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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창圖畵窓과 복합 공간의 어울림 - 논산 명재고택 답사기

 

 

1.

어제 가족과 함께 김천에 있는 황악산 직지사를 거쳐 충남 논산에 있는 명재고택을 다녀왔다. 올여름은 비가 많이 내려, 오전까지도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 날이 개었다.

 

명재고택은 야트막한 산과 들이 펼쳐진 내륙 깊숙한 곳에 오랜 세월 풍상에 씻기면서 형성된 한옥 특유의 유서 깊은 분위기를 간직한 채 의연히 자리 잡고 있었다. 담장도 없이 열린 공간이 뜨거운 여름 햇살아래 유달리 환해 보였는데 바깥마당 양쪽으로 큰 백일홍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명재고택에 들어서니 밖으로 드러난 사랑채와 안채를 중심으로 한 공간이 매우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동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예기치 않은 경험을 직접 할 수 있는 것이 답사의 묘미다. 지형도 다르고 건축의 재료인 돌이나 나무의 크기와 모양도 다르고, 무엇보다 그것을 조성해낸 선조들의 정신이나 안목과 솜씨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간 책자라든가 연구자료 및 신문지면을 통해 이 고택에 대해서 흥미와 관심을 가졌는데 이번 답사를 통해 더 많이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주1)

2.

명재고택은 중부(호서) 지방에 위치한 조선 중, 후기의 대표적인 한옥으로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즉 ‘향교가 있는 마을’에 있다. 이 지역은 파평 윤씨의 세거지이며 인근의 회덕 지역과 함께 조선 후기 정치 사상계 실세들의 본거지였다.

명재고택은 조선 중기의 선비인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 선생의 말년인 1709년(숙종35년)에 제자들이 주도하여 지은 건물로 전해지며, 윤증 선생이 오랫동안 살았던 옛집은 인근 유봉마을에 있다. 주2)

현재 고택의 건물 양식은 19세기 중엽의 건축양식이어서 이 무렵에 고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담장이나 소슬대문과 같은 별도의 경계물이 없고, 주3) 대문채 앞 넓은 평지에 동양의 전통적 연못과 섬인 ‘방지원도方地圓島’가 있다.

정면에서 보면 명재고택은 2단의 축대 위에 지은 사랑채와 대문채가 나란히 있다. 이 중에서도 격식과 규모면에서 사랑채 건물이 단연 두드러지며, 특히 누마루가 있는 모퉁이 공간이 파사드facade처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공간은 정자 역할을 하는 장소로 전면의 경관이나 농토를 조망하거나 오른 쪽 앞의 사각 연못을 감상하는 장소이다. 윤증 선생은 덕유산을 여행한 후「유여산행遊廬山行」이란 글을 남길 정도로 자연의 풍경風景을 사랑한 분이므로 이러한 풍류 정신이 이 건물에 깃들어 있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때마침 여름이라 여닫이로 된 3면의 창문을 들어 올려 걸쇠에 매달아 놓았는데, 모퉁이 칸은 정자처럼 활짝 열린 공간을 이룬다. 특히 정면 황금비의 ‘도화창圖畵窓’은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경을 완상하는 프레임 역할을 한다. 굳이 누마루에 올라가보지 않아도 능히 도화창을 통해 전경을 감상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누마루 정면의 편액은 ‘세속을 떠나 은둔하며 천시天時를 연구하는 집’이라는 뜻인 ‘이은시사離隱時舍’가 검은 바탕에 흰색의 행서체로 새겨져 있었다. 주4) 누마루 측면에는 ‘도원인가桃源人家’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도원’은 ‘무릉도원’을 의미하므로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을 담았다. 주5)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총 8칸으로 그 중 방은 2칸이다. 나머지는 마루이거나 다락이다. 사랑채 공간은 안팎으로도 특이한 부분이 많다. 그 중에는 바깥 사랑채 마루 밑의 검 은색을 띤 높이 30cm 크기의 산수석 같은 돌들도 있는데, 이 돌은 석가산石假山, 즉 금강산을 뜻하므로 이로 인해 누마루는 산 위에 있는 정자가 된다. 주6)

또 하나의 예는 TV나 책자 등에 소개되어 많이 알려진, 사랑방과 골방 사이에 있는 ‘안고지기’라고 불리는 ‘미닫이 여닫이문’이다. 즉 미닫이로 열 수 있으면서 또한 문틀과 문짝이 맞물린 상태로 여닫이(*앞으로 당겨 여는 것)로도 열리는 문으로, 현대적 관점에서도 매우 참신한 디자인으로 보였다.

