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현
조회 수 : 524
2018.04.17 (10:29:08)
extra_vars1:   
extra_vars2:   

자연미학  17

  b  이중의 원상성

   미적자연과 미적예술은 많은 점을 공유하고 있어나, 양자는 카테코리-로써 구별된다. 그럼으로

자연에 대한 예술의 미적우위, 혹은 예술에 대한 자연의 미적우위에 대한 물음은, 그 물음 일반이 새로 세워지기전에, 이미 해결된 것 같이 생각됨이 틀림없다. 어떤 방식에서는 그건 그렇다. 이 대치적인 개관은 양자의 동등한 현상으로써 현출시킨다. 예술에 대해서도 혹은 자연에 대해서도 미적우위를 인정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 오래된 물음은, 그것과 더불어 모든 것이 片附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바로 양자의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차이에서, 예술과 자연은, 상호적강화라고 하는 의미에서, 서로가 [원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예술의 수정이며 또한 예술은 자연의 수정이다. -데에 의한 칸트 독해에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정식을 차용할 수가 있다. 자연과 예술은 [의도적으로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그럼에도 미적으로 [서로에 대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이미 제3장에서의 자연과 예술사이의 제약된 비교의 결과였다. 이 결과는 지금이야말로 일반화 될수있는 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 배교의 조건이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이 비교는 지금에서는 예술과 자연에 있어 상상만의 헤당은 아니나, 허나 또한 단지 타의 두개의 차원이 첨가한것도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자연과 예술의 미적통일형식은, 서로에게 手本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은, 그것이 예술에 머물고저 한다면, 자연의 통일성에 도달할 수 없으며, 자연은, 그것이 자연에 머물려 있으야 한다면, 예술의 통일성에 도달할 수 없다. 새로운 비교는, 따라서, 개개의 자연미적인 공간이나 개개의 예술미적인 작품에 관계해서는 안되며, 예술이나 자연 일반에 있어 가지각색의 미적 매혹의 소여에 관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새로운 비교는 그 작품의 다수성에서의 미적예술과 관계하며, 또한 그 시간과 공간의 相違에서 미적자연과 관계한다.

   개개의 예술작품은 그렇치 않으련지는 모르나, 허나, 아마도 전체로서의 예술은, -든 자연경험의 수정이다. , 우리들이 자연을 전체없는 통일로써 경험하는 경우, 우리들은 자연을 제한없이 미적으로 단지 경험한다는 기억. 자연의 미적통일이 아니고, 모든 미적자연의 가변성과 동시성은, 성공한 예술작품의 산출과 수용의 수정이다. 말하자면, 한번 뿐인 구성의 분절가능성은, 예술적으로 창작된 형식의 과정적 독자적 생의 창조와 지각에 대한 수본이며, 미적예술은, 자연에 있어서도, 또한 미적차원성과 차이의 지각에 대한 원상이다. 자연의 우연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격정은, 아무리 逆의 사태일지라도 예술의 금이 들어가 있는 풍경에 대한 격정에 속해 있다. .

   이와 더불어, 최초의 비교명제에서 굳게 보지되었던 자연과 에술과의 논리적인 비대칭은, 규범적대치의 노정에 의해 補足되었다. 그 논리적인 관계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십전한 의미로, 아름다운 자연이 존재할 수 있기에는, 성공한 예술작품에의 관련이 없어서는 안된다. 성공한 예술이 존재할 수 있기에는, 자연과 자연미와의 내용적인 관련은 필연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술과 자연의 이중의 수본성의 명제는, 이 서술적인 언명을 규범적 원칙에 의해 지지한다. , 십전한 의미로 아름다운 자연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성공한 얘술에 대한 감수성이 없어서는 안되며, 성공한 예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연미에 대한 감수성이 없어서는 안된다. 예술이 성공할 수 있기에는, 확실히 자연과의 내용적관련이 없어도 되지만, 자연이 예술속에 어떤 방법으로 [나타나]지 않아도 좋다. 허나 자연의 긍정적인 우연성이나 예술작품에 있어서의 그 반영에 대한 미적인 감지능력은, 어디가지나 예술의 성공의 조건이다. 여기서는 자연에의 에술의 [내용적] 관련 대신, [미적] 관련에 대해 논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명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예술 (혹은 예술지각), 그것이, 지접적이이던 간접적이던, 혹은 의식적이던 非의식적이라도, 자연미에 미적관련을 갖을 때만이 성공한다. 죤즈와 같이 그 그림의 주제에 있어 자연에서부터 먼 예술가는, 바로 이점을 증명하고 있다. [나는 어떤 物이 한때 있었던 것으로부터 사라지는 것, 어떤 물이 현재에 있는 어떤 물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되는 것, 어떤 물을 정확히 확인하려는 순간, 그 순간이 사라져 버리는 일, 언제든지 보던지, 말하던지, 그것을 그대로 두던지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또 다른 대목에서는, [눈은 눈짓이 향하는 자연안에서 항상 무엇인가 새로운것을 찾아 낸다. 나의 작품에서도 같은 가능성이 있다].

