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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8 (06: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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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도>와 서화 다시 보기
        


아는 대로 본다면 새로운 경험은 불가능하다. 어떤 대상과 세계에 대한 낯선 ‘마주침’은 통념의 한계를 자각하게 한다. ‘실존은 사유에 선행 한다’, 또는 ‘도구는 투명하고 사물은 불투명하다’는 말의 의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창작 세계를 감상(鑑賞)하고 비평하는 것은 경험에 대한 해석의 과정이며, 회화 중에는 그 어떤 개념적 용어로도 해석이 쉽지 않은 새로운 관점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예컨대 겸재 정선의 <청풍계도> 이후 선명한 기세의 그림, 담백하면서도 강경(强勁)하기 이를 데 없는 추사 김정희의 만년 글씨와 그림, 전통적 소재와 채색법에서 벗어난 마네의 그림, 빈센트 반 고흐가 생애를 마감할 무렵에 그린 특정 색에 대한 광적인 선호와 요동치듯 선이 흔들리는 그림, 끝내 단순화된 색채의 조합으로 귀결된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 산 연작, 잭슨 폴록의 ‘No시리즈’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중 추사 김정희(1786,정조10년,~1856,철종7년) 만년의 그림이나 글씨는 여러 면에서 이채로운 특성을 보여준다. 추사의 그림은 몇 점의 산수화와 수십 폭의 난 그림 등이 전하지만 글씨에 비해서는 많지 않다. 추사의 난 그림은 간송미술관 소장의《난맹첩(蘭盟帖)》, 개인소장의 <산심일장란도(山深日長蘭圖)>, <증번상촌장란도(贈樊上村庄蘭圖)>, <불기심란도(不欺心蘭圖>, <불이선란(不二禪蘭)도> 등이 알려져 있다.
이 중 <불이선란도; ‘不作蘭圖’라고도 함>는 추사의 <세한도>와 더불어 추사 그림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불이선란도>에는 기년(紀年)이 적혀 있지 않지만 제시와 제발의 내용 및 서체 등으로 보아 추사가 만년에 그린 그림으로 추정된다.  
최근 나는 책상머리 맡에 사진그림으로 표구한 <불이선란도>를 세워 놓고 추사 특유의 담백하면서도 도도한 성정과 기(氣)의 선적 흐름, 즉 맥세(脈勢)가 드러난 난 잎과, 여백 부분의 필적을 틈날 때마다 들여다보았다. 이전에 그린 <세한도>에서 제주 유배시절 자신의 실존적 처지와 심경을 간결하면서도 꼿꼿한 필치로 구현한 추사가 <불이선란도>에서는 어떤 차원에 이르렀기에  “20년 동안 난을 치지 않아도 본성의 참모습이 드러났네.”고 자찬하였을까?


