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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6 (13:4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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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을 다녀와서

 

1.

세계는 체험의 폭만큼 넓어진다. 체험은 몸, 호흡, 목측(目測), 지질학적 토양, 빛과 색의 차이가 빚어내는 낯선 시공, 역사와 문화의 흔적 등이 어우러지면서 관념의 틀을 깨는 과정이다.

지난 토요일(10월 19일), 직장 동료 선생님 4인과 함께 한반도 백두대간(白頭大幹)의 허리인 소백산(小白山)을 다녀왔다. 최초 집결지인 광명에서는 한 선생님의 차로 안양으로 이동한 후, 아침 6시 40분경에 출발하여 영동고속도로를 거쳐 죽령 고개 넘어 희방사 주차장까지는 장 선생님의 승용차로 이동하고, 희방사 어귀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이번 소백산 산행은 지난 1998년에 3박 4일간 지리산을 종주한 이래 두 번째로 백두대간 구간을 간 것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고지도에 나타난 이 땅의 산줄기를 모티브로 하면서도 산행이란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공간과 존재를 탐구하는 작업을 해온 나로서는 이번 산행이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먼 길을 우회한 끝에 관념이 현실이 된 것이다.

경상북도 영주시·봉화군, 충청북도 단양군에 걸쳐 있으면서 영남과 충청을 가르는 소백산은 죽령 이남으로는 묘적봉(1,148m) 도솔봉(1,314m), 북으로는 제2연화봉(1,357m), 연화봉(1383m), 제1연화봉(1394m), 비로봉(1,439m), 국망봉(1,421m), 신선봉(1,389m) 등 고산연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백산은 국립공원 중에서도 지리산 군, 설악산군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넓이이다. 소백산은 삼국시대에는 신라·백제·고구려 3국의 경계에 있었던 곳이고,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들이 즐겨 유람했던 유구한 역사와 애환이 어린 장소로서 그만큼 많은 역사적 사연과 문화 유적 및 기록유산이 전한다. 그래서 이번 소백산 산행은 자연과 함께 한 선인들의 삶의 궤적과 불교, 유교, 선교 등이 융합된 우리 고유의 사상과 자연을 모티브로 삼아 넓고도 깊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형성한 이들의 삶을 더욱 강렬하게 내 몸으로 체험하고 감지하는 일이기도 했다. 나아가 특정 공간에 대한 선택과 집중 속에서 더욱 새롭게 경험하는 삶의 결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2.

희방사(喜方寺) 매표소 근처에는 뜻밖에도 웬만한 명산의 절 입구에 있는 사하촌이 없었다. 점심식사를 미리 준비하지 못해서 나와 장 선생님만 다시 죽령휴게소까지 가서 사발면과 약간의 과자류, 그리고 동동주 등을 사서 다시 출발 장소로 이동했다. 다른 일행은 먼저 출발했기 때문에 둘이서만 짐을 나누어진데다 원래 가져온 짐의 무게도 있어 배낭이 만만치 않게 묵직했다.

희방사 계곡으로 들어서서 얼마가지 않았는데 곧 약 28m 높이에서 거의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보였다. 지난 2002년에 금강산에서 본 구룡폭포에 비하면 작은 폭포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름으로만 알다가 직접 보는 희방폭포였다. 조선 전기의 학자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하늘이 내린 선경(천혜몽유처,天惠夢遊處)’이라 했을 정도로 이 폭포는 소백산의 한 절경으로서 오래전부터 영남 제1폭포로 꼽혔다고 한다. 폭포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구름다리를 건너자 희방사가 있었다. 이 절은 그 연혁이 오래된 절이지만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후 신축한 건물이어서 유장한 역사의 향기는 느낄 수 없었다.

