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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7 (19: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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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지난 3월 초에 쓴 글입니다. 워낙 긴 글이어서 일부만 올립니다. (각주도 생략함)

 

흩어진 선과 복합적 면의 시공(時空), 김병기의 삶과 예술

 

(글 앞부분 생략)

 

1989, 작가는 자신의 길을 만든 거장들을 만나는 유럽 여행을 한다. 이 여행이후 그린 그림으로 <() 빅투아르 산에서의 독백>을 꼽을 수 있다. 전시장의 한 벽을 차지한 스케치와 작가의 육필을 통해 당시의 여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잔의 窓門(창문)’이란 제목의 스케치 아래 다음과 같은 연필로 쓴 글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글씨체로 메모되어 있었다. 뜻밖에도 <산하재> 시리즈를 그리게 된 배경이 이 글 속에 담겨 있었다.

 

山河在(산하재)對象(대상)을 한국에만 局限(국한)할 필요는 없다. 유럽旅行(여행)에서 얻은 것, 본 것, 생각한 것, 모두다 山河在(산하재)의 다른 한 면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세잔느의 (), 르노와르(르누아르)庭園(정원)의 오()리브 나무, 모네의 庭園(정원), 이런 것들에서 볼 수 있는 19세기 말에서 世紀初(세기초)에 이르는 鄕愁(향수)의 프랑스와 오늘의 狀態(상태)對照(대조)하는 것이다. 모네의 庭園(정원) 다리에서 본 벧()트남 少年(소년)과 프랑스 少年(소년), 꽃을 가꾸는 黑人(흑인) 庭園師(정원사)의 모습, 암스텔담(암스테르담)의 데카당스, 落書(낙서), 뽐삐두(퐁피두)噴水坮(분수대)廣場(광장)을 춤추듯이 지나가는 한 少年(소년)少女(소녀)의 모습을 생각해본다. 山河在(산하재)의 이것은 하나의 긍정의 世界(세계). 긍정 속에 있는 페이소스, 페이소스를 뚫고 허우적거리는 긍정, 이것이 나의 世界(세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의 갈 길이 보인다. 미국과 유럽을 헤매이는 한 東洋人(동양인)의 보고, 생각하는 것, 이러한 비판()인 현실을 그려야 할 것이다. 6/28 89 (*한자가 섞인 원문대로 실음, 괄호 안은 필자가 음을 달았음)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산하재> 시리즈 작품들은 날카로운 면 분할과 함께 화면이 우리 고유의 붉은 단청 빛 채색으로 울긋불긋하게 채워져 있다. 산하재는 두보의 시 국파산하재 성춘초목심(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즉 나라는 망해도 산과 강은 그대로 있고, 도성에 봄은 와서 초목은 깊구나.’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화면에 칠해진 붉은 색면들은 이중적 이미지이다. 찬란하고 강렬하면서도 너덜너덜하게 찢긴 천 조각이 펄럭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이는 한 대담에서 밝혔듯, 한국 전쟁이후 분단국가로 남은 조국으로서의 갈등 상황과 함께 산업적으로는 유례없는 성취를 이룬 당시 한국의 복합적 현실에 대한 마음을 강렬한 붉은 색채와 분열적 이미지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2000년대 이후에도 <글라디올러스와 석류B(2002>)와 같은 정물화를, 거주지를 로스앤젤로스로 옮긴 이후에는 <산의 동쪽, 시공(2012)>, <공간 속의 인간(2013)>, <연대기(2013)> 등의 작품을 남겼다. 화면은 더욱 얇아지고, 화폭 곳곳에는 캔버스의 원 바탕천이 그대로 드러날 만큼 작업의 과정과 흔적이 생생해진 것이 이 시기 그림의 특징이다.

이 시기 작품 중에서 특히 마음에 와 닿았던 작품 중 하나로 <공간 속의 인간(2013)>이 있다. 거침없이 그은 무수한 선들이 겹쳐진 화면을 지우듯 칠한 얇은 붓질과 붉은 점과 선에 가까운 색 면들 사이에 사람인 듯한 선들이 보인다. 자코메티는 인간을 가는 선으로 나타냈지만 김병기의 그림에서는 얼핏 보면 인간의 형상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수직선처럼 보이는 가는 면 뒤에 이리저리 교차하는 선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이미지를 형성한다.