사랑채 뒤의 툇마루와 낮은 굴뚝이 있는 공간은 매우 아늑하고 정감이 있었다. 여기서 작은 문을 통해 안채 오른쪽 날개채의 뒷마당으로 이어진다.

 

대문채를 거쳐 안으로 들어서면 ‘경冂’자형의 공간이 대문채로 인해 아담한 정방형 안마당을 형성하는데, 동서로는 통로로 열린 공간이다. 안채는 가운데 ‘육六자’형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이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7) 또한 크기는 다르지만 사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에 마루공간이 있다. 대청의 천장은 우리의 전통적 한옥처럼 기둥보다 굵은 대들보와 함께 서까래가 드러나 있다.

 

대청마루 뒤로는 활짝 열린 바라지창 뒤로 바로 장독대가 놓인 후원이 보인다. 낮게 조성된 뒷담 너머 뒷산인 노성산은 솔숲이 무성하다. 여기서 언젠가 한옥을 다룬 다큐 프로그램에서 나온 장면이 생각났다. 이러한 한옥의 경우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대청마루로 불어오는데, 뒷산 자락의 찬 공기가 더운 마당 쪽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대개의 전통 한옥의 마당에 잔디를 심거나 나무를 심지 않은 이유도 이러한 통풍 효과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안채 서쪽에는 안채와 곳간이 형성한 공간이 있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이 없었다면 무심히 지나쳤을 공간인 이곳은 ‘아래는 넓게 위는 좁게’ 비껴서 배치한 물길이자 바람이 지나는 공간으로, 유체의 역학 법칙인 ‘베르누이의 정리’를 경험으로 터득한 선조의 지혜를 보여준다. 안채 동쪽 측면에도 좁고 긴 마당이 조성되어 있으며, 사당으로 통하는 문 옆에는 나지막한 굴뚝이, 끝부분은 계단식 화단이 있어 아늑한 느낌을 갖게 한다.

 

안채의 동측 뒷면 공간에는 별도로 지어진 사당이 있다. 명재 고택 뿐 만 아니라 격식을 갖춘 조선시대 한옥에서 사당은 집터의 가장 높은 곳에 별도의 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중문간에는 하단이 송판인 ‘내외벽’이 있는데, 아랫부분은 약 30~40Cm 높이로 뚫리어 있다. 안채에서는 이 공간을 통해 방문자의 신분을 확인하고 손님을 맞았다고 한다. 이처럼 명재고택은 남녀의 성, 세대, 신분에 따라 여러 채 또는 영역들로 나뉘지만, 한 가족의 생활공간이므로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어디까지나 그 바탕은 지형적 조건이다.

무엇보다도 명재고택은 우리 전통 건축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왕궁이나 전통사찰, 서원은 지형에 따라 지어 전체 건물 군을 같은 높이의 평지에 지은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전통 건축공간은 그 구성이 다채롭고 복합적이며 체험동선도 단조롭지 않다. 명재고택 또한 민가여서 규모만 작을 뿐 이러한 기본적 특색은 다르지 않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사랑채와 안채의 배치다. 사랑채는 정면에서 보면 두 단의 높은 기단 위에 있지만 안채는 낮고 소박한 석축 위에 경冂’자형으로 자리 잡았다.주8)

 

3.

명재고택은 조선 중기 호서지방 사대부의 생활공간이 남아 있는 대표적 건물이다. 약 300년 전에 이 고택이 지어진 후 지금처럼 현존할 수 있기까지는 수많은 사연과 곡절이 있다. 특히 명재 윤증 선생의 중용적 실천의 삶은 우리 삶과 세계에 대해 더욱 폭 넓고 사려 깊은 태도를 갖게 한다. 그래서 이 건물은 그 가치와 의미를 더한다.

명재고택 안팎의 공간은 지형과 건물의 관계를 종합적 관점에서 통찰할 수 있을 때 고유성과 특이성을 느낄 수 있다. 즉 명재고택 고유의 특이성은 부분보다 전체, 단편보다 종합에 있다. 그래서 ‘가장 기능적일 때 가장 아름답다’는 최근 현대 디자인의 특성을 선구적으로 구현한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삶의 지혜를 통섭적으로 아우르는 복합공간이라는 것이다.