<불이선란도>의 구성과 붓질의 특성

제시에서 드러나듯 <불이선란도>는 오랫동안 그리지 않다가 그린 그림이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불이선란도>는 여느 난 그림과 다르며, 이 그림 이전에 그린 추사의 ‘묵란도(墨蘭圖)’와도 사뭇 다르다. 추사가 중 장년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난맹첩》의 15폭 난 그림 중 특히 <적설만산도(積雪滿山圖)>나 <춘농로중도(春濃露重圖)>, 그리고 <인천안목도(人天眼目圖)>에서 볼 수 있는 난은 칼끝으로 그은 듯 날카롭고 예리하여 당시 추사의 추상같은 성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불이선란도>는 담백하면서도 유희하는 듯한 특성이 보이며, 난의 구성이나 형세도 파격적이다. 전형적인 난 그림의 경우 대개 꽃대는 난 잎 사이에서 솟아나 있는데, 이 그림에서는 꽃대만을 별도로 큰 비중으로 그렸다. 또한 화심(花心)을 제외한 난 잎과 꽃대는 옅은 먹으로 그렸으며, 몇 개의 난 잎은 건필(乾筆)과 검묵(儉墨), 즉 붓끝에만 먹물을 묻혀 쓰는 붓질과 먹을 아껴 쓴 흔적만 보일 정도이다.
그림의 구성을 보면 1, 2엽으로 전형적인 봉안(鳳眼)과는 다르게 봉안을 그린 후 3, 4 엽으로 이를 깨트렸다. 이 같은 화법으로 5,6엽을 친 후 7,8엽으로 다시 파봉(破鳳)하였다.  
잎은 전체 10엽이지만 단연 1엽의 비중이 크다. 1엽의 형세는 잎 폭에서 큰 변화 없이 왼쪽 위를 향해 그려지다 크게 꺾이는 전절(轉折)에서 화면 오른쪽 위를 향해 대각선으로 뻗은 기세를 보여준다. 그래서 필세, 즉 붓의 흐름과 생동하는 맛, 힘의 패턴, 역동적 긴장감이 특히 두드러진다. 반면 2엽은 둥근 곡선형에다 기교적인 선을 구사하여 굵고 가는 비수(肥瘦)의 변화가 크며 농담의 변화도 나타난다. 이 때문에 1엽의 단순한 기세가 돋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1엽의 존재감은 희미하게 마른 붓질을 한 5옆, 6엽과 대비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뿐만 아니라  ‘ㄷ자 형으로 그린 3엽과 7엽도 1엽을 살려준다. 또한 난 잎이나 꽃대의 전절이 보여주는 경사성은 방향성 긴장감을 자아내며, 이로 인해 잎 사이의 간격 뿐 만 아니라 화면이 생동감 있는 공간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난의 아래 부분은 매우 빽빽한 반면, 윗부분은 상대적으로 잎 사이의 간격을 넓게 그려 공간으로 확산되는 듯한 데, 이는 4엽과 7엽, 그리고 8엽의 상단 끝 부분을 매우 희미한 갈필로 그려 더욱 그러하다. 이 그림은 얼핏 보면 단조로운 듯하지만 이른바 ‘삼전지묘(三轉之妙)’를 살려 난 잎을 쳐야한다는 자신의 ‘난화론’을 입증하듯, 잎 새의 변화가 무궁하다.
꽃대는 맨 좌측에서 꺾여 뻗어 올라가는 형세인데 상단부분은 비백까지 보일 정도로 속도감 있는 필치를 구사하다 다시 한 번 90도 가까이 꺾어 꽃을 그린 후 화심만 농묵(濃墨)으로 찍었다. 4개의 꽃잎도 아랫부분은 그 간격을 좁게, 윗부분은 넓게 하고, 2개의 화심도 위는 크게 아래는 작게 찍어 막 피어나는 듯한 참신함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불이선란도>는 담묵으로 그렸으면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의 난 잎은 물론 꽃대, 심지어 화심에 이르기까지 변화의 진폭이 크다.
이러한 난 그림의 선적 표현은 기(氣)를 바탕으로 한 세계관이 깔려 있으며, 무심한 듯 하면서도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추사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난초 치는 것은 서너 장의 종이를 넘을 수 없다. 신기(神氣)가 서로 일치되고 주변의 분위기가 맞아야 한다. 주1)  

한자 문명권에서 ‘기(氣)’는 인간의 몸, 산세와 지세를 보는 풍수사상, 그리고 글씨와 그림은 물론 칼을 쓰는 일에 이르기까지 세계와 삶과 예술, 사유에 일관된 개념이다. 그렇다고 기는 초월적, 형식적 개념도 아니며, 경험적 체험이 반영된 내재적이고 유동적인 개념아닌 개념이다.
추사의 글에서도 역시 ‘기’를 바탕으로 논지를 펼치며, 그가 인용하거나 직접 쓴 여러 글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 장화의「학서요론」을 인용한 글에서,  필획의 성글고 빽빽함과 가볍고 무거움, 굵고 가는 변화를 ‘내기(內氣)’라 하고, 행간의 좁고 넓음, 또는 자간의 좁고 넓음을 구성하는 장법을 외기‘(外氣)’로 보았다. 그러므로 ‘내기’는 인간의 몸과 상관이 있으며, 외기는 내기를 펼치는 장과 상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추사는 글씨 쓰는 공간을 ‘내기’와 ‘외기’가 만나는 장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추사는 서화를 구분하지 않았으므로 이런 차원에서 <불이선란도>는 난을 모티브로 한 기의 강함과 약함, 집중과 분산, 빠름과 느림 같은 생성과 흐름이며, 그 기와 기의 만남이 질감으로 드러나는 그림이다.  


