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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2 (07: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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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번쩨            이브= 아랑. 보와(Yve-Alain Bois)

 

             모더니즘이 抑壓해 왔던 表象시스템을 分析한다

 

어쩌면 편견일지 몰라도, 이브=아랑.보와 만큼 근년에 와서 특히 일본에서 일종의 팻션으로 각광을 받은 비평가는 없지 않을까. 더욱이 일본어에 의한 역서가 지금도 충분히 출판되고 있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그렇다. 이는 어느 특정한 방법론이 팻션으로 떠 오르는 현상에 강한 경고를 해 왔던 보와에게는, 납득이 잘 가지 않는 일일런지 모른다. 허나 모더니즘을 비판적으로 넘어선 위에다 포-말리즘을 심화시키고 그 가능성을 추구하고저 희망하는 사람에게는 아마도 로쟈린드.크라우스나 마이켈.프리드와 나란히 앙성맞춤의 길잡이가 되어 주고 있는 것이 그의 여러가지 논고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보와의 이론을 왜소화시키는 위험을 무릎쓰고 말해 본다면, 그의 관심은 무엇보담 작품의 [됨됨]을 분석하는데 있다. 물론 그것은 습작에서부터 완성작으로 가는 한가닥 길을 명료하게 그려 내 보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직선적으로 진행하는 이야기에 대한 통렬한 반박이다. 일례를 든다면, 그가 마티스의 작품을 둘려 싸고 전개해 온 의론은 작품이 성립하는 과정을, 전진이나 후퇴로도 말할 수 없는 착종된 蛇行을 생생하게 부각하는 것이었다. 보와에 의하면 마티스의 두 유채화(호사, 정일, 일락) (생의 환희), 그 작품의 실현이란 점에서는 확연하게 서로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한쪽이 신인상주의에서 배운 점묘법으로 그려지고, 다른 쪽이 몇 개의 색면을 조합함으로 구성되어 있다라는 표피적인 기법적 내지 양식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작품을 성립시키고 있는 구조가 근본적인 문제인것이다. 작자의 마음속에 생긴 이미지가 몇가지의 예비적 습작을 통해 서서히 명확한 형상을 부여 받아 가면서 하나의 완성작으로 결실되 가는 이야기로 기술될 수 있는 것이 (호사, 정일, 일락)였다면, (생의 환희), 실제상의 작업과정 속에서 작가가 작품과 대치하며 격투함으로써, 想念과 形象이 동시에 하나의 착지점에 내려 앉은 것 같이 보이는 것이다. 후자에서는 전제로써의 마음속의 이미지가 처음부터 부정되고, 팽개처 버리려진 것이다. 마티스가 (생의 환희) 에서 이루어 냈던 것이 그렇다면, 이는 단순한 제작과정의 변화로써 이해해 버릴 수 있는 사태가 아닐 것이다. 보와는 마티스에서의 색채의 문제로 이와 같은 의론을 전개하였던바, 그기에 멈추지 않고, 이 또한 서양에서의 표상의 문제에 혁명적인 전환을 초래하였다고 말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고대 희랍 이후, 표상은 줄곧 심적 이미지와 불가분으로 연결된 것으로 이와 대응관계에서 회화를 잡아 내었던 것이다. 그러함으로써, 현실의 사물을 봄으로써, 얻으지는 지각상과 회화를 봄으로써 얻어지는 지각상이 서로 식별될 수 없을 정도로 회화가 그 사실성을 회득하는 목적론적 발전사, 진보사로써 서양미술을 볼 수 있게 한 것이 었다. 마티스는 이 매듭을 끊어 버림으로써 스스로의 작품의 표상으로써의 기반뿐만 아니라, 서양에서의 표상시스템 자체까지 크게 바뀌 놓는 결과에 이른다. 보와의 의론은, 이와 같은 작품의 곁보기와는 다른 내부에 침잔해 들어 가서 그 뒷면에서부터 이를 지탱하고 있는 시스템나 구조를 줄곧 선명하게 前景化시켜 보여 주었던 것이다.

