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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8 (12: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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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번쩨             데오돌. 아드르노(Theodor W. Adorno)

                    자본주의하의 文化批判의 實直한 先驅者      

    도도하게 돌아가는 멜스트림의 소용돌이 속으로 삼켜저 버린 고기잡이의 체험이라던가, 부하의 귀를 막고 스스로 帆柱에 묶으면서 세이렌들의 위험한 유혹을 뿌리 첬던 오뎃세의 위계라 할지라도, 아드르노가 시민주체의 경험을 묘사하기 위해 들고 나온 언설들은, 어느것이던, 지금에 와서 보면, 수상스렵고, 아드르노 자신의 受容狀況을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우선 외면적인 수준에서 반드시 문제시되는 택스트의 난해함과 논리의 역설적인 구성, 그 안에서 내용으로 간신히 뽑아 내는 동일성지배로 부터의 유-토피아적救濟의 도식, [아우스빗치이후]의 모든 지식인과 예술가에 대한 도의적負債의 요청, -즈를 위시한 대중문화에의 경직된 태도, 하이데카-나 아렌토나 쇼-렘등에 대한 언급관계에 있어, 논리와 원한의 혼유, 이러한 것들로 이루어진 언설의 磁場은, 이론적관심보담 휠씬 애모-선널한 환기력으로 우리들을 그 권역속으로 잡아 넣고, 배들에 대한 그 조류의 압도적인 위력을 가지고 그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삼켜저 버리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하고, 혹은 그 매혹적인 노래로 우리들을 끌어 넣고 죽여버릴려고 하는 것 같다.

 

    도데체 20세기의 미술비평을 대표하는 사상가의 한사람으로써 아드르노의 이름을 드는 자체를 의문시하는 경향도 있다. 분명하게도 그의 비평의 본령은 음악이나 문학의 영역에서 발휘된 것으로, 미술비평 그 자체에 대해서 그가 직접 자극을 입힌 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 허나, 문화를 둘려 싼 20세기의 언설 전체에 대해 그의 사상이 던진 영향에는, 지대한 것이 있다. 그의 영향력의 거듭되는 가능성을 규명하려면, 그러나, [미메시스][비동일성]이라고 하는 아드르노 독해의 쟈곤에 대해서나, 우수에 찬 비관적지식인이라고 하는 이미지에 대해서도, 일단 우리들의 귀를 막고 더욱 漏斗狀의 냄비의 안쪽으로 밀려 나가면서도 기묘한 호기심에서 중대한 관찰을 고기잡이와 같은, 사태에 눈뜬 관찰의 눈을 돌리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아드르노의 언설에서 사람을 냉정하게 두지 못하게 하는 최대의 요인은, <進步> <反動>의 대비에 입각한 독특한 도의적 고발이다. 억압과 현상긍정의 계기와 비판적해방과의 긴장관계를 탐색하면서 곤난한 해결을 희구하는 그 가락을 갖고 그는 오늘날에 와서 누구도 그 매듭을 묘색하는 일이 없는 대대적인 대비관계를 탐구하였던 것이다. 도대체 그의 뒤로 누가 슌베르크와 루이.암스트롱에 대해서 동일한 이론적 측도를 적용하여 어느쪽이 반동적인가를 논하려고 했겠는가. 그 이후의 누가 문화의 總體를, 戰時下의 대량학살의 야만과의 [공범관계]에서, , 어떤 필연적인 결합을 통해 폭로하려고 했겠는가. 前者의 시도에서는 아드르노를 하이.컬츄의 진정에 고집하는 편협한 에-리트주의로 야유하게 하는 전형으로써, 후자는 그를 독일 관념론 최후의 양심의 大思想家로써 영웅화했다. 그 어느쪽이던, 이는, 시민사회의 理想像에서의 편차에 의해 문화의 현상을 단죄하는, 좋든 나쁘든, 고풍스려운 그의 사고의 스타일에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우리들의 관찰점은, 지금이사 역사에 의해 큰소용돌이의 외연을 응시하는 위치로 떠 내려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실은, 아드로노의 스타일을 새삼 고풍스렵게 보이게 한 것은, 그 이후, 하이 컬츄와 사브 칼츄가, 또한 문화일반과 야만이, 몰가치적으로 애매하게 공존해 왔던 상황이 아니였겠는가. 이러한 상황을 단지 아메리컨.웨이.오브.라이프의 세계제패로 논한다면 사태를 달리 보이게 되지 않을 까. 아드로느는, 미국이 초대국으로 발흥해 갈 시기에 그 문화적변영의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던 허리욷에, 유대인撲滅의 국가구상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독일의 암울한 기억과 더불어 옯겨 산다. 복제와 소비와 오락에서 세계의 최첨단을 걷고 있는 로스앤젤스에, 구래의 예술전통이 섬세함과 농후함의 극으로 성숙해 갔던 직후의 뷘의 기억과 더불어 옮긴다. 20세기전반에서 아마도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2극간의 이동을 어찌할 수 없이 실행했던 그가, 새로운 문화의 형태에 거부반응을 나타내며 奇態에 가깝울 정도로 공격적인 대중문화비판을 행했던 것은 무리한 것은 아니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암담한 기분에서 그 등장의 모습을 바라 본 새로운 세계사시스탬이, 인류전체를 번영과 행복의 환상속으로 영구히 가려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닐뿐만 아니라 또 그렇게 되서도 안된다는 것이 지금에 와서 보면 분명해 지고 있다. 그러한 속에서 萌芽期의 고도소비사회로 돌려진 아드르노의 문화비판은, 자본주의시스템에 대한 실직한 저항의 선례로 재 음미해 볼 가치를 새롭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드느로의 비평의 가능성을 보다 직접적. 구체적으로 파내려면 우리들의 시야를 한정시키고 1930년대의 벤야민과의 생산적인 공동작업의 시기에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시간적계기를 강진한 변증법점논리로 처리하는 아드르노의 사고와, 공간적대비의 선명성에서 예상치 못한 몽타-쥬를 가능케하는 벤야민의 사고와의 풍성하고 많은 영향관계(혹은 긴장), 두사람의 왕복서한을 당시의 논문의 교정과정과 더불어 상세히 살펴 봄으로써 선명하게 떠 올라 온다. 그리고 아드르노가 러구로나 뷔리아..리라단에 대해 가르치고, 벤야민이 포크너나 멜뷜에 대해 가르친다는 書簡속의 세세한 일화는, 두사람이 행복한 공동작업을 이어 갔으면, 이루었을 작업의 크기에 대해서, 우리들의 역사적 상상력을 크게 자극한다.

