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전원길 칼럼입니다.
조회 수 : 3690
2007.06.05 (13:3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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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으로 몸으로

전원길

2005/12/18 (1:44)

자연으로 몸으로
전 원 길

I 야투


1982년 여름 공주 금강의 청벽에서 첫 작품을 발표한 이래 1990년 겨울 금강 백사장에서 沙上樓閣a house on sand이란 풀잎을 이용한 작은 설치 작업을 마지막으로 야투자연미술연구회에서의 작업을 마무리하였다.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나의 자연현장에서의 작업은 비교적 긴 기간 동안 행해졌던 하나의 미술프로젝트였다고 할 수 있다. 계절과 장소에 따라서 각기 다른 작업을 했지만 작업의 방법과 내용이 일정한 특성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야투활동을 통해서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시절에 ‘野投’라는 새롭고 순수하며 열정이 넘치는 작업현장에서 나의 감성을 다듬을 수 있었고, 학교 실기실에서 벗어나 작업의 폭을 확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야투를 떠난 이후 전개되는 일련의 페인팅 작업에서도 눈 감각에만 의존하지 않고 인간과 자연과 사물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논리적 사유의 과정을 통해 작업으로 표현하는데 많은 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야투 멤버들과 작업하는 동안 나는 자연이라는 막의 뒤편으로 들어가 미술를 통해 자연과 만나는 체험을 하였다. 수 만 광년 떨어져 있는 별들이 하나의 별자리로 만나듯 만날 길 없었던 나의 의식을 저항 없이 받아주면서 순간적으로 나의 작업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내는 자연은 언제나 공치사 없이 편안하였다.
당시 나는 자연과의 단도직입적인 맞대면을 통하여, 나의 감성이 자연에 대하여 생생하게 반응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자연과 더불어 일구어 낸 작품들은 낯선 예술적 감흥을 일으켰고 그것은 기존의 다른 미술방식들을 진부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시절 함께 작업하던 회원들은 동료의 좋은 작품을 자기 작품처럼 반가워했으며 자신에게도 그와 같은 자연의 선물이 주어지리라 기대하였다.

II 자연미술


적나라한 사적 경험을 거침없이 날려 보내는 이 시대의 많은 작가들의 작업과, 방향을 잃은 인간세상의 혼돈을 목쉬게 노래하는 많은 작품들 속에서 인간과 자연으로 하여금 제자리를 찾게 함으로서 희망을 가지고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자연미술의 가치는 찾아질 것이다.
자연미술은 인간과 자연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틀 속에서 미술을 통한 인간성의 구현이라는 대전제를 향해나간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적 태도가 한 사람 한사람의 삶 의 단면에 집중하며 미술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부여하고 있는 이 시대에, 인간의 보편적 환경인 자연을 이야기하면서도 예기치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작업을 풀어간다는데 자연미술의 강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80년대 자연미술 작업들이 어떠한 정신과 방법을 구사하고 있었는지 당시의 나의 작업을 중심으로 분석하려고 한다. 이러한 복기復碁 작업은 단지 과거의 미술운동을 회고하고자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세월 속에 숙성된 자연미술작업들을 되짚어 봄으로서 이 시대에 의미 있는 작업으로 다시 진화해 나가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시도를 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또 한 가지는 1990년 이후 진행된 실내 작업들과 자연에서의 작업들 사이의 형식상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 관련되는 고리를 찾아 연결해 보려는 것이다. 한 작가가 작업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개인의 신념의 변화 혹은 시대적 환경의 변화로 인해 작업의 내용이 바뀌게 되기도 하고 작업 자체의 과정에서 변모가 일어나기도 한다. 어떠한 경우든 변화의 과정 속에서 무의미하게 동 떨어져 있어야 하는 시기의 작업은 없다. 한 작가가 보여주는 작업의 변화 과정은 그 이유야 어떻든 그 자체로서 필연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모든 작업 경험은 다시 작업의 방향을 잡아나가는데 소중한 재료가 된다고 생각한다.

