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현
조회 수 : 296
2018.02.19 (12:3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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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미학  6                                                                    

  二, 예술작품의 통일성               

  자연미학과 같이, 예술의 미학 역시 상상. 조응. 관조의 분석을 포괄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술의 상상적개념만으로는 많은 예술작품의 통일성을 이해시키기에는 너무나 협소하다. 그것은, 동시에 또한 예술에서, 자연의 미적통일성에 대한 새로운 눈짓을 획득하기에도 너무나 좁다. 우리들의 당초의 배타적 – 배타적이며 상상적 – 인 예술개념을, 예술 및 예술작품을 미적으로 포괄적 개념으로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감히 추측해 본다면, 예술작품의 통일성은, 미적통일성으로 사료된다.

  나는 몇 개의 예술쟝르에 관한 개략적인 고찰에서 시작해 볼까 한다. 그것은 규범적인 예술개념의 정식화로 통하는 것이나, 그것에 이어 [간섭적] 내지 [통합적] 예술작품끼리의 구별은. 이 규범적인 예술개념에, 보다 예리한 역사적인 윤곽과, 보다 명확한 방법론적 스테이트스를 빌려준다. 이 둘째번의, 예술에 관한 긴 補說에서는, 많은 것들이 불철저한것으로 머물것이나, 미적자연의 기본구성에의 최종적인 통찰을 획득하기 위해서 필요한 정도로만 언급 되어 지는 것으로 사료된다.

      a  몇가지예술

   이하의 스켓치는, [배타적] 예술과 [포용적] 예술의 구별을 계기로 하여 예술이론의 측면에서 우리들의 세가지 카테고리-의 진가를 시험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몇가지 결착은 이미 나 있다. 배타적으로 관조적인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보았다 시피 있을 수 없다. 배타적으로 조응적인 예술은, 어디서든지 있다 – 그것은 일상적인 생의 (직업적 혹은 개인적인) 양식화의 예술이며, 따라서 휠씬 넓혀진 예술이다 --- ,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좁은 의미로 예술이 화제가 될 때, 거기서 생각될 수 있는 것 같은 예술에 어떤 사례도 제공하지 않는다. 관조적이며 조응적인 미적객체는, 내가 생각하기로는, 동시에 상상적객체가 문제가 될 때 처음으로 쫍은 의미로 예술작품으로 료해되는 것이다. 그러함으로, 예술의 상상적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제3장에서 이미 언급했다 시피 예술의 기본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단지 순수하게 상상적인 예술만이 배타적예술의 사례를 제공해 주게 될것이다. 포괄적예술에 대해서는, 미적기능에서 어느것이 그것이며 각기 다른 장합에 중요기능인지 하는 것이 더욱 문제가 된다. 1차원 이상으로 분절화되는 모든 예술쟝르는, 현저하게 상상적으로 분절되는 까닭이 없다.

   회화의 경우는 확실히 그렇게 보인다 – 적어도 뒤샹까지의 회화에 있어서는, 그것에 따른다면, 회화는 전체로서 본다면 포괄적예술이며, 거기서는 상상적인 분절화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 일례를 든다면, 회화는 전체적으로 본다면 포괄적예술이며, 거기서는 상상적인 분절화가 대단히 중요하다. --- 예를 들어 보면, 금세기의 회화가 그 모체의 전형적인 방식을 변화시키고 거기에 이를 분쇄하는 것에 거듭 힘을 쏟았다고 하더라도, 뒤샹의 작품의 일부는 --- 물론 그 자체가 매우 상상적이며, 따라서 역설적이지만 --- 예술로부터 모-든 상상을 쫓아 내는 시도이다. 컨셉추얼 아-트는, 시각적모체를 비감각적 상상의 모체로 변화시키는 것을 실험하는 것인데, 그것은, 스스로의 관조적심화가 같이 조응적해방을 거부한다. 한편, 워-홀의 공적은 근대예술에 다른 누구보다 그 조응력을 상기시켰다는 점에 있다. 이들이, 조형예술의 미적. 포괄적인 통일성을, 과격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주제화하는 바로 그 점에서, 그 통일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조형예술은 약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강한 의미에서 포괄적이라고 하는 것이, 조형예술의 특질을 확실하게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회화는, 관조적이며 조응적인 예술의 상상적이며 포괄적인 통일성이다. 거기서는 --- 규범적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료해된 --- 통상의 사례에서 상상적으로 세계에 제시하는 계기가 중요기능을 다하는 것이다.

