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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6 (12: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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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미학]의 일부 번역을 마칩니다.

책소개로 시작하여, 소나무 갤러리의 전원길선생의 강청으로 그 일부를 번역하였던바, 필자는 일본어번역본을 가지고 총 6장에 이르는 내용중 5장 예술의 위대함만을 번역하였다.

 저자 말틴.(Martin Seel)1954년생으로 여러 유명 독일 대학교의 교수직을 거처 2004년 이후 프랑크프르트대학 이론철학강좌정교수직을 맡고 있다.

 그의 문장은 아주 독특한 것으로, 끝없는 개념의 분개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죠이스의 무의식의 환상에 버금가는 난해한 문장으로 일반 독자들은 접근하기 힘든 내용이다. 허나 자연미학을 바로 정면으로 마주하며 분석해 내는 그의 특이한 문체는 자연미술을 전문으로 다루는 미술가에게는 자연미술의 담론에는 보기 드문 좋은 기회가 아닐까 생각된다.

택스트로 쓴 일본어 번역본은 필자가 교보문고에서 구입했던 것으로, 영문본을 구입해 보려고 수소문해 보니 절판되어 구입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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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ected no image [자연미학]의 번역을 마치며
317 2018-05-06
1449 no image 자연미학 20
295 2018-05-06
자연미학 20 五, 미적자연의 상호주관성 객체화된 자연과 심미화된 자연과의 사이의 가능적인 맺음은, 요동치는 지반위에 성립해 있다. 그것은 분기적인 입장에 의해 맡겨저 있으며, 확실히 서로 가깝게 되기는 하지만, 허나, 서로 섞여 혼재하지는 못한다. 자연상태의 미적인 판정에 대한 기술적인 판정의 相違에서, 이것이 밝혀진다. 기술적인 판정은 그 목적이 일시적 혹은 본질적으로 선명하지 않을 때도, 목적에의 수단의 적합에 대한 考量으로 존속한다. 그것이야 말로 목적이 될 수 있음에 관한 효과의 평가이다. 이 목적자체의 판정은 기술적판단이 아니고 윤리적실천적판단이며, 자유로운 자연과 연관되는 작업에는 더욱 미적인 가치평가에 의존하는 판단이며, 그럼으로써, 특별한 곤란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미 예술적판단에서는, 확실하게 당연한 것으로서의 타당성요구가 있어나, 허나 구속력이 있는 여하한 판정기준도 주어지지 않는다. 경제적인 유효성이나 생리적으로 견딜 수 있는 것의 넘어 있음으로 해서 처음으로 통찰력을 갖춘 판정에 기초가 결해있다는 것이 자연의 경우에는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예술과 자연사이의 최후에 행했던 비교는, 이들 양자의 지각과 결합된 판단형식을 잡아낸다. 기술적인 판단은 객체적인 판단이다. 말하자면, 인과적인 전략과 더불어 불려 일으켜지는 것은,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이며, 목표상태가 그것에 의해 가능한대로 간단한 방법으로 불려 일으켜지는 것은 기술적으로 의의가 있는 것이다. 미적인 예술판단은, 객체적인 구성요소를 수반하는 상호주관적인 판단이다. 즉, 그 상상적인 분절화의 힘에 의해 고도의 조응적 에너-지 혹은 고도한 관조적감성을 구비하고 있는 예술작품은 성공하고 있다. 이 판단은 상호주관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험적인 기준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규범적인 기준에 지탱되고 있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수용자라고 하는 가정적인 공동체에 단순히 불려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객체적인 구성요소를 구비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술비판적인 해석에 의해 이 무리한 요구를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적자연에 관해서는 – 현재에 있는 혹은 결하고 있는 자연미 – 에 관한 판단은, 그것에 대해서 객체적인 구성요소 없는 상호주관적인 판단이다. 세가지 미적인 자연관계에 속한 판단형식은, 타의 결말을 허용하지 않는다. 자연에 대한 조응적판단만이 또한 객체적인 판단으로써 기술될 수 있었다. 허지만, 이 객체성은, 자연이 개척해 내고 자연이 대응하며 혹은 충돌하는 실존적인 投企에 의존하고 있음이 밝혀 젔다. 관조적인 판단은 순수하게 상호주관적이며, 그것은 그 미를 확정하는 점진적인 단계 이외는, 그 대상에 대해 기준이 될 수 있는 어떤 것도 이야기할 수 없다. 상상적인 판단은 확실히 예술형식적인 특성을 자연의 것으로 하며, 또한 자연이 그 특성을 보다 농밀하게 발전시키면 시킬수록 그만컴 보다 높은 것으로써 자연에 그 가치를 인정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어떤 지속하는 작품구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확실한 해석적언명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은 여기서 미적자연과 미적예술간의 보다 폭넓은 상위에 부딛치는 것인데, 그 미적예술은 작품구조에의 자연의 위치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예술의 평가를 위해서 논쟁되지만, 자연의 평가를 위해서는 단지 요란스러울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로 인하여 자유로운 자연의 승인을 위해서는, 미적으로 논쟁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자연미에 대한 판단은 매우 상위한 것일 수 있으며 또한 여기서의 판단의 주고 받음안에서의 일치에는 매우 어렵지만, 한가지 점에서 통일은 어렵지 않다. 원래부터 자연미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자연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유로운 자연의 개념은 허나 그 자신 하나의 규범적인 개념이다. 이성적인 기술이나 정치는 자연에 대해 이 규범을 일관되게 갖고 있을 것이다. 그 규범의 정식화는, 개개의 우위한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로운 자연이 자연미의 가능성의 전제조건이라 하는 실정에서, 그것은 근거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제四장에서 다루웠던 미/숭고와 자유로운 자연과의 구별의 하나의 중요한 귀결이다. 자연의 보호나 애호의 강한 개념은 미적으로 – 미학에 따라 – 기초지워지는 것이나 그것은 일정한 내용적평가를 – 미적판단의 수준에서의 – 반드시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적으로 다루워젔던 자연이, 그 각각의 장합에서 자연미에 대한 개개인의 의향을 실현하고 있는가 아닌가,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기술적으로 다루워젔던 자연은, 자유로운 자연의 보호나 육성의 미적인 위탁을 실현하는 것이 될것이며, 또한 자연에 대한 개개인의 의향을 빠르거나 늦게나마 실현할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자율성의 기준이 개개의 태도결정의 상호주관성을 어떻게 조금만이라도 보증하지 않트래도 그것은 미적자연의 자유라고 하는 사태에 관한 상호주관성을 그만컴 강하게 보증할 수 있게 될터이다. 미적자연의 가능성으로써의 상호주관성은, 자유로운 자연의 미의 제형식에 대한 다른 관심속에의 자유로운 자연에의 공통의 관심에 헤당하는 것이다.
