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 8415
2008.10.31 (11:39:08)
extra_vars1:  ||||||||||||||||||||| 
extra_vars2:  ||||||||||||||||||||||||||||||||||||||||||||||||||||||||||||||||||||||||||||||||| 

김홍도와 신윤복 신드롬과 조선 후기 회화의 단면



조선 후기 화가에 대한 신드롬

언제부터인가 사극이 TV드라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대중문화의 주요 콘텐츠로 등장했다. 과거 주로 왕과 신하, 주변 인물 위주의 왕조사극이었지만 최근 옛 고구려 땅을 무대로 하여 영웅 중심의 블록버스터 사극이 성행하고 그 범위도 조선과 고려를 넘어, 통일신라 ․ 발해 ․ 고조선까지 이른다. 게다가 주제와 범위도 확대되어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퓨전적인 상상력이 가미되어 다양해진 듯 보인다. 그래서 정치, 사회, 문화예술을 구분했던 이전의 드라마와 다른 특색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풍조에 힘입어 올해 들어 조선시대의 김홍도檀園 金弘道(1745~1806)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1758~?)이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TV드라마가 방영되면서 이들에 대한 신드롬 현상까지 생겨났다. 주1)
이런 현상은 정신문화의 정수인 문화 예술을 콘텐츠로 삼는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예술을 다루는 드라마답게 그림의 세부까지 섬세하게 영상미로 보여준 것은 전례없는  일이어서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주2) 그러나 이러한 장면들의 그럴듯함은 실제 예술가 및 예술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조선 후기 예술가의 삶과 예술  

최근 김홍도와 신윤복을 주인공으로 한 TV드라마는 신윤복을 여자로 설정한 소설을 바탕으로 그들을 스승과 제자로 삼아, 여기에 ‘남장여자’라는 제3의 섹슈얼리티를 접목시킨  이야기다. 또한 조선 후기 문예부흥기(전성기)의 왕인 정조라는 아이콘을 통해 음모와 추적이라는 스릴러의 요소도 가미했다. 그러나 김홍도와 신윤복의 실제 삶과 예술은 드라마의 내용과 대부분 일치하지 않는다. 그 단적인 예로 김홍도는 신윤복보다 그의 아버지 신한평과 함께 주로 활약했다. 주3)
또한 홍도의 라이벌로 당대 제일의 초상화가로 꼽혔던 화산관 이명기華山館 李命基(1756~1803년 이후)에 대한 극중 역할 설정도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르다.

단원 김홍도 하면 조선을 대표하는 풍속화가로만 알지만 그렇지 않다. 김홍도는 꽃과 나무, 동물 등을 그린 화조도, 영모도(새 또는 짐승 그림)와 금강산 등을 그린 산수화, 야외나 궁중에서 벌어지는 행사를 그린 그림, 초상화, 삼강오륜 같은 책에 들어가는 삽화, 그리고 불교화까지 모든 종류의 그림을 잘 그렸다. 게다가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거문고나 퉁소의 연주도 뛰어나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킨 일화가 전한다. 이처럼 그는 매우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으며, 이 뿐만 아니라 풍채와 태도가 아름답고 주4) 시도 잘 써서 아들인 김양기가 출판한 《단원유묵》이라는 문집도 있다. 주4)

1745년(영조 21년)에 중인 계층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김홍도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렸다. 당시 시서화에 능한 사대부 화가였던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도화원의 화가가 되었다. 주5)
그가 강세황에게 배운 것은 그림뿐이 아니었다. 강세황은 그에게 시와 글도 가르쳤다. 그래서 김홍도는 여느 중인 출신의 화가들과 다르게 시심詩心어린 그림을 남겼으며 자작시를  그림 곁에 쓰기도 했다.  
김홍도는 젊은 시절에 주로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이 무렵 그린 그림들이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으로 남아 있다. 이 화첩 중 춤추는 소년과 피리를 부는 말뚝벙거지의 사내의 생동감 있는 표정 등 흥에 겨운 군상의 율동감을 멋지게 표현한 <무동舞童>, 씨름 장면을 실감나면서도 해학적으로 그린 <씨름도> 등이 특히 유명하다.

