 시대의 꿈이자 아르카디아의 꿈으로 인도하는 작품으로 본다.
그러므로 후대의 현대미술도 마네 그림의 이러한 주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색조와 조형 형태의 유희, 순수회화의 도래 등과 같은’ 부수적(?) 영역에만 관심을 가졌다고 기술한다. 이런 관점에서 미래주의 화가들의 경우 ‘주제’ 만큼이나 ‘현대에 등장한 기계성’에 대해 강조했으며 그래서 전통적인 장르에서 벗어나 에너지와 스피드로 가득 찬  기계적 주제의 표현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관람자는 아르카디아로 들어가기 위해 니콜라 푸생의 <아르카디아와 목자들(Les Bergers d'Arcadia)>의 영상이 투사되는 발을 통과해야 한다. 전시장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이 그림은 후경에서 보이는 서정과 평화로운 풍경을 배경으로 네 사람의 목자들이 묘비 앞에서 비문을 보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비문에는 "나 아르카디아에도 있노라"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는 무덤 속으로 잠식되는 생명의 종말 뒤에도 또 다른 이상향이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 발 뒤엔 이상향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 발을 통과하면 예기치 못한 낯선 광경인 프랑수아-자비에 라란(François-Xavier Lalane)의 설치 조각 작업인 24마리의 양떼를 보게 된다. 양들은 비옥한 푸른 풀밭 위에 있지만 일부 머리 없는 양들의 존재는 보는 사람들을 당혹감과 함께 유머러스 하다는 느낌을 갖게도 한다. 이곳은 전시장에서 첫 번째로 만난 아르카디아로서 축복과 풍요의 땅으로 배치한 작업은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번 전시회의 주요 작품들은,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꿈인 것 같지만 어쩌면 언젠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만드는 동경을 아르카디아로 규정한 기획자의 의도에 따라 주로  ‘풍요’나 ‘낙원’, ‘쾌락’이란 소주제 아래 배치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나르(Pierre Bonnard), 마티스(Henri Matisse), 브라크(Georges Braque), 뒤피(Raoul Dufy), 피카소(Pablo Picasso), 레제(Fernand Leger), 피카비아(Francis Picabia) 등의 작품을 통해 그들이 꿈꾸었던 아르카디아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들 미술가들은 에로틱한 관능과 쾌락, 따스한 햇빛이 반짝거리는 자연, 시간에 따른 죽음과 허무, 여유로운 노동자들의 피크닉, 새로운 예술의 조형성 등을 탐구하면서 아르카디아를 꿈꾸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20세기 초 야수주의자들에게 특히 마티스의 경우 아르카디아의 풍요, 쾌락, 기쁨, 행복은 지중해 연안의 작열하는 햇빛과 결부된다. 그들은 이곳에서 <삶의 행복>을 그리며 회화의 낙원을 탐색했다는 것이다. ‘풍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선택된 것은 마티스의 <붉은 색 실내>, <초록색 찬장이 있는 정물>로 이 작품들은 마티스가 젊은 시절 지중해 연안에서 그린 것들이다. 기획자는 마티스 그림의 화면 전체에 넘쳐흐르는 눈부신 붉은 색채도 건강, 풍요, 쾌락, 행복이 가득 찬 낙원을 가리킨다고 본다.  

‘낙원’이란 소주제하에 배치된 그림들 그 중에서는 보나르나  뒤피의 <탈곡> 같은 그림이 주목할 만한 작품이었다. 특히 <미모사가 피어있는 아틀리에>라는 보나르의 작품은 온통 노란색이 지배적인 화면 구성으로 삶의 풍요, 안락, 따스함이 넘치는 낙원인 듯하지만 푸생의 목자들이 두개골을 그리며 아르카디아에도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듯 이 그림에는 죽음, 그리움의 이미지도 존재하며 이는 왼쪽 하단에 죽은 부인의 모습을 그려진 것에서 알 수 있다.

