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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7 (19:44:17)
김병기 선생과의 만남, ‘이상’과 ‘이야기가 있는 그림’
직업의 귀천이나 배움의 유무, 삶의 길고 짧음을 떠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온갖 풍파를 겪은 사연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역사적 의미를 갖는 시대 상황에 대한 남다른 증언자들이 있는데, 우리 미술계에서는 김병기 선생이 있다. 김 선생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된 불과 몇 년 후인 1916년에 태어나서 100세가 된 지금도 생존해 계신 ‘살아 있는 전설’로, 남한과 북한 공히 다방면에 걸쳐 미술문화 활동과 관련된 ‘최초’의 직함을 가지신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시다. 김 선생의 삶을 들여다보면 단지 미술에 국한되지 않는 우리 근현대사의 이면과 실상으로 확장된다. 이 분이 살았던 당대의 역사는 오래 전의 이야기같지만 현재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급속한 변화의 연속인 우리 근현대사 속 인물은 신화화되거나 망각되어 버린 경우가 많다. 한국 근현대미술의 선구자였지만 동년배인 이중섭이나 박수근에 비해 김병기 선생이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1965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커미셔너로 참가했다가 그 길로 뉴욕에 정착했고 2006년 이후에는 LA에 거주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미술계를 지배하는 왜곡된 신화와 비평적 담론 부재 현상들과도 상관이 있다. 봄비가 내리던 지난 4월 19일, 후배 현대미술작가인 김도희의 주선으로 김병기 선생을 함께 찾아뵈었다. 주1) 오후 4시에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인 평창동 가나아트 센터로 갔다. 경북궁 앞에서 자하문과 세검정을 지나 산세가 수려한 북한산의 산자락 언덕배기에 위치하고 있는 가나아트 센터에 도착하니 때마침 봄이어서 막 새잎이 돋아나는 숲과 봄꽃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전시장에 들어서서 김 선생이 계신 곳을 찾으니 바로 옆에 있는 음식점 겸 카페에 김형국 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와 부인이 동석 중이었다.(*김 교수는 『장욱진: 모더니스트 민화장>(열화당)』, 『우리 미학의 거리를 걷다>(나남)』 등의 책을 쓰신 분이다.) 김 교수님 사모님이 김병기 선생님 바로 옆 자리에 앉기를 권해서 앉은 후, 먼저 내가 집필위원으로서 마무리 단계 중인 김 선생 그림을 실은 고등학교 미술창작 교과서 글을 보여드렸더니, “아주 익사이팅한 일이야!” 하며 좋아하셨다. 내가 집필을 한 단원은 ‘분석과 적용’ 중 ‘생각의 힘을 키우는 작품 분석’인데, 이 중 ‘같은 대상 다른 그림’의 예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과 김병기 선생의 <인왕제색>을 비교하고 분석하는 내용을 교과서에 실었던 것이다. 그리고 작년 12월부터 금년 3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김 선생의 전시회 ‘감각의 분할’전을 보고 쓴 <흩어진 선과 복합적 면의 시공(時空), 김병기의 삶과 예술>이란 비평 글을 보여 드렸는데, 무려 1시간여에 걸쳐 미동도 없이 끝까지 정독하셨다. 나의 글을 다 읽으신 김 선생은 “이 글에 나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있네.” “길게 썼어도 끝까지 읽혀지는 글이야!”라며 과분한 칭찬을 해 주셨다.(단 한 부분 해방공간 시기에 활동한 화가인 ‘문학수’에 대한 내용만 잘못됐다며 그 부분을 지적해주셨다). 