김홍도는 정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아 국가 차원에서 중요하게 진행되는 그림 사업에는 항상 참여하였다. 그래서 왕의 초상을 그리는 ‘어진도사’에도 여러 번 화사로서 이명기와  동참하게 된다.
그리고 김홍도가 마흔 네 살 때는 정조의 명을 받아 금강산 일대의 동해안을 중심으로 그림을 그렸으니, 이 때 그린 것이 바로 온건하고 세밀한 화풍의 《해산첩海山帖》이다.  
김홍도가 마흔 다섯 살(정조13년, 1789년)이었을 즈음에는 정조의 지시로 영남지방을 두루 다니며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그후 그는 일본 쓰시마 섬으로 가서 지도를 그려온다. 그리고 중국에도 다녀오면서 체험의 폭과 안목을 넓힌다.

1791년 김홍도는 이명기와 함께 어진도사에 참여한 공로로 충청도 연풍현감으로 부임하며, 이때부터 김홍도는 사대부들의 그림인 문인화을 즐겨 그린다. 이를 통해 김홍도 역시 자신의 신분을 상승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벼슬길이 순탄하지 않으면서 주로 시적인 정취를 중시하면서도 화면을 대담하게 단순화시키는 식으로 화풍이 달라진다.    
문인화가로서 김홍도의 진면목은 1796년 그가 52세 때 그린 《단원절세보첩, 일명 병진년 화첩》에 잘 드러난다. 화조산수화로 구성된 이 화첩은 김홍도 그림의 진수를 보여준다. 선명한 필치와 맑은 기운, 넘치는 시정, 넉넉하고도 여유로운 여백 등이 그러하다. 거의 모든 그림이 명품이지만 이 화첩 중의 백미는 <소림명월도>을 꼽을 수 있다. 이 그림은 둥근 보름달을 배경으로 얽히고설킨 나뭇가지를 능란한 붓놀림으로 농담처리 하여 정취가 가득한 풍경을 보여준다. 그래서 마치 가을 밤 은은한 달빛과 함께 개울물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김홍도는 19세기 초 무렵인 생애 말년에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 ; 자연의 삶이 벼슬보다 더 좋다는 뜻을 담은 그림으로 1801년에 그린 것임>, <송하담소도松下談笑圖;소나무 아래서 이야기 나누는 장면으로 1805년에 그린 것임> 등의 작품을 그리면서 자연에 귀의하는 인생관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림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세상을 떠날 때 무렵 화가 김홍도는 세상의 물욕이나 권력을 넘어선 그림을 주로 그린다. 그러나 정조의 승하 이후 6년 동안 김홍도는 대체로 병고와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김홍도는 평생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겸재 정선과 함께 조선 후기 진경문화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답게 당시 일상적인 사람의 모습 뿐 만 아니라 신선과 고승을 그리는 ‘도석道釋화’나 고사 인물까지도 고유색이 짙게 드러나는 당시 조선 사람의 모습으로 그렸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맑으면서도 탄력 있는 붓놀림으로 그린 소나무와 생황을 부는 신선을 유연한 정취로 표현한 <선인송하취생仙人松下吹笙>, 길가 버드나무 아래 위에서 화답하는 노란 봄 꾀꼬리 한 쌍의 흐드러진 교성에 가는 길도 잊은 듯 넋을 잃고 멈춰 서 있는 그림인<마상청앵馬上聽鶯>, 《단원절세보첩》안의 산수 10폭 중의 하나인 <사인암舍人巖>, 《단원절세보첩》안의 화조 10폭 중의 하나인  <매작梅鵲>, 한 목동이 소 등에 타고 왼편으로 유유히 강을 건너는 장면을 그린 <기우도강騎牛渡江>, 파도와 갈매기를 맑은 필치로 그린 <창해낭구滄海浪鷗>, 고려 왕궁 옛터인 만월대 에서 열린 들 잔치를 기념한 일종의 기록화인<만월대계회도滿月臺契會圖>, 능숙하고 유려한 필치로 염불하여 서방정토로 올라가는 장면을 그린 <염불서승念佛西昇>등이 있다.