III 사계절연구회

1980년대 초 나는 아직 대학문을 나서지 못한 예비 작가였으나 미술에 대해 퍽이나 심각한 결단을 내려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을 늘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새로운 미술에 대한 막연한 열망을 가진 작가지망생은 작가로서의 길을 인도해 줄 마땅한 선배 그룹을 만나지 못하고 스스로 그 길을 찾아야했다. 그러던 차에 야투 사계절 연구회는 마치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설레는 희망을 주었다.
당시 야투는 야투 창립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임동식 선생이 독일로 유학을 떠나고, 고승현 선생이 사계절 연구회의 진행을 맡고 있었다. 야투 연구모임은 삼박사일이나 사박오일로 진행되는 여름 야투를 빼면 일박 이일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자연현장에서의 작업은 답습과 표절의 피상적 작업으로부터 벗어나 나의 의식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자연의 완결성 앞에서 부가적 설치물은 군더더기가 되기 일쑤였으므로 그저 자연이 하는 일을 더불어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당시 나는 작업의 논리적 필연성을 확실하게 확보하지 못한 얼치기 작가였다. 나는 이 점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던가를 자주 생각한다. 당시 내가 얼치기가 아니었다면 그렇듯 아무 선입견 없이 자유롭게 자연을 대하고 작업 할 수가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사계절연구회는 자연과 만나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과정이 현장에서 모두 이루어진다. 아침부터 사진 촬영이 가능한 저녁 시간까지 길지 않은 작업 일정이었다. 장기간의 작업을 통한 밀도 있는 작업을 하기는 어려웠으나 제한된 시간 속에서 순발력 있는 많은 작업들이 나왔다.
자연 앞에서 무장해제를 당한 나는 주로 손과 몸을 이용한 작업을 많이 했다. 간단한 드로잉을 위해 도구를 사용하기도 했으나 주로 몸으로 자연과 만나게 된다. 따라서 이 시기의 작업들은 간단한 행위가 동반된 작업들이 많았고 사진 촬영과 함께 작품이 마무리되는, 단지 짧은 시간 동안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작업이 많았다.
당시 경제적 자립이 힘든 학생신분이거나 대학을 막 졸업한 청년들로 구성된 점도 이 시기의 작업의 유형을 결정 지워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지금의 미술이 기획 작품 위주의 물량공세가 동반되지 않고서는 작가의 역량을 인정받기 힘든 상황임에 비추어보면 당시의 무일푼 어린 작가는 너무나 행복했다. 숲 속을 걷다가 눈에 걸려드는 풀을 돌로 두드리고, 나무를 두 손으로 감싸 안기도 한다. 때로는 파도를 따라 구르기도 하고,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다가 금을 그어 떨어진 낙엽들을 연결한다. 자연과 미술이 새롭게 만나는 이 감흥은 오로지 야투현장에서만 일어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평상시에 무심히 지나치던 자연의 한 장면 한 장면이 나의 의식과 부딪치며 새롭게 다가오는 경험은 다른 곳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았다.  
80년대 야투 자연미술운동은 자연미술에 대한 열정과 창의적 분위기 속에서 野投的이라고 할 만한 작업의 특성을 만들어 낸 것만으로도 그 시대에 자신들이 해야 할 몫을 감당해 냈다고 본다. 그러나 당시의 작업들이 의미 있는 족적으로 미술계에 남기위해서는 작가 개개인이 자신의 작업을 역사적 맥락위에 올려놓고 반추해보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울러 자연미술 작업의 생태적 변이와 확산을 통해 자기 생명력을 계속 증명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IV 자연미술지대


