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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9 (11: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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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미학 4 –  b 照應

간혹 예술작품은 생의 상황의 표현일뿐 아니라 그러한 상황을 구체화한 부분이다. 더욱 예술작품의 상상은 世界內 존재의 일정한 상황을 모사할 뿐 아니라 이 모사의 힘으로 생의 일정한 상황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혹은 그러한 상황에 윤곽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외적]인 표현임으로 해서, [내적]인 미적표현을 획득하고 있다. 내가 막스.ㅇ엘런스트의 어스럼한 숲의 그림의 하나를 나의 방에 걸어 놓는다면 이 그림은 오-피스의 멋없는 내장이나 밝은 밖의 풍경과 대극을 이룰 것이며, 그 회화모사는 깨끗하게 만들어 놓은 실용공간안에서, 겁나는 자연과 비기능적인 질서의 양상을 나타낼 것이다. 이와 같은 공간작용을 이 그림이 갖는 것은, 그러나 연구실의 흔한 환경에서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시각예술은 일반적으로, 그 직관에 조응하여 그 실존적공간을 변화시키던가 변경하는 힘을 갖고 있다.

우리들은, 그러나, 몇가지 예술의 조응적인 방식을, 그러한 가능한 조응형성작용의 다양함과 동일시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럼으로, 내가 영화속에서, 함프리.보카-드와 같은 사람이 주인공인 허구의 세계를 지각하는가 아닌가, 혹은 영화의 역에서 함프리.보카-드가 세계를 바라보는 것과 같이, 내가 현실의 세계를 그렇게 보는가 아닌가, 이는 전적으로 별개의 일이다. 첫쩨번 장합은, 나에게 보카-드영화는 상상의 객체이며, 영상공간의 암흑속에서 허구적인 조응현성은 끊기 힘든 그 객체의 직관에 속한다. 두번째 경우는  상상의 객체는 나에게 있어 일상적인 조응형성의 자극이 되어 그 조응은 영화속의 생이 대낮에 계속 이어가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첫째번 경우, 나는 함프리.보카-드의 세계를 보고, 체험하는 것이 되며, 둘째번 경우에는, 내가 함프리.보카-드와의 세계의 누군가로서 자신을 보고, 체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의 양식이 나의 양식이 되는 것이다. 분명 그것은 환상과 맺어져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환상은 결코 단순한 가상은 아니며, 전적으로 의식적으로 산출된 상상적가상이기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를 떠난 조응이 성립하는 이상 이들 환상은 나의 생의 주관적현실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생을 바꿀 때, 붕괴하는 첫째번 것은 오래된 미적 조응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나가 버린 가장 오래된 것은 또한 다가 오는 것이기도 하는 것이다.

예술적가상에서 세계지각이 그런것과 같이, 조응적지각에서도 또한 직접적 구성요소와 간접적인 구성요소가 있다. 확실히 조응적지각에 있어서는 이들 관계는 총괄적으로는 구성적이다. 조응적인 지각은, 대상 내지 공간의 형태와 표현에 직접적으로 관련되 있으며, 지각하는 자의 생의 구상에는 간접적으로 연관되 있다. 양자는 서로 맺으져 있는 것이다. 양자가 하나로 만나는 것이, 조응인것이다. 그것들의 수용적 혹은 거부적인 형태에 있어 조응하는 제대상은, 생에 대한 그때 그때의 구상의 긍정적 현출로써 혹은 부정적 현출이던가 한다. 조응적으로 아름다운 형태란 분활적 혹은 분활가능한 생의 구상의 표현이며, 또한 그들의 형태의 안에 실제적으로 생성한 생의 구상의 표현의 것이다. 조응적으로 추한 형태란 분활적 혹은 분활가능이 아닌 실존적이상의 표현이나 실재물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그러함으로 자기자신의 생에 대해서 현저하게 부적합한 관계에 놓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적합]대신 [불균제]라고 말해도 좋을것이다. 실존적투기에 대해 분명히 불균재인것이 조응적으로 추한것에 응하여 자기자신의 생에 대해 분명히 적합하고 균제가 잡혀 있는 관계에 놓인 것은 조응적으로 아름답다. 류의어의 [정합적]과 마찬가지로, [균제]라고하는 말은 독특한 어휘다. 어떤것이 어떤것에 대해 균제가 잡혀 있다, 즉 자족한 좋은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두 관점의 조응적 부합은 바로 自動詞적사용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해 준다. 그 자신으로 균제적이던가 정합적인 것은, 타의 것과는 정합하지 않고, 그것은 [나에게] 혹은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감정이나 행위에, 최종적으로는, 말하자면, 우리들의 생의 유의에 맞는 것이다. 자동사적 균제성은 직관적인 실존적정합성이다. 다른 것들이 타동사적으로 서로 종합한다는 속애서 이 자동사적 균제가 몇겹으로 실현하는 한, 이 적합의 미적감각을 설명하는 것은 자동사적의미인 것이다. 이런 종류의 [순수한]정합성은 무슨 예술의 카데고리-가 아니고 생의 사물에 대한 전예술적인 호감의 범주범주인 것. 예술이 조응적제형태의 상상적형성으로써 이따금 료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면 미적조응은, 모든 예술로부터 독립적으로 부여할 수 있는 미의 본래의 형식이다.

