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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5 (17:5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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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동 선생님과의 인연

 

우리의 근현대 미술가 중에는 남달리 굴곡진 삶을 산 이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작가적 역량과 활동에 비해 그 진가가 입증되지 않고, 잊혀 진 분도 많다. 나의 고교 미술교사였던 김기동(金基東1937~?) 선생님도 그 중 한 분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한 달 동안 미술학원 다닌 것과 3학년 때 수능(당시는 예비고사라고 함)이후 서울 종로에 있었던 미술학원에 한 달 동안 다닌 것을 제외하고는 3년 동안 선생님께 그림을 배웠다.

 

지금도 선생님을 처음 만나게 된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고교 1학년 때 과학실, 미술실 등 특별실이 있는 건물의 완만히 경사진 복도를 먼지가 풀풀 나도록 열심히 쓸고 있는데, 선생님이 미술실에서 내려오시다가 얼굴을 찡그린 채 손으로 코를 감싸 쥐며, 높은 톤의 음성에다 서울말 특유의 억양으로 , 물 좀 뿌리고 쓸어야지.”라고 하시며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하다 선량한 눈웃음을 지으시고는 그냥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선생님은 호리호리한 체격의 큰 키에 늘 청바지를 즐겨 입어 30대 초반의 청년으로 보였다. 그때 선생님은 40대 초반의 나이였다)

 

그 후 미술 수업 시간에 사과 3개를 그린 내 정물화를 선생님이 보시고는 그림을 그려 보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 때 나는 무척 그림을 좋아했고, 그만큼 절실하게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때라 다음날 바로 미술준비실로 갔다. 그러자 선생님은 2절지 목탄지를 합판에다 붙이게 한 후 이젤을 세우게 하더니 목탄으로 석고 대에 있는 아그리파를 그려보라고 하셨다.

나는 그때 석고의 크기를 재는 법도 몰랐기 때문에 눈대중만으로 그린 후 명암도 미술 책에서 본 대로 열심히 그렸다. 내 그림을 보신 선생님은 미술학원에 다닌 적이 있느냐고 물어 보셨다. 내가 석고 데생은 처음이라고 했더니, 앞으로 미술준비실에 와서 계속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다. 이때부터 나의 본격적인(?) 그림 그리기가 시작되었다.

 

그 때 미술준비실에서 그림을 그린 학생은 나 혼자였다. 주로 점심시간이나 체육 및 교련 시간, 그리고 학교 수업을 마친 후에도 밤늦게까지 목탄 데생을 했는데, 선생님은 특유의 보폭이 넓은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미술실에 들어와서는 소처럼 크면서도 형형한 눈으로 항상 말없이 내 그림을 지켜보셨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달리 내가 그린 목탄 그림을 보시더니 지우고 다시 그리라고 해서 지우고 다시 그렸다. 그 그림을 보시고선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또 다시 그리라고 하셨다. 그래서 다시 또 그렸더니, 선생님은 그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 하시며, 그림 앞에 앉더니 손수 한 부분을 고쳐 주셨다. 나의 그림에 직접 손으로 그려주신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그때 그림을 그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그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는 방학 때도 학교 미술준비실에 혼자 나와서 그림을 그렸다. 선생님은 늘 뒤에서 지켜보실 뿐, 내 그림에 대해선 말이 없었다.(*선생님은 미술실에서 주로 일본어로 된 책들만 보셨다. 일본어를 몰랐기 때문에 무슨 내용인지는 몰랐으나 미술 책은 아닌 듯 했다)

그러나 내가 그림을 다 그리면 커다란 미술교실 벽에다 하나씩 붙여주셨다. 그래서 일 년 후엔 미술실 사방 벽면이 온통 내 목탄 데생만으로 가득 찼다. 이처럼 나는 그 때 주로 목탄 데생을 했지만 나중에는 수채화와 함께 유화도 그리게 되었다.(2학년이 되면서 후배 미술부원들도 늘어났다)

 

미술준비실에는 선생님의 기하하적인 추상회화(*캔버스 생천 바탕에 한 모서리만 약간 덜 칠한 암갈색의 사각형을 주로 그린 그림이었다)와 설치 작업에 쓴 나무토막 등이 한 쪽 벽에 세워져 있거나 쌓여 있었다.

