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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7 (12:25:55)
시카고의 두 시인 – 2 -에드가 리 마스터즈(Edgar Lee Masters)와 칼 샌드버그(Carl Sandberg) 마스터즈의 시는 [스푼리버(Spoon River Anthology)라는 시집으로 대표된다. 스푼리버라는 강은 실제 일리노이에 있는 강으로 이 시집의 시들은 결국 강의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노래한 것이다. 시의 시작에 헤당하는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죽음이지만 그들의 삶을 또한 말하는 것이다. 열병으로 죽거나 감옥에서 죽거나 교량공사를 하다가 떨어져 죽거나 싸우다가 죽거나 한 이들의 삶은 결코 여유 있고 평탄한 것은 아니다. 흔히 하류계급층민이라 불리우는 이들은 나름대로 세상에서 제 몫을 하다가 죽어 지금은 저 언덕에 묻혀 잇는 것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시인 하우스먼(A.E. Housman, 1859-1936)의 시와 예이츠의 초기시에서 바로 이런 주제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아름답던 처녀와 튼튼하던 젊은이가 지금은 시냇물 흐르는 풀밭에 누워있다” 라는 영탄조의 시 말이다. 이것은 19세기 말과 조오지아주의 방만한 감성적 시들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마스터즈의 시에서는 그 인물들이 구체성을 띤 사실적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물들이 죽어 누워있는 곳도 시냇물 흐르는 아름다운 풀밭이 아니라 마을 뒤에 자리한 허술한 공동묘지 언덕이다. 시인이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마 인생무상이니 애상이니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당시 아마 좀 무질서했었을 사회에서, 산업화의 과정에 적응하다가 죽은 소시민들의 모습을 가련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마지막으로 주목하고 있는 인물의 삶은 좀 더 구체적이다. ( “90평생 내내 깽깽이 연주를 하며/맨 가슴으로 눈보라를 맞았던,/ 술 마시고, 싸우고 마누라도 친지도 / 돈도 사랑도 천국도 생각지 않던 / 늙은 악사 존스는 어디에 있나?” (Where is Old Fiddler Jones? Who played with life all his ninety years,/ Braving the sleet with bared breast,/ Drinking, rioting, thinking neither of wife nor kin,/ Nor gold, nor love, nor heaven?) 마지막으로 언급되고 있는 늙은 거리의 악사 존스를 회상하는 이 시인의 시선은 따뜻하다. 그는 90 평생을 장난처럼 살았고 가난을 맨몸으로 해쳐 나갔다. 계산하지 않고 욕심 없는 이러한 삶은 사실 그 자체만으로 주변의 여러 사람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 세상 모두가 이기적인 계산으로 핑핑 돌아가는데 따지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피곤한 모두에게 하나의 위안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가장 그리워하는 이가 바로 하류계층민이었다. 하류계층민의 삶에 눈을 둔다는 것은 바로 사실주의 문학의 전통이다. 19세기 들어 소설이 본격 문학 장르로 발전하면서 당시 소설가들이 관심을 두었던 것은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뒤에서 신음하는 도시 빈민층과 서민들의 비참이었다. 찰스 디킨즈(Charles Dickens)가 그 대표적인 작가였다. 그것이 나중에 자연주의 소설로 발전해 감에 따라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행하고 비참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심도 있는 추구가 이어지는 것이다. 영국 소설가 토마스 하디, 미국의 드라이져, 러시아의 도스예프스키 등이 바로 이런 소설의 맥을 잇고 있다. 시에 있어서도 그러한 맥을 찾을 수 있을 것 아닌가? 다음의 시에서도 인생의 아이러니가 드러난다.
사람들이 내 묘석에다 이렇게 새겼다: “그의 삶은 점잖았고, 여러 가지 기질이 잘 섞여 있어서 자연이 일어서서 세상에다 이 사람이야 말로 사나이였다 라고 말하리라” 이 헛된 미사려구를 읽고서 나를 아는 이들은 빙긋이 웃을 태지.
내 묘석문은 이러했어야 했다: “삶이 그에게는 점잖았다 여러 기질들이 그의 내면에 섞여 있어 그는 인생에 싸움을 걸었고, 거기서 죽음을 당했다” 라고 살아 있는 동안에도 나는 나를 욕하는 입을 막지 못했다, 이제 죽었으니 바보가 쓴 묘비문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They have chiseled on my stone the words; “His life was gentle, and the elements so mixed in him That nature might stand up and say to all the world, This was a man,” Those who know me smile As they read this empty rhetoric.
My epitaph should have been: “Life was not gentle to him That he made warfare on life, In the which he was slain.” While I lived I could not cope with slanderous tongues, Now that I am dead I must submit to an epitaph Graven by a fool. - [케시어스 후퍼] ("Cassius Hueffer")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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