또한 이 글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시기에 훗날 발간할 책에 실을 계획이라고 했더니 흔쾌히 그대로 실으면 되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어 미술창작 원고 중 내가 집필을 맡은 단원인 김병기 선생의 <인왕제색>이 실린 글을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으시고는 특히 도판으로 나온 이브 클랭의 작품이나 자코메티의 작품 등을 예로 드시며, “작품 선정이 특별히 잘 됐다,” “이런 내용이 실린 미술 교과서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어요.” 라며, 또 분에 넘치는 칭찬을 해주셨다. 그리고 김병기 선생의 작품에 대한 비평 글에서 밝혔던, 대학원 시절 내가 그린 옛 그림 작품을 포트폴리오 사진으로 보여 드리자, ‘아주 깊이가 있어’라고 호평해 주셨다. 또한 지난 2007년에 내가 쓴 『나와 너의 세계 미술』이란 책을 서명한 후 드렸는데,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끝까지 책을 펼쳐보시되, 특히 현대미술에 대해 기술된 부분들은 눈여겨 읽어 보신 후, “전체 글이 대범하고 보편성이 있어!”, “영어로 번역되어 다른 나라 사람들도 읽어야 할 책이야!” 라는, 또 분에 넘치는 말씀을 하셨다. 이런 일로 시간이 지나가는 바람에 정작 여쭈어 보고 싶었던 질문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질문지를 읽어보시는 것으로 대신하고, 그 중 문학가인 이상(李箱, 1910~1937)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고 했더니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다. 주2) 이상을 만난 계기가 주영섭(朱永涉, 1912~ ?)을 통해서 입니다. 주영섭은 연극 리더로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동생인데, 보성전문을 나와 동경에 있는 법정(法政, 호세이) 대학에 재학 중이었어요. 주3) 세 살 위 친구야. 어느 날(*1936년도 임) 엽서가 왔는데, 일본 말도 아니고 한국말도 아닌 글인데, ‘내가 너한테 갈께!’ 였어요. 그래서 이상을 데리고 왔는데, 이상은 동경에 와서 ‘불령선인(不逞鮮人, 후테이센진)’ 으로 낙인 찍혔어! 주4) 그 뜻은 ‘서스피셔스(suspicious) 조센징’, 의심스러운 사람! 최악의 칭호지! 이상은 당시 20대인데, 처음 이상을 봤을 때 50대로 보일 정도로 몸이 망가진 상태였어요. 주5) 폐는 다 썩어서 몸에서 냄새가 났어요. 동경에 있는 주영섭의 방이 너무 좁아서 이상이 내 방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침대가 하나 밖에 없거든? 일본 유카타를 그에게 입히고 침대에 눕게 하고 나는 바닥에 잤어요! 그런데 이상은 하룻밤을 뜬 눈으로 새웠어! 낙숫물 소리 세느라,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를 세느라 한 잠도 못 잤어요! 내가 그때 ‘다섯 개의 원’을 그렸는데, 이상이 “원이 있구만!” 이라고 했어요. “칭찬도 아니고 까는 것도 아니야!” 그때는 칭찬을 안 해! 그림 뭐 이래! 너는 뭔데? 시시한 놈... 그런 분위기였어요. 수 십 년 지나, 근래인 60년 후 LA에서 붉은 바탕에 이 그림을 다시 그렸어요. 한국 사람은 선, 일본 사람은 색채,... 한국은 내리긋는다고! 완당(김정희), 정선은 내리긋는다고! 외국 사람들은 이런 선을 못 긋는다고! 맨 처음에는 평양, 동경, 서울, 미국, LA ... 이 그림이 ‘클로니클(chronicle)’ 즉 <연대기>입니다. 이 그림의 “붉은 바탕은 ‘차이니즈 버어밀리언’인데, 사람들이 다 좋다고 그래! 원은 사람의 형체로 만들었어! 붉은 색으로 그려나가면서 흰 선이 존재해. 잭슨 폴록과 같아!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거든? 초점이 ‘연대기’가 됐어! 그게 이상의 작품하고 관련이 있어.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상의 그런 얘기하고 내 그림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 그건 나만이 아는 <연대기>야! 거긴 무슨 연대기도 없어! 사실은 그냥 붉은 색과 면이 있을 뿐이지. 거기에 무슨 동경, 평양이 있는 건 아니야,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만 보려고 해요. 이건 동경이고 이건 평양이고, 서울이고 그리고 미국으로 갔다, 그런 애기만을 좋아해요. 내 그림은 안 보고...