이 조응의 개념을 내용적인 정합성의 이상과 동일시하는 것은 틀린 것이 될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덴지방은, 뉴-욕라는 무대와 같이 정합적인것으로 경험될 수 있을것이며 장미의 한잎은 나의 잡연한 감상용야자와 같이 또한 상속된 거실의 쾌적함은 차가운 빛과 밋밋한 평면으로 이루어진 실재장식과 같이 또한 반려의 친밀한 아름다움은 모르는 통행인여성의 인상과 같이 정합성으로써 경험되는 것이다. 이들 조응의 얼마간은 숭고한 것을 가볍게 닿는 것이 가능하며 타의 것이 숭고의 상태임이 가능할것이다. 무언가 놀라운 방식으로 균제의 밖으로 나가는 것이라면 그것들은 사람들을 끌어 들일것이다. 아름답다던가 추하다고 하는 형식개념에는 숭고적조응이라고 하는 형식개념이 어울린다. 숭고적조응은 생에 대한 세계의 긍정적인 불균제속에서 성립하는 것이며, 구축물이나 지역은, 아직도 미해되지 않는 생의 구상의 모사로써 현출되는 것이다. 예술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조응을 숭고로 바뀌는 일을 그 과제로 고려하는 것도 드물지 않았다. 예를 들면, 나의 사물실 벽에 걸려 있는 엘런스트의 어두므래한 숲 그림은 학술적환경이라고 하는 비호아래의 응호아래에서 통약불가능성에의 경고일것이다.

이제 미적조응은 일반적으로 간단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되었다. 조응적인 [현전화]란, 본질적으로 형성적인 산출의 실천이며, 그기서는 생의 사물이나 환경을, 그것이 어느정도는 견딜수 있는 생의 형식이 될 수 있도록 정비하는 것이 중요한것이다. 이 형성작용에 있어서는, 형성적인 제형식의 획득이 문제가 된다. 여기서는 실제로, 모든 인간은 [예술가]이던가, 혹은 그렿게 될 수 있는 것이며, -- 좁은 의미에서의 예술과의 뚜렷한 차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일하는 자리나 주거의 조정. 복장의 나타남. 식사의 준비. 머리 모양이나 차종의 선택 같은, 가장 일상적인 종류의 조응행위인 것이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매우 명인적.숙련적.고가인것일 것이며, 조응적산출은 일산적인 미적예술인 것이다. 관조가 아니고, 상상도 아니고, 조응이야말로 개인적 내지 사회적인 취미의 첫쩨번 전문영역인것이다.

이 취미행동의 다양함은, 지향적인 조응생산의 3개의 형식에 눈을 돌릴 때 분명해진다. 포에이시스적인 조응생산은 그 객체를 가능한 한 매혹적인 방법으로 형성하고 배열한다 -- 직업적 혹은 개인적 [디자인]의 경우가 그러하다. 자유선택적인 조응생산은 시적인 조응의 객체의 일정한 양식이나 견본속에서 아름다운 것,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다운 것]를 뽑아 낸다. 수행적인 조응생산은, 많든 적던 아름다운 객체를 특별한 몸짓으로 혹은 특별한 기회에 제시한다던지 혹은 특별한 방식으로 이를 사용한다. – 꽃을 선사 한다든지 선조전래의 액세서리를 좋아하면서 몸에 걸친다던지 조부의 타이프라이트로 편지를 쓰는 경우가 그렇다. 이들 행동이나 몸짓의 대부분이 부차적인 것이기는 해도 이들 모두가 생의 구상을 직관에로 나아가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은 또한 이따금 어떻게 살아 갈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기존의 이미지의 더욱 나아간 발명이기도 하는 것이다. 구상의 직관에는 항상 그 역기를 그냥 두지 않으려는 직관의 구상이 감취어져있다. 미적조응은 고유의 구상에 대해 알고, 그리고 그 중의 하나를 손에 넣는 본질적인 행동양식이다.

지향적인 조응생산의 활동은, 실존을 양식화하는 행위다. 그 의미는, 고유의 생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며, 그 형식에 있어서 이 생의 바램의 형식은 일목요연한 것이 되고, 또한 그럼함으로 해서 보다 현실적이 되는 것이다. 허나, 조응적지각과 조응적 호감의 양식이 당장에 그러함은 반드시 모든 것이 의도적 혹은 관습적인 양식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도시 공간안에서 벤야민의 유보자 ‘프라늘’은, 분명 극단으로 양식화된 실존이며, 조응적 사건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우연한 것이 갖는 의외성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어떤 의도적인 형성작용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조응은 따라서 단지 만들어지는 것뿐 아니라 발견해 내는 것이기도 하는 것이다. 바로 자연은 ---- 129페이지에서 [양식없는]거라고 명명했다 싶이 ---  목표를 정하지 않는 조응의 공간이기도 하는 것이다. 자연은 그것이 인간의 목표를 정한 노력의 표현인 장소 – 정원.공원.초화가 장식된 창가 – 에 그 자신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정합적인 것이 우리들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우리들이 일치하지 않는 한, 자연의 형성작용과 우리들은 결코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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