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현
조회 수 : 122
2018.05.01 (10: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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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미학  19

 b   自然展開의 技術

  이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두나의 중요사항의 相위를 얼마간 보다 상세히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될것이다. 자연은, 한편에서는 기술적인 제작(포이에시스)에서, 다른 편에서는 미적인 실천에 있어 어떻게 현전하고 있는가 라고 하는 점을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하나의 광대한 연구영역이며, 이에 관해서 여기서 그 대부분에 대해 고찰할 수는 없다. 내가 주의를 집중하는 시점은, 자연에 대한 한편에서는 기술적인 관계와 다른 한편에서는 그 미적인 관계와의, 다른 시간구조이다.

   자연계에 놓여 있는 기술적행위는, 자연의 재료와 연관되는 수행적행위이다. 이 행위가 무엇인가를 수행해 낼 수 있기 전에는, 그것은 자연의 재료로 향한 자연의 변화, , 산정할 수 있는 대상물이나 사태로 향한 자연의 변화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연은 대상영역이 되지 않으면 안되며, 그와 더불어 [대립하는] 물의 계산가능한 공간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기술적태도에서는, 자연은, 자연의 생활세계적분절에서 많턴 적던 집어 낼 수 있는 생활공간의 구성으로서가 아니고, 그 생활공간에 있어서의 객체의 영역으로 모습을 들어 낸다. 분명히 이 행위 역시 실천적구상과 체험적세계의 톤택스트안에 있는 것이지만, 허나, 그것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이 콘택스트에 의해 제시되는 목적의 달성과는 연관이 있다. 그것은 목적지향적행위이며, 설정된 목적을 달성함에 성공한다면 풍요로운 성과가 기대된다. 그것은 이 목표에 나타나 있는 상태에 자연이 접근해 감에 의해 그 설정된 목표에로 접근해 간다는 시도안에 있는 행위이다. 이 접근을 발생케 하는데 기술적조작은 집중하는 것이다. 기술적자연의 시간은 직선적인 시간이다.

   이 시간형식에서 나는 미적자연의 [별도의 시간]을 앞서 구별하였는데, 그 시간이란, 살아 갔던 세계에 대해 그것과는 상반되는 제입장의 동시적경험으로써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다원적으로 수행을 방향잡혀진 활동의 시간이며, 간략화를 위해 우이들은 이를 [동시적시간]이라 명명한다. 분명히 기술적인 행위는 결코 직선적인 시간의 유일한 형식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나, 허나, 그것은 지극히 순수한 형식에 있어 이를 성립시킨다. 마찬가지로 미적으로 지각된 자연에 있어서의 시간은, 동시적인 시간의 유일한 상태는 아니지만, 허나 그 결출한 제형식의 하나이기는 하다. 자연의 미적직관은, 그것이 그 공간의 의미깊은 질서하의 관조적으로 잠입하며 또한 상상적으로 넘어서려고 할 때 조차 늘 체험되는 공간의 현상성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미적직관은 이 공간의 내부에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의미소원적. 의미부수적. 화상충만적소여의 교체안에서 그 공간을 공간으로써 현출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그 공간을 생기하는 공간으로써 탄생시킨다. 이 공간에서의 사물은, 이와 같은 생기를 일으키는 묘개물이 되는 것이며, 사용을 위한 도구적인 것들을 갖는 객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미적자연지각의 실행은, 조작적인 것이 아닌 자연의 변종에 대한 미리 주어진 목표에 의해 이끌어지지 않는 주의의 시도이다.

   기술적행위도, 물론 동시적과정과 연관되며, 객체나 일들에 관한 시간동일적조작과 연관되는 것과 같이, 이들의 시간동일적소여성과 연관된다. 허나 여기서는 시간의 안의 동시성이 문제가 되는 것으로, 이와 반해 [동시적 시간], 즉 상호작용하는 동근원적인 조우방법의 변종과는 연관되지 않는 것이다. 기술적자연지배의 시간은, 의도의 틀안에서 계산되며, 목적을 실현하는 도상에서 지나며, 소비되는 시간이다. 이에 대해서 자연에 있어서의 미적실천의 시간은 도구적활동과는 반대로 사람이 [천천히 여유를 가지는] 시간이다. 직선저시간경험은 어디까지나 시간동일적시간의 경험가능성의 조건이라고 하는 것이, 그기에 있다. 동시적시간 때문에 직선적시간관계로부터 떨어질 수 있도록 우리들은 직선적기간관계를 뜻되로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자연미의 [별도의 시간]이 어디에 성립하는가 라고 하는 것이, 이제와서 보다 명확해 젔다. 그것은, 순수하게 수행되는 행위로부터의 충실한 거리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이 거리는, 이미 언급한바와 같이 단지 거리단순히 기술적행위의 거리에서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도구적 방향짓는데서에서 부터의 거리이다. 그것은 자연안에서 특별한 가능성과 만나며, [자기목적적] 행위을 위한 거리일것이다. 직선적시간을  - 일례로 기술적행위의 시간을 충실해 있는 시간, 동시적시간으로써 예를 들면, 미적자연직관의 시간으로써 충실한 시간으로써 역의 모양으로 기술해 보고저 하는 욕구를 배울수 있을는지 모른다. 일련의 이유에서, 허나 이것은, 단순에 불과한것이다. 첫쩨로 자연미의 충실한 시간은, 여기서는 일정의 행위목표가 채워질것이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종류의 여하한 목표도 그기에는 없다는 것, 또는 이 종류의 목표가 멈추게 되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종류의 여하한 목표도 그기에는 부재하다는 것, 또는 이 종류의 목표가 멈추는 것에 지배권을 휘둘지 않는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종류의 목표가 멈추게 되는 지배권을 휘둘지 않는다는 것에 있는 것이다. 두번째로, [동시적]시간은 반드시 [충실한] 시간이 아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미적자연의 양의성에 관한 연구에서 다룰것이다. 세번째로, 수행적행위의 직선적시간은, 반드시 실존적으로 [공허한] 시간은 아니다. 그것이 공허한 것은 다음의 경우에서 만으로, 그 시간안에서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 외의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의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 또한 그 목표달성의 형식이 가치가 있는 것으로 지각될 수 없을 경우, 또는 그 목표달성의 형식이 가치 있는 것으로 지각될 수 없을 경우, 또한 그 방법이 그 행위의 목표가 되지 못할 경우이다. 목표에 방향잡히는 행위는, 동시에 수행의 방향잡힌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그와 더불어 직선적시간도 어느정도 충실한 시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주는 교훈은 기술적행위와 관계된다. 기술적행위는 직선적시간안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그 행위가 필연적으로 소외되어 있다던가, 파괴적이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행위는 수행에 의해 방향지워저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동시에 깊이 고려된 목적설정하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능적으로는 자기목적적행위로써, 또는 기술적인 목표에 방향지워저 있는 행위로써, 그 행위가 미적으로 포함적인 지각의 영역의 건너편에 있다고 하는 것은, 원리적인것은 아니다. 기술적행위를 그 수행에 있어 제어하는 미적지각이란 것은 있을 수 있다. 기술적인 수행은 목표에 방향잡히지 않는 존재의 콘택스트에 대해, 내적논리에서 봐서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으로, 기술적인 수행이, 대응하는 시간형식의 산출을 목표로 삼는 것은 가능하다. 확실히 기술적행위는, 아름다운 자연의 생기를 직접실행하는 것은 아니나, 허나, 그것은 생활안의 형성물을 만들 수는 있으며, 개입함이 허용되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토지를 정돈할 수는 있는 것이다.