그리고 슬라이드를 모아 놓은 앨범도 여러 권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다가 가끔 선생님의 슬라이드 앨범을 펼쳐 보았지만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그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저 아! 이런 게 현대미술인가보다 싶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한 해 재수한 후 나는 그토록 원하던 미술대학에 입학했다.(입학 후 바로 바로 군대에 갔었고, 제대 후 복학해서부터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대학에 다니면서 비로소 선생님이 대학 졸업 당시부터 실험적인 현대미술 작품 활동을 해온 작가임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선생님은 60년대 현대미술사에서도 다루어지는 <60년 미협전>을 주도한 장본인이었다. 1) 그리고 대학 재학시절 교수들도 대개 선생님의 바로 위 선배 아니면 후배들이어서 선생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언젠가 이 일 선생에게도 우리 선생님을 아시느냐고 여쭈어보았더니 대단한 작가인데 하면서 아까운 사람이라고 했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85년에 선생님이 학교를 그만두셨다는 얘기를 몇년 후에 알게 되었다.(*그 때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면서 다른 선생님들께, “다리 위에 내가 서 있으면 시냇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흐른다.”는 말씀을 남겼다고 한다)

 

90년대 초반, 선생님은 대구의 한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퇴직금으로 아는 분과 동업을 하다가 파산하는 바람에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선생님을 잘 아는 어떤 분이 강제로 작업실에 붙들어 놓고는 그림을 그리게 해서 열린 전시회였다)

그 때 본 선생님의 그림 세계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풍경화도 있었고 반추상도 있었지만, 참 맑고 순수한 느낌을 주는 그림들이었다. ‘현상現象과 향기香氣,란 제목의 작품에 대해 선생님은 도록 맨 뒷장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흔히들 관념觀念을 배제한다고 한다.

물질, 세계, 어떤 현상에 붙어있는 인위적인 관념을 배제하여 그 물질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노력을 이야기 하는데 어떤 이는 아무리 관념을 벗겨내도 관념은 남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대각선對角線으로 자르면 관념을 벗어난 현상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곳이 변증법이 끝나는 곳이다. 반조返照 2)를 이야기 하고 그것을 지나면 하나의 세계를 이야기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만일 다른 세계를 발견한다는 것은 또 다른 하나의 관념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현실을 가로지나가는 현상은 절대적 현상만이 존재한다.

이 절대란 말은 그 현상 이전의 그 현상을 낳기 위한 전제의 현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 현상이 원인이 되어 다른 현실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절대적 현상에는 오직 향기만이 생긴다. 그러니까 완전히 관념이 배제되었을 때 나타나는 향기를 말하는 것이다.

아동들의 작희作戱에 가까운 선으로 산과 잠자리채를 든 어린아이가 그려져 있지만 어디에서 온 것도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다.

산과 어린이의 찰나적刹那的인 모습에서 향기만이 생길 뿐이다. 그러면 그러한 현상이 우리들 생활 현실에서 갖는 관계에 대한 물음이 생긴다.

그 대답은 오늘의 세계와 사회 발전이 이러한 인간의 정신적인 확장의 영역에서 모두 너무 소홀하지 않았느냐 라고 그 답을 대신할 수 있다.

 

반조返照는 반조이다.

위의 글은 지나치게 세계를 논리로 접근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나 자신은 현실세계를 논리화 하는 입장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이니까. 3)

1990. 11. 金基東

 