내게는 이 그림 속 거의 보이지 않는 인간이 남북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 없었던 김병기의 자화상이기도 하고, 나아가 20세기 이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한 곳에 정주할 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유난히 두드러진 미완성 화폭에 자유롭게 그어진 유희적인 선과 깃발 같은 빨강 면이 생의 긍정과 넉넉함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김병기 그림에서는 젊은 시절에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정물이나 풍경은 비교적 형상성이 더욱 두드러진 반면, 인간의 도상은 그 형체가 거의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추상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마치 선사시대의 벽화들에서 동물들은 놀라운 구상성을 나타낸 반면, 인간의 도상은 비인간화되어 부정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양상과 유사하다. 이러한 인간의 부재화(不在化)는 그림에서는 선이나 색 면의 변질로 나타난다. 11)

앙드레 말로는 현대 회화가 주제로부터 자율화 되는 순간을 표면성의 현재화로 설정한다. 전통적으로 표상되어 왔던 주제란 것은 물질적인 회화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존재하며 회화를 규정하고 있다. 근대에서 주제가 소멸한다면 그 때 회화의 심층은 사라지고 회화는 회화만의 존재가 되며 물질적인 표면으로서 현재화된다. 이렇게 하여 회화는 자율화되어 색채나 형태의 유희가 된다. 이러한 말로의 근대화에 대해 바타유는 이의를 제기하며 또 다른 하나의 메꾸어 졌던 표면에 그럼에도 열려 있는 또 하나의 구멍을 본다. 근대 회화가 주제를 기각할 때 표면성과는 다른 또 하나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따라서 바타유에게 현대 회화에서 주제의 폐위는 단순한 주제의 부재 그 결과인 표면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제가 파괴될 때 거기에는 표면이 아니고 주제의 부재 자체가 입을 연다. 바타유가 마네의 그림을 봤을 때 찾아냈던 것은 그 열려져 있는 상처였다. 그의 마네론의 특이성은 또 하나의 현대성을 제시한 것에 있었다. 12) 이처럼 말로와 바타유는 마네를 현대 회화의 기원으로 보지만 바타유는 말로를 비판하면서 마네와 인상파 사이의 단절을 강조한다.

바타유에 의하면 마네의 그림은 표면과 부재 사이에 생기는 파열, 투시법에 의한 공간 표현이 없음으로 얕으나 밑바닥을 알 수 없으므로 깊은 공간이 열려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마네의 그림은 그림을 보는 동시에 전통적 회화의 부재를 함께 보도록 하는데 이는 인상파의 시각적 표현성과는 달리 전통적인 주제를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의도적 조작이라는 것이다.(*올랭피아의 현전은 이 그림이 차용한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부재이다) 따라서 이러한 조작이야말로 마네와 인상파를 본질적으로 가르는 차이이다. 말로가 마네 그림의 근대성을 표면적 색채의 자율 속에서 보았지만 조작의 중요성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바타유의 생각이다. 이 조작이 이전까지의 보는 것아는 것을 혼돈상황으로 이끌어감으로써 오히려 -(-)’, 즉 비합리적 감성의 세계로 이끈다는 것이다. 김병기의 작품 세계 이면에는 이 같은 근대 회화의 문맥이 있으며, 인상파에서 벗어나 비지의 감각을 지향한 세잔의 새로운 도전도 이러한 문맥의 연장선에 있다.

따라서 김병기 그림은 이러한 근현대회화의 문제의식과 함께 이 땅의 전통적 정신이 공존한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1970년대 이후부터 흩어진 선과 다층적 면이 공존하는 그림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어떤 선은 떨림으로 점에 가까웠고, 어떤 선은 날카로웠지만 공간 속에 스며들며 사라진다. 이는 선과 선이 만나 새로운 면과 시공간을 구성하고 조합하는 정신적 의지로 표현된다. 이처럼 다원적 시점, 또는 움직이는 시점은 자아가 자신의 원리에 의해 세계를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방식과는 다른 차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작가는 동서 회화의 거장들이 성취한 빛나는 정신으로부터 예술과 인생, 자연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이를 새로운 가능세계로 표현한 것이다. 김병기 그림의 표면은 두껍지 않지만 그 층차(層差)는 얇지 않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는 담백하기까지 하지만 그 이면은 우리 사유의 한계를 넓히는 시공을 가진다. 김병기 그림의 특성은 만년으로 갈수록 고착화된 색도 형태도 존재하지 않으며, 선과 면 사이의 유동성에 있다. 선은 선이 아니고 면은 면이 아니다. 구상과 추상이라는 모순된 세계가 하나가 되는 화면이다.

이런 관점에서 김병기의 작업은 일종의 포토몽타주(photomontage) 어법을 연상케 한다. 포토몽타주는 여러 가지 장면을 하나의 작품에 모아서 제시하거나 서로 접속된 모티브를 가지고 조작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넓은 의미의 포토몽타주는 반드시 사진 이미지의 합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차원에서 포토몽타주 어법은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의 형상을 제시하는 것이고, 현실의 표절, 파편의 형태를 띤 현상을 추구한다. 제작물이 완료된 불변성을 거부하는 하나의 진행 중인 과정적 미술의 이미지를 원하는 표현방식이다. 이번 전시작품 중 특히 포토몽타주적 어법이 두드러진 작품으로는 <나이테가 보이는 컴포지션(1975)>, 날카로운 직선들이 그어진 허공에 거미 형상의 난초가 떠 있는 듯이 그린 <공간 속의 난초(1980)>, <창변(1980)>, <북한산 세한도(2001)>, <인왕산(2005)>, <소나무 밑에>, <공간 속의 형태들>, <붉은 사각형의 공간> 등이 있다. 13) 이러한 표현으로부터 김병기의 그림은 인간과 현실, 역사, 자연,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포에지를 드러낸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병기의 그림은 풍경과 마음을 쓴 김우창의 다음 글을 떠올리게 한다.