<불이선란도>의 제시와 제발 다시 보기

<불이선란도>에는 마치 난초를 에워싸듯, 한 수의 제시(題詩)와 세 개의 발문(跋文)이 붙어 있다. 글은 전통적인 순서와 달리 왼쪽 위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이러한 역행법은 청나라 때 서화로 유명한 판교 정섭(板橋 鄭燮,1691~1764)의 영향을 받았다. 상단 부분을 쓴 후 오른쪽 아래로 내려와서 작게 썼다. 이어 왼쪽 아래로 내려가서 다시 역행(逆行)으로 쓰다가 또 다시 안쪽의 그림 옆에 작게 추가로 썼다.
그리고 ‘제시’와 ‘제발’은 그림보다 유난히 먹색이 짙다. 글씨의 획은 실처럼 가늘거나  매우 굵기도 하며, 특히·‘난蘭’은 더욱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획을 보여준다. 그리고 제시 첫 행에서 보듯 ‘난蘭’자와 ‘이십년’의 현격한 크기 대비와 함께, ‘년’의 끝을 급하게 소멸되게 써서 ‘난’ 자가 상대적으로 더욱 커 보인다.
글씨는 전체적으로 유희하는 듯 썼으면서도 강밀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추사 만년 서체의 주된 특징이기도 하다. 위쪽 첫째 제시와 이어 쓴 발문은 다음과 같다.
          
  난을 그리지 않은 지 20년                        부작란화이십년(不作蘭花二十年)
  우연히 본성의 참모습이 드러났네.                우연사출성중천(偶然寫出性中天)
  문 닫고 찾으며 또 찾은 곳                       폐문멱멱심심처(閉門覓覓尋尋處)
  이것이 유마의 불이선일세                        차시유마불이선(此是維摩不二禪)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또한 비야리성에 살던 유마거사(維摩居士)의 말없는 대답으로 응하겠다. 만향(曼香)쓰다.(若有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無言謝之, 曼香.)

이 제시의 첫 행에 나오는 ‘부작란화 이십년’은 말 그대로 이 기간 동안 난초를 그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추사가 석파 이하응(石坡, 李昰應,1820~1898)에게 보낸 다음 문장에서도 확인된다. 즉 “나는 배우려고 심히 노력하였으나 지금은 또한 남김없이 할 마음을 잃어버려서 이리저리 떠돌면서 그리지 않은 것이 이미 이십여 년이나 되어 버렸다”는 내용이다. 주2) 그러나 평생 추사가 난 그림을 통해 추구한 일관된 경지나 남긴 글로 볼 때, 말 그대로 20년 동안 난을 전혀 그리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러한 사실은 추사가 제주 유배시절 아들에게 쓴 난초 치는 법에 대해 말하면서 종이를 많이 보내 온 것을 나무라는 부분이 있고, 또한 유배시절에 아들에게 주기 위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불기심란도>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주3) 추사의 제주 유배시기가 55세에서 63세 사이이므로 설령 55세 때 이 그림을 그렸다 하더라도 추사가 생을 마감하는 해까지는 20년이 채 안되므로 부작난화 이십년이 말 그대로 이 기간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위 글이나 이 <불이선란도>의 제시로 보아 추사가 《난맹첩》을 그린 이후 오랫동안 거의 난 그림을 그리지 않았음은 사실로 보인다.
먼저, 우연히 본성의 참 모습이 드러났다는 이 제시 두 번째 행과의 상관관계를 통해서도 그 참뜻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두 번째 행의 핵심어는 ‘성중천(性中天,본성의 참모습)’인데, 성중천의 ‘천’은 단지 하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동양의 고전을 통해 알 수 있다. 『장자』에는 ‘천’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소나 말이 발이 4개 있는 것 이것이 천(天)이요, 말머리에 고삐를 쉬우고 소의 코를 뚫는 것 이것이 인(人)이다.’ 무엇보다 ‘천’은 송대의 신유학인 성리학에서 리(理), 성(性)과 함께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빈번히 나오는 용어이다. 학자에 따라 ‘천’에 대한 해석은 다르지만 ‘스스로 그러한’ 세계를 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작란’과 ‘성중천’의 참뜻은 추사가 아들에게 전한 다음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난을 치기가 가장 어렵다. … 또 모양을 비슷하게 하는 데에도 있지 않고 길을 따르는 데도 있지 않고 화법으로써 들어가는 것도 대단히 꺼린다. 또한 많이 그린 연후에야 가능하니, 당장에 성불할 수도 없으며 또 맨 손으로 용을 잡을 수도 없다. 비록 구천 구백 구십 구분에까지 이룰 수 있다 하여도 그 나머지 일분은 가장 원만하게 이루기 힘드니, 구천 구백 구분은 거의 모두 가능하나 이 일분은 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역시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후략) 주4)  