선조들의 깊은 지혜가 담긴 이런 역사적 · 물리적 어울림의 공간은 급속하게 무연無緣사회로 변하면서 물질, 또는 상품의 과잉이 문제인 현대문명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한다.

 

2011년 8월 5일

도 병 훈

 

주1)이번 명재고택답사에는 이숙실문화해설사의 자상한 설명이 큰 도움이 됐다.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주2)윤증은 예학자로서 기호학파 계열의 인물이다. 윤증은 당시 실세였던 노론파의 우암 송시열의 제자였지만 후에 우암에 대항하는 소론파의 영수가 된다.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되는 사건을 역사적으로 ‘회니시비(懷尼是非)’라 부른다. 두 학자가 거주했던 회덕(懷德-송시열)과 노성의 당시 지명인 니성(尼城-윤증)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두 학자로부터 비롯된 ‘노·소’ 갈등의 근본적 이유는 병자호란 이후 야기된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른 ‘숭명의리(송시열)’와 ‘대청실리외교(윤증)’의 대립이었다. 윤증은 호란 이후 사회경제 문제는 주자학적 의리론과 명분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윤증은 스승을 배반했다는 패륜의 낙인이 찍히기도 했지만, 그를 따르던 소론 진보세력들은 그의 사상을 이어받아 노론에 비판 세력 역할을 했다.

이 같은 노소 대립은 경종 ·영·정조 대에도 계속되었으나, 18세기 중반 이후 노론 일당의 지배 체제로 굳어졌다. 이 와중에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 남인들은 약 200년간 중앙 권력으로부터 거의 소외되는데, 윤증을 필두로 한 소론은 야당인 남인과 노론 사이에서 중도 노선을 견지하였다.

윤증은 평생을 도리와 예법을 좇아 살고자 한 당대의 대표적 선비였다. 그는 대사헌·이조참판·이조판서·우의정을 임명 받았지만 한 번도 벼슬길에 나아간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 중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나 서신으로 적극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리고 지행합일의 인간적 소통과 화합정신을 보여주는 여러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윤증은 ‘무실務實’과 ‘실심實心’의 삶을 지향하여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3) 연구 자료에 의하면 원래는 소슬 대문이 있었다고 한다.

주4) 이 편액은 명재의 후손 중 개화기 때 윤하중尹昰重이란 인물이 천문학에 심취하여 그 뜻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주5) 이 편액 ‘도원’의 ‘桃자는 ’木‘변이 위에 있다.

주6) 석가산 아래쪽 마당에도 돌무더기가 있는데, 언뜻 보기에는 화단을 둘러싼 돌로 보이지만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을 상징한다고 한다.

주7)冂자형 안채의 가운데 부분, 전면 다섯 칸은 대청이다. 깊이 방향을 계산하면 8칸이다. 얼핏 보면 주택의 규모에 비해 크다. 대청이 너른 것은 제사를 위한 제청 및 초례청과 가족들의 모임장소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청의 뒤쪽엔 머름(전통 주택의 창호 구분은 ‘머름’의 유무로 선택한다. 머름이란 ‘멀다’란 의미와 소리를 뜻하는 한자음인 음을 합한 이두표기다. 머름의 위치와 크기는 방바닥 위에 약 30센티미터 높이로 설치하며 그 위에 창을 설치한다. 즉 머름이 있는 부분은 출입을 목적으로 하는 문이 아니라 환기를 목적으로 하는 문임)대 위에 세운 문얼굴이 있고 바라지창이 달렸다.

주8)안채와 사랑채의 분리, 사당의 건립 등은 조선조 중기 성리학적 규범이 지방사회를 지배하면서, 17세기 이후 '가례'와 같은 예학이 강력한 사회 규범으로 자리 잡으면서 정착되었다. 특히 남녀의 공간을 분리하는 주생활 규범은 16~7세기에 이르러 일반화된다.

그리고 대청 서쪽의 안방으로 들어가는 세 짝의 문은 맹장지 사분합이라 부른다. 동쪽의 대청 끝자리로 띠살무늬에 궁판을 들인 분합문은 건넌방의 출입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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