이번 TV드라마에서 김홍도의 라이벌로 나오는 화산관 이명기는 일반사람들에게 생소하지만  당대에는 조선 최고의 초상화가로 꼽혔다. 조선시대는 유교사상의 윤리적 이념화와 함께 왕의 초상인 어진제작은 물론 학문이 높은 사람을 기리는 숭현사상崇賢思想의 표본으로 공신들이나 사대부들의 초상을 그리게 하며, 이를 진전眞殿이나 사당 및 영당影堂에 모시고 가문의 근간으로 삼았다.
그래서 조선시대는 초상화를 그린 뛰어난 화가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최전성기인 18세기 후반에 뛰어난 초상화를 남긴 사람이 화산관 이명기다. 현재 그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초상화는 약 10여점에 이르며 이외 다수의 산수인물화가 전한다.

이명기는 36세 때인 정조 15년(1791년)에 10년 이상 선배이자 스승격인 김홍도와 신한평을 제치고 임금의 어진을 그리는 일을 총괄하는 주관화사主管畵師로 첫 번째 어진을 그렸다.
그의 나이 37세 때인 정조16년(1792년)에 그린 <번암 채제공의 73세 초상>은 천연두를 앓은 흔적인 곰보 자국은 물론 사팔뜨기의 눈까지 그대로 그릴 정도로 묘사가 치밀하다.(* 그런데 이번 TV드라마에서는 오히려 김홍도와 신윤복이 체제공의 사팔뜨기 눈을 묘사하는 것으로 나온다)뿐 만 아니라 속옷 색까지 얼비치는 의복의 묘사도 절묘하여 그가 남기 초상화 중에서도 <서직수 상>과 더불어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한 당시 기록에 이 그림을 본 정조가 우울해 보인다며, 다시 그리게 할 것을 권하자, 채제공이 그림 그릴 당시 실제로 우울했다며 사양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를 보면 이명기가 사람의 심리적 내면까지 묘사할 수 있는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극진한 필력으로 묘출한 그의 초상화는 당시 사대부들의 기질과 내면적 성정, 품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명기의 대표작으로는 <강세황 상>, <오재순상>, <유언호상>, <허목 상>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여러 점의 인물 산수화도 남겼다.  
  
이명기의 초상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조선의 초상화는 중국이나 일본의 초상화와는 다르다. 중국의 초상화는 과다한 장식적 배경까지 함께 그리거나 주로 남녀 군상 및 조상들을 함께 그리는 것이 주된 특성이라면, 일본의 초상화는 인물의 표정을 과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조선의 초상화는 그리는 대상인물을 정직하게 그리려 한 특성을 보여준다.  

신윤복은 김홍도, 김득신金得臣(1764~1822)과 더불어 조선의 주요 풍속화가로 꼽히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그에 대한 연구 성과도 드문 편이다. 속화를 즐겨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속설과 함께 오세창吳世昌의《근역서화징》에도 단 두 줄의 기록만이 남아 있다.

신윤복申潤福(1758~), 자 입부笠父, 호 혜원蕙園, 본관 고령高靈, 첨사 신한평申漢枰의 아들. 벼슬은 첨사다. 풍속화를 잘 그렸다."

이렇듯 그에 생애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어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주6) 그렇지만 그림에 남긴 간기로 보아 1805년부터 1813년까지 약 8년간 주로 많은 그림을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이 시기는 이미 김홍도가 죽고 난 이후다.
그의 부친 신한평은 임금 초상인 어진 제작에 참여한 어용화사로 노년까지 도화서에 봉직했다. 근 40년간에 걸친 이 같은 아버지의 도화서 활동 때문에 부자가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것을 꺼리는 이른바 ‘상피相避’ 풍조로 신윤복은 제도권 밖에 머물게 되었고, 그래서 한량들의 생활공간이었던 야유회나 기방을 빈번하게 출입하면서 그만의 농염한 분위기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수화와 문인화가 으뜸이던 시대에 신윤복은 주로 여인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렸다. 특히 여인을 가운데에 배치하고, 주변 배경을 살리는 새로운 구도와 여인의 얼굴 화장, 입술, 의복에 화려한 채색을 하는 등 당시로는 파격적인 화풍을 선보였다. 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머리를 감는 여인들의 과감한 노출이나 기녀와 한량의 유흥을 그려낸 모습 등의 직접적인 묘사가 두드러진다.