위 글에서 추사는 겉모양으로 난의 참모습을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추사는 난의 겉모습을 그리기 위해 난을 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추사가 말하는 본성의 참모습이란 초시간적이고 불변적의 대상의 참모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본성의 참모습을 성리학에서는 선험적인 절대 진리인 ‘리(理)’의 차원에서 말한다. 이른바 ‘성즉리(性卽理)’이다.
그런데 김정희는 우주 운행 근거를 음양오행의 기(氣)로 설정한 청대의 학자 대진(1723~1777)의 사상을 수용하여 인간의 혈기(血氣)와 심지(心知)에서 발현된 욕망의 발현을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다. 이에 대한 추사의 견해는 ‘사사로움(私)’은 욕구의 잘못에서 생기고 ‘가림(蔽)’은 앎의 잘못에서 생긴다는 내용을 담은「사폐변(私蔽辨)」이란 글에서 드러난다. 주5)그러므로 위의 마지막 구절에서 ‘나머지 일분, 즉 자연의 본성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는 부분도 「사폐변」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추사의 생각은 그의 간찰이나 제발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래 추사의 글도 위의 내용과 유사한 맥락의 예술 정신이 드러난다.

요즘 사람들이 써낸 글씨를 보니 다 능히 ‘허화’하지 못하고 사뭇 악착한 뜻만 많아서 별로 나아간 경지가 없어서 한탄스런 일이다. 글씨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허화에 있는 것이니 이는 인력으로 나아갈 바가 아니요, 반드시 일종의 천품을 갖추어야만 능한 것이며, 심지어 법이 갖추어지고 기가 이르러 가면 한 경지가 조금 부족하다 해도 점차로 정진되어 스스로 가고자 아니해도 곧장 뼈를 뚫고 밑바닥을 통하는 수가 있기 마련이라네. 주6)

위 글에서, 점차로 정진하면 가고자 아니해도 뼈를 뚫고 밑바닥과 통한다는 말은 추사가 인간과 자연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보지 않았음을 알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허화’라는 말도 ‘성중천’이란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성중천’이나 ‘허화’에서 드러나는 그의 예술관은 <불기심란도>의 제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불기심란도>는 추사의 난 그림 중 《난맹첩》과 <불이선란도>의 사이에서 그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그 글씨체가 <세한도>의 제발과 매우 유사하여 추사가 제주 유배시절에 아들에게 주기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이다.

난을 칠 때에는 스스로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잎 하나 꽃술 하나라도 안으로 마음을 살펴 한 점 부끄럼이 없는 후에 남에게 보여야 한다. 모든 사람이 쳐다보고 모든 사람이 지적하니 두렵지 아니한가. 이 작은 그림도 반드시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비로소 손을 델 수 있는 기준을 얻게 될 것이다. 주7)

이 글에서 추사는 난을 칠 때 무엇보다 거짓을 경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불이선란도> 제시의 첫 행의 의미도 다시 보게 된다. ‘부작란화 이십년’은 말 그대로 20년 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내용이면서도, 또한『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에 나오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부작’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술이부작은 “나는 전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을 기술할 따름이지 새로운 것을 꾸미는 것은 아니다.” 라는 의미로 공자가 한 말이다. 이처럼 추사는 난을 그릴 때 어디까지나 ‘자기기인(自欺欺人)’, 즉 그림을 그릴 때 꾸밈을 경계하였고, 이를 평생 실천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래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요사이 붓끝에만 먹물을 묻혀 쓰는 붓질과 먹을 아낌으로써 원나라 사람들이 거칠고 간략한 것처럼 억지로 꾸며내려고 하지만 모두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이다.(후략)주8)  

이 뿐 만 아니라 추사는 다른 그림을 논하면서도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이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예술적 형식은 그의 삶의 시기별로 크게 달라지지만 자신과 남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는 예술 정신을 평생 일관되게 실천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불이선란도> 제시는 난초를 꾸며 그리지 않은 지 20년 만에 비로소 자신을 기만하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은 자족한 세계를 그리게 되었다는 자부심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유마불이선 앞의 ‘문 닫고 찾고 또 찾은 곳’이란 구절에서도 드러난다.주9)  
그러므로 <불이선란도> 제시 끝부분의 ‘유마의 불이선’도 평생 자신이 추구한 예술관의 집약한 선(禪)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불이선은 ‘불이법문’에서 유래한 말로 그 출처는 <유마경維摩詰所說經>‘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이다. 유마는 출가하지 않은 석가모니의 재가 제자로 출가하지 않고도 살고 죽는 것과 있고 없음이 둘이 아님(不二)을 침묵으로 입증한 사람이다. 이런 차원에서<불이선란도>는 ‘상(相)과 색(色)이 공(空)인 세계이다.  둘은 둘이 아니고 둘 아닌 것도 아닌 것이며, 하나의 공상(空相)에 의하여 그 평등의식마저 유마는 부정하였다. 그래서 이 제시에서 추사는 자신을 유마에 비유한 것이다.
추사는 사대부였지만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당대의 대표적인 선승과 교리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승려들에게 보낸 서신과 게송도 다수 남길 정도였다. 특히 만년에는 봉은사라는 절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불교에 심취한다. 아래 글은 추사가 불교와 선에 대해 말한 부분이다.