자연미술을 위해 자연현장 속으로 들어갈 때는 평상시와는 다른 정신상태가 된다. 소풍이나 채집, 산책을 위해 숲 속을 거닐면서 자연을 대하는 것 보다는 예술적 작업 의지가 예민해진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어느 곳에서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이러한 야투 사계절 연구회 분위기로 인해 오랫동안 다른 자연미술 작가들과 함께 작업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작가이자 서로의 작품에 대한 감상자였던 당시의 멤버들은 서로가 통하는 하나의 정신적 공간을 형성하여 그 안에서 서로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새로운 미술을 만들어나갔다.
자연미술은 山川草木 뿐 아니라 자연생태작용의 환경이 되는 빛, 바람, 소리, 색깔, 그리고 자연 현상 속에 내재된 질서 모두와 관계하며, 자연은 인간의 접근 방식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품에 참여한다. 자연과 더불어 작업하기위해서는 실내작업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즉 기술적, 감각적 손재간을 바탕으로 하는 기존의 회화 제작 방식과 는 다르며 야외공간에 인위적 구조물을 들이밀면서 개념적 성취를 이루어내는 야외설치와도 거리를 유지한다. 자연미술은 자연을 단지 대상과 재료로만 다루지 않으며, 자연을 정의하거나 해석하지도 아니한다.
자연현장에서 나무와 그림자, 풀, 돌, 파도 등을 통해 발생되는 아이디어는 자연과 나의 연결루트를 만들고 이런 연결 상태(방식)가 곧 미술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즉 자연과 인간의 생각이 시각적 개념적 결합을 이루며 자연과 인간사이의 ‘미술상태美術狀態’가 된다. 이러한 결합 상태는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이 자연을 대상으로 작업하거나 자연재료를 가지고 설치작품을 한다고 했을 때 나타나는 양상과는 사뭇 다른 방식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어느 한 쪽이 또 다른 한 쪽을 완전히 장악하거나, 두 가지의 특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머금듯 하나로 존재하면서도 각각의 특질을 서로 훼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나는 자연과 허심탄회한 독대의 시간을 가짐으로서 자연의 있음을 보고 동시에 나의 있음을 보려고 한다. 자연이 스스로 내어주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에 대한 나의 본성의 반응을 자연에 조응시켜야만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려낸 작품을 보게 된다. 자연의 내어줌과 나의 받아냄의 상태가 간결하고 담백한 작품들은 자연과 인간의 본성적 교감을 실현한다.
자연미술 작업은 눈 보다는 마음과 정신을 통해 작용하기 때문에 서구의 개념미술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구의 개념미술이 현대미술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보다 잘 이해되고 그 의미가 살아난다면 한국의 자연미술은 원소재源素材인 자연과 더 많이 관계한다. 80년대 자연현장에서의 작업들은 개념적 성격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작업 자체가 그 의미를 드러내기 때문에 자연미술에 접근하기 위한 선행학습을 많이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원래 심성이 자연과 쉽게 공조하기 때문에 사변적 해석을 통하지 않고도 직접 자연미술과 조우 할 수 있고, 자연미술의 간결한 표현 방식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작가의 경험을 순간적으로 자신의 경험으로 치환置換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자연과 미술이 직접적인 접점을 찾아냄으로서 당사자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연미술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자연의 현상現狀이 그대로 유지되고 쉽게 그 내용이 전달되어져 오는 특성으로 인하여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은 의욕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마음먹음이 비록 실행되지 않더라도 그것은 적극적 동감의 표시이며 살아있는 예술적 감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V 단순논리