그는 섬세하고 유연한 선을 구사하면서도 채색을 즐겨 사용했다. 전통수묵화에서 색채는 극도로 제한된다. 색채가 가미되어도 수묵담채화 정도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신윤복의 풍속화는 색채를 적극적으로 구사한 그림이다. 물론 서양의 야수주의 그림처럼 대담하고 강렬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색채감은 오늘날의 대중적 영상 이미지와도 부응한다. 무엇보다 신윤복은 여성성을 세련된 감각으로 보여주는데 특히 그의 그림은 여자의 심리적 내면까지 정감 있게 포착한다.    

신윤복의 풍속화는 소재 선택, 구성, 인물의 표현방법 등에서 김홍도의 풍속화와는 매우 다르다. 신윤복의 그림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것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혜원풍속도첩蕙園風俗圖帖》이라 하기도 함, 국보 135호)주7)으로 이 그림들은 조선 후기시대 우리 조상들의 풍속을 잘 알게 한다. 《혜원전신첩》은 간송미술관에서 1930년대에 일본 오사카에서 고미술상으로부터 구입한 후 새로 표구한 것이다.

이 그림들은 대부분 기생과 한량을 중심으로 한 남녀 간의 행락이나 정념 또는 양반사회의 풍류를 소재로 그린 것으로, 경아전京衙前들에 의해 조성되었던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의 서울 시정의 유흥적· 향락적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각 인물들의 몸동작과 표정을 비롯한 배경 등을 신윤복은 정교하교 치밀한 소묘력으로 표현했다. 특히 가늘고 유연한 필선과 한복의 아름다운 색감 등을 최대한 살린 색채의 효과적인 사용 등을 통하여 당시의 풍속 상과 풍류생활의 멋과 운치를 전해준다.
등장인물들은 남녀 모두 대체로 갸름한 얼굴에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간 선정적인 모습에 맵시와 멋이 넘치는 자태로 그려 도회적인 세련미와 함께 색정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신윤복의〈월하정인月下情人〉은 그의 풍속화 중에서도 가장 심리적인 내면 묘사를 잘한 작품으로 꼽힌다. 그림을 보면 어스름한 달빛 아래서 양반의 자제인 듯 잘 차려 입은 청년이 초롱불을 들고 길을 재촉하는 것 같다. 여자는 쓰개치마를 둘러쓰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조금은 주저하는 듯한 모습이다. 배경은 간략히 묘사되어 있지만 대신 이들의 표정과 행동에서 미루어 짐작되는 그네들의 감정은 온 화폭이 모자라는 듯 넘쳐흐른다. 이 그림의 찬문撰文은 ‘달은 기울어 밤 깊은 삼경인데,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이 안다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라고 적혀 있다. 주6)

이처럼 그의 그림들은 심지어 한 밤중의 도성 뒷골목에서 두 남녀가 은밀한 만남을 즐기는 것도 보여주며, 나아가 유교문화와 가장 근접해 있는 선비들이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생들과 놀이를 하는 모습 등을 대담하게 또는 은근하게 묘사하여 현대의 관점에서도 다소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그림 속 인물의 면면을 살펴보면, 당시의 엄한 도덕적 규범과 금기를 벗어나, 솔직하고도 당당하게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이로써 당시 사대부들이 엄하고 강직하기만한 도덕군자만이 아닌, 때로는 인간적 본능과 감정에 충실 하는 감성적인 측면도 드러나는 인간임을 알게 된다.
제반 사회, 도덕적 규범이 엄격했던 당시 유교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일반 서민층과 대다수 양반가 남성들은 비교적 폭 넓은 성적 자유를 향유하며 살았었지만 반가의 여성, 특히 과부들에게는 수절이 강요되는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도 혜원의 그림 중에는 이런 사회적 제약을 넘어선 그림까지 있다.
이런 그림의 예로〈이부탐춘嫠婦耽春〉을 꼽을 수 있다. 이 그림을 보면 높은 담장 밖에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어느 화창한 봄날, 과부로 보이는 반가의 두 여성이 내원의 고목 그루터기에 걸터앉아서, 마당에서 짝짓기에 열중하는 개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붉히는 장면을 그렸을 알 수 있다.