그림의 이치는 선과 통하네. 마힐 왕유 같은 사람은 그림으로 삼매의 경지에 들었고, 노릉가와 거연, 관휴 같은 무리들은 모두 정신으로 통달하여 유희했네. 그 요결에 이르기를 “길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물은 흐를 듯 흐르지 않는다”고 한 것은 바로 선지의 오묘한 경지일세(후략) 주10)

이처럼 추사는 불교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며, 그래서 <불이선란도>에서도 자신이 도달한 경지를 불교의 선적 깨달음을 표현하는 말인 ‘불이선’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불이선이란 말은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세계를 말한다. 이는 불이선란도와 제시와 제발에서 유 불 선을 융합하는 통섭성이 볼 수 있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유교적 상징인 사군자를 그린 것과 제시에 드러나는 ‘부작’의 참의미와 선객노인의 선(仙)은 유교와 도교를 아우른 추사의 통섭적인 서화관이 잘 드러나며, 이 또한 불이의 세계다. 이처럼 ‘불이선’은 모든 이질적인 글씨를 통섭하여 독창적인 예술세계에 이른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또한 ‘불이선’은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을 일관성 있게 구현하면서도 추사가 평생 연구한 비학碑學과 첩학帖學을 혼융한 성과를 선(禪)적 깨달음으로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불이선란도>는 ‘법고’와 ‘창신(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이라는 어쩌면 모순적이기도 한, 두 가지 목적을 ‘불이’, 즉 둘이 아니라는 불교적 세계관에서 융합된 그림으로도 볼 수 있다.  이는 그림 속  1엽 난 잎을 경계로 그 아래 여백에 쓴 두  번째 발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오른쪽 중간의 두 번째 발문은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의 기이한 글자 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겠으며 어찌 좋아하겠는가? 구경이 또 쓰다.(以草隸奇字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구竟又題” <古硯齋>

초서와 예서를 혼융한 붓질로 난초를 쳤다는 말이다. 예서와 초서는 엄연히 다른 방식의 글씨체다. 그런데 상이한 글씨체를 혼융하여 그림을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리라 말한 것이다. 사실 ‘초예기자지법’은 문인화의 이상을 실천하는 방법론으로 동기창(1555~1636)이 제시한 말이지만 추사는 자신이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노라고 자부한 것이다. 예컨대 추사가 심희순(1819~ ?)에게 보낸 편지글에서도 이러한 면을 확인할 수 있다.

근일에 서법이 모두 급하고 촉박한 길로만 치달아서 항상 즐겁게 여겨지지 않더니만 지금 영감의 글씨를 보니, 첫째는 사군자의 너그럽고 가없는 도량이 팔목 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요. 둘째로는 순전히 천기로써 움직여 필묵의 혜경 밖에 있어 일점의 속된 기운이나 일호의 기교가 없는 점이라 이 때문에 항상 대해도 싫증나지 않는 거외다. 남들이 보면 이를 만필이나 희묵으로 여겨 여러 말이 곁에서 일어날 것이나 교계하고 변명할 거리도 되지 않으니, 속된 눈들이 어찌 알 수 있으리오. 주11)  

위 글의 핵심은 특히 ‘천기로서 움직여 필묵의 혜경(법식) 밖에 있어 일점의 속된 기운이나 일호의 기교가 없는 점이라…’라는 부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천기’는 불이선란도의 성중천과 뜻이 통한다.
이런 의미에서 결국 <불이선란도>의 제시와 제발 및 그림에 대한 품평에 나타난 예를 종합할 때 속된 꾸밈없이 ‘천진’과 ‘자유’의 정신으로 걸림 없는 통섭의 차원에 도달했다는 자긍심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주12)


