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 83
2018.10.09 (1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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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의 두 시인 -3

-에드가 리 마스터즈(Edgar Lee Masters)와 칼 샌드버그(Carl Sandberg)

이 시의 화자는 상당히 재미있다. 그는 죽은 자신의 묘비의 비문을 읽으며 쓴 웃음을 짓는 것이다. “내 인생이 순탄했다고? 운명이 나와 잘 맞았다고? 내 일생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웃겠어? 인생이 결코 나에게는 순탄치 않았고 나의 운명은 전쟁이었다라고 써야 하는 거야. 그런데 그게 뭐야. 듣기에는 좋게 써 놓고 뭘 하자는 거야?” 이것이 아마 시적 화자의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살아가는 자신을 욕하는 사람들에게 시달리다가 죽어가는 바보가 새긴 비문에 굴복하는 것이다. 상당히 시니컬한 시이다. 역시 세기말적인 전통에 그 기반을 둔 시라고 할 수 있다. 무언가 세상은 불합리하고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인생이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런 것들이 이 시기의 서구를 사로잡고 있던 생각이었다. 쇼펜하우어의 염세론이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고 영국에서는 토마스 하디, 하우스먼 같은 시인들이 끊임없이 그런 시를 서대고 있었다. 이런 시인들과 마스터즈의 차이는 그 사실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엘자 위트만](“Elsa Wertman”)이란 시는 좋은 예다. 독일에서 이민 온 농촌 소녀 엘자는 토마스 그린이라는 자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게 되는데 어느 날 주인 여자가 외출한 사이에 남자에게 겹탈을 당하게 된다. 임신을 하게 된 그녀는 주인내외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만 그것은 묻혀지고 아이가 없던 그 집에 아기를 빼앗기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 아이가 태어났다-그들은 나에게 너무나

 친절했다.

     나중에 나는 거스 위트만과 결혼해서 여러 해가 지났다.

     그러나  - 어느 정치 집회에 참석했을 때 곁에 앉은 이들은 내가

     해밀턴 그린의 연설에 감동해서 울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아니다! 나는 말하고 싶었다:

     거건 내 아들! 내 아들이다! 라고.

 

      And all went well and the child was born – They were so kind to 

 Me.

      Later I married Gus Wertman, and years passed.

      But-at political rallies when sitters – by thought I was crying

      At the eloquence of Hamilton Greeen –

      That was not it.

       No! I wanted to say:

       That’s my son! That’s my son!                                   

 