   이들 모든 것은, 예술과 미적자연은 역사속에서의 이들 서로 다른 입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공통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예술과 자연의 미적차이化 의 역사이다. 이 예술과 자연의 공통의 역사는, 양자의 상호적인 우위를 늦으지면서도 승인했던 역사로써, 즉 양자의 미적동등성의 역사로 기술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하나의 [발명]이기는 하지만, 그 의미는, 발명가의 지배하에서는 없다는 것, 그 발명가의 그림에 따라 창조되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미적예술은 그렇게 추측되어지는 것이나, 미적예술의 정반대의 것으로써 자연미를 발전시킨 존재를 낳았던 것이다. 많은 예술작품이 간섭적인 것이 되고, 또한 그것들과 더불어 예술이 전체로써 강한 의미에서 다원적인 것이 되어버린 뒤에 가까스러 자연은 미적제차원의 상호작용적과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술의 가변성과 동시성의 발견과 더불어 종류의 다른 자연의 가변성과 동시성의 발견에 이르렸던 것이다. 자연의 미적자율성은, 따라서 예술의 미적자율성의 불가역적인 결과일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간섭적작품의 출현후의 예술이 전체로써 통합적묘사의 이상에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것과 같이, 예술에 의해 파괴된 미적자연의 전체성을, 예술에 의해 다시 수립할 수 없는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때 이래, 역사적으로 예술에 의해 해방되었던 자연미의 공간은, 예술에 의해서는 이미 파괴될 수는 없는 것이다.

   허나 이는 잘 알려저 있는 바와 같이 진실이 아니다. 미적예술에 의해 열려진 자연의 자유공간은, 예술에 의해 크게 파괴될 수 있는 것이다. 미적예술에 의해서가 아니고 허나 기술적 [예술]에 의해 장합에 따라서는 미적예술과의 동맹에서, 확실하게 자연의 위헙이 기술적자유처리의 책임이라면, 우리들은 미적자연의 해방 자연 [전부]의 미적지각에의 인간의 해방 의 그 취분을 횅령해서는 안될 것이다. 미적예술과 기술적예술은, 자연의 소원함이 호감을 갖고 마지한다면, 또한 자연의 우연성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그 거리를 만들어 낸다. 미적자연의 역사는 기술적예술의 역사없이는, 쓰여지지 못할 것이다. 휠씬 강력한 정도에 있어 자연의 제어는, 자연의 보다 자유로운 동생으로써, 이 기술적 [예술]에게는, 물론 처음부터의 것이다. 그 목표가 과연 타의 것인지 어떤지 하는 것은 조금도 확실하지 않다.

번호 제목 조회 등록일
Selected 자연미학 17 524 2018-04-17
1445 자연미학 16 591 2018-04-08
1444 자연미하 15 722 2018-03-29
1443 자연미학 14 644 2018-03-25
1442 자연미학 13 643 2018-03-24
1441 자연미학 12 559 2018-03-21
1440 자연미학 11 613 2018-03-16
1439 자연미학 10 640 2018-03-13
1438 자연미학 9 562 2018-03-10
1437 자연미학 8 617 2018-03-04
1436 자연미학 7 524 2018-03-03
1435 자연미학 6 739 2018-02-19
 

17598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이박골길 75-33 | Tel. 031-673-0904 | Fax. 03030-673-0905 | Email: sonahmoo@hanmail.net

Copyright ⓒ 2002- Alternative Art Space Sonahmoo all right reserved.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