돌아 보건데 나의 자연미술작업들에는 자연과 나의 몸 혹은 드로잉이 서로 개념적, 언어적, 시각적 관계를 형성하는 가운데 의미를 유발시키는 작업이 많았다. 나는 이러한 작업을 ‘단순논리’에 의한 작업이라 부르는데, 자연과 작업행위가 투명하게 겹쳐있거나 너무나 일반적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쉽게 보는 사람에게 다가며 이해하는 각도에 따라서 해석의 여지가 많은 하나의 텍스트가 된다.
자연과 몸의 촉각적 접촉의 순간에 만남과 일체화의 개념적 의미가 발생한다. 만남의 순간에 작품은 불꽃처럼 살아나고 다른 곳으로 몸을 옮기는 순간 사라진다. 간략한 드로잉을 동반한 작업들도 마찬가지다. 나의 작업에 있어서 드로잉은 자연과 몸의 접점에서만 그 역할과 의미가 살아난다. 여기서 몸은 나의 의지의 상징적 대용물이면서도 자연의 어떤 것과의 적절한 만남을 위한 재료가 된다.
자연과 내가 중간 매개물 없이 직접 몸으로 만나고 표현하는 방식은 자연과 나의 체온이 직접 맞닿는 생생한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일상의 영역에 있으면서도, 비일상적 상상력이 그 중심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뇌리 속에 자리를 잡는다.
생태적 생명성을 가진 자연과 피가 흐르는 몸의 체온이 인간의 미적 아이디어를 통하여 만난다는 측면에서 몸을 이용한 자연미술의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주의 질서가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는 자연을 몸의 접촉과 드로잉 등을 통해서 그대로 작품 속에 담아내고, 자연 속에 내재된 신성神性을 기꺼워하는 인간의 감성과 지성을 명료하게 작업 속에 반영함으로서 자연과 인간과 예술의 조화로운 긴장 관계를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은 여타의 현장 작업들과 구분되는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VI 하나되기


자연이란 이 세상에서 테두리 쳐진 어떤 신성한 구역으로 분류 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인공물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자연을 특수 영역화 하였다. 본시 자연은 인간의 삶의 현장이기 때문에 자연을 떠난 인간을 상상 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영역과 자연을 구분하는 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연이라는 말 속에 순수성과 신비감 등의 부가되는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 본래 모습을 오히려 보지 못한다. 나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순간에 떠오르는 것으로 작업한다. 자연을 바라보되 그 외양에 빠져들지 않고 다른 것과의 관계성에 주목하길 좋아한다. 자연이 다른 것과의 관계성을 유지하는 동안 그것은 보이는 것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며 하나의 의미형식으로서 나의 작업 속에서 작용한다.
자연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신을 가리고 있는 동안 사람은 자연을 볼 수 없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라는 막 뒤편으로 들어가야만 사람에게 내어주는 자연의 본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만약에 자연의 내재된 실체와 마주하지 못하는 사람(작가)은 남들이 열어 보인 전례를 따르는 수밖에 없다.
80년대 나의 자연미술 작업들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자연과 나의 손 혹은 몸이 만난 작업, 자연물로만 된 작업, 간단한 드로잉이나 색이 가미된 작업 등이다. 어떤 방식이든지간에 모두 한 가지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되기’이다.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고 자연과 자연이 미술을 통해 일체화 되는 방식을 표현한 것들이다.

자연 속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접근 과정을 통해 '하나되기'를 시각적 개념적으로 추구한다.

달리보기

등산이나 야유회 혹은 정원을 가꿀 때의 자연과 작업현장에서의 자연은 다르다. 그 경계가 분명하여 작동하는 뇌의 종류가 다른 듯도 하다. 평상시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자연물들과 장면들이 그림을 그릴 때의 조형적 요소들처럼 살아나고 마치 감상의 대상이던 그림 안으로 들어가서 그 속의 갖가지 것들을 직접 대하는 그런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자연미술 현장에서 그러한 경험을 해보지 않고는 그 경계를 이해 할 수 없다.
자연이 내어주는 아이디어가 자기 자리를 찾아가기까지의 시간은 순간이다. 이 과정은 나와 자연의 일종의 영적 대화이며 상호적인 관계 속에서 자연과 나의 작업의지가 만난다. 나의 정직성이 유지되는 한 자연은 미술작업에로의 초대를 사양한 적이 없다.