희방사 옆으로 난 산 길을 따라 오르니 곧 숨이 가쁠 정도로 가파른 산길이었다. 이러한 산행에서의 위안거리는 형형색색의 단풍들과 시리도록 청초한 야생화들이었다. 주1)

 

가파른 계단 길을 계속 1시간 정도 오르자 깔딱재라는 곳에 이르렀다. 거기서 왼쪽으로 역시 경사진 산길을 계속 걸어서 점점 오르자 한 폭의 수묵화처럼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가을 소백산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서 간 김선생님과 이 선생님이 발견한 어느 바위 위에 오르자 방금 올라온 희방사쪽 계곡이 한 눈에 들어왔다. 골짜기와 능선마다 형형색색의 단풍이 비바람에 씻긴 낡은 단청처럼 조화롭고 깊은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다채로운 색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색계(色界)였다.

 

계속 걷고 걸어서 마침내 산 정상에 도달했다. 바로 연화봉(蓮花峰)이었다. 비로소 소백산의 주요 능선을 이루는 정상이자 백두대간에 오른 것이다. 산 정상은 완만하고 편평한 했는데, 소백산의 주요 능선과 사방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남으로는 천문대가 있는 제2연화봉, 북으로는 제1연화봉과 멀리 비로봉, 그 너머 국망봉까지 보여 백두대간의 굽이치는 연봉들을 목측(目測)으로 조망할 수 있었다. 깊고 푸른 가을 아래 흰 구름 아래로 끝없이 아득한 능선들이 구비치는 장엄한 형상은 가슴이 탁 트이는 광경이었다. 우리 일행은 연화봉 정상에 설치된 넓은 마룻바닥 한 곳에서 준비해온 컵라면과 과일, 과자 등으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제1연화봉과 비로봉을 향해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능선 길은 멀리서 본 것과 달리 내리막길과 오르막길로 이어져 있었다. 주위의 나무들은 해발 1300m 이상의 고지대라서 대다수가 관목들이었다. 이들 관목들은 겨울나무처럼 잎도 거의 다 떨구고 맨 가지만이 빽빽하게 길 양쪽으로 우거져 있었고, 그 사이로 더러 수명을 다한 나무들도 많이 드러나 보였다. 이러한 나무들은 모든 개체의 유한성, 즉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사라지는 필멸(必滅)의 이치를 보여주듯 수명을 다한 나무 둥치들이 흙으로 변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흙에서 또한 신생(新生)의 식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능선 길을 가는 내내 고산 지대 특유의 신기한 나무들이 많았으며, 그 중에는 짙은 분홍빛 꽃처럼 색이 강렬하고 짙은 열매도 있었다.

이어 제1연화봉을 거쳐 계속 비로봉을 향해 걸었는데, 능선 좌우는 각각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땅이었지만 그러한 인위적 구분이 무색하게 끝없이 부드러운 곡선의 산 능선들이 파도처럼 물결쳤다. 주변의 나무들을 보면 늘 거센 바람에 씻긴 자태를 하고 있었으나 이날은 바람마저 잔잔해서 맑고 고요한 길이었다. 먼 산자락 계곡 아래로 가을 저수지 물이 가을 하늘과 햇살을 담고 맑게 빛났다. 비로봉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눈앞에 초원이 전개되었으며, 다양한 야생화와 특이한 나무 열매들을 볼 수 있었다. 야생화는 흰색, 노란빛의 꽃이 주로 피는 봄, 여름과는 달리 황금빛 초원의 가을철이라 보랏빛이 흰 색 꽃들이 눈에 띄었다.

비로봉 근처에 다다르자 길 능선 왼쪽으로 고산에 서식하는 나무인 주목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비로봉(毘盧峰) 정상에 도착했다. 오후 약 3시경이었다. 비로봉으로 오르는 길 양 쪽은 황금빛 초원이 가을바람에 끊임없이 흔들렸다. 비로봉은 완만히 경사진 토산이었는데, 이렇게 높은 산이 흙산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특이했다. 그런데 정상에 오르니 편평한 곳에 호박돌들이 깔려 있었고 부분적으로는 바위들이 드러나 보였다.

산 정상에는 두 개의 정상표지석이 존재했다. 충청북도 정상표지석은 조그마했지만 영남 쪽

정상표지석은 규모가 훨씬 컸다. 예서체로 비로봉이라 쓴 정상석 뒤에는 소백산이란 시가 역시 예서체로 다음과 같이 세로로 쓰여 있었다.