1448 no image 자연미학 19
208 2018-05-01
자연미학 19 b 自然展開의 技術 이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두나의 중요사항의 相위를 얼마간 보다 상세히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될것이다. 자연은, 한편에서는 기술적인 제작(포이에시스)에서, 다른 편에서는 미적인 실천에 있어 어떻게 현전하고 있는가 라고 하는 점을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하나의 광대한 연구영역이며, 이에 관해서 여기서 그 대부분에 대해 고찰할 수는 없다. 내가 주의를 집중하는 시점은, 자연에 대한 한편에서는 기술적인 관계와 다른 한편에서는 그 미적인 관계와의, 다른 시간구조이다. 자연계에 놓여 있는 기술적행위는, 자연의 재료와 연관되는 수행적행위이다. 이 행위가 무엇인가를 수행해 낼 수 있기 전에는, 그것은 자연의 재료로 향한 자연의 변화, 즉, 산정할 수 있는 대상물이나 사태로 향한 자연의 변화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연은 대상영역이 되지 않으면 안되며, 그와 더불어 [대립하는] 물의 계산가능한 공간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기술적태도에서는, 자연은, 자연의 생활세계적분절에서 많턴 적던 집어 낼 수 있는 생활공간의 구성으로서가 아니고, 그 생활공간에 있어서의 객체의 영역으로 모습을 들어 낸다. 분명히 이 행위 역시 실천적구상과 체험적세계의 톤택스트안에 있는 것이지만, 허나, 그것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이 콘택스트에 의해 제시되는 목적의 달성과는 연관이 있다. 그것은 목적지향적행위이며, 설정된 목적을 달성함에 성공한다면 풍요로운 성과가 기대된다. 그것은 이 목표에 나타나 있는 상태에 자연이 접근해 감에 의해 그 설정된 목표에로 접근해 간다는 시도안에 있는 행위이다. 이 접근을 발생케 하는데 기술적조작은 집중하는 것이다. 기술적자연의 시간은 직선적인 시간이다. 이 시간형식에서 나는 미적자연의 [별도의 시간]을 앞서 구별하였는데, 그 시간이란, 살아 갔던 세계에 대해 그것과는 상반되는 제입장의 동시적경험으로써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다원적으로 수행을 방향잡혀진 활동의 시간이며, 간략화를 위해 우이들은 이를 [동시적시간]이라 명명한다. 분명히 기술적인 행위는 결코 직선적인 시간의 유일한 형식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나, 허나, 그것은 지극히 순수한 형식에 있어 이를 성립시킨다. 마찬가지로 미적으로 지각된 자연에 있어서의 시간은, 동시적인 시간의 유일한 상태는 아니지만, 허나 그 결출한 제형식의 하나이기는 하다. 자연의 미적직관은, 그것이 그 공간의 의미깊은 질서하의 관조적으로 잠입하며 또한 상상적으로 넘어서려고 할 때 조차 늘 체험되는 공간의 현상성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미적직관은 이 공간의 내부에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의미소원적. 의미부수적. 화상충만적소여의 교체안에서 그 공간을 공간으로써 현출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그 공간을 생기하는 공간으로써 탄생시킨다. 이 공간에서의 사물은, 이와 같은 생기를 일으키는 묘개물이 되는 것이며, 사용을 위한 도구적인 것들을 갖는 객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미적자연지각의 실행은, 조작적인 것이 아닌 자연의 변종에 대한 미리 주어진 목표에 의해 이끌어지지 않는 주의의 시도이다. 기술적행위도, 물론 동시적과정과 연관되며, 객체나 일들에 관한 시간동일적조작과 연관되는 것과 같이, 이들의 시간동일적소여성과 연관된다. 허나 여기서는 시간의 안의 동시성이 문제가 되는 것으로, 이와 반해 [동시적 시간], 즉 상호작용하는 동근원적인 조우방법의 변종과는 연관되지 않는 것이다. 기술적자연지배의 시간은, 의도의 틀안에서 계산되며, 목적을 실현하는 도상에서 지나며, 소비되는 시간이다. 이에 대해서 자연에 있어서의 미적실천의 시간은 도구적활동과는 반대로 사람이 [천천히 여유를 가지는] 시간이다. 직선저시간경험은 어디까지나 시간동일적시간의 경험가능성의 조건이라고 하는 것이, 그기에 있다. 동시적시간 때문에 직선적시간관계로부터 떨어질 수 있도록 우리들은 직선적기간관계를 뜻되로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자연미의 [별도의 시간]이 어디에 성립하는가 라고 하는 것이, 이제와서 보다 명확해 젔다. 그것은, 순수하게 수행되는 행위로부터의 충실한 거리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이 거리는, 이미 언급한바와 같이 단지 거리단순히 기술적행위의 거리에서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도구적 방향짓는데서에서 부터의 거리이다. 그것은 자연안에서 특별한 가능성과 만나며, [자기목적적] 행위을 위한 거리일것이다. 직선적시간을 - 일례로 기술적행위의 시간을 – 충실해 있는 시간, 동시적시간으로써 – 예를 들면, 미적자연직관의 시간으로써 – 충실한 시간으로써 역의 모양으로 기술해 보고저 하는 욕구를 배울수 있을는지 모른다. 일련의 이유에서, 허나 이것은, 단순에 불과한것이다. 첫쩨로 자연미의 충실한 시간은, 여기서는 일정의 행위목표가 채워질것이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종류의 여하한 목표도 그기에는 없다는 것, 또는 이 종류의 목표가 멈추게 되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종류의 여하한 목표도 그기에는 부재하다는 것, 또는 이 종류의 목표가 멈추는 것에 지배권을 휘둘지 않는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종류의 목표가 멈추게 되는 지배권을 휘둘지 않는다는 것에 있는 것이다. 두번째로, [동시적]시간은 반드시 [충실한] 시간이 아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미적자연의 양의성에 관한 연구에서 다룰것이다. 세번째로, 수행적행위의 직선적시간은, 반드시 실존적으로 [공허한] 시간은 아니다. 그것이 공허한 것은 다음의 경우에서 만으로, 그 시간안에서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 외의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의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 또한 그 목표달성의 형식이 가치가 있는 것으로 지각될 수 없을 경우, 또는 그 목표달성의 형식이 가치 있는 것으로 지각될 수 없을 경우, 또한 그 방법이 그 행위의 목표가 되지 못할 경우이다. 목표에 방향잡히는 행위는, 동시에 수행의 방향잡힌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그와 더불어 직선적시간도 어느정도 충실한 시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주는 교훈은 기술적행위와 관계된다. 기술적행위는 직선적시간안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그 행위가 필연적으로 소외되어 있다던가, 파괴적이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행위는 수행에 의해 방향지워저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동시에 깊이 고려된 목적설정하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능적으로는 자기목적적행위로써, 또는 기술적인 목표에 방향지워저 있는 행위로써, 그 행위가 미적으로 포함적인 지각의 영역의 건너편에 있다고 하는 것은, 원리적인것은 아니다. 기술적행위를 그 수행에 있어 제어하는 미적지각이란 것은 있을 수 있다. 기술적인 수행은 목표에 방향잡히지 않는 존재의 콘택스트에 대해, 내적논리에서 봐서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으로, 기술적인 수행이, 대응하는 시간형식의 산출을 목표로 삼는 것은 가능하다. 확실히 기술적행위는, 아름다운 자연의 생기를 직접실행하는 것은 아니나, 허나, 그것은 생활안의 형성물을 만들 수는 있으며, 개입함이 허용되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토지를 정돈할 수는 있는 것이다. 자연보전의 기술, 또는 경우에 따라서는, 더욱 자연획득의 기술 – 우리들은 이를 자연전개의 기술이라 말하자 – 은, 첮쩨로 비기술적인 목표를 갖지 않으면 안 될것이며, 또한 두번쩨로, 그 수행에 있어 이 목표의 지각이 가능하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선행하는 고찰이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다면, 적으도 이것은 가능할것이다. 이 [소극적인] 기술도 역시 자연지배의 기술일런지도 모르나, 허나 그것은 단지 좋은 의미에서이다. 이 기술도, 자연의 재료에 연관되는 목표로 향해지는 작업일것이나, 물론 특수한 수행형식과 특수한 종류의 목표등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쫍은 의미에서의 도구적행위여서는 안되며 넓은 의미에서의 도구적행위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자연의 이 관대한 기술은, 그 자신 하나의 미적기술이 되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허나 비예술적미적기술, 그것은, 그것이 목표로 삼는 자연을, 그 기술의 작품으로 성립시키는 시도이지 않으면 안될안될 것. 그 작품안에서 자연을 변화시키려는 욕구의 기술은 자연파괴의 단지 다루기 힘든 형식일 뿐이다. 이 과제는 충분히 역설적이다. 자연의 미적기술은 생산될 수 없는 것을 생산하는 것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생산은 이루어젔던 목표상태에 關知하지 않는 생성이 아니면 안될것이다. 그것은 자연과 맺으진 시작의 상태의 생산이 아니면 안 될것이다. 물론 가장 간단한 것은 이것이 현재에 있는 것과 같이 그렇게 자연의 영역을 방치해 두는 것이다. 자연지배의 거리는 이 [無]의 기술에서만이 완전한 것이다. 보다 구하는 것이 많은 가능성은, [사라저 가는] 기술의 사용인바, 그기서는 자연발생적인 토지를 보존한다던가 혹은 인간이 품는 이미-지에 따라 이를 성형한다전지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재생시킨다던지 혹은 계획적으로 그것에 첨부한다던지 하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또한 최후에 허나 자연의 미적기술의 순수한 가능성으로써 상호작용적통일과 간섭적 통일사이에 있는 영국의 정원과 같은 手本에 따라, 자연에 충만한 공간을 다양한 색으로 변화시키는 것등도 들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을 더한 여러가지 가능성사이의 서열은 어떻게 기초지워지는가 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 어떤 자연보전의 형식이 적당한 것인가 하는 것이, 그때 그때의 자연환경에 있어 문제가 된다. 자유로운 자연이 반드시 손 안될 수 있는 자연이 아닌것과 같이 방치해 둔 자연이 반드시 매력적인 자연이 아니다. 손 안된 자연 혹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자연을, 시비하던, 기술적으로 손 안된체로 만드는 것의 미적근거란 없다. 자연의 미적기술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수정, 언제든 現에 있는 자연상태의 수정일지라도 상관없다. 그러나 자연의 미적기술이 수정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자연의 제어되지 않는 활동이라기 보담, 오히려,,제어되지 않는 기술적제어에 의해 초래되는 자유로운 자연의 말살이다. 이와 같은 말살을 앞에 둔 자연의 보호의 경우, 머저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자연미일 수 있는 인간의 결출한 생존가능성성의 보호일 것이다. 자연의 미적기술이란, [동시적시간]을 산출하는 기술을 일컫는 것일 것이다. 그것은, 완수된 인간적실천을 가능케하는 장소를 확보하는 시도이며, 또한 다시 이를 성립시키는 시도일 것이다.
