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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1 (11:5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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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번쩨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R. Jameson)

 

                歷史的 變轉을 지속하는 世界시스템의 끊임 없는 解析者

 

   역사에 씨나리오를 구하는 것이 점점 낡은 愚行으로 보이고, 점점 곤난한 시도로 사료되는 상황속에서, 제임슨은 1960년대 이후 일관되게 그 시도를 지속해 왔다. 더욱이 强진한 분석력과 광범위한 퍼스팩티브로 그 시도에 설득력을 띠우면서, 그것이 愚行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상황에서 한층 중요한 知的實踐임을 증명해 왔다. 그리고 오늘날 그는 미국에서도 가장 존경을 받는 비평가의 한 사람이 되고 있다.

 

    그의 비평활동에 착상과 지침과 활력을 주고 있는 것은, 의심할 필요 없이, -마르크스 와 그 의도를 이어가는 최량의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이다. 70년대 중엽까지 제임슨은 사르트르나 루카치나 프랑크프르트학파의 사상을 연구하는 것으로, 마르크스주의 비평의 액추얼한 가능성의 수맥을 파내는 작업을 해 왔다. 더욱이 비평행위의 형식에 주목하여 그 전통을 계승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그는, 동시에, 러씨어.-말리즘나 P. W. 루이스를 바탕하는 문학작품을 지속적으로 정치하게 해석하면서 언어표현과 이야기의 구조속의 정치적 함의를 분석하는 방법론을 세운다. 허나, 오늘날에 와서 뒤돌아 보면서 그의 비평의 전망이 크게 열렸던 것은, 80년대에 들어 와서 그의 비평적 안목이 자본주의의 현행시스템의 총합적분석에 눈을 돌렸었때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물론 그의 가장 유명한 것이, 역사감각이 결락된 고도소비사회의 발전단계를 명쾨하게 특징지워 갔던 포스트 모더니즘의 이론이다.

 

    이 이론의 임팩트로 제임슨의 이름은 [포스트 모던의 사상가]로써 가장 잘 알려진 것 같은데, 그 자체가 역사감각의 부재를 전형적으로 반영한 이 켓치프레이즈 보담 오히려 역사적변전을 지속하는 세계시스템의 끊임없는 해석자라고 하는, 얼만간 地味로운 記述쪽이 한층 정확히 그의 비평활동의 특징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지 모른다. 사실, [변증법] [-토피어] [물상화]라고 하는 그의 분석어휘는, 그의 방법론이 최첨단의 유행이라기 보담 매우 오-소독스한 전통의 활용을 기도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며, 이들 일견 이미 쓰먹은 개념에서, 眼前의 현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해방의 가능성을 묘색하기위한 새로운 활력을 최대한 인출해 내는데, 그의 비평의 비범한 점이 놓여 있는 것이다. 제임슨은 훌륭한 마르크스주의 사상가가 반드시 갖추고 있는 實直함과 지속성과 헤안이 서로 맺으저서 그 통합에 성공한, 희유한 비평가라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히스토리즘와 俗流 디컨스트락선이 유행하고 [역사의 종국]이 소리 높이 외처 지고 있는 시니컬한 언설상화속에서 (시대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묻고 자본주의의 발전단계를 분석한다는 자세를 일관해 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제임슨의 광범위한 비평활동의 근저에 일관되고 있는 것은, [물질적생활의 생산양식은 사회상 혹은 정치상 내지 정신상의 생활과정일반을 조건지우고 있으며 물질적기반의 변화에 따라 상부구조전체가 변혁된다]라고 하는 마르크스의 정식화에 기초한 견실한 자본주의의 현상분석이다. 이 모델을 고집하면서 그는 네이선을, 철학언설을, 미디어와 컴뮤니케이선의 현재를, 3세계와 마이노리티의 해방을, 그로발리제이선과 넷워크화를, 그리고 문학과 건축, 영화를 명쾨하게 그리고 유연하게 논해 가고 있다. 소비엩연방이나 베를린의 壁과 더불어, 미국 언설계의 시니시즘도 과거로 밀려, 한번은 끝났다고 사료되는 역사의 발전속으로 샘켜지고 있는 상황속에서, 이러한 제임슨의 수비일관된 비평자세가 새로운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60년대이후의 자본주의와 문화의 발전단계를 포스트모더니즘로 보고 이를 分節化했을 경우, 제임슨은 그 異種混㴗성의 모델을 포스트모더니즘건축에서 보고 있으며, 그 때문에, 그는, 문학과 더불어 건축에 관해서 발언하는 기회를 많이 갖어 왔었다. 또한 80년대 후반부터는 영화비평에도 적극적으로 간여해 왔다. 허나 쫍은 의미에서의 美術 그 자체에 관해서는, 그의 언설에서 특별한 비평적공헌이 있었다고는 말하기 곤난하다. 물론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예술을 모더니즘에서 확정하기 위해서 포-.리얼리즘나 폽 아-트나 컨셒추얼. -트에서 언급은 하고 있어나, 이는 상식적인 지식에 기반한 역사적 정리란 것에 지나지 않으며, 파노브스키-나 뷀브르그연구소의 업적을 들어 내는 것도, 역사적 시점의 한 유파를 대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이들 미술사가들의 작업들이 회화분석의 내부에까지 들어 와서 논한 일은 없었다. 이로부터, 혹은 도그마틱한 공산주의로부터의 개입의 기억과도 겹치면서,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비평과 시각예술 사이에 그렇게 생산적이라 말할 수 없는 관계를 귀결시킬는지 모른다. 그러나 알췌셀에 의한 이데올로기-장치의 분석이나 벤야민의 시각미디어론을 처음으로 하고, 여기서부터 더욱 해명해야 할 문제를 품은 세련된 시각성의 의론의 흐름은, 확실히 마르크스주의비평의 전통속에서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임슨 역시 영화비평에서 시각영역에 있는 욕망과 가치와 권력의 결합태를 분석하면서, 이마지나티브한 스크린의 세계와 그것이 투영되는 역사적현실과의 관계를 물을려고 할 때, 그러한 의론의 전통의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그의 비평과 시각예술의 분석과의 생산적인 관계의 가능성은, 이러한 理論展開안에서 찾아 내야 할 것이다.

 

    원래, 역사에 싸나리오를 부여하는 시도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결정론적 인과론에 의해 사후적으로 역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변전하는 상황과 개념의 기능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현재의 사상을 세계시스템의 총체와의 관계속에서 해석하는 틀을 끊임없이 새롭게 설정 해 가는 것을 말한다. 제임슨의 비평적실천의 서늘한 날이 스스로 증명해 왔듯이 그러한 해석에의 의지는 결코 낡은 것이 되지 않는 것이다. -트의 비평에서도 만찬가지이다.

 

   略歷: 1934년 미국 태생. 예일대학 졸업후, 프랑스의 엑스대학, 독일의 뮌헨,벨르린 양대학에 유학하고, -버드대학, 예일대학, 캘리포니아대학교 내지 산디에고대학 및 산타그르즈교에서 가르치다. 현재는 듁대학의 비교문학 교수. 2차대전후의 영어권에서 가장 첨예한 마르크스주의문예비평가로 알려저 있다. [비운다리 2 ] 의 편집위원이나 [비평공간]등의 편집고문을 맡았고, 문학이론뿐만 아니라, 대중문화론, 건축비평, 영화비평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발휘하고 있다.

 

 

    主著: [변증법적비평의 모험] 1980 일본.      [정치적 무의식] 1989 일본.      [사르트르] 1999 일본.    [시간의 종자] 1998 일본.      [뒤에 태어나는 자에게] 1993 일본.      [언어의 감옥] 1988 일본.    The Geopolitical Aesthetic, BFI 1996

