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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5 (11:3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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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랑의 시조와 글씨에 드러난 만남 ․ 사랑 ․ 삶

 

 

1.

최근 친일파와 독립 운동가들의 글씨체를 분석하여 그 특성을 밝힌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전장(戰場)에서 쓴 무인의 글씨와 임천(林泉)에서 풍류를 즐기는 문인의 글씨가 다르듯, 글씨는 글을 쓴 당사자의 처지와 마음이 반영된다.

며칠 전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1539~ 1583)과의 애틋한 사연과 함께 한국고전 문학사상 가장 아름다운 연시의 하나로 꼽히는 조선시대 기생 홍랑(洪娘)의 시조 글씨를 친구의 메일을 통해 보고, 그 필치가 예사롭지 않아 자료들을 찾아보았더니 그녀가 직접 쓴 육필 원본이었다. 주1) 이 글씨는 흔히 볼 수 있는 상투적인 글씨체나 기교 넘치는 글씨와 달리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아름다움으로 그녀의 모습과 숨결이 느껴지는 듯 했다.

홍랑의 이 연시가 실린 서첩은 2000년 11월에 그 원본이 처음 공개되었다. 이 서첩에는 그간 알려진 홍랑의 시뿐만 아니라 최경창의 시도 함께 수록돼 있으며, 서첩 말미에 홍랑과 나눈 만남과 이별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다.

홍랑은 어떻게 최경창을 만나고 사랑하게 되었으며, 이 애틋한 사연을 간직한 시조와 친필 글씨까지 남기게 되었을까?

 

 

2.

홍랑이 만난 최경창이란 인물은 살아생전에 그 시대를 대표할 만큼 뛰어난 문장가였다. 또한 ‘3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릴 정도로 시에도 뛰어났으며, 글씨, 그림, 퉁소도 잘 부는 예인(藝人)이었다.

최경창은 과거에 급제한 뒤 5년이 지난 1573년(선조 6년)에 함북 경성(鏡城)의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하여 홍랑을 만나게 된다.

홍랑은 관아에 소속된 관기(官妓)로서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빼어난 미모를 지녔으며, 감성과 지성을 겸비한 예인이었음을 최경창과의 첫 만남의 과정에서 알 수 있다. 홍랑은 최경창을 만나는 자리에서 자신이 흠모하던 시인의 시를 노랫가락으로 표현했는데, 그 시는 최경창이 지은 것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를 각별하게 한 인연의 끈은 이렇게 맺어진다. 그토록 흠모한 시인이 눈앞에 있음을 알게 된 홍랑의 감격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으며, 이후 두 사람은 막중(幕中)에서 함께 동거하게 된다. 그러나 임기가 끝난 최경창은 서울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 때 홍랑은 쌍성(雙城,함경도 영흥의 옛 이름)까지 따라와 정인(情人)과 작별하고, 돌아가던 길에 날이 저문 함관령(咸關嶺:함흥과 흥원 사이에 있는 고개 마루)에서 봄비를 보며 사모의 정을 담은 시조 1수를 지어 최경창에게 보낸다. 이 때 홍랑이 지은 시조는 다음과 같다.

 

묏버들 갈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

자시창(窓) 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밤비예 새닙 곳 나거든 나린가도 너기쇼셔.

 

(산 버들가지 골라 꺾어 임에게 보내오니,

주무시는 방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홍랑은 해마다 봄이 오면 싹트는 묏버들의 새 잎에 빗대어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천 리 먼 거리로 떨어져 있어도 항상 임의 곁에 있겠다는 마음과 함께 오직 자신만을 사랑해달라는 뜻도 깃들어 있다. 특히 홍랑의 간절한 마음과 나무의 새 잎이라는 구체적 이미지는 깊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400년의 시공을 넘어 지금도 이 시가 마음에 와 닿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울로 간 최경창은 1575년(선조 8년) 봄부터 겨울까지 병석에 눕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홍랑은 곧 남장으로 행장을 차리고 그 날로 밤낮 7일을 걸어 서울의 최경창 집에 당도하여 그를 극진히 간호를 하며 잠시 함께 지낸다.