1447 no image 자연미학 18
247 2018-04-22
자연미학 18 四, 技術的藝術의 時間 기술도 역시 자연의 [修正]이며, 아마도 다른 모든 것들 중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예술과는 달리, 기술은 자연적所與 그 자신의 일련의 변화에 있어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계를 바뀌 나가는, 기술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그 현상적인 다름이 아니고, 실천적인 가변성이 문제시 된다. 자연에의 기술적관계는 그럼으로 미적인 자연관계와는 대조를 이룬다. 미적인 자연관계에 있어서는 자연이 우연히 있는 그러한 방식으로 자연을 존재시키는 것이 문제가 된다. 금일 자연이 여하히 우연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자연은 그러나 자연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의 기술적개입에 의해 다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의 우연성은, 단지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에의 기술적인 개입이 필연적으로 자연의 미적성질을 침헤하며 파괴하는가 어떤가 라고 하는 문제는, 기술의 본질이 자연지배안에 있는가 아닌가 라고 하는 문제에 귀착한다. 그 답은 Yes 이며 동시에 No 이기도 한다. a 自然支配 의 技術 내가 [미적자연]에 관해서 간략하게 논한 바와 같이, [기술적자연]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논할 수 있다. 여기서 또 생각해 지는 것은, 문제제기적인 자연에의 기술적인 관계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술은, 광범위하게 걸쳐서 자연에 대한 제학문의 성과임으로, 그 기술의 사용에서는, 서론에서 [기준적]이리고 이름부친 자연이, [문제제기적]인 자연의 영역으로 어디까지 들어가는 모양으로 활동한다. 허나 우리들은, 생활세계적인 자연에 대해 어떤 관계가 기술적자연에 의해 발생하는가를 해명하기 위해 자연과학자신의 기준적인 자연이 이미 기술적자연인가 아닌가 하는 물음에 관해, 의론할 필요는 없다. 기술적행위의 대상이 되는 문제제기적인 자연은 그럼으로 [기술적자연] 일것이다 라고 료해될지도 모를 일이다. 기술적인 행위는, 도구적인 행위의 한 형식이다. 쫍은 의미에서 도구적인 행위는, 명확한 목적을 달성함에 제수단의 사용이다. 넓은 의미에서의 도구적인 행위는, 미리 제시되어지기는 하지만, 단지 개략적, 잠정적으로 정해진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제수단의 발견과 제수단의 사용이다. 이 후자의 경우, 목적실현 그 자신은, 목적결정의 한 형식이며, 예를 들면, 예술적 수단사용은 이런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인 경우, 도구적인 행위는, 선명하게 끊어 낸 목적의 획득 혹은 실현에 관계지워저 있다. 쫍은 의미에서의 도구적인 행위의 대부분은 넓은 의미에서의 도구적인 행위에서 성립한 것이며, 넓은 의미에서의 도구적인 행위의 대부분은, 쫍은 의미에서의 그런 행위(도구적인 행위)를 준비하는 것이다. 기술은 쫍은 의미에서의 도구적인 행위를 위한 신뢰할 수 있는 수단인것이다.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술이란 도구적인 행위의 도식이며, 이 경우, 그 [도식]은 자주 일정한 행위의 경과안에서만 성립할뿐 아니고 기구나 장치일식에서도 성립하는 것이다. 이 기술적인 도식은, 인과적인 작용의 목표를 정한 달성을 지시한다. 기술적인 행위란, 인과적인 전략의 조력과 더불어 그기에 있는 목표를 실현하는 것이다. 기술적인 知란, [인과적인 전력과 맺으저 있는 수단知]이며, 금일적인 기술을 [학문적으로 합리화한 대상화된 과정에 관한 자유로운 처리]라는 것이다. 인과적인 작용의 연관이 존재하는 – 이것은 자연의 근대적개념이 었었다. 비록 물리학이 그 개념을 버렸다고 하드래도, 기술적인 실천의 기술을 위해서는, 이 인과성이란 개념은 아직도 효력이 있다. 기술적인 자연이란 – 자연의 합법측적인 동태에 관한 지식이나 계산으로부터 – 인과적인 전력에 의해 처리되며, 또한 실현가능성에 대응하여 지배된 자연이다. 이와 같은 관계속에서 일상적. 감각적인 주위의 자연공간은, 제객체영역을 인간의 입장에서 자유롭게 처리하는 공간, 규정된 법칙에 따르는 공간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事象은 또한 거리화의 사상으로도 기술될 수 있다. 즉, 인간이 이와 더불어 존재하는 인간을 둘려 쌓고 있는 자연은, 인간이 이를 조작하는 소여적인 자연이 된다. 자연의 이 중성화된 대상영역은, 생활세계적으로 열려 있는 자연의 내부에 있어 전개되는 것과 같이, 전체로서는 자연의 대신이 될 수도 있다. 농경의 경우, 첫쩨번 것이며, 댐건설의 경우는 두번쩨의 것이며, 연구를 위해서 실험실내의 경우는, 이러한 사례의 세번쩨의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일상적으로 문제제기적인 현존재로부터의 자연의 거리이다. 이들의 경우에는, 이렇게 다른 것이며, 사용되는 기술은 그 자연대상을, 문제제기적인 행위의 세계로부터 그렇게 다른 거리이며 그때마다 멀어지는 것이나, 그것들에는 아직도 공통적인 점도 있다. 즉, 일정한 인간적인 특전을 채우는 것은, 자연과 더불어 달성되며, 자연으로부터 획득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것이다. 일정한 목적이나 기능에 봉사하는 경우에서의 자연의 조정이 문제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에 적용되는 모든 기술은, 자연지배의 기술이다. 허나 이건 자연지배의 어느쪽인가 하면, 약한 개념이다. 도구적인 지배 – 착취, 이용, 기능화 – 가, 자연의 기술적인 다룸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 있는 곳에서 우리들은 처음으로 - 쫍은 의미에서의 자연지배의 – 강한 개념을 획득한다. 모-든 – 넓은 의미에서 풀이 된 – 기술은 자연지배일것이다라는 것의 단순한 확인만으로는, 모든 기술은 자연지배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 불가역적으로 객체화된 자연을 낳는 다는 것이 기술이란 것의 의미나 본질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 아직 논급하지 않았다. 그 반대가 옳바른것이다. 기술의 본질안에 객체화라고 하는 것이 여하히 있던, 자기목적으로서의 이 객체화를 추진한다는 것은 기술의 본질에는 없다. 기술적행위가 이루어야 할 일이, 타의 地에 있어 객체화인가 아닌가 라고 하는 것은, 사용된 기술만의 물음이 이루어야 할 것을, 타의 지에 있어 객체화인가 어떤가 라고 하는 것은, 사용된기술만의 물음이 아니고, 인간의 목표설정의 물음이다. 개념적으로 볼 때, 미적자연을 성립시키는 것이, 기술적인 행위의 의미일런지도 모른다. 다른 표현을 빌린다면, 기술적인 자연은, 미적자연의 절대적인 반대물이 아니고, 매우 빈번히 실제로 미적자연일 수 있다. 요히훔.릿다나 타의 사람들이 되푸리 주장했다 싶이, 자연의 객체화을 위한 거리나 자연의 심미화를 위한 거리는, 역사적으로는 근간이 같다는 것이 옳바르다면, 자연의 객체화는 적으도 자연의 심미화를 위하여 부분적으로는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은, 여하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허나 같은 설득력을 갖고, 그 자연의 심미화의 단계라고 하는 것은, 멈출줄 모르는 자연의 객체화의 역사안에서의 아주 짧은 한 단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 밝혀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될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자연의 힘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안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객체화적인 방향설정과 심미화적 방향설정의 공존의 가능성이 문제되는 것이다.