 

小白山(소백산) 지은이 서거정

小白山連太白山(소백산연태백산) 태백산에서 이어진 소백산

逶迆百里揷雲間(위이백리삽운간)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사이 솟았네.

分明劃盡東南界 (분명획진동남계) 뚜렷이 동남방의 경계를 그어

地設天成鬼破慳(지설천성귀파간)하늘과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檀紀 四三二六年(西紀 一九九三年 十月 日)

*逶 : 구불구불 갈 위, 迤 : 연이어질 이 , 慳 : 아낄 간, 인색하다. 감추어 두다.

 

서거정이 남긴『사가시집四佳詩集』「보유, 제3권, 여지승람(輿地勝覽) 편」에 실려 있다는 시였다. 원시집에는 제목이 ‘풍기 소백산’이지만 비로봉에 있는 정상석에는 소백산으로 쓰여 있었다. 주2)

 

지난 1998년 지리산 천왕봉에서 체험했던 공간의 광대함을 이 비로봉에서 다시 체험할 수 있었다. 드높은 푸른 하늘과 눈높이의 구름들이 드넓게 감싸고 있는 비로봉은 사방이 둥근 원으로 보이는 공간의 중심이었다. 『노자도덕경』에 나오는 천장지구(天長地久), 즉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간다는 구절이 저절로 떠오르는 광경이어서 존재의 근본적 근거가 땅과 하늘일 수밖에 없음과 생물학적 존재의 개체적 유한성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길을 본받는데, 길은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을 뿐이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라는 노자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이때의 하늘과 땅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으로 보면 하늘과 땅은 분리될 수 있는 실체적 대상이 아니다. 서거정이 ‘지설천성(地設天成)’이라 말한 것도 이런 차원에서 비로소 그 느낌이 와 닿고 이해된다.

 

비로봉에서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봉우리는 마의태자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는 국망봉이다.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신라의 국권을 되찾으려 백방으로 애를 쓰다가 실패하자 엄동설한에 베옷 한 벌만 걸치고 저 봉우리에 올라 망국의 한을 달래며 옛 도읍인 경주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린 곳이라 해서 국망봉이라 불렀다는 설화가 전하는 곳이다. 국망봉 왼쪽으로 신선봉 능선이 뻗어 있다. 일행보다 혼자 먼저 도착했기 때문에 다른 일행들이 다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 기념사진을 찍은 후 하산하기 시작했다.

 

하산 길은 오르는 길보다 훨씬 시간이 단축되었다. 비로봉에서 연화봉까지 4.3Km를 평지에서 걷듯 약 1시간동안 걸었다. 그러나 가을이라 오후 5시 넘어서자 곧 해가 지기 시작했다. 연화봉에서 일행을 기다렸다가 하산하기 시작했는데 그 거리가 올라 올 때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깔딱재에서부터 점점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희방사 근처에 와서는 한 치 앞이 안보일 지경이었다. 불과 몇 십분 사이에 대낮에서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이 되는 것을 보며 자연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일행이 없이 혼자였다면 얼마나 무서울까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였다. 그래서 한 걸음 한 걸음 어둠 속을 빠져나와 마침내 소백산에서의 긴 하루의 여정을 마치고 소백산을 가슴에 품고 귀로에 올랐다.

 

3.

소백산에 대한 여러 기록과 사연이 전한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택리지』에서 ‘병란을 피하는 데는 태소백이 가장 좋다.’라 하였고, 『정감록』에서는 병난과 질병이 없는 십승지의 으뜸으로 소백산 금계를 꼽았고, 『격암유록』을 지은 격암 남사고는 소백산 아래를 지나다가 말에서 내려 절하며,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땅에 살았던 우리의 선조들은 흰, 밝음을 숭상했기에 신령스러운 명산에 그 음을 따서 ‘백(白)’자를 넣었다. 백두대간 중 이러한 백자가 들어가는 산으로 백두산, 함백산, 태백산, 소백산을 꼽을 수 있다. 여기서 백은 ‘희다’ 는 차원을 넘어 높다, 거룩하다는 뜻도 있다.