Signatures of the Visible, Routledge, 1993       Brecht and Methode, Verso 1998

번호 제목 조회 등록일
1446 no image 자연미학 17
20 2018-04-17
자연미학 17 b 이중의 원상성 미적자연과 미적예술은 많은 점을 공유하고 있어나, 양자는 카테코리-로써 구별된다. 그럼으로 자연에 대한 예술의 미적우위, 혹은 예술에 대한 자연의 미적우위에 대한 물음은, 그 물음 일반이 새로 세워지기전에, 이미 해결된 것 같이 생각됨이 틀림없다. 어떤 방식에서는 그건 그렇다. 이 대치적인 개관은 양자의 동등한 현상으로써 현출시킨다. 예술에 대해서도 혹은 자연에 대해서도 미적우위를 인정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 오래된 물음은, 그것과 더불어 모든 것이 片附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바로 양자의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차이에서, 예술과 자연은, 상호적강화라고 하는 의미에서, 서로가 [원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예술의 수정이며 또한 예술은 자연의 수정이다. 괴-데에 의한 칸트 독해에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정식을 차용할 수가 있다. 자연과 예술은 [의도적으로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그럼에도 미적으로 [서로에 대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이미 제3장에서의 자연과 예술사이의 제약된 비교의 결과였다. 이 결과는 지금이야말로 일반화 될수있는 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 배교의 조건이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이 비교는 지금에서는 예술과 자연에 있어 상상만의 헤당은 아니나, 허나 또한 단지 타의 두개의 차원이 첨가한것도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자연과 예술의 미적통일형식은, 서로에게 手本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은, 그것이 예술에 머물고저 한다면, 자연의 통일성에 도달할 수 없으며, 자연은, 그것이 자연에 머물려 있으야 한다면, 예술의 통일성에 도달할 수 없다. 새로운 비교는, 따라서, 개개의 자연미적인 공간이나 개개의 예술미적인 작품에 관계해서는 안되며, 예술이나 자연 일반에 있어 가지각색의 미적 매혹의 소여에 관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새로운 비교는 그 작품의 다수성에서의 미적예술과 관계하며, 또한 그 시간과 공간의 相違에서 미적자연과 관계한다. 개개의 예술작품은 그렇치 않으련지는 모르나, 허나, 아마도 전체로서의 예술은, 모-든 자연경험의 수정이다. 즉, 우리들이 자연을 전체없는 통일로써 경험하는 경우, 우리들은 자연을 제한없이 미적으로 단지 경험한다는 기억. 자연의 미적통일이 아니고, 모든 미적자연의 가변성과 동시성은, 성공한 예술작품의 산출과 수용의 수정이다. 말하자면, 한번 뿐인 구성의 분절가능성은, 예술적으로 창작된 형식의 과정적 독자적 생의 창조와 지각에 대한 수본이며, 미적예술은, 자연에 있어서도, 또한 미적차원성과 차이의 지각에 대한 원상이다. 자연의 우연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격정은, 아무리 逆의 사태일지라도 예술의 금이 들어가 있는 풍경에 대한 격정에 속해 있다. . 이와 더불어, 최초의 비교명제에서 굳게 보지되었던 자연과 에술과의 논리적인 비대칭은, 규범적대치의 노정에 의해 補足되었다. 그 논리적인 관계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십전한 의미로, 아름다운 자연이 존재할 수 있기에는, 성공한 예술작품에의 관련이 없어서는 안된다. 성공한 예술이 존재할 수 있기에는, 자연과 자연미와의 내용적인 관련은 필연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술과 자연의 이중의 수본성의 명제는, 이 서술적인 언명을 규범적 원칙에 의해 지지한다. 즉, 십전한 의미로 아름다운 자연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성공한 얘술에 대한 감수성이 없어서는 안되며, 성공한 예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연미에 대한 감수성이 없어서는 안된다. 예술이 성공할 수 있기에는, 확실히 자연과의 내용적관련이 없어도 되지만, 자연이 예술속에 어떤 방법으로 [나타나]지 않아도 좋다. 허나 자연의 긍정적인 우연성이나 예술작품에 있어서의 그 반영에 대한 미적인 감지능력은, 어디가지나 예술의 성공의 조건이다. 여기서는 자연에의 에술의 [내용적] 관련 대신, [미적] 관련에 대해 논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명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예술 (혹은 예술지각)은, 그것이, 지접적이이던 간접적이던, 혹은 의식적이던 非의식적이라도, 자연미에 미적관련을 갖을 때만이 성공한다. 죤즈와 같이 그 그림의 주제에 있어 자연에서부터 먼 예술가는, 바로 이점을 증명하고 있다. [나는 어떤 物이 한때 있었던 것으로부터 사라지는 것, 어떤 물이 현재에 있는 어떤 물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되는 것, 어떤 물을 정확히 확인하려는 순간, 그 순간이 사라져 버리는 일, 언제든지 보던지, 말하던지, 그것을 그대로 두던지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또 다른 대목에서는, [눈은 눈짓이 향하는 자연안에서 항상 무엇인가 새로운것을 찾아 낸다. 나의 작품에서도 같은 가능성이 있다]. 이들 모든 것은, 예술과 미적자연은 역사속에서의 이들 서로 다른 입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공통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예술과 자연의 미적차이化 의 역사이다. 이 예술과 자연의 공통의 역사는, 양자의 상호적인 우위를 늦으지면서도 승인했던 역사로써, 즉 양자의 미적동등성의 역사로 기술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 물론 하나의 [발명]이기는 하지만, 그 의미는, 발명가의 지배하에서는 없다는 것, 그 발명가의 그림에 따라 창조되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미적예술은 그렇게 추측되어지는 것이나, 미적예술의 정반대의 것으로써 자연미를 발전시킨 존재를 낳았던 것이다. 많은 예술작품이 간섭적인 것이 되고, 또한 그것들과 더불어 예술이 전체로써 강한 의미에서 다원적인 것이 되어버린 뒤에 가까스러 자연은 미적제차원의 상호작용적과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술의 가변성과 동시성의 발견과 더불어 종류의 다른 자연의 가변성과 동시성의 발견에 이르렸던 것이다. 자연의 미적자율성은, 따라서 예술의 미적자율성의 불가역적인 결과일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간섭적작품의 출현후의 예술이 전체로써 통합적묘사의 이상에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것과 같이, 예술에 의해 파괴된 미적자연의 전체성을, 예술에 의해 다시 수립할 수 없는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때 이래, 역사적으로 예술에 의해 해방되었던 자연미의 공간은, 예술에 의해서는 이미 파괴될 수는 없는 것이다. 허나 이는 잘 알려저 있는 바와 같이 진실이 아니다. 미적예술에 의해 열려진 자연의 자유공간은, 예술에 의해 크게 파괴될 수 있는 것이다. 미적예술에 의해서가 아니고 허나 기술적 [예술]에 의해 장합에 따라서는 미적예술과의 동맹에서, 확실하게 자연의 위헙이 기술적자유처리의 책임이라면, 우리들은 미적자연의 해방 – 자연 [전부]의 미적지각에의 인간의 해방 – 의 그 취분을 횅령해서는 안될 것이다. 미적예술과 기술적예술은, 자연의 소원함이 호감을 갖고 마지한다면, 또한 자연의 우연성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그 거리를 만들어 낸다. 미적자연의 역사는 기술적예술의 역사없이는, 쓰여지지 못할 것이다. 휠씬 강력한 정도에 있어 자연의 제어는, 자연의 보다 자유로운 동생으로써, 이 기술적 [예술]에게는, 물론 처음부터의 것이다. 그 목표가 과연 타의 것인지 어떤지 하는 것은 조금도 확실하지 않다.
1445 no image 자연미학 16
58 2018-04-08