1446 no image 자연미학 17
244 2018-04-17
자연미학 17 b 이중의 원상성 미적자연과 미적예술은 많은 점을 공유하고 있어나, 양자는 카테코리-로써 구별된다. 그럼으로 자연에 대한 예술의 미적우위, 혹은 예술에 대한 자연의 미적우위에 대한 물음은, 그 물음 일반이 새로 세워지기전에, 이미 해결된 것 같이 생각됨이 틀림없다. 어떤 방식에서는 그건 그렇다. 이 대치적인 개관은 양자의 동등한 현상으로써 현출시킨다. 예술에 대해서도 혹은 자연에 대해서도 미적우위를 인정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 오래된 물음은, 그것과 더불어 모든 것이 片附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바로 양자의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차이에서, 예술과 자연은, 상호적강화라고 하는 의미에서, 서로가 [원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예술의 수정이며 또한 예술은 자연의 수정이다. 괴-데에 의한 칸트 독해에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정식을 차용할 수가 있다. 자연과 예술은 [의도적으로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그럼에도 미적으로 [서로에 대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이미 제3장에서의 자연과 예술사이의 제약된 비교의 결과였다. 이 결과는 지금이야말로 일반화 될수있는 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 배교의 조건이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이 비교는 지금에서는 예술과 자연에 있어 상상만의 헤당은 아니나, 허나 또한 단지 타의 두개의 차원이 첨가한것도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자연과 예술의 미적통일형식은, 서로에게 手本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은, 그것이 예술에 머물고저 한다면, 자연의 통일성에 도달할 수 없으며, 자연은, 그것이 자연에 머물려 있으야 한다면, 예술의 통일성에 도달할 수 없다. 새로운 비교는, 따라서, 개개의 자연미적인 공간이나 개개의 예술미적인 작품에 관계해서는 안되며, 예술이나 자연 일반에 있어 가지각색의 미적 매혹의 소여에 관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새로운 비교는 그 작품의 다수성에서의 미적예술과 관계하며, 또한 그 시간과 공간의 相違에서 미적자연과 관계한다. 개개의 예술작품은 그렇치 않으련지는 모르나, 허나, 아마도 전체로서의 예술은, 모-든 자연경험의 수정이다. 즉, 우리들이 자연을 전체없는 통일로써 경험하는 경우, 우리들은 자연을 제한없이 미적으로 단지 경험한다는 기억. 자연의 미적통일이 아니고, 모든 미적자연의 가변성과 동시성은, 성공한 예술작품의 산출과 수용의 수정이다. 말하자면, 한번 뿐인 구성의 분절가능성은, 예술적으로 창작된 형식의 과정적 독자적 생의 창조와 지각에 대한 수본이며, 미적예술은, 자연에 있어서도, 또한 미적차원성과 차이의 지각에 대한 원상이다. 자연의 우연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격정은, 아무리 逆의 사태일지라도 예술의 금이 들어가 있는 풍경에 대한 격정에 속해 있다. . 이와 더불어, 최초의 비교명제에서 굳게 보지되었던 자연과 에술과의 논리적인 비대칭은, 규범적대치의 노정에 의해 補足되었다. 그 논리적인 관계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십전한 의미로, 아름다운 자연이 존재할 수 있기에는, 성공한 예술작품에의 관련이 없어서는 안된다. 성공한 예술이 존재할 수 있기에는, 자연과 자연미와의 내용적인 관련은 필연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술과 자연의 이중의 수본성의 명제는, 이 서술적인 언명을 규범적 원칙에 의해 지지한다. 즉, 십전한 의미로 아름다운 자연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성공한 얘술에 대한 감수성이 없어서는 안되며, 성공한 예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연미에 대한 감수성이 없어서는 안된다. 예술이 성공할 수 있기에는, 확실히 자연과의 내용적관련이 없어도 되지만, 자연이 예술속에 어떤 방법으로 [나타나]지 않아도 좋다. 허나 자연의 긍정적인 우연성이나 예술작품에 있어서의 그 반영에 대한 미적인 감지능력은, 어디가지나 예술의 성공의 조건이다. 여기서는 자연에의 에술의 [내용적] 관련 대신, [미적] 관련에 대해 논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명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예술 (혹은 예술지각)은, 그것이, 지접적이이던 간접적이던, 혹은 의식적이던 非의식적이라도, 자연미에 미적관련을 갖을 때만이 성공한다. 죤즈와 같이 그 그림의 주제에 있어 자연에서부터 먼 예술가는, 바로 이점을 증명하고 있다. [나는 어떤 物이 한때 있었던 것으로부터 사라지는 것, 어떤 물이 현재에 있는 어떤 물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되는 것, 어떤 물을 정확히 확인하려는 순간, 그 순간이 사라져 버리는 일, 언제든지 보던지, 말하던지, 그것을 그대로 두던지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또 다른 대목에서는, [눈은 눈짓이 향하는 자연안에서 항상 무엇인가 새로운것을 찾아 낸다. 나의 작품에서도 같은 가능성이 있다]. 이들 모든 것은, 예술과 미적자연은 역사속에서의 이들 서로 다른 입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공통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예술과 자연의 미적차이化 의 역사이다. 이 예술과 자연의 공통의 역사는, 양자의 상호적인 우위를 늦으지면서도 승인했던 역사로써, 즉 양자의 미적동등성의 역사로 기술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 물론 하나의 [발명]이기는 하지만, 그 의미는, 발명가의 지배하에서는 없다는 것, 그 발명가의 그림에 따라 창조되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미적예술은 그렇게 추측되어지는 것이나, 미적예술의 정반대의 것으로써 자연미를 발전시킨 존재를 낳았던 것이다. 많은 예술작품이 간섭적인 것이 되고, 또한 그것들과 더불어 예술이 전체로써 강한 의미에서 다원적인 것이 되어버린 뒤에 가까스러 자연은 미적제차원의 상호작용적과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술의 가변성과 동시성의 발견과 더불어 종류의 다른 자연의 가변성과 동시성의 발견에 이르렸던 것이다. 자연의 미적자율성은, 따라서 예술의 미적자율성의 불가역적인 결과일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간섭적작품의 출현후의 예술이 전체로써 통합적묘사의 이상에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것과 같이, 예술에 의해 파괴된 미적자연의 전체성을, 예술에 의해 다시 수립할 수 없는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때 이래, 역사적으로 예술에 의해 해방되었던 자연미의 공간은, 예술에 의해서는 이미 파괴될 수는 없는 것이다. 허나 이는 잘 알려저 있는 바와 같이 진실이 아니다. 미적예술에 의해 열려진 자연의 자유공간은, 예술에 의해 크게 파괴될 수 있는 것이다. 미적예술에 의해서가 아니고 허나 기술적 [예술]에 의해 장합에 따라서는 미적예술과의 동맹에서, 확실하게 자연의 위헙이 기술적자유처리의 책임이라면, 우리들은 미적자연의 해방 – 자연 [전부]의 미적지각에의 인간의 해방 – 의 그 취분을 횅령해서는 안될 것이다. 미적예술과 기술적예술은, 자연의 소원함이 호감을 갖고 마지한다면, 또한 자연의 우연성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그 거리를 만들어 낸다. 미적자연의 역사는 기술적예술의 역사없이는, 쓰여지지 못할 것이다. 휠씬 강력한 정도에 있어 자연의 제어는, 자연의 보다 자유로운 동생으로써, 이 기술적 [예술]에게는, 물론 처음부터의 것이다. 그 목표가 과연 타의 것인지 어떤지 하는 것은 조금도 확실하지 않다.
