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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3 (11:4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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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동서식품 사외보 격월간지 '맥스웰 향기' 3,4월호에 실린 저의 글입니다.(1,2월호에는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를 주제로 한 글이 실림)

 

 

장승업의 매 그림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1843∼1897년)하면 영화 <취화선>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장승업은 조선 말 예인(藝人)으로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남아 있지 않아 <취화선>의 내용은 대부분 만들어진 이야기다.


  그가 활동하기 이전의 화단은 사대부 계층인 추사 김정희와 그 제자들이 주도한 심의(心意), 즉 마음의 뜻과 고담한 품격을 중시하는 문인화풍이 대세였다. 

 

 그런데 조선 말기에 사대부 중심의 신분질서가 붕괴되면서, 역관이나 중인 계층, 여항문인(閭巷文人)을 중심으로 시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새로운 화풍이 유행하게 된다. 이에 따라 묘사적 필력이 뛰어난 장식적 그림이 주목받게 되며, 장승업은 바로 이 시기에 혜성같이 나타난 화가이다.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에 자신을 견주어 그들만 원(園)이냐 나(吾)도 원이라는 뜻에서 호를 ‘오원(吾園)’으로 지었다는 설도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준다.  

 

 오원의 이력은 흥미롭다. 그는 주인집에서 머슴으로 살면서 어깨너머로 서화를 익히며 화가의 길로 들어섰으며, 청나라 상하이 화단에서 발간된 화보를 포함, 다양한 화풍도 수용했다. 이후 화가로서 이름을 얻게 되면서 궁중에서 그림을 그리던 관청인 도화서 화원이 되기도 하는데, 의례적인 보수성이 강한 도화서 화원풍의 그림은 그의 방일(放逸)한 기질과 맞지 않아 왕실 병풍을 제작하라는 고종의 명을 받고 대궐에 불려갔을 때도 두 차례나 궁궐 담을 넘어 도피했다고 한다.

 

  1890년대 전반에 장승업은 서울 광통교 부근에 위치한 육교화방이라는 개인화실에서 가장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는데, 당시 이곳은 지물포와 서화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에는 도화서가 폐지되고, 새롭게 부상한 상공인들과 부농들이 서화를 주문하는 주요계층이 되면서 이들 취향에 부합한 오원의 그림이 더욱 각광을 받게 된다. 그런데 그는 명성과 부(富)를 얻게 되자, 그림 판 돈을 술집에 맡겨놓고 매일 들러 술을 마시며 여색에 빠졌다고 한다. 

 

  장승업은 산수·인물·화훼․영모(翎毛)·기명절지(器皿折枝)·사군자 등 거의 모든 화과에 두루 능통했다. 특히 그는 새와 동물그림인 영모화를 즐겨 그렸으며, 그 중에서도 대표작으로 꼽히는 그림이《영모도 대련(對聯)》이다. 이 대련은 매와 꿩을 주제로 그린 한 벌의 그림을 말하는데, 이와 유사한 필치로 그린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유묘도遊猫圖>와 개인소장의 말 그림도 있어, 총 4폭이 함께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각자 단폭으로도 완결성을 지닌 그림들이다.

  영모도 대련 중 매 그림은 ‘사나운 독수리 그림’이란 뜻의 <호취도豪鷲圖〉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이 그림에 나오는 새는 그 모습과 깃털의 특징으로 보아 독수리가 아닌 ‘매(鷹) ’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그림을 보면 적절하게 공간을 배분한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데, 오원이 어떤 주제와 소재를 그리더라도 초본 없이 거의 즉흥적으로 그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놀랍다.   

 

  또한 이 그림은 다양한 묵조(墨調)와 담채(淡彩)가 어우러져 화면의 생동감이 넘친다. 무엇보다 필치의 다양성이 마음을 끈다. 좌변의 굵은 나무줄기는 단숨에 농담을 구사하는 몰골법으로 호방하게 표현하면서도 매의 눈이나 매의 발톱은 극히 날카롭게 묘사하거나, 풀잎이나 깃털 같은 부분은 섬세한 필치로 그렸다. 이처럼 한 화면에 다질성이 융합되어 공존하는 필치와 화풍은 조선시대 다른 화가의 그림에는 그 유례가 없다. 이전의 문인화가 담백한 여백 속 겨울 소나무 한 가지라면 장승업의 그림은 가을의 다채로운 단풍나무숲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오원 자신의 독창성이라기보다는 전통적 가치관이 해체되는 시대의 미의식의 변화와 함께 장식적 볼거리를 중시하게 된 문화 분위기에 기인한다. 그리고 장승업 제자 세대들이 활동하던 시기인 일제 강점기에 서양미술이 주로 일본을 통해 유입되면서 장승업 식의 화풍은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장승업이 문인화에서 벗어난 새로운 미감을 선보였듯, 새 시대는 또 다른 예술세계가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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