       이 시는 그 마지막 부분에 비극적 클라이막스가 있다. 남의 집에 들어가 일을 하다가 그런 일을 당한 처녀가 한 둘이였겠는가? 당시 미국사회는 아직 이민자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보호책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낮선 나라에 이민 와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은 부지기수였다. 이 독일처녀의 비극은 그렇게 해서 낳았고 빼앗긴 자신의 아이가 어느덧 훌륭한 정치가로 성장을 한 모습을 보는데 있다. 핏줄은 무섭다. 한 눈에 자신의 혈육임을 알아본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 잘 생긴 젊은이 해밀턴 그린은 바로 자기가 낳은 그 아기였던 것이다. 그 비극은 이어지는 시 [해밀턴 그린](Hamilton Green”)에서 그 해밀턴의 이야기에 의해 배가되고 있는 데 좀 우습기까지 하다. (“나는 버지니아의 프란시스 해리스와/켄터키 출신 토머스 그린의 독자,/ 둘 다 다 용감하고 명예로운 혈통이었다./ 나의 모든 입지, 판사, 의회의원, 주의 리더 등은 / 다 그 두 집안의 덕택이다.” (I was the only child of Frances Harris of Virginia/ And Thomas Greene of Kentucky,/ Of valliant and honorable blood both/ To them I owe all that I became,/ Judge, member of Congress, leader in the state./ From my mother I inherited) 젊은이는 철석같이 이 두 사람을 자기의 친부모로 믿고 있다. 지금 현재 그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 정치적인 지위는 모두 그 부모의 덕택으로 얻은 것으로 생각하며, 어머니로부터는 활력과 상상력가 언어능력, 아버지로부터는 의지력, 판단력, 논리적 사고 등을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어머니로부터 생기와, 환상과 언어를;/ 아버지로부터 의지, 판단력, 논리력을 물려받았다./ 그분들에게 영광 있으라.” (Vivacity, fancy language; From my father will, judgment, logic,/ All honor to them)) 아마 이 젊은이는 부모 양 쪽의 핏줄에 자랑스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 가난한 독일계 이민녀의 피가 흐르고 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 것인가. 이것 역시 시인의 냉소적인 시각이 다분히 드러나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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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0 no image 현대미국시인 - 6
3 2018-10-22
현대 미국시인 – 6 로빈슨 제퍼스(Robinson Jeffers) – 몬트레이 해안의 명상가 바다에서 건진 영감 로빈슨 제퍼스(Robinson Jeffers 1887-1962)는 한국의 시인들에게 그리 많이 알려진 시인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활동했던 1920-30년대 당시로서는 매우 독특한 시인이었다. 우리는 앞에서 윌리엄즈의 시를 이야기하며 그의 지역성을 언급했었다. 이는 당시 세계시민을 지배하던 엘리엇이나 파운드의 세계주의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엘리엇의 [황무지]는 당대 서구문명의 종말을 우려하는 문명비판의 노래였고 파운드의 시도 역시 그러했다. 에이츠 또한 그의 독특한 가이어 상징을 창안하여 독특한 역사진행 이론을 내세우고 거기에 맞추어 자신의 우주관을 펼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 시대는 뭔가 거창하고 현학적인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분위기였는데 이 때 자신이 살던 지역에 깊이 천착하며 거기시 휴머니티와 아름다움을 찾았던 시인이 뉴져지의 월리엄 칼로스 윌리엄즈였다. 월리엄즈가 미 동부의 뉴저지에 천착했다면 미 서부 해안의 아름다움을 절경과 거기서의 삶에 몰두했던 시인이 바로 로빈슨 재퍼스이다. 윌리엄즈가 몰두했던 것은 당시 산업화가 진행되던 뉴저지 패터슨읍의 이민자들의 애환과 삶이었다. 그는 그들의 가난하고 힘든 삶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의 상처 입은 마음들을 어루만졌다. 그러나 로빈슨 제퍼스는 사람이 모여 사는 동부가 아니라 당시 거의 무인지경이던 태평양 연안의 작은 마을에서 자리 잡았다. 그를 벗하는 것이라고는 대양의 파도와 갈매기뿐이었다. 월리엄즈가 사람들의 삶에 목을 맸다면 제퍼스는 바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들의 모습에 집중했다. 이 시인과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처의 풍광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생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대륙의 끝과 바다가 만나는 절벽이 나온다. 빅서라고 불리우는 이 절벽위의 길을 수마일 따라가면 몬트레이라는 아름다운 해안이 나오는데 그 바로 아래 자리잡은 마을이 칼멜이다. 이 시인은 칼멜의 거주지 경계지역 쯤에 터를 구입하고 직접 집을 지었다. 그들의 “땅은 파도가 화강암과 둥근 돌들을 두들기는 작은 해변 위쪽으로 50야드쯤 올라가 위치한 하늘과 바다를 마주하는 땅”이었다고 한다. 그가 토르(Tor)라고 이름붙인 이 집은 사실 상당한 시간을 두고 계속 증축되며 나중에 두 아들이 성장하면서 완성된다. 거의 수도자나 명상가의 삶과 흡사한 이 생활은 1916년부터 칼멜에서 시작된다. 지금 이곳은 미려한 주택들이 들어선 일급 주택지이자 관광지이지만 그 당시는 거의 무인지경이었다. 제퍼스의 시는 이 지역에서의 거의 자연인에 가까운 삶과 당시 태평양 연안의 아름답고 광활한 자연을 소재로 삼고 있다. 초기의 다음 시에서 그의 생활과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대양의 옛 목소리, 작은 강들의 새 지저귐, (겨울은 그들에게 은 대신 금을 주었고 물을 더럽히고 초록을 칼질하여 갈색으로 만들고 은행에 줄서게 했다) 서로 다른 목구멍으로부터 하나의 언어가 되어 나온다. 하여 나는 생각하게 되나니, 과연 우리가 병든 나라의 폭풍소리와 배고픔이 덮친 도시에서의 분노를 욕망과 공포의 갈라짐 없이 들을 수 있을 만큼 강한지, 그 목소리들은 또한 어린아이의 그것이다; 대양의 기슭에서 연인을 꿈꾸며 숨 막히게 춤추는 어느 소녀의 그것처럼 선명한 모양일 것이다. The old voice of the ocean, the bird-chatter of little rivers, (Winter has given them gold for silver To stain their water and bladed green for brown to line their banks) From different throats intone one language. So I believe if we were strong enough to listen without Divisions of desire and terror To the storm of the sick nations, the rage on the hunger-smitten Cities, Those voices also would be found Clean as a child’ s; or like some girl’s breathing who dance alone By the ocean-shore, dreaming of lovers. -[자연의 음악](“Natural Music”) 전문 이 시인의 시에서는 “대양의 목소리”라는 표현이 자주 보이는데 물론 이것은 파도소리를 말하는 것이고 또 작은 강들의 맑은 조잘거림을 새소리에 비유하고 있다. 태고이래 끊임없이 뒤척이며 원시적인 소리를 반복했을 바다와 그 바다에 함류하는 무수한 작은 당들의 면모 중에서 특히 소리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괄호 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당시 몰아치던 금광개발의 열풍(처음에는 은광 나중에는 금광이었다) 그에 따른 사람들의 정신적 타락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들의 것이 시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깨끗한 자연을 난도질 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 “서로 다른 목구명에서 나오는 하나의 언어”란 여러 나라 출신의 이민노동자들이 공용어인 어색한 영어로 떠드는 것을 연상하게 한다. “벙든 국가들”이나 “굶주림이 덮친 도시”는 당시 노동자들의 삶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광산에서 결국 돈을 버는 것은 소수의 자본가였으니) 거기에 비하면 자연의 소리는 얼마나 깨끗한 맑은가. 시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러한 세태에 물들지 않을 수 있는 용기의 부족함이다. 끝으로 시인은 그 자연의 목소리를 어린 아이의 깨끗함, 춤추는 소녀의 숨결이라고 말한다. 제퍼스는 그가 살고 무수히 거닐었을 바닷가, 광대한 태평양 바닷가에서 천진무구한 아이의 숨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1479 no image 시카고의 두 시인 - 5