1445 no image 자연미학 16
278 2018-04-08
자연미학 16 三, 美的自然과 美的藝術 우리들은 이제서야, 미적자연과 미적예술 사이의 직접적인 대결을 위한 준비가 되었다. 그 포괄적인 비교는 파기할 수 없는 일련의 차이를 인식케한다. 그것에 의해, 예술과 자연과의 미적우위성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최종적인 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두개의 고전적인 반대명제는, 이들 양자가 진실임으로 해서 양자공히 잘못된것이다. 예술은 자연의 원상이며, 또한 자연은 예술의 원상이다. 자연은, 예술적으로 만들어진 형태가 갖는 과정적인 개적생명의 산출과 지각을 위한 手本 이며, 예술은 자연속의 미적차원의 다양성과 차이를 지각하기 위한 原像 이다. a 일곱개의 相違 자연과 미적예술은, 이들 양자가 미적인것의 [통일성현상]이라는 것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의 미적차원부터가 아니라, 여러가지 혹은 모-든 미적제차원에서만이 료해된다. 물론 축제나 도시의 한 지역이나 작업실의 조도품이나 사람으로부터 발산하는 방사력등, 다른 기회에 미적인 관점을 갖는 행복한 뫃임이 이루어진다. 자연과 예술은 따라서 미적인 지각으로 향한 유일의 통일성현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허나 그 개념이 이와 같은 통일성의 개념이외로는 이해하지 못할 그런 미적인 객체인것이다. 자연과 예술에게는 미적인 통일성의 가능성은 구성적이다. 이와 같은 사태에 대해서, 나는 [통일성현상]이라고 하는 표현을, 아래에서 유보하게 될것이다. 이들 [자연과 예술의] 구성적인 공통성을 확인하는 것은, 미적자연과 미적예술과의 구성적인 상위를 記 述하는 기초를 만들어준다. 나는 이 장과 앞의 장에서 전개한 규범적인 개념을, 이 비교고찰의 근저로 삼는다. 나는, [미와 숭고의 변전하는 매혹을 낳는] 자연공간을, 미적에너-지의 통합적인 集束 혹은 간섭적인 집속에 성공하는 예술작품에 대조시킨다. 단순화하여, 나는 강하게 혹은 약하게 포괄적인 예술작품을, 비교의 계속을 위해, 단순하게 이를 [예술]이라고 부르며, 자연미의 포괄적인 공간을 단지 [자연]이라 부른다. 일곱개의 서로 설명해 주는 명제속에서, 나는 그 중요한 상위를 총괄한다. i. 모-든 자연은 예술에의 관계를 포괄하고 있는 바, 허나, 모든 예술이 자연에의 관계를 포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미는 예술작품에의 상상적인 관계없이는 불가능한것이다. 그에 대해, 예술은 자연에의 모-든 내용적인 관계없이도 가능하다 – 죤즈의 깃발 그림과 같이. 예술작품의 개념은, 그것만으로 해서는 자연미의 개념보담은 보다 기초적이다. 예술작품의 개념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논리적인 의미에서만이 미적자연은 미적예술에 대해 파생적이다. 예술은 자연보담 [보다 본질적]이라던가 혹은 예술은 자연에의 방향설정없이도 같이 잘 해 나간다는 것과는, 그기서는 결론지울 수 없다. ii. 자연은 포괄적이며, 예술은 개략적으로 그러하다. 자연미가 항상 강하게 포괄적인 현상인 반면, 예술작품은 대충 강하게 혹은 약하게 포괄적인, 때로는, 배타적인 상상적인 객체이다. 자연에게 강하게 포괄적인인 통일성은 구성적이나, 예술은, 강하게 혹은 약한 통일성에로 체질적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 제한이라 하는 방법에서 확인할 수 있는 소질, 예술이 예술로서의 그 통일성을 탐구함에 있어 원칙적인 한편, 자연공간에 있어 미적총제성을 항상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 현출방식의 다양성안에 있어 자연은 변화하기 쉽고, 모-든 예술보담 휠신 가변적이다. 허나 자연은 그 미적통일성의 형식에 있어 연속적이며, 모-든 예술보담 휠씬 영속적이다. iii. 자연은 제일차적인것이고, 예술은 미적인것의 강화된 통일성현상이다. 자연미는 [제일차적인] 일현상이다. 왜냐하면, 자연미는 항상 포괄적이며 또한 언제든지 예술의 상상력과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공한 예술작품은, [강화된] 통일현상이다. 왜냐하면, 성공한 예술작품은, 미적기능의 통일성안에 있을뿐 아니라 그 통일성의 구성에 반성적으로 관계하고, 더욱 이를 넘어 타의 작품의 구성과도 관계하고 있기때문이다. 자연은 항상 또한 예술과의 대화를 유도하며, 예술작품은 항상 자기 자신과의, 또한 타의 예술작품과의 대화를 – 그리고 충분히 자주 자연과의 대화를 유도한다. iv. 자연에게 작품존재는 우연적인것이나, 예술에게는 그것 [작품존재]는 필연적인것이다. 이는 여기 서 문재가 되고 있는 두나의 위대한 것 사이에 놓여 있는 중심적인 차이이며, 그기서부터 모든 타의 차이가 도출되는 것이다. 보다 강한 이해는 아래와 같을 것이다. 즉 자연공간은 작품을 모르나, 허나 예술객체는 전적으로 작품인것이다. 허나 이는 너무 강한 표현일런지 모른다. 라고 하는 것은, 자연은 단호히 작품을 [알고 있으며], 자연은 인간의 작품일 수 있는 것이며, 다른 한편 예술이 작품을 낳는것과 같이, (건축이나 조각의 경우와 같이) 자유로운 자연에 있어서의 객체로써, 혹은 (정원예술이나 대지예술의 경우와 같이) 자연에서부터 혹은 자연과 더불어 형태화된 작품, 자연생명에 참가한다던지, 혹은 자연의 일부일수도 있는 작품도 존재한다. 자연의 특수한 아름다움은, 허나 자연의 움직임이 예술의 특수한 성공의 그것만이 그기에 들어서는것과 같이, 그러한 작품의 논리에 (만이) 따를뿐 아니라, 또한 그 자연의 움직임이 이와 같은 – 자연이 갖는 우연성과도 어울려지는 – 그러한 논리에 따르는 것 같은 장합에서만 자주 나타난다. 예술적인 작품의 논리는, 미적인 각양 각색의 다룸이나 미적인 제기능의 통합적 혹은 간섭적인 결합안에서 성립한다. 예술가는 자품의 구성에 관련되는 창조적인 가능성을, 작품의 관계안에서 설정한다. 여기에 대해, 자연미는 이러한 논리의 밖에 있는 미적통일성이다. 이 차이는 자연 혹은 예술의 포괄적인 결합에 있어 미적인 가지각색의 매혹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자연에 있어서는, 이것들은 공히 주어지고 있는 것이며, 예술작품에 있어서는 이들은 서로 맺으저 있다. 예를 들면, 자연의 관조는 자유로운 관조이며, 자연의 관조가 바라는 방향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며, 자연의 관조가 지속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조응적파악이나 상상적파악에로 교체할 필요가 없다. 이에 대해, 예술작품의 관조는, 결합된 관조이다. 그것은 작품의 현상상의 구성과 결합하고 있으며, 그 작품의 감성적에너지의 지각 – 작품의 쌓인 에너지-의 기작 – 으로써, 그 작품의 관조가 상상적인 혹은 조응적인 파악에서 생기고, 또한 그기에 다시 되돌아 갈때는, 스스로 단지 보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음악과 같이 자연은 연주할 수가 없다.) 작품특성의 기준에 관해, 자연과 예술에 있어서의 미적쟝르의 의미 역시 구별된다. 많은 예술작품이 그 통상의 쟝르의 경계를 넘으서려고 하는 것은, 그것들의 트질이며, 상상적자연이 그 쟝르의 차이를 넘는 곳에 원리적으로 서려고 하는 것은, 상상적자연의 특질이다. (여하한 음악도 자연의 형태의 법칙을 자연과 같이 연주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v. 자연의 통일성은 우연적이며, 예술의 통일성은 구조적이다. 이는 작품특성에 관한 자연과 예 술의 서로 다른 입장의 이면이다. 자연과 예술은, 미적과정의 이자택일적인 형식이다. 자연공간에서의 미적제차원의 [상호작용]은, 예술의 구조에서의 그 [통합] 혹은 [간섭]과는,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별개의 것이다. 자연의 통일성은 자연의 시간, 감각안에 있는 것이며, 이것에 대해 예술작품의 통일성은, 예술작품의 감각. 시간속에 있다. 자연미가 그 관찰의 기회에서 – 시간에 대한 의미소원적이며 의미부수적이며 생생하게 살아 있는 화상적인 현출의 변화에 매혹을 나타냄이, 자연미의 통일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예술작품은 하나 혹은 몇 개의 미적작용을 계산해서 만들어 낸 것으로, 그 인공적인 구성의 힘에 의해, 그것은 통합적 혹은 간섭적인, 혹은 포괄적 혹은 배타적인 상상력에 뛰어난 감각을 갖는 구조물이다. 예술작품의 이러한 감각은, - 예술작품은 조응과 관조에 의해 통합적으로 받침되고, 또는 조응과 관조에 의해 간섭적으로 방향을 바뀌고 중단되고 건너뛰게 되는 것이며, 파쇠되는 것으로 – 예술내부적인 수단의 과정에 있어 부여되며, 이 감각은, 작풒의 (연속적 혹은 불연속적인) 감각.시간속으로 부여되는 것이나, 작품지각의 시간은 이 작품의 감각. 시간에 관심을 갖는다. – 투영의 사례는 이 분석에 확증을 제공한다. 