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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9 (16: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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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직지사에서 본 겸재와 마티스 그림?


1.
지난 여름, 추풍령 고개 넘어 경상북도 김천 황악산(黃嶽山) 동쪽 기슭에 위치한 직지사(直指寺)에 다녀왔다.
고교 졸업이후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게 되면서 경부선을 타고 대구와 서울을 오르내리면 김천 근처에서 한적한 간이역인 직지사역을 볼 수 있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최완수 선생이 쓴 『명찰순례』라는 책에서 직지사 편을 감명 깊게 읽었다.
오래된 절인 직지사는 시대를 달리한 정신과 물질의 연(緣)이 켜켜이 쌓인 퇴적층처럼 혼재된 공간이었다. 사찰의 건축이나 그림은 형식적인 속성을 가진 유산 또는 상징이기 전에 물질이며, 이 물질의 형(形)과 질(質)을 바탕으로 문화적 교배가 성립되며, 인간의 정신과 숨결을 드러낸다.  
이번 직지사 탐방에서 뜻밖의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그 단서는 사찰 당우들에 그려진 그림과 대웅전 안팎의 그림들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직지사 경내 회화들의 가치가 크게 주목받는 대상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 질 정도였다. 직지사의 불화들은 찬연한 우리 전통 불교미술의 정화(精華)로서, 조선시대의 바로크 미술이자, 또한 겸재와 마티스 그림의 특성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불상 뒷벽, 그리고 그 뒷벽의 그림들에서 이러한 특색이 뚜렷했다.

2.
직지사가 자리한 황악산(黃岳山, 1111m)은 북쪽으로 추풍령을 넘으면 충청도(영동) 땅이고, 서쪽 삼도봉 너머는 전라도(무주) 땅, 이처럼 경상도와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에 자리 잡은 산이다. 바위산에 쓰이는 악(岳)자가 산 이름에 들어가 있지만 실상은 육산(肉山), 즉 흙산이다. 그래서 황악산 자락은 가파르지 않았으며, 깊고 넓었다.

절 이름, 즉 사명(寺名)에 불교의 본지(本旨)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절 3개를 말하라면 해인사(海印寺)와 개심사(開心寺), 그리고 직지사(直指寺)를 꼽고 싶다.
해인사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 근거를 둔, 삼라만상이 고요한 바다에 세상의 실상이 비치듯이 깨달음의 세계는 번뇌가 끊어진 바다와 같다는 의미에서, 개심사는 마음을 연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직지사는 선불교 사상이 집약된 이름으로 강한 어감이 드러난다.
직지사의 절 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경전이나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 기대지 않고 각자가 갖고 있는 참된 마음을 곧바로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禪宗) 교리의 근간인,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에서 나온 말이다.

직지사는 유서 깊은 절이 대개 그러하듯 숲의 바다 속에 있었다. 주차장을 나와 절 입구에 들어서자 거대한 일주문에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 크게 쓰여 있었다. 대단한 자긍심과 위세를 드러낸 모습이다.
진입공간 길 양옆에는 숲 속에 있어 키가 큰 배롱나무들에 붉은 꽃들이 점점이 피어 있었다. 만세교를 건너자, 임진란의 병화(兵禍)에서도 화를 면했다는 고풍스런 일주문이 이번 비에 손상을 입었는지 수리 중이었다. 
이어 대양문을 지났다. 일반절의 형식인 일주문 - 천왕문(또는 금강문) - 불이문(혹는 해탈문)으로 이어지는 삼문(三門)형식과 다른 문이다. 주1)
일주문, 대양문, 금강문을 지나 천왕문에 이르자, 천장의 비천상 그림이 매우 생기 넘치는 율동적 선으로 묘사되어 있어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불이문을 거쳐 만세루에 이르는 데, 이 모든 문이 거의 평지에 가까운 지세 위에 지어져 있었다. 만세루를 지나 계단을 올라서는 순간, 대웅전과 탑이 있는 넓은 마당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사찰을 통틀어 국보와 보물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은 조계산 송광사이고, 그 다음이 통도사, 법주사, 해인사, 금산사, 화엄사, 그리고 이곳 직지사의 순이다. 국보 숫자만 통계내면 불국사도 많지만 보물까지 합하면 이 순서대로다.
그런데 직지사의 보유문화재는 다른 곳에서 반입된 유물들이 유달리 많다. 경내에 즐비한 4기의 석탑들도 반입문화재이고 성보박물관의 전시 유물들도 거의 말사들의 유물이다.