 

같은 일이 미술을 둘려싸고 있는 언어로써 무비판적으로 다용해 오고 있는 [영향]이라고 하는 말이 품고 있는 문제에도 적용된다. 마티스의 [생의 환희]에는 그것이 아-고스티-.가랏지의 판화를 전거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본들 (그건 그것데로 중요한 사실의 발굴이라고 하드래도), 작품의 표상으로써의 내실엔 얼마만컴 박진해 오겠는가. 이와 같이, 마티스의 어떤 작품에 피카소 등에서부터의 영향을 지적하고, 차용원이라고 들어 봐도 그건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들려 주는데 지나지 않는다. 허나, 어떤 작가의 작품과, 또 다른 화가의 작품간의 관계성은, 그러한 일방통행적 내지 수동적인 맺음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보와는 그러한 단순한 인과론적사고를, 미하엘.바푸친이나, 하롤드.부름, 루네.지랄와 같은 문학이론가들의 성과를 원용하여, 대화적인 교환의 의론으로 바뀌 놓고, 두 작가의 다른 작업에 의한 작품을 맺는 間택스트的인 관계를 잡아 내려고 하고 있다. 마티스와 피카소에는, 상호간의 화법이나 응답으로 제작된 작품이 다수 있다.

때로는 완벽하게 보일정도로 모방하면서도 때로는 상대의 작품을 무리하게 곡해도 하면서 혹은 야유를 하며, 한방 먹이는 꼴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능동적인 작위였다. 그리고 그 대화적관계는, 승화에로 향하는 변증법적 전진운동은 물론 아니고, 체스 게임과 같이, 순간 순간의 제빠른 대응뿐만 아니라 게임의 진전에 따르는 아주 긴 시간의 지속속에서 과거 역시 그때 그때 소환해 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기서는 어느 한수=작품에 대해 십수년의 시간이 지난 한수=작품을 부딛쳐 볼 수 있는 것이 가능해 지며, 전진이나 후퇴 어는 개념도 무의미하는 것이 된다.

 

    죨즈.바타이유로부터 차용하고, 그가 크라우스와 더불어 짜낸 [앙포르멜(           부정형)]만 해도, 작품의 됨됨의 구조에의 새로운 인식을 수반하는 개념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모더니즘이 금과옥조로 삼아 왔던 순수한 형식(폴름)이라고 하는 개념(과 이와 항상 함께 차의 양륜으로 대비하는 주제란 개념), 전적으로 무화시키는 것이다. 순수한 형식으로써 완결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특정한 주제에도 회수되는 것도 아니고, 거꾸로 이것들에 공격을 가하면서 떨어저 나가는 것, 카테골리화되는 개념이 아니고, 어떤 종의 [작동 operation]이 작품에 가해지는 동적인 양상을 가르키는 것이, [앙폴름]이다. 모더니즘이 억압해 왔던 바로 표상시스템을 분석해 보이는 보와의 의론은, 표상으로써의 작품의 다이나믹한 모습을 밝혀 내기 위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 가는 것이다.

  

略歷: 알제리 생. -버드대학 교수(근대미술사). 마티스, 피카소부터 전후 미국미술, 특히 미니멀 아-트에 이르는 20세기 미술에 대해 폭 넓은 연구를 함. 94-95년에 하-, 워싱톤, -욕를 순회한 몬드리언 회고전을 공동기획하고, 96년에는 로자린트.크라우스와 폼퓨트.센트(파리국립근대미술관)에서 개최한 [.폴름; -자즈.가이드]전을 기획하다. 바넷.-먼의 카타로그레조네의 제작에도 간여한다.

 

主著: [마티스와 피카소] 일본경제신문사 2000.   Painting as Model, The MIT Press; Cambridge, MA, and London, 1990   Informe; mode dmploi, Editions du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1996    Laveuglement Matise1904-1917, Edition du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1993    The Iconoslast, Pier Mondrian, National Gallery of Art,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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