하나의 포함적인 예술작품이, 여하히 그것이 통합적 혹은 간섭적인 것이라 해도, 그것이 자연에 투사될 때 그 상상적인 특성만 남게 된다. 자연의 일시적인 공존에 있어, 예술작품의 구조상의 공존은, 미적인 구성요소의 자유로운 상호작용에로 해소된다. 그 작품전체는 자연전부에 전사가능으로 되지 않는다 .나는, 죳트의 하늘과 같은 가상에서 하나의 야공을 볼 때, 나의 관조적인 지각을 이끄는 이 하늘의 외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기에 머물고, 나에게 나의 생활상황의 내적인 표출이 되어 있는 이 하늘은 그기에 머물고 있다. 자연의 예술적가상과 더불어, 그 자연의 전라나한 출현도 그 자연의 가치있는 존재자체도 하나의 가상이 되는 일은 없다. 자연전부가 예술의 투영은 아닌것이다. vi. 예술은 료해되기를 바라지만, 자연은 료해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작품의 료해란, 그 구성내지 그 계산의 료해이다. 구성도 계산도 주어저 있지 않는 경우, 혹은 구성과 계산이 미의 본질적인 것이 아닌 경우, 그 지각수행은 료해수행일수 조차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적인 자연지각은, 료해의 하나의 형식이기는 하나, - 허나 자연의 한 형식은 아니다. 료해는 여기서는 우선, 고유의 생활상황으로 향해저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예술의 상상적인 가능성으로 향하고 있다. 양쪽의 차원에서 자연미는 인간적 감각과 그 료해를 열고 또 변화시킨다. 예술의 지각에서 수행되는 료해는, 이것에 대해 예술로써의 그 구성의 료해이다. 허나 이 료해역시 언젠가는 관조적으로 예리하게 다듬어져 또한 간섭적으로 뿌셔진 작품이 문제다 되는 한 상상적이며 조응적인 감각료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제구성을 료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감각의 제과정 이외, 단일한 혹은 거듭 쌓인 감각을 갖는 하나의 과정을 료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작품의 미적논리를 료해하는 것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실제의 논리는 자연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임으로, 여기서는 이 료해도 존재할 수 없다. vii. 자연은 하나의 생명연관이며, 예술은 생명의 제연관을 넘어선 곳에서 생명의 제연관안에 존재 한다. 자연 또한 아무리 미적관계안에서 현실성의 부호가 된다고 하드래도, 자연은 생활의 독립된 연역의 요소에 머문다. 예술 또한 여하이 생활현실의 일부분이 된다고 하드래도, 예술은 생활의 현실성이 그것에 닿아서 굴절되는 묘체로 머문다. 자연미는 생활세계적인 현실성의 특별한 영역이며, 예술은 특별한 나타남으로 해서 이 생활세계젹인 현실성안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에의 양자의 입장에서 밝혀 진다. 미적관찰의 대상이 되는 자연은 – 모든 예술과 같이 – 특히 미적입장에서 성립하며, 지속하고, 그 료해 혹은 해석의 역사안에서만 살아 남는다. 미적자연 역시 하나의 역사적 관계이고, 허나 한묶음으로 한 역사적객체에의 관계는 아니다. 이에 대해서, 예술작품은,, 하나의 역사적 관계에 있어서의 역사적객체이다. 역사적 혹은 전기적 조응의 관점에서, 확실하게 미적자연도 역사의 장소가 되지만, 허나 미적자연의 독립성과 가변성은 – 많던 적던 자주적인 생활연관으로써의 그 존재는 – 자연을 역사에서 항상 멀리하게 만들고ㅡ 해석에서 생기고 또한 해석을 위해 지속하는 생활에서 자연을 경계 지워준다. 혹시 자연과 예술과의 보완관계와 대립이, 여기서와 같이 명료해지는 곳은 없다. 우리들은 자연안에서 항상 또한 역사의 밖에 있는 현실성을 탐구하고, 예술에서는 항상 또한 현실성 밖에 있는 역사를 탐구한다.
1444 no image 자연미하 15
346 2018-03-29
지연미학 15 d 방법에 대한 付言 허지만 역시 통합적예술에 대한 간섭적예술의 主題的인 나의 優遇는, 규범적이유에서도 방법론적이유에서도 의심스려운 것으로 생각될 수 있을는지 모른다. 허지만, 과거 150년을 제외한다면, 예술작품의 압도적 다수는 간섭적이 아니라 통합적으로 작성되어젔던 것일까. 말하자면, 예술작품의 통합적통일성을, 그 패쇄성의 해소에서 출발하여 기술하는 것이 과연 잘 되어 갈수 있을는지. 이러한 疑念 은 정반대의 평가에 기인하고 있다. 통합적예술에 대한 간섭적예술의 원리적우우는, 확실히 규범적으로는 의심스려울것이다. 허나 방법론적으로는 그렇치 않다. 반드시 개념적제관계는 역사적관계를 묘사하지 않는다. 예술작품의 미적통일성이 먼저 구체적으로 나타났던 것은 간섭적작품에서 였음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통합적예술작풉의 개념은, 간섭적예술작품의 개념에 대한 반대개념이며, 미적영역의 예술적 내지 예술이론적인 탈세분화가 실행된 후에 처음으로, 이 반대개념은 엄밀히 정식화되어지는 것이다. 간섭적예술은, 역사적으로 미적통합에 대한 바로 반대운동으로써 성립했던 것이며, 어떤 일정한 개념이 – 또한, 죳트의 사례가 보여주는 바 성과에 대한 높혀진 감정이 – 강력한 미적인 동일성의 제형식부터의 돌발의 도상에서 겨우 이 통합에 부여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또한 이는 죤즈와 죳트나 로스코의 대치를 명확히 해주는 것이나, 강력한 동일성모델의 현존이 없는 이 돌발은 이루어지지도 료해되지도 않는다. 예술은 한쪽이던가 혹은 다른쪽이 아니다. 간겁적작품의 운명은 통합적작품이라고 하는 적대자에 묶여 있다. 하여, 간섭적인 예술과 예술지각은 너무 간섭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기에는 간섭적예술과 통합적예술 사이에 숨어 있는 협정이 줄곧 존재해 온다. 통합적예술 --- [미적동일성]의 예술 --- 은, 간섭적예술이 그 허벅지나 반대쪽으로 오자 마자 미적제차원의 불분리성의 상태가 아니고, 그것은 성립해져 있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험된 재통합의 상태가 된다. 간섭적예술이 우선 전통적예술의 전체성 파토스에 대한 응답이라면, 근대에 놓여 있어 통합적예술은 전체없는 통일의 작품형식에 대한 응답이 된다. 양쪽 모두 그 반대운동이 그 경향에 대한 특이한 것을 인식시켜주는데, 그 경향에 대해 반대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죤즈가 죳트에 대해 배우는 진실은, 재도 다시 한쪽으로 돌아 와서, 로스코에게 죤즈를 인식키고 또한 한토케에 벨른하르트를 인식시킨다. 즉 말하자면, 예술작품의 통일성은, 통일성의 타의 제형식과의 차이에서 처음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것이 예술작품의 통일성이라는 것이다. 이 통알성의 하나의 개념밖에 갖지 못하는 자는, 여하한 통일성의 개념도 갖지 못하는 자일것이다. 우리들의 통합적과 간섭적 사이의 구별, 더욱이 배타적과 포함적예술형식이나 작품형식과의 사이의 구별은, 역사적 내지 비판적으로도 통일성의 하나의 류형에 의무지울 수 없는 예술의 다원론적상태를 고려하는 시도였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또한 이미, 예술이론적의념을 조장하는 것 같은 더욱이 심각한 의의는 약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 異議 는 미적자연을 다루는 것에도 관련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의 세분화된 취급은, 자연미의 분석의 중요한 현향된 일변성을 의도하지 않는체 밝혀내는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예술에 앞장서서 승인했던 것, 즉, 예술은 전체의 안에서나, 전체의 밖에서도 미적통일성을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왜 자연지각에서는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상호작용적]인 통일형성과 [통합적]인 통일형성 사이의 공존은, 자연에 있어서도 존재할 수 없는것일까. [十全한] 미적자연경험은 자연풀경의 전체성없는 공간에서만 존재한다고 하는 주장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여기서도 방법론적관점이 상기 되야 할 것이다. 예술에 대한 두번쩨 補說의 방법은 본론고 전체의 방법을 대표하고 있다. 미적분열이 일어난 이후에는 모든 통합형식은 이 가능성으로부터 료해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통합적인 것을, 간섭적인것에서부터, 또는 통합적인것에의 간섭적인 것의 거리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연은 미적으로 전체로써 경험된다는 것을, 자연은 그렇게 되었고, 또한 그렇게 될것이라는 것을, 나는 자연의 형이상학이나 자연의 이데올로기에 관한 대목에서 항상 강조해 왔었다. 