62 2018-10-15
시카고의 두 시인 -5 -에드가 리 마스터즈(Edgar Lee Masters)와 칼 샌드버그(Carl Sandberg) 당시는 1차 세계 대전이 세계를 휩쓸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때까지 남북전쟁을 기억하고 링컨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아직은 미국이 신흥 부국으로 성장해가던 이 시기에 미시간 호반 시카고 근처의 일리노이 사람들의 삶은 마스터즈라는 한 시인의 손을 통해 참으로 풋풋하게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이나 풍자는 약간 싱거울 수도 있는 마스터즈의 시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 마스터즈에 비해 샌드버그는 都市的이다. 그의 대표작 [시카고](“Chicago”)는 정말 남성적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그는 시카고와 근처 미시간호에 대한 더 직접적인 언급을 자주 하고 있다. 신흥도시 시카고는 그의 시에서 다음과 같이 그려지고 있다. 세계를 먹이는 돼지도살자, 기구 제작자, 밀 적재인 철도 도박사, 전국의 화물 취급자, 소란하고 목소리 거칠고 싸움 좋아하는 어께 넓은 도시, 다들 너를 나쁘다고 말하고 나도 그렇게 믿는다. 너의 분칠한 여인들이 가스 등 아래서 농촌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것을 보았으니 말이다. 또 다들 흉악하다고 하면 나는 그렇다, 사실이다 라고 대답한다, 악한이 사 람을 쫘 죽이고, 또 죽이려고 활보하는 것을 내 보았으니. 또 다들 너를 잔인하다고 하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부녀자와 아이들의 얼 굴에서 무자비한 굶주림의 흔적을 보았다고. 그렇게 대답하고서, 나의 이 도시를 조소하는 자들을 향하여, 그 조소를 돌 여 보내며, 이렇게 말해준다, 달리, 이처럼 고개 쳐들고 살아 있고, 억세고, 힘차고, 영리한 것을 자랑스러 이 노래 부르는 도시가 있거든 보여 달라고. 일에 일이 겹치는 고역 속에서 매력적인 욕지거리를 퍼붓는, 여기에 조그마 하고 연약한 도시와 분명히 대조되는 키 크고 용감한 사내도시가 있다고. (이창배 역) HOG Butcher for the World, Tool Make, Stacker of Wheat, Player with Railroads and the Nation’s Freight Handler; Stormy, husky, brawling, City of the Big Shoulders: They tell me you are wicked and I believe them, for I have seen your painted women under the gas lamps luring the farm boys. And they tell me you are crooked and I answer: Yes, it is true I have seen the gunman kill and go free to kill again. And they tell me you are brutal and my reply is: On the faces of women and children I have seen the marks of wanton hunger And having answered so I turn once more to those who sneer at this my city, and I give them back the sneer and say to them: Come and show me another city with lifted head singing so proud to be alive and coarse and strong and cunning. Flinging magnetic curses amid the toil of piling job, here is a tall bold slugger set vivid against the little soft cities; Fierce as a dog with tongue lapping for action, cunning as a savage pitted against the wilderness, … -부분
1478 no image 시카고의 두 시인 - 4
69 2018-10-12
시카고의 두 시인 – (4) _ 에드가 리 마스터즈(Edgar Lee Masters)와 칼 샌드버그(Carl Sandberg) 그의 시에는 온갖 직업의 사람들이 다 등장한다. 거리의 악사, 나무껍질 벗기는 이, 드럼 악사, 광고 패인터 등 당시의 한창 제조 산업이 일어나고 있던 미국 사회 저층을 이루었을 사람들이 다수 등장하며 그들의 애환이 시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은 이민의 나라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먼저 이민 와서 자리 잡은 이들이 후발 이민자들을 다소 착취하는 측면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화중에서도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있었고 그것은 다소 억척스러운 면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의 시에서 우리는 그것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결혼해서 도합 70년을 함께 살았다. 즐기며, 일하며 열두 명 아이들을 키우며, 내가 60이 되기 전에 그들 중 여덟을 잃었지, 나는 물레를 잣고, 옷감을 짜고, 살림을 하고, 환자를 돌보고, 정원을 가꾸고, 휴일이면 종달새 노래하는 들판을 거닐고, 스푼리버 가에서 조개를 줍거나, 꽃을 꺾거나 약초를 캐었지 – 우거진 언덕을 향해 소리 지르거나, 푸른 계곡을 향해 노래를 부르면서 96의 나이, 나는 충분히 살았어, 그게 다야, 그래서 달콤한 휴식으로 들어갔지, 슬픔과 애통, 분노, 불만 그리고 시든 희망 따위나 내가 듣고 있다니 이게 뭐야? 아들들과 딸들을 타락시킨다구, 인생이란 너희들에게 너무 버거워 – 삶을 사랑하기 위해 삶을 요구하는 거야. We were married and lived together for seventy years, Enjoying, working, raising the twelve children, Eight of whom we lost Ere I had reached the age of sixty, I spun, I wove, I kept the house, I nursed the sick, I made the garden, and for holiday Rambled over the fields where sang the larks, And by spoon river gathering many a shell, And many a flower and medicinal weed – Shouting to the wooded hills, singing to the green valleys, At ninety –six I had lived enough, that is all, And passed to a sweet repose. What is this I hear of sorrow and weariness, Anger, discontent and drooping hopes? Degenerate sons and daughters, Life is too strong for you – It takes life to love Life. - [루신다 매트로크](“Lucinda Matlock”) 부분 여기 등장하는 여자는 그야말로 평범한 시골의 여자이다. 멋진 남자를 만나기 위해 모양을 내거나 무슨 로맨틱한 사건, 고민 같은 것도 없었다. 그냥 시골 무도회에서 한 번 만난 남자와 큰 사건 없이 결혼해서 아이를 12명이나 낳고 그 중에 6명이나 잃었지만 그게 무슨 비극이나 슬픔 같은 것을 느낄 여유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을지 모를 것이다. 그냥 옷감 짜고 집안 일 하고 아픈 이 돌보고 그런 주부로서의 생활만 줄기차게 해 왔었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스푼리버 가에서 종달새처럼 노래하고 마음껏 소리지르며 즐거웠다는 회상인데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자연에 그대로 동화된 삶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제 이 여인은 나이 90에 이르렀다. 안식을 찾을 나이가 된 것이다. 늙어서 과거를 돌이켜보면 더 이상 삶에 대한 분노도 회오도 없고 오로지 회상만 남는다. 이 할머니의 삶은 특이할 것 없는 당시 이 시골지역 여성들의 통상적인 삶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이 땅 위에서 주어진 대로 살다가 자연의 순리대로 사라져가는 것 그것이 생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마스트즈의 생각은 그러한 순리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서구시의 중요한 전통, 풍자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다음의 시를 읽어 보자. 나그네여! 스푼리버의 사람들에게 두 가지만 전해 달라: 첫째 우리는 그들의 명령을 듣다가, 여기 누워 있다는 것: 둘째 그들의 명령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았다면 우리가 결코 여기 누워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Stranger! Tell the people of spoon River two things: First that we lie here, obeying their words: And next that had we known what was back of their words We should not be lying here! -[무명용사](“Unknown Soldiers”) 전문 단 네 줄로 된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여기 누워 있는 병사들은 남북전생이나 1차 대전의 격전지에 죽은 채 유골도 추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있는 시신들이다. 