첫 전시장 맞은편에 있는 제 2전시장에 들어서면  지우제페 페노네(Giuseppe Penone)의 설치 작품 <되찾은 낙원>이 온통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은은한 낙엽 냄새와 함께 짙은 갈색으로 변한 월계수 잎은 낙원에도 늙음의 시간과 마침내 죽음이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듯하다. 벽에 걸린 작은 폐 모양의 조형물들도 나뭇잎과 동화되는 듯 같은 퇴색된 나뭇잎과 같은 색조로 만들어져 퇴색된 무수한 잎들도 언젠가는 부스러기, 한 줌의 먼지가 될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허무’란 소주제 하에서는 주로 어둡고 침울한 색조의 상징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러한 그림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치러지는 동안 화가들은 인간이 저지르는 참혹한 비극을 체험했으며, 서구인들이 꿈꾸던 아르카디아는 절망의 땅이 되었다는 것이다. 절망은 죽음으로 죽음은 허무를 낳으며, 이러한 허무는 때때로 종교에 귀의하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인 작가로 도록에는 브라크가 그린 <바니타스>란 작품이 언급되어 있다.
알다시피 브라크는 20세기 초 피카소와 더불어 입체주의를 화풍을 추구한 화가이다. 그러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두개골과 묵주, 십자가가 있는 정물을 그렸는데, 이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이 교훈적 소재로 즐겨 그렸던 그림과 다름없으며 실제로 브라크는 자신의 작품 제목을 <바니타스>(1938~1943)로 명명했다. 바니타스는 지상의 쾌락에 대한 덧없음과 헛되고 헛된 삶의 허무를 의미한다. 이 바니타스 회화에 반드시 등장하는 소재가 바로 두 개록이며, 이는 서구에서 삶의 덧없음과 종말에 대한 명상을 나타낸 전통적 소재였다. 그러므로 이 그림을 통해 중년이후 브라크가 조용히 생을 관조하며 죽음을 사색하고 종교를 통한 평화를 꿈꿨음을 알게 된다.

이번 전시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3)를 마지막 테마로 소개한다. 기획자는 누드의 여인과 두 남자가 화창한 자연 속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원본으로 삼은 몇 개의 작품을 전시장에서 보여준다.  
이러한 그림으로 먼저 알랭 작케(Alain Jacquet)는 그림을 볼 수 있는데, 그는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1963~64)를 여러 명이 등장하는 사진을 이용하여 가까이서 보면 이미지보다 굵은 망점 밖에 보이지 않는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표현하였다. 미술사의 아이콘이 된 그림들을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풍자적으로 대체한 방식의 그림을 그린 것이다.  
블라디미르 두보사르스키와 알렉산더 비노그라프가 그린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매우 큰 작품으로 마네의 그림을 원본으로 삼아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들을 그림 속 인물로 배치한 그림이어서 해학성이 돋보인다.

‘조화’란 테마아래 전시된 그림 중 페르낭 레제의 <여가-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1948~1949)를 꼽을 수 있다. 이 그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정부에서 결정한 ‘유급휴가’를 받고 가족단위로 자전거로 전원으로 휴가를 떠나는 여가의 장면을 화려한 색채와 명확한 형태로 보여준다. 이 작품 속 그림의 하단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여자는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속 마라의 팔동작과 유사한 포즈를 취한 채 손에 <루이 다비드에 대한 경의(Hommage à Louis David)>라고 씌어 있는 종이쪽지를 들고 있다. 이는 노동자들의 유급 휴가가 민주적 투쟁을 통해 쟁취된 역사적 결과임을 암시한다.  