자연미학 16 三, 美的自然과 美的藝術 우리들은 이제서야, 미적자연과 미적예술 사이의 직접적인 대결을 위한 준비가 되었다. 그 포괄적인 비교는 파기할 수 없는 일련의 차이를 인식케한다. 그것에 의해, 예술과 자연과의 미적우위성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최종적인 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두개의 고전적인 반대명제는, 이들 양자가 진실임으로 해서 양자공히 잘못된것이다. 예술은 자연의 원상이며, 또한 자연은 예술의 원상이다. 자연은, 예술적으로 만들어진 형태가 갖는 과정적인 개적생명의 산출과 지각을 위한 手本 이며, 예술은 자연속의 미적차원의 다양성과 차이를 지각하기 위한 原像 이다. a 일곱개의 相違 자연과 미적예술은, 이들 양자가 미적인것의 [통일성현상]이라는 것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의 미적차원부터가 아니라, 여러가지 혹은 모-든 미적제차원에서만이 료해된다. 물론 축제나 도시의 한 지역이나 작업실의 조도품이나 사람으로부터 발산하는 방사력등, 다른 기회에 미적인 관점을 갖는 행복한 뫃임이 이루어진다. 자연과 예술은 따라서 미적인 지각으로 향한 유일의 통일성현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허나 그 개념이 이와 같은 통일성의 개념이외로는 이해하지 못할 그런 미적인 객체인것이다. 자연과 예술에게는 미적인 통일성의 가능성은 구성적이다. 이와 같은 사태에 대해서, 나는 [통일성현상]이라고 하는 표현을, 아래에서 유보하게 될것이다. 이들 [자연과 예술의] 구성적인 공통성을 확인하는 것은, 미적자연과 미적예술과의 구성적인 상위를 記 述하는 기초를 만들어준다. 나는 이 장과 앞의 장에서 전개한 규범적인 개념을, 이 비교고찰의 근저로 삼는다. 나는, [미와 숭고의 변전하는 매혹을 낳는] 자연공간을, 미적에너-지의 통합적인 集束 혹은 간섭적인 집속에 성공하는 예술작품에 대조시킨다. 단순화하여, 나는 강하게 혹은 약하게 포괄적인 예술작품을, 비교의 계속을 위해, 단순하게 이를 [예술]이라고 부르며, 자연미의 포괄적인 공간을 단지 [자연]이라 부른다. 일곱개의 서로 설명해 주는 명제속에서, 나는 그 중요한 상위를 총괄한다. i. 모-든 자연은 예술에의 관계를 포괄하고 있는 바, 허나, 모든 예술이 자연에의 관계를 포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미는 예술작품에의 상상적인 관계없이는 불가능한것이다. 그에 대해, 예술은 자연에의 모-든 내용적인 관계없이도 가능하다 – 죤즈의 깃발 그림과 같이. 예술작품의 개념은, 그것만으로 해서는 자연미의 개념보담은 보다 기초적이다. 예술작품의 개념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논리적인 의미에서만이 미적자연은 미적예술에 대해 파생적이다. 예술은 자연보담 [보다 본질적]이라던가 혹은 예술은 자연에의 방향설정없이도 같이 잘 해 나간다는 것과는, 그기서는 결론지울 수 없다. ii. 자연은 포괄적이며, 예술은 개략적으로 그러하다. 자연미가 항상 강하게 포괄적인 현상인 반면, 예술작품은 대충 강하게 혹은 약하게 포괄적인, 때로는, 배타적인 상상적인 객체이다. 자연에게 강하게 포괄적인인 통일성은 구성적이나, 예술은, 강하게 혹은 약한 통일성에로 체질적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 제한이라 하는 방법에서 확인할 수 있는 소질, 예술이 예술로서의 그 통일성을 탐구함에 있어 원칙적인 한편, 자연공간에 있어 미적총제성을 항상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 현출방식의 다양성안에 있어 자연은 변화하기 쉽고, 모-든 예술보담 휠신 가변적이다. 허나 자연은 그 미적통일성의 형식에 있어 연속적이며, 모-든 예술보담 휠씬 영속적이다. iii. 자연은 제일차적인것이고, 예술은 미적인것의 강화된 통일성현상이다. 자연미는 [제일차적인] 일현상이다. 왜냐하면, 자연미는 항상 포괄적이며 또한 언제든지 예술의 상상력과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공한 예술작품은, [강화된] 통일현상이다. 왜냐하면, 성공한 예술작품은, 미적기능의 통일성안에 있을뿐 아니라 그 통일성의 구성에 반성적으로 관계하고, 더욱 이를 넘어 타의 작품의 구성과도 관계하고 있기때문이다. 자연은 항상 또한 예술과의 대화를 유도하며, 예술작품은 항상 자기 자신과의, 또한 타의 예술작품과의 대화를 – 그리고 충분히 자주 자연과의 대화를 유도한다. iv. 자연에게 작품존재는 우연적인것이나, 예술에게는 그것 [작품존재]는 필연적인것이다. 이는 여기 서 문재가 되고 있는 두나의 위대한 것 사이에 놓여 있는 중심적인 차이이며, 그기서부터 모든 타의 차이가 도출되는 것이다. 보다 강한 이해는 아래와 같을 것이다. 즉 자연공간은 작품을 모르나, 허나 예술객체는 전적으로 작품인것이다. 허나 이는 너무 강한 표현일런지 모른다. 라고 하는 것은, 자연은 단호히 작품을 [알고 있으며], 자연은 인간의 작품일 수 있는 것이며, 다른 한편 예술이 작품을 낳는것과 같이, (건축이나 조각의 경우와 같이) 자유로운 자연에 있어서의 객체로써, 혹은 (정원예술이나 대지예술의 경우와 같이) 자연에서부터 혹은 자연과 더불어 형태화된 작품, 자연생명에 참가한다던지, 혹은 자연의 일부일수도 있는 작품도 존재한다. 자연의 특수한 아름다움은, 허나 자연의 움직임이 예술의 특수한 성공의 그것만이 그기에 들어서는것과 같이, 그러한 작품의 논리에 (만이) 따를뿐 아니라, 또한 그 자연의 움직임이 이와 같은 – 자연이 갖는 우연성과도 어울려지는 – 그러한 논리에 따르는 것 같은 장합에서만 자주 나타난다. 예술적인 작품의 논리는, 미적인 각양 각색의 다룸이나 미적인 제기능의 통합적 혹은 간섭적인 결합안에서 성립한다. 예술가는 자품의 구성에 관련되는 창조적인 가능성을, 작품의 관계안에서 설정한다. 여기에 대해, 자연미는 이러한 논리의 밖에 있는 미적통일성이다. 이 차이는 자연 혹은 예술의 포괄적인 결합에 있어 미적인 가지각색의 매혹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자연에 있어서는, 이것들은 공히 주어지고 있는 것이며, 예술작품에 있어서는 이들은 서로 맺으저 있다. 예를 들면, 자연의 관조는 자유로운 관조이며, 자연의 관조가 바라는 방향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며, 자연의 관조가 지속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조응적파악이나 상상적파악에로 교체할 필요가 없다. 이에 대해, 예술작품의 관조는, 결합된 관조이다. 그것은 작품의 현상상의 구성과 결합하고 있으며, 그 작품의 감성적에너지의 지각 – 작품의 쌓인 에너지-의 기작 – 으로써, 그 작품의 관조가 상상적인 혹은 조응적인 파악에서 생기고, 또한 그기에 다시 되돌아 갈때는, 스스로 단지 보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음악과 같이 자연은 연주할 수가 없다.) 작품특성의 기준에 관해, 자연과 예술에 있어서의 미적쟝르의 의미 역시 구별된다. 많은 예술작품이 그 통상의 쟝르의 경계를 넘으서려고 하는 것은, 그것들의 트질이며, 상상적자연이 그 쟝르의 차이를 넘는 곳에 원리적으로 서려고 하는 것은, 상상적자연의 특질이다. (여하한 음악도 자연의 형태의 법칙을 자연과 같이 연주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v. 자연의 통일성은 우연적이며, 예술의 통일성은 구조적이다. 이는 작품특성에 관한 자연과 예 술의 서로 다른 입장의 이면이다. 자연과 예술은, 미적과정의 이자택일적인 형식이다. 자연공간에서의 미적제차원의 [상호작용]은, 예술의 구조에서의 그 [통합] 혹은 [간섭]과는,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별개의 것이다. 자연의 통일성은 자연의 시간, 감각안에 있는 것이며, 이것에 대해 예술작품의 통일성은, 예술작품의 감각. 시간속에 있다. 자연미가 그 관찰의 기회에서 – 시간에 대한 의미소원적이며 의미부수적이며 생생하게 살아 있는 화상적인 현출의 변화에 매혹을 나타냄이, 자연미의 통일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예술작품은 하나 혹은 몇 개의 미적작용을 계산해서 만들어 낸 것으로, 그 인공적인 구성의 힘에 의해, 그것은 통합적 혹은 간섭적인, 혹은 포괄적 혹은 배타적인 상상력에 뛰어난 감각을 갖는 구조물이다. 예술작품의 이러한 감각은, - 예술작품은 조응과 관조에 의해 통합적으로 받침되고, 또는 조응과 관조에 의해 간섭적으로 방향을 바뀌고 중단되고 건너뛰게 되는 것이며, 파쇠되는 것으로 – 예술내부적인 수단의 과정에 있어 부여되며, 이 감각은, 작풒의 (연속적 혹은 불연속적인) 감각.시간속으로 부여되는 것이나, 작품지각의 시간은 이 작품의 감각. 시간에 관심을 갖는다. – 투영의 사례는 이 분석에 확증을 제공한다. 하나의 포함적인 예술작품이, 여하히 그것이 통합적 혹은 간섭적인 것이라 해도, 그것이 자연에 투사될 때 그 상상적인 특성만 남게 된다. 자연의 일시적인 공존에 있어, 예술작품의 구조상의 공존은, 미적인 구성요소의 자유로운 상호작용에로 해소된다. 그 작품전체는 자연전부에 전사가능으로 되지 않는다 .나는, 죳트의 하늘과 같은 가상에서 하나의 야공을 볼 때, 나의 관조적인 지각을 이끄는 이 하늘의 외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기에 머물고, 나에게 나의 생활상황의 내적인 표출이 되어 있는 이 하늘은 그기에 머물고 있다. 자연의 예술적가상과 더불어, 그 자연의 전라나한 출현도 그 자연의 가치있는 존재자체도 하나의 가상이 되는 일은 없다. 자연전부가 예술의 투영은 아닌것이다. vi. 예술은 료해되기를 바라지만, 자연은 료해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작품의 료해란, 그 구성내지 그 계산의 료해이다. 구성도 계산도 주어저 있지 않는 경우, 혹은 구성과 계산이 미의 본질적인 것이 아닌 경우, 그 지각수행은 료해수행일수 조차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적인 자연지각은, 료해의 하나의 형식이기는 하나, - 허나 자연의 한 형식은 아니다. 료해는 여기서는 우선, 고유의 생활상황으로 향해저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예술의 상상적인 가능성으로 향하고 있다. 양쪽의 차원에서 자연미는 인간적 감각과 그 료해를 열고 또 변화시킨다. 예술의 지각에서 수행되는 료해는, 이것에 대해 예술로써의 그 구성의 료해이다. 허나 이 료해역시 언젠가는 관조적으로 예리하게 다듬어져 또한 간섭적으로 뿌셔진 작품이 문제다 되는 한 상상적이며 조응적인 감각료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제구성을 료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감각의 제과정 이외, 단일한 혹은 거듭 쌓인 감각을 갖는 하나의 과정을 료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작품의 미적논리를 료해하는 것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실제의 논리는 자연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임으로, 여기서는 이 료해도 존재할 수 없다. vii. 자연은 하나의 생명연관이며, 예술은 생명의 제연관을 넘어선 곳에서 생명의 제연관안에 존재 한다. 자연 또한 아무리 미적관계안에서 현실성의 부호가 된다고 하드래도, 자연은 생활의 독립된 연역의 요소에 머문다. 예술 또한 여하이 생활현실의 일부분이 된다고 하드래도, 예술은 생활의 현실성이 그것에 닿아서 굴절되는 묘체로 머문다. 자연미는 생활세계적인 현실성의 특별한 영역이며, 예술은 특별한 나타남으로 해서 이 생활세계젹인 현실성안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에의 양자의 입장에서 밝혀 진다. 미적관찰의 대상이 되는 자연은 – 모든 예술과 같이 – 특히 미적입장에서 성립하며, 지속하고, 그 료해 혹은 해석의 역사안에서만 살아 남는다. 미적자연 역시 하나의 역사적 관계이고, 허나 한묶음으로 한 역사적객체에의 관계는 아니다. 이에 대해서, 예술작품은,, 하나의 역사적 관계에 있어서의 역사적객체이다. 역사적 혹은 전기적 조응의 관점에서, 확실하게 미적자연도 역사의 장소가 되지만, 허나 미적자연의 독립성과 가변성은 – 많던 적던 자주적인 생활연관으로써의 그 존재는 – 자연을 역사에서 항상 멀리하게 만들고ㅡ 해석에서 생기고 또한 해석을 위해 지속하는 생활에서 자연을 경계 지워준다. 혹시 자연과 예술과의 보완관계와 대립이, 여기서와 같이 명료해지는 곳은 없다. 우리들은 자연안에서 항상 또한 역사의 밖에 있는 현실성을 탐구하고, 예술에서는 항상 또한 현실성 밖에 있는 역사를 탐구한다.