그들은 지나가는 관광객이나 길손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딱 두 가지만 내 고향 스푼리버의 사람들에게 전해 달라. 첫째는 상관의 명을 잘 들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여기 죽어 있는 것이라고, 둘째 그들의 명령 다름에 올 것을 알았다면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을 테니 지금 잘 살아 있을 것이라고 …… 그렇다 전쟁은 개개인 사람들을 생각지 않는다. 아무리 고귀한 사람이라도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의 한 소모품에 불과한 것이다. 아마 고향에 남아 있는 이들은 이들의 영웅적인 죽음을 기리거나 흠모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전쟁이란 얼마나 비정하고 개인말살적인 단체행동인가. 병사 개개인은 소모품에 불과한 것이다.
Selected no image 시카고의 두 시인 (3)
83 2018-10-09
시카고의 두 시인 -3 -에드가 리 마스터즈(Edgar Lee Masters)와 칼 샌드버그(Carl Sandberg) 이 시의 화자는 상당히 재미있다. 그는 죽은 자신의 묘비의 비문을 읽으며 쓴 웃음을 짓는 것이다. “내 인생이 순탄했다고? 운명이 나와 잘 맞았다고? 내 일생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웃겠어? 인생이 결코 나에게는 순탄치 않았고 나의 운명은 전쟁이었다라고 써야 하는 거야. 그런데 그게 뭐야. 듣기에는 좋게 써 놓고 뭘 하자는 거야?” 이것이 아마 시적 화자의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살아가는 자신을 욕하는 사람들에게 시달리다가 죽어가는 바보가 새긴 비문에 굴복하는 것이다. 상당히 시니컬한 시이다. 역시 세기말적인 전통에 그 기반을 둔 시라고 할 수 있다. 무언가 세상은 불합리하고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인생이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런 것들이 이 시기의 서구를 사로잡고 있던 생각이었다. 쇼펜하우어의 염세론이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고 영국에서는 토마스 하디, 하우스먼 같은 시인들이 끊임없이 그런 시를 서대고 있었다. 이런 시인들과 마스터즈의 차이는 그 사실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엘자 위트만](“Elsa Wertman”)이란 시는 좋은 예다. 독일에서 이민 온 농촌 소녀 엘자는 토마스 그린이라는 자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게 되는데 어느 날 주인 여자가 외출한 사이에 남자에게 겹탈을 당하게 된다. 임신을 하게 된 그녀는 주인내외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만 그것은 묻혀지고 아이가 없던 그 집에 아기를 빼앗기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 아이가 태어났다-그들은 나에게 너무나 친절했다. 나중에 나는 거스 위트만과 결혼해서 여러 해가 지났다. 그러나 - 어느 정치 집회에 참석했을 때 곁에 앉은 이들은 내가 해밀턴 그린의 연설에 감동해서 울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 그건 아니었다. 아니다! 나는 말하고 싶었다: 거건 내 아들! 내 아들이다! 라고. And all went well and the child was born – They were so kind to Me. Later I married Gus Wertman, and years passed. But-at political rallies when sitters – by thought I was crying At the eloquence of Hamilton Greeen – That was not it. No! I wanted to say: That’s my son! That’s my son! 이 시는 그 마지막 부분에 비극적 클라이막스가 있다. 남의 집에 들어가 일을 하다가 그런 일을 당한 처녀가 한 둘이였겠는가? 당시 미국사회는 아직 이민자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보호책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낮선 나라에 이민 와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은 부지기수였다. 이 독일처녀의 비극은 그렇게 해서 낳았고 빼앗긴 자신의 아이가 어느덧 훌륭한 정치가로 성장을 한 모습을 보는데 있다. 핏줄은 무섭다. 한 눈에 자신의 혈육임을 알아본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 잘 생긴 젊은이 해밀턴 그린은 바로 자기가 낳은 그 아기였던 것이다. 그 비극은 이어지는 시 [해밀턴 그린](Hamilton Green”)에서 그 해밀턴의 이야기에 의해 배가되고 있는 데 좀 우습기까지 하다. (“나는 버지니아의 프란시스 해리스와/켄터키 출신 토머스 그린의 독자,/ 둘 다 다 용감하고 명예로운 혈통이었다./ 나의 모든 입지, 판사, 의회의원, 주의 리더 등은 / 다 그 두 집안의 덕택이다.” (I was the only child of Frances Harris of Virginia/ And Thomas Greene of Kentucky,/ Of valliant and honorable blood both/ To them I owe all that I became,/ Judge, member of Congress, leader in the state./ From my mother I inherited) 젊은이는 철석같이 이 두 사람을 자기의 친부모로 믿고 있다. 지금 현재 그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 정치적인 지위는 모두 그 부모의 덕택으로 얻은 것으로 생각하며, 어머니로부터는 활력과 상상력가 언어능력, 아버지로부터는 의지력, 판단력, 논리적 사고 등을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어머니로부터 생기와, 환상과 언어를;/ 아버지로부터 의지, 판단력, 논리력을 물려받았다./ 그분들에게 영광 있으라.” (Vivacity, fancy language; From my father will, judgment, logic,/ All honor to them)) 아마 이 젊은이는 부모 양 쪽의 핏줄에 자랑스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 가난한 독일계 이민녀의 피가 흐르고 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 것인가. 이것 역시 시인의 냉소적인 시각이 다분히 드러나는 시이다.
1476 no image 현대미국시인 - 시카고의 두 시인 (2)
78 2018-10-07
시카고의 두 시인 – 2 -에드가 리 마스터즈(Edgar Lee Masters)와 칼 샌드버그(Carl Sandberg) 마스터즈의 시는 [스푼리버(Spoon River Anthology)라는 시집으로 대표된다. 스푼리버라는 강은 실제 일리노이에 있는 강으로 이 시집의 시들은 결국 강의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노래한 것이다. 시의 시작에 헤당하는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죽음이지만 그들의 삶을 또한 말하는 것이다. 열병으로 죽거나 감옥에서 죽거나 교량공사를 하다가 떨어져 죽거나 싸우다가 죽거나 한 이들의 삶은 결코 여유 있고 평탄한 것은 아니다. 흔히 하류계급층민이라 불리우는 이들은 나름대로 세상에서 제 몫을 하다가 죽어 지금은 저 언덕에 묻혀 잇는 것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시인 하우스먼(A.E. Housman, 1859-1936)의 시와 예이츠의 초기시에서 바로 이런 주제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아름답던 처녀와 튼튼하던 젊은이가 지금은 시냇물 흐르는 풀밭에 누워있다” 라는 영탄조의 시 말이다. 이것은 19세기 말과 조오지아주의 방만한 감성적 시들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마스터즈의 시에서는 그 인물들이 구체성을 띤 사실적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물들이 죽어 누워있는 곳도 시냇물 흐르는 아름다운 풀밭이 아니라 마을 뒤에 자리한 허술한 공동묘지 언덕이다. 시인이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마 인생무상이니 애상이니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당시 아마 좀 무질서했었을 사회에서, 산업화의 과정에 적응하다가 죽은 소시민들의 모습을 가련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마지막으로 주목하고 있는 인물의 삶은 좀 더 구체적이다. ( “90평생 내내 깽깽이 연주를 하며/맨 가슴으로 눈보라를 맞았던,/ 술 마시고, 싸우고 마누라도 친지도 / 돈도 사랑도 천국도 생각지 않던 / 늙은 악사 존스는 어디에 있나?” (Where is Old Fiddler Jones? Who played with life all his ninety years,/ Braving the sleet with bared breast,/ Drinking, rioting, thinking neither of wife nor kin,/ Nor gold, nor love, nor heaven?) 