아르카디아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회는 다시 소주제별로 작품을 분류함으로써 세심한 기획력을 보여주며, 기획자가 기술하듯 테마 면에서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미술 문화 특유의 초월성과 지속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급진성과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 현대미술의 대세임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테마 전시의 한계는 자명하다. 무엇보다 미술관 자체에서 전시주제를 주체적으로 결정한 전시가 아니므로 이번 전시는 근본적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감상자는 항상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좀 더 주체적인 시각에서 전시를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번 특별전에 선정된 80여점 중 소주제의 틀 속에 편입됨으로 인해 오히려 그 가치가 묻혀버린 작품을 여럿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마티스의 <붉은색 실내>와 <잠자는 요정을 유혹하는 목신>이란 목탄 데생 그림이 그 한 예다. <붉은색 실내>는 마티스가 그린 실내 연작 중 마지막 작품일 뿐 만 아니라 그의 작품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을 만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래서 이 그림들은 마치 진부한 시집 속에서 빛나는 싯귀 한 구절처럼 주변 작품들의 존재감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리는 군계일학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도록을 펼쳐보니 이번에 전시된 마티스의 목탄 데생 작품은 마티스의 작업실에 항상 걸어 놓은 두 점의 목탄화 중 한 점이었다. 주2)
그렇다면 이러한 작품의 가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당대로서는 기존의 인식의 틀에서 훨씬 벗어난 지점에서 성립한 것들로 그만큼 통념을 벗어난 예술작품이다. 그러한 대담성과 참신성이 미술의 표현 영역을 확장해왔다는 것이며, 이런 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오히려 통념을 벗어난 예술세계의 진가를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회를 보고 난후의 뜻밖의 소득은 <몽유도원도>와 겸재가 그린 ‘진경산수화’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을 소재로 하여 동양의 아르카디아라 할 수 있는 무릉도원을 그린 그림인데, 언젠가 겸재 정선이 그린 장소를 답사하다가 어느 계곡에서 <몽유도원도> 속에 나오는 폭포와 너무도 흡사한 폭포를 보고 이상한 느낌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이처럼 ‘상상화'인 <몽유도원도> 속에 실경이 존재하는 듯한 낯선 체험을 하면서 혹시 안견의 고향이 이쪽이었을까? 라는 생각도 들어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근거 자료가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이 이번 전시를 보고나서 아르카디아에 대해 생각하면서 풀렸다. 그것은 더욱 행복하고자 하는 꿈이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와 그에 대한 동경은 지역과 시대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현상이며, 또한 ‘상상’과 ‘실제’의 구분도 상상해서 그렸는가, 또는 실제로 보고 그렸는가의 사실로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작품을 만들어내는 ‘미술현장’과 ‘제도’, 그리고 ‘관람자(또는 애호가)’를 미술문화의 세 가지 기본 영역으로 본다면 이 중 제도 영역, 그 중에서도 기획자는 미술현장과 관람자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다. 그러나 기획자들은 이러한 매개자 역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경제적 가치를 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표면적으로는 대중들에게 좀 더 작품에 대해 가까이 다가서게 하려는 세심한 배려를 하는 것이 기획자의 주된 역할이지만 단지 문화적 가치 생산이 주된 목적이 아니며, 국경을 건너는 전시회의 경우 문화정치학적 논리의 일환인 경우가 많다.(가령 이번 전시회의 경우 ‘도록’ 앞부분에 왜 프랑스 대사의 ‘축사’까지 실리는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자국의 역사적 산물인 예술적 가치를 브랜드화하고 그 가치를 새로운 기획력을 통해 재생산하는 측면은 그들로부터 배울 점이다.
그렇지만 개별 작품을 어떻게 체험하는가는 감상자의 주체적 역량에 달린 문제이다. 기획자가 제시하려는 주제의 근거로 ‘선택’된 작품이 곧 전시의 성격을 결정한다고 해서 작품마다의 고유한 표현의 어법까지 이러한 주제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오히려 기획자의 인식적 틀에 따라 개별 작품의 진면목이 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전시기획자에 의해 설정된 테마를 전시를 보는 객관적 잣대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구획된 틀을 벗어난 새로운 관점과 시각에서 전시회를 보려는 태도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2009년 1월 16일
                                    도 병 훈


주1) 푸생은 프랑스의 고전주의적 바로크 양식을 확립한 화가이다. 그는 거의 모든 생을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지내면서 로마 고대조각의 포즈와 라파엘의 회화세계를 연구했다. 또한 그는 고대문학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과 스토아파 철학에 의해서 다져진 정신을 회화라는 장르에 도입시킨 화가였다.