같은 주제를 다룬 김홍도의 <주막>과 신윤복의 <주사거배>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김홍도가 소탈하고 익살맞은 서민 생활의 단면을 주로 해학적인 필치로 다루었다면, 그는 젊은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룬 풍속화를 주로 그렸다.
그리고 이러한 젊은 남녀 간의 애욕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매우 섬세하고 유연한 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즐겨 사용한 까닭에 그의 작품은 매우 세련된 감각을 느끼게 한다. 또한 그의 풍속화는 당시 살림살이와 복식 등을 자세히 묘사하여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김홍도 그림과의 차이는 인물 묘사에서 뚜렷이 나타나며, 대체로 얼굴은 갸름하며 섬세한 ‘세금선’의 필치로 인물의 윤곽선을 그리면서 아름다운 채색을 적절히 사용했다. 그러나 산수를 배경으로 한 풍속화에서는 준법에서 김홍도의 영향이 보이기도 한다.
이외에도 신윤복은 무속巫俗이나 주막의 정경 등 서민사회의 풍모를 보여주는 풍속화도 그렸으며, 산수화는 옅은 먹과 옅은 채색(바림)을 주로 사용해 맑으면서도 참신한 감각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미인도>도 신윤복의 대표작중 하나로 꼽는다. <미인도>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당시의 기생으로 추정하는 시각도 있지만 옷맵시나 여인의 세련도고도 품격 있는 자태로 보아 지체 높은 사대부의 소첩 같기도 하다. 윤이 나는 트레머리의 한 쪽에 자줏빛 댕기가 살짝 내비꼈고, 자주고름에 달린 수마노 삼작노리개를 그 희고 연연한 손으로 매만지는 자태가 매우 곱다.
초승달 같이 길고 가는 실눈썹과 귀 뒤로 하늘거리는 잔 귀밑 머리털에 이르기까지
저 단아한 눈매를 섬세하게 그렸다. 왼 쪽 상단에 보이는 제시의 뜻은‘화가의 가슴속에 만 가지 봄기운이 일어나니 붓끝은 능히 만물의 초상화를 그려내 준다.(반박흉중만화춘 필단능언물전신盤礡胸中萬化春 筆端能言物傳神)’이다. 주8)

신윤복의 그림은 소재의 선정이나 구성법, 인물들의 표현기법 등에서 특히 김홍도와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그렇지만 신윤복도 김홍도처럼 여러 가지 그림에 능해서 남종문인화풍의 산수, 사실적인 묘사력과 서정이 조화를 이룬 동물그림 등도 잘 그렸다. 이러한 화풍은 조선 말기의 유운홍劉運弘과 유숙劉淑 등을 거쳐 1930년대 이용우李用雨의 인물화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신윤복의 화풍은 후대의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쳐 작가 미상의 풍속화나 민화 등에도 그의 화풍을 따른 작품들이 많이 눈에 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신윤복의 필치를 가장한 춘화가 많이 제작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화격으로 진, 위작을 구별하며 현재 진작은 백 점이 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한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작품세계는 차이점과 함께 유사성도 있다. 먼저 김홍도는 젊은 시절 풍속화를 통해 ‘사람살이’에 주목하여 일상의 삶을 화폭에 담아냈지만 필력 면에서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병진년 화첩》을 통해 알 수 있듯, 그는 성리학적 유교에 바탕으로 둔 문인화를 그리기도 하는데 이러한 점이 신윤복과 현저하게 다른 점이다. 즉 신윤복은 김홍도와 달리 이러한 문인화적 화격을 보여주는 그림을 별로 많이 그리지 않았다. 신윤복의 그림에는 주로 기녀들이나 미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신윤복은 여성을 통해 성적 아름다움을 추구하였으며 이에 따라 당대 남녀 유별한 유교 문화권에서 신윤복의 그림세계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경제력의 발달이 섹슈얼리티의 주목과 맞물려 가는 것에 맞추어 신윤복은 기녀들을 주인공으로 양반 중심의 성리학적 유교질서를 풍자하고, 추상적 관념론을 우선시하는 화풍에 반기를 들었다고 할 수 있다.