다가가기

세상에서 예술적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사람뿐이다. 자연의 방문자로서 나는 예술적 영감을 받아 줄 무엇인가를 찾아 나선다. 머릿속 생각들을 여기 저기 놓아보고 자연과 나의 반응을 살핀다. 나는 자연에 몸으로 다가간다. 나의 예술적 의지가 작용하는 순간에 자연과 몸은 미술 안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게 되고 나와 자연은 서로를 의미 있는 상태로 만든다. 서있는 나무에 팔을 대고 선을 긋는다든지, 고추밭에 빨간 고추를 손바닥에 그린 것들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젖은 모래와 마른모래를 이용하여 내 다리에 손자국 을 남긴 작업들은 이러한 관계를 잘 보여 준다고 생각된다.

함께하기

자연미술에 있어서 자연은 표현 대상이 아니라 작업의 주체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자연으로부터 떠나는 순간 사라지는 작품이 허다하다. 자연물과 자연현상, 그리고 현장의 상황 등이 작업의 중심에서 작용 할 때 좋은 작업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자연 그 자체의 현상을 미술화 하려는 일련의 시도들과는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자연과 몸 그리고 명료한 나의 의식의 참여가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생각하기

자연과 나, 그리고 작품사이에 발생하는 의미에 관해서 ‘생각하기’는 작업 후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에서의 작업들은 의미부여의 과정을 뛰어넘어 순간적으로 비약飛躍하기 때문에 작업이 끝난 후 나와 작업사이에는 채워야 할 거리가 남는다. 세상의 모든 것은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와 원인에 의해서 움직여 가고 있기 때문에 자연으로부터 또 하나의 파생체가 된 작품이 제자리를 잡고 완성되기 위해서는 감상자는 물론이고 작업의 당사자인 나에게 있어서도 생각하기 과정이 필요하다.

1980년대 나와 한국의 자연미술가들은 자연과의 단도직입적인 대면을 통해 작업하였고 때로는 아주 작은 풀잎을 대상으로 작품을 이끌어 내었다. 그것은 자연과의 명상적 만남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지 않고도 미술작품이 되는 서구의 실험적 방법론들이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학습된 사실이 있겠으나, 우리들은 자연으로 들어가면서 선행된 학습경험들을 버리고 자연이 던져주는 것을 받아서 작업하려고 하였다.
나는 자연미술을 통해서 모든 것을 내가 주도하기보다는 자연을 작업에 적극 참여시키는 방식을 알았고, 자연의 다양한 양상들과 인간의 생각이 일정한 관계를 맺어나감으로서 의미 있는 '미술상태'를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이러한 현장작업의 방법론은 실내 캔버스 작업에 있어서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VII 색으로 하나 되기

자연과 하나 되기는 선이나 색, 행위 등으로 이루어진다. 자연과 나의 하나 되기 작업은 마음이 만들어 내는 욕망을 털어내고 자연과 나를 지으신 분의 섭리 속에 나를 일치시켜나가려는 일종의 ‘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 되기를 원하는 의지를 가지고 마음 없는 자연과 일체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상태에 대한 미술평론가 김성호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날카롭게 받아들여진다. “필자가 보기에, 붓을 쥐고 그림을 그리거나 자연을 캔버스 삼아 ‘야투’ 활동을 통한 자연미술을 시도하는 전원길에게 있어서는, 자연의 흔적을 더듬어 그 원형의 질서를 따라가는 행위만이 의미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그는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에 접근할 때, 그 창작에 있어 주인공이 되기를 포기하려는 태도, 단지 그 창작의 결과물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려는 태도를 견지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의 질문은 그의 작업이, 그의 창작 결과물이 자연 앞에서 늘 미끄러지지 않는가? 라고 반문하는데 존재한다. 그의 작업이 결코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고 생생한 시각적 결과물로 작가 곁에 남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그의 글에서 이러한 한계를 전제로 작업 과정에 의미를 둔 것도 나의 작업에 대한 적절한 접근이 아닌가 생각한다. 자연과 하나되기 작업은 ‘바람의 과정’이며 결국 나를 보내신 분의 품으로 돌아가는 그 날에야 실현되는 일일 것이다.
색이 일하는 나의 캔버스화면 속에서 ‘하나 되기’는 보다 집요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보이는 물체의 색과 완벽한 일치를 이룸으로서 ‘하나되기’는 작업과정에서 만큼은 바램을 넘어 실제로 이루어진다.

