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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4 (13: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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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로스코와 윤형근 예술세계의 단면

 

 

지금 서울의 예술의 전당에선 마크 로스코 전(Mark Rothko,1903-1970), 청와대 근처에 새 전시장을 마련한 PKM갤러리에서는 윤형근(1928-2007)전이 동시에 열리고 있다. 마크 로스코 전 도록은 2권의 두꺼운 책으로 만들었는데, 한 권은 그림 위주로 한 권은 강신주라는 젊은 철학자가 로스코의 삶과 예술에 대해 쓴 것이다. 그의 글은 로스코의 삶과 작품에 대해 심도 있게 접근해서, 국내 그 어떤 미술비평가가 쓴 글보다 참신했다. 윤형근전 도록은 영문판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마크 로스코는 생전에 예술가로서 누릴 수 있는 호사와 영광을 다 누렸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독이 되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윤형근은 최근 단색화 미술이 부각되면서 미술시장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그의 작품에 대해 깊이 있는 비평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

이들의 작품이 대대적으로 전시되고 고가에 거래되는 이면과 달리 작품의 예술적 가치와 의미는 별개의 문제이다. 평생 고독하게 자신의 길을 걸었던 두 작가가 성취한 독자적 작품들은 화면이 매우 단순하고 색 면만으로 화면을 구성했다는 유사한 특성을 공유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의 그림은 매우 다르다. 삶의 시간과 공간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두 작가는 당대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극한적으로 경험했다. 로스코는 1,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시대에, 윤형근은 20대 초반에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이다.

로스코는 잭슨 폴록과 함께 전후 미국 추상미술을 대표는 작가이다. 로스코는 예일대 철학과를 중퇴한 후 초기에는 20대 후반 아이들을 가르치며 오히려 아이들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이는 예술가는 아이들처럼 어떠한 검열도 없이 단순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그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초기의 구상적, 신화적 그림에서 이른바 다양한 형태를 뜻하는 멀티 폼그림에서는 부유하는 듯한 여러 개의 색 덩어리를 그리다가, 1949년 후반부터는 캔버스의 크기도 커지고 색 덩어리를 사각형으로 확정하고 몇 개의 색 면, 또는 상하 두 개의 색 면만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색의 관계나 형태, 그 밖의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단지 기본적인 인간 감정들, 그러니까 비극, 황홀, 숙명 등을 표현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내 그림을 대할 때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린다는 사실은, 내가 인간의 기본 감정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내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 느낀 것과 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 같은 마크 로스코의 작품에 대해서는 독일 미술사학자 베르트 하프트만의 다음과 같이 통찰력 있는 해석과 평가가 있다.

 

그림은 어두운 빛을 받으며 바탕으로부터 솟아오르고 또 바탕으로 가라앉는 몇몇 색 면들로만 명료하게 스크린이 되었다. 이들 빛의 스크린들은 틀에 끼워진 그림들과 더더욱 공통점이 없다. 그것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그 속에 정령이 살고 있는 거대하고 무한하며 우주적인 공간을 상징한다. 오직 암시적이고 최면을 거는 듯한 색채의 힘만이 관념과 내용을 결정한다.1)

 

로스코의 작품이 이같이 바탕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듯이 보이는 것은 여러 겹의 색을 겹쳐 표현했기 때문이기보다는 색 면의 모서리를 둥글게 하고 가장 자리 부분을 흐리게 처리한 데서 오는 느낌이다.

이와 달리 윤형근의 작품은 마크 로스코보다 더욱 단색에 가까우며 여백과 화면이 어우러져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데 때로는 여백이 더 비중이 큰 듯이 보이기도 한다. 윤형근의 그림은 울트라마린 블루(군청색)에 엄버(암갈색 안료)를 섞은 색과 캔버스의 바탕 천으로 이루어져 있다. 린넨() 캔버스에 수직으로 내리 그은 색 면이다. 그래서 가장자리 부분만 번지면서 스며들고 배어나온 흔적이 드러난다. 칠한 부분은 짙은 색이지만 옅은 색을 반복해서 칠했기 때문에 맑고 깊은 느낌을 준다. 그의 그림은 그린 부분과 그리지 않은 여백 부분의 화면 구성이 조성하는 흔적으로 충만하다.

검은 청색과 다갈색을 섞은 번트 엄버 앤 울트라마린 블루(Burnt umber and ultramarine blue)’는 윤형근이 구축한 독창적인 회화 세계로, 1974년 이전에는 푸른색이, 이후에는 거의 짙은 원두커피 색에 가까운 암갈색조로 그렸다. 전시는 1970~80년대 초기작들 위주로 꾸려졌다. 세로 1가 넘는 대작 9점과 소품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이번 전시회를 PKM 갤러리의 대표는 윤형근은 단순히 단색화 작가로 분류하기보다 담화淡畵의 카테고리에서 새롭게 해석돼야 한다.” 면서, “그리기를 넘어서 획 긋기와 같은 전통 서예의 방법론이 현대적인 재료를 통해 구현된, 현 시대의 문인화 같은 작품으로 본다. 이런 특성이 있긴 하지만 윤형근의 작품은 근본적으로 험한 시대를 살아남은 자로서의 실존적 산물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 중에는 전쟁 부상자들을 출혈 부위를 감싼 붕대에 배여 있는 피, 또는 1회용 생리대가 없던 시절 월경을 할 때 몸밖에 나온 피를 흡수하도록 샅에 대는 개짐에 피가 번져 배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도 있다. 후기로 갈수록 색면은 정제되고 기하학적 구성 같은 형상으로 변모되는데, 조형의 근본적인 측면은 이전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귀족적인 외모와 달리 그는 결코 평탄한 삶을 살지 않았다. 한국 전쟁을 전후해서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자로서, 또는 현실 사회와 불화하면서 그러한 현실을 부정하듯 그 울분 같은 것을 그림으로 표출한 것이다. 그의 그림은 그러한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을 치유하는 행위의 소산이며, 바로 이 점에서 윤형근 그림의 독자성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최근 피카소의 한 그림이 2000억에 가까운 금액에 팔려 바로 이전 프랜시스 베이컨이 세운 경매 기록을 경신했다고 한다. 이처럼 현대미술가들 중에서는 신화화되고 우상화 되는 작가들이 많아 그 작품의 값이 천문학적 액수이다. 역설적이게도 현대예술의 미적, 예술적 가치는 이러한 거품 현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성립한다. 어디까지나 감상자와의 관계 속에서 작품의 가치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즉 분별력 있는 감상자에 의해 작품의 가치가 드러날 수 있고, 이로써 그 작품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로스코와 윤형근의 작업은 각각 당대의 세상과 직면했던 삶의 흔적이다. 우리는 캔버스 위에 발라진, 혹은 스며든 흔적을 바라보며 예술과 인생이 무엇인지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2015. 5. 14)

 

1)The picture became a screen, illumined by dark light articulated only by a very few coloured fields which rise from the ground and sink back in to it. These screens of light have nothing more in common with framed pictures; they symbolise the great, unlimited, universal space surrounding us, in which the numen has its place. Only the suggestive, hypnotic power of colour determines the idea and content. Werner Haftman(1965). Painting in the Twentieth Century, Volume One, New York : Praeger Publishers.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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