추사 서화세계의 변천과 특색

추사 김정희의 생애는 순탄치 않았다. 추사는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부터 온갖 풍상(風霜)을 겪는 삶을 살았다. 특히 장년기 이후에는 세도다툼에 휘말려 여러 번 가화(家禍)를 겪고 문초까지 당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으며, 제주에서 8년 3개월(55세~63세 : 1840년, 헌종 6년~1848년, 헌종 14년), 함경도 북청에서 약 1년(66세~67세 : 1851년, 철종 2년~1852년, 철종 3년)등 장기간에 걸쳐 두 번이나 기약 없는 유배생활을 했다. 그리고 67세때인 1852년부터 과천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인근 봉은사를 오가며 오랜 벗들과의 교류 및 시서화에 매진하다 71세 때인 1856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추사의 글씨와 그림의 변천과정은 이러한 생애의 굴곡을 반영하며, 특히 과천시절 이후 더욱 달라졌다. 이를 통해 추사의 서화세계는 이러한 역경과 정신적 지평의 확장 속에서 변화되고 승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추사의 학문과 서화의 결정적 전기는 25세 무렵의 청나라 연행(燕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추사는 이 연행을 통해 조선시대에 주로 성행한 학문이나 글씨가 왜곡되거나 편향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귀국하여 6년 뒤 완원의 학설을 수용하여「실사구시설(實事求是設)」을 썼다. 이후 그의 평생은 실제 사건이나 사물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 학문을 추구하였다.
그래서 추사는 글씨의 경우 왕희지체 이전의 글씨를 추구하였고, 결국 생애 만년에 이르러 미려한 꾸밈과는 거리가 먼 뼈대만 남은 것 같은 완강하고 또렷한 글씨를 쓰게 된 것이다. 추사 만년의 글씨가 간결하면서도 마치 나뭇가지로 먹물을 찍어 쓴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특성은 추사의 그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는 역시 추사가 금석학에 바탕을 둔 고증학적 학문을 통해 동양의 서예역사나 그림에 대해 통관할 수 있는 학문적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고증학을 통해 글씨의 꾸밈이라는 것도 시대에 따라 다르며 부차적이고, 심지어 자신도 모르게 사람을 속이게 되는 짓거리임을 간파하였다는 것이다. 그가 여러 글에서 조선의 전통적 글씨에 대해 편벽되고 고루하다고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이다.
추사의 학문관을 스스로 말한 고백으로 집약하면, 제주에서 자신의 작은 초상화에다 생애를 술회하며 쓴 글로 “담계 옹방강은 ‘옛 경을 좋아 한다’ 하였고, 운대 완원은 ‘남이 한 말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두 분 말씀이 나의 평생을 다 드러냈다.” 주13)는 말이다. 그리고 “법은 사람마다 이어받을 수 있지만 정신과 흥회는 사람마다 스스로 이룩해야 되는 것” 주14)이라는 말은 추사의 개별성 짙은 서화관을 잘 알게 한다.

추사가 평생 일관되게 주장한 서화관은 이른바‘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이다. 그림이든 글씨든 심오한 학문적 소양과 부단한 공부를 바탕으로‘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추사의 그림을 두고 학문에 입각한 관념미를 구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추사에게 서화는 성리학의 공부방식인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길이었으며, 이는 몸과 일로써 체험하는 것이었다. <불기심란도>와 제발과 <불이선란도> 제시의 핵심어인 ‘성중천’이나 ‘불이선’이란 말에 드러나듯, 추사는 만년에 이르러서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자신의 신체적 감응과 호흡에서 우러나온 서화세계를 지향했다.
이러한 서화관은 한자 문명권 특유의 세계관이나 추사의 여러 글에서 확인 할 수 있듯, 만물의 본질을 기의 흐름과 변화로 보는 세계관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의 흐름은 현실적 상황과 몸의 경험에 따라 다르게 구현된다. 똑 같은 글씨를 쓰고 똑 같은 그림을 그려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서양의 언어를 빌리면 ‘기’란 나타난 현상 너머의 실재, 즉 ‘리얼리티’를 말하는데 한자 문명권에서는 변화 자체가 ‘리얼리티’인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기의 흐름을 변화로 보여줄 수 있는 개성적 필력이며, 이는 저마다의 인간적 기질과 삶의 체험의 진폭에 따라 다르게 구현된다. 추사가 만년에 도달한 서화세계의 진면목도 이와 다르지 않음을 <불이선란도>는 물론 만년의 글씨를 대표하는 <대팽두부>같은 일체의 장식적 꾸밈이나 군더더기 없는 대련 글씨에서 확인할 수 있다.주15) 이처럼 추사의 서화는 철저하게 개별성을 띤다는 것이다.
결국 추사의 삶은 지적 정직성을 중시한 고증학적 학문에 바탕을 둔 정신의 실천, 즉 스스로도 남을 속이지 않겠다는 정신을 실천하려는 의지로 일관된 것이었다. 추사가 어느 글에서, 『주역』의 ‘나아가거나 물러나거나 그 올바름을 잃지 않는다’를 언급한 것은 곧 자신의 곧은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러한 추사의 의지는 오랜 기간 변방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세상과의 단절 속에 승화되며 그것은 그 모든 것이 현재 속에 융합되는 아닌 불이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 걸림없는 삶을 살고자 했다. 주16) 이 때문에 그의 서화세계는 그만큼 독보적인 권위를 갖게 되어 당대 예술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그가 일으킨 ‘완당(김정희의 또 다른 호)바람’이 오늘의 시점에서 뒤돌아보면 한국이라는 땅에 뿌리 뻗고 자라날 그림의 꽃나무들을 모진 바람으로 꺾어 버렸으며, 그래서 진경산수화 등 사실주의 화풍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겸재의 진경산수화나 단원의 풍속화는 당대의 문화적 풍토 속에서 성취한 개별성이듯, 추사의 서화세계는 ‘추사’라는 인물이 당대를 살면서 겪어야만 했던 체험과 혈기의 산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추사의 서화세계가 ‘사의(寫意)’로 치우치는 바람에 ‘형사(形似)’를 중시하는 ‘사실주의’를 퇴조시켰다는 시각도 문제가 있다. 구체적 대상을 정교하게 그린 그림들도 알고 보면 대상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일부 속성만을 표현한다. 꽃 한 송이를 아무리 그럴듯하게 그려도, 즉 형사에 치중하여도 실재 대상인 꽃과는 엄연히 다른 대상일 수밖에 없다면 ‘사실주의’의 한계는 분명하다. 그러므로 추사로 인해 사실주의가 퇴조되었다는 말은 원천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맺음말