그러나 이들의 두 번째 만남도 오래 갈 수 없었다. 이들이 이른바 ‘양계의 금禁(함경도 평안도 사람들의 도성 출입을 금함)’을 어겼다는 죄목과 또한 당시 왕후의 국상 직후여서 사대부가 기생과 어울렸다고 문제를 제기한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주2) 이 일로 최경창은 관직에서 파면되고 홍랑 또한 함북 홍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또 다시 기약 없는 이별의 순간, 최경창은 자신의 마음을 담은 한시를 홍랑에게 준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幽蘭)을 주노라

이제 가면 아득히 먼 곳 어느 날에 돌아오리

함관령 옛날의 노래는 다시는 부르지 마라

지금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겠지.

 

相看脉脉贈幽蘭 상간맥맥증유란

此去天涯幾日還 차거천애기일환

幕唱咸關舊時曲 막창함관구시곡

至今雲雨暗靑山 지금운우암청산

 

첫 구의 '맥맥(脈脈)' 이란 시어는 ‘서로 말 없이 바라보며 마음속 깊이 정감이 고동치는 모습’을 뜻한다. 이 시 첫 구절에 드러나듯 고죽에게 홍랑은 그윽한 향기가 나는 난(蘭)과 같은 존재였으며, 시 전체에 별리의 아픔이 구구절절이 배여 있다.

이 때 이별이후 두 사람은 다시는 생전에 만나지 못했다. 이후 최경창은 변방의 한직을 떠돌다 종성부사로 간 지 1년 만에 한양으로 돌아오다 1583년(선조 16) 객관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최경창이 죽은 후 홍랑의 행적은 조선 중기의 학자 남학명(南鶴鳴)의 문집인 『회은집(晦隱集)』에 전한다. "최경창이 죽은 뒤 홍랑은 스스로 얼굴을 상하게 하고 그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했다"는 것이다. 홍랑은 3년간의 상을 마친 뒤에도 최경창의 무덤을 떠나지 않은 채 그 곳에서 죽으려 했지만 때마침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그래서 홍랑은 최경창이 남긴 시고(詩稿)나 문적(文蹟)을 정리하여 등에 짊어지고 다시 함경도의 고향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7년의 전쟁 동안 그녀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다만 겨우 병화(兵火)에서 피신했으며, 그 덕분에 최경창의 시가 온전하게 후대에 전해지게 된다.

홍랑이 죽자 최씨 문중은 최경창 부부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에 최경창의 묘소와 그녀 무덤이 있다. 그곳에는 현대에 들어 세운 홍랑가비(歌碑)가 서 있다.

 

인물과 재능이 출중했던 홍랑에게 최경창 같은 예인은 변방의 평범한 사내들과는 그 격이 다른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며, 홍랑으로서는 최경창을 직접 만나고 사랑할 수 있어서 여한이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만남/사랑은 삶의 규범 및 제도적 틀과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충돌하는지 잘 알게 하는 사례다. 문제는 이러한 충돌 속에서 자신이 어떠한 삶을 선택하는가이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변방에 부임하여 그 지역의 관기를 만나고 동침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당연한 관례였지만 홍랑이란 인물의 진가는 헤어짐의 장면에서부터 드러난다. 홍랑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묏버들의 새 잎이란 매개물로 표현했다. 무엇보다 그것은 한지에 먹으로 쓴 물적 오브제이며, 시각 이전의 직접 몸에 닿는 촉각적인 매체다. 홍랑의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이러한 물적인 오브제가 없었다면 그들의 삶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홍랑은 이 단 한편의 시조를 필적으로 남김으로써 최경창의 마음은 물론 후대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되었다.