우선 대웅전 앞에 나란히 서 있는 2기의 삼층석탑(보물 제606호)은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도천사터에서 1974년에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보물 제607호로 지정된 비로전 앞 삼층석탑도 도천사터에서 옮겨온 3기의 석탑 중 하나다.주2) 균형미와 세련된 조형미를 보여주는 청풍료(성보박물관)앞 삼층석탑(보물 제1186호)은 원래 구미 선산의 낙동강변 원동마을 강락사(江洛寺)터에 있던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선산군청으로 옮겨졌던 것을 다시 옮겼다. 이들 탑신은 모두 불국사 석가탑과 거의 비슷한 형상인데, 좀 더 갸름하고 날씬한 형태였다.
불교의 공(空)사상을 빌리지 않아도 세상만물 모든 것은 기멸(起滅)하여, 고정 불변하는 사물은 없지만 아직 건재한 탑들이 이곳까지 옮겨지기까지는 그 타당성을 떠나 물리적 힘이 아니고선 불가능하다. 전 세계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이 되게 그러하듯…
그래서 어떤 곡절과 이유가 있든 새로운 장소에 정착하게 되면, 그 내력만이 기록으로 남고, 실제는 그곳의 풍경이 되고, 마침내 역사로 고착됨을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직지사는 그 창건 설화로 보아 매우 오래된 절집이다. 직지사가 전환의 시기를 맞은 건 고려태조 왕건과의 인연에서다. 왕건과 견훤이 패권을 다투던 시기, 대구 팔공산 동수(桐藪)에서 패배해 달아나던 왕건은 이곳 황악산에서 능여(能如)대사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견훤의 추격을 피해 사지를 벗어난다.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후 이곳 직지사에 전답을 하사하고 능여를 왕사로 삼아 직지사를 크게 중수한다. 이후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직지사는 조선 정종의 태를 묻은 태봉이 대웅전 뒷산에 모셔지는 인연으로 조선 초기 까지도 사세를 유지한다.

그리고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이 절이 낳은 대표적인 인물이 나오는데,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그 때 이 절에 주석하던 신묵(信黙)대사의 꿈에 절 입구의 큰 소나무 아래서 누런 용(黃龍) 한 마리가 하늘로 오른다. 그 날, 열세 살에 양친을 여의고 천애고아가 되어 떠돌던 남루한 행색의 어린소년이 절 입구의 편편한 바위 위에서 자고 있었다.
이 소년이 바로 사명당 유정(泗溟堂, 惟政, 1544~1610년)으로, 이곳 직지사에서 머리를 깎게 된 사연이다. 그는 서산대사 휴정(西山, 休靜, 1520~1604년)의 수좌(首座)로서 임진란 때 연로한 스승을 대신하여 승군을 지휘한 우두머리였다.

그러나 직지사도 임진란의 병화를 피할 수 없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제1군은 대구를 지나 조령(문경 새재)을 넘고,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제2군은 경주를 거쳐 죽령을 넘고 쿠로타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은 성주, 김천을 지나 추풍령 넘어 한양으로 진격했던 임진란 때 직지사는 이 주요 진격로 중 하나에 위치한 절이었다.