   자연보전의 기술, 또는 경우에 따라서는, 더욱 자연획득의 기술 우리들은 이를 자연전개의 기술이라 말하자 , 첮쩨로 비기술적인 목표를 갖지 않으면 안 될것이며, 또한 두번쩨로, 그 수행에 있어 이 목표의 지각이 가능하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선행하는 고찰이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다면, 적으도 이것은 가능할것이다. [소극적인] 기술도 역시 자연지배의 기술일런지도 모르나, 허나 그것은 단지 좋은 의미에서이다. 이 기술도, 자연의 재료에 연관되는 목표로 향해지는 작업일것이나, 물론 특수한 수행형식과 특수한 종류의 목표등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쫍은 의미에서의 도구적행위여서는 안되며 넓은 의미에서의 도구적행위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자연의 이 관대한 기술은, 그 자신 하나의 미적기술이 되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허나 비예술적미적기술, 그것은, 그것이 목표로 삼는 자연을, 그 기술의 작품으로 성립시키는 시도이지 않으면 안될안될 것. 그 작품안에서 자연을 변화시키려는 욕구의 기술은 자연파괴의 단지 다루기 힘든 형식일 뿐이다.

   이 과제는 충분히 역설적이다. 자연의 미적기술은 생산될 수 없는 것을 생산하는 것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생산은 이루어젔던 목표상태에 關知하지 않는 생성이 아니면 안될것이다. 그것은 자연과 맺으진 시작의 상태의 생산이 아니면 안 될것이다. 물론 가장 간단한 것은 이것이 현재에 있는 것과 같이 그렇게 자연의 영역을 방치해 두는 것이다. 자연지배의 거리는 이 []의 기술에서만이 완전한 것이다. 보다 구하는 것이 많은 가능성은, [사라저 가는] 기술의 사용인바, 그기서는 자연발생적인 토지를 보존한다던가 혹은 인간이 품는 이미-지에 따라 이를 성형한다전지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재생시킨다던지 혹은 계획적으로 그것에 첨부한다던지 하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또한 최후에 허나 자연의 미적기술의 순수한 가능성으로써 상호작용적통일과 간섭적 통일사이에 있는 영국의 정원과 같은 手本에 따라, 자연에 충만한 공간을 다양한 색으로 변화시키는 것등도 들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을 더한 여러가지 가능성사이의 서열은 어떻게 기초지워지는가 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  어떤 자연보전의 형식이 적당한 것인가 하는 것이, 그때 그때의 자연환경에 있어 문제가 된다. 자유로운 자연이 반드시 손 안될 수 있는 자연이 아닌것과 같이 방치해 둔 자연이 반드시 매력적인 자연이 아니다.

   손 안된 자연 혹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자연을, 시비하던, 기술적으로 손 안된체로 만드는 것의 미적근거란 없다. 자연의 미적기술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수정, 언제든 現에 있는 자연상태의 수정일지라도 상관없다. 그러나 자연의 미적기술이 수정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자연의 제어되지 않는 활동이라기 보담, 오히려,,제어되지 않는 기술적제어에 의해 초래되는 자유로운 자연의 말살이다. 이와 같은 말살을 앞에 둔 자연의 보호의 경우, 머저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자연미일 수 있는 인간의 결출한 생존가능성성의 보호일 것이다. 자연의 미적기술이란, [동시적시간]을 산출하는 기술을 일컫는 것일 것이다. 그것은, 완수된 인간적실천을 가능케하는 장소를 확보하는 시도이며, 또한 다시 이를 성립시키는 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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