마지막으로 언급되고 있는 늙은 거리의 악사 존스를 회상하는 이 시인의 시선은 따뜻하다. 그는 90 평생을 장난처럼 살았고 가난을 맨몸으로 해쳐 나갔다. 계산하지 않고 욕심 없는 이러한 삶은 사실 그 자체만으로 주변의 여러 사람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 세상 모두가 이기적인 계산으로 핑핑 돌아가는데 따지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피곤한 모두에게 하나의 위안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가장 그리워하는 이가 바로 하류계층민이었다. 하류계층민의 삶에 눈을 둔다는 것은 바로 사실주의 문학의 전통이다. 19세기 들어 소설이 본격 문학 장르로 발전하면서 당시 소설가들이 관심을 두었던 것은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뒤에서 신음하는 도시 빈민층과 서민들의 비참이었다. 찰스 디킨즈(Charles Dickens)가 그 대표적인 작가였다. 그것이 나중에 자연주의 소설로 발전해 감에 따라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행하고 비참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심도 있는 추구가 이어지는 것이다. 영국 소설가 토마스 하디, 미국의 드라이져, 러시아의 도스예프스키 등이 바로 이런 소설의 맥을 잇고 있다. 시에 있어서도 그러한 맥을 찾을 수 있을 것 아닌가? 다음의 시에서도 인생의 아이러니가 드러난다. 사람들이 내 묘석에다 이렇게 새겼다: “그의 삶은 점잖았고, 여러 가지 기질이 잘 섞여 있어서 자연이 일어서서 세상에다 이 사람이야 말로 사나이였다 라고 말하리라” 이 헛된 미사려구를 읽고서 나를 아는 이들은 빙긋이 웃을 태지. 내 묘석문은 이러했어야 했다: “삶이 그에게는 점잖았다 여러 기질들이 그의 내면에 섞여 있어 그는 인생에 싸움을 걸었고, 거기서 죽음을 당했다” 라고 살아 있는 동안에도 나는 나를 욕하는 입을 막지 못했다, 이제 죽었으니 바보가 쓴 묘비문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They have chiseled on my stone the words; “His life was gentle, and the elements so mixed in him That nature might stand up and say to all the world, This was a man,” Those who know me smile As they read this empty rhetoric. My epitaph should have been: “Life was not gentle to him That he made warfare on life, In the which he was slain.” While I lived I could not cope with slanderous tongues, Now that I am dead I must submit to an epitaph Graven by a fool. - [케시어스 후퍼] ("Cassius Hueffer") 전문
1475 no image [현대미국시인] - 시카고의 시인
81 2018-10-05
현대미국시인 시카고의 두 시인 - 에드가 리 마스터즈(Edgar Lee Masters)와 칼 센드버그(Carl Sandberg) 미국은 넓은 나라이지만 그 경제, 정치, 문화의 중심은 아무래도 대서양연안의 동부다. 휘트먼(Walt Whitman)과 디킨슨(Emily Dickinson) 이래 미국 현대시의 주류는 역시 동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샌프란시스코 문예운동 이후 서부도 일종의 르네상스를 맞게 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엘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 게리 스나이더(Gary Snyder)가 있었다. 동부의 중심이 뉴-욕이라면 서부 문화의 중심은 역시 샌프란시스코이다. 그리고 현재 거기를 중심으로 피어나는 문화는 녹록치 않다. 그렇다면 대륙을 동서로 거슬러 갈 때 놓칠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도시 시카고에는 어떤 시인들이 있었을까? 소위 “시카고 시인” 이라 불리우던 시인이 칼 샌드버그(Carl Sandberg 1878-1967), 에드가 리 마스터즈(Edgar Lee Masters 1868-1950) 이다. 그들은 1910년대 시카고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시인으로 이들의 시 역시 단단한 지역성을 띠고 있다. 월리엄 칼로스 윌리엄즈가 뉴저지의 사람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었듯이, 이들 역시 시카고를 중심으로 한 일리노이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를 썼다. 이런 열은 필히 사실주의적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드라이저의 소설에서 말하던 신진 아메리카의 인간상들을 그들은 시에서 표현하고 있었다. 인류보편의 거대한 담론(문명의 흥망, 역사의 순환 등) 20세기 초엽에 서구를 흥분시켰던 문제들에 몰두하기 보다는 주변에 살고 있는 소박한 사람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엇의 프루프록은 도시의 뒷골목을 배회하며 자신의 연애를 성사시킬 용기를 찾고 있었다. 그야말로 “세상울 훈들만한” 대 사건인 이 연애를 성사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망설이고 용기를 내던 왜소해진 소시민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이들 시카고 시인들이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제 자본주의화 되어 가는 미국 중동부의 도시에서 살던 사실적인 인물이다. 프루프록 처럼 전형화된 인물이 아니라 실제 길거리에서 만날 것 같은 그런 평범하고 인간 냄새가 나는 인물인 것이. 우선 에드가 리 마스터즈의 시부터 살펴 보기를 하자. 의지 약한 친구, 팔둑 굵던 친구, 어릿광대, 술꾼, 싸움꾼 엘머, 허만, 버트, 톰, 그리고 찰리는 어디에 있나? 모두, 모두들 저 언덕에 잠들어 있네. 하나는 열병에 걸러 죽고, 또 하나는 광산에서 불타죽고, 또 하나는 싸우다 살헤당하고, 또 하는 감옥에서 죽고, 또 하나는 마누라 자식 먹여 살리려고 애쓰다 다리에서 떨어져 죽고 – 모두 모두들 잠자네, 잠자네, 잠자네, 저 언덕에, Where are Elmer, Herman, Bert, Tom, and Charley, The weak of will, the strong of arm, the clown, the boozer, the Fighter? All, all, are sleeping on the hill. One passed in a fever, One was burned in a mine, One was killed in a brawl, One died in a jail, One fell from a bridge tolling for children and wife – All, all are sleeping, sleeping, sleeping on the hill. -[언덕](“The hill”) 부분
1474 no image 작품 [파] 를 읽다 -3
85 2018-10-01
작품 - [波]를 읽다 - 3 *非定形性 혹은 변주곡 비정형성을 상황으로 전환시켜 감상자의 자재로운 감상적 이류-전을 유발하도록 설정 되 있기 때문에 환경미술 혹은 더 엄밀히 말해서 ‘상황’ 미술의 범주에 들어 가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파도 위에 앉아 좌선을 하는 모양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전래의 회하작품에서는 보기 힘든 구도다. 시각위주의 회화작품에서 감상자에 따라 각기 다른 자유로운 이류-전을 허용하기 때문에 이 작품은 마치 음악에서의 ‘변주곡’을 예상케 하는 것으로 [회화의 변주곡]이라 부를 만 하다. 시각적 이미지를 따라 감상자가 자유로히 해석케 하는 것이 아니라, 아에 [파]의 이미지를 무화시키면서 전혀 다른 콘택스트를 허용하는 것이다. 이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Beethoven. 1770-1827)이 만든 ‘디아베리 변주곡’과 같은 맥락의 내적 논리를 암시하고 있다. 바흐가 쓴 백작의 자장가(골드베르크 변주곡)가 하나의 멜로디에서 서른 개로 변주한 예에서 따 온 것이다. 최화백의 [파]는 이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그림 앞에 선 감상자 나름데로 자유롭게 만들어 내는 이류-전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 l 일본의 경우 [아트레스(artless) – 마이노리티(minority 소수파)로서의 현대미술. 나는 모-든 결정권을 현장(site,장)에 맡긴다.” 국제적 미술가의 스리링한 자기검증을 들어 본다. 川保正 (가와마다 다다시) (1953년생. 동경예술데학미술연구과 박사과정 만기퇴학. 학생시대부터 여러 개전, 그룹전을 행하다.1982년 베니-스 뷔엔날레 참가후 장학금을 받아 뉴-욕에 눌려 앉다. 이후 각국의 아-티스트.인.레지던스에 체류하면서 현지제작을 하다. 1987년 도큐멘트(캇셀), 쌍 파울로.