직지사 대웅전은 임진란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 27년(1649)에 사승, 상원, 계림 등이 중창하고 영조 11년(1735)에 다시 중건된 건물로, 조선 후기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내ㆍ외부에 많은 벽화와 불단이 남아 있는 점 등이 두드러진 특색이다. 특히 정면 다포의 맨 위층은 다른 절과 달리 모두 용머리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그리고 문살도 우물 정자형인데, 매우 단순하면서도 대범한 느낌이어서 아름답고 품격이 넘쳤다. 이 대웅전은 이러한 가치를 뒤늦게 인정받아 최근에야 보물 1576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오늘의 직지사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건물들은 20세기에 들어 녹원(綠園)선사가 대대적 중창불사를 하면서 조성한 것이다.

직지사는 비로전 안쪽 선원으로 가는 길목, 누각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폭 40~50Cm의 세심천(洗心川)이 아름다웠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어 속세에서 선계에 이르는 상징적인 뜻이 담겼으며, 이곳 문화해설사에 의하면 이러한 세심천은 목조건물의 뒤틀림을 방지하는 역할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직지사의 두드러진 특색이자 압권은 단연 불화, 즉 그림이었다. 보물 제670호로 지정된 3폭의 삼존탱화(영산대회탱, 약사대회탱, 미타대회탱)는 조선 후기문화의 전성기인 1744년 작으로 짙은 녹색과 붉은 색, 흰색 등의 채색 대비가 매우 아름다웠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내력 있는 다른 절도 대개 그러하듯, 이러한 탱화는 단지 불상의 배경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규모 및 이미지와 색채 측면에서는 오히려 불상보다 더욱 강렬한 대상으로 존재한다. 그래서일까? 탱화를 보는 순간 대담한 색조 구성 및 대비효과가 마티스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내부 각 벽면과 천장의 단청과 벽화도 매우 화려한데, 특히 눈에 뛰는 것은 좌우 상벽에 문수, 보현, 관음 등 제 보살을 사자, 코끼리, 용 등의 관련 있는 동물에 태워 전진하는 동세를 강조한 것이다. 
남순동자는 비룡을 타고 하늘을 난다. 이 대부분의 그림들이 자유자재의 대담한 구성과 함께 그 필세가 활달하고 색채 또한 화려했는데, 그 백미는 삼존불 뒤쪽 벽에 있는 거대한 크기의 남해관음의 좌상과 남해 용왕 및  선재동자(남순동자)상이었다. 마침 여름이라 환기를 하려는 지 뜻 밖에도 대웅전 뒷문이 열려 있어 평소에는 공개되지 않은 이 그림들을 볼 수 있었다. 이 뒷벽을 통해 불상과 불화가 있는 벽이 대웅전 뒷벽과 별도로 있어 그 사이가 통로를 이루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뒷벽의 그림은 고주로 분할된 세 칸의 벽면에 녹청과 먹을 주조로 매우 신비롭게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대웅전 뒷벽과의 사이 공간이 좁아 벽을 헐지 않고선 벽화의 전경을 제대로 볼 수 없으며, 그래서 관람객이나 순례객은 밑에서 위로 우러러 볼 수밖에 없어 더욱 종교적 이미지가 부각되어 보였다.
오른 쪽 선재동자상은 그 아래 넘실거리는 거친 파도를 나타낸 필세가 어제 그린 듯 생동감이 넘쳐 마치, 겸재 정선이 동해 파도를 그린 것 같았는데, 워낙 필세가 거침이 없어 오히려 겸재의 그림보다도 더욱 강렬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만 보면 마치 그림의 그리는 과정이 그대로 거칠게 드러나는 현대의 드로잉 작품 같았다.
가운데는 수월관음상이 그려져 있었으며, 왼쪽 벽의 남해용왕 옷자락의 묘사는 정말 감탄을 금하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필치였다.
사찰 그림이 전반적으로 채색 위주여서 이렇게 필세가 강한 그림이 매우 드문 데, 선묘 위주로 강렬하게 표현된 것이 거친 흙벽과 어울려 더욱 상승효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이 그림들은 구태의연한 종교적 형상을 벗어나 있었다. 이번 여름에 경험한 최고의 발견이었으며, 새삼 이미지의 힘이 종교에서 얼마나 강력한 요소인가를 자각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종교적 상징의 공간에서 자연과 인간의 숨결이 더욱 강하게 드러남을 절감하게 되었다. 중력의 법칙에 의하면 사과나무에 사과가 달려 있는 것이 경이로운 현상이듯, 인간의 정신과 손길의 힘으로 수백년을 유지해 온 물리적 대상들은 그 자체로 시간의 역사를 드러낸다.