 

    허나, 미국에 망명한 후의 아드로느는 30년대에 보여주었던 유연성을 그 비판에서 뻬았겨, 숨막힐 정도의 사색속에 파묻혀 버린다. 그의 고독한 집필에서는, 20세기비평전반에 대한 그의 또다른 하나의 공헌으로써, 비평언어로써의 엣쎄이란 스타일이 탄생시켰다. 허나,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변증법적비평의 살아 있는 적용은, 오히려, 그의 사후, 프레드릭.제임슨과 같은 비평가에 의해 이어저갔다고 봐야 한다. 단지 아드로느를 실망시키고, 이내 고독한 사색활동으로 침잔시킨 미국문화의 토양에서, 그 제임슨의 예민한 비평이 나타난점을, 우리들은 역사의 아이로니로 볼것인지, 혹은 변증법적전개라 부를 것인지.

 

   약력: 1903년 프랑크프르트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남. 20대는 뷘의 알반. 베르그 밑에서 작곡을 배우면서,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독일에 귀국한 후, 홀크.하이머가 이끄는 사회학연구소와 관계하는 한편, 친구인 발트.벤야민을 도와준다. 33년 나치스의 정권장악과 더불어 영국에 망명, 38년에 도미. 미국에서는 홀크 하이머와 더불어 [개몽의 변증법]등을 집필함. 50년이후, 다시 프랑크프르트대학에서, 철학이나 사회학을 가르키면서, [부정변증법] [미학이론]을 시작으로 일련의 저작생활에 전념함. 69년 몰.

 

   주저: [부정변증법] 1996 일본.   [개몽의 변증법(홀크 하이머와 공저)] 1990 일본.   [알반 베르그] 1983 일본.

         [말라]1999 일본.    [기엘고골] 1998 일본.   [불협화음] 1998 일본.    [브리즈맨] 1996 일본.  

         [인식론의 메탈그리크] 1995 일본.    [본래성이란 은어] 1991 일본.      [미니마 몰라리야] 1979 일본.

          [벤야민/아드르노 왕복서간] 1996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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