뷔엔날레, 1998년 시드니-.뷔엔날레등 많은 국제전에 참가, 프로젝트주도의 현지제작을 주로 하는 작품제작으로, 해외, 특히 유-렆에서 전기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많은 작품은, 일시적 가설설치로 인해 프로젝트의 프랜, 모형등이 국내외의 미술관에 코렉선되어 있다..2000년 일본문화예술진흥상 수상. 현재, 동경예술대학미술학부 선단예술표현과 교수) “왜 개인이 표현을 추구하는가,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하는가. 어울림으로 해서 공동성 의식이, 작품의 개인 레벨에서 조금씩 집단의 것으로서 수준을 비뀌고 첵임을 나누워 가지려고 하는가. 오-직 이러한 관계성의 변용을 체감해 보고 싶은 흥미에 관심을 갖게 되는가.” 미술가(?) 라고 하는 것. 자신의 작업을 타인에게 소개할 때 여간해서 설명을 하기 힘든 경우를 자주 느낄 때 있다. [이것이 현대미술입니다]라고 말하면서, 타의 미술과 다른 지분을 분명히 하면서, 현대미술이라 칭하고, 무언지 모를 애매한 작품을, 알수 없다는 것이 바로 현대미술의 표어가 되버리는 범용함에 나는 납득할 수 없는 무엇을 느낄 때가 있으며, ‘컨탠프라리. 아-트’ 라고 칭하는 세련된 말에 식상해 버린다. 미술가라고 하는 말 자체에 대해서도 석연치 않는 기분이다. 잔신이 간여하고 있는 미술이란 쟝르에 대해 비하하는 것은 무어라 해도 석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는가 하면, 어디선가 자신이 행하고 있는 작업을 미술, 더욱이, 현대미술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 자신안에 있다는 기분이다. 대체로, 미술을 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타잎은, 어릴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 하고, 주위에서부터 칭찬의 말을 듣고,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이곳 저것의 전람회에 출품을 하고, 많은 상을 받았다 던지, 어릴떼 부터 소질이 있었다던가 하는 사람이 이 길에 들어 선 경우가 많다. 이점을 고려해 보면, 나 자신은 그것이 아니 였음을 느낀다. 고교에서 대학으로 향해 시험을 치를 때, 어디선가 보통대학보담 미술계 대학 쪽이 조금 편하지 않겠나, 라고 하는 단순한 이유에서 이 길로 들어 온 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다는 것이 본심이 아니였을까, 한다. l 도병훈의 경우 - [파]지기 들아간 한시 한편. 苟安室夜話(구안실야화) 淸夜相携花下謌 (청야상휴화하가) 圓蟾已復現山河 (원섬이복현산하) 凉添麻麥垂垂露 (양첨마맥수수로) 風掠池塘灔灔波 (풍략지당염염파) 諸子論懷宜有述 (제자논회의유술) 良辰回首易輕過 (양신회수이경과) 曲欄西畔千絲柳 (곡란서반천사류) 一倍婆娑影更多 (일배파사영갱다) 구안실에서 밤에 대화를 나누다 맑은 밤 서로 모여 꽃 아래서 노래하니 둥근 달이 벌써 돌아와 산하를 밝히누나. 삼과 보리에는 한기 맺혀 이슬방울 송골송골 연못에는 바람 스쳐 물결이 출렁출렁 자네들은 품은 생각 속 시원히 털어놓게. 좋은 철은 머리 돌리면 쉽게 훌쩍 지나가지. 굽은 난간 서쪽에는 버들가지 천 가닥이 곱절로 너울대며 그림자가 더 많이 진다.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이 1901년에 지은 시라고 합니다. 구안실(苟安室)은 전남 구례에 있는 매천의 집입니다. 시를 읽어보면, 어느 날 이 집에 친구들이 모였는데, 밤이 되어 달빛이 환하여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과 연못에 일렁이는 물결(波)까지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뜬구름 같은 인생이라 좋은 철에 얼굴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쉬운 일은 아니니 품은 생각 있고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숨기지 말고 털어놓자. 이런 순간이 언제나 찾아오는 것은 아니잖은가.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속마음을 풀어놓는 사이 난간 저편 버들가지는 바람에 흔들리며 달빛 받아 그늘이 일렁거린다. 라는 뜻이 담긴 시입니다. (끝)
1473 no image 작품 [파]를 읽다 - 2
82 2018-10-01
[波] 를 읽다 - 2 例示 *아인슈타인으로 부터 듣다 아인뉴타인은 물리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막상 그가 이루려던 평생의 꿈은 ‘자연의 모든 힘을 순수한 기하학에 바탕을 둔 단일 기술방식으로 흡수하여 대통일場 이론을 만드는 데 있었다. 수학과 물리학의 관계에 대해 이미 1870년경 수학자 클리퍼드(W. K. Clifford)는 물질의 공간 이론에 관하여 ‘공간의 작은 부분은 평평한 표면에 있는 작은 언덕과 유사하다…… 이렇게 휘거나 비틀린 성질은 계속해 파(波)의 전달 방법과 같이 공간의 이곳에서 저곳으로 흘르 간다. 공간의 이러한 곡률 변화는 실제로 물질 운동이라고 표현되는 현상으로 일어난다. 물리적 세계에서는 이런 변화 이외에 다른 것이 일어나지 않는다’ 라고 했다. *環境藝術과 대비해 보면…… 실내외를 막론하고, 관객을 둘려싸는 환경 자체를 작품으로 내 세우는 예술. 현대예술의 콘택스트에는, 50년대의 그뤂.제로의 작품등이 그 선구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으나, 아랑.카프로의 작품-등이 그 천철로 보는 경우도 있으며, 아랑.카프로를 시조로 보는 경우가 일반적. 그가 그 실현을 목표하여 59년에 처음으로 개최한 개전에서는 잘게 쪼개진 방에서 개별적으로 서로 다른 헤프닝을 연출하여, 관객을 향해 그 해프닝간의 상호관계를 생각케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환경 예술을 하프닝, 즉 다양한 돌발적인 사건들의 조합으로 생각 케 한 데서 유래하며, 자연환경을 살려 제작활동을 상정하는 우리들의 상상력과는 그 위상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카프로-는 해석을 넓게 잡아 본다면 인스트레이선(installation) 전체을 환경 예술로 간주할 수 있다. 환경 예술이라고 하는 어휘에서 가장 쉽게 연상되는 자연환경등을 제작 소재로 등장한 것은 60년대후반, 로버트.스밋선, 데니스.오펜하임,월트-.드.마리아가 대두할 때이다. 어-스워크라 부르던 그들의 작품은, 사막, 호수, 황무지등의 자연을 제작 소재로 잡은 것으로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수반하며 작품자체를 현지에서 볼 수 없다는 난점도 있어, 환경이라는 말 자체와는 친화성이 높은 반면, [관객을 둘려 싸는 환경을 작품으로 세우는] 것이라고 하는 환경예술의 의도에 즉한 표현인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또한 에코로지-의 기운이 대두한 80년대에서는, 이번에는 환경예술을 도시환경의 콘택스트로 생각하려고 한 경향이 생겨났었다. 그런 발상에서 생겨난 작업의 많은 것은 란드스케이프.디자인이라는 측면이 강함으로 이를 순수한 미술의 콘택스트로 다룰 수 있는가 의심스렵다. 그 흐름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저 가고 있다. 제로.에밋션(패기물을 제로로 하는 활동)이나 사스티나버리티(지속가능한), 개발등의 환경중시를 내세웠던 표어가 소리 높이 부르짖는 작금, 새삼스렵게 환경예술이란 어휘가 떠 오른다. *하프닝(Happening) [우연히 일어난 일]. 주위의 환경의 우발성으로 돌리는 부분이 큰 작품의 총칭으로써, 발안자의 아랑.카프라-는 하프닝을 환경예술과 불가분의 것으로 생각했다. 59년에 뉴-욕의 류-벤화랑에서 개최된 초대전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18의 하프닝]에서, 카프라는 상호 아무런 맥락도 없는 사태를 연출하면서, 그 사태 끼리의 만남을 작품으로 제시하려고 하였다. 그 의도는 하프닝을 [이벤트 event]의 아산브라쥬(assemble]로 정의한 카프라-자신의 태도에도 확실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허나, 카프라- 이후의 아-티스트들은 카프라-의 의도를 작품과 관객의 인타라 interrelation 보담 신체표현의 방향으로 확장해 갔다. 60년대에 왕성하게 쿠사마(일본의 여류작가)의 하프닝등은 그 효례로, 이 흐름은 70년대이후의 퍼포먼스로 이어간다. 더욱, 하프닝은 자주 프르크사스 의 [이벤트]와도 대조하게 되지만, 후자의 경우, 대본에 의해 그 진행이 면밀하게 규정해 간다는 차이가 있다. 하프닝의 실체를 좌우한 것이 다름이 아니라 우연인 이상 그 행위의 결말은 자주 파괴나 혼란으로 귀결되어 가는 것이 된다. 카프라는 하프닝의 힌트를 주로 죤.케이지의 즉흥음악이나 쟉손.보록의 토리핑회화에 구하였던바 그 활동내용까지 포함해서 검토한다면, 하프닝의 진정한 시조를 슈-리얼리즘나 다다이즘의 코라-쥬에 구하는 것도 가능 할것이다. *體驗의 반미술적 성격- 몸으로 체험하기. 밥을 보는 것이 아니라, 먹어 본다는 것. 미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안에 들어 가서 좌선을 해 본다면, 이는 작품을 ‘경험’한다고 볼 수 있다. 그기서 작품, [파]는 그 구조가, 그려진 것으로 평면적이 아니고 입체적으로 조각작품과 같이 4치원으로 이루어저 있다. 작가는 작품을 소개하는 사진을 통해 그 위에 앉아 좌선을 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데. 자신은 자신의 작품 안에 들어 앉아서 좌선적인 경험을 하고 있다라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다. 