<불이선란도>는 추사 김정희가 20년 만에 친 한 폭의 난이다. 추사는 이 난을 성중천이라 하고, 또한 ‘유마(維摩)의 불이선(不二禪)’이라 했다. 불이선은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것을 넘어선 경지를 말한다. 평생 굴곡 많은 인생 끝에 추사는 만년에 이르러 불이의  경지를 추구한 것이다. 그래서 <불이선란도>는 유희하는 듯 담백하다. 이 그림은 또한 간결하면서도 변화가 많고 고졸하면서도 참신한 느낌을 주는데, 추사의 앞선 시기의 작품과 크게 다른 점이다.
연행이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온갖 역경 속에 살면서도 추사는 실사구시의 삶을 살았으며, 글씨와 그림은 자신의 이러한 뜻을 펼치는 세계였다.  
그러므로 추사의 난 그림은 실제의 난을 모사한 것도 관념적인 선의 표현도 아니며, 그야말로 먹으로 그린 ‘묵란’이다. 그것은 체현된 기의 밀도의 흔적이며 변화를 야기하는 힘이다. 그래서 이러한 기의 흐름은 그만큼 감응적이고 촉감적인 변이의 공간을 형성 한다.
특히 추사는 만년에 이르러 모든 것을 아우르는 불이의 세계에 이르며, 그래서 이 무렵의 글씨와 그림은 변화의 흐름인 기(氣)의 리듬만이 담백하고도 강렬한 밀도로 나타난다. 이런 맥락에서 추사 만년의 서화는 여유롭고 넉넉한 마음이 빚은 삶의 흔적이며, 이런 차원에서 또한 ‘공’과 다르지 않은 세계인 것이다.  
                              