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우리 다시 만나리(랴)’, 좋은 점은 안 보고, 어디서 만나리에 가슴을 친다고. 그것만 얘기해요. 그건 하나의 미스테익이야! 그런데 김환기는, 그 제목이 그런 얘기를 가지고 있어! 하여튼 나는 그림이 그런 얘기를 갖게 하고 싶어요. 그림이 무슨 얘기를 갖게 하고 싶다고! 현대회화는 이야기가 다 없어졌어! 뻔뻔한 담벼락이 됐다고! 거기서 우리가 뭘 하는 거야! 뻔뻔한 담벼락에서... 박서보는 뭐 이렇게도 하고, 이렇게도 하고... 그러나 그건 대동소이한 거야! 그 뻔뻔한 담벼락에서 갈 길이 없어요. 미니멀리즘으로 가는 첫 단계야! 최소 한 줄... 나는 거기서 다시 형상성을 도로 찾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형상성은 벌써 얘기가 있잖아요. 그러나 과거의 설화적인 형상성의 얘기는 아니야 예쁜 얼굴 그려서 예쁘다, 뭐 성모마리아가 아기를 안고 있다, 성스럽다, 뭐 이런 얘기가 아니에요! 그러나 미술이 어떤 얘기를 가지지 말란 법이 어디 있어! 단지 그것을 설화적으로가 아니라 예술의 본질을 무엇으로 설명하는 거야? 얘기로 밖에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런데 현대예술은 얘기가 다 거의 없어졌어! 그러나 없어진 것도 아니야! 이브 클랭의 작품 같은 것을 보면 캔버스거든! 자동차 바디를 만드는 오일 탱크에 그걸 넣었다 뺀다고! 그러면 캔버스가 찌그러질 거 아니야. 마르는 도중에! 그것을 한 15점을 죽 걸었어. 스위스 뮤지엄에. 1965년에. 나는 그 찌그러진 캔버스에서 감동을 받았어! 이 사람은 오브제를 보는 거예요. 그리는 회화가 물체(오브제)로 변하는 게 이 시점이야. 그리고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같은 박스 속에 살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30평, 어떤 사람은 60평, 어떤 사람은 100평, 그런데 너희 집은 30평이지, 우리 집은 90평이야 자랑하고 있다고! 어처구니없는 얘기에요! 마음속으로 인간이 박스 속에 살고 있는 것이 행복한가, 아닌가를 우리는 검토해야 하는데 박스 속의 경쟁들을 하고 있다고! 이런 어리석음이 우리 서울을 지배하고 있어! (그래서) 강남의 아파트는 좀 비싸! 어처구니없는 얘기예요! 한데 그런 것을 프랜시스 베이컨은 박스 속에 밥 먹고 오줌 싸고 자고 하는 것을, 하나의 놈팽이들이 하는 그것을 그대로 그렸어! 선으로! 프랜시스 베이컨이 역사상 현대미술가로는 제일 높은 가격으로 팔렸어! 돈 많이 받았다고 하는 얘기 아니에요. 그런 평가를 받았다고 하는 예기예요. 그건 상당히 좋은 거예요. 그런데, 그런 평가의 시작은 반 고흐의 <해바라기>입니다. 이 <해바라기>를 일본 야스다 깅코 (安田銀行 *화재 보험회사)가 세계 옵션에서, 5000만 불에 샀어! 일본의 야스다 깅코가 (1987년에) 5000만 불에 샀어요! 세계가 깜짝 놀랐어요! 일본 야스다 깅코에서 산 이유는 일본이 한국 전쟁 덕분에 갑자기 부자가 됐어! 전패국(*전쟁패전국)이! 전패국이 5년 후에 세계 제2 경제대국이 됐다고! 그러니까 자기들이 우등 나라이고 문화가 높은 나라라고 하는 것을 천명해야 자기 물건들을 세계 각국이 안심하고 살 테니까 문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 그렇게 한 거야! 그건 맞았어! 야스다 겐코의 은행에 있는 반 고흐의 <해바라기>는 신주쿠에 있는 초고층 빌딩(*구 야스다 화재 해상 빌딩을 말하며 현재는 ‘손해보험 재팬 빌딩’임)의 어떤 (미술관) 방에 걸려 있고, 사람들은 돈 내고 들어가서 보고 모나리자를 보듯이 줄을 서 보고 있어! 그런데 내가 사실은 동경에 가서 공부할 때, 문화학원에, ‘시키바 류 자브로(式場隆三郞, 직접 종이에다 자필로 한자로 명기함)’라고 하는, 정신의학 박사인데, 시키바 류사브로 정신의학박사가! 여기까지가 그날 김 선생님이 하신 이야기였다. 이 일본의 정신과 의사 이야기를 막 시작하려는 순간에 김 선생님이 한국에 있는 동안 스케줄을 관리하고 작품 활동도 도와주는 가나아트의 이호재 회장이 들어와서, ‘우리 선생님 큰 일 나시겠네!’하며 오늘 12시부터 지금까지 앉아 계셨다며 건강을 염려하시며 계속 말씀하시려는 것을 만류하는 바람에 얘기를 중단하신 것이다. 우리 역시 김 선생님이 무리하시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아쉽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김 선생님은 이날 마지막으로 우리가 준비해 간 각각의 도록에 자필로 서명하다가, ‘오늘 무슨 요일인가요?’