좌선은 좌선자가 무나 공을 지향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공을 향한 심리적인 흐름이 일어 남으로 이는 비정형적 이며, 고착시킬 수 없기 때문에, 미술의 차원을 벗어 난다. *[현대미술 다시보기]- 드 뒤브의 경우. 質 이나 미적 가치는 ‘형식’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영감inspiration이나 직관vision 혹은 내용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형식은 영감으로 가는 길을 열어줄 뿐만아니라 영감을 얻기 위한 수단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기술적인 관심 역시 충분히 탐구되고 추구된다면 ‘내용’을 발견하거나 발생시킬 수 있다. 내용은 그 형식과 분리될 수 없다.” 이는 음악의 변주곡과 같다. *非定形性 혹은 변주곡 비정형성을 상황으로 전환시켜 감상자의 자재로운 감상적 이류-전을 유발하도록 설정 되 있기 때문에 환경미술 혹은 더 엄밀히 말해서 ‘상황’ 미술의 범주에 들어 가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파도 위에 앉아 좌선을 하는 모양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전래의 회하작품에서는 보기 힘든 구 도다. 시각위주의 회화작품에서 감상자에 따라 각기 다른 자유로운 이류-전을 허용하기 때문에 이 작품은 마치 음악에서의 ‘변주곡’을 예상케 하는 것으로 [회화의 변주곡]이라 부를 만 하다. 시각적 이미지를 따라 감상자가 자유로히 해석케 하는 것이 아니라, 아에 [파]의 이미지를 무화 시키면서 전혀 다른 콘택스트를 허용하는 것이다. 이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Beethoven. 1770-1827)이 만든 ‘디아베리 변주곡’과 같은 맥락의 내적 논리를 암시하고 있다. 바흐가 쓴 백작의 자장가(골드베르크 변주곡)가 하나의 멜로디에서 서른 개로 변주한 예에서 따 온 것이다. 최화백의 [파] 는 이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그림 앞에 선 감상자 나름데로 자유롭게 만들어 내는 이류-전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계속) .
1472 no image 작품 [파]를 읽다 - 1
74 2018-09-30
작품: [파] 작가: 최예문 전시 장소: 대한미술공간 [소나무] 일시: 2018.8.25 - 9..6 작품 [波]를 읽다 - 1 a. 序 – 작품의 位相 작가는 자신이 광목천에다 파도를 그리 넣은 콘테이너의 한 가운데 좌선을 하고 있다. 화가가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호칭하고 있는 콘택스트 속으로 들어 가서 좌선을 하는 것으로, 보는 것과 체험하는 모습, 그리고 관객의 입장의 3중주가 연주되고 있는 무대다. 여기에서 끝이 난다면, 이는 작가도 미술작품의 한 요건으로 간주해서 감상의 대상으로 삼으면 무방 할 것이나, 작가는 관객도 작품 안으로 끌여 드리고, 작품의 콘택스트가 되어 자유로운 처신을 하기를 권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작품은 입장하는 관객의 수만큼 다른 예상할 수 없는 콘택스트가 생성하게 된다. 관객의 수 만큼 다른 콘택스트란 싑게 떠 오를 수 없는 구도다. 관객이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로 둥갑하게 되고 그 위에다 관객마다 다른 무대가 만들어 지기 때문에 단순히 이를 행위예술로도 보기 힘든다. 행위예술이란 사람이 개입되어 자유로운 행위를 하는 것을 콘택스트로 간주하면 작품이 작품으로써 요건을 갖추게 됨으로 이해가 가지만, [파]는 관객마다 서로 다른 예상할 수 없는 해프닝을 기대하기 때문에 미술의 기본 조건의 하나인 ‘오브제’ 부재의 ‘아포리아(불능)’ 상태가 된다. 이러한 도식은, 관객의 수 만큼 서로 다른 ‘상황’이 생성되는 것이니, 이는 오브제와 이미지로 성립되는 미술의 기본 문법을 벗어 나는 월경죄를 범하게 된다. 회화성이 부정된 자리에는 문학성적인 상황성이 슬그머니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린다. 나래이팁한 스토리(narrative story)는 고착된 이미지를 낳치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3자인 또 다른 관객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입장에 서게 된다. 이야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공간적이기 보담 시간성을 유발하는 매체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작품을 미술의 차원을 벗으난, 일이 다가 되고 다가 일이 되는, 일즉다-다즉 일의 화엄사상에 근접하고 있다고 보고, 이 작품을 상황예술(artless but affairs)로 규정한다. 존재와 존재자가 서로 되먹힘되는 도식은, 서구식 회화문법에는 불가능한 논리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파]는 회화성의 경계를 벗어난,, 해프닝으로 이어지는 문학적 차원으로 더 가깝게 닿아 있다. 이러한 예술적 상황속에서는, 평면에 고착되는 이미지는 [破]해지고, 감상자의 자유롭고 예술적 이류-전(상상려)과 호기심 내지 감동을 유발하는 [波]의 場으로 지양해 가는 것이다. 작품 [波]는, 有와 無가 서로 되먹힘 되는 논리적 도식으로 풀어 가야만 하는 가상적 [場]이다. 피도가 대상화되면, 훌륭한 미술이 성립될 수 있어나, 이 작품에서는 [파도]가 연관되는 관객의 하프닝과 더불어, 자기 부정의 내적 논리를 내 세우기 때문에, 비미술적 상황으로 일종의 생물학적 진화로 이어지게 된다. 오직 한가닥 가능한 길은, 이러한 반미술적 콘택스트를 총칭하여, ‘상황예술’로 규정해 볼 수 있다. b.. 이어지는 이야기 작품을 밖에서 바라 보는 것이 아니라 작품안으로 들어 오게 하여, 감상자에 따라 달라 지는 체험을 기대하고 있는 [波]의 구도는 ‘예측할 수 있는 ‘유’(그림)와 예측할 수 없는 ‘무(참관자와 그의 감상태’)로 이루이저 있다. 작가의 몫으로 회화문법에 따르는 有가, 실존적 정형이라면, [무]는 감상자의 몫으로 예측할 수 없는 비정형성, 흐름圖(moving, unexpected situational landscape)- 현재에는 없는 ‘무’적 상황을 의미한다. 예측할 수 있는 회화가 전제하고 있는 실존態에서, 예측할 수 없는, ‘일즉 다 다즉일, 유와 무가 되먹힘되는 타자(비실존적)의 ‘장’으로 옮겨 갈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 타자의 장은 구체적 실체에서 장을 내다 보는 미지의 [상황]이다. [상황]은 유를 무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를 딛고, 생물학적 범주로 넘어 가서 조성될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회화의 유로써 발단되지만, 다양한 이야기로 진화해 가는 촉매역활을 삼기 때문에 어느 순간, 비회화의 범주, 일종의 ‘상황’으로 넘어 가게 된다. 비회화란, 회화됨을 멈추고 감상자의 체험을 열어가는 [장] 혹은 [상황]으로 바뀌고 [변주]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현대 미술이 전반적으로 공통으로 갖고 있는 자기부정의 역설이며 또한 딜렌마(dilemma)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품 [파]는 이러한 자기 부정의 역설에서 벗어 나서 상황으로 진화해 간다는 점에서 메우 이색적이고, 독창성이 높은 점에서 평가받아야 하는 작품이다. 역설을 넘어 형식과 본질의 융합, 귀납(induction)과 연역(decuction)이 만나는 場(site) 장은 [상황]의 동의어이다. 이 상황속에서 만이, 감상자의 ’자유연상’으로 현대의 ‘즉물적’인 관점에서 감상자의 개별적인 ‘연상’으로 진화가 가는 구도가 성립하는 것이다. 미술이 회화성을 넘어 문학성이나 음악성을 수용함으로 이를 통털어 ‘변주곡’이라 부를 만 하다. c. [波]적 상황의 개념적 分介 a. 예측 불허의 상황에서 禅的 감수성을 유발하여, 정신적인 숭고함 높은 존재와의 영적인 교감을 통해, 찰라 찰라로 이어지는 鑑賞態로 나아가는 것을 예상한다. b. 찰나의 포착-파의 나불(wave)의 됨됨이 찰라적인 것으로 …자연의 본질에 가 닿으며 시공을 초월한 神聖한 차원을 체험하게 한다. c. 여성성- 운동이 만들어 내는 보이지 않는 힘(energy)은 여성적이다. 남성이 보이는 것에 능하다면, 여성은 보이지 않는 부분에 능하다. d. 無爲自然- 파도는 인위를 가하지 않는 스스로 그냥 있음을 나타냄. 작가가 파도 속에 앉아 좌선을 하고 있는 것은 우언한 해프닝은 아니다. e. 스스로 미술이 될 수 없고, 그기에 얹혀 저 있는 감상자의 존재를 품어 안아야 함으로 쫍은 ‘미술’의 차원에서 더 나아가서 ‘예술’적 차원으로 진화해 감을 기대할 수 있다. f. 상황과 헤프닝 - 작품안으로 들어 온 감상자의 해프닝적 체험과 더불어 비로서 예술이 되게 하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그래서 이 작품은 전래 해 왔던 시각위주의 평면적인 작품이 아니고 체험적인 신체가 개입된 場으로 제시 된다. 따라서 장은 감상자에 따라 작품이 달라지는 것을 받아 들인다. g. 이 작품은 작품자체도 그렇거니와 감상자 내지 비평자 공히 어떤 대목에서도 양극적인 正과 不의 양자 택일적인 대목을 볼 수 없다. 이는 서구씩 회화 문법에서는 보기 힘든 현상으로 작가와 더불어 작품의 발상이 동양적 사유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으로 본다. h. 예술적 치유는 그 결과로 감상자에게 예측 불허의 보너스로 다가 올 수 있다. (계속)