1444 no image 자연미하 15
94 2018-03-29
지연미학 15 d 방법에 대한 付言 허지만 역시 통합적예술에 대한 간섭적예술의 主題的인 나의 優遇는, 규범적이유에서도 방법론적이유에서도 의심스려운 것으로 생각될 수 있을는지 모른다. 허지만, 과거 150년을 제외한다면, 예술작품의 압도적 다수는 간섭적이 아니라 통합적으로 작성되어젔던 것일까. 말하자면, 예술작품의 통합적통일성을, 그 패쇄성의 해소에서 출발하여 기술하는 것이 과연 잘 되어 갈수 있을는지. 이러한 疑念 은 정반대의 평가에 기인하고 있다. 통합적예술에 대한 간섭적예술의 원리적우우는, 확실히 규범적으로는 의심스려울것이다. 허나 방법론적으로는 그렇치 않다. 반드시 개념적제관계는 역사적관계를 묘사하지 않는다. 예술작품의 미적통일성이 먼저 구체적으로 나타났던 것은 간섭적작품에서 였음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통합적예술작풉의 개념은, 간섭적예술작품의 개념에 대한 반대개념이며, 미적영역의 예술적 내지 예술이론적인 탈세분화가 실행된 후에 처음으로, 이 반대개념은 엄밀히 정식화되어지는 것이다. 간섭적예술은, 역사적으로 미적통합에 대한 바로 반대운동으로써 성립했던 것이며, 어떤 일정한 개념이 – 또한, 죳트의 사례가 보여주는 바 성과에 대한 높혀진 감정이 – 강력한 미적인 동일성의 제형식부터의 돌발의 도상에서 겨우 이 통합에 부여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또한 이는 죤즈와 죳트나 로스코의 대치를 명확히 해주는 것이나, 강력한 동일성모델의 현존이 없는 이 돌발은 이루어지지도 료해되지도 않는다. 예술은 한쪽이던가 혹은 다른쪽이 아니다. 간겁적작품의 운명은 통합적작품이라고 하는 적대자에 묶여 있다. 하여, 간섭적인 예술과 예술지각은 너무 간섭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기에는 간섭적예술과 통합적예술 사이에 숨어 있는 협정이 줄곧 존재해 온다. 통합적예술 --- [미적동일성]의 예술 --- 은, 간섭적예술이 그 허벅지나 반대쪽으로 오자 마자 미적제차원의 불분리성의 상태가 아니고, 그것은 성립해져 있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험된 재통합의 상태가 된다. 간섭적예술이 우선 전통적예술의 전체성 파토스에 대한 응답이라면, 근대에 놓여 있어 통합적예술은 전체없는 통일의 작품형식에 대한 응답이 된다. 양쪽 모두 그 반대운동이 그 경향에 대한 특이한 것을 인식시켜주는데, 그 경향에 대해 반대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죤즈가 죳트에 대해 배우는 진실은, 재도 다시 한쪽으로 돌아 와서, 로스코에게 죤즈를 인식키고 또한 한토케에 벨른하르트를 인식시킨다. 즉 말하자면, 예술작품의 통일성은, 통일성의 타의 제형식과의 차이에서 처음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것이 예술작품의 통일성이라는 것이다. 이 통알성의 하나의 개념밖에 갖지 못하는 자는, 여하한 통일성의 개념도 갖지 못하는 자일것이다. 우리들의 통합적과 간섭적 사이의 구별, 더욱이 배타적과 포함적예술형식이나 작품형식과의 사이의 구별은, 역사적 내지 비판적으로도 통일성의 하나의 류형에 의무지울 수 없는 예술의 다원론적상태를 고려하는 시도였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또한 이미, 예술이론적의념을 조장하는 것 같은 더욱이 심각한 의의는 약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 異議 는 미적자연을 다루는 것에도 관련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의 세분화된 취급은, 자연미의 분석의 중요한 현향된 일변성을 의도하지 않는체 밝혀내는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예술에 앞장서서 승인했던 것, 즉, 예술은 전체의 안에서나, 전체의 밖에서도 미적통일성을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왜 자연지각에서는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상호작용적]인 통일형성과 [통합적]인 통일형성 사이의 공존은, 자연에 있어서도 존재할 수 없는것일까. [十全한] 미적자연경험은 자연풀경의 전체성없는 공간에서만 존재한다고 하는 주장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여기서도 방법론적관점이 상기 되야 할 것이다. 예술에 대한 두번쩨 補說의 방법은 본론고 전체의 방법을 대표하고 있다. 미적분열이 일어난 이후에는 모든 통합형식은 이 가능성으로부터 료해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통합적인 것을, 간섭적인것에서부터, 또는 통합적인것에의 간섭적인 것의 거리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연은 미적으로 전체로써 경험된다는 것을, 자연은 그렇게 되었고, 또한 그렇게 될것이라는 것을, 나는 자연의 형이상학이나 자연의 이데올로기에 관한 대목에서 항상 강조해 왔었다. 이 경험의 [불필요성]의 기술은 항상 또한 --- 그럼에도 불구하고 --- 지각되는 자연의 가능성에 관해서의 병행기술이 었었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방법론적인 것이었다. 나의 기술의 다른 쪽인 것으로 규범적인 것은, 실제로는, 전체론적형이상학적자연경험에 대해서, 반전체론적 --- 자연경험에 미적우위를 부여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있었다. 예술의 경우에, 통합적형식 혹은 간섭적형식의 원리적우위에 대한 물음에서는, 나는 이론적 放棄를 지지하지만, 그 예술의 장합과는 별도로, 나는 자연에 대해서는, 자연의 전체성없는 통일의 지각만이, 그 자유이며 순진한 제한없는 미적기각이라고 하는 명제를 응호하였다. 그럼에도 확실하게 나는 미적자연을 미적예술과는 별도로 논했다. 그러나 이점에 의념을 갖는 사람은, 자연미학이던 예술의 미학이던, 그 미학의 큰 罪를 범하고 있다. 말하자면, 자연과 예술을 무사료하게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1443 no image 자연미학 14
74 2018-03-25
자연미학 14 속 c 간섭적예술 대 통합적예술 소위 전통적예술을 일관하여 통합적(혹은 [아름다운]) 것으로, 또한 근대적예술을 그 시작은 언제라도 좋치만, 일괄하여 간섭적(혹은 [숭고한])얘슐로 분류한다는 것은, 지금은 대단히 매혹적인 것일런지는 모른다. 허나 이것만큼 틀린 것이 없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근대적예술의 중요한 부분은 바로 통합적미적형식의 재건을 다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쟈스파.죤즈가 50년대에 깃발이나 다-쯔의 표적이나 수자를 그리고 있을 때, 마-크.로스코는 화상의 절대적인 미적통일성을 부활하려고 하는 역의 길을 걷고 있을 때, 베-타.한도께는 시적유화의 새로운 관용어법을 찾아 내고자 한다. 등등. 근대예술은 분열하고 있다. 그것은 간섭적작품과 마찬가지로 통합적작품도 알고 있다. 포괄적조작의 충일과 나란히, 그것은 항상 새롭게 비타적환원을 시도한다. 물론 그것은 합일에 대한 분열의 승리이다. 근대예술이란 단지, 그것이 매우 급진적작품이라던가 또는 그럴런지도 모른다라는 것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닐것이다. 통일없는 전체, 근대예술은 그렇게 되려고 하는 것이며, 또한 내가 생각키로, 근대예술은 그 이외 아무것도 아닐것이다. 근대예술은 그것들의 작품의 일치하지 못하는 다양성에서, 세계의 통일적인 개시나 그 통일속에 구속되는 세계의 개시의 이념에 대해서 단념하는 것이다.
1442 no image 자연미학 13
62 2018-03-24
자연미학 13 속 c 간섭적예술 대 통합적예술 [간섭적] 예술의 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관찰은, 단지 회화에만 헤당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 모-든 예술에 에 대해서도 적용가능 할것이다. 彫刻 에 관해서는 우리들은 죳트의 례가 있고, 건축에 관해서는 貧相 한 렛텔인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충분할는지 모른다. 음악에 있어서는 아마도 게이지나 가겔뿐 아니라 이미 마-라의 이름을 들어야 할것이고, 무용에 있어서는 마-스.커닝감와 비나. 바우슈의 안무가 우선 거론될 수 있는 사례일 것이다. 70년대의 연출가의 연극은 매우 고전적인 희극을 바탕하는 간섭적상연을 행했던 것이며, 또한 고달나 뤼뷧트가 없는 유-럽란 무엇일 것인가. 사례가 다수 있다고 하는 것은 개개의 예술의 구조안에는 없어나 근대예술 그 자신의 구조에는 있는 것이다. 허나 배타적문학의 사례는, 이 진단에는 – 진단의 이 시사에는 – 적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미적 제차원의 간섭은, 여기서는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타적으로 상상적인 문학은, 간섭적예술의 시대에서만 성립했었다는 것, 그리고 이 문학은 [미적차이의 정황]을 이따금 정식화하여 – 여하간 베겟트, 보르헤스, 카프카와 같은 작가들이 그 담보자들이라 하는 직관은 거부할 수가 없다. 이 직관을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 통합적통일성과 분단적통일성 사이의 차이가, 예술의 상상적 著술을 위해 再度 정식화하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개개의 장합에 그 사정이 어떤것이었나 라고 하는 것은, 제예술의 관계에 관한 역사적 내지 체계적으로 의론하는 탐구의 대상일것이나, 그런 탐구는 이 장에서는 상응하지 못한다. 허나 몇가지 귀결은 확실해 지고 있다. 통합적이기도 하는 포괄적예술은 그 작품질서의 구상에 있어, 동시에 세계질서의 재현 혹은 구상이다. 그 의미는 결국은 작품으로서 이들의 상위에 있는 질서의 례해, 현실화 혹은 祈禱에 있는 것이다. 그기에 대해서 간섭외적인 구조로써 그 구성을 제출한다. 이 작품의 통일성은 모든 예술외적인 질서를 넘어선 곳에 있는 질서로서 이해될런지도 모른다. 간접적 작품이란 다른 말로 한다면, 이미 세계의 해명된 해석의 대표자나 대리인이 아니고 세계의 실험적해석의 대리인 – 허나 대표자는 아니다 – 이다. 통합적예술은, 더욱 다름과 같이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이나, 그 예술에 의해 창작되던가 갱신되는 사물의 조망에의 확신을 필요로 하며, 간섭적예술은, 사정에 따라 확신을 필요로 한다. 즉 자기자신과 세계에 관해서 성립되고 있는 모든 해석에 대한 주관의 有力 혹은 무력에의 확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1441 no image 자연미학 12