라고 물으셨다. 4월 19일이라고 하니, “4. 19구나! 혁명이 일어난 때구나!”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당신의 이름 밑에 날짜를 적으셨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우리 보고는 “내가 더 설명할 수가 없어요. 이미 다 아시는 분들이야! 대단히 훌륭한 분들이야!”라고 끝까지 과분한 말씀으로 주시고는 이호재 대표와 함께 자리를 뜨셨다. 최고령 미술계 대선배로서 아직도 청년 작가처럼 작업을 하시는 김 선생님과의 만남은 나로서는 평생 잊지 못할 뜻 깊은 사건이었다. 워낙 짧은 시간인데다 노령으로 인한 난청 때문에 충분한 대화를 나누지 못해 아쉽기 그지없었지만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서양미술의 도입기를 몸소 체험한 분과 아직도 같은 대기를 호흡하며 생생한 육성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최근 이웃나라 일본의 극우적 행태에서 알 수 있듯, 우리 근현대사는 20세기 일제강점기와 맞닿아 있다. 이 때문에 이 땅의 사회 문화적 현실도 20세기의 역사부터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짧은 대화였지만 동경에서 이상과 만났던 소설같은 일화는, 당시 이미 망가진 몸의 상태라든가 ‘불령선인’이라는 말을 통해 이제는 신화적 존재가 되어버린 이상의 실존적 삶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군국주의로 치닫고 있던 당시 시대 상황에서 이국땅 낯선 집에 와서 한 잠도 자지 못하고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 소리를 밤 새워 세고 있는 이상의 모습은 식민지 시대를 살아야 했던 한 비극적 지식인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상에 대한 일화의 설명 끝에 나온, ‘이야기가 없어져 버린 현대미술’에 대한 김 선생의 언급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촌철살인의 핵심적 화두였다. 이를테면 현대미술이 잃어버린 이야기를 과거의 설화적인 형상성이 아닌 그림의 본질로서 다가가야 한다는 메시지는 그림에 대한 큰 깨우침을 주는 값진 메시지다. 또한 “오늘이 4. 19구나, 혁명이 일어난 날이구나.” 라는 한 마디 말도 노대가로서 이 분의 삶과 우리의 근현대를 함축적으로 느끼게 한다. 당대의 경험에 대한 살아남은 자로서의 유일한 증언은 그 자체로 귀중한 사료적 의미를 갖는다. 물론 모든 역사적 증언도 경험한 자의 주관이 개입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란 이러한 과거의 경험(사건)과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 재해석된 기록인 것이다. 2015. 4. 25. 도 병 훈 주1) 김도희 작가는 김병기 선생의 전시회와 거의 같은 시기에 국립현대미술관 바로 옆 전시장에서 열린 젊은 모색전의 작가로 참여했다. 이번 김 선생의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 중 <산악도>와 김도희 작가의 <야뇨증>이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유사한 면이 있었으며, 이전부터 김병기 선생의 작품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다. 주2) 그날 이상에 대해서만 질문을 하게 된 것은 미술사 관련 부분은 다른 대담 자료에서 본 데다, 최근 출간된 서울대 김민수 교수의 『이상 평전 : 모조 근대의 살해자 이상, 그의 삶과 예술』을 통해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다층적인 시각에서 재해석된 이상의 삶과 문학에 대해 흥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상 문학 연구자들은 이상을 여성편력의 화신, 퇴폐주의의 전형, 근대도시를 거닐던 권태로운 산책자 등으로 규정했지만(*이상에 대한 연구 논문만 1 만 편이 넘지만 대개 이러한 관점에서 쓰여 졌다.) 