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 5759
2007.06.05 (17:5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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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나와 너의 세계, 미술”에 대한 단상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를 중심으로-

1.  
  이번에 출간된 나의 졸저 책 제목은 단지 평범한 뜻으로 정한 것이 아니다. ‘나와 너의 세계’는 현대의 고전으로 유명한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책, 『나와 너』를 통해서도 생각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를 염두에 두고 책 제목을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말한 ‘나와 너’와 상관이 없지 않다.  
  마르틴 부버는 ‘깨어진 세계, 인간의 자기상실, 원자화’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깨어진 데서 온 것으로 보고, 이를 객체화 될 수 없는 주체이며 인격으로서 공존하는 ‘나’와 ‘너’의 만남, 곧 ‘나’와 ‘너’의 대화를 통하여 회복하려고 하였다. 부버의 사상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2.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사실은 인간과 함께 하는 인간이다.”(『인간이란 무엇인가』)는 사상을 전제로, ‘나’는 ‘나’만으로서는 존재하지 못한다. 우리가 ‘나’라고 말할 때 그것은 ‘나-너’의 ‘나’이거나 ‘나-그것’의 ‘나’이거나 이며, 이 밖의 ‘나’란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이 두 가지의 근원어의 근본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너’는 내가 ‘나’의 온 존재(Wesen)를 기울여야말 비로소 말할 수 있는 데 반해, ‘나-그것’은 ‘나’의 온 존재를 기울여 말할 수 없다. ‘나- 그것’의 관계는 인간의 객체적인 경험 ― 지식의 세계의 것이요, ‘나-너’의 관계는 인간의 주체적인 체험 ― 인격의 세계다.
우리가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사물의 표면을 돌아다니면서 그것은 경험한다. 우리는 이 사물로부터 그것들의 성질에 관한 지식, 곧 경험을 가져온다. 하지만 그는 사물에 붙어 있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경험만으로는 세계를 사람에게 가져올 수 없다. 경험은 사람에게 오직 ‘그것’과 ‘그 여자’, 그리고 ‘그것’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가져다 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너는 오직 존재를 기울여서만이 말해질 수 있다. 그렇지만 ‘나-너’의 세계와 ‘나-그것’의 세계는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며, 하나의 세계의 전체를, 모든 사람, 모든 인간 활동을 꿰뚫고 있는 이중성이며, 상호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은 ‘그것’ 없이는 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 사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현대적 상황이 너무도 전적으로 ‘그것’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 너’에 있어서 모든 ‘너’는 언젠가는 ‘그것’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에 우리 운명의 숭고한 우수가 있다. 더 없이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나-너’의 직접적, 상호적 현존적 관계는 때의 흐름과 더불어 사라져 버리고, ‘너’는 ‘그것’으로 변하고 말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차원 더 깊은 자각을 한다면 낱낱의 ‘너’를 넘어서 마침내 ‘너’이면서 결코 ‘그것’이 되지 않은 ‘영원한 너’를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무리 현전하며 생성되는 자를 통하여 ‘영원한 너’의 옷자락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원한 너’는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요컨대 부버에 의하면 인간의 세계에는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질서가 있다. 그 하나는 ‘나-너’의 근원어에 바탕을 둔, 참다운 대화가 이루어지는 인격공동체이며,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 곧 ‘그것’으로 밖에 보지 않는 ‘나-그것’의 근원어에 바탕을 둔 집단적 세계이다.
그러나 부버가 서양인이고 무엇보다 유대인이어서 그런지 ‘나와 너’에 대한 논의도 결국 서양인 특유의 초월적인 사상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점은 나의 세계관과는 다르지만 ‘나’와 ‘너’의 이면에 대한 심도 있는 철학적 논의는 우리의 삶과 예술을 깊게 이해하는 또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3.
  사실 이번 책의 표제의 나와 너는 ‘나’와 ‘타자’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너’는 동양과 서양을 뜻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타자와의 만남, 즉 교류 속에 제3의 새로운 사건이 일어난다.
세계는 개개인의 사람마다 다른 ‘다질 공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미술의 특성과 가치에 주목해왔다. 미술 또한 그 어떤 영역보다 다질 공간, 즉 다양성이 그 특징이기 때문이다. 즉 미술은 개별 작품마다 각각 하나의 세계이면서 ‘세계’의 여러 얼굴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이런  의미에서“좋은 회화와의 만남은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고 ‘세계’와의 새로운 만남이다. 결국 나에게는 미술이 곧 너와 나의 세계인 것이다.  
    
                            2007년 5월 9일
                                              도 병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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