사물의 색채를 화면으로 옮겨오는 작업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물체에서 색을 제거한다면, 다시 말해서 빛을 제거한다면 거기에는 촉각적인 실재만이 남게 된다. 따라서 물체와 색은 완벽하게 같은 몸을 이루면서도 별개이고 물체로부터 분리된 색은 평면과 공간 속에서 등질의 상태로 이동이 가능하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나는 그동안 사물의 색과 똑같은 단색 화면을 만들고 그 위에 사물을 개념적conceptual, 시각적visual 측면에서 접근하여 대상의 속성과 형상을 색 조절과정을 통해 표현하는 방법으로 작업을 해왔다. 최근에는 그동안의 방법론을 대상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하면서 나뭇잎과 같은 실제 자연물 혹은 주제와 관련된 사진 이미지를 화면에 붙이고, 그 위에 한 붓, 한 붓 물감으로 올려붙여 색채를 조율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形象-物 을 화면 속에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물감을 올려 붙여나가는 작업에서는 ‘그린다’는 전통적 감성보다는 ‘일한다’는 현장감을 더욱 느끼게 되는데 이는 마당에서 삽이나 괭이를 들고 흙과 더불어 일할 때의 기분과 동일하다. 화면 위에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듯 점점이 움직여 나가는 작은 물감 덩어리들은 명백한 이미지를 만들어 냄과 동시에 실물로 남겨지며 빛을 받아들이는 반입체공간을 형성한다. 사물의 존재감을 직접적으로 제공하는 이와 같은 작업은 대상 자체가 물감으로 뒤덮여서 결국은 새로운 작업 결과물이 물리적으로 하나가 되고 원래의 대상 위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색채 탐색 과정은 회화적 자연성을 드러낸다.
세상의 만물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세상에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화면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나의 그림속의 이미지들도 이와 같이 순환하는 만물의 존재 양상을 반영한다. 시간을 따라 다층적으로 쌓여지며 각 단계가 서로 관련을 맺게 되는 작업 방식은 원인과 결과가 상호 작용하는 자연의 보이지 않는 구조를 반영하며, 어제와 오늘의 시간이 함께 존재하고 내일의 시간이 이미 화면 속에 등장하는 통시적通時的diachronic 회화 공간을 보여준다.