서양문화의 기층에 크게 고전주의적 요소와 바로크적 두 축이 있듯, 우리 문화유산에도 이러한 특성이 보인다. 수덕사 대웅전이 고전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면 화려한 사찰들의 경우 바로크인 경향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범주가 혼재하는 사찰들도 있다.
사찰은 자연환경과 인간환경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이념적 공간인 기독교의 교회나 이슬람 사원과 달리 정서적이고 감각적인 공간이다. 이처럼 한국의 불교는 구체적인 환경 속에서 형성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무엇보다 자연친화적 미의식이 두드러지지만 당대의 권력계층과 매우 긴밀한 연대를 드러낸다. 
테크놀로지 문명이란 추상공간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이러한 사찰공간이란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한 청정한 공간이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변함없는 유구한 자취란 존재하지 않는다.
최근 들어 대형사찰에서 진행되는 대대적 중창불사는 물질적 공세이며, 그만큼 불교의 본래적 정신과 거리가 멀다. 오늘의 사찰이 바른 앎을 추구하는 불교 본연의 지혜를 새롭게 형성하는 기반이 될 수 있는가를 반문해본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3.
여행은 발견이고 예기치 않은 경험이다. 이번에 가 보지 않았더라면 불상 뒤쪽과, 그 뒷벽에서 겸재와 마티스의 예술세계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종교적 순례의 장소로서만, 또는 건축학자의 입장에서만 이 공간을 들여다본다면 보이지 않은 부분이다.
사찰의 그림에서는 관념적, 상징적, 장식적, 주관적인 요소를 모두 종합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바탕은 어디까지나 물적 토대이며, 또한 그 형질에서 이를 조성한 인간의 기질을 느낄 수 있다.  미술하는 사람으로서 사찰회화의 진면목은 바로 이러한 특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직지사에는 무엇보다 풍부한 색채와 거침없는 선의 변주가 있었으며, 이것은 환영이 아니다. 과거나 현재나 환영은 문명의 겉모습이다. 이러한 환영의 계기는 신념이지만 그 과정과 결과는 신념을 넘어선 광경이자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세계다. 이런 차원에서 여행이란 외피의 환영을 넘어 본질적 실체와 대면하는 과정이다.
다채로운 종교적 상징 속에서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본다. 이러한 욕망으로부터 깨달음을 추구한 붓다의 정신이 시대와 지역마다의 물질과 접점을 이루면서 다양한 변주를 이루는 것 이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물론 현대로 내려올수록 최근에 지은 것일수록 더욱 물질적 공세가 두드러진다. 자연과 매우 대립적인 이런 양상은 서양 물질주의의 잘못된 이입과 천박한 미의식의 산물이다.
세심천과 사찰 벽화라는 훌륭한 자산에서 알 수 있듯, 먼저 그 가치의 발견이 선행되어야 하며, 결국 무조건적 신앙의 대상이 아닌 불교 본연의 지혜로써 현재와 미래의 직지사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2011년 9월 30일
                                        도 병 훈


주1)수 년 전, 일주문, 천왕문, 대웅전의  편액글씨가 친일파의 대표격인 이완용의 글씨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주2) 이처럼 3기로 조성한 탑은 통일신라 이후 유행한 동서 쌍 탑의 가람형에서 벗어난  특수한 가람 배치로 3탑 가람 구조의 형태를 보여주는 매우 드문 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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