1471 no image 월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2
91 2018-09-28
월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 2 이것이 스티븐스의 시다. 그는 팬실베니아주의 리딩에서 태어났으며 하버드를 졸업한 후 법조계에 투신했다. 1916년 코네티것의 하트퍼드에 있는 한 보험회사에 들어간 후 시 쓰기와 회사 일을 병행했다. 1934년 이 회사의 부사장이 되었고, 1949년 시 부문 보링겐 상을 타고 1955년 퓰리치상을 탄 것으로 보아 그는 두 가지 일에서 다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흔히 시를 쓰면서 사회적으로 실패자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그 반대이니 얼마나 절륜한 정력의 소유자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시는 현대 난해시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는데 이는 엘리엇 시의 난해성과는 또 종류가 다르다. 그는 기존의 모든 것들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앞의 인용 시에서도 그것을 느낄수 있지만 그에게는 당시의 지배적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개편하고 싶은 욕구에 차 있는것 처럼 보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서구정신을 오랫동안 지배하고 있던 천국적 질서가 아니라 지상 현재적 질서를 추구함이며 그조차도 일시적이어서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에게 가장 큰 영감을 불어넣어준 선배는 불란스 상징주의 시인들이었고 그들의 영향으로 말을 쓸 때 문자 그대로의 의미보다는 소리와 의미적 기능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심지어 의미가 기교의 일부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하여 그의 어떤 시들은 추상적, 인상주의적, 심지어 초현실주의적 그림을 대하듯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지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은 상상력이지만 낭망주의자들의 창조적 상상력과는 다르다. 낭망시인들의 상상력이 감상적 상상이어서 그 압도적인 상상력으로 현실을 지배했던 것이라면 스티븐스에게는 상상이 중요하긴 하나 실체를 지배하지는 않는다. 즉 그의 상상력은 좀 더 과격한, 옛 신들이 모두 죽었고 낡은 정설들은 모두 거짓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공허하고 빈 현상세계에는 어떠한 질서나 정형도 없으며 상상력으로 일시적 질서나 정형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예술이 그 기능을 수행하는 매개가 된다. 예술가의 상상력으로 잠정적 질서가 부여된 현실 또는 세계를 우리는 그의 시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상상과 실재(reality)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사실 실재가 아니라 하나의 모습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참된 진실이 아니라 기존의 고정관념에 덧입혀진 왜곡된 실재이다. 그의 시가 불교적인 색채가 짙은 것은 바로 이런 생각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20세기 초 미국 현대시를 뒤덮었던 동양사상의 영향을 기억하게 만든다. 그의 시 또 한 편을 읽어 보자. 사람은 겨울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눈이 꽁꽁 얼어붙은 소나무의 가지나 서리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그리고 지금까지 오랫동안 추워왔음에 틀림없다 얼음이 서걱서걱 얼어붙은 노간주나무를 보거나, 1월 태양의 아스라한 광채 속의 앙상한 가문지나무를 보기 위해서; 그리고 바람소리나 몇 안 남은 나무 잎사귀 소리에서도 비참을 생각지 않기 위해서, 그것은 똑 같은 황량한 장소에서 불고 있는 똑 같은 바람으로 가득한 땅의 소리인 것이다, 들을 수 있는 자에겐 즉 눈 속에서 귀를 기울이며 스스로 無가 되어, 거기에 있지 않은 無와 거기에 존재하는 無를 보고 있는 그에겐. One must have a mind of winter To regard the frost and the boughs Of the pine – trees crusted with snow; And have been cold a long time To behold the junipers shagged with ice, The spruces rough in the distant glitter Of the January sun; and not to think Of any misery in the sound of the wind,/ In the sound of a few leaves, Which is the sound of the land Full of the same wind That is blowing in the same bare place For the listener, who listens in the snow, And, nothing himself, beholds Nothing that is not there and the nothing that is. -[눈사람]("The Snowman") 전문
1470 no image 현대미국시인 - 월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81 2018-09-27
현대 미국시인 (4) 월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 - 코네티컷의 증권맨, 1. 상상과 실재의 화두 나는 항아리 하나를 태네시에 놓았다, 그리고 어느 언덕위에서 그것은 둥근 모습이었다, 그것은 지저분한 황무지로 하여금 그 언덕을 둘려싸게 만들었다. 황무지는 항아리까지 올라왔다가 퍼졌어나, 더 이상 황패하지는 않았다. 항아리는 땅 위에서 둥글둥글했고 키가 컸고 대기의 한 항구였다. 그것은 곳곳을 지배했다. 항아리는 희색이고 밋밋했다. 새나 숲의 문양도 없고. 테네시의 어느 것과도 담지 않았다. I placed a jar in Tennessee, And round it was, upon a hill. It made the slovenly wilderness Surround that hill. The wildness rose up to it, And sprawled around, no longer wild. The jar was round upon the ground And tall and of a port in air. It took dominion everywhere. The jar was gray and bare. It did not give of bird or bush, Like nothing else in Tennessee. -전문 이 시의 제목은 [항아리의 일화](“Anecdote of a jar”)이다. 그리고 이 시는 우리가 이제까지 읽어왔던 시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에이츠, 엘리엇적 명상도 프로스트적 평이함도 윌리엄스적 위트도 아니다. 독자들은 이 시를 읽으면서 머리를 갸웃거리게 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즉 이 시는 독자들의 상상력의 최대치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저자 월러스 스티븐스(Wallace Stenens 1879-1955)는 이것을 읽고서 독자들이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는가를 빙긋이 웃으며 바라보고 있을지 모르겠다. 내용은 간단하다. 시인은 항아리 하나를 테네시의 황무지에 놓아두는 것이다. 그것도 펴범하기 짝이 없는 항아리로서 잿빛의 맨몸일 뿐이다. 그러나 그 둥근 항아리를 중심으로 기묘하게 테네시 황무지의 질서가 개편되는 것이다. 우선 언덕 위에 놓아둔 항아리를 향해 황야가 에워싸다가 급기야는 솟아올라 주변에 엎드린다. 모든 황야가 자신을 애워싸고 엎드림으로써 볼품없는 항아리는 재황처럼 당당해지는 것이다. 급기야 그것은 대기를 타고 이동하는 모든 것들의 항구처럼 거대한 형채로 변모한다. 마지막으로 항아리는 무늬도 없는 맨몸뚱이지만 태네시의 다른 어느 것과도 같지 않다고 강변한다. 이 아무런 꾸밈없는 항아리 하나, 그것이 어찌 그리 독특할까? 그것은 아무런 무늬도 없고 희색빛 맨 몸뚱이 일 뿐인데 왜 그다지도 중요한 역할을 할까? 이것에 뭐라고 설명을 붙이기는 몹시 힘들어 보인다. “마음의 세계가 인간의 위대한 영토이지만 그 영토는 허망하고 실망을 줄 뿐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는 풀이도 있지만 웬지 와 닿지 않는다. 혹 이것이 스티븐스의 시론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런 무늬도 없고 무덤덤한 시, 그러나 태네시의 황무지를 지배하듯, 당대 시단의 기존 질서를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새로운 무엇을 제시하려는 시인의 야심에 찬 시도 ……….. 이런 것은 아닐까?
1469 no image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즈] - 3
87 2018-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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