VIII 안과 밖에서

그동안 나는 80년대에 자연현장을 중심으로 작업을 하였고,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주로 캔버스에 작업을 했다. 최근 몇 년간은 평면과 자연공간을 넘나들며 작업하고 있다. 자연미술은 자연현장에 나의 몸과 의식이 자연과 직접 만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고, 90년대 평면 회화작업들은 작업의 주체인 나 혹은 인간의 존재의 형식을 회화적 형식으로 풀어내는 과정이었다.
1990년대 작업에 관해서는 이미 본인의 석사논문 ‘현대회화의 기하학적 형태와 표현성에 관한 연구’에서 정리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1997년 이후 작업들은 작업의 과정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자연미술의 일련의 맥락과 괘를 같이 하면서 그 연관성을 직접 찾을 수 있는 작업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작업한 호박잎 시리이즈는 그러한 결과를 잘 반영한다. 1989년 봄 계룡산 어느 수풀 속에서 행한 이 작업은 돌 위에 자라난 쑥의 잎을 근처에서 발견한 돌로 찧어 그 형상을 바위위에 남긴 것이었는데, 화면에 풀잎을 붙이고 그 위에 물감을 묻혀 나가는 나의 캔버스 작업과 낙엽위에 작은 돌들을 올려놓는  작업은 서로 관련 맺고 있다.
상당기간 별개로 이루어진 작업들이지만 시간의 흐름 밖 통시적通時的 미술공간에서 만나고 다시 나의 현재 시간 속에서 작용하며 이제는 안과 밖을 가리지 않는다. 1986년 공주의 한 고추밭에서 행한 작업은 10년을 넘긴 후에야 사물의 색채를 옮겨오는 작업으로 풀려져 나왔다. 1987년 공주 신원사에서 낙엽을 따라 선을 그었던 작업은 캔버스를 대지로 삼아 움직이며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를 작은 색 덩어리로 이어가는 작업과 연관이 있다고 하겠다. 생각과 행함이 나의 기억 속에서 얼마만큼 살아서 다음 작업에서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작업의 결과들 속에서 나의 의식이 연결 되고 있는 것을 보면 놀랍다.
자연과 만나는 자연미술의 방식은 간결하지만 직관적이어서 때로 나를 넘어 높이 도약한다. 반면에 회화 작업은 나의 몸 감각을 훈련시키고 시감각의 흐름을 받아주면서 작업 자체의 지속적인 진화를 통해 발전한다. 나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 방식은 자연성을 작업에 받아들이는 개념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으나 분명한 서로의 영역을 지니고 있다. 실내외를 들고 나는 작업을 통하여 이종 교배에 의한 새로움을 얻을 수 있다. 또한 각각의 영역에서의 작업개념이 캔버스와 자연공간을 왔다 갔다 하면서 마치 벌레와 미생물을 통해 숙성되는 흙과 같이 비옥한 창의적 생산성을 소유할 수 있다.

IX  5 가지 프로젝트

짧은 시간에 간결한 작업행위로 이루어진 작업이 주류를 이루었던 80년대 작업과는 달리 좀더 시간을 가지고 진행되었던 작업들이다. 작업계획은 좀 더 치밀해지고 비교적 규모가 있으면서도 구체적인 작업의 결과가 남게 되었다. 그렇지만 야외작업의 초창기부터 표현되어온 ‘하나 되기’는 방법적, 개념적으로 일관성 있게 유지되고 있다.

1. 댕기머리

댕기 머리는 본래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머리 형태중 하나로 혼인을 하지 않은 남녀가 자라나는 머리카락을 가장 자연스럽게 간수했던 방법이다. 나는 이 작업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이 지니고 있는 생명력을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인체의 성장이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자라는 머리카락과 전통적 머리 간수법이면서 젊음을 상징하는 댕기 머리는 이 작업을 실현하는 데 중요한 소재이다. 나는  십 여 미터가 넘는 대나무를 안에다 넣고 농사용 검정 비닐을 이용하여 댕기머리를 땋듯이 땋았다.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개념적, 형태적으로 합치될 수 있는가를 '자라나는 머리카락'의 모습을 ‘자라나는 풀’의 형태로 표현하였는데, 마치 긴 댕기 머리가 풀이나 나무 같은 자연의 모습으로 대지에 뿌리를 박고 뻗어 올라 하늘을 향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검정색을 주로 하여 서로 다른 색깔과 높이, 휘어진 모습을 지닌 수백 개의 댕기머리들은 각각 다른 삶의 형태와 시간들을 의미하며 머리에 가르마를 탄 듯 양 갈래로 나뉘어 풀숲을 이룬 모습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금 확인하고 시간과 인생의 의미를 자문하도록 하고 싶었다.
또한 작품 속에 난 길을 관람객들이 거닐어 볼 수 있도록 함으로서 보다 적극적으로 작품에 참여하고, 느끼고,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작품의 실제적 기능을 더하였다.