이 경험의 [불필요성]의 기술은 항상 또한 --- 그럼에도 불구하고 --- 지각되는 자연의 가능성에 관해서의 병행기술이 었었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방법론적인 것이었다. 나의 기술의 다른 쪽인 것으로 규범적인 것은, 실제로는, 전체론적형이상학적자연경험에 대해서, 반전체론적 --- 자연경험에 미적우위를 부여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있었다. 예술의 경우에, 통합적형식 혹은 간섭적형식의 원리적우위에 대한 물음에서는, 나는 이론적 放棄를 지지하지만, 그 예술의 장합과는 별도로, 나는 자연에 대해서는, 자연의 전체성없는 통일의 지각만이, 그 자유이며 순진한 제한없는 미적기각이라고 하는 명제를 응호하였다. 그럼에도 확실하게 나는 미적자연을 미적예술과는 별도로 논했다. 그러나 이점에 의념을 갖는 사람은, 자연미학이던 예술의 미학이던, 그 미학의 큰 罪를 범하고 있다. 말하자면, 자연과 예술을 무사료하게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1443 no image 자연미학 14
290 2018-03-25
자연미학 14 속 c 간섭적예술 대 통합적예술 소위 전통적예술을 일관하여 통합적(혹은 [아름다운]) 것으로, 또한 근대적예술을 그 시작은 언제라도 좋치만, 일괄하여 간섭적(혹은 [숭고한])얘슐로 분류한다는 것은, 지금은 대단히 매혹적인 것일런지는 모른다. 허나 이것만큼 틀린 것이 없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근대적예술의 중요한 부분은 바로 통합적미적형식의 재건을 다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쟈스파.죤즈가 50년대에 깃발이나 다-쯔의 표적이나 수자를 그리고 있을 때, 마-크.로스코는 화상의 절대적인 미적통일성을 부활하려고 하는 역의 길을 걷고 있을 때, 베-타.한도께는 시적유화의 새로운 관용어법을 찾아 내고자 한다. 등등. 근대예술은 분열하고 있다. 그것은 간섭적작품과 마찬가지로 통합적작품도 알고 있다. 포괄적조작의 충일과 나란히, 그것은 항상 새롭게 비타적환원을 시도한다. 물론 그것은 합일에 대한 분열의 승리이다. 근대예술이란 단지, 그것이 매우 급진적작품이라던가 또는 그럴런지도 모른다라는 것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닐것이다. 통일없는 전체, 근대예술은 그렇게 되려고 하는 것이며, 또한 내가 생각키로, 근대예술은 그 이외 아무것도 아닐것이다. 근대예술은 그것들의 작품의 일치하지 못하는 다양성에서, 세계의 통일적인 개시나 그 통일속에 구속되는 세계의 개시의 이념에 대해서 단념하는 것이다.
1442 no image 자연미학 13
304 2018-03-24
자연미학 13 속 c 간섭적예술 대 통합적예술 [간섭적] 예술의 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관찰은, 단지 회화에만 헤당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 모-든 예술에 에 대해서도 적용가능 할것이다. 彫刻 에 관해서는 우리들은 죳트의 례가 있고, 건축에 관해서는 貧相 한 렛텔인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충분할는지 모른다. 음악에 있어서는 아마도 게이지나 가겔뿐 아니라 이미 마-라의 이름을 들어야 할것이고, 무용에 있어서는 마-스.커닝감와 비나. 바우슈의 안무가 우선 거론될 수 있는 사례일 것이다. 70년대의 연출가의 연극은 매우 고전적인 희극을 바탕하는 간섭적상연을 행했던 것이며, 또한 고달나 뤼뷧트가 없는 유-럽란 무엇일 것인가. 사례가 다수 있다고 하는 것은 개개의 예술의 구조안에는 없어나 근대예술 그 자신의 구조에는 있는 것이다. 허나 배타적문학의 사례는, 이 진단에는 – 진단의 이 시사에는 – 적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미적 제차원의 간섭은, 여기서는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타적으로 상상적인 문학은, 간섭적예술의 시대에서만 성립했었다는 것, 그리고 이 문학은 [미적차이의 정황]을 이따금 정식화하여 – 여하간 베겟트, 보르헤스, 카프카와 같은 작가들이 그 담보자들이라 하는 직관은 거부할 수가 없다. 이 직관을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 통합적통일성과 분단적통일성 사이의 차이가, 예술의 상상적 著술을 위해 再度 정식화하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개개의 장합에 그 사정이 어떤것이었나 라고 하는 것은, 제예술의 관계에 관한 역사적 내지 체계적으로 의론하는 탐구의 대상일것이나, 그런 탐구는 이 장에서는 상응하지 못한다. 허나 몇가지 귀결은 확실해 지고 있다. 통합적이기도 하는 포괄적예술은 그 작품질서의 구상에 있어, 동시에 세계질서의 재현 혹은 구상이다. 그 의미는 결국은 작품으로서 이들의 상위에 있는 질서의 례해, 현실화 혹은 祈禱에 있는 것이다. 그기에 대해서 간섭외적인 구조로써 그 구성을 제출한다. 이 작품의 통일성은 모든 예술외적인 질서를 넘어선 곳에 있는 질서로서 이해될런지도 모른다. 간접적 작품이란 다른 말로 한다면, 이미 세계의 해명된 해석의 대표자나 대리인이 아니고 세계의 실험적해석의 대리인 – 허나 대표자는 아니다 – 이다. 통합적예술은, 더욱 다름과 같이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이나, 그 예술에 의해 창작되던가 갱신되는 사물의 조망에의 확신을 필요로 하며, 간섭적예술은, 사정에 따라 확신을 필요로 한다. 즉 자기자신과 세계에 관해서 성립되고 있는 모든 해석에 대한 주관의 有力 혹은 무력에의 확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1441 no image 자연미학 12
298 2018-03-21
자연미학 12 c 干涉的藝術 對 統合的藝術 이 규정이 조형예술에서 뿐 아니라 모든 예술에 적합한 것으로 가정하드라도, 그럼에도 이 규정은, 그것이 보다 세분화된 문맥에 도입될 경우에, 처음으로 충분한 것이 된다. 예술작품의 통일성에 대한 최초의 두 명제는, - 새로운 최근의 예술의 사례에 눈을 돌림으로써 거이 정식화되었던바 – 그 새로운 예술의 역사적 자리매김 자체에 대해서는 그 규정자신으로서는 맹목일것이다. 우리들은 예술작품의 통일성에 관해서, 예술의 역사를 잊으서는 안된다. 나의 제3의 명제는, 그럼으로, 미적으로 포괄적인 예술의 두나의 형식을 구별하는 것을 제안한다. 즉 [통합적]인 예술과 [간섭적]인 예술이다. 예술의 객체는 본질적으로 포괄적미적객체라고 하는 것이 옳바르다면, 이들은 예술적인 통일성의 두 근본형식이다. 통합적인 예술작품은, 3개의 미적기능을, 그것들이 구별할 수 없기 까지 일치시켜, 미적동일성의 상황을 정식화한다. 간섭적인 예술직픔은 그 미적지각의 제형식간의 융합하지 못하는 과정을 들어 내어 미적차이의 상황을 정식화한다. 통합적인 예술작품의 통일성은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는데, 간섭적인 작품의 통일성은 전체가 없는 통일성이다. 바도바의 스크로뷔에니-예배당의 죳트의 프레스코화는, 의심할 여지 없는 포괄적인 예술작품이다. 그리스도교救濟史 에서의 일련의 화상의 마무리와 배치에 있어, 또는 그 장식적이며 공간충족적인 가장자리와 우의적해석에서, 그것은 조응적미적지각에서도 상상적미적지각에서도 관조적미적지각까지를 불려 낸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시간동일적으로 또한 같은 바란스로 불려 낼뿐 아니라, 그 위에, 같은 의미로 이야기한다. 지각의 한쪽의 형식으로 제한없이 실행하는 것은, 여기서는 이미 지각의 다른 형식을 제한없이 실행하는 것이다. 이 예배당의 프레스고화는 단지 포괄적일 뿐 아니라, 그것은 그 위에 통합적이기도 하다. 이들 화상은 하나의 특별한 공간을 구성하고, 그 형식적인 용도는 확실하게 형태를 부여하고 있는 바, 그것은 그것들이 하나의 종교적인 세계관을 정식화하고 극화하는 것, 따라서 상상적인 현재화시키는 것, 또한 이때 형과 색채와 움직임의 수작들을 무대에 올림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 수작은 다시 다른 두개의 분절화방식을 맡게 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다른 쪽으로 하여 한쪽을 이루며, 또한, 한쪽에 의해 다른 쪽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배당의 반원통의 볼트의 성공은 전공간을 덮는 선명한 청색으로 이루어 지고 있으며, 그 靑은 각각의 사건들의 그림들을 이어 가며, 죳트가 인물의 행상을 돋보이게 하는 수단으로써 사용한 적갈색의 색채와 더불어, 묘사되는 사건들을 위한 화상공간을 여는 것이나, 그 청은 한편 관조자를 화면에서 떨어지게 하여, 다른 한쪽에서는 관조작쪽으로 화면을 땅긴다. 