  이 사실이 옳바르다면, 우리들은 회화의 생을 그 미술관적生 에 완전히 묶어 놓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미술관에서의 화상은 그 전적인 화상이 아니다. 미술관이라고 하는 것은 조응적으로 중립인, 아니 오히려 반 – 조응적인 문맥속으로 던져지는 따라서 그 실존적인 콘텍트에로의 복사로부터 절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조응적차원을 위해 그 화상의 여분을 끊어 버리는 것도 가능할것이나 그러함으로 해서 그 화상으로써의 힘은 분명 저감되지만, 그러나 아마도 파괴되는 일은 없이 다시 화상으로써의 흔적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즉, 필요하다면, 화상은 자기와 관찰자와의 사이의 공허한 공간과를 무엇인가 절충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점은 조각에 대해서는 해당되지 않는다. 조각은 전개하기 위해 공간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스스로 이를 전개시키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조각은 강한 의미에서 포괄적예술이며, 그기서는 공간형성적기능이, 전면으로 내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볼까 하는데, 이 사례는 동시에 예술미에 관한 최초의 補說의 한 면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도널드. 져드의 1969년의 작품 [무제, 여섯개의 스칠 복스](현대미술관, 바-젤)는 각각 1미-터의 가로 세로를 갖는 평면으로 늘린 스틸로 된 6개의 입방체는 공간을 테-마로 하고 있으며, 바로 공간을 느끼게끔 줄세워져 있다. 여섯개의 입방체는 공간을 테-마로 하고 있으며, 곧바로 공간을 느끼게끔 함에 집착하고 있으며, 그 공간은 조각적 지각의 한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공간적 지각의 제조건을 그려낼수 있도록, 곤혹스려운 공간 – 곤혹시키면서 정밀하고, 무한하며, 중립적인 공간을 --- 낳고 있다. 미니멀리즘의 [逆性 의 상상]에 대한 나의 소견은, 여기서는 그렇게 료해되어도 좋을것이다. 허나 이것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우선 인스트러레이선의 지각반성적계산은 결정적으로 예술반성적의미를 갖고 있다. 이들 기계적인 배치나 공업적제작에 있어, 그것들은 관찰자와의 모든 대화나 모든 아니미즘적인 시각을 거부하고 있다. 그들 입방체는 [생명이 없는] 객체이며, 그것들은 신체적 근접.애착.압도력을 느끼게금하며, 브랑크시나 쟈코맷티에 이르는 형상표현적인 조각에 있어 조각적형성물에의 [자연적인]반향이다. 조각의 조응적연출은, 이런 반감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이 형성하는 공간은 부조화로운 숭고한 공간이며 그것은 의인적도식의 피안의 세계를 보는 관찰자의 자유이외의 어떤것과도 조응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그것의 역설이다. 즉, 그것은 관조적인, 정돈되지 않는 공간의 정비이다. 쟛드는 뒤샹과는 달리, 사물관조를 의도하는 것이며, 그에게는 공간을 관조하는 상태가 중요한것이다. 허나 이것은, 예상할 수 없는 예술적인 정비임으로 해서 혹종의 흔들리는 불안정한 상태가 일어나도록 한다. 그 상태에서는 작품에 의해 정돈될 수 있는 공간에의 기대는, 그것이 새롭게 성립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관조적부정으로 다시 돌려지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 산출장소에서의 엄숙함으로 해서 상황형성적인 산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조각이 그 극단에 있어 강한 포괄적공간예술인데 대해, 공간예술의 타의 고전적인 사례인 건축을, 배타적조응적예술로 보고저하는 유혹에 이끌릴지도 모른다. 건축은 그것이 단순한 몸짓의 강조가 아닌, 실존적공간의 영속적건설이라고 하는 점에서, 실용물의 형태화나 생의 보다 넓은 모든 양식화와 구별된다. 이 사실은 분명히 많은 건축에 헤당되는 것이나 허나 건축예술에는 반드시 헤당되지 않는다. 그들 작품은, 그 사회적.기술적인 목적을 실현하지만 그건 단지 그것들이 이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다. 아드르노에게 이점은 위대한 건축의 판정기준이다. 아드르노에 이어 알프렛.뷀마-는, [건축이 동시에 우리들의 세계경험을 표현하고, 대상화시키며 또 변환시킨다면, [분절화된 공간]의 형성에서, [바로 [기술적]인 의미에서 기능적인 것 같은] 진정한 [기능적]인 건축이 성립될 것이다, 라고 논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은 그 건물속에서 작동하며,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성립할뿐 아니라, 그 주연에서 생활하고, 혹은 그 건축물을 단지 관찰할 뿐인 사람에게도 성립한다. 성공한 건축의 [분절화된 공간]은, 내적이며 외적에도 실존적으로도 상상적으로도 분절화된 공간이다. 18세기의 전원예술은 그것은 건축의 유일한 표본에서 벗어나서 또 새로운 풍경화가를 신성한 것으로 만든 한에서는 건축에 관해서도 하나의 진리를 발견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 진리라는 것은, 공간을 타개해 내는 것으로 보다 위대한 공간통일의 예술적 형성은 --- 양자의 동일성을 항상 신경쓰지 않고도 – 공간의 상상을 동시에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더욱 건축은 그 재료의 자중을 용인할 수 있고, 그건 분명히 그 공간의 전체이지는 않으나 아마도 공간에서 강조된 부위를, 관조적인 예외상태을 위해 자유롭게 하고, 대리석이나 현무암, 유리나 강철, 나무나 벽돌로 옛날부터 성공해 왔던 것은, 콘크리트로도 잘 되어지는 것이다. 예술로써의 건축은 다른 말로 해 본다면 약한 표괄적인 --- 주로 조응적인 허나 또한 상상적으로 잘 나간다 면 관조적이기까지 하는 ---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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