83 2018-03-21
자연미학 12 c 干涉的藝術 對 統合的藝術 이 규정이 조형예술에서 뿐 아니라 모든 예술에 적합한 것으로 가정하드라도, 그럼에도 이 규정은, 그것이 보다 세분화된 문맥에 도입될 경우에, 처음으로 충분한 것이 된다. 예술작품의 통일성에 대한 최초의 두 명제는, - 새로운 최근의 예술의 사례에 눈을 돌림으로써 거이 정식화되었던바 – 그 새로운 예술의 역사적 자리매김 자체에 대해서는 그 규정자신으로서는 맹목일것이다. 우리들은 예술작품의 통일성에 관해서, 예술의 역사를 잊으서는 안된다. 나의 제3의 명제는, 그럼으로, 미적으로 포괄적인 예술의 두나의 형식을 구별하는 것을 제안한다. 즉 [통합적]인 예술과 [간섭적]인 예술이다. 예술의 객체는 본질적으로 포괄적미적객체라고 하는 것이 옳바르다면, 이들은 예술적인 통일성의 두 근본형식이다. 통합적인 예술작품은, 3개의 미적기능을, 그것들이 구별할 수 없기 까지 일치시켜, 미적동일성의 상황을 정식화한다. 간섭적인 예술직픔은 그 미적지각의 제형식간의 융합하지 못하는 과정을 들어 내어 미적차이의 상황을 정식화한다. 통합적인 예술작품의 통일성은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는데, 간섭적인 작품의 통일성은 전체가 없는 통일성이다. 바도바의 스크로뷔에니-예배당의 죳트의 프레스코화는, 의심할 여지 없는 포괄적인 예술작품이다. 그리스도교救濟史 에서의 일련의 화상의 마무리와 배치에 있어, 또는 그 장식적이며 공간충족적인 가장자리와 우의적해석에서, 그것은 조응적미적지각에서도 상상적미적지각에서도 관조적미적지각까지를 불려 낸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시간동일적으로 또한 같은 바란스로 불려 낼뿐 아니라, 그 위에, 같은 의미로 이야기한다. 지각의 한쪽의 형식으로 제한없이 실행하는 것은, 여기서는 이미 지각의 다른 형식을 제한없이 실행하는 것이다. 이 예배당의 프레스고화는 단지 포괄적일 뿐 아니라, 그것은 그 위에 통합적이기도 하다. 이들 화상은 하나의 특별한 공간을 구성하고, 그 형식적인 용도는 확실하게 형태를 부여하고 있는 바, 그것은 그것들이 하나의 종교적인 세계관을 정식화하고 극화하는 것, 따라서 상상적인 현재화시키는 것, 또한 이때 형과 색채와 움직임의 수작들을 무대에 올림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 수작은 다시 다른 두개의 분절화방식을 맡게 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다른 쪽으로 하여 한쪽을 이루며, 또한, 한쪽에 의해 다른 쪽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배당의 반원통의 볼트의 성공은 전공간을 덮는 선명한 청색으로 이루어 지고 있으며, 그 靑은 각각의 사건들의 그림들을 이어 가며, 죳트가 인물의 행상을 돋보이게 하는 수단으로써 사용한 적갈색의 색채와 더불어, 묘사되는 사건들을 위한 화상공간을 여는 것이나, 그 청은 한편 관조자를 화면에서 떨어지게 하여, 다른 한쪽에서는 관조작쪽으로 화면을 땅긴다. 이 두개의 색채와 같이, 다른 화상재료도 그 자체로서는 결코 감각적 에너지-로서 성립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개개의 화상이야기의 전승되고 있는 의미에, 각각의 화상이 그 색채와 형태의 생명안에서만이 갖는 명료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內面像的 의미는 다른 편에서는 예배당을 하나의 장소로 보며, 말하자면, 그기서는 묘출되는 광경은 단지 묘출이 아니고, 그 자신지평에 풍요로운 현실이 되는 것 같은 하나의 장소를 이룬다. 그르저 있는 천국의 청을 관조적으로 바라 본다는 것은, 여기서는, 천국의 영역을 상상적으로 마음속에 명기하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다른 한쪽에서 화상적으로 현실화된 의미연관과의 조응안에서 존재하는 것이 된다. 미적지각빙식의 각각은, 여기애서 다른 것을 품고 다른 쪽의 것을 밀어 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리스도교적 세계의 가시적인 활성화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물론, 아래와 같은 것이다. 바야흐로, 이 동시발생의 파기에서 에술작품의 통일성을 획득하는 에술작품과의 경험을 갖는 자에게 만, 이 동시발생의 힘을 그러한 것으로 해서 경험할 수 가 있으며, 또한 동시발생으로써의 그 힘을 분석할 수가 있는 것이다. 간섭적작품을 선호하는 시대만이, 보다 뒤의 예술에 있어 그 전체적 질서에서 돌발하기에 이르는 그 화상긴장을, 이미 죳트의 회화에서 찾아 내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초기근대적인 화상발명에 맞춘 때에 이르러, 통합적인 구성의 지각일것이다. 죳트를 죤즈에 연결하는 예술적세계는, 그들의 작품 사이에 놓여 있는 세계에 대한 지식만으로 도달할 수가 있다. 죤즈의 깃발 그림과 그것에 속하는 일련의 작품은, 어디까지나 간섭적작품이다. 하나의 미적직관은 여기서는 다른 미적직관을 수반하지 않고, 각각의 미적직관은 따로 던져짐으로 해서 다른 미적직관을 강화하는데 공헌한다. 우리들의 깃발 그림의 통일성은 하나의 의미전체의 정식화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중단에 의해 추진되는 하나의 의미과정의 전개안에 있는 것이며, 그 의미과정은 구속력이 있는 하나의 세계관의 정식화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으로써의 세계연관의 순간적현재화에만 도달하는 것이다.
1440 no image 자연미학 11
83 2018-03-16
1439 no image 자연미학 10
102 2018-03-13
자연미학 10 속 b 예술의 규범적개념 여기까지는 주로, 화상의 상상적 존재방식, 즉 화상의 상황분절적 존재방식에 대한 것의 해석을 언급했다. 이 작품 여시, 그것에 의해 만들어진 지적상황의 묘사이다. 그것은 疑裝 된 상황의 분절화가 아니고, 분절화된 상황의 허구인것이다. 우리들은 어느 한 객체, 예술작품과 만나는데, 그것은 그 객체와 우리들과의 만남의 인지에로 우리들을 이끌어 가는 것이며, 그것은 그 객체가 그기서 출발하는 생활세계의 도상기호를, 복잡한 미적상황의 예술적기호로 변화시키며, 그 상황에서 우리들은 흔해빠진 것이나 숭고한 것의 동시적인 긍정에로 재촉받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이러한 [제1의] 개념은 물론 예술작품의 미적통일성에 지나지 않는다. 이 통일성은 그 처리방법의 총체에 있어, 확립되는 표현연관 혹은 제시연관에서 성립한다. 그것은 작품내의 미적의미의 통일성이다. 그럼으로서 이 상상적통일성에 의해, 제1의 명제는 이를 굳건하게 보지하는데, 예술작품은 타의 종류의 모-든 미적인 제객체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이란 순수한 관조의 객체와 같은, 감각적으로 분절된 객체인것이다. 예술작품이란, 단지 조응의 객체와 같은, 살아 있는 세계의 지평의 내측에 있어, 만들어지는 강조. 두드로지는 형태. 장식된 몸짓. 의미있는 형식은 결코 아니다. 예술작품이란 항상 세계의 의미형성적이며 그로 인하여 의의깊은 제지평을 직관시키는 표현풍부한 묘개물이다. 그 이름에 값하는 모든 예술은 세계로 향하는 통로의 생동적인 묘사를 성취함으로 해서 세계에의 통로를 만드는 것이다. 허나 대개의 예술작품의 예술작품으로써의 자기동일성은, 이 상상적통일성에서는 나타나오지 않는다. 만일 그 깃발의 그림이 뉴-욕근대미술관의 중립적 공간이 아니고, 안전의 나의 방에 직접으로, 자연에의 눈짓를 대신하여,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서는 단순히 상상적인 객체뿐 아니라, 같은 조응적인 객체가 문제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이내 밝혀 지는 것이다. 나의 방에 걸려 있는 그 그림은, 던슌히 그것이 묘사하고 있는 역설적인 지각상황을 제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방 전체의 분위기를 바뀌 놓는다. 허나 그 그림은 이 사실을 단순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그림의 표면은 그 장식적 윈형을 갖고 있으며, 혹은 또한 상징적으로 나의 동경의 국토를 가르키고 있는바, 만일 진짜의 기를 나의 벽에 걸수 있다면, 그 기 역시 이 이양의 특질을 갖고 있게 될것이다. 오히려, 이 그림은 그 상상적인 잠세력을 통해 나에 어울리는 의미있는 공간을 만들고 있다. 이 조형적인 역할중에, 그 그림은, 그 상상적인 표현으로는 다시 듸돌아 갈 수 업슨 어떤 고유한, 제2의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공간에 있어서의 객체로써, 이 그림은 심히 세속적인 회화의 목인이 된다. 