2. 길을 따라서

나는 이 작업을 통해서 자연과 인간의 예술 행위가 서로의 영역을 직접 침범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같은 공간 속에서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 할 수 있을까 생각하였다. 나는 삼원색과 흰색의 기본색을 가지고 색채를 조절한 흔적이 남아있는 긴 로프를 성벽옆  산책를 따라 설치하였다. 풀잎, 묵은 낙엽, 이끼, 돌 등 주변의 자연물들과 동일한 색깔이 되도록  로프 위에 색칠을 함으로서 마침내 자연물의 색과 로프위에 칠해진 색이 만나도록 한 것이다. 사람들이 거기에 있는 자연물을 보게 하는 과정이 중요한 작업의 내용이다. 작업을 통해 실물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있는 사물 자체로 안내함으로서 현장의 생생함과, 자연과 관계하는 미술적 사유 과정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3 빛을 따라서

주변의 돌들을 모아 모서리와 모서리를 이어 맞추어 타원형을 만들었다.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돌들의 그림자를 따라 움직이면서 색채조절를 통해 돌과 하나 되기 작업을 하였다. 그림자의 경계면을 따라 물감을 묻혀가며 돌의 색깔과 같은 색을 만들고 다시 원색으로 변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돌을 따라 도는 작업이었다. 이 작업은 태양의 운행에 따른 빛의 변화와/ 돌의 색을 따라 움직이는 나의 감각의 흐름 그리고 그에 따른 색의 조절 과정이 함께 드러나는 작업이다. 사물의 색을 통해 빛과 시간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는 돌 등이 나의 작업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4. 길을 막고 물어보다

가는 길을 막고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인간과 자연과 예술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길가에 있는 돌들을 모아 정성스레 돌을 쌓았다. 나의 눈높이만큼 반듯하게 쌓아올린 단순한 구조의 돌단은 작품 자체의 시각적 개념적 의미를 최소화였으므로 그것 자체로 미적 감흥을 유도하지도 않고 어떤 개념적 구조를 가지고 사람들 앞에 다가서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자연 요소들이 홀로 그 존재 의미를 과시하지 않듯이 돌단은 숲 속의 다른 것들과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 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그들의 반응을 이끌어낸다.
산책로를 아무런 이유 없이 막고 있는 돌무더기는 사람들 앞에 의외의 상황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작품은 사람들에게 예술과 삶과 자연에 대하여 피할 수 없는 물음을 던지지만 잘 쌓여진 돌무더기 속에서 작업의 의미를 찾기 보다는 각자의 반응을 통해서 혹은 사유의 과정을 통해서 이 모든 것에 대한 질문과 답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이 돌무더기는 오랫동안 그곳에 남아서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빛을 받아주고 사람들에 의하여 다시 만들어지는 새로운 길을 바라 볼 것이며 단풍이 물드는 나뭇잎과 한 겨울에 내리는 눈을 맞으며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할 것이다.

5. 낙엽과 돌

떨어진 낙엽위에 작은 돌들을 올려놓았다. 이 작업은 나뭇잎을 캔버스에 붙이고 그 위에 유화물감을 올려붙인 실내 작업을 야외현장 작업으로 확장시킨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돌들의 색깔과 나뭇잎의 색깔 또는 형태에 일치시켜나가는 작업은 자연과 자연이 색채와 형태를 통해서 만나는 자연미술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돌들의 시간과 시간 따라 떨어지는 낙엽들이 나의 작업 속에서 만난다.

X

그 동안 나의 작업들은 그것이 캔버스에서 이루어지든 자연공간에서 행해지든 나름대로의  작업논리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제작태도는 어느 것도 허투루 되어지는 것이 없는 자연의 속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 되기’의 지속적 변주를 시도하고 있는 나는 공간과 평면을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작업의 장을 마련한다.
자연은 말이 없지만 감추고 있는 것은 없다. 자연은 언제나 열려있지만 나는 언제나 그 문 앞에 서 있을 뿐이다. 자연에서의 나의 작업은 나를 앞서나가 자연과 만나지만 나는 여전히 자연에 대하여 피상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살아가는 동안 한번이라도 진정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이 세상을 지으신 분이 세상에 내리신 아름다움을 온전히 마주 할 수 있을 텐데, 그러기에는 내 앞을 가리고 선 욕심들이 너무 큰 것은 아닌지 돌아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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