TV드라마는 한 화가의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그림 자체에 관심이 있는 아니라 어디까지나 화가를 소재로 한 극적 이야기의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사건이나 이야기 중심으로 드라마가 전개되며, 제작을 추진 중인 영화 ‘미인도’는 남장 여성을 둘러싼 섹슈얼리티에 더 주목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므로 최근의 소설이나 TV 드라마에 나오는 조선 후기 화가들을 중심으로 한 코드 역시 최근 한국사회에 유행하는 대중문화와 장르문학의 관계를 보여줄 뿐 그들의 삶의 실상이나 예술의 본질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맺음말

전통 예술인을 대상으로 한 TV드라마라든가 한 영화제작을  계기로 예술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된다면 여러모로 바람직한 현상이다. 제대로 만든 드라마 한 편은 문화상품으로서 뿐 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적 이미지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김홍도나 신윤복 신드롬 현상은 문화에 대한 참된 관심이라기보다, 오히려 현시대 대중문화의 전형적 현상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흥미를 조장하기 위한 역사왜곡은 물론 예술적 가치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없으며, 그 대신 에로티시즘을 미끼로 ‘예술’이나 ‘천재’에 대한 대중들의 갈망과 콤플렉스를 이용하는 것이 더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대중적 흥미의 근간인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예술적인 것을 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따라서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서의 신윤복이나 김홍도는 참된 예술가상이 아니며, '모든 것‘이 상품으로 소비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콘텐츠일 뿐이다. TV드라마는 무엇보다 시청률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윤복과 김홍도에 대한 일시적인 신드롬 현상은 허상에 대한 열광이라 할 수 있다. 더욱 문제인 것은 최근 TV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예술가상’이나 예술작품은 오히려 예술의 참된 가치를 대중들로부터 소외시키는 역현상을 초래하며, 이런 면이 대중문화의 실상이자 근본적 문제점이기도 하다.
  