그것은 이 그림이 그 그림을 여기에 걸어 놓은 나를, 어느 국토의 애국자로 제1의적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이란 국토의 애국자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 깃발 --- 회화의 조응적인 의미란, 근대적 --- 허나 다시 근대미국적인 유-럽적 전통에서 벗어난 --- 예술의 이콘 바로 그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회화의 조응적 또는 상상적인 힘은, 그 회화가 그 이외에, 최초의 해석에 있어 --- 회화의 [흔들리는 화상적 움직임]에 대한 지적에서 --- 이미 언급한바 있는 회화에 있어 존중되어야할 모-든 의미로부터 더욱 우리들의 눈을 가리는 관조적인 마술을 갖지 않는다면 이내 고갈되어 버릴 것이다. 이 마술의 힘에 의해 색채나 형태의 동적인 관계는, 관습적인 상징에 있어 그것들의 정해진 위치에서 밖으로 벗어 나올뿐 아니라, 예술적수단의 상상적이며 조응적인 활동으로부터도 밖으로 삐저 나온다. 이 이중의 화상감각은 순수한 화상감각성에로 해소된다. 형식연관적인 반사성, 미적도덕, 화상의 실존적몸짓은 사라진다. 그기서는 감각적인 물질적제관계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감각적이해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허나 또한 작품의 관례적인 의미나 제시적의미, 수행적인 의미는 다음의 순간에서는 이내 다시 그기에 있게 된다. 바로 그것은, 관조적인 화상현출의 순간을 그만큼 자극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동시적의미기능에서의 이탈인것이다. 바로 그것은 다중의 화상감각에 고갈되지 않는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 즉 그 화상감각은, 돌연한 부재의 제상태에서 항상 새롭게 성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상상적인 화상파악이나 조응적인 화상파악을 항상 새롭게 관조적인 례외적상태로 치겨 세우는 것이다. 즉 화상파악이라는 것은 미적감각의 소멸에 있어, 물질과 맺으저 있는 이 감각의 개체성을 확인하고, 또한 동시에 발견적인 감각형성에의 화상파악의 자유를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이 삼중의 미적분절화의 이 과정을 작품에로 착정하는 것은, 우리들의 화상의 본래적인 예술에 속한다. 또한 대우 잘 알려어 있는 평탄한 도형기호에서 이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은 예술가 쟈스파. 죤즈의 특수성에 속한다.
1438 no image 자연미학 9
96 2018-03-10
자연미학 9 b 예술의 規範的槪念 예술의 논리를 위한 이 단장은 매우 불안전한 것이나 이는 예술의 통일성에 관한 두가지의 명제의 정식화를 가능케하며 이들을 美的藝術과 美的自然과의 비교를 위한 기반을 준비하는 것이다. 몇 개의 예술간의 질적인 상위의 기술자체는 혹종의 평가를 품는 것은 아니였으나, --- [포함적] 예술은 [배타적] 예술보담은 그 자체로 나쁘다거나 좋다고 하는 것은 아니나 --- 그것에서 결론내려지는 예술작품의 규정에는 규범적인 내실이 있다. 물론 이 평가는 어느것이 좋은 작품인가 어느것이 나쁜 작품인가하는 것에는 간여치 않으며, 성공을 위한 무엇인가 일반적인기준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 그런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인것이다. 예술의 규범적개념은 의미깊은 방식으로, 예술의 진정한(자연에 의해서나 타의 인공물에 의해서도 치환이 될 수 없는)가능성에 비추워 예술로 볼 수 있는 것을 확정한다. 미학은 이전부터 그렇게 해 왔던것이며 미학은 예술로 보여지는 것을 확정한다. 미학은 이전부터 그렇게 해 왔던 것이며, 미학은 예술에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것이 예술임으로 해서만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몇 개의 예술을 통한 걸음에서 예술작품의 통일성이란 미적인 통일성이다라고 하는 트리비얼한 추측이, 그렇게 트리비얼한것이 아니란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 원리는 그것을 3개의 미적차원의 분리가능성의 의식에서 읽으 내려 할 때, 트리비얼(trivial)한 것이 아니되어 버린다. 다음의 두 명제는 여태까지의 고찰의 입장을 요약하는 것이다. 제1의 명제는 말한다, 예술작품은 그것이 상상적구축물인 이상 특유한 관조적 혹은 조응적인 특질을 가질 수가 있다. [예술의 상상에 대한 보설]에서 그 개요가 설명된 예술개념은,, 그리고 이것만이, 예술의 기본적 혹은 제1의 개념을 정식화한다.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은 미적인 객체만을 예술작품으로 부를것을 제안한다. 즉, 세계형성적인 관점의 새로운 표현(투영적사용의 경우와 같이)과 탁이 보일뿐 아니라, 실제로 그런 미적인 책체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제2의 명제는 말한다, 그 작품을 의미지평의 제시로 보는 이 제1의 예술개념은, 분명히 예술작품의 자연적인 개념을 정식화하지만, 그러나 충분한 개념을 정식화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배타적인 --- 즉 줄곧 상상적인 --- 예술작품의 극단의 경우에 대해, 상상적인 구축물로써 본질적인 관조적 더욱 혹은 관조적인 객체이기도 한다. 포함적인 예술작품의 파라다임적인 케이스가 대립한다. 예술이론의 중심개념은 포함적인 예술작품의 개념일것이다. 나는 兩命題를, 더욱 다른 작품으로 눈을 돌리면서 설명하고자 하나, 그 작품은 일례로 단지 다루기 쉬운정도로 단순하기도 하며 또한 복잡하기도 하는 것이다. (난해한 예술이 난해하다는 것은 하나의 신화이다)라고 도널드.쟛드는 말한일이 있다. 나는 자스프.죤즈의 유명한 씨-리즈중의 하나의 회화를 선택하는데, 이 씨-리즘는 출발점으로써 합중국의 국기를 그 모티브로 삼고있다. 노회의 도구로 유화의 도구로 그려진 1955년의 이 그림은, 단지 [깃발]이라 제하여, 종106cm 횡152cm의 크기로, 액선페인팅와 같이 움직임이 있는 필치와 또 신문지의 코-라-쥬상의 부분적으로 그려진 필치안에서, 미국합중국기의 원형을 나타내고 있다. 다른 바리에이선의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깃발의 모티브라 전화면을 덮고 있어, [옳바른] 색이 견지되고 있으며, 일곱의 적색의 무늬와 여섯개의 백색의 무늬에 쌓여 있어, 좌상의 청색의 장방형안에 다섯개의 각을 갖고 있는 흰별이 그려저 있다. 많은 해서자가 확인한바와 같이 이것은 기의 그림이 아니라 미국국기의 원형에 따른 화면적인 객체이다. 이것은, 허나, 단지 그것이 이것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는 것 뿐 아니라,그 원형에 따라서 또한 그 원형의 화상적현출에 입각하여 무엇이던지 가르키고 있는 것이다. 미국국기의 정서적으로 확보되어 있는 의미가 보통 갖고 있는 것이, 핵채와 선으로 이루어진 미묘한 조합으로 돌연히 나타난다. 동시에 화상의 회화적 마무리에는, 그 원본의 스트레오타잎적 외견을, 어떤 독특한 작품으로 만들고 있으며, 반투명의 신문지.거칠게 쪼각나 버릴 색채포지. 에술가의 손에 의한 작업을 일부는 공격적으로 나타내며, 일부는 아이로니컬하게 인용하는 소규모의 앙포르멜한 필치와 같은 것은, 그 화상에 듸바꿈이 없게 하는, 독적인 모습을 내게 한다. 그로인하여, 이 화상은, 그 대량으로 복사되어 있는 幼形의 흔한 도상학에서부터 두번쩨로 그 걸음을 내 딛고 있다. 잘 알려진 의미의 표층하와 기층위에, 예술적인 화상연관의 고정적자기동일성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색채는 색채에 대항하고, 선은 선에, 선과 면에 색채가 형에 대항하고, 후경과 전경이 서로 규형을 맞추고 있다. 지각에 박혀있는 화상유형은, 불안한 회화적움직임의 우연의 일순으로 보인다. 경직한 시각적도식으로부터 출발한 죤즈는 회화의 순수한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다. 화상의 역동성에서 출발하여 죤즈는 회화의 순수한 움직임을 낱내고 있다. 화상의 역동성에서 출발하여 죤즈는 시각경험의 일상적도식의 힘을 일상성에 관한 개몽인 동시 더욱 근대회화의 모든 순수주의적인 야심을 능가하려는 시도이다. 이 순수주의는 그것이 반응하는 흔한 현실성과 관계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형이상학이 결여된 순수주의이며, 또한 이데올로기-없는 순수주의이다. 이 예술은 우리들이 본다고 하는 것의 열여저 있는 형식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보여지는가를 보여준다 ---- 또한 동시에 이 여술은 그것이 예술로써, 지각의 모-든 자동화된 유형으로부터 구별되는 점을 보여준다. 예술의 정반대에 있어, 그것은 예술의 최후적인 가능성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1437 no image 자연미학 8
105 2018-03-04