다시 몇 년이 지난 후 선생님이 매우 어렵게 살고 계신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다. 하여튼 그 무렵, 수소문 끝에 어떻게 선생님과 연락이 닿아 같은 학교 후배와 함께 선생님을 잠깐 만나 뵙고 저녁을 사드렸다. 그 날도 마땅히 갈 곳조차 없는 상황인 것 같았으나 선생님은 저녁 늦게 갈 때가 있다면서 자리를 뜨셨다. 그래서 후배와 만나 어떻게 선생님을 돕는 방안을 강구하던 끝에 통장을 하나 만들어 한 달에 약소한 금액이나마 부쳐주기로 했으나, 얼마 후 종적을 감추어 버려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90년대 후반 가족과 함께 지하철 1호선을 타고 가다가, 지하철 구석 자리에 앉아 주무시는 선생님을 보았다. 전에 뵈었을 때 보다 늙고 행색도 초라했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을 깨울 수가 없었다. 어린 아들 녀석을 안고 있었고, 집 사람도 함께 있는 상황이어서 민망해 하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후 한동안 내 마음이 무거웠고, 날씨가 유난히 추운 겨울이 오면 어디서 고단하게 살고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나 역시 가족들과 함께 인사동을 길을 걷고 있는데, 전 보다 더욱 초라해진 노숙자의 행색으로 더블 백 같은 것을 둘러매신 채 큰 길을 가로 질러 어디론가 급히 가시는 선생님을 보았다. 예기치 않게 갑자기 이전보다 더욱 초라해진 모습을 멍하니 지켜볼 뿐 차마 선생님을 부를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막급이지만 이것이 선생님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지금도 따뜻한 밥과 좋은 음식을 먹을 때, 한 잔의 여유롭게 커피를 음미하며 창밖을 내다 볼 때, 가끔 선생님을 생각하게 된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갖게 되는 자책감 때문이다. 선생님은 당신이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어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혼자 감내하시면서도 생애 후기까지 불꽃처럼 비상한 화업을 성취했다. 알량한 재주로 세상을 속이며 호의호식하는 미술인들을 볼 때마다, 선생님의 고결했던 인품과 삶의 자취를 생각하게 되며, 과연 진정한 예인의 삶이 무엇인지 되묻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예술로서 그레이터 굿(greater good, 弘益)’은 대학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비롯되었음을 절각하게 된다.

 

선생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느 덧 일흔을 넘긴 연세다. 선생님이 어디엔가에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고 계시기를, 또한 무엇보다 어디엔가 남아 있을 선생님 관련 자료와 작품도 모으고 싶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마음만 간절할 뿐이다.(2007. 2. 10)

 

*각주

1) 60년 미술협회는 1960년에 홍익대 미술대학 졸업생 6(김기동, 김대우, 김응찬, 송대현, 이주영, 유영렬), 서울대 미술대학 졸업생 6(김봉태, 김종학, 손찬성, 백재곤, 윤명로, 최관도)이 결성한 단체로, 1960년에 야외전 형식으로 덕수궁 담 벽에서 제1회 전시회를 가졌다. 나는 대학입학이후 가끔 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 당신께 60년 미술가 협회전에 대해 여쭈어 보았으나 당시 절친한 친구였던 윤명로(서울대 교수로 퇴임)와 주도해서 하게 되었다는 말만 간단히 했으며, 2회 전시회나 그 후 결성된 악띄엘 그룹에 왜 참가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부터 세력화된 집단과 결별하게 된 모종의 사연이 있어 일부러 말씀을 하시지 않은 것 같다.

2) 선종(禪宗)회광반조(廻光返照)’에서 나온 말로 밖의 언어나 문자에 의지해서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으려 하지 말고 안으로의 자기반성, 즉 자신을 돌이켜보면 자신의 본성이나 참된 세계를 알 수 있다는 뜻임.

3) 이 글 옆에 실린 선생님의 약력은 아래와 같다.(*한자는 한글로 바꾸었으며, 이 약력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무한대전은 1974년에 열렸던 제1회 전시회에도 참가했음을 현대미술 다시 읽기 II, Vol.1, 632쪽에서 실려 있는 작품 도판 사진에서 확인함)

 

-'37 대전 출생

-'61 홍익대 회화과 졸업

-'60 미술가 협회 창립회원

-'73 현대미술초대작가전(대구 대백화랑)

-'74 1회 서울 비엔나레전(국립현대미술관)

-'74 연대성(連帶性) 개인전(서울)

-'78 무한대전(서울명동화랑)

-'85 한일 교류전(대구 수화랑, 東京 東野화랑)

-'90, '90 신춘서양화전(세일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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