                                  2008년 10월 31일
                                       도 병 훈


주1) 10월 13일부터 26일까지 2주간 간송미술관에서 열린 ‘보화각설립 70주년 기념 서화대전’에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들이 전시되었는데, 전시기간 내내 사람이 몰려 장사진을 이루는 바람에 전시회를 보려면 몇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고 한다. 필자도 지난 19일에 아침 일찍 갔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지난 1990년대 초반부터 늘 봄 가을에 간송미술관을 다녔지만 전시기간동안 사람이 붐빈 것은 최근의 일이다.  
주2) 이전보다 드라마에 나오는 서화의 퀄리티 면은 확실히 진일보한 듯하지만 아직도 우리 전통 서화 특유의 분위기나 품격을 살리지 못하는 실정이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 중 뛰어난 작품들은 먹을 써도 투명수채화처럼 맑은 기운이 넘치는데, 이러한 그림의 특색을 못 살리는 것은 필력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종이의 재질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고급한지는 종이의 표면이 매끈해서 먹이 잘 번지지 않는다. 신윤복의 <단오 풍정> 같은 그림도 이 같은 조선종이에 그려야 인물의 윤곽선인 ‘세금선’의 묘미가 살아난다는 것이다. 간혹 드라마에 나오는 그림 바탕종이로 일정한 가로 줄무늬가 보이는 현대의 화선지도 보였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종이다. 이 종이에 그리면 먹이 번지거나 먹빛이 맑지 못하다. 고급 한지를 구할 수 없다면 일회 촬영용 그림이므로 굳이 화선지나 질 나쁜 한지를 쓸 것이 아니라 차라리 현대의 펄프종이를 쓰는 것이 당시의 종이와 그림의 특색을 더 근사하게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주3)신윤복의 그림 중에는 김홍도의 그림과 유사한 부분도 있어 신윤복이 어느 정도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정된다. 단원과 혜원에 대한 기본 개설서로는 최완수가 쓴 「단원 김홍도」와 이원복이 쓴 「혜원 신윤복의 회화」(『간송문화』, 제59호 회화ⅩⅩⅩ Ⅵ, 단원 혜원, 한국민족미술연구소, 2000년)의 75-108쪽을 참조할 것. 그리고 단원 그림에 대한 종합적인 해설은 『간송문화』제68호(2005년)를 참조할 것. 단원의 생애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 기념 특별전 논고집인 『단원 김홍도』(삼성문화재단, 1995년)를 참조할 것.    
주4)조선 말기 화가인 조희룡趙熙龍에 따르면, “김홍도는 풍채와 태도가 아름답고 성미는 너그럽고 선선하여. 자질구레한 일에 구애되지 않아서 신선과 같은 인물” 이었다고 한다.  
주5) 강세황과 김홍도는 여러모로 인연이 깊다. 김홍도는 중인으로서 벼슬을 하는 데, 첫 번째 부임지가 바로 스승 강세황과 함께 근무하는 장원서(궁중의 화초나 과실나무들을 관리하는 곳)였다.  
강세황은 김홍도를 당시 우리 미술사상 제일의 인물로 높이 평가하였다. 강세황은 김홍도의 풍속화 솜씨에 대해  “더욱 우리 동쪽나라 인물풍속을 잘하여, 선비가 공부하는 것이나, 장사치가 시장으로 치닫는 것. 규중의 여인, 농사꾼, 누에치는 여인 및 가옥의 규모와 산과 들 같은데 이르러서는 그 형상을 거의 실제 모습으로 그려 어그러짐이 없었으니 이는 곧 옛날에는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라고 극찬하였다.
주6) 이명기에 대해서는 필자가 쓴 「《열녀서씨 포죽도》와 이명기의 그림세계」,『나와 너의 그림세계』책을 읽다, 2007, 318~328쪽 참조  
주7) 김재희의 ´색 샤라쿠´는 일본 에도에서 1794년 10개월 동안 140여점의 그림을 남기며 불꽃처럼 활동하다 어느 날 연기처럼 사라진 전설의 화가 샤라쿠를 신윤복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밑받침하는 사료적 자료가 거의 없으므로 신빙성이 극히 희박하다. 샤라쿠의 우키요에는 마네, 모네, 드가 등 인상파는 물론 반 고흐와 고갱 등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주8)《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에 실린 그림은〈월하정인 月下情人〉·〈월야밀회月夜密會〉·〈춘색만원 春色滿園〉·〈소년전홍少年剪紅〉·〈주유청강舟遊淸江, 강에서 뱃놀이하는 장면 〉·〈연소답청 年少踏靑,젊은 선비들이 새싹을 밟는다는 뜻으로 봄 들놀이가 끝나고 돌아오는 장면〉·〈상춘야흥賞春野興, 봄날 야외에서 벌어진 연회 장면〉··〈납량만흥 納凉漫興〉·〈무녀신무 巫女神舞,굿하는 장면〉·〈주사거배酒肆擧盃〉·〈쌍검대무 雙劍對舞, 양반들 앞에서 쌍칼을 들고 춤을 추는 장면〉·〈휴기답풍 携技踏楓〉·〈정변야화 井邊夜話 봄밤에 우물가에서 얘기를 나누는 장면을 양반이 지켜보는 장면〉·〈계변가화 溪邊佳話,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의 모습과 활과 화살을 들고 그 옆을 지나는 젊은 선비를 그린 장면〉·〈삼추가연 三秋佳緣, 어린 기생의 초야권을 사고파는 장면〉·〈표모봉심 漂母逢尋〉·〈야금모행 夜禁冒行, 한 밤에 기생과 양반이 어디론가 가려는 모습〉·〈유곽쟁웅 遊廓爭雄,기방 문 앞에서 벌어진 싸움을 말리는 장면〉·〈이승영기 尼僧迎妓〉·〈이부탐춘 嫠婦耽春>·〈단오풍정 端午風情〉·〈홍루대주 紅樓待酒〉등 모두 30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폭마다 제시와 낙관이 있다.
주9) ‘얇은 저고리 밑, 가슴 속 가득한 정을 붓끝으로 전하노라資薄縛胸中萬華云 筆湍話與把傳神’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Tag List
 

17598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이박골길 75-33 | Tel. 031-673-0904 | Fax. 03030-673-0905 | Email: sonahmoo@hanmail.net

Copyright ⓒ 2002- Alternative Art Space Sonahmoo all right reserved.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