자연미학 8 속 - a 몇가지 예술 주지한바와 같이 발레리-는 음악을 시의 수본으로 까지 격상시켰다. 따라서, 헤-겔이 그것 때문에, 문예를 승자의 영관을 부여한바의, 문예가 진실로 정신적인 --- 즉 배타적인 상상적인 --- 예술형식이라고 하는 것 까지는 아직 결착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많은 시가 그 의미를 그 의미로부터 날아 오를 수 있는 음속에 울려퍼진다. 그와 같이, 한토게는 [시인의 눈매, 돌연의 부지로써의 그의 발견방식, 또는 상, 색체, 박자에의 이행]을 기술한다. 그 음향적인 질에 의해 문학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그 배타적인 신분을 넘어 설수 있울 뿐 아니다. 서정시에 대해서는 시각시. 말라루메의 [교자일축]이나, 오그타비오. 바스의 도형적으로 전개하는 송가, 혹은 로르프.뒤-타.브르그만의, 메모, 회화의 단편, 유행가, 시찰, 악태, 인용에서 흐르려지면서 조립된 시가 상기될것이다. 산문작품이나 장편소설도, 약하게 혹은 강하게, 포함적성질을 이따금 보지하고 있으며, 그 포함적성질은 구승에 의한 이야기의 전통에서의 분리에 의해, 단번에 배제되어 있다. 예를 들면, 죠이스의 저술가로써의 강령은, 근대의 포함적문학의 강령이며, [휜가네스.웨이크]는 소리와 말을 위한 종교적움악이기도 하다. 상상의 노마네스크적 초과라고 하는 통상적 사태는, 물론 음과 의미 혹은 묘화와 문학의 혼합이 아니고, 이야기한다고 하는 사태에의 독자의 조응적간여이다. 분명히, 여기서는, 상상적독서의 지속을 위해만 성립시키는 허구적인 조응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 객체적조응에 대신하여 행위적조응이라고 할 수 있있을는지 모른다 ---- . 그렇치만, 이와 같은 독서의 지속을 위해서도, 미적주체의 실존적상황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며, 그것은 음악이나 연극 혹은 영화에 의해 불려 일으켜지는 변화와 닮았다 --- 허나 또한 전적으로 다른 것이기도 하다. 택스트의 독자를 함께 데리고 가는데, 문학의 이론은 이 이론의 독자의 현실성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독서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화하는 독자의 현실성에 대해서는 그 이론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문학은 미적으로 배타적일 수 있다. 허나 문학은 그 본성으로 인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문학적예술의 통상의 사태는 아니다. 그 미적신분애 븉아눈 갓이 문헉아며, 아마도 그것은 모든 예술중에서도 가장 순응성에 뛰어난 --- 가장 까다로운 예술이기도 할 것이다. 허나 순수하게 상상적인것으로 성공하려면, 예술 혹은 문학 그 자신의 극단적 사례일것이다. 프로-벨의 [사란보]나 베게뜨의 [명명할 수 없는 것]에서는, 보르헤스의 산문작품에서 자주 카프카의 몇개의 작품에서, 이 극단적인 사례가 주어저 있다. 또한 시적인 화상에서, 음의 놀이나 어적묘사나 독자와의 연동을 전적으로 포기하는 아름다운 시가가 있다. 윌리엄즈의 [프로레타리어드의 초상] 혹은 그린그만의 [일월의 세탁물 걸이의 탄식]는 그것에 속한다. 그러함으로 문학은, 배타적으로 상상적인 예술이던가 혹은 상상의 우위를 동반하는 포함적인 예술일것이다.
1436 no image 자연미학 7
105 2018-03-03
자연미학 7 속 - a [몇가지예술] 건축과 예술에 관한 발레리의 대화에서, 소크라데스는 [예술에 대한 지끌임은 나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라고 말한다. [나는 예술과 나란히 서 있다. 나는 그 차이를 밝히고 기둥의 울림을 듣고자하며, 선율의 기념비를 맑게 껜 하늘 속에서 떠 올린다. 이러한 상상은 나를 쉽게 이끌으가서, 한편으로 음악을 또한 건축을 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을 세운다. 회화는 친애하는 바이도로스여, 표면만을 가리고 있는, 회판이나 벽의 표면을, 그리고 이들 위에 회화는 가지 각색의 物이나 사람의 흔적들을 만든다. 조각가까지도 언제나 마냥 우리들의 조망의 일부분을 장식한다. 그러나 하나의 神殿은, 사람이 여기에 다가 올 때 혹은 바야흐로 신전의 내부는, 우리들에게 완전한 크기의 一方式을 현성하고, 그 안에서 우리들은 살아 간다….. . 우리들은 그때 존재하며, 우리들은 만나며, 우리들은 인간의 작품속에서 살아 있다 ! 이 삼중의 넓힘의 내부에서는, 알려지는 일도 없고 숙고되는 일도 없었을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여기서 말하자면 인간의 의지와 편애를 호흡한다. 우리들은 인간이 선택한 제관계에 의해서, 붇잡혀 있으며 또한 제어된다. 우리들은 이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 의식의 과잉에서, 第一義적으로 조응적예술인 건축에 대한 발레리의 입김은 한층 중요한것이다. 조응에의 회귀는, 금세기의 중요한 포괄적미학의 目印이다. 이들 미학은 어떤것도 예술적생산에 대한 모사설적료해 혹은 한정된 표현론적료해의 거부에서 정식화된다. 그럼에도 바렐리. 하이데크 내지 벤야민에서는, 그것들은 아무런 미적인것의 조응에의 회수라고 하는 결과에 이르지 못하며, 따라서 미적자율성의 부정이 아닌 미적카데코리의 확대된 새로운 정식화의 시도인것이다. 疑古的인 함의에도 불구하고, 하이데카-의 경우에는 특히 이것은 명백하다. 그의 예술작품에 대한 논고는 관조의 미학(순수한 사물로써의 예술작품)의 비판, 조응의 미학 내지 모사적상상의 미학의 비판으로 시작하여 계속해서 이들 모든 구성요소의 변환과 상호간섭에 입각하여 예술작품의 통일성을 료해한다. 새로운 근본개념은 강제된 조응개념이며 그것은 예술작품을, 그 현실형성력에서 ---보다 주의깊게 말한다면 말하자면 그 생명형성적 에느-지로부터 --- 료해하려는 시도인것이다. [작품존재란 말하자면 하나의 세계를 세우는 것이다]. 작품존재는, [모사하는 것]과 [산출하는 것] 사이에 정밀하게 정식화되어 또한 그 예술적형식의 세계 開始적인 동시에 세계제공적인 의미가 잡히는 것이다. 하이데카-는 희랍신전에 관해 말할 때 이 두번쩨의 시점을 강조하고 [자기자신에의 조망]을 인간으로 승인하는 것이다. [대지]의 개념에서, 최종적으로 그는 예술작품의 의미중립적관점에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작품은 하나의 세계를 세움에 의해 그 대지를 산출한다]. 하이데카는, 예술작품의 통일성을 이들 제계기의 병존적존재에서 본다. [세계의 건립과대지의 산출은 작품의 작품존재에 있는 두개의 본질특잉이다. 이들은 또한 작품의 통일성에 있어 공명한다]. 이 통일성은 하이데카-에 의해 이제야 통합으로서가 아닌 구성적인 제계기의 [항쟁]으로 생각되었다. 이건 충분히 놀라운 일이다. 새로운 미학이, [조응] 즉 미학적 카데고리-안에서도 가장 전통적인 것을 새롭게 사유해 보려고 함으로 해서 새로운 미학은 미적제차원의 이분에 있어 그 통일성의 현상에 조우하는 것이다. 물론 하이데카-의 경우는, 그 신전에 대한 언설은, 발레리의 미적가치의 낙천적인 가치전환에서 신전에 관한 언설이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는 점, 즉 포괄적예술의 세련된 개념의 근대성이 보이지 않토록 해 놓았다. 이 재구축의 요점은 발레리-에 의한 공간형성예슐로써의 건축과 음악과의 병치이다. 쇼펜하워의 께 설득력이 결한 모사설 --- 움악은 [의지 그 자체의 모사]로 무시간적.무공간적.탈개체적인 [순수한 인식주체]에 의해 잡을 수 있다. --- 에 대해서 발레리-는 음악적사태의 감각적현재를 찾아낸다. 음악은 장소를 변화시키는 예술, 아니면 보다 강하게 말한다면, 그것이 언제나 연주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예술이란 것이 분명해진다. 이 공간은 허나 단지 음악적조응의 공간은 아니고, 그것은 함께 관조적공간이며 상상적공간이기도 하다. 음악의 진행은 신체를 중심에 놓는 분위기적공간을 형성하지만 그 공간은 동시에, 순수감각적인 지각충실의 탈신체중심적인 공간으로 도 존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기서는 말로써 나타내기 힘든 상황적의미연관의 연주가 실현되는 것이다. 특히 관조의 관점이 강조됨에 당연하다. 내가 제1장의 끝에서 자연의 관조적특권은 자연에서만 이루어지는 유일한 것이 아님을 말했을 때 분명히 또한 조형예술에 대한 것도 고려하고 있었듯이 또한 非模倣的인 예술인 음악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악은 이점에서 ㅛ펜하워가 다시 옳발랐던 것인데, 관조적발명의 예술로써 가장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예술이며, 조형예술과는 달리 음악은 이 예술이외로는 어떠한 그와 유사한 대응물이 없는 것 같은 종류와 밀도의 감각적사태를 탄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단지 혹은 주로 관조적예술인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음악은 그 근본적감각적인 강도와 그 작곡싱의 구조를 통해 전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음악이 만들어 낸 실존적상상적질서에 대한 음의 독립화로써 이기 때문이다. 음악은 그 시간과 그 공간을 그 울림의 [분산된 현전]에로 조직하지 않으면 안되며 그 현출의 해방된 놀림이 생성되도록, 이중으로 감각적인 구조를 형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위대한 음악은 타의 것에 의해 그런것이다. (유행가는 이에 대해, 제1의적으로 조응적음악이다.) 움억은 뛰어 나게 포괄적예술이며, 관조. 조응. 상상의 어떤 것의 근본적인 우위없이도 그런것이다. [정말입니까!] 라고 소크라데스는 큰소리를 지른다. [당신은 이런일을 한번도 경험해 본일이 없습니까, 당신이 의식을 엄하게 다룬 집회에 참여했을 때, 향연에 참여했을 때 또는 관현악이 넓은 공간을 악음이나 현출로 채울 때 본래의 공간이 알기쉽게 변화무상한 공간에 의해 교환된듯 한, 혹은 오히려 시간 그 자체가 당신을 모-든 관점에서 둘려 싼 것 같은 그런 일이 당신에게 일어났던 일은 없었습니니까. 끊임없이 개축되고 그 자체로 재건되고 공간의 혼 자체가 멈추고 있었던 혼의 변모에 전적으로 몰입된 움직이는 건물에 당신은 살지 않했습까. 그것은 당신안에서 옛일을 끊임없이 들추어 내고, 가지 각색의 예감, 추억, 예견 또는 더욱 많은 특정의 흥분을 불태우는 것으로 당신의 존재를 비추어 내며 또한 따뜻하게 감싸면서 끄질줄 모르는 바로 화염과 같은 끊임없이 옮기는 충일이 아니였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순간과 이것들을 치장해 준것들, 춤꾼이 없는 춤, 신체와 얼굴이 없는 이들 조상 이것들이 당신을 이 음악의 분수된 현전하에 한사람의 노예와 같이 상태에 떨어저 버린 당신을, 마치 둘려싼 것 같이 여겨지게 한 것들을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건축은 그 고유의 공간으로 또 다른 하나의 시간을 낳는 것이라면, 음악은 그 고유의 시간에 의해 또 다른 하나의 공간을 성립케 하는 것이다. –계속
1435 no image 자연미학 6
145 2018-02-19