그 외 명산 준봉들도 각각 이름이 있는데, 불교사상에 연원을 둔 봉우리 이름도 많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불교의 비로사나불에 근거한 비로봉(毘盧峰)으로, 대개 그 산의 최고봉을 비로봉이라 하며, 금강산 비로봉(1,638m)이 대표적이다. 이 외 오대산 비로봉(1,563m), 소백산 비로봉(1,439.5m), 대구 팔공산 비로봉(1,193m) 등을 꼽을 수 있다. (*치악산 비로봉(飛蘆峰1,288m)은 한자가 다르다.)

 

우리의 선인들은 많은 ‘유산기(遊山記)’’를 남겼다. 유산기란 유산의 기록, 즉 산을 노닌 체험을 쓴 기행문이다. 이러한 기행문은 고려시대 1243년에 쓰여진 진정국사(眞靜國師)의 <유사불산기(遊四佛山記)>를 그 원형으로 꼽는데, 고려는 불교를 중시했기 때문에 글쓴이는 제목도 불교적 색채가 짙다. 그러나 조선조 16세기 이후의 유산기는 주로 신유교, 즉 성리학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쓰여 졌다. 이들 유가(儒家)의 관자(觀者)들이 산을 향유한 방식은 겸재 정선의 화폭과 같은 전통산수화에도 잘 드러나듯, 관산(觀山)·요산(樂山)·유산(遊山) 등이다.

조선 중·후기 사대부들이 유산기를 쓴 것은 산수를 우주로 인식하는 자연관과 퇴계와 율곡이 성취한 조선성리학적 이념이 제시하는 이상적 삶을 구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산을 오른 생생한 감흥이 담긴 유산기는 당대 선인들의 자연관을 알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유산기는 대개 산행의 준비과정부터 시작되어 유산의 과정을 기술하고 글 말미에는 유산에 대한 소감을 술회하는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유산기에는 산을 오르는 과정과 동행한 사람들과의 교류, 산수 경관에 대한 묘사, 해당 산이 간직한 명승·고적·설화, 산사에 머물며 산승들과 나눈 대화, 자연으로부터 촉발된 흥취에 관한 기술 등이 담겨 있다. 단지 능선이나 정상을 오르기 위한 등산이 아니라 ‘입산’하여 산 안에서 경험함으로써 촉발되는 감흥과 더불어 산의 특정 공간을 점유하는 문화유산들까지 종합적으로 접근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공존하고 상생하는 생태적 사상을 선인들의 유산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선인들에게 산은 유락(遊樂)과 시흥(詩興)의 풍류 공간이자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심(道心)을 기르는 공간이기도 했다.

선인들의 유산 정신은 오늘날의 자연관과 등산 문화를 돌아보게 한다. 선인들은 산을 개발과 건강을 위한 매개물로 삼지 않았으며 자본주의적 발상에서 인간 위주로 개발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자연을 대상화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소백산 유산기는 퇴계 이황이 49세 되던 해에 풍기군수로 재임하던 1549년(명종 4) 4월 22일부터 26일까지 소백산을 등산한 「유소백산록」주3)이다. 그전에도 몇몇 기록이 있었다 하나 전해지지 않으며, 풍기 군수로 재임하던 주세붕의 유소백산록이 퇴계가 산행 할 당시에 석륜사에 현판으로 제작되어 걸려 있었다 하나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퇴계는 영남의 유림들이 소백산 유산록을 많이 남기지 않음을 아쉬워하였으나, 흔적을 따라 후인들이 소백산을 유람하며 남긴 유산록과 차운하여 지은 시가 많이 전한다. 퇴계의 「유소백산록」일부를 옮기면 다름과 같다.