김 교수는 이 책에서 그간의 이상 문학에 대한 이러한 오해와 편견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각에서, “이상의 작품을 시각 예술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 의하면 이상은 병으로 총독부 기수직을 그만둔 뒤 가족의 빈곤과 생활고에 절망했다. 그럼에도 불굴의 투지가 담긴 시 <且(또)-팔-씨의 출발>로 새 출발을 다짐했다. 이상은 이 시에서 ‘식민지 근대화, 도시화’의 허구와 모순을 말했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상을 둘러싼 모든 오독과 곡해의 근원은 바로 시 <또- 팔- 씨의 출발>에 있다. 이 시는 연구자들에 의해 지독하게 오독됐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과 건축가로서의 이상을 생각해보면 폐결핵으로 죽음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실존의 땅’을 계속 파야만 하는 ‘또-팔-사람의 출발’이란 뜻이다. 식민지 땅에서 건축가로서 열심히 계속 땅을 또 파려는 한 인간의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 시다. 시의 본뜻을 안 저자는 이상의 처절한 삶에 전율하고 눈물 흘린다. 김 교수는 1928년 경성고공 졸업반 때인 19살 때의 이상이 그린 자화상을 이후 ‘모든 이상’을 푸는 열쇠로 본다. 이 자화상은 섬뜩한 모습이다. 그림은 삶과 죽음으로 양분된 좌우 대칭이지만 왼쪽 눈동자는 지나치게 빛나는 반면 오른쪽 눈엔 안구가 없다. 그래서 저자는 이 땅에 서양화 기법이 유입된 이래 이 자화상만큼 강력한 표현주의는 없었다고 본다. 이상이 당대 여러 현대예술을 섭렵한 뒤 내면화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며, 그래서 <1928년 자화상>은 이후 전개되는 모든 이상의 글의 원형이자 출발점으로 본다. 이를 바탕으로 저자는 이상을 문학가이기 전에 화가이자 건축가로서 일본제국주의가 이식한 ‘모조 근대’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감성과 지성으로 드러낸 융합예술가로 보았다. 주3) 평남 평양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에 다니면서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막심 고리키의 《밤주막》을 공연했고, 극단 신건설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 배우로 출연했다. 에리히 레마르크의 반전 소설이 원작인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카프 계열 연극인들이 신건설 창립작으로 올렸다가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을 불러온 작품이다. 이후 일본에 유학하여 호세이 대학에서 수학하면서 마완영 등과 함께 1934년 도쿄학생예술좌를 창립했다. 도쿄학생예술좌는 창작극 공연에 의미를 두고 창립작으로 유치진의 《소》와 주영섭의 《나루》를 공연했다. 주영섭이 《신동아》에 발표한 《나루》는 당시 농촌 현실을 그린 작품이다. 1939년 도쿄학생예술좌 사건이 발생하여 마완영, 박동근, 이서향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이 사건 이후 귀국하여 유치진의 현대극장에 가입하고 함대훈의 국민연극연구소에서 활동하며 친일로 전향했다. 이후 현대극장 창립작으로 유치진의 친일 희곡 《흑룡강》을 연출해 공연하였고, 함세덕의 《추석》, 유치진의 《북진대》 등 친일 연극들을 연출했다. 평론가로서도 활동을 펼쳐 「연출론점묘(演出論點描)」(1936)·「현대극서론(現代劇序論)」(1937)·「연극과 영화」(1937)·「시나리오 문학과 시나리오」(1938)·「문학과 영화」 등의 다수의 평론을 발표하였다. 해방 직후 월북한 것으로 추정되나 그 후 활동은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주4) ‘불령선인’은 일본 제국이 일제 강점기 식민지 통치에 반대하는 조선인을 불온하고 불량한 인물로 지칭한 용어이다. ‘불령(不逞, 후테이)’는 멋대로 행동함, 도의에 따르지 않음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5) 이상이 도쿄에 도착한 시기는 1936년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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