이 두개의 색채와 같이, 다른 화상재료도 그 자체로서는 결코 감각적 에너지-로서 성립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개개의 화상이야기의 전승되고 있는 의미에, 각각의 화상이 그 색채와 형태의 생명안에서만이 갖는 명료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內面像的 의미는 다른 편에서는 예배당을 하나의 장소로 보며, 말하자면, 그기서는 묘출되는 광경은 단지 묘출이 아니고, 그 자신지평에 풍요로운 현실이 되는 것 같은 하나의 장소를 이룬다. 그르저 있는 천국의 청을 관조적으로 바라 본다는 것은, 여기서는, 천국의 영역을 상상적으로 마음속에 명기하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다른 한쪽에서 화상적으로 현실화된 의미연관과의 조응안에서 존재하는 것이 된다. 미적지각빙식의 각각은, 여기애서 다른 것을 품고 다른 쪽의 것을 밀어 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리스도교적 세계의 가시적인 활성화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물론, 아래와 같은 것이다. 바야흐로, 이 동시발생의 파기에서 에술작품의 통일성을 획득하는 에술작품과의 경험을 갖는 자에게 만, 이 동시발생의 힘을 그러한 것으로 해서 경험할 수 가 있으며, 또한 동시발생으로써의 그 힘을 분석할 수가 있는 것이다. 간섭적작품을 선호하는 시대만이, 보다 뒤의 예술에 있어 그 전체적 질서에서 돌발하기에 이르는 그 화상긴장을, 이미 죳트의 회화에서 찾아 내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초기근대적인 화상발명에 맞춘 때에 이르러, 통합적인 구성의 지각일것이다. 죳트를 죤즈에 연결하는 예술적세계는, 그들의 작품 사이에 놓여 있는 세계에 대한 지식만으로 도달할 수가 있다. 죤즈의 깃발 그림과 그것에 속하는 일련의 작품은, 어디까지나 간섭적작품이다. 하나의 미적직관은 여기서는 다른 미적직관을 수반하지 않고, 각각의 미적직관은 따로 던져짐으로 해서 다른 미적직관을 강화하는데 공헌한다. 우리들의 깃발 그림의 통일성은 하나의 의미전체의 정식화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중단에 의해 추진되는 하나의 의미과정의 전개안에 있는 것이며, 그 의미과정은 구속력이 있는 하나의 세계관의 정식화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으로써의 세계연관의 순간적현재화에만 도달하는 것이다.
1440 no image 자연미학 11
326 2018-03-16
1439 no image 자연미학 10
338 2018-03-13
자연미학 10 속 b 예술의 규범적개념 여기까지는 주로, 화상의 상상적 존재방식, 즉 화상의 상황분절적 존재방식에 대한 것의 해석을 언급했다. 이 작품 여시, 그것에 의해 만들어진 지적상황의 묘사이다. 그것은 疑裝 된 상황의 분절화가 아니고, 분절화된 상황의 허구인것이다. 우리들은 어느 한 객체, 예술작품과 만나는데, 그것은 그 객체와 우리들과의 만남의 인지에로 우리들을 이끌어 가는 것이며, 그것은 그 객체가 그기서 출발하는 생활세계의 도상기호를, 복잡한 미적상황의 예술적기호로 변화시키며, 그 상황에서 우리들은 흔해빠진 것이나 숭고한 것의 동시적인 긍정에로 재촉받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이러한 [제1의] 개념은 물론 예술작품의 미적통일성에 지나지 않는다. 이 통일성은 그 처리방법의 총체에 있어, 확립되는 표현연관 혹은 제시연관에서 성립한다. 그것은 작품내의 미적의미의 통일성이다. 그럼으로서 이 상상적통일성에 의해, 제1의 명제는 이를 굳건하게 보지하는데, 예술작품은 타의 종류의 모-든 미적인 제객체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이란 순수한 관조의 객체와 같은, 감각적으로 분절된 객체인것이다. 예술작품이란, 단지 조응의 객체와 같은, 살아 있는 세계의 지평의 내측에 있어, 만들어지는 강조. 두드로지는 형태. 장식된 몸짓. 의미있는 형식은 결코 아니다. 예술작품이란 항상 세계의 의미형성적이며 그로 인하여 의의깊은 제지평을 직관시키는 표현풍부한 묘개물이다. 그 이름에 값하는 모든 예술은 세계로 향하는 통로의 생동적인 묘사를 성취함으로 해서 세계에의 통로를 만드는 것이다. 허나 대개의 예술작품의 예술작품으로써의 자기동일성은, 이 상상적통일성에서는 나타나오지 않는다. 만일 그 깃발의 그림이 뉴-욕근대미술관의 중립적 공간이 아니고, 안전의 나의 방에 직접으로, 자연에의 눈짓를 대신하여,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서는 단순히 상상적인 객체뿐 아니라, 같은 조응적인 객체가 문제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이내 밝혀 지는 것이다. 나의 방에 걸려 있는 그 그림은, 던슌히 그것이 묘사하고 있는 역설적인 지각상황을 제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방 전체의 분위기를 바뀌 놓는다. 허나 그 그림은 이 사실을 단순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그림의 표면은 그 장식적 윈형을 갖고 있으며, 혹은 또한 상징적으로 나의 동경의 국토를 가르키고 있는바, 만일 진짜의 기를 나의 벽에 걸수 있다면, 그 기 역시 이 이양의 특질을 갖고 있게 될것이다. 오히려, 이 그림은 그 상상적인 잠세력을 통해 나에 어울리는 의미있는 공간을 만들고 있다. 이 조형적인 역할중에, 그 그림은, 그 상상적인 표현으로는 다시 듸돌아 갈 수 업슨 어떤 고유한, 제2의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공간에 있어서의 객체로써, 이 그림은 심히 세속적인 회화의 목인이 된다. 그것은 이 그림이 그 그림을 여기에 걸어 놓은 나를, 어느 국토의 애국자로 제1의적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이란 국토의 애국자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 깃발 --- 회화의 조응적인 의미란, 근대적 --- 허나 다시 근대미국적인 유-럽적 전통에서 벗어난 --- 예술의 이콘 바로 그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회화의 조응적 또는 상상적인 힘은, 그 회화가 그 이외에, 최초의 해석에 있어 --- 회화의 [흔들리는 화상적 움직임]에 대한 지적에서 --- 이미 언급한바 있는 회화에 있어 존중되어야할 모-든 의미로부터 더욱 우리들의 눈을 가리는 관조적인 마술을 갖지 않는다면 이내 고갈되어 버릴 것이다. 이 마술의 힘에 의해 색채나 형태의 동적인 관계는, 관습적인 상징에 있어 그것들의 정해진 위치에서 밖으로 벗어 나올뿐 아니라, 예술적수단의 상상적이며 조응적인 활동으로부터도 밖으로 삐저 나온다. 이 이중의 화상감각은 순수한 화상감각성에로 해소된다. 형식연관적인 반사성, 미적도덕, 화상의 실존적몸짓은 사라진다. 그기서는 감각적인 물질적제관계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감각적이해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허나 또한 작품의 관례적인 의미나 제시적의미, 수행적인 의미는 다음의 순간에서는 이내 다시 그기에 있게 된다. 바로 그것은, 관조적인 화상현출의 순간을 그만큼 자극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동시적의미기능에서의 이탈인것이다. 바로 그것은 다중의 화상감각에 고갈되지 않는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 즉 그 화상감각은, 돌연한 부재의 제상태에서 항상 새롭게 성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상상적인 화상파악이나 조응적인 화상파악을 항상 새롭게 관조적인 례외적상태로 치겨 세우는 것이다. 즉 화상파악이라는 것은 미적감각의 소멸에 있어, 물질과 맺으저 있는 이 감각의 개체성을 확인하고, 또한 동시에 발견적인 감각형성에의 화상파악의 자유를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이 삼중의 미적분절화의 이 과정을 작품에로 착정하는 것은, 우리들의 화상의 본래적인 예술에 속한다. 또한 대우 잘 알려어 있는 평탄한 도형기호에서 이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은 예술가 쟈스파. 죤즈의 특수성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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