 

산 위는 매우 높고 기후는 차서 세찬 바람이 휘몰아쳐 그칠 사이가 없으므로, 살아 있는 나무는 모두 동쪽으로 누워서 가지와 줄기가 거의 다 구부러지고 무지러지고 오무라졌으며, 4월 그믐께라야 잎이 피기 시작한다는데 1년 동안 크는 것이 푼, 치 정도에 불과하여, 앙상하게 (비바람에) 시달려 모두 애써 싸운 표정을 하고 있어서, 깊은 숲 큰 구렁에 난 것과는 매우 달랐는데, “거처하는 데에 따라 기운이 변하고, 기르는 것에 따라 체질이 변한다(居移氣 養移體)”는 말이, 사물이나 사람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석름(石凜), 자개(紫蓋), 국망(國望) 세 봉우리의 거리가 서로 8, 9리쯤 되는 사이에 우거져 한참 난만하게 피어 너울거려서, 마치 비단 포장 속을 거니는 것 같기도 하고, 축융(祝融)의 잔치에 취한 것 같기도 하여 매우 즐거웠다

 

소백산 지역은 인문지리, 자연생태, 산업·문화적 측면에서 다양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은 물론 미래 문화유산으로서 가치는 무한하다. 이 같은 가치를 재창조하기 위해 소백산 일대에서 국비로 추진되는 여러 가지 사업으로는 국립 백두대간 테라피 단지 조성사업, 산림치유단지, 국립 산림약용자원연구소 설립, 소백산 산양삼 테마 랜드 조성 등이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지자체끼리 소백산에 대한 주도권 싸움으로 비화되기도 하는데, 이 같은 지자체간의 과열된 갈등은 자칫 소백산을 훼손하는 난개발로 이어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최근 제기되는 4대강 개발의 논란은 자연에 대한 종합적이고 신중한 접근의 필요성을 절감케 한다. 이런 관점에서도 주로 경제적 측면에서만 소백산을 개발한다면 그 가치를 훼손할 수밖에 없다, 등산로를 만듦으로써 등산로 주위 자연의 황폐함을 방지할 수 있듯이 무조건 자연 그 자체로 존재하게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다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자연을 파괴하는 무분별한 난개발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4.

평지와 달리 같이 걸어도 산에서는 결국 혼자 걷는 시간이 많다. 게다가 신체적 심리적 차이는 물론 외적 자연도 경험하는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공간이 된다.

둥근 지구의(地球儀)를 놓고 보면 바다 위 조그만 돌출부에 지나지 않은 한반도이지만 산행을 다녀보면 우리 땅은 생각보다는 훨씬 크고 깊은 곳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러한 산에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나 인간세(人間世)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도 소백산은 소백, 연화, 비로에서 알 수 있듯, 산 이름부터 부드럽고 여성적이다. 아마 바위 위주의 골산(骨山)이 아닌 토산(土山)이기 때문일 것이다.(*능선 길 따라 드러난 바위들도 볼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산행은 그 과정이 힘들수록 즐거움과 환희는 배가되는 측면도 있지만 소백산은 전체적으로 토산이어서 기진맥진할 정도로 힘든 코스가 없다. 그만큼 여성적인 풍모를 지닌 부드러운 능선을 가진 산이다. 이러한 산의 특성상 소백산은 치유와 정화력을 갖춘 공간으로서도 그 가치와 중요성이 커질 것이다.

소백산 지역은 능선으로만 한정되는 공간이 아니라 하늘과 이어진 유장하고 거대한 공간이다. 천지(天地)와 산수(山水), 즉 산과 물을 중심으로 한 자연에 대한 동양적 세계관은 오늘날에도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천지와 산수를 중심으로 한 세계는 불가(佛家)의 적멸(寂滅)이나 도가(道家)의 허령(虛靈)으로는 정의할 수 없다. 이러한 세계는 색(色, 형체 있음, 땅)과 공(空, 형체 없음, 하늘)이 천변만화(千變萬化)로 공존하고, 살아 있는 생명체와도 분리되지 않는다. ‘유산’의 참 뜻을 알았던 이 땅의 옛 선조들은 그들의 기록에서 매우 다채롭고 풍부한 감성을 드러내는데, 불확정성으로 가득찬 모호한 세상으로 보는 현대물리학적 세계관이나 자유로운 현대예술가들의 감성과 대조해보아도 모순되지 않는다.