 

예술의 공간은 일단 객관적인 사물의 모사와 구도의 문제로 환원된다. 그러나 더 심각한 예술적 성찰에서, 이것은 예술가 또 일반적으로 인간의 주체적 경험에 있어서 공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문제로 나아간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사람이 세계에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또는 하이데거와 말한 바와 같은 세계와 삶의 근원으로서 이 존재의 열림에 대한 성찰로 나아갈 수도 있다. (중략) 기술적 문제는 한편으로 공간의 체험자를 어떻게 화면에 관계시키느냐 하는 문제에, 다른 한편으로는(이 점은 주제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지만) 이 공간을 단순히 평면적인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것으로: “무한하고 소진되는 않은 근원으로, 존재의 열림으로, -또는 메를로 퐁티의 말을 빌어 공간화된 공간으로부터 (나아가) 공간화하는 공간으로 느끼게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관계된다. 14)

 

나무를 쪼개보아도 그 속에는 아무 꽃도 없네.’라는 말이 있다. 작품을 자세히 분석한다고 해서 그 속에 작품의 본질이 있는 건 아니다. 분석적, 논리적 관점만으로 작품에 접근할 수 없는 이유다. 선과 면이 만나고 어긋나고 지우고 다시 면과 면이 만나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그러한 과정에서 형성된 김병기의 회화적 지층과 그 단면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복합성의 세계는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해서 말할 수 없는 비합리성의 영역이다. ‘세계는 사실들의 전체이지 사물들의 전체가 아니다.’ 그러니 여전히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 ’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세계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함축한 철학적 성찰이다. 아픔, 상처, 단절, 외로움처럼 그림은 원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15) 김병기는 이러한 비합리성의 영역을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영역으로 본다.

 

3.

1970년대 이후 고도의 기술 발달과 함께 미술에서도 여러 매체에 의한 표현 방식이 확장되어 스펙터클한 볼거리가 넘치는 시대이다. 그런데도 서양근현대미술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는 세잔의 고투와 자신이 겪은 실존적 체험이나 사건을 재해석하면서 그 복합성으로부터 독자적 회화세계를 구축해온 김병기의 그림은 실로 많은 느낌과 생각을 갖게 한다.

이번 전시회는 개인적으로 내가 그림에 뜻을 둔 이후 겪어야만 했던 미적, 예술적 가치에 대한 고민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선을 긋고 다시 지워버린 흔적만이 남은 듯한 <산의 동쪽, 시공(2012)>이란 작품은 1980년대 후반 나의 작품들과도 비슷해서, 스스로 내 자신의 옛 작업들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공유하는 고민이 있으며,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작품이 형성된다는 사실은 새삼 예술적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16)

외부 세계의 표상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은 실로 다양하다. 활자는 활자대로, 영상은 영상대로, 조각은 조각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각자의 장치와 문법이 있다. 독서나 영화를 통해서만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세계가 있듯이, 그림은 그림을 통해서만이 느낄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정선의 금강산도가 실제의 금강산과 다르듯 세잔의 사과는 실제의 사과와 다른 사과이다. 그런데 정선의 금강산 그림들과 세잔의 <사과가 있는 정물>만이 선사하는 경험이 있다. 한 작가의 작품 세계는 이처럼 독자적인 면이 있다. 그것은 그림만이 갖는 복합적 현실성이다. 이러한 그림만의 현실성 표현은 통찰과 지혜가 필요하다. 김병기는 격변과 혼동으로 점철된 시기에 파란만장한 혼돈과 갈등의 삶을 살아온 작가로서 그러한 경험에서 얻은 지혜는 우리의 값진 문화적 자산이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한 생애를 걸고 고투해도 겨우 몇 사람만이 기존의 미적, 예술적 성취의 틀을 깨는 새로운 틈을 연다. 20세기 들어서 회화의 종말까지 논의되었지만, 선사시대 동굴벽화의 탄생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 만년에 걸친 회화의 역사는 곧 인류의 탄생과 함께 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감성으로 표현해온 역사이기도 하다. 작가에 따라서는 미술사적 주요 쟁점들이 교차하는 존재면을 남긴 이들이 있다. 김병기의 작품 세계도 실로 복합적인 현실성을 느끼게 하는 존재면이 있다. 근현대 예술적 성취에 대한 깊은 독해와 통찰을 바탕으로 삼아 한 세기를 살아 온 한 노대가의 삶과 예술은 우리에게 이토록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한다.

 

2015. 03. 02. 도 병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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