                                 2009년 4월 26일  
                                    도 병 훈

주1)金正喜 著, 崔完秀 譯,『秋史集』, 현암사, 1976, p.313. 「與佑兒」 312~314중에서 부분 발췌 …殊可憤荀寫蘭、 不得過三四紙。 神氣之相湊、境遇之相融、…    
주2)金正喜 著, 崔完秀 譯, 앞의 책, p.160.…余推鹵甚、 今又頹唐無餘、 鸞飄鳳泊、不作已二十年餘。…「題石坡蘭卷)」중 부분발췌
주3)金正喜 著, 崔完秀 譯, 앞의 책, pp.158~159 「題石坡蘭卷)」중 부분발췌
주4) 추사는 阮堂全集 卷一의 「사폐변」에서“생양의 도는 욕에 있고, 감통의 도는 정에 있는데, 사람이 각각 그 정을 얻고 욕을 이루되, 도의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사폐변」은 청대의 학자인 대진(1723~1777)의 『맹자자의소증』의 내용을 수용하여 저술한 것으로, 사람의 근심거리를 사(사사로움)과 폐(가림)으로 보며, 사사로움은 욕구의 잘못에서 가림은 앎의 잘못에서 생긴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주5)金正喜 著, 崔完秀 譯,앞의 책, pp.158~159 「題石坡蘭卷)」중 부분발췌
주6)阮堂全集, 卷四, 書牘, 見作書者, 皆不能虛和, 軏多齪齪之意, 殊無進境可歎, 此書之最可貴者, 卽在虛和處, 此非人力可到, 必具一種天品, 乃能, 至如法備氣到一境, 差欠而漸次精進, 自有不欲行而直詣透骨徹底處耳。
주7)金正喜 著, 崔完秀 譯, 앞의 책, p.312.
주8)澗松美術館, 『秋史精華』, 知識産業社, 1983, p.234. 近以乾筆儉墨,强作元人荒寒簡率者, 皆自欺而欺人…  
주9) 이 구절은 청의 서화의 대가인 板橋 鄭燮(1691~1764)의 시 구절 ‘山中覓覓復尋尋’을 변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시 구절을 주제로 한 <山中覓尋>이란 난 그림이 《난맹첩》에 전한다. 간송문화 제71호, 한국민족미술연구소, 2006년, 185쪽 참조
주10) 阮堂全集, 卷七, 雜著, 「示云句」 畵理通禪 如王摩詰 畵入三昧 有若盧楞伽巨然貫休之徒 皆神通遊戱 其訣云 路欲斷而不斷 水欲流而不流者 是禪旨之奧妙也…
주11) 阮堂全集, 卷四, 書牘, 近日書法進趍齪齪一路 常所不樂 今見令書 第一 是士君子襟度 坦無厓涘 有流出於腕底者 第二是純而天機行之 在筆墨蹊逕之外 無一點塵俗氣 無一毫機巧意 所以常欲對之而不厭 人之見者 以爲是漫筆戱墨 中咻旁起 便不足較辨也 俗眼鳥得知之也…
주12) 왼쪽 아래의 세 번째 발문은 ‘애당초 달준에게 주려고 아무렇게나 그린 것이다. 다만 이런 그림은 하나만 있지, 둘은 있을 수 없다.’ 仙客老人.” 示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 仙客老人, 樂文天下士 金正喜印
추사의 문집에 남아 있는 서찰, 시들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추사는 1853년 반대파의 탄핵으로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을 가서 달준이라는 평민 출신의 총각을 만난 뒤 시동처럼 부렸다고 한다. 달준은 먹을 갈아주어서 ‘먹동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며, 추사가 귀양에서 돌아와 과천에 은거할 때도 추사를 모셨다고 한다.  
왼쪽 아래 안쪽의 네 번째 발문은 “소산(小山) 오규일(吳圭一)이 보고 억지로 빼앗으니 우습다.(吳小山見而豪奪, 可笑.)” 이는 소산이 달준에게 준 그림을 가로챘다는 것이다. 그래서 추사는 “소산이 보고 억지로 빼앗으니 정말 가소롭고 우습구나.” 라는 익살스런 제발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일화의 세세한 기록은 이 그림에 얽힌 생생한 사연을 알게 하여 흥미를 더한다.
또한 이 그림에는 지나치게 많을 정도로 여러 개의 낙관이 찍혀 있는데, 이 중 추사가 직접 찍은 것은 첫 번째 제발의 ‘만향’밑의 추사, 두 번째 제발 끝의 고연재, 네 번째 발문 밑의 낙문천하지사, 김정희인 이며, 나머지는 후대의 소장가들이 찍은 것이다.
주13)覃溪云, 嗜古經, 芸臺云, 不肯人云亦云, 兩公之言, 盡吾平生(金正喜, 『阮堂全集』,卷六「제발(題跋)」, 또 제주에 있을 때(又-在濟州時)
주14)阮堂全集, 卷八, 雜識, 法可以人人傳 精神興會 則人人所自致
주15)<대팽두부>는 추사의 몰년인 1856년, 71세때 쓴 마지막 대련 글씨로 전한다. 대팽두부의 원문은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라는 현세적 내용으로 글씨도 이와 걸맞게 일체 군더더기가 없는 형식을 보여준다.
주16)현대의 선적 깨달음을 대표하는 선승인 성철이 평생 가장 강조한 말이 불기자심(不欺自心,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말라는 뜻임)이었다. 이로 보아 추사의 만년의 예술관이 불교의 선적 깨달음과도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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