특정한 산에 대한 산행은 일회적이지만 내 몸이 느끼는 산행의 가치와 진정한 의미는 산행 이후에 생겨난다. 퇴계의「유소백산록」이나, 명산을 탐승하면서 진경산수를 그린 겸재 정선과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린 세잔 등의 그림에 특히 잘 드러나듯, 자연과 인간이 깊고 넓게 교감하는 과정에서 자연의 무한한 다양성을 체험하게 되고 그만큼 의미가 커진다. 이런 차원에서 체험의 공간은 제한적이고 그 시간도 일시적이지만 그 체험의 감응과 진폭으로부터 비롯되는 의미와 가치는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주4)

 

2013. 10. 24.

도 병 훈

 

주1)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야생 국화인 구절초이다. 나는 이번 산행 전까지 구절초와 쑥부쟁이, 그리고 개미취 이 세 가지 꽃을 구분하지 못했다. 워낙 비슷하게 생긴 야생 국화들이라서 이들을 흔히 들국화라 통칭하지만 정식 학명이 아니다. 구절초는 흰색인데 쑥부쟁이는 연한 보라색이다. 그리고 만개한 상태를 보아 꽃잎수가 많고 측면에서 봤을 때 꽃잎이 완전히 젖혀지도록 핀 것이 쑥부쟁이다. 개미취는 쑥부쟁이에 비해서 꽃잎수가 적고 만개한 꽃을 측면에서 보아 뒤쪽으로 젖혀지지 않고 앞쪽으로 몰린 듯이 보이는 꽃이다. 이외에도 소백산의 야생화는 철 따라 매우 다양해서 산국이나 감국도 이번 산행 후 소백산 야생화를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

 

주2) 이 시의 한글 해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 시구가 납득되지 않아 하산한 후 자료들을 찾아보았더니, 위의 해석 외에도 ‘천지자연의 비밀을 귀신도 깨뜨렸구나, 하늘 땅 이룬 조화 귀신인들 어쩌리’ 하늘과 땅이 이룬 조화 귀신도 울었소, ‘하늘땅에 귀신도 인색하지 않았구나’ 귀신인들 경계가 너무나 명백하여 감히 속이려 덤빌 수가 없구나. 등 해석이 다양했다. 이는 ‘귀파간’에 대한 해석의 차이 때문인데, 그 어느 구절도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향후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겠지만 바로 위 세 번 째 시구의 핵심이 경계가 분명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무엇보다 이 시 전체 핵심어가 ‘지설천성’이므로 ‘하늘과 땅이 함께 만들었으니 귀신도 범접할 수 없네.’ 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래서 이 시를 다음과 같이 다시 해석해 보았다.

 

소백산과 태백산은 연달아 이어져

백리에 걸쳐 구불구불 구름사이로 솟아 있네.

뚜렷하게 가른 동쪽과 남쪽의 경계는

하늘과 땅이 함께 만들었으니 귀신도 범접할 수 없네.

 

이 시에 나오는 ‘땅과 하늘’이란 동양적 세계관이나 현대 과학적 시공관에 의하면 빅뱅 이래의 거창한 시공계라기보다는 우리 이 지구라는 태양계의 혹성을 둘러싼 바이오스페어(Biosphere)를 가리킨다.(*김용옥 지음, 노자와 21세기(하) 통나무, 1999, p16 참조)

 