 

홍랑이 쓴 정갈한 글씨는 당시 그녀의 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홍랑의 글씨는 조선 후기의 궁체와 같은 흘림이나 꾸밈이 없는 단정한 글씨이다. 특히 글자 세로획들의 반듯한 내리 그음은 그녀의 강단과 지조 있는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럼에도 홍랑의 필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초장 중장과 달리 세 번 째 행인 종장에 이르러 행의 배열도 조금 흐트러지고 글씨 크기도 제각각 다름을 보게 된다. 이 부분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홍랑의 당시 심정이 한 획 한 획마다 숨결처럼 드러나며, 그만큼 그녀의 애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일견 담백해 보이는 글씨에도 마음은 그대로 드러난다.

홍랑의 필적을 전체적으로 보면 담백하게 쓴 듯이 보인다. 그러나 한 획 한 획 또박또박 반듯하게 쓴 글씨는 볼수록 그 품격이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일까, 최경창이 죽자 자신의 얼굴을 훼손하면서까지 한 사람을 위해 정절을 지키고자 한 그녀의 삶이 연상될 정도로 결연한 느낌까지 든다.

임진왜란 때, 홍랑이 최경창의 시고나 문적들을 그토록 지키고자 혼신의 힘을 다한 것도 최경창이 남긴 시고나 문적들이 자신과 최경창의 관계를 입증하는 자료들이고, 무엇보다 이 중에는 자신의 마음이 표현된 이 필적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유추하게 된다. 홍랑의 필적에는 참으로 많은 사연이 담겨 있는 셈이다.

 

3.

홍랑과 최경창의 만남/사랑은 홍랑의 시조로 알려졌으며 묏버들은 그 매개체다. 그래서 이들의 만남/사랑도 청신한 새봄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만큼 만남/사랑에 대한 집약하는 이미지다. 욕망은 현실과 항상 어긋나며, 이는 모든 생명체가 겪는 부조리한 현실이다.

옛 그림이나 필적은 당대의 시공간을 직접 대면할 수 있는 1차 자료로서, 이를 통해 삶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홍랑이 남긴 글씨, 그 중에서도 특히 세 번째 행이 입증하듯, 한 획 한 획마다 글씨는 곧 그 마음을 드러낸다. 이처럼 어떤 사연이 얽힌 당대의 오리지널 오브제야말로 가장 미세한 마음의 떨림까지도 보여준다.

홍랑의 필적은 만남/사랑 속 극히 작은 한 부분의 삶의 흔적이지만 그녀가 글을 쓸 당시의 심경과 옛 조선 여인의 아름다운 마음과 기품을 느끼게 하며, 나아가 사랑과 삶의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글씨는 그 사람의 성품이나 기질, 심지어 숨결까지 느낄 수도 있는 생생한 물적 흔적이다. 옛 유품, 그 중에서도 필적은 그 언어적 내용과 별도로 감추어진 삶의 본질에 대해 더 깊게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단서인 것이다.

2009년 5월 11일

도 병 훈

 

 

주1) 이 시조를 홍랑이 썼다고 밝힌 이는 시조 시인인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이다. 이 글씨의 친필 감정은 시대별 어휘의 특성이나 지질, 그리고 함께 전하는 최경창의 문집 등을 보고 이루어졌으리라 짐작한다. 한글이 궁체 위주의 흘림체로 쓰여 진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이다. 홍랑의 글씨는 조선 중기의 글씨체를 잘 보여주며, 무엇보다 글씨 자체의 품격에서 홍랑의 글씨로 여겨진다.

주2)선조실록 10권, 9년(1576 병자 / 명 만력(萬曆) 4년) 5월 2일(갑오) 2번째 기사는 다음과 같다. 사헌부가 아뢰기를,“전적 최경창(崔慶昌)은 식견이 있는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아 북방(北方)의 관비(官婢)를 몹시 사랑한 나머지 불시(不時)에 데리고 와서 버젓이 데리고 사니 이는 너무도 기탄없는 것입니다. 파직을 명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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