자연미학 6 二, 예술작품의 통일성 자연미학과 같이, 예술의 미학 역시 상상. 조응. 관조의 분석을 포괄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술의 상상적개념만으로는 많은 예술작품의 통일성을 이해시키기에는 너무나 협소하다. 그것은, 동시에 또한 예술에서, 자연의 미적통일성에 대한 새로운 눈짓을 획득하기에도 너무나 좁다. 우리들의 당초의 배타적 – 배타적이며 상상적 – 인 예술개념을, 예술 및 예술작품을 미적으로 포괄적 개념으로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감히 추측해 본다면, 예술작품의 통일성은, 미적통일성으로 사료된다. 나는 몇 개의 예술쟝르에 관한 개략적인 고찰에서 시작해 볼까 한다. 그것은 규범적인 예술개념의 정식화로 통하는 것이나, 그것에 이어 [간섭적] 내지 [통합적] 예술작품끼리의 구별은. 이 규범적인 예술개념에, 보다 예리한 역사적인 윤곽과, 보다 명확한 방법론적 스테이트스를 빌려준다. 이 둘째번의, 예술에 관한 긴 補說에서는, 많은 것들이 불철저한것으로 머물것이나, 미적자연의 기본구성에의 최종적인 통찰을 획득하기 위해서 필요한 정도로만 언급 되어 지는 것으로 사료된다. a 몇가지예술 이하의 스켓치는, [배타적] 예술과 [포용적] 예술의 구별을 계기로 하여 예술이론의 측면에서 우리들의 세가지 카테고리-의 진가를 시험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몇가지 결착은 이미 나 있다. 배타적으로 관조적인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보았다 시피 있을 수 없다. 배타적으로 조응적인 예술은, 어디서든지 있다 – 그것은 일상적인 생의 (직업적 혹은 개인적인) 양식화의 예술이며, 따라서 휠씬 넓혀진 예술이다 --- ,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좁은 의미로 예술이 화제가 될 때, 거기서 생각될 수 있는 것 같은 예술에 어떤 사례도 제공하지 않는다. 관조적이며 조응적인 미적객체는, 내가 생각하기로는, 동시에 상상적객체가 문제가 될 때 처음으로 쫍은 의미로 예술작품으로 료해되는 것이다. 그러함으로, 예술의 상상적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제3장에서 이미 언급했다 시피 예술의 기본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단지 순수하게 상상적인 예술만이 배타적예술의 사례를 제공해 주게 될것이다. 포괄적예술에 대해서는, 미적기능에서 어느것이 그것이며 각기 다른 장합에 중요기능인지 하는 것이 더욱 문제가 된다. 1차원 이상으로 분절화되는 모든 예술쟝르는, 현저하게 상상적으로 분절되는 까닭이 없다. 회화의 경우는 확실히 그렇게 보인다 – 적어도 뒤샹까지의 회화에 있어서는, 그것에 따른다면, 회화는 전체로서 본다면 포괄적예술이며, 거기서는 상상적인 분절화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 일례를 든다면, 회화는 전체적으로 본다면 포괄적예술이며, 거기서는 상상적인 분절화가 대단히 중요하다. --- 예를 들어 보면, 금세기의 회화가 그 모체의 전형적인 방식을 변화시키고 거기에 이를 분쇄하는 것에 거듭 힘을 쏟았다고 하더라도, 뒤샹의 작품의 일부는 --- 물론 그 자체가 매우 상상적이며, 따라서 역설적이지만 --- 예술로부터 모-든 상상을 쫓아 내는 시도이다. 컨셉추얼 아-트는, 시각적모체를 비감각적 상상의 모체로 변화시키는 것을 실험하는 것인데, 그것은, 스스로의 관조적심화가 같이 조응적해방을 거부한다. 한편, 워-홀의 공적은 근대예술에 다른 누구보다 그 조응력을 상기시켰다는 점에 있다. 이들이, 조형예술의 미적. 포괄적인 통일성을, 과격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주제화하는 바로 그 점에서, 그 통일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조형예술은 약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강한 의미에서 포괄적이라고 하는 것이, 조형예술의 특질을 확실하게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회화는, 관조적이며 조응적인 예술의 상상적이며 포괄적인 통일성이다. 거기서는 --- 규범적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료해된 --- 통상의 사례에서 상상적으로 세계에 제시하는 계기가 중요기능을 다하는 것이다. 이 사실이 옳바르다면, 우리들은 회화의 생을 그 미술관적生 에 완전히 묶어 놓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미술관에서의 화상은 그 전적인 화상이 아니다. 미술관이라고 하는 것은 조응적으로 중립인, 아니 오히려 반 – 조응적인 문맥속으로 던져지는 따라서 그 실존적인 콘텍트에로의 복사로부터 절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조응적차원을 위해 그 화상의 여분을 끊어 버리는 것도 가능할것이나 그러함으로 해서 그 화상으로써의 힘은 분명 저감되지만, 그러나 아마도 파괴되는 일은 없이 다시 화상으로써의 흔적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즉, 필요하다면, 화상은 자기와 관찰자와의 사이의 공허한 공간과를 무엇인가 절충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점은 조각에 대해서는 해당되지 않는다. 조각은 전개하기 위해 공간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스스로 이를 전개시키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조각은 강한 의미에서 포괄적예술이며, 그기서는 공간형성적기능이, 전면으로 내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볼까 하는데, 이 사례는 동시에 예술미에 관한 최초의 補說의 한 면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도널드. 져드의 1969년의 작품 [무제, 여섯개의 스칠 복스](현대미술관, 바-젤)는 각각 1미-터의 가로 세로를 갖는 평면으로 늘린 스틸로 된 6개의 입방체는 공간을 테-마로 하고 있으며, 바로 공간을 느끼게끔 줄세워져 있다. 여섯개의 입방체는 공간을 테-마로 하고 있으며, 곧바로 공간을 느끼게끔 함에 집착하고 있으며, 그 공간은 조각적 지각의 한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공간적 지각의 제조건을 그려낼수 있도록, 곤혹스려운 공간 – 곤혹시키면서 정밀하고, 무한하며, 중립적인 공간을 --- 낳고 있다. 미니멀리즘의 [逆性 의 상상]에 대한 나의 소견은, 여기서는 그렇게 료해되어도 좋을것이다. 허나 이것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우선 인스트러레이선의 지각반성적계산은 결정적으로 예술반성적의미를 갖고 있다. 이들 기계적인 배치나 공업적제작에 있어, 그것들은 관찰자와의 모든 대화나 모든 아니미즘적인 시각을 거부하고 있다. 그들 입방체는 [생명이 없는] 객체이며, 그것들은 신체적 근접.애착.압도력을 느끼게금하며, 브랑크시나 쟈코맷티에 이르는 형상표현적인 조각에 있어 조각적형성물에의 [자연적인]반향이다. 조각의 조응적연출은, 이런 반감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이 형성하는 공간은 부조화로운 숭고한 공간이며 그것은 의인적도식의 피안의 세계를 보는 관찰자의 자유이외의 어떤것과도 조응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그것의 역설이다. 즉, 그것은 관조적인, 정돈되지 않는 공간의 정비이다. 쟛드는 뒤샹과는 달리, 사물관조를 의도하는 것이며, 그에게는 공간을 관조하는 상태가 중요한것이다. 허나 이것은, 예상할 수 없는 예술적인 정비임으로 해서 혹종의 흔들리는 불안정한 상태가 일어나도록 한다. 그 상태에서는 작품에 의해 정돈될 수 있는 공간에의 기대는, 그것이 새롭게 성립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관조적부정으로 다시 돌려지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 산출장소에서의 엄숙함으로 해서 상황형성적인 산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조각이 그 극단에 있어 강한 포괄적공간예술인데 대해, 공간예술의 타의 고전적인 사례인 건축을, 배타적조응적예술로 보고저하는 유혹에 이끌릴지도 모른다. 건축은 그것이 단순한 몸짓의 강조가 아닌, 실존적공간의 영속적건설이라고 하는 점에서, 실용물의 형태화나 생의 보다 넓은 모든 양식화와 구별된다. 이 사실은 분명히 많은 건축에 헤당되는 것이나 허나 건축예술에는 반드시 헤당되지 않는다. 그들 작품은, 그 사회적.기술적인 목적을 실현하지만 그건 단지 그것들이 이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다. 아드르노에게 이점은 위대한 건축의 판정기준이다. 아드르노에 이어 알프렛.뷀마-는, [건축이 동시에 우리들의 세계경험을 표현하고, 대상화시키며 또 변환시킨다면, [분절화된 공간]의 형성에서, [바로 [기술적]인 의미에서 기능적인 것 같은] 진정한 [기능적]인 건축이 성립될 것이다, 라고 논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은 그 건물속에서 작동하며,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성립할뿐 아니라, 그 주연에서 생활하고, 혹은 그 건축물을 단지 관찰할 뿐인 사람에게도 성립한다. 성공한 건축의 [분절화된 공간]은, 내적이며 외적에도 실존적으로도 상상적으로도 분절화된 공간이다. 18세기의 전원예술은 그것은 건축의 유일한 표본에서 벗어나서 또 새로운 풍경화가를 신성한 것으로 만든 한에서는 건축에 관해서도 하나의 진리를 발견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 진리라는 것은, 공간을 타개해 내는 것으로 보다 위대한 공간통일의 예술적 형성은 --- 양자의 동일성을 항상 신경쓰지 않고도 – 공간의 상상을 동시에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더욱 건축은 그 재료의 자중을 용인할 수 있고, 그건 분명히 그 공간의 전체이지는 않으나 아마도 공간에서 강조된 부위를, 관조적인 예외상태을 위해 자유롭게 하고, 대리석이나 현무암, 유리나 강철, 나무나 벽돌로 옛날부터 성공해 왔던 것은, 콘크리트로도 잘 되어지는 것이다. 예술로써의 건축은 다른 말로 해 본다면 약한 표괄적인 --- 주로 조응적인 허나 또한 상상적으로 잘 나간다 면 관조적이기까지 하는 ---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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