주3) 이 글은『퇴계집』에 전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퇴계는 4월 22일 소수서원에서 묵고 민서경(閔筮卿)과 그의 아들 민응기(閔應祺) 등과 함께 죽계를 거슬러 초암(草庵)으로 올랐고, 묘봉암(妙峯庵)에서 온 종수(宗粹) 스님의 안내를 받아 철암(哲庵)ㆍ명경암(明鏡庵)을 지나 석륜사(石崙寺)에서 이틀 밤을 잤다. 이어 봉두암(鳳頭巖)ㆍ광풍대(光風臺))ㆍ백운암(白雲庵)ㆍ석름봉(石凜峯)ㆍ자개봉(紫蓋峯)ㆍ국망봉(國望峯)ㆍ중백운암ㆍ상백운암ㆍ제월대ㆍ환희봉(歡喜峯)ㆍ산대암(山臺巖)ㆍ자하대(紫霞臺)ㆍ적성(赤城)ㆍ백학봉(白鶴峯)ㆍ백련봉(白蓮峯)ㆍ금강대ㆍ화엄대ㆍ금당(金堂)ㆍ하가타암(下伽陀庵)ㆍ보제암(普濟庵)ㆍ진공암(眞空庵)ㆍ하가타암을 유람하고 관음굴에서 잤다. 산행 5일 째인 26일 박달현(博達峴)과 비로사(毗盧寺)를 경유하여 욱금동(郁錦洞)으로 내려왔다. 이 같은 퇴계의 「유소백산록」을 통해 조선시대인 당시에도 소백산에 수많은 암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4) 소백산을 다녀와서 인문학적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그간 궁금했던 고향의 입향조 이름과 관련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입향조는 도운봉(都雲峯, ?~1416)공으로 여말 선초 절개를 지킨 충신으로 알려진 청송당 도응 공의 4자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청송당의 부친은 여말의 권문세족으로 황산대첩에서도 이성계와 함께 공을 세웠던 도길부공이다. 이 분이 여말에 최영과 이성계 일파와의 권력다툼 과정 중 발생한 무진화변(戊辰禍變)에서 이인임 일파로 몰려 염흥방 등과 함께 참살 당할 때, 청송당 도응 공은 장인인 우인열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게 된다. 조선 건국이후 태조 이성계는 청송당 도응 공에게 벼슬을 내리는 왕지를 여러 번 제수하였지만, 청송당은 끝내 거부하고 지금의 층남 홍성에 거주하다 생을 마감했다.(당시 내린 왕지 4점과 녹패 1점은 지난 1980년대에 보물 724호로 지정됨).

청송당의 후손들은 충청도나 경상도로 흩어져 정착해서 살게 되었는데, 청송당 공의 4자인 도운봉 공은 풍기 백운봉(白雲峯) 아래로 이주했다가 이름을 ‘운봉(雲峯)’으로 개명한 후 지금의 경북 군위군 효령면 성동의 입향조가 되었다는 기록이 문중의 문적 및 족보에 전한다. 그래서 그간 풍기와 영주 지역을 중심으로 백운봉이란 봉우리에 대해 현재의 지도는 물론 옛 지도인 대동여지도 등에서 찾아보았지만 풍기 지역에서는 이런 산봉우리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소백산을 다녀와서 이 지역에 대해 탐색하는 과정에서 소백산 자락에 위치한 예천군 상리면에 백운봉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곳이 현재의 위치상으로 풍기읍 바로 옆이어서 그 연혁을 찾아보았더니 백운봉이 위치한 이 지역이 원래는 풍기였는데 일제강점기인 1923년에 예천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된 사실이 적혀 있었다.

조선시대에 충북 단양과 영주(풍기)와 예천 사이를 가르는 소백산 줄기를 넘는 재로는 저수재(해발850m)와 죽령(해발698m) 이 있는데, 이 중 현재의 예천군 상리면으로 통하는 길은 저수재이고 죽령이 현재의 풍기나 영주로 가는 길이었다. 역동 우탁 선생(도응 공의 장인인 우인열의 선조임)을 비롯한 단양 우씨들이 단양 뿐 만 아니라 현재 예천군 상리면에 고려 말부터 세거했다는 사실을 통해, 입향조도 단양에서 저수재를 넘어 이곳 백운봉 아래로 이주했음을 실증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올해 초『도운봉공 서씨부인과 포죽도』란 책을 간행할 때, 청송당의 장인인 우인열이 고려말의 명문세족인 단양 우씨여서 도운봉공이 단양을 거쳐 영주 풍기로 이동했을 것으로 짐작된다는 추정을 한 바 있는데, 이번에 ‘풍기 백운봉’이란 지명을 지역사적 연원을 통해 그 이주 경로를 분명하게 확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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