푸생은 '회화는 정신적인 것이다'라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을 실천하듯, 이에 합당한 주제의 선택, 인물의 포즈와 구도, 그것들의 질서정연한 구축이 이루어진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그는 회화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이성에 의해 반드시 설명되어져야 한다는 회화관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형태와 색채, 사고와 감정, 진실과 아름다움, 이상과 현실이 모두 조화되고 균형 잡혀 있는 예술세계를 추구하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대개 명쾌한 구성과 수학적 비례가 화면 전체를 지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화가가 훌륭한 양식(maniere magnifique)을 몸에 익히기 위해서는, 가령 영웅적 행위 같은 위대한 것이어야 하며, 세부적인 것을 버리고 모든 비속한 걸 제외시키며, 정곡을 찌를 개념, 자연스러운 구도, 그리고 순수하게 개인적(個入的)인 양식(style), 기법(manner), 기호(taste)로 재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회화의 최상의 목표란 ,고결하고도 진지한 인간의 행위를 재현하는데 있다. 미술가는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것을 추구해야한다. 즉 미술가는 감각보다는 정신적인 것에 호소해야하기 때문에 반짝이는 색깔과 같은 사소한 문제를 억제하고 형태와 구성에 역점을 두어야한다" 이러한 푸생의 그림관은 이후 고전적 그림의 룰이 되었으며, 개성을 억압하는 형식적 강령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푸생 그림의 가치는 ‘현대화화의 아버지’로 꼽히는 세잔에 의해 재발견된다. 세잔은 이렇게 말했다. "자연으로부터 푸생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색과 빛이 있는 야외에서 살아있는 푸생을 그린다." 이처럼 세잔은 푸생처럼 인간과 자연을 장엄한 질서로써 통일시키고자 했다. 세잔이 평생 과제로 삼은 것은 인상주의의 수법을 활용하면서 동시에 고전주의의 대가인 푸생이 달성한 놀라운 균형과 완벽성, 질서와 필연의 감각을 되찾아 자연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잔과 푸생의 회화는 결국 다른 길을 걷는다. 푸생은 "확고한 진리는 이해될 수 있으며, 회화는 그 나름의 법칙과 방법을 갖고 있는 예술이다." 라고 한 반면에 세잔은 "진리는 포착될 수 없으며 탐색은 끝이 없어 근본적으로 고독한 인간은 겸손하게 인간 조건의 신비를 가늠하는 일밖에는 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세잔의 이런 생각은 그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며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회화에는 두 가지 것이 필요하다. 즉 눈과 두뇌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도와야 한다. 이 둘의 상호적인 발전을 위해 화가는 노력하여야 한다. 눈은 자연에 대한 비전에 따르고 두뇌는 표현 수단의 기초가 되는 조직된 감각의 이론에 따라야 한다. 양자가 각기 발전한 후 상호 협조가 이루어져야 한다. 모네는 눈에 불과하다. 그러나 굉장한 눈이다. "
세잔은 그의 그림을 통해 눈과 두뇌, 시각과 이성, 감각과 사유의 조화를 지향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회화 그 자체를 정립하고자 형식, 절도, 비례, 긴장, 균형, 리듬을 과제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주2) 수년 전 시립미술관에서 마티스 관련 전시(*지난 2005년말부터 2006년 사이에 개최된 <마티스와 불멸의 색채화가들>이란 전시회임)를 하면서 정작 마티스의 작품은 그 숫자도 적고 평범한 작품만 전시되었던 전시회에 비하면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마티스 그림들은 질적인 측면에서 그 때의 수준을 훨씬 능가한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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